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 열풍이다. 이정명 작가의 팩션 ‘바람의 화원’이 이 불황기에도 연일 베스트셀러를 기록하고 있고, 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매회 시청자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드라마의 영향으로 지난 달 열렸던 간송미술관 개관 70주년 행사에는 때아닌 관객들이 몰려 장사진을 이루었다. 다름 아닌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영화 ‘미인도’가 개봉함으로써 신윤복 신드롬은 앞으로도 한동안 지속될 전망. 왜 신윤복은 갑자기 이 시대에 등장했을까. 그것도 남장여자로.
드라마 ‘바람의 화원’, 예술가의 초상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이 남장여자로 설정된 것은 별로 남아있지 않은 사료가 만든 상상력의 소산이면서 동시에, 그나마 남아있는 그림들의 필치가 여성적인 섬세함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흔하게 알려진 ‘단오풍정’같은 그림을 두고 봐도 세세한 붓 터치와 인물묘사, 게다가 철저히 계산된 듯한 구도와 색감까지를 쉽게 느낄 수 있다. 이것은 호방함이 느껴지는 김홍도의 남성적인 필치와는 대조적이다. 이정명 필자 스스로도 밝혔듯이 신윤복이 남장여자로 설정된 것은 바로 그 그림이 전해주는 여성성의 느낌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뿐일까.
신윤복과 김홍도가 그림의 배경을 가지고 논쟁하는 장면에 등장하는 새 그림은 신윤복이 당대 조선사회에서 얼마나 억압적인 체제 속에 자유를 갈구했는가를 알 수 있다. 배경은 없고 중심인물만 가지고도 충분히 그 사람의 심정을 드러낼 수 있다고 주장한 김홍도와는 달리, 신윤복은 새를 그려놓고 “이 새는 배경이 없을 때는 그저 새일 뿐”이지만, 배경으로 새장을 그려 넣으면 “새장 밖으로 날아가고픈 심정”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림의 소재나 화풍이 이미 정해져 있어 그 틀을 벗어나면 이단이 되어버리던 당대 사회에서 신윤복이 가졌던 ‘배경에의 의식’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창조하려는 그 여성성의 마음을 가졌지만 체제에 순응해야 하는 남성성의 사회 속에서 겪었을 억압. 그것을 잘 표현한 것이 남장여자라고 볼 수 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남자로서 살아가야 하고, 대신 자신 속의 여성을 숨겨야 하는 신윤복이 자신이 채우지 못하는 여성의 욕구를 그림을 통해 표출한다는 설정이다. 따라서 드라마 속, 신윤복의 작품, <미인도>가 가지는 의미는 그저 그것이 신윤복의 자화상이라는 표면적인 설정에만 있지 않다. 거기에는 남장여자로서 억압된 미적 욕구를 채우려는 욕망이 꿈틀댄다. 그리고 이것은 예술가들의 초상이기도 하다.
영화 ‘미인도’, 성이라는 자유 하지만 영화 ‘미인도’로 오면 이 남장여자라는 껍질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성을 억압하는 사회를 담는다. 각종 성행위를 묘사한 그림들에 대해 조정대신들이 음란하다고 꾸짖을 때, 신윤복은 자신의 손이 하나도 부끄럽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그 그림 속의 남녀는 자연스럽게 그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서로에게 이끌리는 모습들이며 그 인간적인 부족함은 자신에게는 오히려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것이라고 신윤복은 말한다.
영화 ‘미인도’에도 새장과 새의 이미지가 등장하지만 그것은 예술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한 인간의 자유에 대한 의미로 읽힌다. 스승 김홍도가 그 그림이 가진 체제반항을 운운할 때, 신윤복은 자신은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말한다. 자신은 그저 보이는 대로 자연스럽게 그리고 싶은 대상을 그렸을 뿐이라는 것이다.
즉 ‘미인도’는 어린 시절 자신 때문에 오빠가 자살을 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남자의 굴레를 뒤집어쓰고 살아가다 어느 날 당당히 자신의 성 정체성을 드러내는(그것도 아주 자연스럽게) 그 지점에 남장여자의 포인트가 맞춰져 있다. 극중 신윤복이 껍질로서의 옷을 다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오로지 한 남자에게 안겨 있는 모습이 가장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인간의 모습으로 비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영화는 분명 지나치게 멜로와 성적 묘사에 집착한 면이 있다. 따라서 남장여자 설정이 가진 본래의 이 자유로운 인간에 대한 이야기는 오히려 그 속에 묻혀 버린다. ‘센세이션 조선 멜로’라는 문구는 자칫 신윤복이라는 천재를 상업적으로 활용한 혐의를 갖게 만든다.
그 성과가 무엇이든 간에 신윤복이라는 인물이 남장여자로 이 시대에 탄생한 것은 아마도 지금 시대가 지향하는 여성성의 사회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던 과거에서 이제는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나누어지는 시대, 남장여자는 어쩌면 바로 이 중성적인 시대를 담는 아이콘인지도 모른다. (본 원고는 청강문화산업대학 사보 100도씨(100C)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이런 인터뷰는 처음이다. 아니 이건 인터뷰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강남의 한 찻집에서 그를 만났고 차를 마시며 ‘바람의 화원’에 대해 이야기했다. 개인적인 사생활을 중시해 인터뷰를 극도로 꺼린다는 ‘바람의 화원’의 이정명 작가를 만나기 위해 필자는 사진기와 녹음기, 심지어는 노트까지 포기했다. 대신 이야기를 들을 작정이었다. 그러니 이 글은 애초부터 인터뷰 형식에 앉혀질 운명이 아니었다. 다만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 바람처럼 떠다니는 이정명 작가의 이야기, 그 단편들을 적어놓은 것일 뿐이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이 막연함 속에서 이정명 작가가 신윤복의 그림을 앞에 두고 그 뒤에 숨겨진 이야기를 상상하며 느꼈을 막막함과 또 그 속의 어떤 설렘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첫 인상, 성냥갑에 그려진 신윤복의 ‘단오풍정’ 이 불황에, 그것도 한번도 불황 아닌 적이 없었던 출판계에서 꾸준히 베스트셀러로 자리 매김하고 있는 이정명 작가의 첫인상은 의외로 평범하다는 것이었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보게 되는 그런 사람, 마치 신윤복과 김홍도의 그림 속 그저 지나가는 행인 같은 평범함을 간직한. 하지만 환하게 웃으며 동그란 안경 너머로 진지하게 쳐다보는 그 눈빛은 ‘바람의 화원’의 애체를 끼고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는 김홍도를 닮았다. 어딘지 빈 듯 보이지만 막상 작품 앞에 서면 특유의 열정 속으로 빠져드는 그런 사람.
