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의학드라마의 효시인 ‘종합병원’의 적통을 잇는다는 기대를 한데 모으고 방영된 ‘종합병원2’의 첫인상은 그다지 신선하지 않다. 14년의 공백 사이에 무수히 많은 의학드라마들이 계보를 이루어왔고, 그렇기에 이미 하나의 장르가 되어버린 의드에 ‘종합병원2’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해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하지만 그 제목이 주는 화려한 외투에 비해 첫 단추를 풀어 보인 ‘종합병원2’의 속살은 우리가 익숙하게 봐왔던 것들이었다.
의드에 이런 캐릭터 꼭 있다 ‘종합병원2’의 캐릭터들은 여러모로 ‘그레이 아나토미’의 캐릭터들을 벤치마킹한 혐의가 짙다. 주인공인 좌충우돌의 정하윤(김정은)은 메리디스 그레이를, 어딘지 어수룩하지만 인간적인 최진상(차태현)은 조지 오말리를, 상사이면서도 따뜻한 심장을 가진 김도훈(이재룡)은 데릭 셰퍼드를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거의 대개의 국내 의학드라마들이 가졌던 캐릭터 구조다.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외과의 과장이 있고, 이제 막 병원생활을 시작하는 신출내기 레지던트들이 있으며 그 레지던트들 사이에는 우정인지 사랑인지 애매한 관계의 남녀가 있다. 대체로 주인공은 그 레지던트들 중 여성이며, 그 여성은 외과의 과장 혹은 동료와 사랑에 빠진다. 이것이 그 대략의 구조다. 이 틀은 이미 ‘뉴하트’에서도 똑같은 구조로 제시된 바 있다. ‘외과의사 봉달희’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여지없이 빠지지 않는 캐릭터는 레지던트들을 깨는 호랑이 선배 레지던트다. ‘종합병원’에서 오욱철이 했던 그것을 ‘종합병원2’에서는 류승수가 맡아 하고 있다. 이것은 ‘뉴하트’에서는 뒤질랜드로 유명한 배대로(박철민)라는 캐릭터로 보여진 바 있다. 이들 캐릭터들은 아마도 ‘종합병원’이 최초로 방영되었던 1994년이라면 획기적이고 신선한 캐릭터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이 캐릭터들이 전형화되어 버린 지금은 그렇지가 못하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이야기들 총상을 맞고 응급실에 실려온 유괴범과 그가 어디에 숨겨두었는지 밝히지 않아 위험에 처하게된 유괴된 아이를 두고 벌어지는, 이른바 ‘범법자와 환자’코드의 에피소드 역시 새로운 것이 아니다. 유괴범을 범법자로 봐야하는가 아니면 환자로 봐야 하는가 하는 의사들의 원초적인 질문을 하는 이 에피소드는 이미 ‘외과의사 봉달희’에서 소개된 것들이다. 살인범을 살려주었더니 그 자가 오히려 봉달희를 칼로 찌르는 이 이야기는 의사라는 직업과 인간이라는 본질 사이에서 고뇌할 수밖에 없는 의사들의 상황을 잘 말해주는 에피소드다.
‘종합병원2’에서는 마지막 장면에 정하윤과 최진상이 서로 환자를 살리기 위해 땀과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교차시키면서 이 메시지를 잘 영상화해냈다. 즉 정하윤이 살리려는 유괴범이나 최진상이 살리려는 유괴된 아이 모두 의사에게는 살려야만 할 등가의 환자라는 걸 영상이 분할화면으로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에게는 그 유괴범도 하나의 환자에 불과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이 에피소드는 이미 여러 번 의학드라마에서 반복되어 이제 그 신선미가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이제 단 2회가 지난 것으로 아직까지 이 드라마의 전체 그림을 예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여준 ‘종합병원2’의 모습은 어떤 새로운 의드의 도전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익숙한 의드의 코드들을 활용하는 장르에 기대는 느낌이다. 어쩌면 그것이 좀더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으리라 판단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국내 의학드라마의 첫 단추를 열었던 ‘종합병원’의 연장선이라면 무언가 달라야 하지 않을까.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지 않는 ‘종합병원2’가 자칫 ‘종합병원’의 향수에 기대는 드라마로만 남지 않기를 바란다.
새롭게 시작하는 ‘종합병원2’는 의학드라마의 계보를 잇는 드라마다. 본격적인 의학드라마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종합병원(1994)’의 적통이기 때문이다. ‘종합병원’은 최완규 작가가 현장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면서 병원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의 디테일을 살리는 노력을 기울였다. 실로 이 드라마는 전문성이 부족했던 당대 드라마환경에서 획기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시청률은 물론 작품성에서도 호평을 기록한 ‘종합병원’의 성공은 다른 의학드라마의 탄생을 예고하기에 충분했다. ‘의가형제(1997)’, ‘해바라기(1998)’, ‘메디컬센터(2000)’의 등장이 그것이다. 이 중 ‘의가형제’와 ‘해바라기’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종합병원’만큼의 전문성을 갖지는 못했다.
트렌디 드라마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오면서 드라마는 전문성보다는 멜로에 집착했고, 그러자 ‘무늬만 전문직 드라마’라는 말이 등장했다. 전문성과 디테일이 살아있는 이른바 전문직 드라마에 대한 요구가 커지자 본격적인 의학드라마는 부활을 예고했다. ‘하얀거탑’과 ‘외과의사 봉달희’가 본격 의학드라마의 계보를 이으며 등장해 호평을 받았다.
