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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말 사극이 가진 스토리텔링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김이영 작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사극작가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출중한 외모(?)에 이 분이 그 '이산'을 썼던 분이 맞나 의구심마저 들었었죠. 자세히 보니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습니다. "많이 피곤해 보인다"고 했더니 '동이'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병훈 감독님이 '워낙 큰 산'이라 그걸 따라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더군요.

그랬습니다. 김이영 작가는 이병훈 감독님이 워낙 꼼꼼하고 완벽하게 모든 걸 준비하는 분이라 거기에 일일이 보조를 맞추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친다고 솔직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이병훈 감독님에 대한 존경심에서 우러나온 이야기였습니다. 스스로도 그런 과정을 통해 부쩍 성장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고 했죠.

먼저 사극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여자아이가 음식을 훔쳐먹다 주인에게 잡힌 한 미드의 예를 들면서, 이처럼 "끊임없이 인물이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게 되고 그 상황을 빠져나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했습니다.

'동이'를 보면서 떠오른 것도 바로 그 때 김이영 작가가 예를 들어 말했던 그 어린 여자아이였습니다. 어린 동이(김유정)는 누명에 의해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그녀의 주변에 늘 있던 아저씨들을 잃고 홀로 벼랑 끝에 서게되죠. 천민 출신이라는 상황에서도 누구 못지 않게 행복해했던 꼬마 여자아이는 이렇게 그 행복마저 빼앗긴 채, 풍비박산난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무서워. 나도 따라 가고 싶어"하고 말합니다. 아이가 그 텅빈 집을 바라볼 때,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극은 어떤 방향성을 갖게 됩니다. 균형이 깨진 아이의 삶은 다시 균형을 찾기 위해 고난을 이겨내려 하죠.

그리고 김이영 작가는 이런 고난 끝에는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주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또 "너무 힘겨운 고난을 오래도록 지속시키지는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고도 했죠. 그것은 캐릭터에게도, 또 보는 시청자들에게도 힘겨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이는 이제 바닥의 삶에서 한 걸음씩 보상 받으며 성장해나갈 것입니다. 그것이 성장드라마를 가진 퓨전사극의 매력이죠.

사극의 소재를 어떻게 발굴하느냐는 질문에는 "50부작의 이야기성이 있는가"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했습니다. 즉 그만큼 파란만장한 삶이 존재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충분히 성장과정을 보일 만큼 주인공이 낮은 곳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동이'는 그 소재를 숙빈 최씨에서 찾았죠. 천민에서 출발해 숙종의 후궁이 되고, 인현왕후와 장희빈 사이에서 벌어지는 피비린내나는 왕실의 싸움 속에서 살아남아 영조를 낳는 인물이죠.

역사란 늘 왕가의 이야기에 머물기에 그 속에 숨겨져 나타나지 않은 숙빈 최씨의 이야기를 상상력으로 발굴해내는 것은 실로 흥미로운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영조를 낳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숙빈 최씨의 그 발굴되지 않은 이야기는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이니까요. 항간에는 이 작품이 결국에는 또다른 장희빈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이것은 포커스가 숙빈 최씨의 성장에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은 데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이영 작가는 무엇보다 사극은 "극성이 강하다"는 것이 장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옛이야기의 특징이 사건 자체가 크고 다이내믹하다는 것이죠. 하지만 또한 이 극성이 강하다는 장점은 약점이 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사건이 계속 해서 벌어지고 진행되어 가다보면 정작 인물이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고 했죠. 즉 인물의 감정선이 사건과 균형을 맞추지 못하면 사건만 겉도는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캐릭터와 사건의 적절한 균형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동이'의 초반부는 사건전개가 빠른 데다, 추리적인 연출 스타일이 겹쳐져 조금은 따라가기 힘든 구석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동이의 아버지가 결계의 수장으로 등장하자마자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고 결국 죽음까지 맞이하게 되는 긴박한 과정은 시청자가 그 인물에 몰입되지 못한 상태에서 벌어져 그만큼의 효과를 주지 못했죠. 즉 '동이'는 초반부에 좀더 인물에 시청자들을 몰입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긴 '동이'는 홀홀단신으로 남게 된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김이영 작가는 캐릭터를 고난에 빠뜨릴 때, 반드시 그 해결책을 가진 상태에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즉 고난에 빠진 캐릭터와 같이 생각하면서 가장 적합한 해결책을 스스로 찾는다고 했죠. 그것은 결국 캐릭터의 고난 해결책이 김이영 작가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동이'를 통해 김이영 작가는 스스로를 그 지난한 고난의 작업(?) 속으로 집어넣고 헤쳐나오려 하는 것이죠. 그 끝에는 '동이'가 보여주려는 것처럼 고난을 넘어선 자의 충분한 성장이 그녀에게도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김이영 작가가 말한 사극의 힘이란 결국 작가 스스로 그 극한의 상황 속에 스스로를 던져넣는데서(그것을 빠져나오려는 노력에서) 생겨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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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떴2'가 가진 공감 없는 스토리의 문제

새로운 구성원으로 시작한 '패밀리가 떴다(이하 패떴)'. 그 추락이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때는 주말 예능의 지존의 자리까지 있었던 '패떴'은 차츰 하향세의 길을 걸어오다 결국 구성원 전원을 교체하고 '패떴2'로 변화를 꾀했다. '패떴2'의 첫 방은 16% 남짓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기대감을 높였으나 현재는 반 토막에도 못 미치는 7.5%에 머물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결과를 가져온 걸까.

먼저 지목되는 것은 유재석, 이효리 같은 '패떴' 1기 멤버들의 공백이 너무 크다는 것이다. 사실이다. 지금 '패떴2'에는 전체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굴러가게 할 수 있는 이들 같은 존재가 없다. 김원희가 나서서 상황을 이끌려는 노력이 보이나, 그것은 유재석이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지가 않아 마치 리얼 예능에서 토크쇼를 진행하는 듯한 어색함이 있다. 지상렬은 거의 목숨을 걸고(?) 궂은일을 도맡아하는 열성을 보이지만 그걸 효과적으로 받아주는 멤버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저 열심히 한다는 느낌만을 전할 뿐이다.

