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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 '자이언트', '제빵왕 김탁구'가 70년대를 택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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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빵왕 김탁구'(사진출처:KBS)

드라마와 영화의 시대적 배경으로 70년대가 다시 피어나고 있다. 수목드라마로 40%의 시청률을 넘보고 있는 '제빵왕 김탁구'는 70년대의 질곡을 겪고 자라난 김탁구(윤시윤)가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제빵왕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고 현재 상승세를 타고 있는 '자이언트'도 70년대 개발시대 강남땅을 놓고 벌이는 치열한 개발전쟁을 다루고 있다. 한편 벌써 25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이끼'도 그 근간을 보면 70년대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70년대 개발시대에 아버지가 겪은 고통의 시간들을 현재의 신세대 주인공이 하나씩 되밟아가는 이야기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70년대 개발시대를 이들 콘텐츠들이 다루고 있을까. 흥미로운 것은 이들 작품들이 이 시대를 다루는 방식이 유사하다는 점이다. '이끼'는 70년대 개발시대가 갖고 있던 그 폭력적인 정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즉 영화가 그리는 것은 지금 현재를 만든 그 과거의 왜곡된 폭력의 역사를, 현재의 신세대를 대변하는 주인공이 파헤쳐가는 이야기다. '자이언트'는 군사정권에서부터 개발시대를 지나오면서 한 가족이 겪게 되는 파멸과 생존 그리고 복수와 성장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으로 '이끼'와 거의 같은 맥락의 이야기를 하는 셈이다. 이것은 '제빵왕 김탁구'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온갖 시련을 겪으며 성장해 결국 제빵왕이 되는 과정을 그리는데, 이것이 또 7,80년대의 폭력적인 시대와 연관을 맺는다. 즉 이들 작품들은 모두 개발시대가 남긴 트라우마를 현재의 주인공이 넘어서려 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주목할 것은 이들 작품들이 70년대라는 시대를 배경으로 담으면서 각 장르가 가진 한계를 넘어고 있다는 점이다. '자이언트'와 '제빵왕 김탁구'는 70년대를 하나의 극적 장애요소로 다루면서 이제 한 물 간 것이라 여겨진 시대극을 다시 부활시켰다. 과거 '에덴의 동쪽'이나 '태양을 삼켜라' 같은 시대극들이 과거를 재현하고 그 속에 꿈틀대던 욕망들을 끄집어내 보여주는 것에 만족함으로써 어떤 한계를 드러냈다면, '자이언트'와 '제빵왕 김탁구'는 그 과거가 현재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질문하고 있다. 결국 과거를 소재로 하지만 과거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고 현재와 만나는 지점을 찾아냄으로써 그걸 보는 현재의 시청자들을 공감하게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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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사진출처:시네마서비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청세대의 확장이다. 70년대를 다룸으로써 현 드라마의 주시청층인 중장년층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고, 그 시대를 넘어 성장하는 주인공을 그려냄으로써 현재의 젊은 시청층까지 소구할 수 있었다. 이들 드라마들의 높은 시청률은 바로 이 시청 세대의 폭넓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영화 '이끼'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웹툰 원작의 영화가 거의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그 소구 세대가 달랐기 때문이다. 웹툰이 좀 더 젊은 세대가 향유하는 매체라면 영화는 좀 더 폭넓은 세대를 겨냥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아버지 세대의 이야기와 현 세대의 이야기가 중첩되는 '이끼'는 그 한계를 70년대라는 시점을 끌어들여 넘어서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픈 과거도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된다는 말이 있다. 개발시대는 우리에게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주었지만 그 이면에 또한 많은 상처를 남긴 게 사실이다. 최근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개발시대는 막연히 당대를 향수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또 그 아픔을 넘어서려는 안간힘을 보여준다는 데서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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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넘버 원'의 높은 완성도와 남는 아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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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넘버 원'(사진출처:MBC)

"봉순아. 보이는 겨. 이놈들이 사람이었구먼. 귀신이 아니고 사람이었어. 얼마나 집에 가고 싶었을까. 얼마나..." 어느 날 갑자기 징집되는 바람에 가족과 헤어져 전장에 와 있는 박달문(민복기) 이병이 적의 참호에서 쇠사슬에 묶인 채 도망치지도 못하고 처절하게 죽어간 북한군 병사의 사슬을 풀어주며 하는 대사는 '로드 넘버 원'이 어떤 드라마인가를 잘 드러내준다. '로드 넘버 원'을 가지고 애초에 '반공으로의 회귀'를 걱정했던 것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전쟁이 있고, 남과 북이 서로 총칼을 들이밀고 싸우고 있지만, 그들에게서 서로에 대한 증오보다 더 절실해 보이는 건 생존이다. 그들이 싸우는 것은 단지 승리를 위한 것만이 아니고,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다. '로드 넘버 원'은 바로 그 길, 가족으로 가는 길과 다름 아니다.

그 길은 단순해보이지만 험난한 여로다. 만일 평시였다면 아무런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았을 그 길은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거의 모든 것이 이야기가 된다. '로드 넘버 원'은 강물 하나를 건너는 에피소드에 드라마의 시간으로서는 꽤 긴 30분 이상을 쓰고, 진지 하나를 넘어서기 위해 한 회 분의 시간을 사용하는 드라마다. 평시라면 단 몇 분의 에피소드에 그쳤을 길이지만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힘겹기 만한 그 길은 이다지도 새로운 의미들이 피어난다. 누군가는 길 위에서 살고, 길 위에서 죽으며, 또 길 위에서 가족을 만나 하룻밤을 보내고 길 위에서 동료에게 총을 들이대기도 한다. 그 평범한 길이 예측불가능해진 건 전쟁 때문이다. 그러니 '로드 넘버 원'은 전쟁물이면서도 또한 로드무비이기도 하다.