그의 첫인상이 익숙해질 즈음, 그가 신윤복이란 화원을 접하게된 첫인상이 궁금해졌다. “처음 신윤복을 접한 건 아주 어렸을 적 성냥갑에 그려진 여인이 그네를 타는 그림에서였습니다.” 그건 다름 아닌 신윤복 작품 중 가장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그림, ‘단오풍정(端午風情)’이었다. 그 그림의 여성적으로 보일 만큼 섬세한 필치와 색감을 보면서 어린 미래의 작가는 그 그림의 화원을 여성으로 상상해왔다고 했다. 오히려 나중에 그 화원인 신윤복이 남자라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랄 정도로.
그림은 그리움, 그 그리움을 이야기로 엮다 “그린다는 것은 무엇이냐?” 이 김홍도의 질문에 도화서 생도인 신윤복은 이렇게 말한다.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지요?” ‘바람의 화원’에 등장하는 이 대화는 또한 이정명 작가가 이 작품을 어떻게 써나갔는지를 보여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연대기적으로 신윤복의 삶을 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그가 선택한 것은 그림들이었다. 신윤복과 김홍도의 그림 속에 담겨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다고 했다. 그림을 앞에 놓고 그 속에 있는 인물들이 말해주는 것을 그리움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고 상상하는 작가의 눈길이 느껴졌다.
“서양화에는 그림만큼 유명한 일화들도 많이 내려오고 있죠. 그 이야기들이 모두 역사적인 사실은 아닐지 몰라도 그것들은 그림을 더욱 풍요롭게 해줍니다.” 작가는 우리네 그림들 속에 숨겨져 있을 지도 모르는 그런 일화를 찾아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정명 작가가 밝힌 ‘바람의 화원’의 작법은 그림들이 말해주는 그 이야기를 듣고 짧은 이야기들을 구성과 상관없이 적어두는 것이었다. 사실상 작가의 전작인 ‘뿌리깊은 나무(2006)’보다 더 먼저 이 작품에 대한 구상과 작업이 시작되었다고 하니 꽤 오랜 시간 켜켜이 쌓여진 메모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그 메모만큼 쌓여진 그리움은 다시 작품으로 꿰어졌을 터였다.
드라마가 소설보다 좋은 이유 “이 작품은 장태유 PD가 아니면 어려운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이정명 작가의 장태유 PD에 대한 신뢰는 깊었다. 장태유 PD 특유의 미술적인 감각은 물론이고, 특유의 완성도에 대한 근성은 남다르다고 한다. 이것은 작품을 통해 고스란히 드러나는 점이기도 하다. 특히 이정명 작가는 사실 별로 드라마에 대해 상의를 한 적도 없지만, 자신의 생각과 장태유 PD의 생각이 딱 맞아떨어지는 장면들을 드라마를 통해 확인하면서 전율했다고 한다. “김홍도의 캐릭터를 생각할 때, 조금은 허술한 듯 보이면서도 작업에 들어가면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을 보이는 그런 인물로 그려졌으면 하고 생각”했다는 이정명 작가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이 장태유 PD는 그렇게 그려냈다고 한다.
무엇보다 드라마가 소설보다 낫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상대적으로 소설에서는 군더더기로 생각되어 사용하지 않았던) 그 일상적이고 가벼운 대화 같은 것들이 오히려 드라마에서는 리얼리티를 강화해준다는 점이라고 이정명 작가는 밝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장PD를 신뢰하는 것은 아마도 작가가 이미 밝혔던 ‘그림 속의 이야기에 대한 매혹’을 드라마가 실제 영상으로 구현해냈다는 점일 것이다. ‘단오풍정’ 그림 속의 아낙네들은 드라마 속으로 걸어나와 신윤복을 만나고, 드라마는 신윤복이 그 그림을 그리게 되는 상상의 이야기를 눈앞에 그려낸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이정명 작가의 겸손일 지도 모른다. 소설 속에는 또한 드라마가 보여주지 못하는 또 다른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보다 소설이 좋은 이유 “팩션은 역사소설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역사에 추리가 들어가는 하나의 장르개념으로 받아들여야 하죠. 굳이 말하자면 팩션은 역사추리에 가깝습니다.” 이정명 작가는 최근 영상 컨텐츠로 각광받고 있는 팩션이 그저 말 그대로의 팩트(사실)+픽션(상상)의 결합체로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바로 잡아주었다. 팩션은 저 ‘장미의 이름’처럼 역사적인 팩트를 추리형식으로 파고 들어가는 하나의 특정한 장르라는 것이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과 소설 ‘바람의 화원’이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 팩션이라는 장르의 성격으로 규정되는 추리형식이 소설 속에 더 많이 구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직 드라마가 반 정도만 진행되어 있어 후반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나, 현재까지 드라마 ‘바람의 화원’은 추리형식보다는 신윤복이라는 인물의 화원으로서의 성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드라마와는 달리 소설은 팩션 특유의 추리가 주는 묘미가 특별한 재미를 선사한다.
신윤복 신드롬? 바람으로 끝나지 않길 “매체의 힘을 느꼈지요.” 드라마화 되면서 불기 시작한 신윤복 신드롬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운을 뗐다.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즐거운 비명을 질렀던 간송미술관은 신윤복 신드롬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신드롬은 현재 개봉을 준비중인 영화 ‘미인도’를 통해 또 한번 이어질 태세다. 하지만 이런 신드롬에 대해서 작가는 신중했다. “하지만 조금 지나면 이런 신드롬은 금세 언제 그랬냐 싶게 사라지는 것이 우리네 생리죠. 제발 한 때의 바람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 그림에 대한 관심으로 꾸준히 이어지길 바랍니다.”
