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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에 패자는 없다

네모난 세상/명랑TV 2010/01/30 21:42 Posted by 더키앙

'무한도전'의 패자 없는 경기가 말해주는 것

도전하는 그들에게 패자가 있을까. '무한도전'이 복싱 특집편에서 다룬 WBC 세계 챔피언 최현미 선수와 도전자 쓰바사 선수의 경기에 패자는 없었다. 세계 챔피언이지만 스폰서도 없고 심지어 다음 경기를 잡지 못해 챔피언 벨트를 내줘야 할 위기(6개월 안에 방어전을 치르지 않으면 반납한다고 한다)에 있는 최현미 선수. 그리고 역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밝은 모습으로 꿋꿋이 복싱을 하고 있는 쓰바사 선수. '무한도전'은 두 선수의 명승부를 보여주었지만 승패의 결과는 보여주지 않았다. 그것이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경기를 통해 이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최선의 경기를 다한 선수들은 이미 모두 승자였다.

이 패자 없는 경기를 보여준 '무한도전'은 승패에만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던 권투 경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전해주었다. 일본까지 날아간 정형돈과 정준하는 쓰바사 선수 역시 최현미 선수만큼 속 깊은 사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프로그램은 모두 힘겨운 상황에서 도전하고 있는 이 두 선수를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게 조명했다. 경기 전 좋은 경기를 보여 달라는 격려의 말은 물론이고, 경기가 끝난 후에도 쓰바사 선수의 라커룸을 찾아가 앞으로도 계속 응원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권투 경기, 그것도 한일전이라면 무조건 우리가 이겨야만 된다고 입을 모았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무한도전'의 풍경. 경기가 끝나고 쓰바사 선수의 멍든 눈을 보며 정형돈이 울먹거리고, 길이 끝내 눈물을 흘린 것은 왜였을까. 그것은 아마도 권투라는 경기가 갖고 있는 그 처절함과 힘겨움을 가까이서 바라보고는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있을까. 그것도 링 위에 올라가는 그들에게는 더더욱.

흔히들 권투를 삶과 비교하곤 한다. 우리는 늘 아침에 세상이라는 링에 올라가 한바탕 힘겨운 경기를 치르고 다시 링 아래로 내려오는 삶을 반복한다. 링이라는 사회가 던져놓은 무대 위에서 우리는 늘 승자 혹은 패자가 되지만, 사실 링 밖으로 내려오면 누구나 누군가의 남편, 아내이거나 누군가의 부모로서 승자나 패자는 있을 수 없다. '무한도전'이 패자 없는 경기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바로 이 링 바깥의 시선으로 링 위에 오르는 두 선수를 바라봤기 때문이다.

봅슬레이 특집이나, 복싱 특집처럼 이제 '무한도전'은 사회적인 관심이 미치지 않는 곳에 시선을 던지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 프로그램이 과거와는 조금 결을 달리하는 새로운 도전과제를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무한도전'의 멤버들은 이제 초창기의 그 낮은 위치에 서 있는 존재들이 아니다. 그들은 끊임없는 도전을 통해서 스스로를 성장시켜 이제는 정상의 위치에 서 있다. 이것은 '무한도전'의 도전 상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무한도전'의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지는 이 위기를 넘어서게 해준다. 팀원들의 성장에서 이제는 타인의 성장으로 '무한도전'이 도전하는 과제의 폭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한다'는 '무한도전'의 기치는, 승패가 아닌 그 최선을 다하는 것에 대한 도전의 가치를 보여줌으로써 공감을 자아냈다. 이제 '무한도전'은 그 최선을 다하는 자들을 찾아가 어깨를 두드려주고 있다. 그곳에 승자나 패자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 사회를 흔히들 승자들이 모든 것을 다 차지하는 이른바 '승자독식사회'라고 한다. '무한도전'이 감동을 주는 것은 이 승자독식사회에서 패자 없는 사회를 꿈꾸기 때문일 것이다. '무한도전'에 패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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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의 논란은 어디서부터 생겨나는 걸까

7회 만에 시청률 34%의 놀라운 성적을 거두고 있는 '추노'. 40%를 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라고 말할 정도로 대중들의 이 드라마에 대한 관심은 높다. 그래서일까. '추노'의 논란 또한 끊이질 않는다. 이다해의 화장 얼굴이 리얼리티를 떨어뜨린다는 논란, 유독 노출이 많은 데다 어린 노비를 수청 들게 하거나 언년이(이다해)가 겁탈당하는 등의 내용이 가져온 선정성 논란이 그것이다. 심지어 이 선정성 논란을 의식한 블러 처리가 과잉 반응이었다는 논란까지 일어났다. 물론 논란 또한 관심의 표명일 것이다. 하지만 유독 '추노'에서 왜 이처럼 계속 논란이 쏟아지는 것일까.

먼저 이다해의 화장얼굴이 리얼리티를 떨어뜨린다는 논란은 물론 설득력은 있지만 조금은 과장된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사극은 영상연출에 있어서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기존 사극과는 달리 표현주의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추노'가 '300' 같다고 생각되는 것은 그 영상연출이 자연 상태 그대로를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연출자에 의해 효과적으로 연출되기 때문이다. '추노'에서 대길(장혁)과 태하(오지호)가 대결을 벌일 때 허공에서 두 얼굴이 멈춘 채 한 바퀴 카메라가 빙 도는 그런 장면은 물론 현실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만화적인 구도나 타 영화를 통해 그 장면이 주는 액션의 질감을 알고 있다. '추노'는 리얼한 영상이 아니라, 효과적인 영상을 보여주는 드라마다.