이 두 드라마는 모두 의학에 대한 전문성을 갖추었지만 그 결이 달랐다. ‘하얀거탑’이 멜로 라인 없이 한 인간의 욕망에의 질주를 그려냈다면, ‘외과의사 봉달희’는 전문직으로서의 의사이면서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의 의사를 그리며 호평을 받았다. 이어서 의학드라마의 계보를 이은 것은 ‘뉴하트’로 이 드라마는 ‘외과의사 봉달희’와 ‘하얀거탑’의 요소들을 모두 아우르고, 의학드라마를 하나의 장르로 정착시켰다.
이제 그 계보 위에 세워질 ‘종합병원2’는 어떨까. 2008년에 만들어지는 ‘종합병원2’는 단순히 1994년작 ‘종합병원’의 연장선으로 보아서는 안된다. 그간 이어진 계보의 연장선에서 봐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커진 것은 기대감과 함께 부담감이다. 의학드라마의 효시를 등에 업고 있고, 또한 일련의 진화된 계보를 갖고 있기 때문에 무언가 다르거나 혹은 진화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오히려 기대감의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종합병원2’의 차별점으로 일단 제시된 것들은 인물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졌다는 점과 이전보다 더 디테일한 장면 묘사에 공을 들였다는 것 정도다. 이건 사실 정확히 말하면 차별점이 아니다. 세대교체야 당연한 것이며, 디테일한 장면 묘사는 ‘하얀거탑’ 이후 일련의 의학드라마들이 추구해온 방향이다. 또 휴머니즘을 바탕에 깔 것이고, 또 멜로 라인도 필수적으로 들어갈 것이라는 점은 이미 ‘외과의사 봉달희’나 ‘뉴하트’를 통해 반복되었던 것들이다. 이것은 이제 의학드라마라고 하면 하나의 장르의 요소로서 굳어진 것들이다.
흔히들 의학드라마를 보며 “이런 장면 꼭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의학드라마가 이제 장르가 가진 먹히는 요소들의 유혹을 받는다는 반증이다. 같은 내용에 인물이 조금 바뀌고 장면들이 좀더 세련되게 구사한다고 해서 이제는 더 이상 차별화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진짜 차별화가 이루어지려면 지금까지 다루지 않았던 새로운 스토리의 발굴이 필수적이다. 완전히 장르를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큰 틀에서 몇 가지는 ‘종합병원2’가 장르의 유혹을 벗어나 그것만의 차별점을 찾기를 바란다. 그것만이 의학드라마의 계보 위에서 ‘종합병원2’가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는 일이다.
전문직 드라마라는 용어 속에는 그 전문직에 대한 막연한 동경 혹은 호기심이 숨어 있다. 특히 그 전문직 중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은 방송일 것이다. TV의 앞쪽에 앉아 TV 저편, ‘그들이 사는 세상’이 궁금한 것은 당연한 일. 매일 방영되는 드라마들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촬영되며, 그걸 만드는 사람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것에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은 지대할 수밖에 없다.
이미 방영되었던 ‘온에어’는 바로 그 대중들의 방송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을 드라마로 포착했다. 연예계의 뒷얘기, 즉 카메라를 벗어난 연예인, 혹은 방송관계자들의 삶이라고는 하지만 ‘온에어’를 통해 비춰진 것은 여전히 그들이 보통 사람들의 삶과는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었다. ‘온에어’가 보여준 것은 우리와는 다른, ‘그들이 사는 세상’이었다. 드라마 바깥의 그들 모습을 담고는 있었지만, 그것은 여전히 환타지를 자극하는 드라마였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 세상’이 보여주는 것은 그 다를 것만 같은 세상이 사실은 우리가 사는 세상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내겐 너무도 버거운 순정’편에서 주준영(송혜교)은 “우리 드라마를 한 마디로 한다면 그것은 ‘순정에의 강요’”라고 말하면서 2,30대에 만나서 순정에 목숨거는 한국드라마를 비꼰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드라마의 얘기만이 아니다. “순정은 개뿔!”이라던 주준영 자신 혹은 지금의 쿨한 세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녀는 결국 드라마 촬영 중간에 잠깐 시간을 내서 사랑하는 정지오(현빈)에게 달려가면서 솔직하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 ‘단 한번도 순정적이지 못한 내가 싫었다. 이렇게 달려오면 되는데...’
‘산다’편에서는 배우 윤영(배종옥)의 어머니가 죽는 에피소드를 바탕에 두고 그 위에 수많은 삶의 풍경들을 중첩시켜놓는다. 술에 취해 평소에 쌓인 걸 풀기라도 하겠다는 듯 으르렁대며 “죽인다”고 싸워대는 손규호(엄기준)와 양수경(최다니엘), 아무리 엄마라도 빈집에 친구들과 들어와 밤새 도박과 술을 마신 걸 보고 “사는 게 싫어진다”는 주준영, 드라마를 찍느라 상가집에도 가지 못하는 처지를 “무슨 놈의 팔자가 인간도리도 못하고 살아”하며 한탄하는 중견배우들, 태연한 척 버티다 “극악스러워도 엄마가 있어 좋았다”며 결국에는 오열하고 마는 윤영까지. 그들 틈바구니 속에서 유독 삶의 행복으로 도드라져 보이는 주준영과 정지오 커플의 모습은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들어주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은 드라마를 만드는 자들의 힘겨운 삶과 현실과 때론 타협해야하는 고뇌, 그리고 순간 순간 빛나는 행복감을 그리면서 TV 저편에 사는 그들이 사실은 우리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드라마다. 그러니 그들이 사는 세상을 무언가 특별하고 드라마틱한 삶으로 요란하게 치장했던 방송국을 다룬 기존 드라마들에 비하면 심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덕목은 과장 없는 진정성을 갖고 포착하는 삶의 이야기다. 그것이 드라마라는 직업 속에서 느껴지는 단상들과 연결되기도 하고 때론 직업 상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서 드러나기도 한다. 하지만 매번 다른 부제를 갖고 스무 가지의 삶의 양태를 보여줄 20부작 ‘그들이 사는 세상’은 자극적인 자신들의 현실(자극적이고 경쟁적인 드라마 환경)을 넘어설 수 있을까. 좋은 드라마가 살기 힘든 세상이다. 드라마를 통해 보여지는 것처럼.