그렇게 힘겹게 찾아간 고향은 또 어떨까. 가족을 만나기 위해 사선을 넘어 찾아온 오종기(손창민) 앞에 놓여진 고향의 모습은 절망 그 자체다. 가족이 마을사람들의 내부고발로 몰살된 것. 이것은 아마도 오종기 개인의 비극은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이 살기 위해 누군가를 지목하는 그 상황의 기억은 당대를 살아낸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남아있을 트라우마일 테니까. 이미 그들이 찾아갈 고향의 모습은 그들이 길 위에서 상상하던 그 고향이 아니다. 그 무엇도 희망이 되지 못하는 그 길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 나가는 이들의 발걸음은 어떤 면에서 보면 전쟁물의 차원을 넘어서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마저 던지는 것만 같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다'는 군인들의 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계급이라는 구조는 종종 불합리한 그 얼굴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장우(소지섭)와 신태호(윤계상)의 계급 관계가 그렇다. 처음에는 신태호가 이장우의 상관이었지만, 고지 점령의 전과를 올린 이장우는 중대장이 되어 이장우의 직속상관이 된다. 하루아침에 호칭을 달리해야 하는 어색한 상황이 허용되는 그 길. 바로 전쟁이라는 상황이 만들어낸 그 길의 법칙이 사회의 축소판처럼 그려내는 모습들도 흥미롭다.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는 그 계급의 허용은 상관의 리더십이 그 구성원들에게 얼마나 깊은 영향을 미치는가를 잘 말해준다. 혹자는 계급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려하고 혹자는 승리하기 위해서만 사용하려 한다. 물론 이장우처럼 모든 이들이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세운 이들도 있지만.

'로드 넘버 원'은 사전제작 드라마로서 꽤 높은 완성도를 갖고 있는 드라마다. 이것은 단지 뛰어난 영상의 완성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드라마 스토리구조에 있어서도 '로드 넘버 원'이 거두고 있는 휴머니즘적 시각의 성과를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것이 가능했던 것 역시 사전제작이라는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시스템이 큰 역할을 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초반부의 분위기를 장악하며 전체적인 스토리의 균형을 흔든 이장우와 신태호 그리고 김수연(김하늘)의 멜로 라인은 옥에 티를 넘어서 드라마에 대한 매력을 떨어뜨려 놓았다. 왜 멜로를 그처럼 내세웠을까 하는 이유는 일면 이해가 된다. 전쟁드라마이기 때문이다. 전쟁드라마라면 떠올리던 반공이라는 트라우마를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또 도외시될 수도 있는 여성 시청층을 공략하기 위해서라도 멜로는 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은 '로드 넘버 원'의 한계로 작용했다. 오로지 김수연을 만나기 위해 전쟁에서 생존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이장우와 신태호의 모습은 지나친 멜로로의 귀결로 보일 수밖에 없다. 멜로가 아니라 휴머니즘 자체에 천착했더라면 어땠을까. 부대원들 개개인들이 갖고 있는 인간적인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멜로를 대체할 수 있는 힘이 있지 않았을까. 이 부분에서 아이러니하게 갖게 되는 생각은 드라마의 완성도를 만들어낸 사전제작 드라마가 또한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다. 만일 '로드 넘버 원'이 사전제작 드라마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초반부 멜로에 쏟아진 비판을 받아들여 어떤 궤도 수정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오로지 길 하나에만 집중해도 충분했을 이 완성도 높은 드라마에 못내 남는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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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구도의 재현은 대중들을 공감시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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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사진출처:MBC)

"마마 대응책이라뇨? 지금 그걸 누가 마련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마마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은 마마께서 지금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뿐입니다. 그게 정치라는 것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궁지에 몰린 장희빈(김소연)은 남인의 수장, 오태석(정동환)을 불러 대응책을 마련하라고 하지만 그의 반응은 싸늘하다. "권력이 있는 것이 옳은 것이고 그렇지 못한 것이 그른 것"이라는 장희빈 자신의 말대로 된 것이다. 힘이 없어진 그녀는 이제 이 모든 사건의 책임을 혼자 뒤집어써야 할 위기에 처했다.

장희빈의 권력에 대한 인식은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을 떠올리게 한다. 권력은 쟁취하는 것이지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것 자체는 선도 악도 아니다. 다만 권력관계가 만들어내는 힘의 불균형이 있을 뿐이다. 사실 권력에 대한 이런 인식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권력을 어떤 실체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권력을 쥐는 사람의 심성, 의지에 따라 모든 상황이 달라질 것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어디 그런가. 견고한 시스템 속에서 달라지는 것은 그 권력관계 속에 들어가는 인물들뿐이다.

'동이'에서 장희빈이 초반부에 동이(한효주)의 도움을 받아 중전의 자리까지 오르는 과정에서 그녀는 마치 선인 것처럼 느껴졌지만 결국 중전에 오르자 입장은 달라졌다. 권력관계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권력을 쥔 것이 아니라 다른 권력관계 속에서 입장이 달라진 것뿐이다. 따라서 권력을 얘기하면서 흔히 권력을 쥔 자는 악이고 권력에 이끌리는 자는 선이란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아마도 동이 역시 그 상층부의 권력관계 속으로 들어가면 장희빈처럼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권력이기 때문이다.

'동이'의 장희빈이 '선덕여왕'의 미실만큼 매력적이지 못한 것은 이 사극의 구도가 지나치게 선악구도로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동이는 무조건적인 선이고 장희빈은 악이다. 권력이 없는 동이와 권력자인 장희빈의 대결구도, 그래서 장희빈을 무너뜨리고 그 권력을 동이가 쥐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그려진다. 여기에 사극은 장희빈이 저지르는 일련의 일들을 부도덕한 처사로 몰아간다. 즉 게임의 법칙, 정정당당함을 잃은 장희빈은 악이 되는 것이다.

장희빈의 몰락은 그래서 권선징악적인 이 사극의 목표처럼 보인다. 바로 이 단순한 구도는 장희빈이라는 캐릭터를 매력적이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이다. 물론 장희빈이 "권력이 있는 것이 옳은 것이고 그렇지 못한 것이 그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 사극의 권력에 대한 인식는 선악구도의 그것이 아니다. 하지만 인식이 그런 것과 실제로 드라마 속에서 그려지는 뉘앙스는 다르다. 이 사극은 지금껏 선악구도(운명적으로 선인 동이와 그 반대인 장희빈)를 전면에 내세웠다. 장희빈의 오빠인 장희재(김유석)는 뼛속까지 악역이고 서인의 핵심인물로 등장하는 심운택(김동윤)은 늘 선이다. 그들은 결국 권력을 향해 달려간 두 인물일 뿐이지만.