영상들은 끊임없이 감독에 의해 색채가 입혀지고, 느린 속도로 돌아가다가 갑자기 빨라지면서 어떤 리듬감을 만든다. 대길이 말을 타고 달리는 장면에서 클로즈업된 그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은 그저 말을 타고 달리는 대길의 장면과는 천지차이의 이야기를 해준다. 이다해의 말끔한 얼굴은 이 표현주의적인 영상연출에서 봤을 때,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일 수 있다. 표현주의적인 영상연출의 목적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내러티브를 위해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혜원(이다해)이 가진 정결한 모습은, 노비역할로 얼굴에 낙인이 찍힌 채 늘 검은 칠을 하고 있는 초복이(민지아)의 모습이나, 얼굴에 늘 화사하게 분칠을 하고 있는 설화(김하은)처럼 의도된 것이다. 이다해의 화장 얼굴 논란은 물론 이해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어쩌면 기존 사극과 이 사극의 영상연출의 차이에서 비롯된 바가 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기존의 리얼리티 영상연출의 시각으로 보면 논란이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사극의 표현주의적인 영상연출을 생각해보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 드라마의 선정성 논란은 왜 불거져 나오고 있을까. 그것은 이 드라마가 하층민을 다루고 노비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하층민들을 다루는 '추노'가 양반네들의 품격(?)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쩌면 비상식적인 일일 것이다. 그네들의 삶과 정서가 드라마에 묻어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층민들의 드러낸 몸과 질펀한 농담은 그네들의 힘겨운 삶을 에둘러 말해주는 것들이다. 몸은 힘겨운 노동과 연관이 있고, 질펀한 농담은 그 힘겨운 노동 속에서의 유일한 여가(?)일 테니까.

따라서 '추노'가 몸을 드러내고, 질펀한 농담을 쏟아내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드라마 전략적으로도 맞는 일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처럼 깊게 하층민의 삶을 다룬 사극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는 점은 이 사극의 이러한 모습들을 낯설게 만든다. 따라서 '추노'는 그 소재에서부터 벌써 수위가 높을 수밖에 없는 사극이다. 이것은 성적인 선정성뿐만 아니라 액션 장면에 등장하는 피가 튀는 리얼한 폭력 신에서도 그렇다. '추노'는 성인들의 드라마이지 온 가족이 볼 수 있는 드라마는 아니다. 그러니 제한을 15세가 아니라 그 위로 올렸다면 상황은 조금 달랐을 수 있다. 물론 TV라는 매체에 있어 나이 제한이라는 것이 그다지 효과적인 것은 아닐 것이지만.

어쨌든 '추노'가 인기만큼 논란도 많은 이유는 이 사극이 지금껏 사극이 다루지 않았던 영역을, 역시 색다른 영상연출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추노'는 꽤 높은 완성도를 가지는 작품이지만, TV라는 매체에 방영되기에는 조금 앞서가는 느낌이 있는 사극이다. 바로 이 실험성 강한 작품과 TV의 관습적인 환경 사이에 존재하는 거리는 논란을 야기한다. 그러니 이러한 드라마의 도전적인 실험과 거기서 발생하는 논란은 모두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남은 문제는 이 사이의 거리를 어떻게 좁혀나갈 것이냐가 될 것이다. 논란은 어쩌면 그 거리를 좁히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추노'의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한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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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트콤, 멀리서 보면 즐겁지만 가까이서 보면 슬프다

‘지붕 뚫고 하이킥’의 오현경과 정보석이 눈밭에서 격투를 벌이는 장면을 멀리서 바라보는 노부부는 ‘러브스토리’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우리도 젊었을 땐 저랬었지”하며 흐뭇해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막.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찰리 채플린.’ 이 말은 지금 희비극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 ‘지붕 뚫고 하이킥’의 정체성을 잘 드러내준다. 희극과 비극은 멀리서 보느냐 가까이서 보느냐에 달린 것일 뿐, 서로 다른 삶의 현실을 다루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하지만 ‘지붕 뚫고 하이킥’이 시트콤이냐 드라마냐는 정체성 논란이 나오는 것은 아무래도 시트콤은 역시 코미디여야 한다는 대중들의 바람이 들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지붕 뚫고 하이킥’은 초반의 코미디 분위기에서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사각 멜로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서로를 사랑하게 된 정음과 지훈(최다니엘), 지훈을 바라보는 세경, 그리고 그런 세경을 바라보는 준혁(윤시윤)의 엇갈린 마음이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

통상 두 가지 에피소드를 병치하는 스토리 구조를 가지고 있던 ‘지붕 뚫고 하이킥’은 이제 하나는 전형적인 코미디를,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이들의 멜로를 병치시키곤 한다. 이 희비극의 교차가 가져오는 효과는 분명히 있다. 그것은 적절한 균형만 맞춰진다면 희극과 비극 양쪽을 모두 강화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웃음 속에서 발견하는 눈물, 눈물 속에서 찾아지는 웃음은 더 큰 효과를 발휘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균형을 맞췄을 때의 이야기다. 이 시트콤의 멜로가 코미디와 이질적이지 않게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그 전개에 있어서 적당한 거리를 두었기 때문이다. 초반부 세경에게 마음을 전하는 준혁은 멜로 특유의 가슴앓이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녀를 가르쳐주기 위해 저 스스로 안하던 공부를 하는 그 모습을 통해서였다. 정음과 지훈의 사랑은 불꽃처럼 타오른 것이 아니라, 늘 툭탁거리며 싸우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유일하게 진짜 멜로의 틀로 사랑을 보여준 이는 세경이었다. 그녀는 이 시트콤에서 정극을 연기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하지만 멜로가 무르익으면서 지훈에 의해 상처를 입는 세경과, 그런 세경을 점점 안타깝게 바라보는 준혁이 전면에 드러나면서 이 시트콤은 때론 웃음보다 눈물을 더 많이 보여주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쿨한 관계가 조금씩 사라지고 인물들이 서로 끈끈해지기 시작하자, 이제 시트콤으로서의 거리두기는 가끔씩 그 선을 넘는다. 채플린이 말한 대로 멀리서 바라봐야 할 시선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들의 마음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한 것.

