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분으로 압축된 다큐, 그 일상의 미학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릇에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 상차림이 달라지게 마련이지만, 때론 그릇이 어떤 형태이냐에 따라 담겨지는 음식도 달라진다. 감성다큐 '미지수'는 20분으로 압축된 3편의 다큐멘터리를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한다. 짧아진 분량은 단지 짧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는다. 통상적으로 1시간 정도의 다큐멘터리를 구상하고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만만찮은 분량이 부담으로 작용해 다큐멘터리 자체를 무겁게 만들기 마련이다. 여기에 다큐가 삶을 성찰하는 형식이라는 고정된 인식은 다큐 자체를 일상적인 삶과 멀어지게 하는 아이러니를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20분이라는 분량은 다르다. 누구나 카메라를 들고 찍어내기만 하면 채워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이 분량은 그 다큐 속에 담겨질 소재 역시 제한한다. 지나치게 진지한 부분은 소화해내기 어렵기 때문. 따라서 20분 분량 속에 들어오는 소재들은 우리 손에 들려져 삶을 바꿔나가는 휴대폰이 되기도 하고, 우리가 매일 타고 다니는 버스가 되기도 하며, 일상 속에서 스쳐 지나가던 골목길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 입고 지나쳤던 호피무늬 옷이 되기도 한다. 다큐라는 마운드에 올라서기 전, 20분이라는 분량은 그 VJ의 어깨에서 힘을 빼준다.

'미지수'가 특별해지는 것은 어깨에 힘을 뺀 투수가 오히려 더 잘 던지게 되는 것과 같다. 1시간 분량의 다큐멘터리라면 재료가 될 수 없었던 것들이 재료로 올려지자, 그 요리법 또한 달라졌다. 다큐멘터리는 거대담론을 담기 위해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하기보다는 이 미시적 세계를 살짝 드러내주는 것으로 감성으로 무장한다. 주장하던 목소리는 권유하는 목소리로 바뀌었다. '2010 골목길 감성지도 만들기'는 말 그대로 골목길 속으로 들어가 차츰 사라져가는 향수의 한 자락을 잡아내면서 우리에게 일상 속에 담겨진 특별한 그 무언가를 바라보라고 말한다. '어떤 고향 이태원'에서는 한국을 찾아온 외국인들의 고향으로서의 이태원을 재조명한다. '실험여행, 서울로의 출국'은 서울을 찾아오는 외국인들의 시선을 따라가기 위해 그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서울을 다시 바라본다.

논리적 접근이 영상을 통한 설명이라면, 감성적 접근은 그 포착된(혹은 연출된) 영상 자체가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말해주는 직관적인 보여줌이다. 따라서 '미지수'는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을 위해 연출에 적극적이다. 다큐를 흔히들 연출 없는 영상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다큐만큼 연출에 고민하는 장르도 드물다. 다큐는 기본적으로 촬영자의 시선이 하고자하는 이야기를 규정하는 지극히 주관적인 장르이기 때문이다. '비빔밥, 그 섞임에 대하여'에는 지휘자가 등장해 젓가락을 들고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장면이 나온다. 카메라가 지휘자의 앞을 휘돌아 비출 때, 그 젓가락 지휘가 비빔밥을 비비고 있는 구성은 분명한 연출이지만, 이 짧은 다큐가 전하려는 메시지를 가장 짧고도 명확하게 보여준다. 설명하지 않고 보여주려는 의도. 이것 역시 20분짜리 다큐의 압축 속에서 좀더 효과적인 스토리텔링을 고민하면서 나온 산물일 것이다.

'미지수'는 일일 다큐시대를 예고했던 '30분 다큐'의 후속작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30분 다큐'보다 더욱더 미적으로 영상을 구성하고 있고, 그 단순한 일상에서 시작한 영상은 의외의 지적인 결과물로 도출되곤 한다. '30분 다큐'가 그 시간적 단축으로 다큐의 일상화를 실험했다면, '미지수'는 거기서 한 차원 더 나아가 이 짧은 다큐를 미학적인 차원으로까지 끌고가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미지수'에 이르면 짧아서 쉽기 보다는 오히려 짧다는 그 형식 때문에 더 어려워지는 구석이 생긴다. 20분짜리 분량을 느슨하게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1시간짜리 분량을 20분으로 압축한다는 것. 따라서 이 미(美)적이고 지(知)적인 수(秀)작 다큐는 처음 그 낯설음을 따라 걷다보면 의외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거대한 외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보다는 내게 가까운 일상 속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한 자락을 끄집어내 보여준다는 것은, 어쩌면 이 시대가 요구하는 다큐의 새로운 지점인지도 모른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 http://thekian.net/trackback/1133 관련글 쓰기

복근에 담겨진 사회적 의미

사용자 삽입 이미지

'추노'(사진출처:KBS)

드라마 '추노'는 몸뚱이 하나로 시대의 억압과 맞서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몸에 대한 연출은 '추노'가 가진 메시지를 가장 잘 전달한다. 멋진 남자들이 훌러덩 옷을 벗어던지고 군살 하나 없는 복근을 보여주는 것이 단지 눈요기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잘 단련된 복근이 드라마의 인기에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최장군(한정수)이 숙소로 돌아와 지친 몸을 씻을 때 드러나는 복근 앞에서, 송태하(오지호)가 날이 엇나간 장도를 휘두를 때 언뜻 옷깃 사이로 보여지는 몸 앞에서 시청자들의 눈은 분명 호사를 누렸던 것이 사실이다.

'추노'야 그렇게 몸을 드러내는 것이 드라마의 연출의도와 적합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드라마에서도 남성의 복근을 보여주는 것은 하나의 트렌드처럼 되어 있다. '파스타'에서 까칠 쉐프 최현욱(이선균)은 이태리파 요리사들을 옥상으로 불러 모은다. 새로 온 오세영(이하늬) 셰프의 육수가 감칠맛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다짜고짜 옷을 벗으라고 하는 건 좀 생뚱맞다. 다분히 복근 노출을 통한 팬 서비스(?)의 의도가 강한 장면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파스타'(사진출처:MBC)

최근 송일국의 명품근육이 갑작스레 공개되며 화제를 불러 모았다. 그런데 그 기사들에는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의 주인공으로서의 송일국을 부각시켜 놓았다. '보석비빔밥' 후속으로 방영되는 '신이라 불리운 사나이'의 홍보를 위해 송일국의 몸이 먼저 공개된 것이다. 반응은 나쁘지 않다. 남자들이 드라마에 출연해서 쓸데없이 상체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던 과거를 생각해보면 작금의 복근 노출에 대한 대중의 반응은 호의적인 편이다.