‘바람의 화원’은 그 제목처럼 손아귀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바람 같은 작품이라고 작가는 밝혔다. 드라마 속에 드러나는 인물들 간의 사랑은 사제지간(김홍도)의 정인지, 형제지간(신영복)의 우애인지, 혹은 예술가가 갖는 미의 화신, 즉 뮤즈(정향)에 대한 사랑인지 모든 것이 복합적이고 애매모호하게 그려진다. 그런데 바로 그런 점이 ‘바람의 화원’만이 주는 독특한 아우라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그림자처럼 보이고, 때로는 실체처럼 보이는 그 지점에서 우리는 김홍도가 어진화사 앞에서 신윤복의 그림자에 매혹되면서 느꼈던 그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작품과 작가는 닮는다더니, 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바람의 화원’과 이정명 작가는 서로 닮았다.
어쩌면 자연이 이다지도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HD 방송을 HDTV로 보기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색의 감동이다. 그 선명한 색들 속에서 자연의 생명들은 진짜 살아서 꿈틀꿈틀 화면 밖으로 기어 나올 것만 같다. 국제 환경회의인 람사르 총회를 맞아 특집으로 방송된 MBC 스페셜, ‘순천만 도둑게’에서는 순천만 갯벌에 사는 도둑게를 비롯해, 짱뚱어, 망둥어, 낙지 같은 갯벌생명들을 멀리 떨어진 이 TV 앞까지 생생히 전해주었다.
도둑게는 갯벌에서 뚝방을 넘어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들어와 음식을 훔쳐먹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HD 영상은 도둑게가 거의 직각에 가까운 뚝방을 마치 스파이더맨처럼 기어오르는 장면과, 닫혀진 부엌문을 넘지 못해 닭똥, 심지어 개 사료까지 훔쳐먹는 장면들을 잡아냈다. 시시각각 변하는 갯벌의 모습은 고속촬영으로 찍어 흔히 겉보기에 잠잠하게만 보였던 갯벌의 생동감 넘치는 생명력을 그려냈다.
우리의 시선으로는 포착하기 힘든 것을 내시경 카메라 같은 시야를 확장해주는 장비는 세세하게 볼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장비를 이용해 갯벌 위를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포착하는 카메라들이 발견하려 하는 것은 거기 살아가는 생명체들이 우리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생존 경쟁이 있고, 사랑이 있고, 끔찍한 공포가 있으며, 즐거움이 있다. 그것들은 짱뚱어들이 서로 툭탁거리며 싸우는 모습에서, 게들이 짝짓기를 하는 모습에서, 또 낙지가 수많은 알을 낳는 장면에서 찾아낼 수 있다.
특히 갯벌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같이 잡아줌으로써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아무런 설명 없이도 영상을 통해 느껴지게 만든 점은 이 프로그램의 덕목이다. 먹이를 잡기 위해 갯벌 위에 긴 족적을 남기는 생물들을 먼저 보여준 후, 자그마한 판자처럼 생긴 배를 끌고 갯벌로 나가는 사람들이 남기는 족적을 연결하자 거기 생태의 일부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과거의 자연다큐가 그저 그 곳에 사는 생물들의 신기한 삶의 방식들을 포착했다면 이제 HD로 생생히 살아난 자연다큐는 거기에 미학적인 영상을 통해 철학적인 울림까지를 전달한다. 실제 리얼리티에 가까운 영상을 통해 그 아름다움을 새삼 발견하게 되는 순간, 또 그 모습이 인간의 삶과 다르지 않음을 느끼게 되는 순간, 자연과 유리되어 살아왔던 도시인은 바로 자연의 일부로 되돌려진다.
MBC 스페셜, ‘순천만 도둑게’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이제 다큐멘터리가 이 HD를 만나 어떻게 변해갈 것인가에 대한 예감이었다. 다큐멘터리의 진짜 힘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혹은 인간의 시야로는 잡아낼 수 없어서, 또 잡아낸다 해도 그 결정적 순간을 포착할 수 없어서 제대로 볼 수 없었던 것을 보여주는데 있다.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영상 자체의 생생함이다. HD로 인해 이제 저 바깥의 자연과 세상은 우리네 안방으로 조금씩 다가오게 되지 않을까. 마치 저 도둑게가 인가로 기어 들어오는 것처럼.
금요일에 오랜만에 작정을 하고 TV앞에 앉았다. MBC스페셜에서 순천만 갯벌의 1년을 다룬다고 예고방송을 보았기 때문이다. 시간 맞춰 보기는 정말 오랜만이다. 갯벌. 난 갯벌에서 무언가를 잡아본 적이 별로 없는데... 흠... 지난 번에 갔던 무창포 해수욕장도 갯벌에 해당되는지 모르겠다. 바닷물이 빠지면 평지가 나오며 맛조개도 잡고 게도 잡을 수 있다. 쑥쑥 빠지는 진흙(?)은 없지만 말이다. (네이버 백과사전의 갯벌 http://100.naver...