'선덕여왕'의 미실이 악역이면서도 매력적이었던 이유는 이 사극이 선악구도를 그리기보다는 보다 권력의 관계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미실은 덕만(이요원)과 대립관계를 갖고 있으면서도 멘토 같은 역할을 했다. 그들은 권력의 법칙을 잘 이해했고 그래서 미실이 최후를 맞이할 때 덕만 또한 슬픔을 느끼게 되었다. 덕만이 여왕의 자리로 등극한 이후에 심지어 미실이라는 거대한 존재의 부재를 깊이 느낄 만큼, 사극은 선악구도의 차원을 넘어서 정치관계의 다이내믹함(끝없이 변화하는 힘의 움직임)을 잘 잡아냈다. 반면 '동이'의 대립구도는 지나치게 선악구도에 집착함으로써 오히려 이 권력의 시스템이 그 구도 아래 가려지는 상황을 맞이한다. 과연 이 사극처럼 동이가 장희빈을 내쫓고 나면 시스템은 달라질까. 해피엔딩은 올 것인가.

장희빈은 그래서 미실만큼 매력이 없다. 이건 연기의 문제가 아니다. 캐릭터가 가진 매력의 문제다. 역사에서 정치의 상층부로 올라갔던 여성의 성장과 몰락의 과정에서 장희빈이 비현실적인 느낌마저 주는 반면, 미실이 꽤나 현실적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장희빈하면 우리는 그 배역을 연기한 배우들의 명연기와 억지로 사약을 받는 그 체통도 우아함도 잃은 한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이런 주변적인 관심들은 어쩌면 이 공고한 시스템을 가리고 이 모든 것들이 선악의 문제라고 강변하는 보수적인 시각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선악구도의 변화는 아무 것도 바꾸지 않는다. 한때 이 악녀로 그려졌던 장희빈에게 열광하던 시대가 가고, 이제 그 단순함에 별로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만큼 권력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시선 또한 과거와는 달라졌다는 반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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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호와 인간 사이, 그 공통점과 차이점이 의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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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호 여우누이뎐'(사진출처:KBS)

"봐라. 저 등을 다 같은 한 사람이 달았다고 생각하느냐? 모르긴 몰라도 모두 다른 사람이 달았을 거다. 하지만 저 등에 담겨있는 마음은 다 같다. 아끼는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이다. 세상 사람이 다 다른 것 같아도 사람마음은 다 똑같은 거다. 연이 너랑 나도 신분은 달라도 서로 아끼는 마음은 같지 않으냐? 그러니 우린 달라도 같다." - '구미호 여우누이뎐' 정규도령이 연이에게 마음을 고백하며

구미호는 우리와 완전히 다른 존재인가. 태생적으로는 그렇다. 구미호는 본래 여우니까. 하지만 구미호는 반 인간이기도 하다. 인간이 되기 위해 인고의 세월을 겪으면서 구미호의 심성은 웬만한 인간 이상이 되었다. 말 그대로 반인반수다. 그렇다면 구미호는 여우인가 인간인가. 사실 이런 질문은 질문 자체가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우리가 구미호라는 텍스트를 읽을 때 기본적으로 머릿 속에 그리는 그림이다. 사실 구미호가 여우인가 인간인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진짜 중요한 건 이런 구분이다. 구미호가 여우이건 인간이건 그게 도대체 어떻다는 건가.

왜 여우는 여우로서 살아가려 하지 않고 굳이 인간이 되려 하는가. 왜 인간은 굳이 인간이 되겠다는 여우를 용납하지 않는가. 나아가 인간과 여우가 서로를 인정하고 살아갈 순 없는 건가. 구미호라는 텍스트에는 기본적으로 이 다른 점으로 구분된 두 존재에 대한 차별적 시선이 들어가 있다. 이것은 물론 조선시대 같은 반상의 차이가 뚜렷한 사회의 체계를 공고하게 해주는 것들이다. 인간(양반)은 인간이 가야할 길이 있고(여우보다는 나은), 여우(상놈 혹은 짐승)는 여우가 가야할 길이 있다. 그러니 이 차이를 넘어서려 해서는 안된다.

이 차이는 시대가 변했어도 새로운 이름으로 여전히 남아있다. 가부장제 하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나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빈부의 격차가 만들어내는 상류층과 서민 사이의 장벽같은. 그런데 이 양자 간에는 과연 진짜 차이가 존재할까. 양반과 상놈, 상류층과 서민은 먹는 것도 다르고 싸는 것도 다를까.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지만 다르게 보는 시각이 존재할 뿐이다. 이것은 이 견고한 시스템의 작동방식이다. 인간과 인간으로서의 같은 점을 보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만들어 그 시스템을 운명으로 체화시키려는 것. 이렇게 보면 '구미호'라는 텍스트는 지극히 보수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실제로도 그렇다.

하지만 그것만일까. 만일 그런 보수적인 시각으로 변하지 않는 시스템을 알게 모르게 대중들의 마음 속에 각인시키는 것이었다면 '구미호' 이야기는 이토록 오래도록 계속해서 새롭게 반복되지 않았을 것이다. '구미호' 이야기는 차이와 함께 동일성에 대한 희구가 들어가 있다. 즉 여우이지만 인간이 되고 싶어하는 구미호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그렇다. 구미호는 인간과 동일하게 대우받고 싶어한다. '구미호 여우누이뎐'은 이런 욕구가 더 강력하게 등장한다. 여기에는 딸을 둔 구미호와 윤두수(장현성)의 모성애와 부성애가 똑같은 무게로 그려진다. 인간만큼, 혹은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구미호의 모성애.

