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남자의 자격', 이경규라는 양날의 칼에 달렸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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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격', 이경규라는 양날의 칼에 달렸다

D.H.Jung 2009. 8. 28.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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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규, 칼날이 아닌 칼자루가 되어야

'남자의 자격' 초반부에서부터 이경규는 확실한 보검이었다. 한동안 위기설을 겪고 난 후여서인지 그는 프로그램을 대하는 자세부터가 남달랐다. 새로운 예능의 형식으로 자리한 리얼 버라이어티쇼에 적응하려는 모습이 역력했고, 늘 전면에 서서 프로그램을 좌지우지하던 과거의 방식을 버리려 노력했다. 김국진 앞에서 이경규는 의도적으로 약한 모습을 보였고, 지나치게 열성적인 모습으로 이 대한민국 평균 이상의 연령들에게 피해를 주는 김성민에게 당하는 모습을 스스럼없이 보여주었다.

50대 이경규의 이런 자세는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음악으로 치면 독주보다는 합주를 해야 하는 형식이며, 그 합주에서 함께 출연하는 출연진들과의 적절한 토크 배분은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서열이나 개그의 공력으로 독보적인 이경규라는 보검은 자칫 잘못하면 같은 아군의 말문을 막아버리는 무시무시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따라서 자신이 당하고 낮추는 모습을 보여주는 이경규의 노력은 그 자체로 '남자의 자격'이라는 프로그램의 전제조건이 되는 셈이다.

이것을 위해 '남자의 자격' 제작진 역시 초반부에 어떤 장치를 마련하려 했던 노력의 흔적이 보인다. 그것은 멘토로서 이외수나 남진 같은 대선배를 세워두었던 점이다. 이 멘토들은 외부에 서서 '남자의 자격' 팀원들이 비교적 공정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해주었다. 이경규는 이들 멘토들에게도 서슴없이 속내를 끄집어내는 공력을 보였지만, 결국에는 무너지고 초라한 모습을 연출함으로써 프로그램의 팀워크를 살렸다.

하지만 '남자의 자격'은 어느 순간부터 멘토가 등장하지 않게 되었고, 그러자 이런 균형은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다. 이경규는 다시 프로그램의 중심부에 섰다. 그와 형 동생하며 편안하게 얘기할 수 있는 김태원의 캐릭터는 도드라졌고, 그와 마치 톰과 제리 같은 관계를 유지하는 김성민의 캐릭터도 부각되었다. 무엇보다 전체적으로 평균 이하의 체력에 몰려 지쳐있는 모습과 늘 상반되는 자세를 보여주는 김성민은 이 프로그램의 보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반면 본래부터 수비형 토크가 장기지만, 유독 '남자의 자격'에서만은 이경규를 향한 공격형 토크를 했던 김국진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렸다. 허약 캐릭터이자 이경규의 집사 캐릭터인 이윤석은, 시체 캐릭터이자 새로운 이경규의 오른팔이 된 김태원 앞에서 잘 보이지 않게 되었고, 윤형빈은 왕비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선배님들의 개그에 리액션을 하는 캐릭터로 굳어져갔다. 이정진은 웃기지 못하는 예능인으로서의 캐릭터도 걸기가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물론 캐릭터는 그렇게 쉽게 잡히는 것도 아니고, 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현재의 이런 모습들이 앞으로도 그대로 지속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현재는 '남자의 자격'의 도드라진 캐릭터들, 즉 이경규와 김태원, 김성민이 다른 캐릭터들의 빈 부분을 잘 메워주고 있다. 2PM의 춤을 배워 UCC를 만드는 과정에서 보면 이 세 명의 캐릭터가 얼마나 이 프로그램의 동력이 되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삶이 그대로 묻어난 캐릭터에서 나오는 김태원의 촌철살인, 뭐든 열심히 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김성민의 긍정적인 에너지, 그리고 독보적이라 할 수 있는 이경규의 예능감은 '남자의 자격'의 가장 큰 재미요소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균형감각이다. 이 존재감이 너무나 드러나는 캐릭터들과 상대적으로 존재감이 잘 드러나지 않는 나머지 캐릭터들 사이의 균형감각. 이것은 이제 리얼 버라이어티쇼로 대변되는 달라진 예능의 환경 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집단 MC체제가 성립된 이유는 그만큼 다양하게 시청자가 감정이입할 수 있는 캐릭터들이 다수 존재한다는 점 때문이다. 과거와 달리, 시청자들은 늘 전면에 나서서 웃기는 자만을 쳐다보지는 않는다.

묵묵히 누군가의 얘기를 들어주고 받아주는 캐릭터 역시 다양한 기호와 취향을 요구하는 시청자들에게는 소중한 존재들이다. 김C가 현재 예능의 블루칩으로 부상한 것은 그의 탁월한 예능감 때문이 아니다. 리얼 버라이어티쇼처럼 지속적으로 봐야하는 프로그램에서 캐릭터는 예능감보다 우선적인 것이 인간적인 매력이다. 인간적인 매력의 캐릭터는 마치 밥 같아서 예능감으로 무장한 맛깔난 반찬 같은 캐릭터들보다 더 오래도록 음미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따라서 예능적인 존재감이 덜 하더라도 그 캐릭터가 가진 인간적인 매력이 부각될 수 있는 기회는 충분히 제공되어야 한다.

캐릭터들 간의 균형 감각이 만들어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분위기다. 그런 면에서 이 팀의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경규의 역할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다. 이경규는 실로 혼자 버라이어티쇼를 해도 풍부한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공력의 소유자다. 하지만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혼자 선다는 것은 프로그램의 죽음과 같다. 미약하지만 같은 팀원의 모습들 속에서 캐릭터를 발견해주고 뽑아내주는 역할 또한 그의 몫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캐릭터가 발현될 수 있는 분위기를 위해 스스로 가장 낮은 자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자신도 살리고 프로그램도 살릴 수 있는 길이다.

일일 아르바이트 체험에서 이경규가 중국집 주인아주머니에게 이리 저리 끌려 다니는 모습을 보여줄 때, 패러글라이딩처럼 그동안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을 몸소 보여줄 때 이경규라는 개그맨은 위대해 보인다. 나이 오십에서도 여전히 청년의 정열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이미 우리나라 예능계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고, 지금도 그 획을 계속 긋고 있는 진행형 개그맨이다. 하지만 대단한 개그맨이 위대한 개그맨이 되려면, 그 높은 곳에서 늘 바닥으로 걸어 내려와야 한다. 이경규라는 보검은 무엇이든 자를 수 있기에, 그 스스로가 칼날을 쥐고 다른 이들이 칼자루를 쥐게 해주어야 빛이 난다. '남자의 자격'은 그런 면에서 이경규에게는 '위대한 개그맨의 자격'을 묻는 시험대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