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전’, 마약 범죄 느와르에 숨겨놓은 우리네 삶의 풍경들

영화 <독전>은 제목처럼 독하다. 이야기가 독하고 폭력적인 장면들이 독하며 그걸 연기해내는 배우들은 더더욱 독해 보인다. 한 마디로 미친 존재감을 보여준 배우들, 조진웅, 故 김주혁, 류준열, 차승원, 김성령, 박해준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진서연까지 모두가 소름끼치는 연기 몰입을 보여준다. 관객으로서는 그들의 연기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에 어떻게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마약을 두고 벌어지는 느와르 영화의 전형처럼 강렬한 장면들이 관객의 시선을 온통 집중시키는 바람에 이해영 감독이 이 느와르를 통해 담아놓은 많은 종교적 뉘앙스들이 슬쩍슬쩍 뒤로 숨겨진다. 이건 <독전>이라는 영화 제목의 영문명이 조금은 엉뚱하다 싶은 ‘Believer’라는 데서도 찾아질 수 있다. 겉면은 ‘독한 전쟁’이지만 그 내면에는 ‘믿는 자’들을 내세운 삶에 대한 종교적 통찰을 숨겨놓은 듯한.

워낙 맹렬하고 독한 범죄 현장의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 채워져 있는지라, 영화의 시작점과 끝점에 등장하는 눈이 하얗게 쌓인 풍광 속을 달려가는 원호(조진웅)의 모습은 어찌 보면 이 느와르를 표방한 영화에는 사족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 시작점과 끝점은 영화를 다 보고나면 사족이 아니라 사실은 이 느와르 영화를 훨씬 더 확장해서 볼 수 있는 열쇠라는 걸 알게 된다. 마치 자신이 믿는 바를 끝까지 확인하기 위해 세상의 끝에 다다른 듯한 원호의 모습은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한 단면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독전>이라는 느와르 영화에서 이런 종교적 뉘앙스를 느끼게 되는 이유는 이 영화 전편에 깔려 있는 ‘이선생’이라는 이름은 있지만 실체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세워져 있어서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목적에 따라 이선생을 만나려 하거나 그를 사칭하거나 그를 잡으려 한다. 물론 느와르 영화라는 장르적 특성 속에서 이선생은 거대 마약 조직을 배후에서 움직이는 ‘거물’이고 그래서 그를 만나려는 자들은 그와 거래를 하려 하거나, 그의 명성을 이용하려 하거나 혹은 그를 검거하려 한다. 

하지만 영화는 마지막에 이를 때까지 이선생의 존재를 숨겨 놓는다. 그래서 그 가상의 존재를 두고 벌어지는 인물들의 지옥 같은 전쟁이 벌어진다. 아무도 믿지 않는 자나 그를 사칭해 권력을 쥐려는 자는 그래서 그 지옥 속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그를 잡으려 하는 자는 결국 허상만은 잡게 된다. 그나마 끝까지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원호만이 이선생의 실체 앞에 다가간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그 이선생 앞에 선 원호는 그렇게 이선생을 좇으며 살아온 삶이 허망하다는 걸 느낀다. 그는 문득 이선생에게 묻는다. 그렇게 “살면서 행복했던 적이 있었냐”고. 마치 이선생을 잡으면 자신의 삶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지만, 막상 그 앞에 서게 되면서 그는 문득 깨닫게 된다. 무엇 때문에 그리도 고집스럽게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그 세상의 끝에까지 오게 됐던 것인지. 

<독전>은 제목이 말해주는 대로 그 ‘독한 전쟁’을 느와르를 즐기듯 봐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그 느와르의 질감을 독한 핏빛으로 만들어낸 배우들의 열연은 소름끼치도록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느와르를 통해 종교적인 구원과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이해영 감독의 속삭임을 들여다보는 재미 또한 빼놓을 순 없다. 영화 앞과 끝을 이어주는 그 황량하고 추운 동토 속을 구도하듯 차를 몰고 나가는 원호의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 속에 아른거리는 그 여운이 주는 재미를.(사진:영화'독전')

'버닝'이 담아낸, 청춘과 부조리 그리고 예술

(본문 중에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저는 뭐를 써야 될 지 모르겠어요. 세상은 수수께끼 같거든요.” 문득 벤(스티븐 연)이 무슨 소설을 쓰고 있냐고 묻자 종수(유아인)는 그렇게 답한다. 그는 알 수 없는 혼돈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이 느끼는 혼돈과 분노에 맞닿아 있다. 혼란스럽고 화가 나지만 도대체 왜 그런지는 잘 보이지 않는 안개 자욱한 길을 헤매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은 이 청춘들이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과 그 감정을 만들어내는 부조리한 세상, 그리고 그 안에서 예술은 얼마나 가녀리면서도 또한 희망을 주는 것인가를 담았다.

<버닝>의 첫 장면은 트럭으로 보이는 차 뒤에서 조금씩 피어나오는 담배연기로 시작한다. 누군가 그 뒤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 다만 한숨처럼 피어나는 담배연기가 그 존재를 증명하는 듯한 종수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트럭에서 짐을 꺼내들고 인파 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시장통으로 보이는 그 곳에서 그는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데 그 곳에서 그를 알아보는 이가 있다. 바로 한 가게 앞에서 춤을 추며 호객을 하고 있는 나레이터 모델 해미(전종서)다. 어린 시절 종수와 파주의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해미. 그들은 그렇게 만나 그날 밤 함께 술을 마신다.

술자리에서 해미는 이야기를 하며 손으로 귤을 까먹는 듯한 마임 동작을 해보인다. 그냥 재미로 배우고 있다는 마임. 해미는 마임을 잘 하려면, 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귤이 없음을 잊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건 해미라는 존재와 그가 살아가는 삶을 압축해서 설명한다. 그는 가진 게 몸뚱어리 하나밖에 없고, 카드빚에 쫓겨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하는 존재다. 하지만 그는 아프리카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 그 곳에서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를 춤추는 원주민을 만나겠다는 것. ‘리틀 헝거’가 배고픈 자들이라면,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 대한 허기를 느끼는 자들이란다. 그는 ‘리틀 헝거’지만 ‘그레이트 헝거’를 추구한다.

