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지식채널e’, 그 역설의 미학 본문

옛글들/네모난 세상

‘지식채널e’, 그 역설의 미학

D.H.Jung 2009. 3. 11.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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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채널e’, TV의 법칙을 모두 뒤집다

‘지식채널e’의 ‘가비오따스’편은 “발전을 어떻게 정의하십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1970년 콜롬비아 열대 우림에 운하건설을 위해 파견된 파올로 루가리는 인디언 정착지를 둘러보며 ‘개발로 인해 정작 행복해지는 사람은 누구일까’하는 의구심을 갖게 된다. 그는 지속 가능한 발전을 찾아 코카나무조차 자랄 수 없는 척박한 땅 가비오따스로 들어가고 거기서 가능한 모든 것들을 시도한다. 자생력 강한 소나무를 심고, 수경 재배법을 퍼뜨리고, 버려진 잡동사니로 풍차를 만들고, 심지어 시소놀이를 하면서 물탱크를 채우는 슬리브 시소 펌프를 만든다. 결국 수천 년 만에 사막이 열대우림으로 되살아나고 그는 말한다. 진정한 위기는 자원의 부족이 아니라 상상력의 부족이라고.

이 감동적인 가비오따스의 기적을 보여주는 5분 짜리 영상은 그대로 ‘지식채널e’의 기적을 증명하듯 보여준다. ‘지식채널e’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5분. 프로그램의 자원으로서는 가비오따스의 사막만큼 부족한 시간이다. 하지만 파올로 루가리가 이 사막이라는 조건을 상상력으로 뛰어넘었듯이, 5분이라는 한정된 시간은 오히려 무한한 상상력의 공간으로 확장된다. 압축된 시간은 영상의 군더더기를 없앴고 단일한 주제에의 집중을 요구했다.

빠른 속도로 휙휙 지나가는 영상의 시대에, 5분 압축 속의 집중이 선택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정지화면이었다. 스쳐 지나가는 영상의 메시지들은 정지화면 속에서 좀더 사색의 공간을 확보해주었다. 세련된 영상 대신 자리한 것이 낡은 사진(혹은 옛 동영상)이었다. 그 흑백으로 자리한 낡은 사진들은 색마저 지워버림으로써 온전히 사진 속 이미지가 주는 의미에 집중시켰다.

그리고 그 위로 ‘지식채널e’는 문자를 부활시켰다. 음성이 지워진 자리에 선 글자 하나하나는 마치 머릿속에 각인되듯 의미들을 피워내고는 사라졌다. 정지된 영상과 사라진 음성 속에서 문자만이 자유롭게 떠다니는 이 풍경은 마치 TV가 한 권의 책으로 변신하는 마력을 만들어낸다. 이로써 5분이라는 한계 상황은 좀더 집약적인 영상을 만들어내면서 심지어는 누군가의 일생을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그릇이 된다. 5분이라는 열악한 시간자원을 가진 프로그램이, 몇 시간의 다큐멘터리가 포착할 수 없는 메시지를 잡아내는 기적 같은 순간이다.

‘지식채널e’는 영상시대가 문자시대에 보내는 헌사다. 이 프로그램은 시간을 압축하고, 동영상을 정지시키며, 음성 대신 문자를 채워 넣음으로써, TV의 영상법칙을 모두 뒤집어 문자시대가 주었던 지식들의 향수를 일깨운다. ‘지식채널e’가 말하는 역설의 미학은 속도의 미학에 경도된 TV영상들이 주는 그 숨가쁨에 숨쉴 공간이 되어주고, 현란한 동영상 세상의 산만함에 잠깐 멈춰 사색할 공간을 내어주며, 내레이션들이 강권하는 메시지들이 넘쳐나는 TV 공간에 강권없는 화두로서의 문자를 던져준다. ‘지식채널e’는 풍요 속에 사막이 되어가는 상상력 없는 TV세상에 가비오따스의 기적을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