이것은 시트콤의 새로운 실험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간 시트콤은 드라마가 아닌 예능의 하나로 치부되며 폄하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이 시트콤의 코미디와 드라마를 넘나드는 희비극의 형식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러한 편견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처럼 코미디에 멜로가 깊숙이 자리하게 된 데는 더 단순한 이유가 자리하고 있다. 한마디로 멜로가 코미디보다 쉽다는 것이다.

정음과 지훈, 세경과 준혁의 안타까운 멜로의 에피소드들을 보면 기본적인 구도의 틀이 완성된 위에서 계속 변주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목도리라는 오브제는 이 멜로가 생겨나고 깊어져가는 과정에서 꽤 여러 번 사용되었고, 무심한 지훈과 그에게 상처받는 세경 그리고 그걸 바라보는 준혁의 에피소드도 계속 반복되었다. 이것은 멜로의 틀이다. 구도의 완성, 상황의 반복을 통한 감정의 몰입.

하지만 매번 새로운 아이디어로 웃음을 만들어내야 하는 코미디는 상황이 다르다. 그것은 전적으로 아이디어에 의해 좌우되는 것들이다. 게다가 매일 방영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이 시트콤이 짊어져야 하는 짐의 무게를 가늠하게 만든다. 매일 같이 새로운 상황의 웃음 코드를 뽑아내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다. 그러니 멜로는 물론 이 시트콤의 별미 같은 맛을 주지만, 또한 어쩌면 이 시트콤 제작자들에게는 겨우 숨 돌릴 수 있는 여지를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

많은 드라마 작가들은 말한다. 사실 웃음을 만드는 것이 눈물을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그래서 시트콤에 대한 낮은 시선을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지붕 뚫고 하이킥’이 가진 희비극이 말해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웃음은 멜로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 시트콤은 드라마와 비교해 절대 쉽거나 가치가 떨어지는 작업이 아니다. 드라마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제작비로 매일 편성되어 지옥 같은 제작의 고통을 감내하게 만드는 그 시선에도, 마치 시트콤을 하나의 그저 그런 쉬운 작업으로 바라보는 그 낮은 시선이 들어가 있는 건 아닐까.

황정음의 신종 플루 감염으로 '지붕 뚫고 하이킥'이 한 주를 스페셜로 대체한다고 한다. 물론 이 시트콤의 한 팬으로서 한 주의 안타까움이 있지만 어쩌면 이것은 열악한 제작여건 속에서도 끝없이 달리기만을 종용받아온 이 시트콤에 작은 재충전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나의 시트콤이 드라마 이상의 대중적 지지도와 완성도를 가지고 있는 ‘지붕 뚫고 하이킥’. 그 희비극 속에 담겨진 고충을 이제는 이해해야할 때도 온 것 같다.

오현경과 정보석이 사투를 벌이는 그 장면을 멀리서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음 짓는 노부부처럼 우리는 어쩌면 전쟁 같은 제작현장의 상황을 생각하지 않은 채,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며 편안하게 웃음 짓고 있었는 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채플린의 말처럼, 시트콤의 제작여건도 마찬가지다. 멀리서 보면 즐겁게만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슬픈 현실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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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에 대한 편견을 깨는 착한 드라마, '별을 따다줘'

“별을 따다준다”는 말은 언뜻 듣기엔 유치하고 상투적으로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이 말을 늘 상투적으로만 사용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별을 따다줘’라는 드라마가 이 말을 다시 시청자들에게 건네는 방식은 자못 도전적이다. 우리가 상투로 생각하던 그 말에 대한 작가의 동심 같은 순수한 진정성이 절절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별을 따다줘”라는 말을 유치하게 여기는 이제는 어른이 되어버린 시청자들에게, 그 말이 본래는 감동적인 것이라는 걸 알게 해주는 드라마다.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부모가 모두 하늘의 별이 되어버리고 갑자기 혹처럼 달리게 된 다섯 명의 동생들을 데리고 살아내야 하는 진빨강(최정원)은 절망적이다. 자기 하나도 건사하지 못할 정도로 철없이 살아온 그녀에게, 가장의 책무가 내려진 것. 집도 절도 없는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길거리를 떠돌다, 원강하(김지훈)의 집의 가정부로 아이들을 숨긴 채 들어온다. 회사에서는 꼴찌 보험설계사, 가정부로서도 빵점인 그녀는 아이들과의 생존을 위해 할 짓 안할 짓 다하지만 나아지는 건 없어 보인다.

아직 아기인 막내를 짐처럼 등에 업고, 벤치에 앉아 절망에 빠져있는 그녀. 그 때 마치 하늘의 별이 된 부모가 건네는 말에 대한 대답처럼 막내의 옹알이가 들려온다. “별을 따다줘.” 그것은 어쩌면 그녀의 마음이 만들어낸 환청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하지 않은 그 옹알이를 듣는 순간, 진빨강은 절망을 뚫고 올라오는 희망의 빛을 보게 된다. 어찌 현실에서 별을 따다 줄 수 있겠냐마는 그 말은 진빨강의 마음 속에 있던 짐을 희망으로 바꿔버린다. 부양해야할 짐으로만 생각해왔던 아이들은 이제 그녀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된다. “그래 저 별 다 따다 줄께!”하고 진빨강은 소리친다.