TV의 복근 노출은 드라마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너나 할 것 없이 다투어 복근을 노출한다. 아예 대놓고 "좀 보여주시죠"하는 MC의 요청과 거기에 대해 거리낌없이 옷을 들춰주는 토크쇼의 풍경은 이제 흔한 것이 되었다. 이른바 '찢택연'으로 대변되는 짐승돌들은 옷을 찢어가며 복근을 보여주는 퍼포먼스로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승승장구'에 출연한 2PM의 준호는 멋지게 춤을 추는 것보다 한번 옷을 찢는 퍼포먼스가 더 대중들의 뇌리에 각인된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남성들의 복근 노출은 연예인의 몸에 대한 성 상품화가 여성에서부터 남성으로까지 넘어오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복근이라는 특정 부위는 이러한 단순한 의미 이상의 것들을 담아낸다. 이것은 과거 불쑥 나온 남자들의 배를 '인격(?)'이라고 부르던 시대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당시 권위주의적인 사회 속에서 남성들의 매력은 자기 자신보다는 배경으로 점수 매겨지곤 했다. 따라서 배가 나온 것은 '여유'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던 것.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배경 보다는 그 각자가 가진 고유한 매력으로 어필되는 작금의 상황에서 '인격'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이제 자기 몸을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하게 된 시대다. 사회가 축적하던 시대에서 이제는 소비하는 시대로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못 먹어서 죽던 시대는 가고, 이제 많이 먹어서 죽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니 돈 많고 지위가 높을수록 오히려 자기 몸을 관리하는 데서 여유를 발견하게 된다. 즉 복근에는 이처럼 건강한 몸에서 연상되는 잘 관리된 삶의 태도(혹은 그렇게 관리할 수 있는 능력)가 투영된다.

이것은 작금의 대중들이 환호하는 남성과 여성들의 몸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태도다. 남성들의 복근처럼, 여성들의 이른바 '꿀벅지'는 이러한 건강한 몸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을 담고 있다. 과거처럼 남성들의 시선에 포획되어 억압받아온 바짝 마른 허벅지가 아닌, 스스로 건강한 허벅지의 노출이 잘 관리된 삶을 표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복근 노출은 단지 성적인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이제 남성들의 삶까지 투영하는 매력의 상징이 되었다. 게다가 몸은 정직하게도 노력하는 만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어떤 진정성까지도 갖고 있다. 드라마에 내용과 상관없이 남성들이 복근을 드러내고, 가수들이 앞다퉈 옷을 찢으려는 것은 그 매력을 통해 자신들의 능력을 더욱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연기나 노래 실력만큼 중요한 것이 그 사람이 가진 매력이 된 시대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 http://thekian.net/trackback/1117 관련글 쓰기

  1. 태터앤미디어의 생각

    Tracked from tattermedia's me2DAY  삭제

    이것은 과거 불쑥 나온 남자들의 배를 '인격(?)'이라고 부르던 시대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당시 권위주의적인 사회 속 남성의 매력은 개인보다 그 배경이 중심이었다. 따라서 배가 나온 것은 '여유'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던 것. <TV, 복근의 전시장이 된 이유>

    2010/02/18 15:26
  2. 여자 연예인의 술광고, 해도 너무하다

    Tracked from 당신 덕분에 꽃이 핍니다♡  삭제

    요즘 광고는 이미지를 팝니다. 이 물건이 얼마나 좋은지 하나하나 알리기보단 유명인들을 데려다가 행복한 표정을 짓게 하죠. 이 물건을 사야 행복해질 거라고 광고는 속삭입니다. 이런 광고가 대중매체뿐 아니라 골골샅샅이 없는 데가 없고, 이미지가 쳐놓은 그물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xml:namespace> 마구 쏟아지는 이미지를 만만하게 볼 수 없죠. 이미지들은 눈에 들어왔다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 무의식에 들어가 자리를 잡으니까요. 이..

    2010/02/18 17:15
  3. 新天地、新約の約束した救いの場所

    Tracked from 日本語  삭제

    本当に正しく知りましょう。聖書と新天地 この内容は教会や聖徒の信仰知識のために共益的な目的で聖書を根拠として書いたものです。  また、この内容は教会や聖徒たちの真信仰のため「あなたがたは、然り、然り、...

    2010/02/19 15:14

불황이 만들어낸 마이너리티 감성

사용자 삽입 이미지

'미녀들의 수다'(사진출처:KBS)

만일 당신이 사회의 정신적인 뇌관을 건드리는 테러리스트라면, 우리 사회만큼 간단한 테러 목표도 없을 것이다. 그저 남자라는 단어와 '루저'라는 단어를 붙여 넣기만 하면 엄청난 파장이 일어날 테니까. '미녀들의 수다'의 한 여대생이 "남자 키 180cm 이하면 루저"라는 말 한 마디가 일으킨 대폭발(?)은 지금 우리 사회가 이 부분에 있어서 얼마나 민감해져 있는가를 잘 말해준다.

불황에 남녀 구분이 있을까마는 아마도 상대적인 박탈감은 남성들이 더 할 것이다. 본래 높은 위치에 계시던 분이 진창으로 나서야 그 힘겨움을 더 느끼게 되는 법 아닌가. 남성들은 가부장제적 사회 속에서 이제 조금씩 남녀평등의 사회로 이행해가고 있는 중이고, 차츰 자신들이 가졌던 이성적 능력보다, 여성성이 가진 능력이 이 감성적인 시대에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을 인정해가고 있는 중이다. 물론 그것은 바람직한 방향이지만 그렇다고 그 박탈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지독한 불황은 남성들의 어깨를 더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실로 이 계속된 불황 속에서 우리네 남성들의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왔다. 그들은 이 이행기에 여전히 가장이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있으면서도, 그 지위는 누리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있다. 청년실업에서부터 조기퇴직까지 이른바 가장으로서의 남성들의 목은 댕겅댕겅 잘려나갔다. 그러니 이 가뜩이나 힘겨운 상황에 처한 남성들에게 의도적이든 우연이든 붙여진 '루저'라는 단어는 뇌관이 될 수밖에 없다.

