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분 토론’과 ‘끝장토론’, 시사토크쇼가 가는 길

사용자 삽입 이미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시끄러운 세상, 시사토크쇼가 전성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 문제, 촛불 정국, 삼성 사태, 심지어 대통령의 자질문제 같은 이 땅에 사는 모든 대중들이 가진 초미의 관심사들은 곧바로 토크쇼라는 도마 위에 올려져 여러 방향과 방식으로 재단되고 토론된다. 그 선두주자는 단연 ‘100분 토론’. 명쾌하고 균형감각 있는 진행으로 정평이 나 있는 손석희로 상징되는 이 시사토크쇼는 시의에 발맞추는 아이템과 뜨거운 설전으로 순식간에 화제의 반열에 올랐다. 주제는 시사에서부터 정치, 경제,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그 경계가 넓어졌다.

한편 케이블 방송에서는 백지연 앵커를 내세워 ‘끝장토론’이라는 좀더 자유로운 형식의 토크쇼를 선보이고 있다. ‘100분 토론’과 다른 점은 리얼리티를 추구한다는 점. ‘끝장토론’에서는 시민논객들이 마치 게임을 벌이듯 자유롭게 설전을 벌이며, 패널들 역시 공중파보다는 좀더 수위가 높은 말들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좀더 솔직한 내면을 드러내게 만드는 형식인 셈. 따라서 토론에서는 드러나면 안 되는 미세한 감정들이 노출되는 경우도 많다.

Good - 시사문제의 공론화
세상이 시끄럽고 논란이 많을수록 그만큼 맹위를 발하기 마련인 시사토크쇼는 그것이 어떤 형식이든 일단 문제를 공론화시킨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부분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토론이라는 공론의 장은 한 가지 사안에 대한 다양한 시각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나와는 다른 의견과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 이유를 들어보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개인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 속에서 또한 함께 더불어 가는 삶을 유지해야 하는 민주주의 국가의 살아가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과거 TV는 한때 정부의 시녀 역할을 강요받은 적이 있다. 통폐합이라는 언론 앞에 놓여진 칼날은 TV라는 창을 국민들을 위한 것이 아닌 정부를 위한 것으로 바꿔놓았다. 이 과정에서 시사토크쇼란 존재 기반을 잃어버린다. 일정한 보도지침이 가이드라인처럼 설정된 상황에서 시사적인 문제에 대한 공론화란 자칫 선동이란 누명을 쓰고 어두운 지하밀실로 끌어내려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미 과거지사가 되었다. 커뮤니케이션의 흐름이란 물과 같아서 누군가에게 가로막힌다고 해서 도달할 곳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돌아서 가든 뚫고 가든 가게 마련이다. 대중들이 각자 생활 속에서 조근조근 얘기하는 것을 막게 되면 그들은 광장으로 나와 소리를 치는 방식으로 막혀진 커뮤니케이션을 뚫기 마련이다. 인터넷을 활용할 줄 알면 논객이 될 수도 있는 지금 같은 시대에 물길은 어디로나 나 있다. 그러니 TV의 기능은 이제 한 발 더 나간 지점에 있게 마련이다. 이 도처로 흐르는 물길들을 시사토크쇼라는 형태로 묶어주면서 어떤 각자의 맥락을 이해하게 해주는 것이다. 시사토크쇼가 하는 기능은 거기까지여야 한다.

Bad - 예능보다 더 뜨겁다
따라서 시사토크쇼가 마치 세상을 변혁시킬 것 같은 권력을 가졌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일이다. 오히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는 것 이상이 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보여지는 기능에 충실한 것이지, 그것을 통해 변화시키는 기능은 해서도 안되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문제는 이 보여지는 기능이 얼마나 충실한가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사토크쇼는 그 아이템의 논란 수위가 높아질수록 자극적이다. 속된 말로 ‘불을 확 질러버리는’ 누군가의 말 한 마디는 토론을 격한 전쟁터로 변모시킨다. 다음날 인터넷에는 그 말 한 마디에 대한 기사와 말들로 논쟁이 벌어진다. 놀라운 것은 이 과정에서 때로는 본말이 전도되는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정작 문제는 촛불집회에 대한 찬반논란에 대한 것이었는데 확대 재생산되는 메시지들은 누가 어떤 말을 했다더라 하는 선정적인 코드에만 머무는 경우도 많다.