아프리카로 떠나 집이 빈 동안 해미는 종수에게 보일러실에 버려져 ‘보일이’라고 부르며 그 집에서 키우고 있다는 고양이에게 밥을 챙겨달라고 부탁한다. 상처가 깊이 방에 있다고는 하지만 모습을 보이지 않는 보일이. 그리고 북향이라 하루에 단 한 번 남산타워에 반사되어 빛이 들어오는 그 방은 모두 해미를 또 종수를 닮았다. 존재가 있지만 존재가 보이지 않고, 마치 청춘이기에 없는 희망을 꿈꾸긴 하지만 그것의 실체를 손에 쥐지는 못하는 그들이다.

해미가 없는 사이 그 집에서 어디 있는 지도 모르는 보일이에게 밥을 주는 종수의 헛되어 보이지만 희망을 꿈꾸는 그 손짓은 그래서 처연하다. 아무도 없는 그 집에서 저 편에 거대하게 압도하듯 발기한 채 서 있는 남산타워를 바라보며 자위를 하는 종수의 모습은 허망하다. 해미나 보일이처럼 그도 방 같은 세상에 누군가 던져주는 밥 한 끼가 없어 배고픈 이들이지만, 청춘이라는 아직도 한참을 더 살아야 하는 나이에 삶의 의미에 대한 헛된 허기를 느낀다. 그 간극은 너무나 커서 아직 세상의 이 비정함과 부조리함을 온통 이해하지 못한 이들을 알 수 없는 분노의 불길로 들끓게 만든다. 언제 폭발할지 알 수 없는 불꽃이 그 속에서 타들어간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해미가 거기서 만난 벤(스티븐 연)을 알게 되면서 종수는 점점 더 세상이 수수께끼 같다고 여긴다. 나이 차이는 얼마 나지도 않고 번듯한 직장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지만 포르쉐를 끌고 다니며 럭셔리한 집에서 비슷한 동류의 친구들을 불러 파티를 하고 클럽에서 춤을 추는 그들의 삶은, 북한의 대남선전방송이 들려오는 파주에서 소똥을 치우며 법정에서 선고를 기다리는 아버지와 집나가 소식이 없다가 어느 날 갑자기 전화를 걸어와 자신의 빚 이야기를 하는 어머니를 마주하는 종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다가온다. “우리나라에는 개츠비가 너무 많다”는 말은 그래서 이 청춘이 마주하고 있는 단단한 세상의 벽을 실감하게 만든다.

그 파주에 있는 종수의 집을 어느 날 해미와 함께 찾아온 벤은 그 포르쉐가 주차되어 있는 냄새나는 집 마당에서 와인을 마시며 지는 해를 바라보는 언발란스한 풍경을 보여준다. 문득 대마초를 꺼내 함께 피운 벤은 자신의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엄염한 범법행위가 아니냐고 종수는 말하지만, 벤은 그건 마치 비가 내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지 어떤 선악의 의미가 들어있는 행위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곳에 온 것도 비닐하우스 하나를 태우기 위한 사전답사라고 말한다.

해미는 문득 그 파주에 있었던 자신의 집과 그 집 근처에 있던 우물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금은 사라져버렸지만 그 우물에 자신이 빠졌었고, 종수가 자신을 발견해 구해줬었다는 것. 종수는 그런 일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런 일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는다. 마치 지금 해미가 벤을 만나 처한 사정이 바로 그 우물에 빠진 상황과 같다고 느끼며 그를 자신이 구해냈으면 하는 욕망을 갖게 된다.

벤이 그렇게 말하고 떠난 후, 종수는 비닐하우스에 그리고 사라진 우물에 집착한다. 버려진 비닐하우스 하나가 불타버려도 경찰이나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다는 그 말은 마치 종수 자신의 ‘있지만 없는 존재’의 이야기처럼 다가온다. 그리고 사라진 우물의 존재가 원래 없던 것이 아니라, 본래는 있었던 것이라는 걸 발견하는 일이 그 ‘있지만 없는 존재’인 자신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일이 되어버린다.

그 날 벤과 함께 온 해미가 술에 취해 대마초에 취해 마당에서 지는 노을을 보며 상의를 벗고 저편 날아가는 철새들처럼 춤을 췄을 때, 그것은 도취된 해미에게는 하나의 마임 같은 ‘행위예술’로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문득 음악이 사라지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 울음소리에 깨어난 해미는 그 갑작스런 현실에 당혹스러워하고 슬퍼한다. ‘없는 것을 잊으며’ 자신은 삶의 의미에 허기를 느끼는 사람이라 치부하며 살아온 그에게 갑자기 현실이 닥쳐온다. 사실은 그저 배가 고픈 청춘일 뿐이라는 것. 그런 그에게 종수는 아픈 말을 한다. 그렇게 옷을 마구 벗는 건 “창녀”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그 아픈 현실을 꺼내 놓은 후 종수 앞에서 해미는 마치 있지만 없는 보일이처럼 사라져버린다. 그것이 벤에 의한 것이라 의심하는 종수는 그를 미행하며 해미를 애타게 찾는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해미는 나타나지 않고, 대신 해미 같은 또 다른 배고픈 청춘이 벤의 옆에 나타나 해미가 걸어갔던 그 길을 걷고 있다는 걸 종수는 목격하게 된다.

가진 자들은 있는 것을 마치 제물처럼 즐기며 살아가고, 못 가진 자들은 없는 것을 잊으며 마치 있는 것처럼 살아가려 몸부림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알 수 없는 분노를 어찌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버닝>은 날카롭게도 우리네 청춘들이 처하고 있는 ‘없지만 있는 것처럼’ 치부하며 버텨내는 그 안간힘을 포착해낸다. 유아인이 당혹스러운 그 얼굴로 표현해내는 청춘의 초상이 못내 아프게 다가온다.