'루저'는 무능력자에 회생 불가능한 폐인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상대적인 의미인 위너들과 비교될 때 분노감은 더 커지게 된다. 즉 세상은 위너들의 공고한 시스템으로 굴러가고 있고 '루저'들은 늘 질 수밖에 없는 패배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불평등한 사회 구조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혜수-유해진(사진출처:OSEN)

'루저'라는 말이 그저 한 때의 잘못 발화된 한 여대생의 실수담이 아니라는 것은, 유해진과 김혜수의 열애사실과 함께 드러난다. 유해진은 늘 조연 자리에 서 있던 인물이다. 그는 '전우치'에서 전우치로 등장하는 강동원이 아니다. 그는 전우치가 데리고 다니는 개 초랭이의 분신으로 등장한다. 그런 그가 늘 '엣지있게' 자신만의 스타일을 드러내는 당당한 미인 김혜수의 남자친구라는 사실은 고개 숙인 남성들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

그러고 보니 작년 한 해 눈에 띄게 약진한 예능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의 캐릭터들이 대부분 저마다 '대한민국 평균 이하'를 주창하던 남성들이라는 사실이 도드라져 보인다. 물론 '루저'라 지목되지는 않았지만 그 낮게 되어버린 남성들의 눈물겨운 도전과 노력에 우리는 감동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남성과 '루저'가 만나면 폭탄이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만큼 구조적으로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는 남성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어떻게 하면 '루저'라는 말조차 농담처럼 웃으며 들을 수 있는 사회가 될까. 아직은 요원한 느낌이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 http://thekian.net/trackback/1092 관련글 쓰기

  1. 태터앤미디어의 생각

    Tracked from tattermedia's me2DAY  삭제

    '루저'라는 말이 그저 한 때의 잘못 발화된 한 여대생의 실수담이 아니라는 것은, 유해진과 김혜수의 열애사실에서 드러난다 (…) 그가 늘 '엣지있게' 자신만의 스타일을 드러내는 당당한 미인 김혜수의 남자친구라는 사실은 고개 숙인 남성들에게 묘한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

    2010/01/24 01:12

환경 문제를 바라보는 몇 가지 시선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바타'와 '아마존의 눈물'(사진출처:뉴스코프, MBC)

2009년에 개봉한 영화 '2012'의 쓰나미는 온 지구를 삼켜버리지만 그 이유는 참으로 애매모호하다. 뭐 과학적인 이론이야 그럴싸하지만 과연 그런 지구 종말이, 그저 예언되어진 대로 벌어지는 것일 뿐, 인간과는 무관하다는 태도는 심지어 무책임하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하긴 할리우드에서 흥행을 위해 만들어진 재앙 블록버스터에서 윤리적인 측면까지 기대한다는 건 좀 지나쳐 보이기까지 한다. 재앙이 벌어졌으나 거기에 인간의 죄는 묻지 않는 태도, 끔찍한 지옥도가 펼쳐지지만 먼 거리에서만 바라봐 그 지옥도조차 스펙타클로 여겨지게 만드는 할리우드 CG의 놀라움 앞에서 환경 문제 같은 이야기는 쑥 들어가 버린다.

코맥 매카시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더 로드'는 이야기가 약간 다르다. 이 작품 역시 무엇이 그런 지구의 종말을 불러일으켰는지는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세세한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 영화는 이 모든 원인들이 바로 인간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종말 이후의 세계 속에 생존한 인간들의 모습이 그 종말의 원인을 말해준다. 사람들은 파괴된 세계 속에서 먹을 것을 찾아 헤맨다. 때론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끔찍한 카니발리즘을 만나지만 사실 이것보다 더 끔찍한 건 인간이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그 순간이다. 희망하는 자는 길을 따라 걸어가고, 포기한 자는 길 바깥으로 나가 짐승의 길을 가게 된다. '2012'는 종말의 스펙타클(?)을 보여주지만, '더 로드'는 보고 싶지 않은 현실, 환경 파괴가 가져오는 그 지옥도를 클로즈업해서 보여준다는 점이 다르다.

한편 '아바타'는 이미 파괴될 대로 파괴되고 에너지가 고갈된 지구에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 행성인 판도라로 날아간다. 그런데 아직도 인간들은 정신 못 차리고 지구에서의 잘못된 역사를 반복한다. 대체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판도라 행성의 원주민인 나비족의 터전을 불질러버리는 것. 문명의 바람을 이미 쐰 인간으로서는, 에너지를 얻기 위한 파괴는 어쩔 수 없는 운명일까. 휠체어 신세로 다리(아마도 기계 다리)를 얻기 위해 이 행성에 들어와 아바타(분신)를 이용해 나비족에게 접근한 제이크 설리(샘 웨딩턴). 그러나 그는 점점 나비족에게, 아니 이 아름다운 판도라 행성에 빠져든다. 결국 이 판도라 행성을 지키는 제이크 설리의 이야기는 바로 파괴되지 않았던 시절, 자연과 인간이 영적으로 소통하던 옛 시절의 지구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담는다. 판도라 행성을 구해낸 제이크 설리가 기계 다리를 포기하고 주술이 살아있는 자연의 품에서 새 몸을 얻는 장면은, 문명에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로도 읽히지만, 지긋지긋한 현실에서의 도피, 즉 가상이지만 낙원으로 영원히 접속되는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바타'와 '아마존의 눈물'(사진출처:뉴스코프, MBC)

MBC 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에서 '아바타'의 잔영이 보이는 것은 그 판도라 행성의 살아있는 자연이 아마존의 밀림을 그대로 닮아있기 때문이고, 대체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그 원주민들의 터전을 불 지르는 인간의 이야기가 바로 이 곳 아마존에서 지금 현재도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존의 눈물'의 시선은 '아바타'에서의 제이크 설리의 시선을 따라간다. 아마존 밀림 속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의 삶을 차츰 이해해가는 그 과정에서 저 한 편에서 밀림을 향해 다가오는 기계음을 듣게 되는 식이다. '북극의 눈물'에서 카메라가, 녹아가는 얼음 위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북극곰에 머무르는 것으로 지구적인 환경문제를 잡아냈던 것처럼, '아마존의 눈물'에서 카메라는 거기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삶을 따라가며 지구의 이야기를 건넨다. 물론 '아마존의 눈물'에는 파괴되어 가는 '지구의 허파'를 위해 싸우는 제이크 설리 같은 돈키호테는 없다. 하지만 바로 그 곳에 들어가 그 실상을 시리도록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과 대비시켜 담아온 그들이 바로 환경 파괴에 맞서는 첫 발을 내디디는 제이크 설리가 될 것이다.