애초에 기대했던 조권, 윤아, 택연은 이미 프로그램밖에 있던 캐릭터를 프로그램 속으로 가져와 반복해서 보여줌으로써 그 이미지 소모가 너무 빨라지고 있다. 조권은 여기서도 여전히 깝춤을 추고, 윤아는 '분장실의 강선생님' 흉내를 내며, 택연은 초콜릿 복근을 과시한다. 매화아가씨-매실총각을 뽑는 장면에서 이들이 남장여자, 여장남자를 했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 조권의 여장은 결국 깝춤으로 이어졌고, 윤아의 남장은 의외의 보이쉬함을 통한 털털함을 재확인해줬으며, 택연은 결국 근육 과시로 마무리되었다.

거의 전 멤버가 프로그램 속에서 캐릭터를 세우지 못하고, 대신 이미 갖고 있던 캐릭터를 반복하는 것은 '패떴2'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만든다. '패떴'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연예인들이 유사가족으로 뭉쳐졌을 때, 그 새로운 관계 속에서 의외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재미를 주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외부의 캐릭터를 그저 내부로 가져올 때, 그것은 '패떴'의 정체성을 공고히 해주는 게 아니고, 그 캐릭터를 반복하는 출연자의 정체성만 소비하게 된다. 즉 '패떴2'에서 고유의 특징을 만들어내기 어려워지게 되는 셈이다. 유일하게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는 인물은 윤상현이지만 예능 초보로서 그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문제를 더욱 가중시키는 것은 연출의 문제다. 지금 '패떴2'에는 자연스러운 스토리가 부재하다. 어느 마을에 가는 것에 대한 설명도 없고, 그 곳에서 게임을 반복하는 것에도 어떤 이유를 찾기가 어렵다. 이것은 단지 프로그램의 의미만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게임 하나를 하더라도 그 과정을 통해 시청자가 그 게임에 빠져들 수 있게 해줘야 하는데, 맥락 없는 게임은 시청자들의 맥빠지게 만든다. 아침에 기상시켜 갑자기 차에 타라고 한 후, 강변에서 씨름을 시키는 것은, 출연진을 고생시키는 것 이외의 공감을 찾기 어렵게 한다. 씨름부 아이들과의 아침 대결이 준비되었다면(어차피 이건 인위적인 것이다), 사전에 왜 그들이 대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 정도는 암시되었어야 한다.

이것은 매화아가씨-매실총각 콘테스트나 벗굴 채취에서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이곳의 명물인 매화와 매실 그리고 벗굴을 홍보하기 위한 것은 알겠지만, 그 과정에서 이들이 왜 게임을 통해 이런 생고생을 해야 하는지는 잘 이해하기가 어렵다. 지금 '패떴2'는 이처럼 공감이 형성되기 이전에 인물들을 이리저리 끌고 다님으로써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도 효과는 나오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 '패떴1'에서는 저녁 먹는 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재미를 주었는데, 지금은 눈밭과 진창에 뒹굴고, 벗굴 채취를 위해 차가운 물 속에 들어가도 그다지 재미를 주지 못한다.

이것은 '패떴1'이 가졌었던 공감대를 '패떴2'가 가져오지 못한 결과다. '패떴1'은 그 따뜻한 가족적인 분위기가 가장 큰 공감대였다. 그 분위기 위에서 서로 툭탁대지만 그것이 장난 같은 즐거운 놀이처럼 아기자기한 맛을 주었던 것. 하지만 '패떴2'는 너무 비장하다. 윤아나 조권, 택연, 윤상현 같은 좋은 멤버들을 갖췄음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의 마음에 저들과 함께 여행을 가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는 공감대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이 즈음에서 떠올려야할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야심만만'이다. '야심만만'은 설문이라는 형식을 통해 초대 손님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재미를 선사했다. 어찌 보면 폭로의 우회형 방식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설문을 통해 바탕에 깔린 공감대가 있었다. '아 나도 저랬었지'하는 공감을 통해 출연자의 이야기에 시청자가 고개를 끄떡일 수 있었던 것. 하지만 '야심만만2'로 오면서 그 공감이 사라지고, 대신 자극적인 설정만 남게 되었을 때,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를 상기해봐야 할 것이다. '패떴2'는 왜 안타깝게도 '야심만만2'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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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외면한 낮은 자들의 죽음을 기억하라

‘추노’는 왜 그토록 많은 죽음을 보여주었을까. 혜원을 호위하던 백호(데니안), 명나라 출신 여자 자객 윤지(윤지민), 원손을 지키던 궁녀 필순(사현진)의 죽음은 소소한 것이었다. 죽을 때까지 세상을 저주한 천지호(성동일)의 죽음은 시청자들을 가장 안타깝게 했으며, 태하의 심복 한섬(조진웅)의 죽음은 시청자들을 울렸다. 본래 죽을 운명이었던 최장군(한정수)과 왕손이(김지석)는 극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순진하게 ‘노비들의 세상’을 꿈꾸던 개놈이(이두섭)나 끝봉이(조희봉)를 위시한 노비당 인물들은 한꺼번에 떼죽음을 당했다. 업복이(공형진)는 그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이경식(김응수)과 그 분(박기웅)을 죽이고 결국 죽음의 길로 들어섰고, 주인공 대길(장혁) 역시 사랑하는 여인 혜원과 이제는 같은 길을 걷게 된 송태하(오지호) 그리고 원손이 만들어갈 새로운 세상을 위해 죽는 길을 선택했다.

이처럼 드라마의 캐릭터들이 줄초상을 당한 경우가 있을까. 캐릭터는 일종의 시청자들이 몰입할 수 있는 대리자라는 점에서 그 캐릭터들의 연속된 죽음은 실로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따라서 ‘추노’의 줄초상에 대한 일부 시청자들의 비판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일까. ‘추노’는 엔딩에 공을 들였다. 실제 엔딩은 대길의 죽음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살아남은 초복(민지아)과 은실이 해를 바라보는 장면(이를 통해 이 실패한 혁명이 실패가 아니라는 전언을 남겼다)과 대길이 해를 향해 화살을 먹이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것도 아쉬웠는지 드라마가 완전히 끝난 그 자리에 왕손이와 최장군이 땅을 일구는 장면까지 삽입되었다. 그만큼 실패했지만 실패하지 않았고 죽었지만 죽은 게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을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캐릭터들은 죽었지만, 그 캐릭터들이 우리들의 기억 속에는 생생히 살아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캐릭터들의 죽음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도 결국 새드엔딩을 벗어나기는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이들의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이 사극이 가진 메시지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일도 아니다. 사실 우리는 수많은 사극 속에서 우리의 시선조차 받지 못하고 죽어간 많은 낮은 자들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전쟁 사극 속에서는 한 신에 수십에서 수백 명이 목숨을 잃지만 그들을 기억하는 이들은 없다. 말 그대로 ‘높은 자들’, 주인공들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다.