‘별을 따다줘’는 짐처럼 거치적거리게 생각되던 가족이라는 존재가 바로 자신이 살아가는 힘의 원천임을 말해주는 드라마다. 남겨진 다섯 명의 아이들은 그렇게 먼저 진빨강의 마음 속으로 들어와 그녀를 바꾸어놓는다. 남자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면서 친구의 등이나 쳐먹던(?) 그녀는 달라진다. 살아가야할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타인(혹은 타인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을 가족처럼 대하기 시작하면서 자신만을 생각하며 물기 없이 살아가던 그녀의 삶에는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 아이들이 바꿔놓는 존재가 진빨강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들은 그 스스로 주변에 벽을 치고 살아가는 원강하의 영역으로 자꾸만 침범해 들어온다. 원강하의 집은 피도 눈물도 없는 그의 마음을 똑같이 그려낸다. 그는 가정부로 들어온 진빨강에게 늘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어야 하고, 음식도 입맛에 정확히 맞춰야 하며, 자신이 있는 이층방에는 절대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투명인간처럼 일하라”고 말한다. 그러니 그 집의 말끔함은 원강하의 무미건조한 삶을 그대로 담아 보여준다.

그의 집으로 숨어들어온 아이들은 그러니까 그의 마음 속으로 숨어들어온 존재들이나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어느 날 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몽유병 증세가 있는 아이 진파랑(천보근)이 자신의 침대에 들어와 자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마음 속으로 조금씩 스며든다. 그러면서 그 마음은 조금씩 열린다. 그렇게 자신의 마음 속으로 불쑥 들어온 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원강하는 그 침범이 싫지만은 않다는 것을 조금씩 느끼게 된다.

이 드라마는 힘겨운 상황에 처한 이들을 보면 누구나 갖게 마련인 ‘측은지심’을 말한다. 소파에서 떨어지려 하는 아이를 보며 어떻게 지나칠 수 있으랴. 쓰러지려는 막내를 껴안아 올리고 우는 아이를 본능적으로 달래기 시작하는 원강하처럼, 드라마는 이 힘겨운 삶에 처한 진빨강을 향해 손을 내밀기 시작한다. 같은 집에 살아가는 원강하의 동생 원준하(신동욱)와 조카 우태규(이켠)는 그녀와 아이들이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하기 위해 형을 설득하려 한다. 회사의 팀장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에게 기회를 주려한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그녀가 짐이라 생각했던 아이들이 거꾸로 그녀에게 제공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아이들을 위해 “별을 따다주겠다”는 그 마음이 그녀를 변화시킨 것. 이것은 사회가 흔히 보여주는 약자에 대한 편견을 뒤집는다. 약자라 하면 늘 돌봐 주어야 할 존재로서만 여기지만, 사실 그들이 있어 우리가 살아간다는 생각을 우리는 하지 않는다. ‘별을 따다줘’는 이 이야기를 웃음의 코드로 유쾌하게 우리에게 전하는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과 ‘가문의 영광’을 쓴 정지우 작가의 작품들과 궤를 같이 한다. 정지우 작가의 작품들은 주로 유쾌한 멜로를 다루지만 그건 사랑이라기보다는 정, 어쩌면 인간애에 더 가깝게 그려진다. 그 안에는 부족한 듯 보이는 인간 군상들이 등장하지만 작가는 그들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 변화 가능성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정지우 작가의 작품을 훈훈하게 만드는 이유다. ‘별을 따다줘’는 그 훈훈함이 무미건조해져버린 우리네 마음까지 녹여주는 착한 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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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타’가 일과 사랑을 엮는 방식

‘파스타’와 ‘커피 프린스 1호점’은 여러 모로 닮았다. 먼저 음식점이 배경이라는 점이다. 커피 전문점과 파스타 전문점은 이 드라마들에 묘한 식욕을 돋우는 애피타이저들다. 그 공간에 포진한 꽃미남들과 그 속에 유일하게 서 있는 홍일점 주인공이라는 설정도 그렇다. 여기서 가능해지는 것은 일과 사랑의 공존이다. 일터라는 공간 속의 남과 여. 그것도 여러 명의 남자들과 여자 한 명이라는 설정은 이 여자 주인공의 일과 사랑이 가진 난관을 더 첨예하게 만든다. 남자들과 경쟁해야 하고, 또 그 남자들 중 하나와 사랑해야 한다.

하지만 ‘파스타’와 ‘커피 프린스 1호점’은 다르다. 가장 다른 점은 남자 주인공이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의 한결(공유)이나 한성(이선균)은 모두 한없이 여성들에게 부드러운 남자들이다. 게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꽃미남 종업원들도 모두 수직적인 위계질서와는 거리가 먼 수평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남자들이다. 하지만 최현욱(이선균)으로 대변되는 ‘파스타’의 라스페라에 있는 남자들은 위계질서 속에 서 있다. 마치 소리 지르는 게 일상인 듯 이들은 서로 자신의 위치가 높다고 으르렁댄다.