이러한 구미호와 인간 사이의 동일성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구미호 여우누이뎐'에서 정규도령이 연이(김유정)에게 하는 "우린 달라도 같다"는 대사는 바로 이 사랑이, 서로 다른 두 존재 사이를 연결해줄 유일한 가능성이라는 걸 말해준다. 하지만 어떤가. 구미호가 인간의 얼굴에서 반인반수의 진면목을 드러냈을 때 보인 연인의 반응은? 사랑의 감정과 두려움의 감정이 뒤섞인 그 깊은 혼돈. '구미호 여우누이뎐'이 흥미로운 것은 이 작품이 단지 구미호의 변신에 대한 인간의 혼돈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인간(윤두수)의 변신(자신의 딸을 위해 연이를 죽이려는)에 대한 구미호의 혼돈도 들어가 있다. 숨겨진 존재들이 진면목을 드러냈을 때, 이들은 여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이라는 동일성에 머물 수 있을까, 아니면 진면목이 가진 차이의 벽을 이겨내지 못할까.

우리처럼 단일민족이란 수사를 끊임없이 반복해온 민족에게 타인을 우리처럼 받아들이는 일은 실로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이클립스'의 뱀파이어와 늑대인간 사이에 서서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고민하는 벨라라는 인간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이다. 우리는 고작 구미호와 인간 사이의 차이에서 허덕이고 있지만, 저들은 둘도 아닌 세 종족이 함께 사는 법을 고민하고 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것은 바로 '트와일라잇'이라는 영화가 미국에서 그토록 초미의 관심을 끌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관심을 끌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저들의 사회가 우리보다 차별이 덜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이것은 이민족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저들 나라에서 이종족이 함께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는 우리보다 더 큰 판타지임을 말해주는 것일 뿐이다. '구미호'라는 텍스트는 이민족은 아니지만 끊임없이 차이를 생산해내는 사회 시스템에 의해 양산되는 우리 식의 차별적 존재들이 서로의 차이를 넘어서려 하거나 좌절하는 이야기를 거기에 담고 있다. 사실 같은 두 존재를 놓고도 어떤 이들은 차이점을 보지만, 어떤 이들은 공통점을 찾기도 한다. '구미호 여우누이뎐'이 지금 이 시대에 던지는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당신은 구미호와 당신의 차이를 보고 있는가 아니면 공통점을 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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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태터앤미디어의 생각

    Tracked from tattermedia's me2DAY  삭제

    왜 여우는 여우로 살아가려 하지 않고 굳이 인간이 되려 하는가. 왜 인간은 굳이 인간이 되겠다는 여우를 용납하지 않는가. 나아가 인간과 여우가 서로를 인정하고 살아갈 순 없는 건가. 구미호라는 텍스트에는 기본적으로 두 존재에 대한 차별적 시선이 들어가 있다.

    2010/07/26 08:05
  2. 구미호 정규도령 사랑이 연이의 저주를 풀 수도 있다(?)

    Tracked from 노천카페에서 상상을 즐기며  삭제

    이제 구미호 여우누이뎐은 시청률과는 상관없이 그 화제성만으로도 시청자들의 시선을 확실하게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주 들어 조금 전개가 느려지긴 했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스토리텔링으로 사람들을 꼼짝못하게 만들지요. 다음 주부턴 본격적으로 갈등의 중심으로 들어가나 봅니다. 어쩌면 이번 주는 그런 갈등과 극적인 장치를 하나하나 풀어 나가기 위한 일종의 숨고르기로 볼 수도 있겠네요. 어제도 포스팅을 했지만 이 드라마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연이(김유정)가..

    2010/07/26 09:02

'이끼', 신구세대를 가로지르다

그저 지나쳤으면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그런 시골마을. 이제 개발의 손길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지만 도시인의 마음으로 보면 심지어 살고 싶을 정도로 한적한 그런 풍경. 그 풍경은 과연 아름답기만 한 걸까. 거기 덤불 아래, 세워진 집 아래에는 뭔가 숨겨진 시대의 생채기가 남아있지 않을까. '이끼'는 바로 이 질문에서부터 시작하는 영화다. 어느 날 그 동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한 젊은 청년은 이곳으로 들어와 그 덤불을 들춰보고는 거기 무언가 이상한 것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 이상함은 전체주의적인 분위기다. 이장 천용덕(정재영)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마을 사람들이나, 마치 파놉티콘을 연상시키는 이장의 집에 의해 감시되는 마을. 의절한 채 살아왔던 아버지의 부음으로 시골동네를 찾은 유해국(박해일)은 이질적인 존재로서 단박에 그 분위기를 감지해낸다. 아버지가 혹시 살해된 건 아닐까 하는 의심 속에서 마을을 조사하기 시작하는데, 몰랐던 동네의 숨겨진 비밀들이 양파껍질 벗겨지듯 드러나면서 해국은 점점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빠져든다.

윤태호의 웹툰을 영화화한 '이끼'는 상영 전부터 이미 화제가 된 작품. 웹툰이 게재될 때 이미 18건의 영화화 제의가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영화화 될 때 기대만큼 우려도 많은 작품이었다. 영화화된 웹툰이 거의 성공을 거둔 전례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150만 관객을 돌파한 '이끼'는 이제 웹툰의 첫 번째 성공사례로 꼽힐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어떤 점이 '이끼'의 성공을 이끈 것일까. 그 해답은 신구세대를 가로지르는 독특한 이야기 구조에 있다.

이 영화의 대결구도는 천용덕으로 대변되는 개발시대의 잔재와 유해국으로 대변되는 신세대적 감성의 부딪침으로 그려진다. 즉 유해국의 아버지인 유목형은 월남전의 트라우마를 갖고 있던 인물이고, 천용덕은 이 폭력의 시대에 폭력으로 무장하곤 돈과 권력을 탐하는 형사였으며, 마을 주민들은 저마다 개발시대의 욕망 한 자락을 쥐고 죄를 지은 인물들이었다. 즉 현 시대의 젊은이인 유해국은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죽음을 통한) 이 이상한 마을로 들어와 천용덕이 세워놓은 왕국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것. 장르는 스릴러지만 그 아래에는 현재의 풍요 속에 감춰진 시대적 아픔을 들춰낸다는 점에서 사회극의 요소를 갖고 있다.