그런 사극과 비교해볼 때, 이 사극 속의 죽음은 실로 그 수가 적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만 그 죽음을 다루는 방식이 저들과는 달랐을 뿐이다. 그저 산 속 나무 둥치에 쓰러져 죽어간 낮은 자들을 ‘추노’는 하나하나 찾아가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그 자리에 이르렀는가를 보여주었다. 그러니 그 강도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여타의 사극이 지나쳐버린 이름 모를 낮은 자들의 죽음에 대한 조명. 역사가 외면한 그들을 기억하라는 것. ‘추노’의 줄초상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 이해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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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의 마지막 장면, 초복이와 은실이가 태양을 바라보며 앞으로 저 해가 누구의 것인가를 말하는 대목에서 문득 대학시절 읽었던 리얼리즘 소설을 떠올렸습니다. 제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소설들은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런 식의 비전을 중요하게 생각했죠. 비록 지금은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끝난 것은 아니다. 결국 도저한 역사의 흐름은 잘못된 역사를 바꿔 놓을 것이다.

제가 대학에 들어가던 87년도. 그 해에 저는 이한열의 죽음 옆에 있었습니다. 그다지 시위에는 관심이 없던 저였지만, 그 때는 모두 강의실을 뛰쳐나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선배 누님은 사과탄에 머리를 맞아 살갗이 썩어간다는 얘기까지 나돌았으니, 그 들끓는 젊은 피의 분노가 얼마나 컸던가는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딱 반 년 간의 일이었습니다. 6월 시청앞 광장으로 시민들이 모여들고 마치 혁명의 전야가 다가온 듯 흥분되던 그 시점에서 6.29 선언이 나왔죠. 모든 것이 끝나버린 듯, 광장에 모였던 이들은 다시 제 갈길로 사라졌습니다. 대학도 제 자리로 돌아갔고, 시위는 사그러들었습니다. 86학번 선배들은 허탈감에 빠진 듯 보였습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1년 전만해도 학교는 학교가 아니었답니다. 전경들이 교내로 들어와 여대생을 희롱하는 걸 매일 봐야했고, 교수가 강의하다 현장에서 체포되는 경우도 있었다니까요.

하지만 그건 모두 옛일로 사라져버린 듯 했습니다.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직선제로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88년 올림픽을 거치면서 사회는 긍정의 분위기로 바뀐 듯 보였습니다.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해보니 학교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혁명을 외치던 그 세대들은 어디론가 숨어버렸고, 대신 적을 잃어버린 방황하는 청춘들의 방탕에 가까운 소모적 삶이 그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났고 우리들은 모두 사회로 들어갔죠...

흔히들 386이라고 말하는 그 세대들은 그러나 사회 속으로 들어가면서 저마다 자신들의 살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개중에는 우리가 젊은 시절 그토록 싸워야할 대상으로 여겼던 그런 권력형 인간으로 돌변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혁명을 외쳤지만 이제는 그것이 "옛 사랑의 그림자"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추노'를 보며 줄곧 이건 바로 그 실패한 혁명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은 썪어있고 그것을 고치겠다고 나선 선비들 역시 알고 보면 세상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왕을 바꾸려는 것이었으며(조선비), 권력 아래서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 작은 권력의 실타래라도 쥐고 휘두르려는 모습(오포교)이나, 여전히 대의를 외치지만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 채 결국 자신을 소외시키는 송태하 같은 인물, 순진하게 혁명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지만 그것 역시 권력의 장난임을 깨닫는 노비당, 혁명 따위는 믿지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몸을 던지는 낭만적인 대길, 세상이 더럽다면서 사실은 그 세상의 무서움을 알기에 도망치는 중인 짝귀, 그리고 결국 역사에 자신 같은 노비 한 사람도 있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테러리스트의 길을 걷는 업복.

'추노'는 그 폭풍 같았던 혁명의 시절을 회고하게 만드는 드라마였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바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도저한 흐름은 결국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전언. 업복이 말했듯이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 낮은 자들의 뜨거운 삶을 하나하나 기록했다는 것, 그 자체가 혁명이 되는 드라마. 그래서 실패했지만 그 실패한 혁명을 조명하는 것으로 혁명이 되는 그런 드라마.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견고한 세상에 화살 한 방 날려보는 그런 드라마.

전반적으로다가' '추노'는 그 80년대 옛 혁명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드라마였다고 기억됩니다. 무수히 죽어간 그 인물들의 면면이 오래도록 여운으로 남을 것입니다. 우리가 한 때 길바닥에서 피흘리고 쓰러져 있던, 하지만 세월의 부식으로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던 그 얼굴들을 상기시키는. 그게 도달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태양을 향해 화살을 먹이고는 킥킥 웃어대던 그 시절의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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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태터앤미디어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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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풍 같았던 혁명의 시절을 회고하게 만드는 드라마였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바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도저한 흐름은 결국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전언. 업복이 말했듯이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 낮은 자들의 뜨거운 삶을 하나하나 기록했다는 것.