그러니 공간이 주는 분위기도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은 늘 낭만적이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주지만, ‘파스타’의 라스페라는 늘 전쟁터다. 주방장은 사장과 늘 대립하고, 직원들 위에 군림하며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새 주방장 현욱이 데려온 요리사들은 기존 라스페라의 요리사들과 대립하며 헤게모니 싸움을 벌인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유일한 여성인 서유경(공효진)은 편견에 얽매인 남성들의 세계와 부딪치며 살아남아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라스페라의 주방이 환기시키는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남성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져 왔던 직장의 세계, 그 위계질서의 세계 속에서 직장여성들이 겪어야 하는 상황을 라스페라의 주방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많아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우리 사회가 가진 남성 헤게모니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팀장 현욱의 마초적인 권위와 그 속에서 패배하지 않고 버텨내는 이제 막 인턴을 끝낸 사원(?) 서유경의 모습이 많은 직장인들에게 공감을 주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라스페라의 주방이 또한 주방장 현욱의 마음을 그대로 그려낸다는 점이다. 주방장이 바뀌면 주방의 풍경도 바뀌는 것은, 주방장의 마음이 고스란히 주방에 변화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현욱이 라스페라에 오면서 주방은 전쟁터가 된다. 그것은 현욱의 마음이 ‘전쟁중’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과 성공에 상처 입은 요리사는 그 마음 그대로 주방에서 감정을 지워버린다. 주방에서의 사랑이 용납되지 않는 것은 그 마음이 사랑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일과 사랑을 다루는 멜로드라마의 접점이 생겨난다. 주방장 현욱의 마음을 그대로 그려내는 라스페라의 주방에서 유일하게 살아남는 존재 서유경은, 바로 그대로 현욱의 마음 속에서 살아남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드라마 ‘파스타’는 일과 사랑을 다룸에 있어서 ‘커피 프린스 1호점’이 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맛을 낸다. 현실의 축소판으로서의 주방과 상처 입은 주방장의 마음을 대변하는 주방을 일치시킴으로써, 그 이야기가 사회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동시에 멜로의 틀을 벗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남자의 주방에서 살아남는 이야기와 그 남자의 마음을 여는 이야기가 서로 맞닿는 지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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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판타지+실용 > 논란

‘공부의 신’이 가진 현 교육제도에 대한 태도는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천하대(사실상 서울대의 다른 말이나 마찬가지다)를 가기 위해 만들어진 특별반은 전형적인 우리네 교육 정책의 엘리트주의를 그대로 답습한다. 특별반에 들어온 네 명의 아이들은 그래도 선택받은 아이들이지만 나머지 병문고 아이들은 거꾸로 버려진 아이들과 마찬가지다. 물론 천하대 특별반을 만드는 강석호(김수로) 변호사는, 늘 그 엘리트들이 만들어놓은 룰 속에서 패배자로 남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 룰을 바꾸기 위해서 천하대에 가야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을 위해 엘리트 교육 시스템을 답습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또한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이라는 본래의 뜻을 갖고 있는 ‘공부’라는 말이 이 드라마가 내세우고 있는 ‘공부의 신’과 잘 어울리는지도 의문이다. 항간에는 ‘공부의 신’이 아니라 ‘입시의 신’이 더 맞는 표현이라는 비아냥도 있다. 실제로 이 드라마에서는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히는 것을 보여주기 보다는 입시를 위한 문제풀기의 방법을 익히는 과정을 주로 보여준다. 문제풀기와 실제 배움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런 논란거리들에서 자유롭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가 대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거꾸로 현실에서 찾아진다. 아마 드라마가 우리네 교육 현실을 실감나게 다루지 않고 그저 뜬구름 잡는 이상만 떠들어댔다면 어땠을까. 그것이 이상적일지는 모르지만 아무런 공감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네 교육현실은 한창 꿈꾸어야 할 아이들이 하루 네 시간씩 자며 입시경쟁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그러니 이 참담한 교육현실을 외면하고 교육을 다루는 드라마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공부의 신’은 바로 그 현실을 그대로 가져와 드라마의 바탕으로 깔아놓는다. 그리고 이 현실 위에 판타지를 그려 넣는다. 만일 현실을 현실 그대로 리얼리티를 바탕으로 그려냈다면 ‘공부의 신’은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공부를 해야할 시간에, 혹은 아이들 공부할 시간에 굳이 이 드라마를 보며 현실의 씁쓸함을 곱씹을 시청자가 얼마나 있을까.

하지만 이 드라마는 현실 상황 위에 그것을 넘어서는 판타지를 집어넣음으로써 시청자들이 현 교육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대리 체험하는 쾌감을 제공했다. 물론 ‘수학의 신’ 차기봉(변희봉) 선생이나, 춤과 노래를 하는 앤써니 양(이병준) 같은 영어 선생이 학교에서(아마 학원에서는 가능할 것이지만)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어쨌든 천하대 특별반에 있는 네 명의 아이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갖고 있고, 그 사연을 넘어서 도전하는 모습과 이를 도와주는 선생들의 이야기는 지친 수험생과 부모들에게 드라마가 주는 작은 위안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여기에 ‘공부의 신’은 보다 강력한 양념을 하나 더 추가했다. 그것은 판타지 위에 지극히 실용적인 공부의 방법(문제 푸는 방법이 더 많지만 이것이 더 실용적이다)들을 제공한 것. 영어문장을 독해할 때, “단어를 모르더라도 찾아보지 말고 일단 때려 맞춰라”라는 방법이나, 수학문제를 풀 때,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서로 문제를 내보는 방식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러니 이 실용적인 정보들은 판타지와 만나면서, 판타지를 더욱 강화하는 힘을 부여한다. 저렇게 공부하면 나도 천하대(사실은 명문대)에 갈 수 있지 않을까. 물론 현실은 다르지만.

‘공부의 신’의 성공방정식은 ‘현실+판타지+실용 > 논란’이다. 즉 현실을 바탕으로 제시하고 그 위에 판타지를 그려 넣은 후, 추가로 실용적인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스토리가 강력한 힘을 발휘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힘은 이 드라마가 “기존 잘못된 교육정책을 결국은 인정하고 심지어는 부추기고 있다”는 그 논란의 불씨마저 압도한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 대해 우리는 양가감정을 갖게 된다. 드라마의 내용에 강력히 공감하면서도(현실적인 공감),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그 마음. 드라마의 성공이 그만큼 현실의 실패를 말해주는 그 씁쓸한 상황, 이것이 ‘공부의 신’의 성공이 우리에게 환기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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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 야구단', 야구는 예능과 어떻게 만났나

찰떡궁합이다. 각본 없는 드라마인 스포츠와, 역시 각본 없는 웃음을 주는 예능이 잘 어울린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야구와 예능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천하무적 야구단'이 처음 시작되었을 때, 아마도 어디서부터 해야할 지 난감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달려라 슛돌이'의 축구와 '천하무적 야구단'의 야구는 확실히 다르다. 축구는 공을 상대방 골에 넣으면 되는 비교적 간단한(?) 룰을 갖고 있지만, 야구는 책으로 공부해야 할 정도로 룰이 복잡하니까.