웹툰이 그 매체적 성격상 젊은 세대를 주 타깃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웹상에서의 폭발적인 인기가 영화로 이어지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끼'는 신구 세대의 문제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웹툰이면서도 그 타깃의 폭이 넓다. 영화로서 성공하려면 좀 더 넓은 타깃을 가져야 한다. 특히 중장년층의 호응은 절대적이다. '이끼'는 바로 그 점을 만족시켜주는 스토리 구조를 갖고 있다. 공간으로서의 도시와 농촌이, 존재로서의 인간과 신이 교차하는 이 작품 속에는 70년대 개발시대의 정서에서부터 2010년도 현재의 정서까지가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의 이야기이고, 어느 한 시골동네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라 이 땅 전체의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웹툰에서 금세 튀어나온 듯한 싱크로율 100%의 박해일과,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정재영의 연기대결도 볼만하다. 무엇보다 유해진이라는 배우는 이 자칫 끝없는 긴장으로 피곤해질 관객들에게 간간이 시원한 소나기 같은 웃음을 선사한다. 2시간 40분이라는 런닝타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니다. 하지만 윤태호 작가가 구축해놓은 팽팽한 스토리와 백전노장 강우석 감독의 좀더 대중적으로 호흡할 수 있는 영화적 해석은 이 긴 시간을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영화에 속도감을 제공한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는 톡톡 튀는 신세대 작가와 여전히 저력을 갖고 있는 기성세대 강우석 감독의 만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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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빵왕 김탁구'의 탁구, '자이언트'의 강모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80년대를 풍미한 이현세 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 등장하는 까치의 이 대사는 당대의 대중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사회의 소외된 인물들이 지옥훈련을 통해 강자로 재탄생하지만, 결국 엄지에 대한 절대적 사랑 앞에 승리마저 포기하는 까치. 그 사랑에는 당대 사회분위기가 잘 녹아있다. 사회적인 문제와 직접적으로 부딪치기보다는 개인적인 차원으로 회귀하는 깊은 감상주의가 바탕에 깔려있지만, 거기에는 사랑을 위해서는 뭐든 해내는 강한 남성에 대한 열망이 담겨져 있다.

30년이 지났지만 지금 안방극장에는 이 까치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가진 것 없는 이들은 모든 것을 가진 이 시대의 마동탁들과 대결을 벌이며 그 지독한 사랑을 보여주고 있다. '제빵왕 김탁구'의 김탁구(윤시윤)와 구마준(주원)의 유경(유진)을 사이에 둔 대결구도가 그렇다. 안기부에 끌려간 유경을 구하기 위해 "2년 간 유경을 만나지 않는다"는 마준의 제안을 수락하는 탁구의 이야기는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지옥훈련을 떠나는 까치의 에피소드를 떠올리게 한다. 그 떠나있는 시간동안 마준은 마치 마동탁처럼 끊임없이 유경을 흔들어놓을 것이다.

뭐든 원하는 것은 돈으로 얻을 수 있는 마준이 유경의 사랑은 얻을 수 없는 상황이나, 아무 것도 없지만 남다른 재능으로 최고의 제빵왕으로 거듭나는 탁구의 이야기, 또 그 탁구 주변인물로서의 진구(박성웅)나 인목(박상면) 그리고 갑수(이한위) 같은 인물이 '공포의 외인구단'의 까치 주변인물들처럼 보여지는 것도 그렇다. 아마도 우연의 일치겠지만, 김탁구와 구마준이라는 이름에서도 옛 만화 속의 인물들이 떠오른다. 독고탁과 마동탁.

당대의 사랑은 늘 빈부의 격차 속에서 사랑이 현실을 이길 수 있는가의 질문을 던진다. 남성 캐릭터는 가난한 자신의 현실을 이겨내고 강한 남자로 다시 자신의 사랑 앞에 서려하고, 여성 캐릭터는 끊임없는 현실의 유혹 앞에 흔들린다. 아마도 이런 구도의 부활은 꽉 막힌 사회적인 억압 속에서 자꾸만 움츠러드는 남성들의 강한 남자에 대한 판타지 때문일 것이다. 어딘지 촌스러워 보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우리의 감성을 자극하는.

한편 '자이언트'의 강모(이범수) 역시 또 다른 까치의 부활이다. 사랑하는 여자 정연(박진희)을 늘 옆에서 바라보기만 하고 자신의 처지를 알기에 다가서려는 그녀를 속에도 없는 말로 밀어내고는 절규하는 그 모습은 까치의 옛사랑 그대로다. 물론 대사로 "널 위해 뭐든 할 수 있다"는 말은 안하지만, 그의 행동이 그 대사를 대신한다. 그 사랑을 방해하는 존재로 조민우(주상욱)는 마동탁의 역할이다. 뭐든 다 가졌지만 정연의 사랑만은 가질 수 없는 존재.

쿨한 사랑의 시대에 촌스럽게 느껴지는 까치식의 사랑이 21세기에 부활한 것은 왜일까. 물론 그것은 이 두 작품이 모두 7,80년대를 다루는 시대극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바탕에 깔려있는 감성이 현재와 만나는 지점이 분명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그것은 강한 남성에 대한 희구, 그 시절에 대한 향수다. 물론 이 두 작품에는 까치식의 이야기와는 확연히 다른 점이 존재한다. 그것은 바로 희생적 사랑에만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성장과 행복에도 주목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 지점, 향수를 자극하는 옛사랑과 현재적인 관점에서의 행복을 추구하는 모습이 교차하는 세대의 접합점은, 이들 드라마가 왜 과거를 다루면서도 현재의 인기를 끄는 지를 잘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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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드라마에서 아역들이 각광받는 이유

정말 저게 아역의 연기일까? 달라진 눈빛을 보면 영락없는 역할에 빙의된 성인연기자의 그것. 최근 들어 드라마를 볼 때마다 드는 놀라움이다. '구미호 여우누이뎐'의 김유정. 사실 그녀가 맡은 역할은 쉬운 게 아니다. 반인반수인데다, 사람을 사랑하는 상황은 복잡한 감정을 표현해내야 한다. 성인들도 힘들다는 구미호 역할과 지금 그녀가 하고 있는 연이라는 캐릭터의 역할은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오히려 '구미호 여우누이뎐'에서는 구미호보다도 연이라는 캐릭터가 중심이 되는 느낌마저 든다.