올 겨울, 전 세계는 이상기온으로 들썩이고 있다. 우리나라는 때 아닌 폭설에 한파가 몰아닥쳤고, 지구 반대쪽에 있는 호주에는 난데없는 열대야로 펄펄 끓고 있다. 환경파괴로 인한 자연재해는 어쩌면 이제 우리가 지금껏 누려온 문명의 평온한 만큼 앞으로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존재가 될 지도 모른다. 이러한 자연재해를 보는 시선은 저마다 다를 수 있다. 누군가는 '2012'의 무책임한 태도로 바라볼 수도 있고, 누군가는 '더 로드'의 보고 싶지 않지만 반드시 바라봐야 하는 현실로 볼 수도 있으며, 누군가는 '아바타'가 그리는 막연한 야생과 자연에의 향수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며, 누군가는 '아마존의 눈물'처럼 그네들의 불행이 우리의 삶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통찰해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우리 각자의 미래도 달라질 것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문화는 때로는 이야기와 꿈을 통해 세상을 바꿔나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 http://thekian.net/trackback/1085 관련글 쓰기

  1. 아마존의 눈물,아바타 그리고 충무로의 불편한 진실

    Tracked from 아이엠그라운드  삭제

    You are on Pando~ra!!! 이 말 한 마디에 우리는 예고편을 통해서 팬도라로의 여행에 호기심을 얻습니다. 그리고 제이크 설리가 아바타를 이끌고, 팬도라에 들어가는 순간의 희열을 느낍니다. 정글로 진입하는 그 모습은 실제 아마존 정글 속으로 들어가는 듯한 환상이고, 탐험에 대한 숱한 이야기를 들었던 미지의 모험담처럼 신비롭게 그려집니다. 하지만 우리가 익히 상상할만한 스토리는 원시족에 맞서서 문명인 죽음을 이겨낸 것을 기억해봅니다. 영화..

    2010/01/15 09:42

'아마존의 눈물', 무엇이 문명이고 무엇이 야만인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마존의 눈물'(사진출처:MBC)

MBC창사특집 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 프롤로그 '슬픈 열대 속으로'가 살짝 보여준 속살은 실로 시선을 뗄 수 없는 문화적 충격과 이국의 자연이 주는 경이의 연속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옷 한 가지 걸치지 않고 살아가는 자연 그대로의 원주민들의 모습이었다. 마치 에덴을 빠져나오기 전의 아담과 이브처럼 거리낌 없는 모습. 하지만 원시 그대로의 몸에 옷을 걸쳐 입고 활 대신 총을 들고 사냥에 나서는 문명의 바람을 쐰 흔적이 역력한 몇몇 원주민들의 모습은 작금의 아마존이 무엇으로 병들어가고 있는가를 잘 말해준다.

레비-스트로스가 '슬픈 열대'라는 인류학의 기록을 통해 문명과 야만의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을 비판했듯이, '아마존의 눈물'은 문명인의 눈에는 충격으로 다가오는 야만의 모습을 그저 야만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그곳에 살아가는 원주민들은 물론이고 동식물에 이르는 생명들의 삶이 그 자체로서 얼마나 경이롭고 자연스러운 일인가를 보여줌으로써, 야만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 삶 속으로 파고드는 질병 같은 문명이라는 것을 말한다.

문명의 세계에서 이식된 질병은 원주민들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고, 문명의 욕망에 의해 파괴되는 자연은 이들의 삶의 터전을 사라지게 만들었다. '아마존의 눈물'이 그저 아마존이라는 지역을 포착하는 자연 다큐멘터리와 다른 지점은 이것이다. 이 다큐멘터리는 시리도록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과 그 자연을 파괴하는 문명의 모습을 병치해 보여줌으로써 환경 파괴의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환경 다큐멘터리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가 진짜 여타의 환경 다큐멘터리와 다른 지점은 이러한 아마존의 실상을 알려주는 카메라의 시선이 그 곳에 살아가는 원주민들의 이야기에 머물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휴먼다큐 사랑'에서 '로봇다리 세진이'를 연출한 김진만 PD는 당시 아마존으로 떠나기 전, '아마존의 눈물'은 자연 다큐이자 환경 다큐이면서 그 곳의 인간을 담아내는 휴먼 다큐가 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마존에서 힘겨워하는 원주민들의 삶을 몇몇 인물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전해주는 방식은 크게 환경 문제의 심각성을 강변하지 않아도 그 안타까운 아마존의 변화를 실감하게 해줄 것으로 보인다. 간염으로 죽을 날을 앞두고 어린 아들에게 사냥을 가르치는 아버지의 이야기나, 부모에게 버려져 허드렛일을 하며 살아가는 어린 아이가 "날이 저물 때면 자꾸 슬퍼진다"고 말하는 대목은 이국의 원주민들의 삶에 대한 이 다큐의 시선을 잘 보여준다. 그들의 삶에 공감하게 될 때, 아마존이 처한 문제 또한 자연스레 이해하게 되는 것.

프롤로그인 '슬픈 열대 속으로'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이 아마존을 취재하기 위해 원시의 밀림 속으로 들어간 제작진들의 고생담이다. 입에 맞지 않는 음식을 먹으며 맛있다고 얘기하기는 했지만 결국을 구역질을 해대고, 호의로 베풀어주는 코담배를 고통스럽게 받아주는 모습들, 그리고 해충들의 공격으로 온 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제작진들이 병원에 실려갈 정도로 고생을 하면서도 끝까지 카메라를 손에 쥐고 있는 그 모습은 실로 인상적이었다. 무엇이 그들을 그런 생고생에서도 버텨내게 해주었을까.

압도적인 아마존이라는 자연이 주는 어떤 숭고함에 매료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 자연이 파괴되어 간다는 안타까운 사실 때문일까, 아니면 그 곳에 살아가는 원주민들에게 동화되어 그들을 파괴한 문명의 야만을 끝내 고발하고 싶었기 때문일까. 그것이 무엇이든, 생고생을 마다않는 제작진들의 모습은, 이 경이로우면서도 충격적일 수 있는 영상을 마주하는 우리네 도시의 문명인들의 눈에도 그 자체로 그네들의 삶에 대한 강렬한 공감으로 다가온다. 아마존이라는 먼 거리까지 달려가서도 우리는 거기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때론 파괴적인 문명의 모습이기도 하고, 때론 그것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아마존의 눈물'은 자연과 인간, 문명과 야만 사이로 나누어진 그 속으로 뛰어 들어가 어떤 소통을 꿈꾸는 다큐멘터리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 http://thekian.net/trackback/1065 관련글 쓰기

  1. 아마존의 눈물, 폴리가미와 흡혈곤충 삐용을 살펴보니

    Tracked from 탐진강의 함께 사는 세상 이야기  삭제

    명품 다큐멘타리를 선보이고 있는 MBC가 '북극의 눈물'에 이어 '아마존의 눈물'을 창사특집 시리즈로 방송하기 시작했습니다. 벌써부터 놀라운 아마존 원시 부족을 비롯한 밀림 이야기가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아마존의 눈물 프롤로그 '슬픈 열대 속으로'편은 사극 '선덕여왕'에서 비담역으로 주가를 높인 김남길의 내레이션도 관심을 끌면서 이날 금요일 동시간대 15.7% 시청률로 1위를 차지할 정도였습니다. 대개 예능 프로그램이 시청률 선두를 차지하던 것에..

