주간 정덕현

‘꽃보다 남자’를 보는 양극단의 시선 본문

옛글들/드라마 곱씹기

‘꽃보다 남자’를 보는 양극단의 시선

D.H.Jung 2009. 1. 20.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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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를 보는 눈과 드라마를 보는 눈

부유층에서도 초부유층에 속하는 이른바 F4의 리더인 구준표(이민호)는 자신이 사랑하게된 서민 금잔디(구혜선)의 집을 찾아간다. 보통의 드라마였다면, 구준표가 제아무리 부잣집 자제라 해도 여자친구의 부모 앞에 고개를 숙여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꽃보다 남자’라는 세계 속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밥상을 앞에 두고 구준표는 높다란 의자 위에 앉아 콩자반을 들고는 “이런 걸 먹느냐”고 묻고 심지어 멸치를 보고는 ‘이건 무슨 벌레냐’고 묻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잔디의 부모는 무릎꿇고 앉아서 구준표가 반찬 중 갈치를 알아 봐준 것에 대해 감탄하고 고마워한다. 물론 이 장면이 어른들의 속물근성을 풍자하기 위한 것이라면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런 목적 자체가 없다. 매일 매일의 힘겨운 세탁 일 같은 것으로 점철된 어른들의 세계는 찌질한 그 무엇으로 치부되는 곳이 ‘꽃보다 남자’의 세계다. 이 곳은 돈이 있으면 자신의 그룹의 백화점에서 여자친구와 단둘이 쇼핑을 즐기기 위해 비상벨을 깨 손님들을 내쫓을 수 있고, 부모에게 간단히 통보하고 해외로 그 딸을 데려갈 수 있는 세계다.

구준표는 입만 열면 구질구질한 서민들의 생활을 하찮은 눈빛으로 내려다보지만, 이 드라마 속의 그는 늘 추앙 받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잘생긴데다가 돈이 있는 그가 서민인 금잔디를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전형적인 신데렐라 이야기지만, ‘꽃보다 남자’는 이 상황을 좀더 양극단으로 표현한다. 즉 금잔디에게 쏟아지는 극단적 이지메 상황을 먼저 보여준 후, F4라는 판타지적 인물들이 그녀를 구하는 식이다. 지나치게 자극적이어서 논란까지 일기도 하지만 극에서 극으로 갈 때, 판타지는 더 커진다.

‘꽃보다 남자’가 요즘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막장드라마의 하나라고 비판받는데는 바로 이 극에서 극으로 오가는 판타지와, 판타지라고 해도 어떤 일정 부분 현실과 맞닿는 지점에서 발생하기 마련인 비현실성의 노출 때문이다. 극단적인 부자의 행동은 판타지 속에서는 오히려 매력적인 욕망의 하나로 받아들여지지만, 현실과 만날 때는 언뜻 그 금전만능주의의 속살을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막장드라마라고 비판받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 상황을 너무나 쉽게 이해해버린다는 점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게 만드는 것일까. 그것은 드라마가 주는 것이라기보다는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의 눈이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거기에는 ‘꽃보다 남자’를 우리가 익숙히 보아왔던 드라마로 보는 시선과, 전혀 다른 만화의 드라마 버전으로 보는 시선이 나뉘어져 있다.

물론 드라마 자체가 판타지를 가진 것이지만, 그래도 현실적인 상황을 어느 정도는 반영하는 드라마의 하나로 ‘꽃보다 남자’를 본다면 이 드라마는 도무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작품이 된다. 이 세계 속에서는 오로지 판타지만 존재할 뿐, 현실적인 배려는 전혀 찾아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화를 보는 시선, 즉 잠시 현실을 잊고 판타지 속으로 끝없이 빠져 들어가는 그런 시선으로 본다면 이 드라마는 충분히 고개가 끄덕여질 수도 있다.

‘꽃보다 남자’를 바라보는 극단적인 두 시선이 이처럼 공존하는 이유는 이 드라마가 만화적 요소와 드라마적 요소의 결합된 형태이기 때문이다. 만화의 판타지가 주는 재미에 깊이 빠져 TV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시청자가 그 드라마 속에서 현실적인 모습들 예를 들어 이지메 상황이나 사생활 노출 같은 범죄에 가까운 장면을 보았을 때 잠깐 현실로 돌아오는 그 지점이 두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