아무리 드라마라도 지나친 게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지만, 연이와 정규(이민호) 도령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들은 구미호(한은정)와 윤두수(장현성)의 멜로와 거의 병렬적인 힘을 만들어냈다. 초파일 연등을 내려다보며 그 등을 단 사람들은 다 달라도, 등에 담겨진 마음은 같다며, 연이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정규 도령, 하지만 연꽃을 따주려다 물에 빠지자 그를 구하기 위해 반인반수의 모습을 드러내는 연이의 그 아픈 내면은 김유정이라는 어린 연기자를 통해 잘 표현되었다.

'구미호 여우누이뎐'은 모성애와 부성애가 부딪친다는 점에서 그 대상이 되는 아이들의 역할 또한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연이와 대척점에 서 있는 초옥을 연기하는 서신애는 '지붕뚫고 하이킥'에서의 선한 웃음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패악스런 연기로 시청자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연이를 우물에 빠지게 해놓고, 달려온 연이의 엄마에게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이미 늦었다"고 말하는 초옥은 보는 이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연이가 어린 구미호의 역할이라면, 초옥은 그 구미호를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 인간이란 존재의 어린이 버전이라 할만하다.

최근 아역이 과거와 달라진 점은 과거처럼 성인 연기자들을 보조해주거나, 그들의 어린 시절을 잠깐 보여주던 것에서, 이제는 드라마 자체를 이끌어가는 독립적인 존재로 서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1,2회에 불과했던 아역의 분량이 점점 늘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것은 단지 '구미호 여우누이뎐'처럼 아역이 특히 중요한 드라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자이언트'에서도 아역들의 연기는 성인 못잖은 몰입을 만들어내며 꽤 오랫동안 선보여졌다. 어린 강모 역할의 여진구나 어린 정연 역할의 남지현은 대표적이다.

한편 '제빵왕 김탁구'에서 어린 탁구 역할을 연기한 오재무는 천연덕스런 사투리까지 써가며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지금은 성인 역할로 바뀌어 윤시윤이 그 연기의 바톤을 이어열연하고 있지만, 아직도 오재무가 남긴 어린 탁구의 아우라는 여전히 남아있다.

아역들이 이처럼 드라마의 부수적인 존재에서 중심 역할로 변모하게 된 이유는 두 가지다. 그 첫째는 아역들이 이제 이런 역할을 소화해낼 만큼 연기력이 좋아졌다는 것이다. 영상에 익숙한 이들 세대들은 카메라 앞에서 성인들보다 저 자연스런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둘째는 드라마의 극성을 끌어올리는데 아역이 가진 힘이 크다는 점이다. '구미호 여우누이뎐'에서 연이가 당하는 상황은 그것이 아이이기 때문에 더 강도가 커지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아이들이 가족을 잃고 길거리에서 뿔뿔이 흩어져 생존해가는 '자이언트'의 이야기나, 거의 막장에 가까운 현실 속에 내팽개쳐지는 '제빵왕 김탁구'의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렇게 달라진 환경이 만들어내는 문제도 있다. 그것은 이 아역들이 선전하는 무대가 청소년 드라마가 아니라 성인들의 드라마라는 점이다. 따라서 아역들은 성인 못잖은 폭력적인 상황에 내몰리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기도 한다. 이것은 아역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이런 드라마에 노출되기 쉬운 어린 시청자들에게도 그다지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한다.

아역 전성시대는 이제 아이들도 연기의 영역에서 당당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반증으로서 반가운 일이지만, 또한 거기에는 분명한 어떤 수위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성인 못잖은 놀라운 아역들의 연기를 좀 더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제작진들의 배려가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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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구미호'에 겹쳐지는 '엑소시스트', 그 아픈 진실과 숙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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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미호 여우누이뎐' 6회를 보면서 저는 줄곧 무언가를 떠올렸습니다. 한때 저에게 큰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던 영화 '엑소시스트' 였습니다. 사실 '엑소시스트'는 단순한 공포영화가 아니라서, 저와 같이 크게 공감하고 충격받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냐?" 면서 공감하지 못하기도 했던 영화입니다. 영화의 기본 줄거리는 아주 간단합니다. 한 소녀가 악령에 사로잡혔고, 그 악령을 내쫓으려던 두 명의 엑소시..

    2010/07/21 15:20

'자이언트' 일으킨 가족애, 그 가능성과 한계

'자이언트'의 시청률은 최근 몇 회 동안 갑자기 올랐다. 10% 언저리에 머물던 시청률은 18%대까지 올랐고, 현재는 16%에서 숨고르기를 하고 있다. 대작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자이언트'의 초반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이유는? 국책성 드라마라는 오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이런 오해는 눈 녹듯 풀렸다. 복마전을 방불케 하는 엎치락뒤치락하는 사건들의 연속은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긴박하게 흘러갔다.

강남땅을 두고 벌이는 치열한 각축전은 사극의 전투를 연상케 할 정도. 하지만 국책성 드라마라는 오해가 풀리고, 숨 가쁘게 돌아가는 사건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은 정체상태였다. 이런 멈춰선 '자이언트'의 거대한 몸을 움직이게 한 것은 도대체 뭘까. 바로 가족이었다. 어린 시절 뿔뿔이 흩어졌던 강모(이범수)와 성모(박상민) 그리고 미주(황정음)가 차례차례 재회하는 장면에서 좀체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던 '자이언트'의 무거운 시청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31빌딩 앞에서 미주가 그녀를 바라보는 강모의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한 눈을 보면서 "오빠?"하고 말했을 때, 미주 앞에 나타난 성모가 옛날 사진관에서 찍었던 빛바랜 사진을 꺼내들 때, 그리고 강모를 구해낸 성모가 동생에게 "내가 네 못난 형이다"라고 말할 때 드라마의 집중도는 극에 달했다. 우리네 드라마에서 '가족'이라는 코드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 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가족 코드가 '자이언트'에 부여한 힘은 그간 끝없이 벌어졌지만 깊은 감정이입을 만들지는 못했던 일련의 사건들을 남다르게 만들었다. 잡혀온 강모를 폭행하는 조필연(정보석)을 바라보는 성모의 눈빛에는 불꽃이 튀었고, 이것은 그간 묻혀있던 성모라는 캐릭터를 재발견하게 만들었다. 박상민의 연기가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이 재발견된 캐릭터의 힘이기도 하다. 한편 연기력 논란까지 불러 일으켰던 황정음 역시 가족을 만나 미주라는 캐릭터가 살아나면서 '눈물의 여왕'으로 재탄생되었다. 이것은 가족이라는 코드가 그저 뿔뿔이 흩어져만 보이던 사건들 사이에 어떤 강력한 접합제 역할을 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캐릭터는 감정선이 녹여진 사건들 속에서 살아나기 마련이다.