    2010/04/14 08:28

'추노', 역사에 이름 한 줄 없는 그들만의 역사

송태하(오지호)가 석견(김진우)을 구명하기 위해 한밤중 몰래 저자거리에서 봉림대군(이준)을 만나는 장면에서 대길(장혁)은 태하처럼 무릎을 꿇지 않는다. 그저 건들대며 간단한 목례를 할 뿐. 짧은 장면이지만 이 길바닥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추노꾼 대길과 봉림대군의 만남 사이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그것은 우리가 사극이라고 하면 늘 봐왔던 그런 풍경, 즉 왕이나 세자 앞에서는 누구나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그 풍경이 아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봉림대군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그 곳은 대길과 태하가 그를 좇는 철웅(이종혁)과 부하들이 한 판 벌이는 자리로 바뀐다. '추노'는 이처럼 역사 속의 인물을 어둠 저편으로 밀어내고 대신 그 자리에 역사 바깥에 존재하던 인물들을 세워놓는다. 봉림대군은 아마도 역사에 수많은 말을 남겼을 것이지만 이 사극에서는 주인공인 민초들이 심지어 농 섞인 말을 계속 떠들어댈 동안 줄곧 침묵하고 있다. 허구의 인물 대길은 그렇게 역사의 인물 봉림대군을 만나 "여기는 내 세상"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추노'가 그리는 세계는 확실히 과거의 사극들과는 그 시선부터가 다르다. 과거 사극에 등장하던 천민들은 신분상승을 꿈꾸었지만, '추노' 속의 천민들은 더러운 양반들의 세상과 한 판 대결을 벌이고 있다. 신분이 엄연한 시대에 천민들과 양반들이 벌이는 대결. 즉 이 사극은 세상이 뒤집어질 혁명을 꿈꾼다. 하지만 어디 혁명이 쉬운가. 그리고 우리는 이미 역사를 통해 그 혁명이 번번이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혁명은 그리 낭만적인 것이 아니다.

송태하가 꿈꾸는 새로운 세상은 "열망이 욕망으로 바뀐" 조선비(최덕문)로 인해 뒤집어지고, 노비들의 세상을 꿈꾸는 노비당은 결국 그 분(박기웅)이 이경식(박응수)의 사주를 받은 인물로 밝혀짐과 동시에 와해된다. 업복(공형진)의 의구심은 현실로 나타난다. 즉 '추노'는 저 '수호지' 같은 혁명의 낭만성을 판타지로서 그려내는 사극이 아니다. 오히려 '추노'는 그 혁명의 실패를 아프지만 똑똑히 바라본다.

그래서 결국 남은 것은 혁명이 아니라 개인의 생존이 되었다. 대길은 조용히 살아가라고 하지만 송태하는 석견과 혜원을 데리고 청으로 빠져나가려 한다. 그 과정에서 불을 보듯 뻔한 것은 그들을 좇는 철웅과의 마지막 대결이다. 하지만 이 대결 역시 이제는 혁명과는 상관없는 개인적인 차원의 대결이 되어버렸다. 대길은 "은혜는 잊어도 원수는 꼭 갚는다"는 말처럼 철웅에 남은 빚을 갚으려는 것이고, 송태하는 개인적인 이유로 끝없이 그를 추격하는 철웅을 피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혁명은 저물었고, 남은 자들은 저마다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그렇다면 민초들이 꿈꾸었던 혁명이 이처럼 무참하게 무너지는 과정을 이 사극은 왜 굳이 주목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그렇게 실패했으나(그래서 역사에 한 줄도 남아있지 않지만) 그래도 당대에 사람답게 살고자 꿈꾸었고 싸웠던 민초들이 있었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추노'를 통해 수없이 죽어나간 민초들의 삶을 보았고, 그 역사에 한 줄 남겨지지 않은 그들에게 이름을 붙였다. 더럽게 팍팍한 인생을 살다간 천지호(성동일)는 물론이고, 업복이와 짝귀(안길강) 그리고 노비들이 주인되는 세상을 꿈꾸었던 개놈이(이두섭)와 끝봉이(조희봉) 같은 인물들이 새롭게 조명되었다.

'추노' 속의 혁명은 실제 역사에서처럼 실패했지만, 그 실패한 혁명을 낮은 자들의 위치에서 조명함으로써 '추노'는 저들만의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는데 성공한다. 이것은 기존 역사의 재현으로서 시작되었던 사극이, 지난한 세월을 거쳐 이제는 사극 스스로 역사를 써가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로 추노가 그려내는 역사는 공자왈 맹자왈 하는 양반들의 이야기를 알아먹지 못할 외계어로 만드는 세계다. 낮은 자의 시각으로 저자거리의 언어로, 때론 몸의 언어로 한 컷 한 컷 그려진 민초들의 역사, 사극이 복원해낸 그네들의 역사, 그것이 바로 '추노'다. 역사의 사극에서 사극의 역사로. 혁명은 과거의 그 때가 아니라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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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추노: 월도의 전성시대

    Tracked from 고어핀드의 망상천국  삭제

    * 이 글의 출처는 http://blog.gorekun.com/1424 입니다. 출처를 지우지 않은 상태에서 비상업적으로 배포가 가능합니다.추노가 종영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저는 거의 드라마를 보지 않습니다만, 워낙에 화제가 되다 보니 조금씩 동냥으로나마 듣고 보는 건 어쩔 수 없더군요.이 드라마에서는 언월도(偃月刀, 줄여서 월도月刀)가 꽤나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악역 철웅(이종혁 분)이 월도 시범을 보이는 장면도 보이고,...

    2010/03/25 17:10

작품, 결과보다 중요한 건 과정이다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이하 지붕킥)'은 끝났지만 엔딩에 대한 이야기는 끝날 줄을 모른다. '지붕킥'의 엔딩은 실로 파격적인 면이 있다. 지훈(최다니엘), 세경, 정음, 준혁의 얽히고설킨 멜로가 어떤 식으로 마무리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집중된 상황에서 '지훈과 세경의 죽음'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해피엔딩을 기대했던 시청자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이 '죽음'이라는 뉘앙스만으로 '지붕킥'을 그저 새드엔딩이라고만 단정할 수 있을까. 물론 죽음은 슬픈 것이지만, '지붕킥'이 그 죽음을 어떻게 보여줬는가도 중요하다. '지붕킥'은 사고를 직접적으로 보여주지도 않았고, 그 사망 사실도 3년이 흐른 후 성장한 정음과 준혁(윤시윤)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주었다. 게다가 마지막에 세경이 "시간이 이대로 멈춰버렸으면 좋겠어요"하고 말하는 대사와 거기서 멈춰져 흑백 사진의 추억으로 바뀌는 장면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분명 이건 새드엔딩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깊은 여운을 남긴 아름다운 새드엔딩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이 엔딩에 몰두하느라 지금껏 '지붕킥'이 달려온 웃음과 감동의 시간들이 주는 의미에 대해 지나치게 소홀한 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엔딩은 수많은 마무리 중 하나의 선택일 뿐이다. 그것이 무엇이건 그 하나로 지금까지 걸어온 '지붕킥'의 길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미스테리 스릴러 장르가 아닌 이상 말이다. 혹자는 "이 마지막 엔딩 한 편으로 모든 걸 망쳤다"고까지 말하는데, 이건 지나친 결과지상주의적인 사고방식이다. 결과보다 중요한 건 과정이다.