    2009/12/20 00:28

대중은 지금 서민들의 영웅을 원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홍길동의 후예'(사진출처:어나더라이프컴퍼니)와 '전우치'(사진출처:영화사집)

영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선덕여왕'은 대부분의 사극이 그러하듯이 수많은 영웅들의 탄생과 성장을 그려냈다. 그 중 덕만(이요원)과 미실(고현정)은 난무하는 칼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세 치 혀만으로도 충분한 정치적 지도력을 선보이며 여성 영웅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여성성의 시대, 이 여성 영웅들의 리더십은 꿈꾸지 않는 작금의 현실 정치가 희구하는 것으로, 대중들은 그 강력한 판타지 속으로 빠져들었다.

덕만과 미실이 그 시대의 정점에 서서 그 통치를 통해 현실을 개척해나가는 영웅이라면, '아이리스'의 현준(이병헌)은 시대가 꺾어버린 개인의 삶을 복원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래서 그것이 결국은 시대를 바꿔버리는 그런 영웅이다. 그 시대란 다름 아닌 남북분단의 상황이고, 현준은 그것을 고착화시키려는 아이리스와 홀로 대결하는 영웅이다. 남북이라는 소재 때문에 현준은 구태의연한 냉전시대의 영웅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이리스'가 현준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남북의 대결이 아니라 집단과 개인의 대결이기 때문이다.

'히어로'의 도혁(이준기)은 서민들의 영웅이다. 삼류잡지사 기자였다가 잡지가 폐간되자 전직 조폭이었던 용덕(백윤식)과 용덕일보를 창간하는 도혁이 싸우고 있는 것은 대세일보라는 거대 언론이다. 물론 도혁은 장총찬 같은 주먹도 아니고, 그렇다고 필력이 뛰어난 기자도 아니지만 그를 '영웅'이라 부르는 것은 대세일보로 상징되는 정의가 사라져버린 시대에 사라진 영웅을 거꾸로 말해준다. 도혁은 정의 하나를 쥐고 있는 인물로서 이 시대의 영웅이 된다. 현실에 존재하는 많은 대세일보 같은 언론사들의 정치적 행보들은 도혁 같은 맨주먹의 정의로운 행동을 대중들이 희구하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대중들의 영웅에 대한 희구는 안방극장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화는 고전 속의 영웅을 현대로 불러들인다. 홍길동의 후손들이 살아남아 아직도 홍길동이 하던 '대도의 길'을 걷는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홍길동의 후예'가 그렇고, 설화 속의 인물이 현대에 깨어나 세상을 어지럽히는 요괴들과 한판 승부를 벌이는 '전우치'가 그렇다. 이것은 홍길동과 전우치 같은 이야기가 당대 서민들의 억압을 풀어주는 시대의 영웅으로서 탄생한 것과 맥락이 같다. 이들은 현 시대의 억압 속에 답답해하는 대중들의 마음 한 구석에서 탄생한다.

'홍길동의 후예'는 이른바 '좋은 도둑과 나쁜 도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겉으로 보기엔 착한 일을 하는 것 같은 경제인 이정민(김수로)은 사실은 대중들의 피를 빠는 이 시대의 탐관오리 즉 나쁜 도둑이고, 홍길동의 후예인 홍무혁(이범수)은 그의 금고를 털어 사회에 기증하는 좋은 도둑이다. 이 영화가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들 사이에서 취하고 있는 자세는 흥미롭다. 이정민은 피규어 매니아로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들(예를 들면 슈퍼맨이나 배트맨 같은)이나 재패니메이션의 로봇들을 수집하는데, 그의 캐릭터는 종종 이 슈퍼히어로들을 대변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그러니 홍무혁이 이정민과 벌이는 대결은 한편으로 보면 이들 할리우드와 일본의 영웅들과 우리네 서민적인 영웅이 벌이는 대결로도 보여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히어로'(사진출처:MBC)

이러한 영웅의 서민적인 면모는 우리네 영웅상의 한 특징이다. 할리우드 슈퍼히어로들이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하는 자들이라면, 우리네 서민적인 영웅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들은 지구적인 고민보다는 당장 서민들이 갖고 있는 고민들을 풀어주려고 노력한다. 그것은 서민이 삭제된 정치이기도 하고(선덕여왕), 집단이 꺾어버린 개인(아이리스)이기도 하며, 정의가 사라진 사회(히어로)이기도 하고, 나쁜 도둑들이 판을 치는 세상(홍길동의 후예)이기도 하다. 이 영웅들의 서민친화적인 모습은 그 권위적인 모습을 던져버리는 것에서부터 아예 코믹한 영웅의 탄생으로까지 이어진다.

특히 우리네 영웅을 다루는 영화들이 대부분 액션과 함께 코미디를 장르적 특성으로 갖고 오는 점은 주목할 만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네 영웅은 볼거리라기보다는 시대적 공감에서부터 탄생하고 있다는 징후일 것이다. 이러한 서민적 영웅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통쾌함을 느끼는 것은 그들이 날라 다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속에 날카롭게 숨겨진 풍자의 칼날이 이 시대의 억압을 풀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렇게 이야기 속에서 영웅들이 쏟아져 나오는 양상은 이 시대가 가진 억압들을 말해주기도 한다. 대중들은 지금 영웅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서민적인 영웅을.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 http://thekian.net/trackback/1045 관련글 쓰기

  1. 히어로, 이쯤되면 비극이다! [히어로]

    Tracked from 연어군의 파닥파닥  삭제

    - 본격적으로 펼쳐질 <히어로>의 이야기들 <히어로>가 오늘로 4회까지 방영되었는데요. 어느정도 큰 흐름들이 자리잡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세그룹과 용덕일보의 대립구조인데요. 이 대립구조는 룸싸롱 박사장의 실종이라는 사건을 중심으로 펼쳐질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방송된 내용을 가지고 미루어 짐작해보면, 룸싸롱 사장이 대세그룹 최일두 회장의 아이를 가졌고, 대세그룹 회장은 아이의 출산을 반대했을 것입니다. 아이의 출산 여부를..

    2009/11/27 07:39

논리가 아닌 감동으로 전하는 '현장르포 동행'

사용자 삽입 이미지
"울지 마세요. 울지 마세요. 강하게 살아야죠." '현장르포 동행-엄마 보고 싶어'편의 열 아홉 살 봉관이는 울고 있는 엄마에게 그렇게 말했다. 간경화로 세상을 떠난 아빠 대신 동생들을 데리고 살아가던 봉관이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엄마는 그를 반겨주지 않았다. 심한 우울증으로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엄마는 자식들에게까지 짐이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엄마 마음이 다를까. 입으로는 독하게도 "돌아가라", "다시는 오지 마라"는 말을 하면서도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런 엄마를 다독이는 건 오히려 봉관이었다.