드라마 시대는 가고 예능 시대가 오나. 한 때 드라마는 방송사의 얼굴이었다. 어떤 드라마가 방영되고 얼마만큼의 시청률을 올리고 있느냐는 그 자체로 방송사에 수익을 올려주면서 동시에 방송사의 이미지를 제고시켜주었다. 하지만 경제상황 악화로 광고시장이 위축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치열한 시청률 경쟁으로 드라마는 상업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떨어져 가는 수익성은 방송사에 이득을 주기는커녕 오히려 부담이 되었다. 드라마는 더 이상 수익도 이미지도 올려주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드라마가 빠진 자리에 채워질 것이 예능 프로그램이란다. MBC는 주말 특별 기획 드라마를 폐지하는 대신 그 자리에 ‘명랑히어로’를 전진 배치하고, ‘무한도전’은 5분을 더 연장시킨다고 한다. 금요드라마가 사라진 SBS는 대신 그 자리에 오락 프로그램을 편성할 예정이다. 드라마 시대는 가고 예능 시대가 도래하는 느낌이다. 이렇게 예능이 대안이 된 것은 상대적으로 제작비를 줄일 수 있고, 안 돼도 기본 시청률은 하는 그 속성 때문이다. 하지만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왜 대안이 굳이 예능이었어야 하며, 또 예능 역시 지금 드라마와 같은 경쟁으로 천정부지의 제작비가 들어가는 양상이 벌어지고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방송사가 외치는 건, 결국 돈돈돈일 뿐이다 드라마가 지나치게 많고 경쟁 또한 지나쳤던 것은 사실이다. ‘드라마 공화국’이라는 말 속에 비아냥의 뉘앙스가 숨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제 사라질 드라마들의 면면을 보면 늘 있어왔던 드라마 시간대 이외에 추가로 배치되었던 드라마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SBS 금요드라마는 그간 없었던 금요일 시간대의 드라마였고, MBC의 주말 특별 기획 드라마도 예능의 자리를 차고앉았던 것이었으며, 또 상업성을 노리고 KBS2에 신설되었던 일일드라마도 과거에는 없었던 것이었다. 어쩌면 이 드라마들의 폐지는 드라마 세상에 낀 거품을 제거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수익성 약화와 함께 방송사가 일제히 들고 나온 건 결국 상업성이다. 드라마가 상업적으로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이니 수지가 맞는 예능으로 눈을 돌린 것뿐이라는 것이다. 평균 잡아 회당 6천만 원, 적게는 3천만 원 정도만을 갖고도 최소 10%에서 20%까지의 시청률을 올릴 수 있으니 예능은 여러모로 드라마보다는 확실히 되는 장사다. 드라마에 낀 거품이 가져온 수익성의 약화는 반드시 바로잡아야 하는 일이지만, 그것이 방송국의 상업성을 정당화해주지는 못한다. 그 빈자리에 참신한 교양이나 다큐 같은 것을 배치하는 것은 이제 생각조차 하지 못할 일인가.
덩치 커지는 예능, 어떻게 할 것인가 게다가 점점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덩치가 커져 가는 예능의 버라이어티화는 드라마의 부실만큼 큰 뇌관을 안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의하면 SBS의 ‘일요일이 좋다’는 회당 제작비로 1억3천만원이 투여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MBC의 ‘일요일 일요일 밤에’ 역시 회당 제작비가 1억2천3백만원. ‘해피선데이’가 방송3사 주말 예능 중 가장 적은 제작비를 기록했으나 그것도 미술비와 협찬을 제외한 비용으로 9천2백만원을 기록했다.
물론 모든 예능들이 이처럼 많은 제작비를 투여하는 것은 아니다. ‘무한도전’은 상대적으로 적은 6천5백만원, ‘스친소’는 6천3백만원, ‘개그야’5천8백만원, ‘스타킹’5천7백50만원, ‘야심만만-예능선수촌’5천6백80만원이 회당 제작비로 들어간다. 하지만 점차 버라이어티쇼에 입맛을 들이게 만드는 주말 예능 프로그램의 영향은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상업적인 선택을 좋다고만 볼 수 있나 제작비를 좌우하는 연예인의 출연료와 야외촬영은 바로 예능 프로그램의 재미를 좌우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즉 누가 출연해 어딜 가느냐가 관건이 된 예능 시장은 점차 이 부분에 대한 제작비 투여를 어떤 식으로든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캐릭터 중심에 이야기가 매회 구성되는 버라이어티쇼는 점차 드라마화 되어가고 있는 추세다. 이것은 어쩌면 또 다른 수익성 악화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항간에는 벌써부터 웰 메이드 드라마보다는 광고주 입맛에 맞는 드라마가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아무리 잘 만든 프리미엄 드라마보다 욕은 먹어도 시청률은 나오는 투자대비 효율이 높은 그런 드라마들이 판을 칠 거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상한 그림이 그려진다. 앞으로 TV에서 좋은 드라마는 점점 사라지고, 반면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는 더 많아지며, 그 중간을 상업적으로 무장한 예능 프로그램들이 장악한다? 상상만 해도 TV가 풍길 돈 냄새가 물씬 퍼지는 느낌이다.
수익성을 회복하기 위해 방송사가 어떤 식으로든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TV가 온통 상업적인 색채를 띄게 되는 것 역시 좋다고 볼 수 있을까. 프로그램 몇 개 없애고 수익성이 떨어지는 드라마보다 상대적으로 수지가 맞는 예능을 채운다고 이 문제가 해결될까. 진짜 문제는 드라마든 예능이든 그 자체가 갖고 있는 거품들, 예를 들면 과도한 출연료나 작품보다는 외형에 치중하다 결국에는 실패하게 되는 그런 왜곡된 시장구조를 바로잡는 것이 아닐까. 이 위기의 상황에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TV가 가진 엄청난 힘에도 불구하고 TV비평은 사각지대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 국내 유일의 드라마 전문 비평 오프라인 잡지였던 ‘드라마틱’이 2008년 2월호를 마지막으로 무기한 휴간을 결정한 데 있어, 온라인 TV비평웹진인 ‘매거진T’ 역시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잠정적인 휴간을 결정해 많은 애독자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편집장, 백은하씨가 27일 남긴 글에 의하면 ‘매거진T’가 재정적자에 이른 이유로, ‘충분한 재화로 보상받기에 턱없이 부족한 웹 기사의 가치’그리고 수금체계 자체가 없는 ‘공짜정보’로서의 웹진이 가진 한계를 들었다. 백은하 편집장은 “지난 2년 5개월은 단 한 걸음도 쉬웠던 적이 없었다”며 그 힘겨움을 토로했다.
‘매거진T’가 가진 TV비평지로서의 가치는 단순히 하나의 웹진 그 이상이다. ‘매거진T’는 진지한 비평에서부터 가십성의 글, 그리고 매니아적인 정보까지 두루 갖춘 웹진으로 많은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즉 전문적이면서도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가벼운 TV 프로그램에 관한 글들 속에서 늘 진지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TV를 단순히 오락기 혹은 바보상자로 취급하며, 저 스스로를 평가절하 해온 TV비평은 사실 지금 같은 매체의 시대가 응당 그 가치를 복원해야할 어떤 것이다. 쌍방향 시대의 뉴미디어로 진화되고 있는 TV는 이제 이 시대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지대한 위치를 차지하고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매거진T’가 가진 TV프로그램에 대한 진지한 태도는 바로 그 TV비평의 가치를 이 시대에 복원시킨 공이 있다. 또한 지나친 엄숙주의로 비평의 이론에만 갇힌 학계의 비평과 결을 달리해 즐겁게 대중들의 눈높이를 찾아간 것도 ‘매거진T’만이 가졌던 장점이라 할 수 있다.