결과에 대한 몰두는 자칫 결과만 좋으면 다 좋다는 식의 사고방식도 만들어낸다. 반 년 이상 지속되는 드라마에서 태반 이상을 자극적인 막장으로 끌고 오다가 결말에 이르러 해피엔딩을 한다고 해서 그런 막장드라마가 이해될 수는 없는 일이다. '천만번 사랑해'가 그랬고, 현재 '수상한 삼형제'가 그렇다. '수상한 삼형제'는 아예 막장인 가족을 설정으로 하고 그 집이 차츰 화해되고 봉합되는 과정을 그리겠다는 것인데, 이것은 결과지향적으로 바라보면 납득이 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과정 자체로 바라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한정된 시간에 끝나는 영화라면 모를까, 드라마는(특히 연속극은)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다.

이제 곧 '추노'가 종영한다. 벌써부터 그 엔딩에 대한 예측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붕킥'에 이어 '추노'도 새드엔딩일 것이라는 예상이다. 지금까지의 흐름 상 해피엔딩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새드엔딩이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어떤 희망을 발견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지금껏 이 작품이 어떤 과정을 밟아 마지막까지 이르렀는가 하는 그 점이다. 해피엔딩이니, 새드엔딩이니 하는 것은 하나의 선택일 뿐, 그것으로 작품 전체가 바뀌지는 않는다. 아울러 엔딩에 대한 지나친 집중은 그것 하나로 과정 자체를 덮어버리려는 막장드라마들의 변명거리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도 그다지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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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킥'이 열어놓은 시트콤만의 가능성

그 누구도 시트콤을 하위 장르라 내놓고 얘기한 적은 없다. 하지만 시트콤을 보는 시선은 늘 낮았던 것이 사실이다. 시트콤 작가들이 정극으로 빠져나가고, 새로운 작가들도 시트콤에 도전하려 하지 않게 된 건 그 고생은 고생대로 하면서 대접받지 못하는 시선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지붕 뚫고 하이킥(이하 지붕킥)'을 통해서 시트콤은 더 이상 하위 장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단지 일일극과의 대결에서 거둔 그 대중성 때문만은 아니다. '지붕킥'은 시트콤의 웃음이 힘겨운 현실과 결합해 어떻게 재미와 의미를 만들어내는 지를 보여주었다. 게다가 우리는 '지붕킥'을 통해 시트콤이 웃음은 물론이고 멜로도 그릴 수 있으며 때론 깊은 감동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시트콤이라서' 낮게 보던 그 시선은, '시트콤이어서' 가능한 것이 무엇인가를 찾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그 시트콤만의 강점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시트콤의 강점은 정극의 허구성을 뒤틀었을 때 가장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 보석과 현경이 눈밭에서 싸우는 장면을 멀리서 바라보는 노부부가 '러브스토리'를 떠올리며, "우리도 젊었을 때 저랬었지"하고 말하는 장면은 이미 클리쉐화 되어버린 정극의 멜로 장면을 뒤튼다. 웃음은 바로 그 허구가 드러났을 때 터지게 되는데, 따라서 장르를 패러디하는 시트콤은 정극이 갖는 허구나 판타지를 리얼하게 폭로해내는 경향을 갖게 된다. 김자옥을 위해 엄청난 이벤트를 준비하는 이순재는 정극이라면 감동으로 끝났을 장면을, 노래를 하다 혼절을 하거나 혹은 자신이 하는 짓을 질책하는 속마음을 드러냄으로서 웃음으로 바꾼다.

클리쉐화되어 버린 정극은 어떤 면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허구의 세계라고도 볼 수 있다. 일일드라마가 대표적인 경우. 늘 똑같은 설정과 늘 똑같은 흐름이 몇 년째 계속 되고 있지만 그것이 판타지이기 때문에 여전히 대중들은 그것을 반복적으로 시청한다. 따라서 일일극이 장악한 저녁 시간대에 그것과 차별화를 이루며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장르로 시트콤만한 것도 없다. 시트콤은 일일극이 가진 그 클리쉐를 부수는 것으로 재미를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트콤의 '현실 폭로(?)' 경향은 정극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것이 마치 진짜 현실인 양 웃고 있는 사회의 얼굴 그 이면을 뒤틀어 보여주기도 한다. 서운대생임을 숨기며 살아가는 정음이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장면은 우습지만 깊은 페이소스를 남긴다. 어찌 보면 세경과 지훈(최다니엘)의 만남으로 시작해 그들이 함께 시간이 멈추는(?) 그 장면으로 끝나는 것은, 지훈이라는 도시인의 메마른 감성과 세경이라는 산골의 따뜻한 감성이 부딪쳐 한 자락 촉촉한 비로 내리는 것으로, 도시와 시골, 디지털과 아날로그, 현재와 추억으로 나뉘어지고 변해가는 세태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트콤은 이처럼 웃음을 머금고 있기 때문에 정극에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가능하게 한다. 웃음에 충실하다면 대부분의 장르 실험도 허용된다. 우리는 '지붕킥'을 통해 추리적인 요소나 멜로적인 요소, 휴먼드라마적인 요소, 심지어는 신파적인 요소까지 아무런 부담감 없이 즐겨왔던 게 사실이다. 그만큼 시트콤은 정극이 가지는 견고한 장르적 틀에서 자유롭고 그렇기 때문에 훨씬 다채로워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것은 웃음과 눈물, 희극과 비극, 풍자의 가벼움과 정극의 진지함 같은 요소들을 균형 있게 잘 연출해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지붕킥'을 통해 그 성공적인 실험을 경험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시트콤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일이다. 시트콤을 여전히 웃음만 주면 되는 그런 장르로 낮춰본다면 시트콤은 늘 하위 장르에 머물면서 그 가능성의 싹을 틔우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제작자든 시청자든 좀 더 확장된 마인드로 시트콤을 바라볼 때, 시트콤은 정극이 주지 못하는 재미와 의미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시트콤이라서 안 된다는 생각은 바꾸어야 한다. 시트콤이어서 되는 것이 더 많다. 이것이 '지붕킥'은 끝났지만 앞으로도 이어질 시트콤에 대해 갖게 되는 기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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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태터앤미디어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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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지붕킥'을 통해 추리적인 요소나 멜로적인 요소, 휴먼드라마적인 요소, 심지어는 신파적인 요소까지 아무런 부담감 없이 즐겨왔던 게 사실이다. 그만큼 시트콤은 정극이 가지는 견고한 장르적 틀에서 자유롭고 그렇기 때문에 훨씬 다채로워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2010/03/22 14:04

