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내조의 여왕', 양봉순을 미워할 수 없는 이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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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조의 여왕', 양봉순을 미워할 수 없는 이유

D.H.Jung 2009. 5. 6.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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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조의 여왕'에서 초반 악역을 자처했던 인물은 바로 양봉순(이혜영)입니다. 그녀는 고교시절 여왕처럼 받들던 천지애(김남주)를 사회에서 만나고는 회심의 미소를 짓죠. 남편 온달수(오지호)를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천지애를 그녀는 온달수의 상사이자 자신의 남편인 한준혁(최철호)의 지위를 이용해 무릎꿇리죠. 천지애를 사랑했던 한준혁을 가로챈 인물이자, 현재 주인공인 천지애를 괴롭히는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양봉순은 전형적인 악역입니다.

그런데 이 견고해보이는 양봉순이라는 악역의 틀이 조금씩 깨져가고 있습니다. 시청자들은 점차 양봉순이 처한 입장에 대해 동정을 갖게 되거나 이해하는 입장이 되어가고 있는 중이죠. 그녀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남편 한준혁을 위해 자신의 삶은 접어둔 채 온통 내조로만 살아가는 인물이죠. 그런 그녀에게 결국 돌아온 것은 남편 한준혁이 여전히 과거를 잊지못하고 천지애에 대한 연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 뿐입니다.

사실 실제에 있어서는 이런 양봉순의 상황이 현실에 가까울 것입니다. 이른바 가정주부로서의 삶을 강요받아온 시대의 주부들이라면 더욱 그러하겠죠. 거의 남편 뒷바라지에 자식 뒤치닥거리에 어느새 훌쩍 인생이 저물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그 허망함이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런 그녀들에게 불쑥 들이밀어지는 것은 남편의 외도나 불륜 같은 충격적인 사실일 경우가 많죠. 이것은 여성들이 주시청층인 드라마가 왜 그다지도 불륜이란 소재를 벗어나지 못하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양봉순이 정상적이지 못한 비뚤어진 삶을 살게 된 것은 과연 그녀의 잘못일까요. 외모 지상주의와 왕따 문화가 사회적으로는 성공 지상주의와 파벌 문화로 연결되는 이 사회 속에서 양봉순은 그 주류에 편승하고자 했던 한 명의 희생자일 수 있습니다. 사실 천지애의 삶 이상으로 양봉순의 삶이 우리네 삶을 대변해주는 이유는 그런 이유 때문이죠.

양봉순의 내조 혹은 남편에 대한 집착은 그녀 식의 사랑인 셈입니다. 그것은 이 비뚤어진 세계 속에서 얼마나 그녀가 안간힘을 써야 버텨낼 수 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죠. 그러니 이제 양봉순의 입장과 천지애의 입장은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지언정 그다지 상황이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그녀들은 이 성공 지상주의와 파벌 문화의 시스템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왔을 뿐이죠. 그러니 진짜 적은 그런 시스템을 양산한 김홍식 이사(김창완)와 그의 부인 오영숙(나영희)일 것입니다.

'내조의 여왕'이 이 사회의 어떤 부조리한 구조를 코미디로 풀어 풍자하고 있다면 그 세계 속에서 양봉순은 절대로 악역이 아닙니다. 그녀는 가장 극적인 희생자일 뿐이죠. 그러니 그녀가 남편의 사랑을 확인하면 흘리는 눈물에는, 또 그런 그녀를 뒤로 하고 "미친 년"하고 욕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감동하는 천지애의 눈물에는 이 세상 주부들이 갖고 있는 그 답답함을 함께 공감하는 구석이 있게 마련입니다. 결말에 이르러 불륜이 걱정되는 '내조의 여왕'에서 어떤 희망적인 결론을 기대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은 양봉순과 천지애의 동지의식 같은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