시사토크쇼가 보여주는 화면과 영상을 자세히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최근 들어 리얼리티쇼의 영향으로 시사토크쇼들의 카메라는 좀더 패널들의 얼굴 가까이 다가가는 경향이 있다. 누가 어떤 말을 할 때 그 격앙된 얼굴이 클로즈업되거나, 그 말을 듣는 상대방의 당혹스런 얼굴이 클로즈업되는 것은 시사토크쇼가 가진 대결구도를 극대화하려는 의도다. 이런 부분을 특히 강화시킨 것이 ‘끝장토론’. 여기서는 마치 이종격투기 경기의 오프닝을 보는 것 같은 화면들이 효과음과 함께 배치되고, 중간중간 분할화면으로 ‘공격과 수비(?)’의 양상을 얼굴에서 찾아내 증폭시킨다. 리얼리티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가끔은 조종실의 모습도 끼워 넣는데 이것 역시 실제상황임을 강조하기 위해 매니저가 등장하거나 하는 스맥다운류 레슬링쇼의 편집의도와 유사한 것이다.

다양화된 의견들이 쏟아져 나오는 수평적 커뮤니케이션 시대에 시사토크쇼는 어떤 식으로든 그 존재가치가 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존재의 의미를 살리려면 시사토크쇼는 좀더 투명해져야 한다. 쇼 자체가 자꾸만 무언가를 보여주거나 극대화하려는 노력을 하면서 불투명해질 때, 오히려 그 안에서 쏟아내는 누군가의 메시지는 대중들에게 닿지 않을 수도 있다.
(본 원고는 청강문화산업대학 사보 100도씨(100C)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TRACKBACK :: http://thekian.net/trackback/561

‘우리 결혼했어요’, 그 재미 속에 남는 우려

사용자 삽입 이미지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우리 결혼했어요’는 가상으로 설정된 남녀들의 결혼생활을 리얼리티쇼 형식으로 담아낸 프로그램. 전성호 PD는 ‘우리 결혼했어요’가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고 자평한 적이 있다. 아마도 가상이지만 타인들의 좌충우돌 결혼 생활을 들여다봄으로써 타산지석이 될 거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가상 결혼’이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쓰는 ‘동거’라는 말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결혼은 ‘하는 것’이지만, 동거는 ‘해보는 것’이듯이, 이 ‘가상 결혼’도 그저 해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결혼했어요’가 보여주는 것은 결혼이 아니라 동거다.

바로 그 동거생활, 즉 결혼처럼 해보는 생활은 적어도 책임감이나 의무감 혹은 관계의 피곤으로 점철된 우리네 결혼생활이 자리한 사회 속에서는 환타지에 속한다. ‘우리 결혼했어요’가 주는 재미의 포인트는 현실적인 리얼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부족한 이 환타지를 충족시켜주는 데 있다.

따라서 정형돈-사오리 같은 현실적인 부부생활의 리얼리티는 이 프로그램의 주요 재미요소인 환타지를 상쇄시킨다.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은 알렉스-신애 같은 풋풋하고 절절한 연애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커플이거나, 크라운제이-서인영 같은 거침없고 개성강한 신세대 커플, 솔비-앤디 같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커플, 혹은 황보-김현중 같은 엇박자지만 잘 어울리는 연상연하 커플이다.

답답한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그 달콤하고 유쾌한 환타지 속에 빠져보는 것이 무엇이 문제일까. 시청자들은 이미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이런 몰입과 관조의 기술을 터득하고 있다. 저건 가상이지 실제가 아니라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환타지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 그 목적에 합당하게 충분한 재미를 주면 되는 것이라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동거생활을 보여주면서 ‘결혼했어요’라는 제목을 붙이는 것에는 문제가 있다. 이것은 결혼에 대한 개념을 전적으로 혼동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은 가상결혼이라는 컨셉트로 ‘우리 결혼했어요’라는 제목을 달면서, 보는 이에게 이건 ‘가상의 결혼생활’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마치 ‘가상’이라는 전제를 달았기 때문에 괜찮다 생각될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 이것은 여전히 결혼생활이라는 강변을 하고 있다. 비록 가상이지만 결혼생활은 결혼생활이라는 말이다.