엄마를 찾아왔는데 "왜 왔냐"는 물음에 말문이 막혔을 봉관이. 하지만 그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그래도 낳아주신 엄마잖아. 한번은 봐야지."하고 말했다. 그렇게 밀쳐내던 엄마는 아마도 자신이 하는 이 독한 짓에 욕이라도 듣고 싶었었나 보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봐."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의외였다. "안아줘." 이 말은 어찌 보면 상처를 주었을 엄마를 그래도 한없이 보듬는 아이 같지 않은 봉관이의 마음이 담겨진 것이면서 동시에, 이 엄마 앞에서 꿋꿋이 서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봉관이가 역시 열아홉 살의 아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이었다.

거듭 한번만 안아 달라고 하는 봉관이에게 결국 엄마는 "그럴 자격 없다. 난 엄마도 아니야"하고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자 봉관이가 불쑥 다가가 엄마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그의 위로의 말이 이어졌다. "엄마 원망 안 해. 힘들게 사는 거 아니까. 그냥 엄마 보러 왔어. 엄마가 아무리 독하게 말해도 잘 해주신 거 아니까 괜찮아." 그런 아들에게 엄마는 끝내 참고 참았던 입을 열었다. "우리 아들 정말 잘 컸다. 해준 게 아무 것도 없는데." 90도로 고개 숙여 다시는 못 볼 마지막 인사를 하고는 돌아서는 봉관이를 보며 엄마는 혼자 쪼그려 앉아 눈물을 흘렸다. 그 엄마의 귓전으로 마치 천상의 목소리라도 되는 듯, 봉관이의 외침이 들여왔다. "엄마! 고마워!"

이 엄마와 아들 봉관이의 짧은 만남이 주는 감동을 어떤 드라마가 대신해줄 수 있을까. 이것은 바로 휴먼 다큐멘터리 '현장르포 동행'이 세상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이다. 온통 화려하고 편리한 것들만 넘쳐나는 것 같은 세상 속에서 '현장르포 동행'은 그 사각지대에 가려진 무채색의 진실을 담아낸다. 그 속에는 가난에 휘둘려 힘겨운 세상에 내쳐진, 그러나 그 세파 속에서도 함께 살아갈 이들이 있어 하루하루를 버텨내며 희망을 놓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카메라가 비춰주지 않았다면 있는 것조차 몰랐을 그네들의 삶. 그러니 이 동행을 자처한 것은 먼저 저 따뜻해질 수 있는 카메라다.

그것은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그 어려움을 함께 바라보고, 그 힘겨움에 함께 울어주는 카메라가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지는 동행이다. TV가 화려한 세상의 모습들만을 비춰주고, 마치 세상은 그렇게 빛으로만 가득하다고 외칠 때, 이 프로그램은 마치 섬처럼 그 자리에 서서 그 그늘을 바라본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그 삶을 카메라가 바라보고, 그 카메라를 통해 우리들이 그 삶을 바라보는 카메라와 동행하면서 세상은 조금 따뜻해진다. 힘겨웠던 그들이 세상과 조금씩 소통하고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것은 이 카메라가 바라본 그 따뜻한 시선이 우리 모두에게도 그대로 전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그늘이 왜 만들어졌고, 또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현장르포 동행'이 바라보는 시선은 그런 논리적이고 설득적인 눈이 아니다. 대신 '현장르포 동행'은 세상의 그늘에 있는 그들 역시 우리와 함께 동행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감동으로서 우리에게 전해줌으로써 실천에 옮기게 만드는 휴먼 다큐멘터리다. 힘겨운 삶 속에 던져졌음에도 끝내 "엄마! 고마워!"하고 외친 봉관이의 말이 그 어떤 앙상한 논리보다 더 아프고 깊게 울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 http://thekian.net/trackback/1039 관련글 쓰기

변화하는 시골정보프로그램 속 한결같은 '6시 내고향'의 가치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루의 바쁜 일과가 끝나가는 저녁 6시. 뜨끈한 국물이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한 그릇만 봐도 허기에 식욕이 도는 그 시간 우리의 눈은 자꾸만 TV 화면에 머문다. 오늘은 또 어느 곳의 구수한 이야기가 우리의 식욕을 돋울까. 저녁 상 차리는 주부와 밥상을 두고 둘러앉은 식구의 눈도, 고향 떠나와 타향에서 홀로 저녁 상 앞에 앉은 외로운 자취생의 눈도, 이제 막 퇴근해 돌아와 구수한 밥 냄새를 맡는 가장의 눈도 TV에 머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살맛 없는 세상, 살맛나는 고향의 이야기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회차만도 무려 4400회. '6시 내고향'은 18년 간이나 저녁 6시면 어김없이 우리를 고향으로 데려다준 프로그램이다. 그 정도면 거의 안 지나친 곳이 없으련만 매번 보고 듣게 되는 고향이야기가 늘 새롭게 다가오는 건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만큼 우리네 고향의 이야기는 화수분처럼 마르지 않기 때문일 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우리가 매일 겪는 다른 하루하루가 늘 변함없는 고향 이야기를 매번 새롭게 느껴지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의 끝에 돌아갈 집처럼 늘 변함없이 우리를 기다리는 고향이 되어버린 프로그램, 바로 '6시 내고향'이다.

이 프로그램의 8%에서 9%대를 유지하는 한결같은 시청률이 가능한 이유는 프로그램명이 표방하듯 저녁 6시라는 시간대를 고향으로 가는 시간으로 만들어버린 그 채널 선점효과 때문이다. 특별한 편성상의 변수가 없다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저녁 시간대를 맞이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프로그램의 오랜 성공이 그저 관성적인 시청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타 방송국의 같은 시간대의 프로그램들이 비슷한 소재로 늘 경쟁을 벌여왔지만 그 아성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6시 내고향'이 갖는 정보의 질적 차이에서 비롯된다. 지역 네트워크를 백분 활용해 날마다 생생한 날 것의 고향 이야기가 배달되는 그 정보의 힘을 넘어서기란 실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MBC는 98년부터 무려 10년에 걸쳐 '생방송 화제집중'이라는 코너를 운영했지만 작년 코너를 접었고, 지금은 저녁 6시 대에 뉴스를 방영하고 있다. 한편 SBS는 30분 일찍 '생방송 투데이'를 편성하고 이어서 저녁 드라마를 방영하는 것으로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6시 내고향'이 선점하고 있는 6시라는 시간대에 방송사별로 나름의 고민을 하고 있는 흔적들이다.