예능 프로그램이 일부 야구팬들만을 대상으로 할 수는 없는 노릇. '천하무적 야구단'은 복잡한 룰을 전혀 야구를 접해보지 못한 일반인들까지 대상으로 보여주면서, 야구도 하고 또 예능도 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게다가 '천하무적 야구단'에 들어온 인물들도 야구를 아예 모르는 초보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마르코는 룰 자체를 몰랐고, 김준은 겉보기와 달리 거품(?)이었으며, 마리오는 외모는 메이저 리그였지만 실력은 동네야구 수준이었다.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야구 룰은 알고 있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 늙은 사자 이하늘, 의욕은 충만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과욕이 되곤 하는 김창렬, 나이 어린 동호, 부실한 몸의 한민관... 그나마 야구를 곧잘 하는 오지호와 김성수가 있었지만, 그것은 공격 이야기고 수비로 들어가면 이들 역시 구멍이었다.

그러니 전적은 지금껏 3승이 고작인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바로 이 해야할 일이 산적해 있다는 점이 '천하무적 야구단'에는 오히려 약이 되었다. 이 예능은 바로 이 실제 야구와 현실인 예능 사이의 거리만큼 리얼 버라이어티쇼로서의 성장스토리를 보여줄 수 있었다. 매번 마르코를 내세워 경기 룰을 가지고 퀴즈를 내고, 후에는 백지영을 단장으로 포섭해 상대적으로 야구에 관심이 덜 한 여성 시청층까지 공략했다. 그들이 차근차근 룰을 공부해가고 경기를 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야구는 조금씩 시청자들에게 친숙해지기 시작했다. 일반인들에게 결코 쉽지 않은 야구는 오히려 축구보다 좋은 리얼 버라이어티의 소재가 되었던 것.

바로 이 점은 야구라는 스포츠에도 그대로 큰 도움을 주었다. 야구라는 조금은 거리가 있어보이는 스포츠의 저변을 넓히는데 이만큼 강력한 방법은 없었던 것. 리얼 예능이 가진 독특한 스토리 방식, 즉 웃음을 주면서도 쉬운 것에서부터 차츰 복잡한 것으로까지 이야기를 넓혀나가는 이 스토리의 힘은 야구를 보다 가까이 시청자들 앞에 가져다 놓았다. 프로야구협회에서 '천하무적 야구단'에 상을 주고, 7명의 내로라하는 프로야구 감독들이 이들을 위한 일일코치를 자처하는 등의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두산 베어스의 김경문 감독은 가르쳐주는 입장에서도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거듭 전했다. 그리고 이 감독들의 일일코치를 담은 영상들은 하나의 쉽고 재밌는 야구교본을 방불케 했다.

야구의 저변을 넓히는 것 이외의 효과로서 프로야구경기에 '천하무적 야구단'이 부여한 '야구에 대한 실감'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아마도 '천하무적 야구단'을 시청해온 분들이라면 2009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가 조금은 다르게 느껴졌을 것이다. 우리는 '천하무적 야구단'이라는 리얼 스포츠 버라이어티쇼를 통해 야구가 누구나 공을 던지고, 때릴 수 있는 그런 쉬운 경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프로야구에서 흔히 보이던 더블 플레이 하나에도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고 감탄을 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 프로야구가 보여주는 실책 없는 경기나 담장을 넘기는 홈런에 남다른 실감을 가질 수 있었다.

'천하무적 야구단', 이 야구와 예능의 만남은 양쪽에 모두 행복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예능은 특별한 이야기를 구성하지 않고도 야구 자체가 가진 재미를 통해 특유의 리얼 성장 스토리를 보여줄 수 있었고, 야구는 이 예능을 통해 야구라는 스포츠가 가진 매력을 보다 많은 이들에게 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이 좌충우돌 야구단은 한 발 더 나아가 보다 큰 꿈을 꾸기 시작했다. 사회인 야구를 위해 '꿈의 구장'을 지으려는 것. 야구와 이 예능이 가진 찰떡궁합의 행복한 공존을 통해 볼 때, 이것이 결코 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꿈은 이루어진다. 꿈꾼다는 것만으로도 현실적인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특히 꿈을 향해 달려가는 성장 스토리를 근간으로 삼는 리얼 예능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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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이 만들어낸 마이너리티 감성

만일 당신이 사회의 정신적인 뇌관을 건드리는 테러리스트라면, 우리 사회만큼 간단한 테러 목표도 없을 것이다. 그저 남자라는 단어와 '루저'라는 단어를 붙여 넣기만 하면 엄청난 파장이 일어날 테니까. '미녀들의 수다'의 한 여대생이 "남자 키 180cm 이하면 루저"라는 말 한 마디가 일으킨 대폭발(?)은 지금 우리 사회가 이 부분에 있어서 얼마나 민감해져 있는가를 잘 말해준다.