이제 종영을 앞두고 있는 ‘대왕 세종’은 독특한 사극이다. 사극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던 흥행요소들이 빠져있는 사극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시청률이 아마도 10% 초반대에서 종영하는 KBS 사극은 ‘대왕 세종’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시간대와 채널 이동이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그 근간에는 ‘대왕 세종’만이 가진 이 같은 도전이 깔려있다. 어찌 보면 무모한 도전처럼 보이는 ‘대왕 세종’의 행보, 그것은 무엇이었고, 또 어떤 의미가 있나.
볼거리가 없다? 스펙타클보다는 심리사극으로 ‘대왕 세종’의 가장 큰 특징이자 난점은 여타의 사극들에 비해 볼거리가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볼거리에도 여러 가지가 존재한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그간 대하사극하면 기대하게 하던 전쟁, 전투신의 그 스펙타클한 영상이 ‘대왕 세종’에는 없었다는 말이다. 어린 충녕대군이 대왕 세종이 되어가는 그 과정에서 오히려 부각되는 것은 정치다. 즉 칼의 싸움이 아닌 말의 싸움이 사극의 중심에 서게 된다.
스펙타클한 영상을 기대한 시청자라면 인물들의 심리에 천착하는 ‘대왕 세종’의 이런 면모는 낯선 것이 아닐 수 없다. 눈과 귀를 열어두기만 하면 쉽게 상황이 파악되면서 역사적 인물들이 그 속에 살아 움직였던 과거의 사극들에 비해, ‘대왕 세종’은 자세하게 인물들의 대사를 읽어나가야 하는 곤혹스러움이 있다. 대사 또한 정치적 언변이 그러하듯이 직설적이라기보다는 중의적이고 다의적이다. 만일 그 대사가 주는 특별한 재미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대왕 세종’은 자칫 ‘말만 번지르르한 사극’으로 비칠 수 있었다.
적도 아군도 없다? 독특한 대결구도 정치 사극을 지향하는 ‘대왕 세종’에는 전투나 전쟁이 중심이 되는 사극들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적과 아군의 선명한 대비가 없다.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동지도 없는 이 정치판에서 때론 강력한 대립자였던 양녕대군(박상민)과 황희(김갑수)는 후에는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 된다. 이것은 권력에의 욕망을 드러내며 사사건건 세종과 대립하던 박은(박영지)도 마찬가지다. 또한 초기 세종의 지원자였던 최만리(이성민)는 뒤로 가면 원칙주의자로서 세종의 한글 창제에 반대하는 강력한 적이 된다.
이것은 사실 사극에서 이제껏 잘 보여주지 않던 독특한 대결구도이다. 선명한 대결구도가 갖는 복수극의 구조는 사극이 가진 흥행의 핵심요소. ‘대왕 세종’은 그 비현실적인 대결구도를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복마전의 세계로 끄집어낸다. 이것은 또한 세종의 정치철학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오히려 가장 강력한 대립자인 조말생(정동환)을 가장 측근에 두면서 자신이 엇나가지 않도록 균형자 역할을 하게 만든다. 즉 정치란 상명하복의 과정이 아니라 다른 생각들의 부딪침을 통해 보다 나은 것으로의 타협의 과정이라는 것을 ‘대왕 세종’은 보여준다.
멜로가 없다? 인간애를 다루다 대결구도나 전쟁신 같은 스펙타클을 버리고 나면 사극에서 흥행요소로 남는 것은 멜로이다. 현대극이 식상한 것으로 그리는 운명적인 사랑은 아직도 사극 속에서는 유효한 코드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왕 세종’에는 그 흔하디 흔한 멜로가 없다. 초반부에 후궁으로 들어와 세종과 사랑을 나누며 후일 신빈 김씨가 되는 역할을 맡았던 이정현은 성대결절을 이유로 하차하자 그나마 있던 이렇다할 멜로 구도는 사라져버렸다.
대신 ‘대왕 세종’이 천착하는 것은 세종의 무한한 백성들에 대한 사랑, 즉 인간애이다. 조선 백성들의 삶을 위해 조선의 역법과 천문을 연구하고, 한글 창제를 해나가는 그 과정은 한 인간이 어떻게 인간을 사랑하는가를 실천적으로 보여준다. 독특한 것은 그 과정에서 ‘대왕 세종’만의 재미를 구축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백성들을 위해 끊임없이 추구하는 발명의 과정과 그 발명을 제지하려는 세력 간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두뇌 싸움이다. 물론 이 재미 역시 보통의 사극을 기대하던 시청자들에게는 낯선 것으로 비쳐질 수 있었다.
‘대왕 세종’은 결과적으로 이 사극의 세 가지 흥행코드를 버림으로써 시청률에서 실패한 사극이 되었다. 주말 밤, 아직까지는 도전적인 새로움보다는 익숙함이 통한다는 반증인 셈이다. 그렇지만 ‘대왕 세종’이 그린 그 독특한 세계 자체가 시청률이라는 양적 판단에 재단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 낯선 사극의 구조는 훗날 어쩌면 새로운 대중적인 사극의 구조 속으로 편입될 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도 하지 않지만 해야하는 길을 걸어갔다는 점에서 ‘대왕 세종’은 그 드라마의 주인공을 닮았다.