자연, 자연스러운 스토리텔링

우리에게 ‘무소유’의 삶을 몸소 보여주고 떠난 법정 큰 스님이 평생 강조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자연(自然)’이라고 한다. 자연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숲과 바다 같은 그 자연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고, 한자 그대로의 뜻으로 ‘스스로 그러한’ 것을 뜻하기도 한다. 즉 어떤 인위적인 흐름이 부여되지 않은, 그냥 그대로 흘러가는 것이 바로 자연이고, 그것을 우리는 숲과 바다와 나무 같은 자연을 통해 발견한다. 자연의 흐름이란 실로 단순하고 명쾌하다. 즉 태어나고 성장하고 쇠약해지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법정 큰 스님은 우리에게 이 자연적인 삶을 거스르지 말고 그 흐름대로 살아가라고 말씀하셨다.

‘무소유’는 자연이 자연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방식이었다. 무언가를 가진다는 것은 그만큼 부자연스러워지는 것을 뜻하는 것이니까. 예를 들어 인간이 스마트폰 같은 새로운 장비를 자꾸만 개발해 무장하는 것은 맥루한 식으로 얘기하면 ‘감각의 확장’을 위한 인위적인 노력이다. 즉 스마트폰은 외부적인 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감각을 확대시킨다. 시공간은 이 장비를 통해 바로 내 눈앞으로 당겨진다. 이것은 대부분의 인간이 만들어낸 기계들의 속성이다. 기계들은 외부에 있는 게 아니다. 내 속으로 들어온다. 그래서 그것은 내 힘을 키워주고, 내 시야를 넓혀주고, 내 귀를 뚫어주며, 내 손발을 더 빠르게 무장시켜준다.

왜 이런 장비들을 개발해 감각을 확장시키려 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연을 정복하기 위한 것이다. 자연을 정복한다는 것은 단지 숲을 파괴하고 에너지를 확보한다는 그런 식의 외부적인 자연에 대한 침탈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 하나의 자연으로서 한계 지워진 육신의 삶을 정복한다는 이야기도 포함된다.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기 위해 멀리 있는 것을 눈앞으로 당겨놓는 기기를 개발하고, 내가 짧은 시간 내에 갈 수 없는 공간을 가기 위해 빠르게 움직이는 차를 개발한다. 이것은 과연 성장일까. 파괴일까. 여기에 대해 법정스님은 이런 식으로 말씀하셨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가진 자는 가난한 자이고, 가난한 자는 부자입니다.”

인위적인 것이 들어와 무언가를 확장한다고 해도, 그것이 자연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결국 자연의 일부인 사람은 자연의 법칙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싫어도 성장해야 하고, 싫어도 노쇠해야 하며, 싫어도 죽어야 한다. 태어나는 것? 그것은 아예 우리의 선택권도 아니다. 법정 스님이 입적에 이르러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하신 것은 늘 당신이 자연의 삶을 살기 위해 정진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모든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주고,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한 줌의 재로 돌아간다는 것. 그것을 몸소 보여주신 큰 스님의 삶의 방식이 우리에게 큰 울림이 되는 것은 우리들의 삶이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것인가를 거꾸로 말해주는 것만 같다.

이 자연의 흐름, 법칙은 사실 우리네 스토리 속에 그 유전자를 남기고 있다. 스토리의 가장 오래된 구조이자 여전히 가장 강력한 구조가 기승전결, 혹은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흘러가는 것은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진짜 ‘자연’이 아니다. 그저 ‘자연스러울’ 뿐이다. 즉 자연을 닮으려는 노력일 뿐이지, 자연 그 자체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자연은 사실 정해놓은 법칙이 없다. 그저 ‘스스로 그러하게’ 굴러가는 것이지, 거기에 어떤 법칙을 읽으려는 것은 바로 우리네 인간들의 노력일 뿐이다. 자연은 심술궂게도 어느 봄날 난데없는 눈을 내리기도 하고, 어느 겨울날 따뜻한 햇살을 내리기도 한다. 물론 어떤 흐름은 있지만, 그 흐름은 늘 변수를 지닌다. 즉 일반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이야기다.

바로 이 차이, 즉 자연의 무차별적인 흐름과 그 흐름 속에 내던져진 인간 사이에 놓여진 차이에서 스토리가 탄생한다. 스토리는 일어난 일들을 해석함으로써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하려는 인간의 노력에서 탄생했다. 맥락 없이 내던져진 정보들, 즉 자연은 인간에게는 공포 그 자체다. 어느 날 갑자기 낙뢰에 맞아 사람이 죽거나, 홍수에 터전이 휩쓸리는 것이 바로 자연의 흐름이다. 사실 죽음이 아무런 맥락 없이 찾아온다는 것은 문명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남아있는 자연이 주는 근원적인 공포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맥락 없는 자연 앞에 무기력한 인간은 그저 삶을 방관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 이 공포의 무차별성을 해결해준 것은 스토리다. 곧 죽을 것만 같은 긴긴 겨울 끝에 봄이 온다는 전언, 그 희망을 전해준 것. 무차별적인 흐름에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질서를 부여해 삶을 지탱해준 힘. 그 스토리의 구성이 자연을 닮아있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그리고 이것은 여전히 우리의 유전자 속에 각인되어 있다.