이로써 이 프로그램이 실제로 보여주는 동거생활은 결혼생활로 치환되면서 저 케이블TV에서 줄곧 방영되며 선정성 논란에 휘말린 동거 프로그램들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어찌 보면 ‘우리 결혼했어요’는 이미 케이블TV에서 방영되고 있던 ‘애완남 키우기 나는 펫’같은 동거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공중파 버전으로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뉘앙스의 차이다. 둘 다 같이 사는 것이지만 동거와 결혼은 그 뉘앙스가 다르다.  “나 결혼했어”하고 말하는 것과 “나 요즘 동거해”하고 말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우리 결혼했어요’는 동거 프로그램이 갖는 어두운 면들을 ‘결혼’이라는 용어로 포장함으로써 양지로 끄집어낸 혐의가 짙다. 여기에 일반인들이 갖는 남녀관계의 환타지를 결혼에 대한 환타지와 묶음으로써 자칫 자극적으로 흐를 수 있는 방향을 로맨틱 모드로 바꾸어주었다. 따라서 이 프로그램은 한 편의 로맨틱 코미디를 보는 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은데, 바로 이 부분이 스타들의 리얼리티쇼와 맞닥뜨리는 부분에서 폭발력을 갖게 되는 이유다. 하지만 동거생활을 결혼생활로 포장하면서 발생하는 결혼의 개념에 대한 혼란은 여전히 문제로 남는다. 이것이 그 열렬한 환타지에 대한 희구에 푹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보면서도 한편으로 남는 우려의 실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TRACKBACK :: http://thekian.net/trackback/558

드라마, 예능에 가득한 경합, 그것이 말해주는 것

‘식객’의 초반부 긴장감을 탄탄히 만들어주고 있는 것은 단연 운암정 후계자 자리를 놓고 벌이는 성찬(김래원)과 봉주(권오중)의 요리 경합이다. ‘스포트라이트’에서는 이미 앵커 자리를 놓고 한 차례 경합을 벌였던 서우진(손예진)과 채명은(조윤희)이 이제 심층리포트의 진행자 자리를 놓고 또 경합을 벌이고 있다. ‘대왕 세종’에서도 드라마 초반에는 충녕대군과 양녕대군이 국본의 자리를 놓고 치열한 정치적 경합을 벌이며 시청자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드라마 속의 경합, 공정하지 못한 사회

사용자 삽입 이미지
드라마들이 이렇듯 한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합을 벌이는 이야기를 활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드라마는 갈등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바로 이 대결구도를 가장 쉽게 가시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경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합의 양상들을 좀더 들여다보면 그렇게 간단하지도 않다. 거기에는 사회가 가진 서열 구조와 그것을 뛰어넘으려는 욕구들이 드라마 속에 환타지의 형태로 드러난다.

성찬과 봉주의 경합에서 봉주가 상처를 받는 것은 그가 적자의식을 갖고 있어서다. 그는 운암정 최고권위자인 오숙수(최불암)의 아들이니 당연히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서우진과 채명은의 경합에 있어서도 이 적자와 서자의식은 똑같이 드러난다. 선배인 채명은은 서열상 자신이 적자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대왕 세종’같은 사극 속에서의 장남이거나 적자인 이들은 당연히 자신에게 권력과 부가 승계될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드라마들은 대부분 이 적자들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는다. 지금 사회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적자나 서자의식이 통용되는 사회가 아니라 능력 위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당히 실력을 갖춘 이가 적자의식에만 가득한 인물을 무너뜨리고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경합뿐이다. 이것은 점점 능력 중심으로 변해가는 사회를 반영하는 것일까. 거꾸로 여전히 실력보다는 서열이나 관계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의 불합리함을 드라마에서나마 위안을 얻으려는 환타지일까.

