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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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장편 ‘똥파리’, 전 세계가 주목할만한 이유

D.H.Jung 2009. 4. 18.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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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개 국제영화제 수상, 최다개봉관 개봉 왜?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는 독립장편 극영화로는 이례적으로 로테르담, 도빌,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8개에 달하는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역시 독립장편 극영화로는 역대 최다개봉관인 50여 개 스크린에서 개봉되었다. 영화를 정식으로 공부한 적도 없는 양익준 감독이 각본, 연출, 주연까지 북치고 장구치고 한 이 영화가 흔한 상업영화들처럼 세련될 리는 만무다. 게다가 영화 찍다 돈이 없어 촬영이 중단되자 전셋집까지 빼서 했을 정도니 돈 냄새가 날 리도 없다. 영화가 친절한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다. 시작부터 욕설과 폭력으로 시작해 끝까지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 욕을 들으면서도, 또 심지어 아버지와 자식을 패는 패륜적인 폭력을 보면서도 때론 웃음이 터지고 때론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똥파리’가 그리는 세계는 당연하게도(?) 화장실 같은 세상이다. 거기에는 살벌한 낙서처럼 휘갈겨진 욕설이 일상의 언어처럼 쏟아져 나오고, 어디서 생긴 지도 모르는 분노가 변의처럼 폭력으로 불끈불끈 솟아나온다. 상훈(양익준)은 그 세상에 사는 똥파리다. 이른바 떼인 돈을 받아주는 그의 직업의 세계는 더럽기가 똥 같은 곳이다. 빚을 진 자들 중에는 맞아도 쌀만한 인간들(예를 들면 상훈의 아버지같이 가정폭력을 일삼는)도 즐비하다. 상훈은 자신의 이런 짓거리 역시 더럽다 생각하는 인물. 같이 데리고 다니는 똘마니들에게 왜 폭력을 휘두르지 않느냐며 주먹질을 해대다가도, 그들이 정작 일(?)을 할 때면 그들을 향해서도 폭력을 휘두른다. 그의 주먹은 동료와 적을 나누지 않는다. 그것은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폭력으로 동생과 어머니까지 죽게 하고 감방에 들어갔다 출소한 아버지에게 “든든히 먹어야 맞을 수 있다”고 말하고 발길질을 해댈 정도. 그런 그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연희(김꽃비)가 나타난다. 그들이 서로에게 감정을 느끼는 과정에는 여느 영화 속에서 보았던 그런 알콩달콩함은 없다. 만남부터 상훈의 주먹질로 시작하고 일상적 대화 속에는 듣기 불편할 정도의 욕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처음에는 불편했던 욕들이 차츰 듣다보니 익숙해지고, 어느 순간에는 그 욕 속에 숨겨진 이들의 애절한 속내들이 보여지면서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월남전 참전으로 후유증을 겪는 아버지로 인해 똑같은 폭력에 내둘러진 연희는 그러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그런 그녀를 보는 상훈은 한번도 느끼지 못했을 기대고픈 마음을 갖는다.

영화가 프레임 속으로 보여주는 공간은 이 ‘똥파리’들의 세상에만 집중되어 있다. 카메라는 인물을 포착할 때도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있는 듯한 거북한 느낌을 준다. 이것은 마치보기에도 섬뜩한 사람이 코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부담감을 준다. 카메라는 이들의 비극적인 순환이 반복되는 세상을 따라가면서 그것이 서로가 서로에게 똥칠을 해대는(그렇게 하도록 시스템화된) 과정을 조명해준다. 연희와 상훈은 보이지 않는 폭력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지긋지긋한 가난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서로의 살을 물어뜯는 비정한 세상(비참한 삶을 사는 똥파리 상훈이 역시 비참한 삶을 사는 빚쟁이들의 돈을 폭력으로 받아내는)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상훈을 이 똥파리들의 세상에 붙잡고 있는 회사(?) 사장(그는 상훈의 친구이기도 하다)은 분명 이 시스템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일 것이지만, 그를 통해 이 폭력의 세상을 연출해낸 시스템의 장본인들은 끝까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가 끝까지 이 낮은 자들의 세상을 비추는 동안, 관객들은 이 프레임 바깥의 세상이 궁금하게 된다. 그리고 프레임 바깥의 그 어떤 시스템이 프레임 안의 똥파리들의 비극적인 삶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 그 똥파리들이 해대는 욕과 폭력은 하나의 안타까운 몸부림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 더러운 세상에 대한 정밀묘사는 영화의 진심을 전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국적성을 지워버리는 효과도 있다. 하긴 이런 세상의 풍경이 어디 특정 국가의 문제일까. 각종 세계 영화제의 관심은 그걸 에둘러 말해주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