불황에 남녀 구분이 있을까마는 아마도 상대적인 박탈감은 남성들이 더 할 것이다. 본래 높은 위치에 계시던 분이 진창으로 나서야 그 힘겨움을 더 느끼게 되는 법 아닌가. 남성들은 가부장제적 사회 속에서 이제 조금씩 남녀평등의 사회로 이행해가고 있는 중이고, 차츰 자신들이 가졌던 이성적 능력보다, 여성성이 가진 능력이 이 감성적인 시대에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을 인정해가고 있는 중이다. 물론 그것은 바람직한 방향이지만 그렇다고 그 박탈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지독한 불황은 남성들의 어깨를 더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실로 이 계속된 불황 속에서 우리네 남성들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왔다. 그들은 이 이행기에 여전히 가장이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있으면서도, 그 지위는 누리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있다. 청년실업에서부터 조기퇴직까지 이른바 가장으로서의 남성들의 목은 댕겅댕겅 잘려나갔다. 그러니 이 가뜩이나 힘겨운 상황에 처한 남성들에게 의도적이든 우연이든 붙여진 '루저'라는 단어는 뇌관이 될 수밖에 없다.

'루저'는 무능력자에 회생 불가능한 폐인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상대적인 의미인 위너들과 비교될 때 분노감은 더 커지게 된다. 즉 세상은 위너들의 공고한 시스템으로 굴러가고 있고 '루저'들은 늘 질 수밖에 없는 패배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불평등한 사회 구조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루저'라는 말이 그저 한 때의 잘못 발화된 한 여대생의 실수담이 아니라는 것은, 유해진과 김혜수의 열애사실과 함께 드러난다. 유해진은 늘 조연 자리에 서 있던 인물이다. 그는 '전우치'에서 전우치로 등장하는 강동원이 아니다. 그는 전우치가 데리고 다니는 개 초랭이의 분신으로 등장한다. 그런 그가 늘 '엣지있게' 자신만의 스타일을 드러내는 당당한 미인 김혜수의 남자친구라는 사실은 고개 숙인 남성들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

그러고 보니 작년 한 해 눈에 띄게 약진한 예능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의 캐릭터들이 대부분 저마다 '대한민국 평균 이하'를 주창하던 남성들이라는 사실이 도드라져 보인다. 물론 '루저'라 지목되지는 않았지만 그 낮게 되어버린 남성들의 눈물겨운 도전과 노력에 우리는 감동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남성과 '루저'가 만나면 폭탄이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만큼 구조적으로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 남성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하면 '루저'라는 말조차 농담처럼 웃으며 들을 수 있는 사회가 될까. 아직은 요원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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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태터앤미디어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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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저'라는 말이 그저 한 때의 잘못 발화된 한 여대생의 실수담이 아니라는 것은, 유해진과 김혜수의 열애사실에서 드러난다 (…) 그가 늘 '엣지있게' 자신만의 스타일을 드러내는 당당한 미인 김혜수의 남자친구라는 사실은 고개 숙인 남성들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

    2010/01/24 01:12

주말예능이 주말극보다 더 좋은 이유

드라마가 가지는 진정성과 리얼리티는 이제 옛말이 된 걸까. 주중의 드라마들이 그 두 가지를 모두 추구하고 있는 것과는 상반되게, 시청률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수상한 삼형제'나 '천만번 사랑해' 같은 주말드라마들은 이 진정성과 리얼리티를 이제는 포기한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 오히려 진정성과 리얼리티는 적어도 주말에는 드라마보다 예능에서 찾아진다. '무한도전'이나 '1박2일' 같은 리얼 버라이어티가 전하는 이야기가 이들 드라마보다 더 진정성이 있고 리얼리티가 있다는 이야기다. 지금 드라마의 퇴행은 어디까지 가고 있는 것일까.

주말 전체 시청률의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수상한 삼형제'는 3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것이 과연 저녁 8시라는 시간대에 방영되어도 좋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자극적이다. 문영남 작가의 개성이 그대로 묻어있는 이 작품은 해체되어가는 가족의 지지고 볶는(?) 이야기가 끝없이 반복된다. 이 드라마 속에서 연적은 거의 범죄에 가까운 수준으로 사랑을 방해하고, 시어머니는 학대에 가까운 수준으로 착한 며느리를 구박하고, 새로 들어온 못된 며느리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손아래 며느리를 골탕 먹인다.

지질한 캐릭터들은 이 드라마를 움직이는 핵심적인 동인이 된다. 이 민폐형 캐릭터들은 열심히 살아가려는 다른 가족의 삶을 파탄 낼 정도의 패악을 보여준다. 이들을 대하는 부모의 태도는 두 가지다. 포기하거나, 그래도 제 자식이라고 두둔하거나. 그러니 그걸 바라보고 있는 시청자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질 수밖에 없다. 가족드라마의 가족은 시청자에게 하나의 대안가족처럼 감정이입이 되기 마련인데, 그 속에 물을 흐리는 미꾸라지 한 마리가 끊임없이 문제를 만들어내는 식이다.

물론 가족드라마는 이러한 가족 간의 갈등을 다루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 갈등은 현재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때 공감대가 형성된다. '수상한 삼형제'의 갈등은 그러나 여전히 시대착오적이라고 할 정도로 과거의 것들을 반복하고 있다. 불륜, 장남에 대한 기대와 그 기대가 만드는 짐, 천편일률적인 고부 갈등 등등. 게다가 이 드라마의 갈등 상황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 자체에 있다는 점에서 작위적인 느낌마저 준다. 즉 "저런 인간은 늘 저렇게 살아 간다"는 상투적이고 인위적인 설정이 갈등을 만들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활용된다는 점이다.