충격적인 엔딩은 그것이 실제로 벌어진 일인지, 아니면 이 종수라는 인물이 또한 ‘없지만 있는 것처럼’ 그려낸 상상 혹은 소설의 일부분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그 엔딩이 담고 있는 예술의 허망함 혹은 그나마 존재하는 희망의 양면은 역시 이창동 감독다운 예술에 대한 깊이있는 시각을 드러낸다. 예술은 ‘없지만 있는 것처럼’ 하는 행위이고, 그래서 허망해보이지만 때론 그것이 세상을 인식하게 해주고 그래서 변화하게 해줄 수도 있는 희망일 수 있다는 것이다. <버닝>이라는 영화가 그러하듯이.(사진:영화 '버닝')

'레디 플레이어 원', 스필버그의 역발상에 감탄할 수밖에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을 보면 이게 스티븐 스필버그의 작품인가 싶다가 본래 이게 스필버그의 색깔이었지 싶은 생각이 들 수 있다. 생각해보면 <죠스>나 <레이더스>, <이티>, <쥬라기 공원> 같은 영화들이 가진 오락성과 특수효과 그리고 그 안에서 넉넉하게 느껴지는 유머까지 <레디 플레이어 원>을 통해 새삼 확인할 수 있으니. 

<레디 플레이어 원>은 우리가 상상으로는 해봤을 지도 모르나, 실제는 일어나기 어렵다 생각했던 그런 놀라운 장면들이 시선을 압도한다. 이를 테면 카레이싱을 하는데 도로에서 갖가지 장애물들이 튀어나오고 심지어 도로가 움직이기도 하며 갑자기 튀어나온 킹콩이 있는 대로 차들을 두드려 부수는 그런 장면 말이다. 하지만 이건 이 영화가 보여주려는 놀라움의 시작일 뿐이다. 건담과 아이언 자이언트 게다가 처키가 동시에 한 영화 속에 등장한다는 건 캐릭터 마니아들이라면 상상이 현실이 된 듯한 반가움을 느낄 것이다. 

이 모든 게 가능해지는 건 그것이 게임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세계는 남루한 현실과 병치되는 오아시스라는 가상현실의 공간으로 아바타와 가상화폐가 사람들의 욕망을 한데 모아놓은 그런 곳이다. 사람들은 그래서 접속을 통해 더 많은 가상화폐를 모아 더 좋은 아이템을 가지려 한다. 심지어 아바타가 죽어버리면 실제 자살시도를 하는 사람이 생길 정도로.

그런데 <레이 플레이어 원>은 그런 디스토피아를 그려내는 영화가 아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특유의 동화 같은 설정을 통해 디스토피아 속에서도 꿈을 좇는 영화다. 오아시스를 설계한 전설적인 제작자 할리데이가 세 가지 미션을 푼 자에게 이 세계를 운영할 수 있는 권한을 유언으로 남기자, 모두가 그 미션을 풀기 위에 게임에 돌입한다. 주인공 웨이드 와츠는 오아시스를 지배해 돈벌이에 이용하려는 거대기업에 맞서 순수하게 게임의 즐거움을 모두가 공유하는 이상적인 세상을 꿈꾼다. 

이 영화가 흥미로운 건 머지않은 미래의 가상현실 세계를 담고 있지만, 그 안은 과거 대중문화들에 대한 향수와 추억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점이다. 가상현실의 게임 공간이기 때문에 이 일들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스타크래프트>, <백투더퓨처>, <아이언 자이언트>, <킹콩>, <쥬라기 공원>, <스트리트 파이터>, <기동전사 건담>, <사탄의 인형>, <샤이닝> 같은 대중문화의 단편들과 그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모두 이 게임 공간 속으로 소환된다. 

결국 영화는 미래 그것도 디지털 세상에 펼쳐진 가상현실의 공간을 다루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과거 지극히 아날로그적이었던 대중문화들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향수들이다. 가상공간이지만 오아시스는 결국 할리데이가 머릿속으로 꿈꾸던 세상의 구현이다. 결국 가상현실이라는 것은 그걸 만든 사람의 기억과 추억이 깃든 새로운 공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미래라는 것이 결국 현재를 사는 이들이 어떤 기억들을 축적하고 공유하면서 꿈꾸느냐에 따라 그려지듯이.

“사실 속으로는 대중문화를 비웃고 있잖아.” 이 영화 속 게이머 웨이드 와츠가 이 세계를 돈으로 지배하려는 거대기업의 회장에게 날리는 일침 속에는 그래서 스필버그가 이 영화를 통해 하려는 이야기를 압축하고 있다. 스필버그는 오아시스라는 가상공간을 통해 실감나는 즐거움을 선사하면서 그 곳을 가득 채우고 있는 대중문화들의 편린들에 헌사를 보낸다. 그러한 대중문화가 주는 순수한 즐거움들이 우리의 삶을 채워주고 있고 돈벌이가 아닌 그 세계가 주었던 진정한 행복감이 어쩌면 보다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준다고.(사진 :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

‘지만갑’, 소지섭·손예진의 아련한 동화 같은 판타지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어린 아이에게 읽어주는 ‘구름나라’ 동화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죽은 엄마가 장마가 시작되자 돌아와 아이를 만난다는 동화. 우진(소지섭)의 어린 아들 지호(김지환)는 세상을 떠난 엄마 수아(손예진) 역시 장마가 시작되면 돌아올 거라고 믿는다. 그런 아들이 못내 안타깝지만 어느 장마가 막 시작하던 날 우진과 지호 앞에 진짜 수아가 나타난다. 

설정부터가 동화 같은 판타지지만, 관객들은 의외로 이 이야기에 몰입한다. 돌아온 수아는 모든 기억이 사라져버렸고, 우진으로부터 그들이 어떻게 만나 사랑하고 함께 살게 되었는가를 하나하나 듣게 된다. 판타지 설정으로 시작한 이야기지만, 관객들은 그런 판타지는 어느 순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느낀다. 그건 우진과 지호가 얼마나 절절하게 수아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있었는가가 충분히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다. 어느새 이들의 바람에 몰입하게 된 관객은 죽은 이가 돌아온다는 설정을 믿고 싶어진다.

