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태양을 삼켜라', 볼거리가 드라마를 삼키다 본문

옛글들/드라마 곱씹기

'태양을 삼켜라', 볼거리가 드라마를 삼키다

D.H.Jung 2009. 8. 7. 07:23
728x90

볼거리만 있고 스토리는 없는 '태삼'의 문제

'태양을 삼켜라'는 애초에 기대만큼 불안감도 컸던 드라마다. 그리고 그 기대와 불안감은 같은 한 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대작, 이른바 블록버스터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블록버스터가 기대만큼 불안감이 큰 이유는 그것이 볼거리에 지나치게 치우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볼거리가 왜 위험성을 내포할까. 그것은 드라마라는 장르와, 그 드라마가 방영되는 TV라는 매체를 이해한다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드라마는 영화처럼 볼거리가 주는 영상체험보다는 스토리에 더 치중되는 장르다. 우리가 과거 연속극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드라마는 그 끊임없이 찾아보게 만드는 스토리의 연결고리가 그만큼 중요하다. 끊임없이 다음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들고, 캐릭터의 내면에 집중시키는 것은 따라서 드라마가 가진 책무이자 가장 큰 재미요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볼거리가 드라마에 만들어주는 힘은 그다지 크지 않다. TV라는 매체 자체가 집중보다는 분산을 특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겉으로 보여지는 영상만으로는 영화만큼의 몰입도를 가져오기가 어렵다. 폐쇄된 공간에 불이 꺼진 채 대형 화면과 실감 음향을 통해 온 몸으로 전해지는 극장의 볼거리는 같은 영상이라고 해도 TV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드라마의 몰입을 만들어주는 것은 볼거리가 아니라 스토리(그 속의 캐릭터들)가 만들어내는 감정이입으로서의 몰입이다.

물론 스토리도 충분히 감정이입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이면서 볼거리까지 있다면 그보다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것은 경제적인 선택은 아닐 수 있다. 차라리 볼거리는 조금 차치하고라도 일단 스토리가 탄탄해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 더 경제적인 방법이다. '찬란한 유산'은 특별한 볼거리는 없었지만, 스토리가 매번 시청자들의 눈을 홀리게 만들었다. 결과는 47%라는 경이적인 시청률로 나타났다.

'선덕여왕'은 대작으로서 볼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볼거리에 치중하지는 않는 영리함을 보이고 있다. 백제와의 전쟁 신에서는 훌륭한 볼거리를 보여주었지만, 그 외에는 캐릭터들이 만들어가는 스토리에 집중하고 있다. 시청자들은 왜 전쟁 같은 스펙타클이 또 안 나오냐고 불평하기보다는, 덕만(이요원)이 자신의 존재를 알아가는 그 스토리나 비담(김남길)처럼 스토리성을 그 안에 갖고 있는 캐릭터의 등장이 주는 몰입감에 열광하고 있다. 결과는 시청률 30%를 넘어 40%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중이다.

반면 '태양을 삼켜라'는 수목드라마들이 모두 주춤하는 사이에 시청률 1위를 여전히 기록하고는 있지만 대작이라는 점을 감안해보면 그 1위는 오히려 부끄러운 수준이다. 이유는 자명하다. 스토리가 눈에 띄도록 매력적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서 이 드라마는 초반부에 반드시 살아나야 하는, 주인공을 움직이는 강력한 동기마저 잘 부여하지 않았다. 이것은 거의 기초적인 것이다.

주인공 김정우(지성)의 탄생배경을 보여준 초반 1,2부의 스토리는, 말 그대로 현란함의 극치였다. 하지만 그 초반 스토리를 장악했던 정우의 아버지 일환(진구)의 모험담은, 다만 정우와 혈연적 관계를 말해줄 뿐, 스토리로는 아무런 연결고리를 보여주지 못한다. 즉 주인공 정우가 앞으로 가야할 길이나 목적, 욕망과는 상관없는 드라마의 볼거리만을 나열한 셈이다.

이것은 그나마 드라마 초반에 있어서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끌기 위한 방법적인 선택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어떨까. 정우는 일환과의 연결고리 없이 그저 가난하고 거친 삶을 살았다는 뉘앙스로 불쑥 등장하고, 갑작스레 장민호 회장(전광렬)의 휘하로 들어간다. 정우가 그렇게 행동한 이유는?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성공에 대한 욕망 같은 상투적인 이유에 불과하다.

수현(성유리)이 갑자기 서커스 공연을 기획한다고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것과 정우와 그 친구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프리카에서 망명한 갑부의 경호팀으로 역시 라스베이거스로 가는 것은 그 둘은 라스베이거스라는 공간에서 만나게 하겠다는 의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설정 자체가 지나치게 무리한 감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이 드라마의 애초 기획의도에 들어가 있는 해외로케의 정당성마저 찾아내기가 어려워진다. 그 곳에서 잭슨리(유오성)가 도박을 하고 동시에 교차편집되어 보여지는 그의 여자가 선정적인 스트립쇼를 하는 장면은 도박과 섹스를 연결한 자극을 보여주지만, 스토리의 맥락과는 역시 떨어져 있다.

스토리가 잘 구축되지 않는 볼거리란 때론. 캐릭터가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볼거리를 위해 캐릭터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맥락 없이 돌아가는 라스베이거스의 풍광들이나, 비키니 입은 여인들, 그리고 가끔씩 등장하는 폭력적인 장면들은 자극적이기는 하지만 캐릭터의 심리와 깊게 와 닿지 않을 때, 그저 지나치는 파편적인 영상으로 전락한다. 계속 반복적으로 이미지가 삽입되는 '태양의 서커스'는 물론 볼거리로서는 압도적일지 몰라도, 왜 그게 그렇게 등장하는지 드라마는 잘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이런 경우, 캐릭터는 당연히 살아나기가 어렵다. 모든 행동이 맥락을 찾지 못하는 캐릭터에 어떻게 시청자가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까. 엄청난 물량이 투입되는 미국 드라마에서도 볼거리는 스토리보다 중요하지 않다. 치밀한 스토리가 있고 그 위에 볼거리는 덧씌워질 뿐이다. 블록버스터 드라마를 지향했던 '로비스트'가 스토리는 없이 볼거리만 나열하고 추락했던 것처럼, '태양을 삼켜라' 역시 마찬가지 길을 가고 있다. 볼거리는 나쁜 것이 아니지만, 볼거리에만 치중하고 스토리에 소홀하게 되면 상황은 나빠질 수밖에 없다. 볼거리가 드라마를 잡아먹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