물론 공감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가족드라마에서 그토록 예전부터 반복되어온 갈등의 양상이다. 현재적인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이 반복적인 갈등 상황을 제시해 시청자의 눈과 귀를 붙잡아 놓는 이 드라마의 이야기는 퇴행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주말 드라마에서 두 번째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천만번 사랑해'도 마찬가지다. 이 드라마는 대리모라는 설정을 활용해 전형적인 모성 신파극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 관계를 살펴보면 실로 거의 거미줄 같은 복잡함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대리모를 해서 아이를 준 집안이 하필 자신이 사랑해 결혼한 남자의 집안이라는 사실, 한 남자를 두고 자매가 동시에 사랑하게 되었던 상황, 대리모를 주선한 여자의 딸이 하필 그 아이를 준 남자와 불륜관계가 되는 상황 등은 아무리 양보해도 지나친 우연의 남발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복잡하게 얽어 놓았기 때문에 물론 갈등 상황은 끊임없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은 상식적인 선을 이미 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지금 주말극의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수상한 삼형제'나 '천만번 사랑해'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작위적이라는 것이고, 그 주창하는 메시지 역시 현재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는 이미 닳고 닳은 것들이라는 점이다. 이 주말극들이 가지는 퇴행적인 모습에 주말 예능이 보여주는 리얼리티와 진정성은 많은 이야기를 해준다. '무한도전'이 보여주는 실험성, '1박2일'이 그려내는 작위성 없는 리얼리티, '일밤'이 보여주는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못지않은 진정성. 이들 주말극이 갖지 못한 것들을 주말 예능들이 갖고 있는 형국이다. 주말극, 주말 예능처럼은 못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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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발광'의 궁금증, 꼭 쓸모 있어야 돼?

도대체 이런 실험과 도전은 왜 하는 것일까. 지금 TV에서는 '자체발광'이라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요상한 도전이 펼쳐지고 있다. 파일럿 프로그램에서 시도된 것은 오리 배를 타고 완도에서 제주도까지, 즉 바다를 건너는 도전. 이 도전이 시작된 것은 한 신입사원이 던진 질문 때문이었다. 무동력으로 태평양을 건넌 25세 미국 청년들의 이야기를 접한 그는 "자가 동력만으로 바다를 건널 수 있을까?"하는 궁금증을 가지게 된 것. 결국 이 호기심 때문에 그는 죽을 고생을 해가며 오래 배의 페달을 밟아야 했다. 결과는? 오리 배의 처참한 침몰로 끝이 났다.

'자체발광'은 파일럿에 이어 본격적인 실험과 도전에 돌입했다. "화장 어디까지 가능할까'하는 의문 때문에 실험자들은 자이로 드롭에 올라타고 팽팽 돌아가는 그 속에서 화장을 시도하는 엽기적인(?) 실험을 선보였다. 결과는 엉망진창. 하지만 그 실험이 주는 웃음만큼은 신선했다. "정말 사슴이 썰매를 끌 수 있을까"하는 크리스마스에 즈음해 생긴 궁금증을 풀기 위해 아빠 산타 정종철은 명동에서 청계천을 거쳐 왕십리까지 사슴을 끌어야 했다.

궁금증을 위해서라면 무협소설에서나 보았던 소림사로 날아가는 일도 이들은 서슴지 않는다. "당랑권과 취권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하는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선발된 2명의 도전자는 소림사에서 죽기 살기로 수련을 해야 했다. 한편 사진만 찍었다 하면 눈을 감는 그 굴욕의 순간을 넘어서기 위해 도전자들은 양파를 썰며, 물 속에서 그리고 번지점프에서 뛰어내리며 사진을 찍어야 했다.

'자체발광'의 '발광'은 물론 스스로 밝힌다(光)는 뜻이지만, 거기에는 "미쳤다(狂)'는 뉘앙스도 포함되어 있다. 그만큼 어떤 궁금증은 쓸모 있게 밝혀지지만(실험光), 어떤 궁금증은 쓸모없어 보이고(도전狂),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한 도전과 실험은 생각보다 엄청나다. 쓸데없이 고생한다는 '생고생'이라는 말은 여기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다. 그러니 이런 형식은 시사교양 프로그램보다는 예능 프로그램이라는 선입견이 든다. 하지만 분명, '자체발광'은 예능이 아니라 시사교양 프로그램이다. 즉 무모한 도전이지만 '자체발광'은 어떤 식으로든 궁금증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바로 이 부분, 예능과 교양 사이에 걸쳐있는 지점이 '자체발광'이 스스로 빛을 발하는 이유가 된다. 교양인 줄 알고 쳐다봤더니 웬만한 예능보다 더 웃기는 도전과제가 제시된다. 도전과 실험은 리얼 버라이어티쇼를 연상시키고, 그 회의 궁금증을 제시하는 영상물은 독특한 '하오체'의 내레이션과 공감을 자아내는 편집으로 마치 '남녀탐구생활'의 다른 버전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렇다고 '자체발광'이 교양이 갖는 정보성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 정보가 갖는 실용적인 가치는 물론 낮은 것이지만.

이 실용적인 가치를 벗어난 질문과 거기에 엄청난 도전과 실험으로 답변을 제공하는 '자체발광'은 작금의 정보에 대한 우리의 기존 관념을 깨뜨린다. 즉 정보라고 하면 그것의 실용가치를 떠올리던 것에서, 이제는 즐거움(fun)의 가치로의 이행을 보게 되는 것이다. '스폰지'가 실용성과 상관없이 정보가 가진 즐거움을 퀴즈 형식으로 프로그램화했다면, '자체발광'은 그것을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갖는 실험 형식으로 프로그램화했다고 볼 수 있다.

궁금증이 꼭 쓸모 있을 필요는 없다. 재미있으면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정보에 대한 태도는 우리가 늘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 접속하면서 해오던 익숙한 것들이 아닌가. '자체발광'이 왠만한 예능을 능가하는 재미를 주는 이유는 정보에 대한 실용적 접근을 벗어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어쩌면 지금 시사교양 프로그램들이 변해가고 있고 또 앞으로 변해가야 할 방향을 예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 정보는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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