하지만 <지금 만나러 갑니다>가 담으려는 건 단지 죽은 인물이 돌아와서 다시 이어지는 사랑이야기 정도가 아니다. 기억을 잃은 수아가 우진으로부터 다시 듣게 되는 그들의 첫 만남부터 이별과 재회 그리고 결혼까지 해 아이를 갖게 되는 그 과정의 이야기들은 새삼 우리 자신의 삶을 반추하게 한다. 이미 결혼해 가정을 꾸린 이들이라면 그렇게 살다보니 마치 기억을 잃은 것처럼 지워버린 젊은 날의 설렘과 절절했던 사랑이 이 영화를 통해 새록새록 떠오를 수 있다. 

과거와는 기억이 단절되어 살아가던 수아는 우진의 이야기를 통해 조금씩 그 사랑을 다시금 느끼기 시작한다. 잊고 있던 사랑을 재확인하고 다시 사랑을 시작하는 것. 그건 이제는 무뎌진 중년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남다른 감회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단지 추억을 회고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옆에 그 사람이 있었다는 걸 수아와 우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첫 사랑의 이야기는 아련한 동화 같은 판타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바로 그 이야기가 가진 동화 같은 마력적인 힘을 잘 드러내는 작품이다. 시작과 함께 읽어주는 ‘구름나라’ 동화가 가진 힘이 그렇고, 후반부에 이르러 수아가 써내려간 일기의 이야기들이 그렇다. 그 이야기들은 현실이 맞나 싶은 아련함으로 다가와 지금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힘겨운 삶을 지금껏 지탱해주고 있는 숨은 힘들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 이야기를 마치 진짜인 것처럼 시침 뚝 떼고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판타지로 그려내고 있지만, 우리는 그것이 하나의 상징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며 서로에게 아름다운 영향을 주었던 그것들이 있어 결국은 누구나 이별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이 굳건히 살아나갈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Be with you’다. 지금 옆에 없어도 항상 당신 옆에 있다는 것. 그건 그 사람과 함께 했던 기억이자 이야기가 가진 마력 같은 힘을 말하는 것일 게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는 한 겨울 같은 차가운 현실 앞에서 몸도 마음도 식어버린 삶이라면, 그들에게도 찬란했던 한 여름의 아름다운 순간들이 있었고 때론 촉촉하게 쏟아져 내리던 장마 같은 감정들이 폭발했던 때가 있었다는 걸 끄집어내주는 영화다.(사진:영화'지금 만나러 갑니다')

‘우리는 썰매를 탄다’, 그들이 웃을 때 눈물이 났던 까닭

아이스하키를 하지만 이들은 썰매를 탄다. 스케이트 대신 양날이 달린 썰매를. 연습장에서 썰매를 지치고 퍽을 날리고 넘어지고 부딪치면서도 달리고 또 달린다. 그 연습장면을 보는 어린아이들은 그들을 보며 신기한 듯 말한다. “다리가 하나밖에 없어.” 

다큐 영화 <우리는 썰매를 탄다>는 파라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들이 어떻게 피나는 연습을 해왔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그 쉽지 않은 삶 속에서도 함께 모여 경기를 하며 웃고 울었는가를 담담히 담아내고 있다. 

시작부터 마음을 저릿하게 만드는 건 이들의 낡은 썰매에 새겨진 무수한 스크래치들이다. 도대체 얼마나 열심히 빙판 위를 달리고 넘어지고 했으면 그런 스크래치들이 생겨났을까. 그런데 그 스크래치는 그들의 낡은 썰매에만 새겨진 것 같지 않다. 그건 그들이 어느 날 사고를 당하고 불쑥 찾아온 장애 앞에 모든 게 무너졌던 그 순간들을 이겨내며 갖게 된 상처들처럼 보인다. 

정승환 선수는 어릴 적 다리를 다쳐 결국 절단하게 됐지만, 부모님은 그 다리가 나무처럼 자라날 거라 말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걸 믿고 살았다고 한다. 결국 학교에 들어갈 때 자신은 남처럼 달릴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했다. 그런 힘들 수 있는 이야기를 아무런 구김살 없이 밝게 웃으며 말하는 그의 모습은 그래서 더 뭉클하게 다가온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아픔들이 이들을 오히려 웃게 만들었을까.

이 영화에 등장하는 파라 아이스하키 국가대표팀 선수들의 대부분이 그런 웃는 표정들이다. 누군가는 아직도 피가 나고 고름이 차 경기 후 스스로 주사기를 꽂아 그걸 뽑아내며 버티고 있지만 그래도 웃는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딸의 운동회에서 함께 달려주지 못해 씁쓸해하면서도 애써 아이에게 웃음을 지어 보인다. 누군가는 나이 들어가는 노모와 살아가며 자신을 걱정하는 노모에게 “오래 사시라”며 자신은 걱정할 것 없다 말하며 웃는다. 

지원을 제대로 받지 못해 새벽에 빙상장을 겨우 빌려 연습을 하기도 하고, 묵을 여관비가 없어 라커룸에서 함께 잠을 자며 경기에 나가기도 했으며, 해외 원정 경기 때는 국가대표가 비행기표를 지원받지 못해 각각 개인비용을 치르고 나가 경기를 하기도 했지만, 이들은 그래도 웃는 얼굴이었다. 그 웃음이 그저 웃음일 뿐일까 싶지만, 그들은 어찌 보면 경기를 한다는 그 자체가 커다란 행복처럼 보였다. 

그런 그들이 2012년 세계선수권대회에 나가 은메달을 땄다. 세계 언론이 한국대표팀에 대해 “기적을 써나가고 있다”고 대서특필했지만, 우리들은 그런 일에 대해 관심을 거의 주지 않았다. 해외에서 열린 그 경기에서 상대팀을 응원하는 이들이 가득 채워진 반면, 우리 측 응원단석에는 쓸쓸한 플래카드 하나만 걸려 있을 뿐,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심지어 은메달을 따고 귀국한 그들을 공항에서 맞아주는 이들도 가족들뿐이었다. 