그것은 아마도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능력 위주의 사회는 바람일 뿐, 우리 사회는 심지어 그 탄생에서부터 미래가 결정되는 경향이 있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이들이 고등교육을 받을 확률이 훨씬 높다는 것은 이제 상식에 속한다. 갖춘 자들의 적자의식은 시대가 흘렀지만 여전하다. 드라마 속에 이렇듯 빈번하게 경합이 활용되는 것은 그만큼 치열해진 경쟁사회이면서도, 그 경쟁 자체는 그다지 공정하지 않은 우리네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예능 속의 경합, 경쟁 사회에 대한 희화화
한편 경합에 빠진 건 드라마뿐만이 아니다. 예능 프로그램들은 거의 모든 것들이 바로 이 경합의 틀을 갖고 있다. ‘1박2일’의 잠자리나 식사 한 끼를 두고 벌이는 복불복 게임이 그렇고, ‘무한도전’의 끝없는 과제 속에서의 이기적인 출연진들의 대결이 그러하며, ‘해피투게더’의 사우나 안에서 벌어지는 도전 암기송이나, ‘패밀리가 떴다’의 유재석이 툭하면 제안하는 게임이 그렇다.

이 예능 프로그램들 속에서의 경합은 얼토당토않은 목표를 갖고 있다. 바로 이 얼토당토않다는 부분에서, 우리가 스포츠경기 같은 것을 통해 느끼게 되는 진지한 긴장감 같은 것은 사라진다. 만일 진지한 목표가 설정된다면 긴장감은 생기겠지만 웃음은 좀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복불복 게임은 말 그대로 게임일 뿐 현실 사회가 보여주는 진짜 경쟁과는 다르다. 경쟁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에 목숨을 걸고 경쟁을 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들 예능 프로그램들은 웃음을 유발한다. 이것은 경쟁 사회에 대한 희화화다.

직장생활 같은 경쟁적 삶 속에서 살다가 빠져나온 경험이 있는 분들이라면 때론 왜 그렇게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며 살았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예능 프로그램 속에서의 경합은 따라서 사회 풍자적인 요소가 있다. 그 얼토당토않은 경합을 보면서 웃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 이미 우스꽝스런 경쟁적 삶에 대한 긴장감이 풀어지게 된다.

드라마나 예능이 점점 이 경합이라는 코드를 보편적으로 활용하고, 거기서 충분한 효과를 얻어내는 것은 여러모로 지금 우리 사회가 가진 불공정한 구조와 그 속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의 피곤함과 관련이 있다. 드라마는 이 경쟁의 피곤함을 환타지의 형태로 해결하려는 것이며, 예능은 경쟁 자체를 비웃음으로써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그 무엇도 실제적인 해결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어떠랴. 그 경합의 재미 속에서 현실의 경쟁적 삶을 잊어버리는 것은. 잠시만이라도 말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TRACKBACK :: http://thekian.net/trackback/555

드라마, 퀴즈쇼, 시사, 정보까지 삼켜버린 버라이어티, 그 이유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식사 버라이어티를 주창하는 ‘해피선데이’의 ‘이 맛에 산다’에서 출연자들은 음식을 먹기 위해 퀴즈를 풀어야 한다. 캐스터, 해설자가 낸 퀴즈를 연속으로 5문제를 맞추거나 한 문제를 출연자 전원이 맞추면 퀴즈는 종료되고 눈앞에서 눈과 귀와 입을 자극하는 요리를 맛볼 수 있게 된다. 어찌 보면 단순해 보이지만 이 하나의 버라이어티쇼에는 꽤 많은 장르들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그것은 퀴즈쇼와 토크쇼, 정보 프로그램, 스포츠 쇼가 버라이어티쇼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여 있는 것이다.

버라이어티쇼 앞으로 모두 정렬!
결혼 버라이어티쇼, ‘우리 결혼했어요’는 더 복잡하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드라마가 있고, 토크쇼가 있으며, 음악이 있고, 연애 혹은 결혼생활에 대한 정보도 있다. 보는 눈에 따라서 이 프로그램은 로맨틱 코미디로 볼 수도 있고, 가수의 일상을 따라가는 새로운 형식의 리얼리티 음악 프로그램으로 볼 수도 있으며, 연애 심리에 대한 토크쇼로 볼 수도 있다. 여행 버라이어티를 내세운 ‘1박2일’ 역시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여섯 명의 유사가족을 형성한 남자들의 로드무비가 있고, 가수들의 리얼리티 라이브쇼가 있으며, 여행지에 대한 정보가 있다.