이것은 이 시대의 스토리의 흐름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 장르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일련의 스토리의 흐름을 가장 잘 드러내는 장르는 드라마다. 영화는 두 시간 남짓의 시간 속에 스토리가 완결되지만, 드라마는 길게는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지속적으로 스토리가 흘러간다. 대체로 잘 되는 드라마들의 특징은 그 스토리가 ‘자연스럽다’는 점이다. 즉 인위적으로 이리저리 작가에 의해 끌려 다니는 드라마는 부자연스럽기 마련이고 그것은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 ‘자연스러움’이 바로 무차별적인 자연의 법칙 속에 불불 떨며 서 있는 인간을 위로하고 희망을 꿈꾸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진짜 ‘자연의 진실’은 아니었을 지라도.

법정 스님이 드라마를 즐겨 보셨을 리 만무다. 그 텅 빈 오두막집에는 전기조차 호사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범박하게 말해 드라마가 하나의 스토리라면, 법정 스님이 좋아하셨을 스토리는 대충 알 것 같다. 그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일 것이다. 법정 스님 또한 스스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스토리 한 편을 우리에게 남기고 가셨지 않은가. 그것은 단순하고 소박한 자연에 가까운 삶의 스토리다.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오롯이 저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바람 같은 자연스러운 삶의 이야기. 이 스토리가 이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것 역시, 그 지극히 ‘자연스러움’을 보는 그 속에서, 우리 삶의 드라마가 얼마나 ‘부자연스러운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반문해보라. 당신 삶의 드라마는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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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은 어떤 스토리를 좋아하셨을까  (0) 2010/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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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이 국민이 되는 시청률 지상주의의 폐해

끊임없는 막장 논란을 가져오고 있는 '수상한 삼형제'에 대해 진형욱 PD는 "이 작품은 비난받을 이유가 없는 드라마"라고 밝혔다고 한다. 진 PD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이 드라마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작가가 쓰는 드라마"이며 "평범한 위기나 너무나 편안한 일상만 펼쳐진다면 드라마틱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 드라마에 출연하고 있는 배우 안내상은 "시청률 40%를 기록하면 국민드라마가 아니냐"며 막장이라고 평가받는 것은 이 "드라마가 불편한 이야기를 건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가 지금 갑자기 나온 것은 아니다. '하늘이시여'는 끊임없는 논란의 도마 위에 올라섰지만 시청률은 40%를 훌쩍 넘어섰다. '별난 여자 별난 남자'도 각종 논란에 휩싸였지만 3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들 드라마들이 시청률 고공행진을 기록한다고 해서 '국민드라마' 운운하고 나온 적은 없다. '수상한 삼형제'가 시청률을 내세워 국민드라마 운운하는 상황까지 온 것은, 시청률 지상주의 속에서 그만큼 자극에 둔감해진 드라마 제작 행태의 일면을 드러내는 것 같다.

무엇이 막장이냐에 따른 정확한 기준은 없다. 다만 대중들의 정서가 그것을 막장으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냐에 달려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어떤 요소들이 막장의 징후로 받아들여지는가 하는 것은 대충 짐작될 수 있다. 대체로 막장은 윤리적인 측면에서의 막장과 완성도의 측면에서의 막장으로 나뉘어진다. 얼개가 느슨한 것은 완성도가 막장이라는 것이며, 소재가 지나치게 자극적인 것은 윤리적인 막장이란 얘기다.

'수상한 삼형제'는 얼개가 그다지 느슨한 드라마는 아니다. 따라서 완성도 측면에서 이 드라마를 막장이라 부르기는 어렵다(물론 비정상적인 관계들은 개연성이 떨어진다는 측면에서 막장으로 치부될 수도 있지만). 하지만 윤리적인 측면을 보면 지나치게 자극적인 상황으로만 몰고 가는 드라마의 행태가 막장 논란에서 자유롭기가 어려워진다. 즉 '수상한 삼형제'의 막장 논란은 좋은 필력을 가진 작가가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시청률을 얻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자극적인 상황을 적재적소에 넣고 빠지는 것을 반복하는데서 나온 것들이다.

'수상한 삼형제'는 지금껏 흘러온 것을 보면 작가가 캐릭터 게임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캐릭터를 하나씩 끄집어내 자극적인 관계들을 얽는 것으로 극성을 올리고, 어느 순간 그 힘이 빠지면 다른 인물로 넘어가는 과정을 반복한다. 물론 그것이 파편화되는 현재가족의 모습을 극대화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보일만큼 이 드라마는 진정성이 엿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시청률을 향해 달려가는 듯한 인상이 강하다는 이야기다.

이즈음에서 국민드라마라는 호칭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막장드라마가 시청률을 갖고 국민드라마라고 주장하는 상황은, 이 사뭇 달라 보이는 두 용어 사이에 근본적으로 시청률 지상주의라는 같은 조건이 상응하기 때문이다. 일정한 시청률을 넘긴 드라마를 흔히 우리는 '국민드라마'라고 부른다. 그만큼 많이 봤다는 뜻이고,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 '국민'이라는 호칭이 붙여지는 분야는 드라마뿐만이 아니다. '무한도전'이나 '1박2일' 같은 예능 프로그램은 '국민예능'이라 불려지고, '해운대' 같은 1천만 관객을 넘긴 영화는 '국민영화'라고 부른다. 국민배우, 국민가수, 국민여동생, 국민남동생, 국민개그맨... 이제 '국민'이라는 호칭은 조금 잘 나가는 장르나 연예인들에게 붙여주는 왕관 같은 것이 되었다.

잘 나가는 드라마나 예능에 '국민'이라고 붙여준 들 무슨 상관일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국민'이라는 호칭이 야기하는 집단적이고 강박적인 사회 분위기는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니다. 사실 시청률 50%나 관객 수 1천만이 정상적인 수치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온 국민의 반이 같은 드라마를 보고, 국민의 다섯 명 중 한 명이 같은 영화를 보는 사회를 건강하다고 할 수 있을까.