하지만 정승환 선수는 이 운동을 하면서 이제 정상인으로 돌아가는 걸 꿈꾸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자신이 하는 이 운동과 함께 하는 이들과의 시간이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기 때문일 게다. 그래서 <우리는 썰매를 탄다>라는 제목이 주는 뭉클함이 더 크게 다가온다. 그것은 메달을 따온다고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도, 계속 썰매를 탈거라는 스스로의 ‘다짐’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금 현재 진행되고 있는 평창 동계 패럴림픽에서 이들은 일본에 이어 체코를 누르고 2연승을 하며 또 하나의 역사를 써나가고 있다.(사진:영화'우리는 썰매를 탄다')

'리틀 포레스트', 한 끼에 담긴 위대한 생명에 대하여“배가 고파서.” 오랜만에 시골로 돌아온 혜원(김태리)에게 절친인 은숙(진기주)이 왜 돌아왔냐고 묻자 혜원은 그렇게 말한다. 물론 은숙은 혜원이 시험에도 떨어지고 남자친구와도 소원해져 내려왔다는 걸 눈치 챈다. 취업도 어려운 답답한 청춘들의 도시 생활이 혜원이 귀향한 이유처럼 등장하지만, 영화는 그런 현실 이야기는 좀체 하지 않는다. 대신 진짜 배가 고파 보이는 혜원이 한 끼 한 끼 제대로 된 밥을 챙겨먹는 일에 집중한다.한 겨울 그 눈길을 헤치고 처음 엄마가 떠나버린 고향의 빈 집을 찾았던 혜원은 그 차가운 집에 난로를 피우고 눈밭을 헤쳐 그래도 실해보이는 배추를 뽑아와 된장국에 밥을 지어 맛나게도 먹는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눈을 치우기 전에 밀가루를 반죽해 숙성해두고 눈을 치운 후, 수제비에 배추전을 부쳐 먹는 혜원의 모습이 이어진다. 처음 봤던 그 차갑기 그지없던 집은 혜원이 돌아오면서 조금씩 온기를 찾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혜원도 마찬가지다. 웃음기 없던 그는 그 곳에서 제대로 된 한 끼를 챙겨먹으며 오래된 친구들과 어울리며 생기를 찾기 시작한다.사실 극 영화라고 하기에 <리틀 포레스트>가 가진 이야기 구조는 지나치게 단순하다. 특별하게 벌어지는 사건이 있는 게 아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나영석 PD의 <삼시세끼>에서 봐왔던 킨포크 라이프와 먹방을 영화 버전으로 보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의외로 이런 단순한 시골집에서의 삶과 밥 지어 먹기가 주는 즐거움이 적지 않다. 그건 어쩌면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희구하는 것이지만 하지 못하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단 며칠 있다 가겠다던 혜원은 겨울에 그 곳에 들어왔다가 봄, 여름, 가을을 거쳐 다시 겨울에 떠난다. 그저 1년 정도를 그렇게 지내는 것이고 또 거기에 어떤 특별한 사건이 있는 것이 아니지만, 혜원은 그 곳에서 챙겨먹는 음식을 통해 엄마(문소리)와의 교감을 갖게 된다. 아빠가 아파 시골에 왔다가 아빠가 돌아가시고도 계속 그 곳에서 지냈다는 엄마. 그러다 어느 날 자신의 삶을 살아보겠다는 편지 한 장을 남긴 채 떠나버린 엄마.그 엄마에 대한 막연한 원망이 있지만 혜원은 자신이 해먹는 음식에서 엄마의 마음을 고스란히 느낀다. 뭔가 좋은 일이 있을 때, 혹은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늘 엄마는 특별한 음식으로 혜원의 마음을 풀어주려 했다. 음식을 홀로 챙겨먹는 혜원은 그래서 그 1년 동안 스스로 엄마가 했던 삶을 똑같이 체험하며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를 이해해간다. 엄마는 떠났지만 엄마의 온기는 항상 그 곳에 남아 혜원이 살아갈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엄마에게서 어깨 너머로 배운 요리는 도시생활에서 ‘배고팠던’ 혜원을 살려내고 있었다.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와 그 엄마의 온기가 깃들어 있는 시골집, 그리고 그 곳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의 이야기를 병치시킨다. 봄이면 돋아나는 쑥과 고사리를 챙겨와 음식을 해먹고, 가을철 떨어진 밤으로 달달함을 채우며, 감을 달아 곶감이 익어가는 겨울을 기다린다. 엄마와 이 시골을 둘러싼 자연은 그래서 동일한 존재로서 혜원을 채워준다. <리틀 포레스트>는 그래서 누구에게나 있는 엄마나 자신을 둘러싼 자연 같은 생명력을 되돌아보게 한다.겨울에 다시 도시로 떠난 혜원은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봄이 되어 양파가 익어갈 때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친구인 재하(류준열)가 양파재배에 빗대 혜원이 ‘아주심기’를 하려는 것이라 말했듯 혜원의 귀향은 그래서 단지 도시로부터의 도망이 아닌 자연과 생명력으로서의 정착의 의미를 담아낸다.그래서 영화는 묻는다. 여러분에게도 ‘리틀 포레스트’가 있냐고. 그것은 단지 귀향하라는 그런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어디에 있든 당신 앞에 있는 한 끼와 그걸 챙기는 자연으로서의 몸을 하나의 생명으로 소중하게 여기고 있느냐는 질문. <리틀 포레스트>가 가진 단순한 이야기가 의외로 묵직한 울림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사진:영화'리틀 포레스트')

‘셰이프 오브 워터’, 괴생명체와의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이라니

“만일 우리가 아무 것도 안 하면, 우리도 사람이 아니예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셰이프 오브 워터>의 여주인공 엘라이자(샐리 호킨스)는 남미 어딘가에서 잡혀온 미지의 존재가 해부될 위기에 처하자 이웃집 친구인 화가 자일스(리차드 젠킨스)에게 도움을 청하며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이 대사는 아마도 이 영화가 하려는 많은 메시지들을 함축하는 것일 게다. 

