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 정덕현

'선덕여왕'의 미실, 악역일까 멘토일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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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의 미실, 악역일까 멘토일까

D.H.Jung 2009. 9. 30. 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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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형 악역 미실이 시사하는 것들

'선덕여왕'에서 덕만(이요원)은 미실(고현정)에게 귀족들이 결국에는 구휼미로 내놓을 것을 왜 손해를 감수하면서 비싼 값에도 곡물을 매점매석하는 이유를 묻는다. 그러자 미실은 덕만에게 농부들에도 자영농과 소작농이 있다면서 그들이 어떻게 되겠느냐고 재차 질문을 함으로써 덕만에게 그 답의 단서를 제시한다. 그 단서를 얻은 덕만은 궁의 비축미를 시장에 풀어 가격을 낮춤으로써 비싼 값에 곡물을 산 귀족들에게 역공격을 가하고, 백성들은 싼 가격에 곡물을 살 수 있게 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과정은 덕만이 그 적이라 할 수 있는 미실이 제공한 정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 셈이 된다. 여타의 사극이라면 특이한 상황이겠지만 '선덕여왕'에서 이런 식의 전개는 그다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이유는 악역이면서도 멘토의 역할을 하는 미실이라는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에서 미실은 이처럼 덕만에게 문제를 제시하는 존재이면서 때로는 그 문제의 해법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이렇게 된 것은 덕만의 캐릭터와도 조응한다. 덕만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적에게도 질문을 던지고 때로는 적의 방식을 그대로 활용하는 인물이다. 곡물의 매점매석을 시장의 논리로서 해결하는 것도 그렇고, 미실이 일식 같은 자연현상을 이용해 백성들을 공포로 몰아넣어 정치에 활용하는 방식은 덕만이 궁으로 다시 돌아오는 그 방식으로 활용된다. 덕만은 어찌 보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늘 미실을 연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덕만의 성장은 그녀를 도와주고 돌봐주는 인물들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녀에게 문제를 내는 인물들에 의한 것이다.

덕만과 미실이 정치란 무엇인가에 대해 두고 벌이는 대화는 마치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스승과 제자의 그것 같다. 미실이 백성들은 환상을 원하고 그 환상을 통해 통치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미실 앞에서 덕만은 자신만의 비전을 궁구하고, 결국 답으로서 환상이 아닌 희망을 제시한다. 그러자 미실은 "자기보다 더 지독한 짓"이라고 말하고, 거기에 대해 덕만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미소를 짓는다. 이것은 비전과 현실정치 사이의 괴리를 말하는 것이다. 덕만은 현실정치를 위해 미실의 방식을 차용하되, 그것이 속이는 환상이 아니라 꿈꾸게 하는 희망으로 비전을 내세운 것이다.

결국 덕만의 방식은 미실이 갖고 있는 정보의 독점을 통한 통제가 아니라, 정보의 공유를 통한 공통 비전의 제시에 있다. 그런데 이것은 상당부분 미실의 통치방식을 연구한데서 나온 것들이다. 적이 문제를 제시하고, 그 문제를 해결했을 때 자신의 성장을 이루는 이 방식은 '선덕여왕'이 갖고 있는 이야기의 주된 방식이라고 할 때, 그 문제출제자이자 기존 정보의 제공자인 미실은 이 사극의 실제적인 추동력이라고 볼 수 있다. 때로는 멘토가 되고, 때로는 악역으로 서는 미실이라는 존재가 있어 '선덕여왕'은 비로소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작금의 현실정치에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비전이 다른 존재들이 서로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를 풀어나가는 그 과정이 정치의 성장 과정이 아닐까. 백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적에게도 질문을 던지고, 또 그 적이 답변을 해주는 이 덕만과 미실의 이야기는 대화와 소통부재의 정치현실을 떠올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