‘매거진T’는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는 연예기사들의 바다 속에서 어느 정도의 격과 재미를 갖추고, 이리저리 휩쓸리던 대중들에게 어떤 등대 역할을 해준 점도 가치거니와, 우후죽순 등장하는 예비 비평가들에게 그 상징적인 가치도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매거진T’의 가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얼른 돌아오라”며 “자발적 구독료 운동을 하자”는 댓글을 달고 있는 네티즌들을 통해 충분히 입증되고 있는 셈이다. 모쪼록 안타까운 일이 없기를 바라며 빠른 시일 내에 상황이 정상화되어 복귀하기를 기원한다.
거침없는 독설 사이 언뜻언뜻 보이는 따뜻한 면모로 순식간에 전국에 강마에 바이러스를 퍼뜨린 MBC ‘베토벤 바이러스’. 그리고 그동안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던 조선시대의 천재 화원 신윤복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SBS ‘바람의 화원’. 이 두 수목드라마는 지금 단순한 드라마 그 이상의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그 신드롬을 촉발시킨 것일까.
고급예술이라고? 서민들거야! 이 두 드라마가 다루고 있는 것은 공교롭게도 그동안 고급예술로 치부되어 왔던 클래식과 고미술이다. 드라마는커녕 TV라는 대중매체 속에서도 그리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 이 두 소재는 그러나 이들 드라마로 들어오면서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그것은 이 드라마들이 클래식과 고미술에 대한 대중들의 편견을 깨는 데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베토벤 바이러스’가 서민들과 만나는 지점은 수해를 입은 주민들과 합창교향곡을 연주하는 시향이 대립하는 장면에서 드러난다. “이 상황에 무슨 놈의 클래식”이냐고 항변하는 주민대표에게 강마에(김명민)는 차분하게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듣게된 오케스트라의 음률에 지휘자가 된 사연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한다. “구원이었죠. 위로였구요.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지휘자가 되었습니다.” 클래식은 배부른 자의 여흥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의 구원이자 위로이자 힘이라는 것을 강마에의 입을 통해 드러낸 셈이다.
한편 ‘바람의 화원’은 그 중심에 신윤복을 세웠다는 것만으로도 고미술과 서민들의 만남을 예고했던 것이나 마찬가지다. 김홍도와 같은 풍속화가이면서도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양반의 허위적인 모습을 비꼬고, 당대 금기시 되던 기생들을 화제의 중심으로 삼아 ‘미인도’같은 미의 결정체로 그려낸 신윤복은 가장 서민과 함께 호흡한 화원이 아니었을까. 이런 드라마의 서민적인 면모는 김홍도가 중국의 고사를 그린 ‘군선도’를 보고 정조가 감탄하는 장면에서도 등장한다. “군선도에서 어찌 조선의 향취가 느껴지는가”하는 정조의 질문에 김홍도는 “사람들은 조선의 사람들을 그렸기 때문”이라 답한다. 저잣거리의 서민들이 바로 신선의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다.
대중들을 사로잡는 캐릭터, 그리고 호연 예술을 다루고 있어서인지 두 드라마는 연출과 연기, 대본 어느 면으로 봐도 완성도가 높다. 특히 신드롬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강마에와 신윤복은 그 캐릭터가 매력적인데다, 그걸 연기하는 김명민과 문근영의 호연 덕택에 말 그대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 강마에는 말은 많지만 실효성은 거의 없는 이 지도력 부재의 시대에 오히려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직설어법으로 공감대를 얻고 있다. 달콤한 거짓말보다는 괴롭더라도 현실을 알게 만드는 독설이 지금 필요한 리더십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독설 뒤에는 상대방을 위한 마음이 전제되어 있다.
한편 신윤복은 남장여자라는 캐릭터를 통해 당대의 억압을 지금을 살아가는 대중들과 함께 호흡해낸다. 즉 여자지만 남자로 살아가야 하는 그 운명은,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여성성을 희구하는 사회에서, 현실은 점점 더 경쟁적인 남성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과 공감하게 만든다. 위선적인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 억압된 사회 속에서 오히려 당당했던 성 의식, 새장 안에 매몰되어 있던 당대 화단에서 저 스스로 새가 되려 했던 자유분방함은 지금 세대의 솔직함과 잘 맞아떨어지는 대목이다.
물론 강마에 신드롬이나 신윤복 신드롬의 기저에는 고급예술을 스스로 향유하고 있다는 대중들의 의식이 자리한다. 하지만 저 음반가게에서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을 꺼내들고, 신윤복의 ‘미인도’를 보기 위해 간송미술관 앞에 늘어선 인파들의 마음 속에는 답답한 사회 속에서 이들 두 인물들이 주는 어떤 속시원함이 내재되어 있다.
연예대상, 연기대상. 연말만 되면 각종 상들이 난무한다. 한 해를 정리한다는 의미는 분명 있을 것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올해의 각종 시상식들 역시 오래된 병폐들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다. 유난히 많은 공동수상은 바로 그 부분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특히 MBC 연기대상의 경우, 거의 대부분의 부문에서 공동수상이 나왔다는 점은 이 시상식의 목적을 의심케 만들기에 충분하다. 공동수상은 과거 나눠먹기식 시상식의 노골적인 형태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동수상의 변으로서 방송사의 주장은 단순하다. 너무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좋은 드라마들이 많았기 때문에 어느 한 명에게 상을 주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것은 일견 맞는 말처럼 보이지만, 한번 더 생각해보면 지나친 자화자찬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한 해 동안 자사에서 방영된 드라마들이 이것도 좋았고 저것도 좋았다는 식의 이야기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성과들이 있었다고 해도 그럴수록 좀더 엄정하게 시상을 하는 모습을 보여야 그것이 좀더 그 상이 있게 한 시청자들에게 겸손한 자세가 아닐까.
일단 그 상을 누가 주는 것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MBC 연기대상은 시청자가 투표해서 뽑는 베스트 커플상, 남녀 인기상, 올해의 드라마상을 빼고는 그 시상기준이 모호하다. 누가 어떤 기준으로 후보자들을 세워놓았는지조차 불분명하다. 이것이 불분명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방송사가 시청자들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후보를 세웠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송사는 어떠한 기준을 가지고 후보들을 선정했을까.