인간과 괴생명체와의 만남과 사랑 이야기. 사실 새로운 건 아니다. 이미 <미녀와 야수> 같은 작품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불안과 공포를 뛰어넘어 사랑에 이르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본 바 있다. 또 일찍이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E.T.’를 통해 외계인과 소년의 아름다운 우정을 담아냈었다. 그러니 <셰이프 오브 워터>가 가진 괴생명체와 엘라이자의 사랑이야기는 그 연장선에 있는 작품으로 쉽게 이해된다. 

하지만 이 작품만이 가진 물의 이미지를 통해 전해지는 독특한 분위기와 오히려 괴생명체와 인간의 사랑이야기를 통해 전하려는 ‘사랑의 본질’에 대한 접근은 여타의 비슷한 구도를 가진 작품들과 이 작품을 명확하게 구분지어 놓는다. 저마다의 물방울이 또르르 굴러 하나로 뭉쳐지는 장면 하나만으로도 이 영화는 ‘사랑의 본질’을 통찰하는 이미지를 그려낸다. 

미 항공우주 연구센터의 비밀 실험실이라는 어마어마한 공간과 그 곳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언어장애를 가진 엘라이자라는 인물은 그 자체로 대비되는 면이 있다. 그 곳은 거대한 우주선이 있는 곳이지만, 엘라이자와 그의 동료 젤다(옥타비아 스펜서)는 그 우주선 밑을 청소하는 일을 한다. 세상은 그렇게 우주를 향할 정도로 변해가지만, 엘라이자는 어딘지 그런 변화와는 무관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 곳으로 괴생명체와 함께 부임한 보안책임자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는 그래서 그 미 항공우주 연구센터라는 공간이 가진 이미지를 그대로 상징하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에게 남미에서 원주민들에게 신처럼 받들여져 온 괴생명체는 그래서 단지 실험대상일 뿐 그 어떤 의미도 주지 못한다. 하지만 그와 대비되는 엘라이자는 다르다. 그는 이 괴생명체에게서 자신과 이어지는 어떤 공감대를 발견한다. 

해부될 위기에 처한 괴생명체를 구하기 위해 엘라이자가 자일스에게 도움을 청하는 장면에서 그는 자신과 괴생명체가 다르지 않다는 걸 강변한다. 말을 못하지만 서로의 마음이 전해지고 심지어 사랑을 느끼는 자신 또한 ‘괴물’이냐고 반문한다. 괴생명체에게 먹을 것을 내밀고 음악을 틀어주기보다는 전기 충격기를 내미는 스트릭랜드는 구분 짓고 차별하는 사회를 표징하는 인물이다. 그가 보이는 괴생명체에 대한 차별은 인종적으로도 직업적으로도 국적으로도 또 성별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래서 엘라이자가 괴생명체와 그 곳을 탈출해 시작되는 사랑의 이야기는 이러한 차별하는 사회를 비판하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 강렬하다. 물에서 사는 양서류의 괴생명체와 물속에서는 살 수 없는 인간이 어떻게 공존하고 나아가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저 괴생명체를 연구해 미래로 나아간다는 스트릭랜드의 생각을 정면에서 반박한다. 

“물은 담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변한다”고 한 기예르로 델 토로 감독의 말에 담겨 있는 것처럼, 이 영화는 괴생명체와 인간의 기괴하지만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신비한 순간들을 담아냄으로써 세상의 모든 사랑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마도 이런 사랑의 정반대편은 무심함이 아니라 폭력의 양상을 띤다는 건 우리가 현실을 통해 알고 있는 것일 게다. 그러니 이 기괴하지만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가 주는 메시지는 우리가 접하고 있는 폭력적인 세상에 대한 비판이자 그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된다.

1960년대의 미국 볼티모어라는 구체적인 냉전시대의 배경이 밑그림으로 깔려 있는 작품이지만, 워낙 보편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울림은 우리네 관객에게도 적지 않다. 세대, 성별, 지역 등등 구분되어 갈등하는 양상들이 사회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우리네 현실 속에서 그 모든 갈등의 차원을 뛰어넘는 이 영화의 아름다움은 마치 물방울처럼 가슴 먹먹하게 차오르며 남다른 감흥으로 다가온다. (사진:영화'셰이프 오브 워터')


'흥부', 해학과 웃음이 더해졌다면 훨씬 좋았을

영화 <흥부>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흥부전이 어떻게 탄생했는가를 담고 있는 영화다. 당연히 허구지만 그 탄생에 대한 재해석 속에는 현재적인 관점이 녹아 들어있다. 은혜를 갚은 제비가 물어다 준 박씨가 커다란 박이 되어 그걸 타자 엄청난 보물들이 쏟아져 나왔다는 이야기는 아마도 19세기 조선시대의 힘겨웠던 민초들의 꿈과 힘겨웠던 현실을 말해주는 것일 게다. 재해석된 영화 <흥부>가 지금 2018년 서민들의 꿈과 현실을 담는 건 당연한 일이다. 

<흥부>는 여러모로 2016년 촛불정국을 그 재해석의 모티브로 그려내고 있다. 광화문 현판이 보이는 곳으로 횃불을 들고 모여드는 민초들의 광경은 2016년 너도 나도 들고 거리로 나오게 했던 촛불집회의 그것과 다를 바 없고, 조항리(정진영)와 김응집(김원해)으로 대변되는 세도정치 당파싸움에 힘없는 왕 헌종(정해인)의 상황은 관객으로 하여금 ‘비선실세’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만든다. 