‘베토벤 바이러스’는 클래식이라는 우리네 드라마와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소재를 다룬 드라마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는 무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것은 그 속에서 타인의 얼굴이 아닌 우리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딘지 우리와는 다를 것만 같은 클래식이란 소재였지만 ‘베토벤 바이러스’는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 서민들의 자화상을 그 속에 담고 있었다.
정희연, 우리 시대 주부의 자화상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늘 뒷전이고 오로지 가족들이 우선인 삶을 살다가 뒤늦게 첼리스트로서의 꿈을 찾아낸 정희연(송옥숙)은 바로 우리네 주부들의 초상이다. 가족들 속에서는 늘 밥 차려라, 수험생 뒷바라지해라는 말에 마치 그것만이 그녀의 인생이라도 되는 양, 못 챙기는 걸 미안해하는 그녀는 바로 그 틀을 벗어나 강마에(김명민)를 만나면서 삶이 변화한다. 그녀를 변하게 한 한 마디는 다름 아닌 강마에의 “똥 덩어리”. 아픈 말이지만 그것은 스스로를 똥 덩어리 취급하며 살아온 그녀를 자신과 맞서게 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서조차 남편의 눈길을 의식하는 그녀는 그래도 늘 가족의 틀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이 시대 주부들의 초상이다.
박혁권, 이 시대 가장의 자화상 콘트라베이스로서의 꿈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박혁권(정석용)은 가장으로서의 삶을 위해 자신의 삶을 포기하려 하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과 같다. 당장 아기의 분유 값이 급하고, 살아가야 할 집을 구하는 것이 급급한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밟히는 것은 가족이다. 그런데 때론 이것은 핑계가 된다. 너무나 멀리 있어 보이는 꿈을 저 스스로 포기하려는 핑계. 직장에서 후배에게 밟히면서도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는 그를 오히려 바꾸는 것은 가족이다. 조심스럽게 내미는 그의 꿈으로의 발걸음이 남다르게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강건우, 이 시대 청년의 자화상 강건우(장근석)는 절대음감을 가진 천재로 등장하지만 그 면면은 이 시대 청년의 자화상을 담고 있다. “왜 즐거우면 안돼요”하는 그의 질문은 이 시대의 화두가 아닐 수 없다. 직업이든, 학업이든 늘 성공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던 기성세대들에게 강건우가 던지는 질문은 무언가 깊이 없어 보이는 아이의 그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즐기는 자를 노력하는 자가 이기지 못하는 시대, 강건우의 질문은 오히려 성공하고 나서도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이들에게 신선한 것이 아닐까.
김갑용, 이 시대 실버의 자화상 시향 단원으로 활동했지만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연주할 자리를 얻지 못하고 주로 길거리에서 연주하게 되는 김갑용(이순재)은 이 시대 실버들의 자화상이다. 한 시대의 중심이었고 그들로 인해 지금의 삶이 가능하게 됐지만 점점 중심에서 벗어나 지금은 잊혀져버린. 친자식보다 하이든(쥬니)에게 더 자식 같은 정을 받고 말년의 기억을 갖게된 김갑용은 이 아이러니한 현실의 대변자다. 치매는 어쩌면 그에게 행복한 것일지도 모른다. 기억하고픈 것만 기억할 수 있으니 말이다.
하이든. 이 시대 청소년들이 자화상 하이든은 교육열 속에 부자인 아이들은 더 좋은 대학에 가고, 가난한 아이들은 그렇지 못한 이 시대 청소년들의 자화상이다. 누구는 매달 몇 백만 원씩 레슨을 받으며 공부를 하고, 누구는 돈이 없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 대물림되는 시대. 빈곤은 또한 문화까지도 특정한 사람들만의 향유물로 바꾸어 버리는 세태. 하이든의 절망과 까칠함은 바로 그런 세상과 맞서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배용기, 이 시대 마이너리티의 자화상 제대로 배운 게 없어 밤무대에서 활동하지만 오케스트라가 꿈인 배용기는 이 시대 마이너리티의 자화상이다. 캬바레라 비아냥대는 말들에 “캬바레 무시하지마”하고 말하는 그의 말에는 진정성이 들어있다. 세상에 인간이라는 단어 앞에 메이저와 마이너가 따로 있을까. 꿈이 있는 한 말이다.
강마에, 이 시대 멘토의 자화상 저마다 사연 한 가지씩들을 갖고 이 시대의 대변자들로서 등장한 이들 모두를 조련해 어느 경지에까지 끌고 가 꿈의 맛을 느끼게 해주는 강마에는 이 시대 멘토의 자화상이다. 그네들의 착한 마음을 다 알고는 있지만 그것보다도 더 강력한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 그들 앞에 스스로 벽이 될 수밖에 없는 멘토. 냉혹한 현실 앞에 약해질까봐 혹 상처를 입을까봐 괜한 부드러움을 보여주지 않으려 애쓰는 이 시대의 멘토.
‘베토벤 바이러스’가 그려낸 캐릭터들은 모두 이 시대의 자화상들이었다. 거기에는 현실이 힘겹기만 한 서민들의 얼굴들이 있었다. 무모하리 만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달려가는 그들의 모습에서 클래식이 낯설어도 우리는 모두 공감을 얻을 수 있었다. 강마에가 그 중심에 섰던 이유는 바로 이 서민들의 꿈을 이끌어주는 리더십으로 자리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베토벤 바이러스’의 이 작은 오케스트라는 지금 현재 이곳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현실은 답답하지만 꿈은 포기할 수 없는.
