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카인과 아벨’, 병원 밖에서 의드를 그리다 본문

옛글들/드라마 곱씹기

‘카인과 아벨’, 병원 밖에서 의드를 그리다

D.H.Jung 2009. 3. 5. 0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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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과 아벨’, 의드의 경계를 넓히다

의학드라마가 힘을 발하는 이유는 도시 속에서 그 병원이라는 공간이 주는 특별한 의미 때문이다. 야생의 도전을 인공의 안락함으로 변모시킨 도시적 삶 속에서, 생과 사의 문제가 가장 치열하게 드러나는 공간이 바로 병원이다. 과거 야생에서 삶을 도전 받았던 삶과 달리, 도시인들의 삶은 병원에서 시작해 병원에서 끝난다 해도 이제는 그다지 틀린 얘기가 아닌 시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의학드라마라고 하면 병원이라는 공간에 포획되는 것이 당연할까.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이는 이 질문은 그러나 ‘카인과 아벨’을 만나면 한갓 고정관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카인과 아벨’은 병원 밖에서도 의드의 묘미를 느끼게 해주는 드라마다.

이초인(소지섭)의 전공이 응급의학과라는 사실은 이 의드가 그리는 공간이 단지 병원 내 응급실이라는 공간을 넘어선다는 것을 암시한다. 병원 밖에서도 얼마든지 응급 상황은 있게 마련이고 그것은 의드가 주목하는 생과 사의 긴박한 순간들을 응급실 바깥에서도 그려낼 수 있게 해준다.

바로 이 점은 그다지 중요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지만, 실상은 여러 장르들이 뒤섞이게 되는 ‘카인과 아벨’에서는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아닐 수 없다. 만일 이초인이 중국에서 기억상실의 시간 속에 액션 드라마를 보여주고 있을 때, 그가 가진 응급의학이라는 경력이 없다면, 한편으로 병렬적으로 이어지는 국내에서의 병원이야기(그리고 앞으로도 이어질)와의 봉합은 매끄럽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초인은 중국의 야생 상황에서도 병원에 갈 수 없는 탈북자인 오영지(한지민)를 수술해주고, 기억상실이 된 채 탈북자 신세가 되어 쫓기는 상황에서도 동료를 야생에서 수술해준다. 그는 병원 바깥에서도 여전히 의사라는 입장을 버리지 않고 있으며, 수술대 앞이 아니라도 메스를 든다.

재미있는 것은 바로 그의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은 거꾸로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능력으로 변모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중국 공안에 잡혀 수용소에서 거구와 벌이게 되는 죽음의 대결에서 오강철(박성웅)은 이초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같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때려서는 안 되는 곳이 있지. 거길 때려라.” 이것은 의드의 새로운 변용이다.

물론 ‘카인과 아벨’은 후에 다시 병원이라는 공간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의드의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이초인의 응급의학이라는 전공은 형인 이선우(신현준)의 뇌의학과 병원 내 권력 구도를 두고(물론 그 밑에는 복수극의 전제가 깔릴 것이 분명하다) 각을 세울 것이다. 이 점에서도 응급의학이라는 이 의드의 새로운 선택은 탁월했다 생각된다.

지금까지 의드의 선택은 거의 대부분이 그 중심에 외과(그 중에서도 흉부외과)를 두고 있었다. ‘하얀거탑’이 ‘외과의사 봉달희’가 그리고 ‘뉴하트’가 그랬다. 이렇게 된 데는 외과가 가장 생명과 직결되고 힘겨운 과이면서도, 바로 그렇기 때문에 외면받는 과로서 의학의 본령을 건드릴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 의드의 계보를 세울 수 있을 정도가 된 상황에서 의드는 어떤 변화가 필요한 게 사실이다. 그것은 새로운 장르와의 결합이 될 수도 있고, 의학의 새로운 분야가 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카인과 아벨’은 이 두 가지를 응급의학의 선택을 통해 넘어서고 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