핍박받는 민초들이 들고 일어나 홍경래의 난이 벌어지고 좌절된 꿈들이 더 이상 희망을 얘기하지 못하게 될 때, 흥부전의 이야기는 아마도 당대의 민초들이 잠시간 현실을 잊고 웃음 속에 꿈을 담을 수 있는 힘이 되어주었을 게다. <흥부>는 촛불정국의 이야기를 저 헌종 시대로 끌고 가 흥부전을 쓴 흥부(정우)의 이야기로 다시금 그려낸다. 그래서 이 작품은 어려운 정국에 작가가 민초들을 위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가를 담아낸 영화이기도 하다. 

어지러운 정국 속에 정감록이 등장하고, 그 정감록을 서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기 위한 정치인들의 작업을 흥부는 하게 되지만, 그는 당시만 해도 작가로서의 소명 같은 걸 갖지 못한다. 하지만 조혁(김주혁)을 만나게 되면서 그는 그 글쓰기가 민초들이 그래도 계속 꿈꾸게 할 수 있는 희망을 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힘겨운 민초들의 정신적 지도자인 조혁과 그의 형이지만 조선을 가지려는 야심가 조항리는 그래서 흥부가 쓰는 흥부전의 모티브가 된다. 사실상 조혁이 흥부이고 조항리가 놀부이지만 그 실명을 쓰지 못하자 작가인 흥부가 자신과 자신의 형 놀부의 이름을 붙인 것. 

이렇게 재해석을 하게 되니, 당대에 날아가던 제비 한 마리, 지붕 위에 얹어진 박들이 달리 보인다. 저잣거리에서 연희되는 흥부전에 민초들이 찡그리고 박장대소를 터트리는 모습이 가슴 찡하게 다가온다. 가진 것 없이 하루하루 버텨내는 삶을 살아야 하는 민초들이 보이는 그 웃음은 그 가슴들 속에 여전히 피어나는 작은 희망의 촛불들이 남아있다는 뜻이니 말이다. 

고전의 재해석은 이미 많은 작품들이 시도된 바 있다. <춘향전>은 고전극으로도 또 현대극으로 재해석된 작품이고, 특히 <방자전> 같은 참신한 시도까지 이뤄진 작품이다. <홍길동전>이나 <심청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직까지 <흥부전>에 대한 시도는 잘 이뤄지지 않았다. 워낙 권선징악의 선명한 구도가 너무 뻔해 보이고 박이 가진 판타지는 너무 황당한 결말처럼 보여 재해석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흥부>는 그런 점에서 보면 2016년 촛불정국의 상황들을 흥부전의 기원을 따라가는 것으로 담아냈다는 의미가 있다. 

물론 남는 아쉬움은 많다. ‘흥부전’이 갖고 있는 해학과 웃음이 촛불정국의 민심을 드러낸다는 그 무게감 때문에 상당 부분 지워져버린 건 가장 큰 아쉬움이다. 작품의 얼개 또한 지나치게 현 시점이 주는 의미에 집착하다보니 자연스럽기보다는 작위적인 느낌을 주는 면도 아쉽다. 또한 작품을 만드는 과정에서 김주혁의 사망이라는 비보가 준 무게감이 너무 커져 작품 또한 ‘故 김주혁을 위한 헌사’에 집중한 것도 <흥부>가 본래 하려던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이유가 되었다. 

그래도 고 김주혁이 조혁이라는 인물을 통해 말하는 ‘백성’의 이야기가 그가 배우로서 ‘대중’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읽혀지는 면이 있고, <흥부>라는 작품 자체가 주는 ‘선한 민초들’의 승리라는 이야기가 지금의 현실에도 여전히 주는 울림이 있다는 건 분명하다. 이런 면들은 많은 허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흥부>가 인상 깊은 작품으로 남은 이유다. (사진:영화'흥부')


'골든슬럼버' 어리바리 강동원, 미스 캐스팅 우려 잠재우다

영화 <골든슬럼버>는 원작이 일본 소설이다. 일본에서는 2010년에 영화화되어 큰 화제가 된 바 있다. 사실 일본 원작의 작품을 리메이크할 때 가장 먼저 우려가 가는 건 그 정서가 우리에게 맞게 제대로 변환되었는가 하는 점일 게다. 하지만 <골든슬럼버>는 적어도 일본 원작 영화에서도 우리가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면이 충분한 작품이었다. 그것은 평범함 서민과 그를 둘러싼 추악하고 거대한 권력과의 사투라는 점이 국적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영화 제목의 모티브가 된 비틀즈의 명곡 ‘골든슬럼버’라는 음악이 감동적인 장면들 속에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점도 이런 국적 차이가 만드는 정서를 하나로 묶어주는 힘으로 작용한다. 다른 것도 아니고 비틀즈의 노래가 아닌가. ‘골든슬럼버’라는 곡은 그래서 이 작품을 특정 국적의 색깔을 드러내는 것이 아닌, 글로벌한 콘텐츠의 느낌으로 만들어준다. 

영화는 인기 아이돌을 강도로부터 구해준 선한 서민들의 영웅 택배기사 김건우(강동원)가 고교시절 함께 밴드를 했던 신무열(윤계상)을 만나면서 시작한다. 그의 눈앞에서 차기 유력 대권후보로 지목되던 정치인이 폭탄 테러로 사망하고, 신무열은 건우에게 이 모든 것이 그를 암살범으로 만들기 위한 조직의 계획이라고 말하고는 결국 사망하게 된다. 

조금 어려운 사람을 그저 지나치지 못하고 선하다 못해 심지어 어리바리해 보이기까지 한 건우는 그래서 그를 죽이기 위해 쫓는 거대 권력 조직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매스컴에 의해 서민 영웅으로 추대되었던 김건우였기에 갑자기 테러범으로 오인된 그는 모든 주변인물들을 믿을 수 없게 된다. 신무열이 죽기 직전 “그 누구도 믿지 말라”고 했던 말이 자꾸만 떠오른다. 

게다가 건우는 자신으로 인해 주변인물들마저 죽거나 고통을 겪게 되는 걸 알게 된다. 함께 카페를 하려던 후배는 살해되고, 과거 함께 밴드를 했던 장동규(김대명), 최금철(김성균), 전선영(한효주)에게도 조직의 인물들의 협박과 회유가 이어진다. 너무나 엄청난 권력을 가진 조직의 힘 앞에서 건우는 그저 힘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린다. 