‘에덴의 동쪽’의 기획의도에는 아무런 시대극에 대한 표지가 나타나질 않는다. 거기에는 대신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마음과 사랑, 심지어 영혼(정말?)까지를 되찾는 휴머니즘의 이야기라는 애매모호한 문구들이 들어가 있다. 물론 드라마가 어떤 현실에 부재한 것을 채워 넣으려는 욕망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 환타지가 어떤 시대를 그릴 때는 신중해져야 한다. 드라마로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재해석은 무한히 열려 있어야 하지만, 그 재해석이 시대정신 자체까지 변형시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이 드라마는 60년대 사북 탄광촌에서부터 시작된 두 가족의 애증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그 역사는 탄광업주인 신태환(조민기)과 노조위원장인 이기철(이종원)에서부터 비롯된다. 신태환의 사주로 이기철이 죽게되면서 양가는 철천지 원수지간이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과정에서 운명의 장난처럼 두 사람의 아들이 뒤바뀌게 된다는 점이다. 복수극의 틀을 가지고 있는 이 드라마의 한 동력이 신태환의 이기철 살해에서 비롯된다면, 그 복수극과 동시에 진행되는 화해극은 이미 시청자들이 이 철천지 원수들의 두 아들이 바뀐 걸 알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바로 이 지점 복수와 화해가 교차하는 그 운명의 쌍곡선은 이 드라마에 극적인 힘을 부여한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기획의도에도 없는 시대극에 대한 징후들이 이 두 가족의 역사 속에 무차별로 끼여든다는 점이다. 탄광촌의 노사분규와 건설회사와 철거민들의 이야기, 학생운동과 고문통치, 전투기 도입과 로비스트 이야기 등등. 그것은 풍경만으로도 우리가 살아온 시대의 아픔을 무작위로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시대풍경의 꼭지점 위에는 신태환 혹은 신명훈(박해진)이 한 축을, 그리고 나머지 꼭지점 위에는 이동욱의 아들 이동철(송승헌)과 이동욱(연정훈)이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대립은 마치 그 시대에 벌어졌던 대립을 표징하는 것처럼 그려진다.
그런데 이 밑그림 위에 얹어진 인물들의 관계가 심상치가 않다. 먼저 이 뒤바뀌어진 아들들이 서로 대립하는 관계는 그것이 지속되고 강해질수록 더 강력한 파국(즉 사실이 밝혀졌을 때의 회한)을 예고하게 만든다. 이미 그 엇갈린 운명을 알고 있는 시청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 대립은 안타까운 운명으로 치환된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등장인물들의 대립이 결국은 오해로 인한 무의미한 것이었다는 식의 이런 스토리 구조는 그 밑그림에 깔려있는 시대의 문제 또한 너무나 간단하게 화해의 장으로 끌어내게 만든다. 거기에는 시대의 아픔을 양산했던 자들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혹은 법적인 문제들에 대한 역사적 처벌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 그것은 오로지 가족적인 핏줄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이 두 가족의 문제만이 아니다. 유난히 많은 이 드라마 속 원수지간의 사랑은 이동욱과 언론재벌 대한일보 민회장의 딸인 혜린으로 이어지고, 신명훈에게 겁탈 당하면서도 아이를 위해 그와 결혼하는 지현(한지혜)으로도 이어진다. 심지어 이동철의 여동생인 기순(전소민)은 자신을 납치한 왕건(김형민)을 오히려 살려주고 점점 가까워진다. 이들에게도 보이는 것은 원수가 저지른 사회적인 문제들(범법행위들)이 밑바탕에 깔려 있지만 그 위에서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개인적인 사랑으로 그 문제를 덮어버린다는 점이다. 그러나 과연 이 드라마가 연거푸 외쳐대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구호 하나면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일까. 사회적인 문제를 개인적인 문제, 혹은 상투적인 종교적 문제로 바꾸어버리는 지점에서 이 드라마는 이상한 휴머니즘을 주장하고 있다.
이것은 사실, 이동철의 아버지 이기철이 “좋은 사람도 나쁜 사람도 모두 품을 수 있어야 사나이”라고 남긴 그 애매한 말에서부터 드러난 바 있다. 잘못된 일이 있으면 그것이 자식이나 아버지라도 응당 그 벌을 받아야하는 것이 사회 정의의 기본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마치 그 지점에서 “그래도 핏줄인데...”하고 우리네 혈연 중심적 사고방식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악의 화신으로 등장하는 신태환이 입만 열면 떠들어대는 “살아남기 위해 뭐든지 한다”는 그 논리는 자신의 추악한 욕망을 생존인 것처럼 위장하게 만들기도 한다. ‘에덴의 동쪽’의 ‘원수를 사랑하라’는 밑도 끝도 없는 주장은 자칫 잘못하면 시대의 아픔을 조장하고도 버젓이 잘 살아가고 있는 자들에게 심정적인 면죄부를 주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때론 역사왜곡보다 더 위험한 일이다.