'자이언트'의 시청률이 급상승한 또 하나의 이유는 멜로다. 그간 겉으로만 빙빙 돌던 강모와 정연(박진희)의 멜로가 급물살을 타면서 드라마는 좀 더 애틋해졌다. 정식이 저지른 살인누명을 뒤집어쓰고 도망 다니는 강모를 위해, 정연은 머뭇대던 감정을 드디어 드러낸다. 멜로 역시 가족 코드와 마찬가지로 일련의 사건들에 깊은 감정선을 부여한다.

물론 가족코드나 멜로코드가 가진 단점도 있다. 그것은 사건을 단순화시키고, 선악구도를 너무 뚜렷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가족으로 뭉치기 전에는, 또 멜로로 서로를 사랑하기 전에, 이 드라마는 어떤 방향으로 튈 지 감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선악구도가 불분명했다. 하지만 관계가 명확해지자, 이제 가족을 중심으로, 또 연인을 중심으로 선악구도는 자연스럽게 자리하게 된다. 선악구도보다는 권력과 욕망을 두고 벌어지는 끝없는 전쟁의 양상이 장점이던 '자이언트'라는 시대극에는 조금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결국 '자이언트'의 시청률 급상승에는 우리네 드라마에서 가족코드와 멜로코드가 왜 그리도 오래도록 반복되는 지를 잘 말해준다. 우리에게 이 두 코드는 식상하면서도 강력하다. 따라서 적절히 사용된다면 큰 효과를 가져오지만, 지나치게 매몰되면 오히려 식상해질 위험성도 생긴다. '자이언트'가 계속적인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사건과 이들 코드 사이에 적절한 균형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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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자이언트' 의외로 그 흥미로운 신파의 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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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강모(이범수)가 드디어 만보건설의 황태섭(이덕화) 회장이 조필연(정보석)과 함께 자기 아버지를 죽인 원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린시절부터 믿고 의지하며 진심으로 모셔 온 황태섭이 원수였다는 사실은 이강모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원래 이성모(박상민)는 동생을 복수극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아서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하려 했지만, 동생이 결혼해서 함께 도망치려는 여자가 바로 황태섭의 딸 황정연(박진희)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잔인한 비밀을 털어..

    2010/07/20 15:05

'세바퀴', 가희 논란 밑바닥에 깔려있는 정서

초심이란 말은 이럴 때 어울리는 말이다. 제작진이 스스로 밝힌 것처럼 '세바퀴'의 가희 논란에서 정작 가희의 잘못은 없다. 잘못은 초심을 잃은 제작진에게 있다. '세바퀴'라 불리지만 이 프로그램은 '세상을 바꾸는 퀴즈'가 본래 이름이다. 뭐가 그리 대단한 퀴즈길래 세상을 바꾼다는 얘기일까. 중요한 건 퀴즈 자체가 아니라, 퀴즈에 참여하는 신구 세대들과 그들이 서로 소통하고 어울리는 그 과정이다. 그 과정은 실로 세상을 바꿀만했다. 퀴즈를 풀며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신세대들과 중장년층이 서로 어우러지는 그 광경.

선배들은 신세대들의 문화를 잘 몰라도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였고, 신세대들 또한 선배들 시대의 문화를 리바이벌해주는 존경의 태도를 유지했다. '일밤'의 한 파트로 있을 때는 이 신구세대의 균형이 잘 이루어졌다. 아마도 그 시간대는 신구세대 모두를 배려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일밤'에서 빠져나와 몇 차례 편성표의 자리를 옮겨 다니다 작금의 밤 시간대로 자리를 잡으면서 '세바퀴'는 조금씩 변한 게 사실이다.

내적인 이야기보다는 외모에 치중하는 경향도 생겼다. 젊은 남자 아이돌에게 복근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고, 보여주면 일제히 환호하는 아줌마들의 모습, 그리고 때로는 과감하게 복근을 만지거나 껴안는 장면들은 물론 호감의 표시이거나 웃음을 주기 위한 과장일 테지만, 이런 장면이 연출될 때 유의해야할 점은 거기 세워지는 젊은 남성 혹은 여성이 이 당혹스런 분위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다. 조권 같은 이미 예능감이 충만한 아이돌이라면 오히려 분위기를 압도하면서 상황을 주도해나간다. 이럴 경우, 성희롱 같은 느낌은 상쇄된다. 물론 이런 연출이 잘된 것이라는 얘기는 아니지만, 그나마 이런 경우는 어떤 균형이 유지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 균형이 깨졌을 때가 문제다. 아저씨와 아줌마들이 젊은 아이돌들을 세워놓고 춤을 추게 하고 복근을 보여 달라고 조르는데, 그 행동이 어떤 강요 같은 느낌을 줄 때, 게다가 프로그램이 전체적으로 이런 느낌으로만 흐를 때, 그건 당하는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그걸 보는 시청자들까지 불편하게 된다. 문제가 생겼던 가희가 출연했던 '세바퀴'에서는 특히 그런 불균형이 심했다. 이날 출연한 줄리엔 강을 놓고 벌어지는 아줌마들의 토크와 행동들이 특히 그랬다. 박미선이 계속 줄리엔 강이 "잘생겼다"고 연발하자, 이경실은 그래서 미리 "침을 발랐다"고 표현했으며(이때 줄리엔 강은 그 말뜻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 뜻이 '뽀뽀'를 뜻하는 거냐는 줄리엔 강의 질문에 이경실은 "뽀뽀 원해?"하고 다시 물었다. 결국 줄리엔 강은 "허그를 잘 한다"는 이휘재의 말에 따라, 아줌마들의 애정 공세에 일렬로 죽 늘어선 그녀들을 하나하나 껴안아줘야 했다.