시청률 지상주의 속에서 막장드라마가 국민드라마라고 한다면, 그 말은 국민이 막장이란 얘기인가. 막장드라마가 국민드라마라고 말해지는 상황 속에서 드라마에 국민을 호명하는 이 상황도 그다지 유쾌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청률만 높으면 다 용서된다는 이 상황은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이해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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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킥'의 희비쌍곡선, 김병욱표 화학실험의 결과물

'지붕 뚫고 하이킥(이하 지붕킥)', 이것은 흥미로운 김병욱표 화학실험이다. 꽤 부유하게 살아가지만 온기나 찰기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이순재 가족. 그 가족 속으로 두 부류의 인물들이 들어온다. 그 하나는 산골에서 갓 상경해 갈 곳 없는 순도 100% 무공해 자매, 세경과 신애이고, 다른 하나는 서운대생으로 약간의 허영기를 갖고 살아가는 황정음과 그 집에 함께 자취하는 친구들(인나와 광수, 줄리엔)이다. 그래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전형적인 성공한 도시 청년의 표상처럼 그려지는 지훈은 늘 자기중심적인 생각 속에서 타인의 삶에 무심하게 살아왔지만, 어느 날 불쑥 자신의 마음 한 구석으로 들어온 정음을 발견한다. 서울대생이라 속인 서운대생에, 술만 마시면 떡실신에 주정을 부리는 그녀지만, 바로 그런 점 때문에 지훈은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갑자기 집안 사정이 나빠진 정음이 이별통보를 했을 때, 지훈은 그 이유를 묻지 않는다. 그저 수동적으로 그 아픔을 받아들일 뿐이다.

한편, 그는 늘 자신 옆에 자신을 챙겨주는 인물로 서 있는 세경을 발견하지만, 그렇게 발견했을 때는 이미 자신의 그 무신경함이 그녀를 상처 주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다른 누군가는 상처를 입은 그 상황 속에서 결국 그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난다"고 말한다. 사랑이 누구와 이루어지고 누구와 이루어지지 않았는가가 뭐가 중요할까. 중요한 것은 이 무신경한 사내가 이제 타인들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는 사실이다.

준혁(윤시윤)은 반항기 가득한, 그래서 누군가 새로운 인물이 자신의 세계로 틈입하는 것 자체를 원천봉쇄하며 살아가던 인물. 그러나 그는 정음을 통해 각별한 우정을 갖게 되고, 세경을 통해 사랑을 알게 된다. 일종의 성장통을 겪고 있는 준혁은 결국 이 우정도 사랑도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알고 절규한다. 누군가를 계속 밀어내기만 하던 그는 이제 누군가를 계속 끌어당기고 있다.

세경은 부모가 없는 상황에서 동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아간다. 식모라는 상황은 그녀가 이순재의 집에 종속된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때론 상황이 역전되어 세경과 신애로 인해 이 온기 없는 집안이 따뜻한 가족 같은 느낌을 만들어내지만(그녀는 진짜 엄마처럼 이 가족들의 밥을 챙긴다), 그것이 그녀의 종속된 삶을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끝없이 지훈을 옆에서 바라보기만 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그녀의 삶을 잘 보여준다. 하지만 그녀는 차츰 지훈과의 마음을 정리하고 스스로의 삶을 찾아나간다. 이민이라는 상황은 물론 역시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지만, 그녀는 스스로 그것을 선택한다.

정음은 생각 없이 청춘을 소비하던 삶에서 치열한 삶으로 선회한다. 아버지의 파산선고가 그 결정적인 이유지만, 어쩌면 그녀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이순재의 집으로 준혁의 과외선생을 하러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그 변화는 이미 예고되었는지도 모른다. 아픈 이별과 아픈 현실의 힘겨움이 동시에 찾아왔지만, 그것이 비극으로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녀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 때문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정음 역시 과거의 그 정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시간은 흘렀고, 처음 시작했던 지점에서 인물들은 저마다 조금씩 성장해있다. '빵꾸똥꾸'를 외치며 독하기만 해 보이던 해리(진지희)는 이제 떠나려는 신애를 붙들며 "넌 아무데도 못가"하는 아이로 성장해 있고, 찌질한 청춘을 연명하는 것 같았던 인나와 광수 커플도 인나가 걸 그룹으로 데뷔하면서 광수와 떨어지게 되자 현실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김병욱표 화학실험은 이처럼 이질적인 존재들을 한 공간으로 섞어 넣음으로써 어떤 희망의 표지를 찾아내려 애쓴다.

시트콤에서 이질적인 것들의 화학반응을 통해 어떤 성장을 그려낸다는 것은 이 시트콤이 가진 고유한 특징을 규정한다. 처음 이순재의 집이 갖고 있는 도시인의 차가움은 말 그대로 시트콤이 가질 수 있는 풍자적인 웃음의 보고나 다름없다. 그 어딘지 부족한 인물들은 그대로 웃음으로 전화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성장하지 못한(혹은 도시생활 속에서 성장이 멈춘) 인물들은 시트콤이라는 과장의 프리즘 속에서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해리는 지독할 정도로 '빵꾸똥꾸'를 외치고, 지훈은 지나치게 무신경하며, 정음은 술만 마시면 떡실신되는 무개념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 웃음을 주는 차가운 현실 속의 인물들은 세경과 신애 같은 인물들이 투입되고 차츰 관계의 화학반응을 거치면서 성장통을 겪는다. 멜로로 극대화되어 있는 이 정극적인 요소는 차츰 초반부의 희극을 후반부의 비극으로 이끌어간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초반부의 희극이 차가운 현실의 절망을 풍자하면서 생겨난 것처럼, 후반부의 비극은 거꾸로 이 차가운 현실 속에서의 희망을 향한 성장통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이 절묘한 희비극의 쌍곡선이 바로 '지붕킥'을 통해 김병욱 PD가 실험하고자 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후반부에 이르러 여러 악재들로 인해 일련의 흐름이 깨어지면서 그 균형에 균열이 가긴 했지만 그래도 '지붕킥'이 시도하려 했던 희비극을 통한 현실의 직시와 그 속에서 시도된 희망의 모색이 가진 가치는 폄훼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정극과 비교해 늘 낮게 취급되던 시트콤에 대한 편견과 그 편견을 뛰어넘으려는 김병욱 PD의 안간힘인지도 모른다. 실로 뒤얽힌 남녀 관계에 대한 관심과 결론에 대한 과열된 추측은 시트콤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웃기던 캐릭터들은 저마다 한 차원씩 성장했고, 희극은 차츰 진지해져갔으며 그 사이 시트콤도 우리가 늘 생각해오던 그 위상에서 한 차원 높아졌다. 지붕 아래 있던 그 모든 것들은 실로 그 견고하게 굳어있던 지붕 하나를 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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