'6시 내고향'의 제작방침은 세 가지로 나눠진다. 그 첫 번째는 사라져 가는 고향의 의미와 정서를 느끼게 하는 것(과거지향)이고 두 번째는 도시와 농촌을 연결시켜주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현재지향)이며, 세 번째는 농어촌이 앞으로 발전적으로 변해가는 그 방향을 제시하는 것(미래지향)이다. 하지만 이러한 제작방침보다 중요한 것은 이 프로그램이 늘 보여주는 고향에 대한 아련한 향수 같은 감성적인 부분이다. 세월이 바뀌어도, 점점 첨단화되는 세상이 되어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고향을 찾는다.

'1박2일'의 이명한 PD가 자신들이 지향하는 바가 "'6시 내고향'의 예능 버전"이라고 말했듯이 고향을 조명하는 프로그램으로서 '6시 내고향'이 타 방송프로그램에 미친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영향은 거꾸로 부메랑으로 돌아와 변함없는 '6시 내고향'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다. 정보 프로그램의 예능화가 그것인데, SBS의 최양락, 정형돈이 메인MC로 자리한 '괜찮아U' 같은 프로그램이 등장했고, 정보 프로그램에 쇼적인 측면을 접목시킨 KBS2의 '리빙쇼 당신의 6시' 같은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전반적인 인포테인먼트화와 최근 부상하고 있는 시골이라는 소재가 맞아떨어지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어도 여전히 우리의 눈이 '6시 내고향'에 머무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우리가 고향을 찾는 마음이 한결같듯이 이 프로그램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푸근한 저녁시간으로 인도한다는데 있다. 고향을 떠나와 각박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늘 저 편에 고향이 존재한다는 따뜻함을 전해주는 '6시 내고향'. 바로 그 모습 때문에 우리는 저녁 6시가 되면 늘 고향으로 달려간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 http://thekian.net/trackback/1021 관련글 쓰기

그 누가 김제동과 김구라를 호명했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연예인의 프로그램 하차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다. 가장 정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개편의 목적이기도 한 프로그램의 쇄신을 위해 출연자를 교체했으리라는 것이다. 김제동이 '스타골든벨'에서 하차하게 된 것에 대해 방송사측에서 내세우는 명분은 이 정상적인 이유이지만 실상을 보면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스타골든벨'은 10% 이하의 시청률에 머물고 있는 프로그램이다. 예능 프로그램으로서 그다지 좋은 성적표는 아니다. 이 프로그램이 이 정도의 시청률에 머물고 있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것은 이 프로그램의 형식이 이제는 조금 낡은 과거의 것으로 여겨진다는데 있다. 즉 프로그램의 쇄신이 필요했다면 형식 자체를 고쳤어야 옳다. 김제동을 지석진으로 교체한다고 해서 프로그램이 쇄신되지는 않을 거라는 이야기다.

게다가 절차상의 문제도 석연치 않다. 사전에 충분히 이야기하고 미리 알려줬어야 하는 상황에서도 단 며칠 전에 통보하는 식은 절차상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혹자들은 이것이 실제로 방송가에 공공연한 일이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잘못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적어도 절차라도 정상적이었다면 구태여 이런 잡음 따위는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런 여러 가지 석연찮은 교체의 이유 때문에 김제동의 하차는 정치적인 목적에 의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김제동이 가진 대중적인 인지도에 정치적인 목적이라는 시선이 부가되자 이 상황은 정치권의 공방으로 이어졌다. 연예인의 정치 참여에 대한 이슈로 옮아간 것이다.

사실 연예인이 어떤 정치적인 발언을 하던 간에 그것은 한 국민의 소신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네 정치 속에서 연예인이란 일종의 얼굴마담처럼 정치권이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본인은 아무런 정치적 의도가 없고 그저 인간적인 마음에서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해도, 그것은 늘 정치권에서 아전인수되는 경향이 짙다.

연예인과 정치권이 연루되는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연예인이 얼굴마담으로 내세워져 희생양이 되는 경우도 많은데 이것은 바로 정치권이 연예인을 보는 시각을 잘 말해준다. 따라서 연예인의 정치참여는 대부분의 유경험자들이 말하듯이 그다지 좋은 기억은 아니다. 연예인이 자기의 일을 접어두고 아예 정치인이 되겠다고 나서기 전에는 말이다.

김제동의 '스타골든벨' 하차와 손석희의 '100분 토론' 하차를 두고 야권에서 들고 나오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국정감사에서 여권이 내민 카드는 이른바 '막장, 막말 방송'에 대한 비판이다. 막장드라마와 막말 예능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는 이미 몇 년 전부터 지속되어 왔다. 하지만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극으로 치닫는 현 방송 문화에 있어서 어찌 보면 이러한 지적은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이러한 사안에 접근하는 방식을 보면 이것 역시 연예인을 앞세운 정치 공방 같은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진성호 의원이 구체적으로 김구라를 지칭하며 퇴출하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좁은 인식을 그대로 드러낸다. '막장, 막말 방송'의 문제는 그 방송을 내보내는 방송사와 제작하는 제작자가 가져야 될 윤리적인 문제이지, 김구라라는 한 연예인이 책임지고 퇴출되어야 할 그런 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역시 이 사안에서도 연예인들은 어떤 본보기나 얼굴마담으로 내세워진 느낌이 있다. 김제동의 경우를 보든, 김구라의 경우를 보든 어떤 정치적인 사안으로 비화되는 과정에서 당사자들은 심한 소외를 겪는 양상을 보여준다. 연예인이 정치에 참여해 피해를 보았다거나, 정치가 잘못된 방송을 바로잡는다는 명목으로 특정 연예인을 거론하고 나서는 상황을 보면서 그 사안이 옳던 그르던 어딘지 잘못되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비판을 하는 이들이 정치인들이라는 점은 그 비판에 대해 공감할 수 없게 만든다. 막말과 막장이라고 하면 우리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들은 과연 모르고 있다는 얘기인가. 적어도 연예인들은 즐거움이라도 주는 고마운 존재들이 아닌가. 연예인들이 정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 여권이나 야권이나 어느 한 쪽이 옳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연예인의 이름이 정치적 목적으로 여기저기서 호명되는 것이 불편할 따름이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 http://thekian.net/trackback/1016 관련글 쓰기

토론이란 이런 것, '선덕여왕'의 대결구도가 시사하는 것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선덕여왕'(사진출처:MBC)

"헌데 왜 진흥제 이후의 신라는 발전을 안한 겁니까?" 덕만(이요원)은 미실(고현정)같은 뛰어난 지도자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신라가 발전하지 못하고 그대로인가를 미실에게 묻는다. 미실은 거기에 대해 답변을 하지 못하지만, 이미 답은 마음 속에 갖고 있다. 그 생각에 골몰해있는 미실의 마음을 아는 건 설원공(전노민)이다. 그는 미실에게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신분 따위로 누구를 부러워하는 건 저로 족합니다." 라고 말한다. 미실은 그것이 자신의 태생적인 한계, 왕비가 될 수 없는 그 신분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꿈꾸는 것조차 한계가 그어지는 신분계급 사회 속에서 미실은 그 이상을 꿈꿀 수 없었다. 그것이 이유였다.