가희가 나왔을 때는 조형기가 자신의 과도한 애정을 표현했다. 이것은 지금껏 조형기가 가진 캐릭터에 비춰볼 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외모 쪽으로만 흘러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조형기의 애정 역시 그다지 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급기야 이상형에 대한 질문이 흘러나왔고, '자기보다 키가 작은 사람은 싫다"는 문제의 발언이 나왔다. 그리고 역시 외모에 대한 비교가 이어졌다. 그 이상형에 맞는 사람은 줄리엔 강밖에 없다며, 그와 그녀를 나란히 세우는 것. 그 후에 예정된 대로, 가희가 섹시한 춤을 추었고, 거기에 대해서는 김구라가 넋이 나간 모습을 연출했다.

'세바퀴'의 외모에 대한 치중은 결국 성적인 뉘앙스를 풍기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그런 분위기는 신구 세대 간의 균형있는 접근이 아니라, 아저씨 아줌마들이 젊은 세대들을 세워놓고 그 성적인 뉘앙스(외모로 표현되는)를 소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상황이 만들어내는 문제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성 희롱 같은 불편한 장면들이 연출된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아저씨 아줌마들로 표상되는 세대들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아저씨 아줌마들은 다 그래)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이런 차원으로 넘어가면 애초에 '세바퀴'가 의도했던 세대 간의 소통은 요원해진다. 결국 구세대들의 젊은 세대를 소비하는 방식으로 흘러간다는 얘기다.

'세바퀴'의 가희 논란이 불거진 것은 바로 그 키 얘기 자체가 민감해서라기보다는, '세바퀴'가 계속 의도적으로 연출해낸 이런 자극적인 구도 탓이 더 크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상형을 물어보는데, 외모를 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스토리텔링이 될 것이다. 따라서 '세바퀴'의 문제는 '가희 논란'이 문제가 아니라, 이렇게 초심과는 멀리 와 버린 작금의 프로그램 전반의 문제다. 아무리 자정에 가까운 성인들의 시간대라고는 하지만, 너무 노골적인 외모나 성적인 접근은 오히려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무엇보다 이 땅의 모든 중년들이 젊은 외모 앞에 노골적인 것처럼 그려지는 것은 분명 문제의 소지가 다분하다. 신구세대가 균형 잡혀 있던 그 때의 초심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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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불패', 제2의 써니가 필요하다

"나도 여기 싸고 싶다." 넓게 펼쳐진 정원에서 빅토리아가 서툰 한국말로 말하자, "싸고 싶다가 아니고 살고 싶다!", 하고 써니가 고쳐준다. 사실 고쳐준 것이 아니라 빅토리아의 서툰 말투를 가지고 말장난을 한 것. 그러자 빅토리아가 다시 고쳐 말하는데, 이번에는 써니가 이 말을 '쌀국수'로 몰아간다. "쌀국수도 아니고..." 우연히 지나치면서 나왔을 이 짧은 대화는 그러나 써니가 가진 특유의 예능 순발력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써니가 '청춘불패'에서는 딱 그 주인공이었다. 써니와 유리가 '청춘불패'에서 빠지고 나서 이 프로그램은 분명 구심점이 흔들렸다. 거의 대부분을 김신영이 이끌어나가고 있지만(물론 이것은 과거에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그녀를 받쳐줄만한 아이돌이 눈에 띄지 않았다. 사실 '청춘불패'는 뭐니뭐니해도 걸그룹 아이돌이 중심이 되어야 하는 프로그램이다. 따라서 김신영이 아무리 진행을 해나간다고 해도 그녀에게 전적으로 기대서는 프로그램의 정체성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써니의 빈자리가 느껴질 수밖에 없다.

써니가 특별게스트로 참여한 일본특집 편에서 김신영의 진행은 써니의 닭살 애교로 살아났다. 버스 안에서 김신영은 써니에게 '일본식 애교 3종세트'를 요청했고, 써니는 특유의 주부애(주먹을 부르는 애교)를 선보였다. 그러자 김신영은 거기에 맞춰 “오랜만에 주먹을 부른다”며 “토쏠리노 노오데쓰(토하시면 안됩니다), 비닐봉다리 후루룩데쓰요(토는 비닐봉지에 하세요)"라고 개그를 던졌다. 개그맨인 김신영과 아이돌인 써니의 조화가 빛나는 장면이었다.

게스트로 참여했기 때문에 써니는 그다지 전면에 나서지 않는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써니가 거기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청춘불패'는 어떤 활기가 느껴졌다. 특히 써니와 또 다른 콤비를 이루던 효민은 잠자는 써니를 두고 이른바 병풍 개그를 환기시켰다. 늘 써니의 병풍을 자처했던 효민이 이번에는 카메라 앞에 서서 써니가 뒤에 있다고 말하며 그 상황을 뒤집어버린 것. 이것은 효민이 가진 병풍이라는 캐릭터에 써니가 얼마나 큰 역할을 하고 있는가를 잘 말해준다.

그다지 튀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던 써니지만, '청춘불패'에서 그녀의 빈자리는 너무나 크게 느껴진다. "이렇게 일 잘하는 여자는 처음 봤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고, 그렇다고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에서의 역할 또한 톡톡히 해냈다. 중요한 건 자신 혼자 개인기를 통해 웃음을 주는 것이 아니라, 멤버들과의 관계(콤비)를 통해 '청춘불패' 전체의 분위기를 상승시키는 역할을 해왔다는 점이다.

써니가 특별 게스트로 참여한 '청춘불패' 일본 특집편은 예능 프로그램에서의 존재감이라는 것이 무엇을 통해 빛나는 지를 잘 말해준 사례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써니와 유리가 빠지고 빅토리아와 주연, 김소리가 새롭게 합류하여 과도기에 처해있는 '청춘불패'가 고민해야할 숙제로 남아있다. 써니의 빈 자리를 채워주고 전체 팀원들의 캐릭터를 살려낼 차세대 아이돌 분위기메이커는 누가 될 것인가. '청춘불패' 본연의 자세인 시골에서의 일에도 열심이면서, 또 예능으로서의 웃음 또한 놓치지 않는 제2의 써니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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