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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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속 남자들은 왜 고개를 숙였나

D.H.Jung 2009. 4. 9.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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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속 남자들의 안간힘, 현실? 판타지!

‘카인과 아벨’에는 대사 한 마디 없이(물론 가끔 회상 신으로 나오긴 하지만), 움직임도 거의 없이 연기를 하고 있는 연기자가 있습니다. 바로 이선우(신현준)의 아버지, 이종민 역할을 하고 있는 장용이죠. 연거푸 KBS일일극에 아버지역으로 캐스팅됐을 정도로 그는 우리네 드라마의 아버지상을 대변해온 중견 연기자입니다. 그 드라마 속 아버지(그래서 우리네 마음 속에 아버지로 자리한)가 의식은 있으나 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침상에 누워, 아내와 아들의 가시 돋친 저주를 들으면서도 한 마디 항변조차 못하는 그 장면에서, 우리네 TV 속 남자들의 안간힘이 겹치는 건 왜일까요.

지금 TV는 온통 여성들의 시선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습니다. 이유는 당연하게도 그것이 시청률을 담보해주기 때문입니다. ‘꽃보다 남자’ 속 F4는 기꺼이 평범한 서민 금잔디(구혜선)를 사랑해주고 뭐든 원하는 것이면 손에 넣게 해주었고, ‘내조의 여왕’의 천지애(김남주)는 ‘남자들의 성공은 본래 여자하기 달렸다’며 그 여성들의 권력의 세계인 내조의 세계로 뛰어들었습니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이나 ‘아내의 유혹’에 오면 꿔다 논 보릿자루처럼 어쩔 줄 몰라하는 남자를 사이에 두고, 피 터지는 여성들의 대결구도를 보여주면서 현실에서 채워지지 않는 여성들의 성공 욕망과 보복 심리를 대리해주었죠. 이렇게 여성들의 시선에 충실한 결과는 시청률로 보상받습니다.

그렇다면 남자들은 어떨까요. 시청률 30%를 기록했던 ‘꽃보다 남자’의 후속으로 들어선 ‘남자이야기’가 시청률 6.8%(AGB 닐슨)에서 시작했다는 점은 충격적입니다. 박용하는 하루아침에 형도 잃고 교도소까지 들어가는 비운의 연기를 보여주었지만 시청자들의 눈길은 ‘내조의 여왕’에서 좀체 거둬지지 않고 있습니다. 꽤 남성적인 세계를 그려내고 있지만 ‘카인과 아벨’은 소지섭이라는 배우가 있어 예외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지섭은 거의 공포에 가까운 눈빛 연기로 보는 이를 전율하게 만들면서도(소지섭 자체가 여성 시청층을 끌어 모으는 요인이 되고 있죠), 한편으로는 오영지(한지민)와 김서연(채정안) 사이에서 아련한 멜로를 선보이고 있죠.

이런 점은 비단 드라마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예능 프로그램에 있어서도 이런 현상은 뚜렷하죠. ‘패밀리가 떴다’가 꽤 많은 우여곡절을 겪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주말의 강자로 자리하고 있는 것은 그 여성 편향적 버라이어티에서도 요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패밀리가 떴다’의 세계에서 남성 출연자들이 어딘지 모자란 존재들(엉성하거나 덤하거나 더머한)인 반면 이효리나 박예진은 늘 이 유사가족에서 가장 큰 발언권을 가진 존재들로 부각되죠. 최근 김원희가 게스트로 등장해 특유의 마님 포스로 주목을 끌었던 것은 이 버라이어티의 여성 편향적 구조를 잘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여성 출연진들과 남성들이 만들어가는 알콩달콩한 관계가 제공하는 드라마적이고 판타지적인 버라이어티의 세계. 이것은 분명 여섯 남자들의 세상인 ‘1박2일’이 갖지 못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1박2일’만이 갖는 리얼리티의 세계가 상대적으로 짜여진 느낌을 주는 ‘패밀리가 떴다’를 압도하는 것이 사실이죠.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패밀리가 떴다’의 판타지가 유효한 것 역시 분명한 사실입니다. 한편 역시 여성 시청층을 겨냥하고 있는 ‘우리 결혼했어요’나 ‘골드미스가 간다’ 같은 프로그램들은 현재 편성 경쟁에서 밀려나 있긴 하지만 언제든 촉발적인 계기만 있다면 금세 부각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 가능성은 ‘세바퀴’가 ‘일요일 일요일밤에’에서 빠져나와 토요일 밤에 독립 편성되면서 첫 방송에 13.6%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라 볼 수 있죠.

반면 이 틈바구니에 시작된 ‘남자의 자격’은 어떨까요. 이제 중년에 가까운 남자들의 재교육 같은 인상을 주는 이 프로그램을 이제 2회를 한 시점에서 뭐라 판단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분명한 것은 남자 출연자들만 나오고 있고 남자들의 도전 과제가 주어진다는 점에서 이 버라이어티는 기본적으로 남자들의 세계라는 점입니다. 바로 이런 점이 작용했는지 그 시청률은 아직까지는 기대 이하죠. 그것은 같은 시간대에 자리한 ‘패밀리가 떴다’의 아성이 그만큼 굳건한 때문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프로그램명이 ‘남자의 자격’이라고 해서 이 프로그램의 지향이 마초적 남자의 세계일 거라는 건 오산이죠. ‘남자의 자격’이라는 말 속에는 그 반대쪽에서 가족이나 여성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점이 이 프로그램의 가능성을 점치게 하는 부분이기도 하죠.

현재 TV 속에서 남성들은 여성들의 세계를 향해 한껏 고개를 숙이고 그 여성들의 세계를 구축하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한편 남성적 세계에 대한 향수를 드러내는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들은 시청률에서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죠. 이 과정에서 TV 속 아버지는 발언권을 잃었고, 남성들은 수동적인 캐릭터로 축조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건 과거와는 달라진 현실에서의 여성들의 위상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이 여성들의 커진 목소리를 완전히 대변한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달라졌다 판단되는 이 현재에서도 여전히 은연 중에 존재하는(그래서 더 어려울 수밖에 없는) 남성에 편향된 세계가 주는 억압이, 판타지의 형태로 거꾸로 투영된 것일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