애매하고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론 심증은 있다. 그것은 드라마의 방송사에 대한 기여도다. 여기에는 시청률이란 잣대가 최우선이 될 것이며, 시청률이 조금 떨어져도 방송사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드는데 얼마나 기여했는가가 다음이 될 것이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것은 현재 진행형인 드라마의 홍보이거나 앞으로 시작할 드라마를 위한 사전 포석(예를 들면 주말드라마나 일일드라마에 대한 의미 없는 후보 거론 같은)이 될 것이다. 물론 그 전제는 시청자들이 그 드라마들을 사랑해주었다는 방송사의 말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심증에 불과하다.
이처럼 시청자의 의견이 빠져버린 시상식은 공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을뿐더러, 나아가 누가 누구에게 상을 주는가 하는 점에서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을 연출한다. 실제로 연기자나 드라마에 상을 주는 것은 시청자들이야 함이 분명한데, 방송사가 마음대로 연기자에게 상을 주는 형태를 띄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소외된 시청자들은 방송사의 목적(?)에 이용되는 입장에 처하게 된다. 원하든 원치 않든 저들의 말대로 많은 사랑을 했고, 그래서 기꺼이 누군가의 수상에 박수를 쳐야만 하는(실제로는 저들끼리만 박수를 치는 경우가 많다) 수동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다.
각종 시상식의 통합에 대한 시청자들의 열망은 이런 소외된 위치에서 벗어나기 위함이다. 방송사간의 경쟁이라도 있어야 그 공정성이 유지될 가망성이 높기 때문이다. 연말이면 어김없이 TV를 가득 메우는 각종 시상식이 전파낭비라는 생각이 드는 건 그런 이유에서이다. 시상식을 하려면 시청자가 소외되지 않고 참여할 수 있는 공정한 룰을 세워야 할 것이다. 만약 방송사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열을 가릴 수 없어 공동수상을 남발할 정도라면, 저들만의 시상식보다는 한 해 동안 사랑해주었던 시청자들을 위한 쇼를 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물론 시상식 자체를 쇼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그렇더라도 그 쇼가 그렇게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연말 각 방송사에서 열리는 각종 연예대상이나 연기대상을 보고 있으면 정말 별들의 전쟁이 따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30일에는 MBC에서 연기대상을 방송했다. 그간 MBC의 간판 드라마들에서 보여지던 스타들은 죄다 한자리에 모여야 정상인데, 올해에는 그렇지 않았던가 보다. 대상 후보자들이 대거 불참하는 사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MBC 연기대상을 보면서 사실 처음부터 예상은 했었지만 완전 태왕사신기의 독무대나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을 해본다. 거기에 현재..
MBC는 연예대상에서도 무한도전 멤버 여섯명에게 공동으로 상줬다더니 연기대상은 한 수 더 뜬다. 이건 뭐.. 시상식이 장난도 아니고.. 무슨 공동 수상이 그리 많냐.-_-;; 그래.. 니들 입장에서는 괜히 이름 있는 연기자들 불러다가 고생시켜놓고 상 안주고 넘어가려니 찝찝해서 (사실은 내년의 캐스팅과 팬들의 원성이 걱정된 거겠지.) 이 사람은 연기를 잘하니 하나, 저 사람은 인기가 많으니 하나~ 이런 식으로 다 줬겠지. 아무리 그래도 기본적인 선은..
편견을 넘어 날아간 거위, 인순이 그녀는 혼혈아다. 물론 자신이 선택한 일은 아니지만 사회는 그녀를 냉대했다. 피부색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게다가 그녀는 제대로 공부를 하지도 못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것이 전부. 고등학교는 그녀의 꿈이었다. 노래를 한다는 것도 그 당시엔 딴따라라 불리는 또 하나의 비아냥이었다. 피부색, 인종, 학력, 직업. 그녀는 우리네 사회가 가진 모든 편견을 다 받아내야 하는 사람이었다.
물론 포기하려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노래가 있었다. 때론 아픔을 달래주고 때론 그 아픈 마음을 타인에게 전해주는 노래. 그녀는 노래에 자신의 삶과 열정을 고스란히 담아 세상에 날려보냈다. 그런데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편견으로 가득한 이 사회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기 시작한 것이다. 혼혈아가 아니고, 못 배운 중졸 혹은 딴따라가 아닌 인순이란 자신의 이름으로.
그녀의 마음이 담긴 노래는 세상의 편견을 녹이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녀가 부른 ‘거위의 꿈’은 10년 전, 이적이 만들고 불렀던 곡이지만, 긴 시간을 돌아 노래 주인을 찾아왔고, 덕지덕지 편견의 족쇄에 묶인 채 날지 못했던 거위는 세상을 향해 날기 시작했다. 그녀가 날자 세상 저편에서 푸드득하고 변화의 날갯짓 소리가 메아리로 울려왔다.
전과자도 스타도 아닌 자기 이름 박인순 같은 이름을 가진 KBS 드라마 ‘인순이는 예쁘다’에서 인순이는 전과자다. 고등학교 때 실수로 친구를 죽였다는 죄로(물론 후에 그것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지만) 교도소에도 갔다. 긴 수감생활 끝에 수갑을 벗고 사회에 나왔지만 사회는 그 수갑을 벗겨주지 않았다. 엄마도 없고 할머니도 돌아가시고 정붙일 곳 없는 처지에 직업마저도 가질 수 없는 절망감 속에서 자살을 선택하려 하지만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 그 누구도 불러주지 않을 것 같던 자신의 이름을 누군가 부른 것이다. 그는 다름 아닌 어린 시절 둘도 없는 친구 상우다.
상우를 통해 다시 살게된 인순이는 어린 시절 자신을 떠났던 엄마를 다시 만나 새 삶을 시작하지만 편견은 바깥 세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전과자라는 사실을 엄마조차도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다시 선택하려던 자살. 그 때 두 번째 기적이 일어난다. 플랫폼 밑으로 떨어진 취객을 구하게된 인순이는 순식간에 ‘지하철녀’란 이름으로 스타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인순이가 불려지길 원하는 이름은 전과자도 아니고 스타도 아니다. 그저 자기 이름 박인순일 뿐이다.