‘타짜’에 새롭게 투여된 짝귀(조상구)는 드라마에 새로운 활력을 줄 수 있을까. 그 결과는 알 수 없지만 짝귀가 적어도 지금까지 들고있던 ‘타짜’의 패 중 가장 좋은 패라는 것은 분명하다. 먼저 드라마 ‘타짜’가 지금까지 들었던 나쁜 패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 진원지는 분명한 선악구도다. 본래 ‘타짜’ 원작이 가진 가장 큰 힘은 선악구도를 뛰어넘는 인간욕망의 집합체로 도박을 그렸다는 점이다. 이 작품의 제목이 ‘도박’이 아니고 ‘타짜(도박판에서 기술로 남을 속이는 자)’인 것을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선도 없고 악도 없는 그 상황을 영화는 잘 그려냈다. 주인공인 고니 못지 않게 아귀와 정 마담 같은 욕망의 화신들이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던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드라마 ‘타짜’는 선악 자체가 불분명한 타짜의 세계에 그 선악구도를 끼워 넣는다. 그것이 드라마라는 한계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것은 패착이다. 평경장(임현식)과 고광열(손현주), 그리고 작두 대호(이기영)는 착한(?) 타짜이고, 아귀(김갑수)와 정마담(강성연) 그리고 영민(김민준)은 나쁜(?) 타짜다. 나쁜 타짜들이 돈에 대한 욕망으로 도박에 손을 댔다면, 평경장과 대호는 은퇴한 자이며, 고광열은 생계형 타짜이고, 고니는 복수의 방법으로서 도박에 손을 대게 되는 타짜로 그려진다.
‘타짜’가 도박의 세계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선악 구도를 세워두면 그 결과가 뻔해진다. 결국은 선이 이기고 악은 지게 된다는 스토리가 그 구도 속에서 미리 읽혀지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에게 너무 쉽게 패가 읽히게 되는 이 구도는 긴장감을 앗아가 버리는 동시에 리얼리티마저 손상시킨다. 도박이라는 강력한 욕망 앞에는 적도 없고 아군도 없는 그런 상황이 진짜 리얼한 상황이다.
영화 ‘타짜’에서는 정 마담이 그 중간 역할을 잘 해줬다. 즉 아귀와 고니의 대결이 박빙일 때, 그 결정적인 승부의 패를 정 마담이라는 이 편도 저 편도 아닌 인물에게 던짐으로써 그 결과를 알 수 없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 ‘타짜’에서 정 마담(강성연)은 그렇게 매력적인 캐릭터로 자리하지 못하고 있다. 영민을 사랑하는 그런 모습은, 사랑마저도 도박 설계의 한 무기로 사용하던 정 마담의 캐릭터를 약화시킨다.
반면 새롭게 등장한 짝귀는 저 스스로 고니에게 밝히듯 “적이 같은 아귀일 뿐, 절대로 자신을 믿지 말라”고 할 정도로 어떤 중간지대를 밟고 있다.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의 양자 구도는 새롭게 삼자 구도로 재편될 가능성을 만들게 된다. 마치 삼국지의 조조와 맞서기 위해 유비와 손권이 일시적으로 손을 잡는 그런 형국이 되는 셈이다.
짝귀가 진짜 좋은 패라는 것은 그 캐릭터가 ‘타짜’의 재미 그 이상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갖기 때문이다. 도박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에서 자칫 선악구도는 그 도박의 위험성 자체를 상쇄시킬 수 있다. ‘타짜’가 도박을 내세워 그 위의 욕망에 굴절된 인간군상이 가진 다양함을 그려내고 또 그를 통해 어떤 관조적인 입장까지를 담을 수 있으려면 적어도 욕망 앞에 승자도 패자도 없는 그 리얼한 상황을 그려내야 한다. 선악구도가 만들어내는 영웅은 그만큼 위험하다는 말이다.
물론 짝귀라는 좋은 패를 가졌다고 해서 ‘타짜’가 그 판을 따낼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마치 고니의 귀환을 위한 한 때의 캐릭터로 다뤄지다가 은근슬쩍 사라져버리거나 해버린다면 짝귀는 아무 것도 아닌 패로 전락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타짜’는 분명 짝귀라는 좋은 패를 잡았다. 하지만 제대로 된 레이스(게임진행)를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저 버려지는 패만도 못한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정치인이 바뀌면 문화도 다른 길을 걷게 된다는 건 우리나라 문화계의 비극이다. 문화적 소양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느 한 구획을 책임지게 될 정치인에게는 실로 중요한 문제다. ‘베토벤 바이러스’에서 강마에(김명민)는 문화적 소양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새로 취임한 시장을 불러 자신이 들려주는 음악의 느낌을 다섯 가지 말하라고 한다. 시장은 아름답다, 좋다는 식으로 그것을 단순히 표현한다. 강마에는 거기에 대해 수많은 표현들이 가능한 그 음악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건 본인의 자유지만, 그걸 모든 시민들에게 강요하지는 말라고 말한다. 문화에 대해 모를 수는 있지만 그것을 자기 식으로 마음대로 재단하지는 말라는 말이다.
그 새 시장은 자신의 취임식을 빛나게 할 목적으로 시향을 불러 자신의 애창곡인 ‘마이 웨이’를 연주하라고 했다. 이것은 아주 오래 전 군부독재 시절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자기 취향을 위해 문화를 굴종시키려는 것. 거기에 대해 강마에가 한 것은 존 케이지의 ‘4분33초’다. 이 전위음악은 4분33초 동안 침묵함으로써 그 즉흥적인 반응으로 들려지는 소리들을 음악으로 전화시킨 곡이다. 즉 이 4분33초 간의 침묵 속에서의 자신의 반응은 자신 스스로 연주한 음악이 되는 셈. 새 시장은 침묵으로 꺾어지는 자신의 욕망에 화를 냄으로써 자신의 음악, 즉 음악적 소양의 조야함을 드러낸다. 여기서 강마에의 선택이 보여주는 것은 문화 그 자체가 어떤 잘못된 정치적 선택에 대한 저항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새 시장이 시향의 존폐를 결정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에서 한 정치인은 이렇게 말한다. “먹고살기가 힘든데 그깟 시향이 뭔 소용입니까 그 돈으로 길이나 하나 더 내세요.” 경제가 어려운데 문화가 다 무슨 소용이냐는 말이다. 그러자 반박이 날아든다. “아무리 어려워도 밥만 먹고삽니까? 향기가 있어야죠.” 그 논박이 오고가는 자리에서 강마에는 귀에 헤드셋을 끼고 클래식을 듣는다. 이 말 저 말 다 듣기 싫다는 무언의 반항인 셈이다. 이 돈을 벌어주는 것도 아니고, 길을 내주는 것도 아닌 음악의 무모성에 대한 시퀀스는 이미 희망을 잃어버린 수재민들에게 아무 소용이 없을 것만 같은 베토벤의 합창교향곡이 진짜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에피소드에서 이미 나왔던 대목이다. 클래식으로 대변되는 문화는 불황에는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는 고상한 취미처럼 여겨져 왔지만, 실상은 그것이 오히려 힘겨움에 빠진 서민들을 위무하고 희망을 주는 존재라는 걸 말해준다.