거기에 대한 답은 오히려 질문을 한 덕만이 던져준다. "새주님은 나라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주인이 아니시니 남의 아기를 키우는 듯 싶었겠지요. 주인이 아닌 사람이 어찌 나라를 위한 꿈을, 백성을 위한 꿈을 꾸겠습니까. 꿈이 없는 자는 절대 영웅이 되지 못합니다. 꿈이 없는 자의 시대는 한 발작도 전진하지 못합니다." 이 말은 미실에게는 뼈아픈 것이다. 그녀를 가로막는 태생적인 한계, 즉 성골이 아니라는 점은 꿈조차도 한계를 짓게 만들었다. 게다가 이 질문을 던지는 덕만은 저 스스로 "왕비가 아닌 왕이 되겠다"고 공언한 바 있다. 이것 역시 미실에게는 아픈 것이다. 자신은 이미 여성이라는 한계를 인정하고 왕비 그 이상을 꿈꾼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미실과 덕만의 100분 토론을 방불케 하는 설전은 그녀들이 처음 탁자를 가운데 놓고 앉을 때부터 예고되었던 일이다. 그 첫 번째 안건은 백성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대한 정치적 견해였다. 미실이 백성들은 환상을 원하고 그 환상을 제공함으로써 통치할 수 있다고 주장하자, 덕만은 환상이 아닌 희망을 내세운다. 같은 현실 정치를 논함에 있어서 이 환상과 희망이라는 어감의 차이는 실로 크다.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 미실은 "자기보다 더 지독한 짓"이라고 일갈한다. 어찌 보면 정치가가 제안하는 희망이란 그저 환상에 머물 수도 있기 때문에 저 스스로 동참하게 만드는 희망의 정치는 어쩌면 더 무서운 것일 수도 있다는 현실주의자 미실의 생각이다.

그 다음 토론의 주제로는 경제가 올랐다. 흉년이 들어 곡물 가격이 자꾸만 오르는데도 그것을 비싼 값에 매점매석하는 귀족들을 두고 의견이 엇갈렸다. 덕만은 그것이 결국 자영농들을 몰락시켜 소작농으로 부리려는 귀족들의 속셈 때문이라는 것을 미실을 통해 알게 되고, 귀족들에게 그 행태를 비판하지만, 귀족들은 자기 돈으로 물건을 사고파는 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주장한다. 자유 시장 경제와 정부의 통제라는 두 시각이 부딪치는 지점이다. 요지부동인 귀족들을 되돌리기 위해서 덕만은 결국 시장의 논리로서 해법을 제시한다. 궁의 비축미를 풀고 군량미마저 풀 거라는 소문을 내자 가격이 떨어지고 거꾸로 귀족들은 싼 가격에 곡물을 시장에 내놓을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미실과 덕만의 설전이 흥미롭다. 백성들에게 철제로 만든 농기구와 황무지를 주어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농민들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는 덕만에게 미실은 이렇게 말한다. "진실과 희망과 소통으로 백성을 다스린다구요? 백성은 진실은 부담스러워하고 희망은 버거워하고 소통은 귀찮아하며 자유를 주면 망설입니다. 백성은 즉물적이예요. 떼를 쓰는 아기와도 같죠. 그래서 무섭고 그래서 힘든 것입니다. 처벌은 폭풍처럼 가혹하게, 포상은 조금씩 천천히." 그 말이 예언하듯 결국 농기구와 황무지를 받은 농민들이 도망을 치고 덕만은 저 스스로 미실이 얘기한대로 폭풍처럼 가혹한 처벌을 백성들에게 가하게 된다. 여기서 덕만은 "꿈을 꿔본 적이 없는 자들은 꿈꿀 줄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좀더 현실적으로 천천히 개혁을 진행하게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선덕여왕'(사진출처:MBC)

'선덕여왕'이 보여주는 100분 토론의 새로운 연사로 등장한 이가 김춘추(유승호)다. 그는 여성의 신분이지만 유일한 성골이라는 이유로 왕이 되겠다는 덕만을 가로막고, 또 미실 세력을 갈라놓기 위해 골품제도를 비판한다. 지금으로 치면 선거제도가 이 토론의 주제가 된 셈이다. 김춘추는 "골품제는 어느 나라에서도 본 적 없는 천한 제도"라고 일갈하며 덕만을 공격하고, 그 말에 미실은 묘한 표정을 짓는다. 그 표정 속에는 절망과 희망이 교차한다. 절망은 자신은 왜 골품제에 대한 부당함을 넘어서보려 하지 않았는가에 대한 회한이고, 희망은 이제 덕만이 깨버린 금기, 즉 여성이 왕이 되려는 것과 김춘추가 깨버린 금기 골품제라는 한계가 깨져버리는데서 오는 것이다. 덕만과 미실의 긴 100분 토론은 덕만의 일방적인 승리인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미실이 그 반사이익을 얻게 된 셈이 되었다.

'선덕여왕'이 보여주는 덕만과 미실의 100분 토론은 누가 이기고 누가 졌느냐를 떠나서 그 토론의 과정이나 방향성이 흥미롭다. 팽팽한 대결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그들은 서로를 파트너처럼 여기며 스스로를 성장시킨다. 미실과 덕만은 서로가 던진 질문에 답을 구하며 성장해나간다. 그 선악구도가 어떻든 그 과정이 건전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우리 정치에서 시사하는 바가 많을 것이다. 대소신료들이 모여서 토론을 벌이다가 드잡이를 하는 장면을 보면서 국회의 모습을 풍자했다는 시청자들의 의견은 이 사극에서 얼마나 대중들이 정치, 경제적인 사안들에 민감한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선덕여왕', 덕만과 미실의 100분 토론이 흥미진진한 것은 물론 그 잘 조화된 극적 구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현실에서는 발견하기 어려운 그 상생의 이야기가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TRACKBACK :: http://thekian.net/trackback/1012 관련글 쓰기

◀ Prev 1 2 3 4 5  ... 9  Next ▶
BLOG main image
더키앙
문화 속에 담긴 현실을 모색하는 곳
by 더키앙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007)
블로거의 시선 (78)
네모난 세상 (880)
생활의 발견 (43)
상투잡기 (4)
깊게보기 (1)

달력

«   2010/03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3,317,458
  • 96516,727
textcubeget rss

더키앙

더키앙's Blog is powered by Tattertools / Supported by Tatter & Media
Copyright by 더키앙 [ http://dogguli.tistory.com/ ]. All rights reserved.

Tattertools Tatter & Media DesignMysel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