두 인순이가 만나는 순간, ‘거위의 꿈’ ‘인순이는 예쁘다’에서 이 두 인순이가 만나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지하철녀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박인순이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 가수 인순이의 ‘거위의 꿈’을 부를 때이다. 노래는 형편없다 못해 방송사고 수준. 짤막하게 부르고 끝냈어야 할 그 노래를 그녀는 끝까지 불러버린다. 그리고는 ‘나도 모르게 그만’ 끝까지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노래부르게 했을까.
이 ‘나도 모르게 그만’은 그러나 드라마 속 음치인 박인순에게만 일어났던 일이 아니다. 그것은 노래 잘하기로 소문난 그녀, 가수 인순이에게서도 벌어졌다. 지난해 ‘윤도현의 러브레터’에서의 일이다. 조금은 피곤한 듯한 얼굴과 목소리로 그녀는 말했다. “꿈은 이루어진다. 노력하는 자한테만. 여러분, 꿈을 꾸십시오. 꿈을 이루십시오. 그리고 꿈을 지키십시오. 그리고 꿈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리곤 시작된 ‘거위의 꿈’. 그녀는 음악 자체에 푹 빠진 채 노래를 열창했다. 그러다 “이 무거운 세상도-”에서 자기도 모르게 그만 짧은 순간 음을 놓쳤다. 감정이 북받쳐 올라서였을 것이다. 그 노래를 하는 그 때 그녀는 이 짧은 노래 속에서 수십 년 간 ‘자신을 묶어두었던 무거운 세상’을 느꼈을 것이다. 차마 눈물을 보이지 못해 담담히 인사하고 불빛이 쏟아지는 무대 밖으로 나갈 때 언뜻 눈물을 훔치는 그녀의 모습이 실루엣으로 잡혔다.
인순이는 정말 예쁘다
드라마 속 박인순을 엉망이지만 끝까지 노래하게 한 것도, 가수 인순이가 노래에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담아 노래를 하다 끝내 음정을 놓치고 눈물을 흘리게 한 것도 모두 그 ‘거위의 꿈’이 전하는 진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상의 편견에 찢겨지고 남루해도 보물처럼 간직했던 꿈, 누군가 뜻 모를 비웃음을 날리기도 했던 꿈, 이미 바꿀 수 없는 운명 같은 현실 속에서 사람들이 헛된 것이라고, 독이 될 뿐이라고 말하던 꿈. 그 꿈 하나 부여잡고, 벽처럼 서 있는 편견 가득한 무거운 세상 앞에 서 있는 자신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인순이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또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복잡한 현대사회 속에서 살아가다 보면, 꿈을 갖고 그것을 이루려 살아가던 자기 자신의 모습에서 점점 멀어져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꿈은 멀고 현실은 너무나 무겁기에 우리는 종종 자격지심과 우월감으로 ‘꿈을 가진 나’를 버리려 한다. 그 나를 폄하하거나 과장하려 한다. 그럴 때면 한번쯤 자신으로 돌아와 남루한 실력이나마 자신만의 ‘거위의 꿈’을 불러보는 건 어떨까.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인순이’는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 인순이는 정말 예쁘다. (위 글은 '한국원자력연구원 사보 '원우'에 실린 글입니다)
존 레논의 ‘이매진(Imagine)’과 함께 흘러내리던 한 방울의 눈물, 그리고 쐐기를 박는 말. “노무현의 눈물 한 방울이 대한민국을 바꿉니다.”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이 TV광고는 이미지가 정책보다 더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정치광고시대를 여는 신호탄이었다. 물론 대중들이 그 광고에서 존 레논의 ‘이매진’이 담고있는 반전, 무신론, 무정부주의 등의 사상을 보진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광고 속에는 아무런 정책이나, 적어도 정책에 관련된 뉘앙스조차 들어있지 않았다. 우리는 왜 노무현의 눈물 한 방울이 대한민국을 바꾸는 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유권자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이것은 대선을 며칠 앞두고 있는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지금 대선 광고는 이미지 전쟁 중이다.
좋은 대통령 정동영, 네거티브 전략
정동영의 광고전략은 네거티브 전략이다. 메인 타이틀로 ‘좋은 대통령’을 내세우는 것은 반대로 ‘나쁜 대통령’을 비판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인 셈. ‘프리허그’를 차용한 첫 광고는 서로 안아주는 장면들과 정동영이 등장하면서 ‘이제 희망을 안으세요. 여러분의 희망이 되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연결되고 거기에 사람들의 “좋은 대통령 되세요”라는 말에 정동영이 “따뜻하고 행복한 나라 함께 만드시죠.”라고 하며 끝난다. 광고 컨셉은 따뜻하고 행복한 이미지를 프리허그를 통해 보여주면서 여기에 정동영 후보의 모습을 넣어 좋은 대통령의 이미지를 부각시킨다는 것이다.
‘행복을 꿈꾸는 소년’편 역시 이 범주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않는다. 더 많은 이의 행복을 꿈꾸는 정동영과 그간의 정치행적을 ‘죄송하고 미안하고 그럼에도 사랑하고 약속하는’ 말로 집약적으로 풀어내면서 ‘가족이 행복한 나라’를 꿈꾸는 정동영의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하지만 이후에 나온 광고들은 본격적인 네거티브 전략을 끄집어낸다. 다분히 젊은 세대의 표심을 의식한 ‘랩 배틀’편은 랩이 가진 반항적이고 도전적인 컨셉을 이명박 후보의 ‘나쁜 대통령’ 이미지를 끄집어내는데 활용한다. 또한 김추자의 ‘거짓말이야’가 락 버전으로 흘러나오면서 ‘나쁜 대통령’의 거짓말을 부각시킨 ‘거짓말’편도 이 맥락을 거의 이어가고 있다.
정동영의 광고는 좋은 대통령의 이미지를 강조하는 이미지 광고에, 상대편 후보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을 병치한다. 지나친 네거티브 전략으로 흐르고 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운 가운데, 정동영 후보는 이에 대해서 “상대편이 워낙에 문제가 많다”는 쪽으로 공세를 멈추지 않고 있다. 이유가 어떻든 정동영 후보의 광고는 ‘자신이 왜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비판의 소지가 있다고 보여진다. 자신이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이유로 ‘상대방이 나쁘니까’ 라는 진술방식은 자칫 국민의 선택을 최선이 아닌 차선으로 몰고 가는 정치적 냉소주의로 흐를 수 있지 않을까.