강마에는 이 가녀리고 우리의 현실과 유리되어 보이는 문화(클래식으로 대변되는)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가 하고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니 석란시향의 지휘자를 그저 5급 공무원으로 생각하는 새 시장과 맞설 수밖에. 이러한 인식은 강마에가 이 오합지졸 오케스트라를 끝까지 마음 한 구석에 세워두고 보이지 않게 도움을 주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적어도 이 오합지졸 오케스트라들은 이 어려운 경기와 현실 속에서도 희망과 꿈을 잃지 않는 존재이며, 그래서 실제 현실과는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위해 밤잠도 설쳐가며 연습을 하는 이들이다.
이들의 모습은 경제를 내세워 문화나 생태 같은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는 식의 경제 강박증을 가진 정치인들보다 훨씬 건전하고 건설적이다. 이들은 백도 없고 학벌도 별로 없는 보통 사람들이다. 특히 클래식이라는 세계에서 보면 애송이들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이 애송이들은 클래식 즉, 문화의 힘이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 꿈은 우리네 서민들의 꿈과 맞닿아 있다. 전문가 입네 하면서 꿈은 이미 버린 지 오래인 그들과는 대립되는. 강마에가 그들을 보며 안타깝게 생각하고 또 지켜주고 싶어하는 것은 바로 그 꿈이다. 그 꿈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 강마에는 저 스스로도 그러했듯 때로는 냉혹한 현실이 되어주기도 하고, 때로는 굳건한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그는 재능도 있고 열정도 넘치며 근성도 있는 강건우(장근석)를 현실 앞에 몰아세우면서도 “독해져라”하고 조언을 해준다. 또 클래식계에 아무런 프로필도 없는 강건우가 더 이상 연주할 수 없는 상황에 몰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못나서”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그를 껴안아주며 “아니야. 넌 훌륭해. 대단해.”하고 말해주기도 한다. 그런데 그 강건우에게 하는 강마에의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울림은 고스란히 어려운 시기를 마치 단원들이나 강건우처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전달된다. 강마에가 껴안은 건 강건우뿐만이 아니었던 셈이다.
‘베토벤 바이러스’가 주목받게 된 것은 강마에(김명민)의 출연과 함께였다. 그가 수면제를 먹고 쓰러진 애완견 베토벤을 향해 “토벤아!”하고 외치는 순간, 드라마의 호감도는 급상승했고, 그가 늦깎이 아줌마 챌리스트 정희연(송옥숙)을 향해 거침없이 “똥.덩.어.리.”라고 얘기하는 그 순간 우리는 그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베토벤 바이러스’는 사실상 강마에, 아니 김명민 바이러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긴장감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확히 강마에와 두루미(이지아)와의 멜로 라인이 구축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사실 이 삼각관계, 즉 강마에-두루미-강건우(장근석)의 멜로 구도는 애초부터 그 무리함을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많았다. 두루미에게 어떤 식으로든(그것이 겉으로는 독설이라도) 애정표현을 하기 시작하는 강마에는 그 캐릭터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버럭 대며 사랑하는 캐릭터는 이제 좀 식상해진 경향이 있다.
게다가 멜로는 그저 애정관계만을 드라마에 짐 지우지 않는다. 거기에는 대결구도가 예고되어 있다. 강마에와 강건우가 두루미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애정대결은 드라마 속 사건의 대결로 연결된다. 강마에와 강건우는 곡 해석을 가지고 부딪치지만 그 기저에는 두루미의 그림자가 꿈틀거린다. 하지만 이 강마에와 강건우의 대결구도는 초반부에 보여주었던 이 드라마의 대결구도보다 참신하지 못하다.
초반의 대결구도는 강마에와 오합지졸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대결이 있었고, 또 그 위에 결국 강마에가 맡게 되는 오케스트라와 세상과의 대결구도가 있었다. 이 구도 속에서 강마에는 살아 움직일 수 있었다. 즉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압제자이기도 하지만 세상과의 대결 속에서 단원들의 보호자가 되기도 하는 것. 강마에는 그 스스로 현실이 되어 단원들에게 자신을 넘어보라고 도발하는 존재로 서게 된다.
하지만 강마에와 오케스트라를 대변하는 강건우의 대결은 너무 멜로 중심과, 천재와 비천재의 대결로 흐르고 있다. 강건우가 천재이고 그 천재를 질투하는 강마에의 이야기는 모차르트와 살리에르를 다루던 ‘아마데우스’에서는 재미있었을지 모르지만 이 드라마가 하려던 이야기와는 너무 벗어나 있다. 그것은 이 드라마를 열광케 만들었던 서민들의 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에게 성큼 다가왔던 클래식이라는 소재는 이 천재와 비천재의 대결구도로 가면 다시 저 멀리 달아나 버린다.