아마도 이런 주인공을 이 작품의 원작이 내세웠던 건 일본이 갖고 있는 집단주의적 풍토 속에서 쉽게 희생되어버리는 개인의 문제를 건드리고 싶었기 때문일 게다. 때론 조직은 그들의 이익을 위해 미디어를 통한 이미지 조작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힘없는 개인들은 아무런 토로조차 하지 못한 채 희생되어버린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이런 정서적인 동질감이 지금의 우리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는 점은 국내의 리메이크판 ‘골든슬럼버’가 토착적인 느낌을 주는 이유다. 이 착하기만 하고 ‘조금 손해보는 삶’이 뭐가 나쁘냐고 항변하는 건우라는 인물은 지금의 우리네 대중정서가 가진 소시민적 영웅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가 거대 조직과 맞서 싸우고, 또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 속에서 그를 여전히 믿고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는 심정적 지지를 갖게 만든다. 

이 작품을 얘기하면서 강동원의 공을 빼놓을 수 없다. 그가 이 작품에 캐스팅되었다는 사실은 어딘지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는 인상을 줬던 게 사실이다. 그 잘생긴 얼굴이 지극히 서민적인 캐릭터와 부조화를 이루지 않을까 저어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동원은 이 작품을 통해 미남이 아닌 아주 평범한 얼굴에 그저 선한 눈빛을 담은 건우라는 인물에 전혀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몰입을 보여줬다. 아마도 그의 선한 눈빛만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뭉클해지는 감정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사진:영화'골든슬럼버')

돌아온 ‘조선명탐정’, 웃음은 충분하지만 남는 아쉬움

사실 설 명절이라는 특수한 시기에는 다소 심각하기보다는 가벼운 코미디가 극장가에서 먹히기 마련이다. 아이들 손잡고 부모가 함께 명절에 가는 영화관에서는 조금 억지스러울 수 있는 웃음도 웃을 수만 있다면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영화 <조선명탐정> 시리즈는 과거 명절이면 돌아오던 <가문의 영광> 시리즈를 닮은 면이 있다. 캐릭터가 확실하고 웃음이 있는데다 어느 정도의 볼거리와 이야기까지 있다면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다.

돌아온 <조선명탐정>은 ‘흡혈괴마의 비밀’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기존 <조선명탐정> 시리즈가 1편 ‘각시투구꽃의 비밀’이나 2편 ‘사라진 놉의 딸’에서 모두 신비한 사건에서 비롯되지만 사실은 현실적인 ‘독’으로 벌어진 살인사건이었거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잠수정’으로 만들어진 괴수사건이었다는 게 밝혀졌던 걸 떠올리는 관객이라면 ‘흡혈괴마’ 역시 무언가 현실적인 이유가 담겨져 있을 것이라 기대하기 마련이다. 

조선시대라면 마치 마술처럼 벌어지는 신비한 사건에 대해 갖가지 소문과 풍문이 더해져 하나의 신화처럼 느껴질 법하지만, 현대적인 탐정의 면면을 가진 김민(김명민)은 이를 과학적으로 풀어낸다. 사실 <조선명탐정>이 남다른 재미를 준 부분은 빵빵 터지는 슬랩스틱과 콤비 코미디가 가장 크지만, 그 밑바탕을 받쳐주는 ‘나름 과학 추리’의 맛이 현실성을 잃지 않아서다. 

물론 이번 <조선명탐정 : 흡혈괴마의 비밀> 역시 웃음의 측면에서 보면 김민과 서필(오달수)이 만들어가는 콤비 코미디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정극에서 ‘연기 달인’이라는 칭호를 붙여도 될 법한 김명민과 오달수는 이 작품을 통해 코미디 연기 역시 달인이라는 걸 입증한다. 진지한 표정에서 나오는 엉뚱한 대사가 주는 부조화의 웃음이나, 지체 높은 양반인 척 하지만 순간 머슴처럼 드러나는 본능들은 조선시대의 반상을 깨는 웃음을 제공한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 남는 아쉬움은 앞서 말한 ‘현실성의 측면’이 진짜 흡혈괴마의 탄생으로 인해 깨져버렸다는 점이다. 영화는 그래서 시작부터 죽었던 사체가 피를 빨아들이고는 다시 살아나고 관군에 의해 쫓기던 괴마가 벼랑 밑으로 추락하지만 곧 다시 달이 휘엉청 떠 있는 하늘로 치솟아 올라 저 멀리 날아가는 장면을 일찌감치 보여준다. 그건 과학을 이용한 신비한 사건이 아니라 말 그대로 흡혈괴마라는 비현실적 존재의 탄생을 이 영화가 수용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인간 무사들 정도는 날아가 버리는 괴마의 어마어마한 힘은 그래서 힘이 어느 정도 균형을 이뤄야 가져올 수 있는 대결구도의 긴장감을 흐트러트리고, 그 비현실성은 <조선명탐정> 특유의 추리요소를 상당부분 지워버린다. 그래서 전반부를 가득 채운 웃음과 긴장감은 후반부로 갈수록 뒷심이 달리는 느낌을 주게 된다. 

이러한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명절 영화로서 가족이 함께 하기에 그리 큰 부담이 되지 않는 영화가 바로 <조선명탐정>인 것만은 분명하다. 김명민과 오달수가 보여주는 콤비 코미디가 주는 웃음의 묘미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시리즈가 앞으로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마디 덧붙인다면, 너무 지나친 비현실적인 이야기로 나가기보다는 그래도 과학적으로 납득이 되는 이야기로 <조선명탐정>이 돌아오길 바란다는 점이다. 막판에 슬쩍 나온 좀비가 다음 시리즈에서 ‘흡혈괴마’의 새로운 버전이 되는 건 이 시리즈에는 그다지 좋은 선택처럼 보이지 않는다.(사진:영화'조선명탐정;흡혈괴마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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