경제 대통령 이명박, 다 나빠도 경제만 살리면 된다?
정동영 후보의 공세에 대해 이명박 후보의 광고는 그 자체로 답변을 담고 있다. ‘욕쟁이 할머니’편에서 주목해야할 것은 왜 하필이면 이명박 후보가 찾아간 인물이 욕쟁이 할머니여야 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 광고는 고도의 심리적 장치들이 숨겨져 있는데 그것은 먼저 욕쟁이 할머니라는 인물에 시청자들을 감정이입시키는 부분에서부터 살아난다. 이명박 후보는 그것이 뭐든 이 광고 속에서 욕을 먹는다. 이것은 현실에서 그 자신이 이런 저런 구설수로 욕을 먹고 있는 상황을 고스란히 광고 영상 속으로 끌어들인다.
하지만 이 욕은 욕쟁이 할머니라는 캐릭터로 들어오면서 부정을 위한 욕이 아닌 긍정을 위한 욕으로 치환된다. “맨날 쓰잘데기 없이 쌈박질이나 하고 지럴 에이 우린 먹고살기도 힘들어 죽겄어.” 이것은 욕쟁이 할머니의 입으로 나오는 국민들의 정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어지는 욕들은 조금씩 색깔을 달리한다. “청계천 열어놓고 이번엔 뭐 해낼껴, 밥 더줘? 더 먹어 이놈아.” 욕을 먹던 이명박은 이 부분에서 밥을 먹는다. 즉 욕은 욕쟁이 할머니의 진술과 행동을 통해 밥이라는 격려로 바뀌게 된다. “밥 쳐먹었으니께 경제는 꼭 살려라잉 알겄냐.” 그리고 마지막으로 던져지는 이 말은 설사 욕먹을 짓을 했더라도, 경제를 살리겠다는데 밥이라도 챙겨주자는 경제에 대한 국민적 정서를 끌어낸다. 밥은 여기서 표와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진다.
이어지는 이명박 후보의 ‘살려주이소’편도 결국 경제 이야기다. 여기서는 “살려주이소”라는 말의 힘에 기대어, ‘살기 힘들어 죽겠다’는 국민들의 절박한 심정을 부각시키면서‘경제를 살려달라’는 의미를 끄집어낸다. 시장과 서민들의 이미지에 눈물을 보태면서 이명박 후보는 상대적으로 허점이 될 수 있는 구설수들을 ‘경제를 살리라’는 지상과제 아래 불식시킨다. 한편에서는 전라도 사투리, 다른 한편에서는 경상도 사투리를 넣어 지역배분까지 고려하는 이명박 후보의 광고는 치밀한 전략과 한 가지 메시지에 천착하는 힘을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경제만 살리면 다 용서된다’는 컨셉은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놓고 보면 위험한 발상은 아닌가 짚어봐야 할 것이다.
반듯한 대통령 이회창, 아직도 반듯한 이미지?
광고 전략으로서 개인의 이미지보다는 정책이 가진 이미지를 내세웠다는 점에서 이회창 후보의 광고는 다른 후보들과 차별화 된다. 광고는 쓰러진 집안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아버지의 마음, 무너진 교육을 안타까워하는 선생님의 마음, 어려운 현실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 소녀가장의 마음을 안다는 진술 끝에 이회창 후보의 아킬레스건이 될 수 있는 출마선언과 낙방을 ‘국민의 마음을 알게된 계기’로 전환시키고 있다. 이로써 이 광고는 가정, 교육, 사회, 경제 전반을 모두 담으면서 거기에 ‘반듯하다’는 한 마디로 이회창 후보의 이미지를 세워놓는다.
감정적인 소구를 하기보다 그저 담담하게 내용을 담았다는 점은 인정할 만 하지만, 이미지 정치광고가 한창인 요즘, 광고로서는 너무 약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난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이미지광고에 힘을 쓰지 못했던 이회창 후보의 광고가 다시금 떠오르는 건, 당시에 보였던 정책적인 뉘앙스들이 여전히 광고 속에 스며있고, 이회창 개인의 이미지가 지난 대선과 거의 다르지 않게 노출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 똑같은 반듯한 이미지가 이번에는 힘을 발휘할지 두고볼 일이다.
광고의 이미지, TV토론으로 이어지길
문국현 후보는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워 말은 그럴싸하게 하지만 실제로 국민을 진정으로 존경하지 않는 정치인들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이미지를 깨끗함, 글로벌 경제인, 존중하는 인물로 내세운다. 문국현 후보가 광고로 세우는 이미지는 ‘믿을 수 있는 경제대통령’, 즉 경제도 알고 깨끗한 정치인의 이미지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에서 끌어온 아이디어는 참신하고 마음을 움직이는 점이 있는 게 분명하지만, 광고 중간 이후부터 컨셉이 하나로 집중되기보다는 문국현 후보의 다양한 일면을 나열하고 있어 그 힘이 제대로 발휘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또한 권영길 후보는 그 칼날을 삼성에 직설적으로 겨누면서 정치가 혼탁하고 경제가 어려운 것이 ‘60년 부패 고리’에 있으며 그것을 끊는 자신이 ‘세상을 바꾸는 대통령’이 될 것임을 강조한다. 단순해 보이지만 삼성을 대변하는 TV와 휴대폰을 집어던지고 터뜨리는 장면은 파격적이고 공격적인 이미지를 구축한다. 하지만 경제적 이슈가 최고의 가치가 된 이번 대선에서 권영길 후보의 이런 이미지가 효과를 발휘할 지는 의문이다. 어쨌든 권영길 후보는 광고를 통해 확실한 자기 색깔을 보여준 셈이다.
정치광고시대에 대선 후보들의 광고는 이제 어떤 이미지를 내세우는가가 관건이 되었다.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기보다 감성적인 이미지로서 후보를 어필하는 것은 어찌 보면 언어가 영상이 된 영상시대에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광고 이미지들이 정책으로 고스란히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영상시대에 광고가 아닌 정책 대결을 보여줄 수 있는 TV토론은 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선 후보들은 자신들이 내세운 광고의 이미지가 TV토론에서의 정책과 잘 맞물리는지, 유권자들이 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