또한 아무리 천재라고 하더라도 이제 몇 달 클래식을 접하게된 강건우를 강마에가 스스로 질투한다고 밝히는 것은 현실성 자체가 떨어진다. 강건우는 사실상 강마에라는 망치질이 있어서 그 천재성이 발휘되는 존재로 기능할 때, 좀더 현실적인 면모를 띄게 된다. 특히 많은 오케스트라 단원들 속에 천재이면서도 평범하게 존재하고 있어야 그 캐릭터는 다른 캐릭터들을 가리지 않고 드라마의 주제를 끌어가면서도 재미를 주게 된다.
강마에와 강건우의 대결구도 속에서 만들어진 타 캐릭터들의 극단적인 설정 또한 문제가 있다. 두루미는 청력을 잃게 된다는 극단적 설정이 없었던 시기에는 능동적인 캐릭터였지만 지금은 그 무거움에 갇혀 캐릭터가 잘 드러나지 않게 되었다. 청력을 상실한 베토벤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하더라도 이 이야기를 너무 무겁게 만들어버리는 두루미 설정은 드라마의 발랄함을 상쇄시킨다. 이것은 또한 치매를 앓고 있는 김갑용(이순재)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이들 캐릭터들은 질병이라는 지나친 설정에 갇혀 능동성을 잃어버렸다.
‘베토벤 바이러스’가 살려면 먼저 강마에를 살려내야 한다. 그러려면 멜로 구도를 끝내야 하고, 강마에와 강건우의 1대1 대결구도를 버리고 강마에와 단원들의 대결구도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고 그 애증관계 위에서 사회적인 편견과 싸우는 모습들이 그려져야 한다. 이것이 ‘베토벤 바이러스’가 가진 중독적인 바이러스를 힘겹게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대중들과 나눌 수 있는 길이다.
‘바람의 화원’에는 그림 경합이 매번 등장한다. 신윤복(문근영)이 화원 승급을 두고 ‘단오풍정’을 그릴 때도 경합이 등장하고, 청국에 보낼 그림을 두고 ‘군선도’를 그릴 때도 김홍도(박신양)와 장벽수(김응수)의 경합코드가 등장한다. 또 동제각화의 명을 받고 김홍도와 신윤복이 주막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며 이것은 어진화사 경합을 통해서도 이어진다.
어진화사 경합의 풍경을 보면 하나의 스포츠가 연상된다. 화제를 내린 왕이 있고, 그 시험을 진행하는 예조판서가 있으며, 감독관으로 홍국영이 있다. 그리고 선수들로 김홍도-신윤복팀과 이명기(임호)-장효원(박진우)팀이 있다. 예조판서가 등장해 “이번 경합은-”하고 말하는 장면은 마치 시합의 시작을 알리는 스포츠의 그것과 같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 대회의 관객들은 경합장은 물론이고, 김조년(류승용)을 위시한 장사치들의 도박내기가 있으며, 소박하지만 서민들의 내기판이 있다. 물론 경기 결과에 따라 입지가 달라지는 선수(?) 주변 사람들까지 거기에는 존재한다.
이 완벽한 스포츠의 구성요소들은 이미 예전 ‘대장금’에서도 등장했었다. 장금(이영애)과 금영(홍리나)이 선수로 등장하는 이 요리 스포츠에는 스승들(한상궁과 최상궁)이 존재하고, 그 판관으로서 중종(임호)의 말 한 마디가 경기를 결정한다. 이것은 ‘이산’으로 이어지면서 이병훈 PD 사극의 색깔을 구축한다. ‘이산’에서는 특이하게도 그 선수가 정조 이산(이서진)이었을 뿐, 거기에는 판관으로서의 영조(이순재)가 있었고 상대편 선수로 노론 벽파세력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닮아가는 사극과 스포츠가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스포츠가 말 그대로 ‘각본 없는 드라마’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반면, 사극은 대체로 결과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바람의 화원’에서도 늘 결정적인 순간에 힘을 실어주는 인물은 바로 정조(배수빈)다. 실제 역사 속에서도 뛰어난 예술가였던 정조가 그림을 놓고 하는 감동(평가)은 마치 촌철살인의 해설자가 풀어낸 경기 해설을 듣는 것만큼 묘미가 있다. 이 해설자이자 판관이 어느 한 팀을 전적으로 밀어주는 형국이 대체로 사극이 가진 스포츠와 다른 점이다.
‘바람의 화원’에서 정조는 김홍도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대장금’에서 중종은 결국에는 장금의 손을 들어주며, ‘이산’에서 영조는 정조를 알게 모르게 밀어준다. 주인공은 늘 이 경쟁상황 속에 들어가서 어려움에 직면하지만 결국에는 이기게 된다. 이렇게 뻔한 결론을 대중들을 다 알면서 왜 이 경합에 빠져들까. 이것은 아마도 이 살벌한 경쟁사회 속에서 대중들이 갖게되는 환타지를 자극하기 때문이 아닐까.
점점 어려워지기만 하는 경제 상황, 그 속에서 더욱 더 경쟁 속에 뛰어들어야 하는 대중들에게 환타지 속에서나마 이 안전한(?) 게임에 빠져들고픈 욕구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사극이 점점 스포츠를 닮아 가는 것은 아마도 그것이 이 살벌한 경쟁사회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 스포츠와 다른 점, 즉 예측되는 경합 결과에 대한 기대는 역시 그 경쟁하는 사회를 그대로 드라마 속에서조차 확인하고 싶지는 않다는 반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