태클 버라이어티를 표방한 ‘명랑히어로’는 시사정보 프로그램과 토크쇼를 결합하면서 버라이어티의 외연을 넓혔다. 뉴스보도 프로그램의 딱딱하고 무거움을 가벼운 토크쇼로 끌어들여 엉뚱하지만 속시원한 그들만의 식견을 끄집어내게 한 것이 성공 포인트였다. 한편 최근 시작한 ‘패밀리가 떴다’는 ‘1박2일’이 가진 여행 요소에, 가족 드라마적인 요소, 그리고 ‘X맨’이 가졌던 연예인 게임쇼의 요소들이 융복합된 프로그램이다. 시골에 거주하는 어르신들에게 여행 기회를 제공하고 그 집을 지킨다는 점에서 일정부분 도네이션 프로그램 또한 결합된 형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버라이어티, 그 큰 그릇의 형식
이처럼 버라이어티쇼는 이제 TV가 가진 거의 대부분의 프로그램 형식들을 그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예능의 대세로 자리잡고 있다. 버라이어티쇼란 본래 그 이름처럼 다양한(variety) 형식들, 예를 들면 음악이나 토크쇼, 코미디가 결합된 장르로 어찌 보면 이 복잡한 형식들을 한군데 끌어 모아 지칭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용어다. 따라서 이렇게 다양한 버라이어티쇼가 등장하는 데는 그 그릇이 상당히 넓은 버라이어티 본연의 형식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과거의 버라이어티쇼가 그 그릇에 주로 음악을 담았다면(‘쇼쇼쇼’같은), 그 후에는 토크쇼와 콩트가 엮어진 형태로(‘일요일 일요일 밤에’ 같은) 바뀌었고, 최근에는 리얼리티쇼 형식과 엮어지면서 다양한 리얼 버라이어티쇼 전성시대를 구가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 데는 물론 최근의 탈장르화되고 융복합되는 프로그램 경향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리얼리티쇼가 가진 영향력이다. 버라이어티쇼가 과거 무대나 세트에서 진행되던 것을, 야외로 끌어낸 것은 바로 이 리얼리티쇼의 현장성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생활 속으로 들어온 카메라, 형식을 넘어서다
‘쇼쇼쇼’나 ‘일요일 일요일 밤에’가 무대 위에서의 짜여진 쇼를 보여주었다면, 최근의 버라이어티쇼는 짜여지지 않은 돌발적인 상황을 찾아 무대라는 공간을 벗어나게 되었다. 이렇게 카메라가 무대라는 가상공간이 아닌, 현실 속으로 들어오면서 음악프로그램이나 토크쇼, 코미디 같은 형식은 그 틀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어졌다. 무대 위의 쇼는 현실을 모사한 가상의 보여짐(Show)으로 어떤 익숙한 형식을 요구하지만, 현실 속으로 들어온 쇼는 생활 자체가 보여짐의 핵심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생활 속으로 들어온 카메라는 우리가 흔히 그러하듯이 때로는 음악 프로그램처럼 노래방에 가서 노래를 부르다가, 토크쇼처럼 친구들과 만나 수다를 떨기도 하고, 때론 드라마 같은 이벤트에 감동을 연출하기도 한다. 맛있는 음식을 찾아 즐거운 한 때를 보낼 수도 있고,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날 수도 있으며, 때론 의미 있는 일을 할 수도 있다. 최근의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모든 장르를 삼켜버리는 것은 카메라가 이제는 무대 위가 아니라 거의 모든 형식을 가능하게 하는 생활에 더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결혼이나 여행, 시사나 정보 같은 점점 더 생활 밀착형으로 되어 가는 것은 그 때문이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TRACKBACK :: http://thekian.net/trackback/552

수평적 대화의 시대, 토크쇼에서 살아남기

사용자 삽입 이미지
‘투나잇쇼’로 잘 알려진 자니 카슨이나, 그 계보를 이어받은 제이 레노, 그리고 역시 토크쇼의 귀재로 동명의 쇼를 진행하는 데이비드 레터맨 같은 이들은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1인 MC 체제를 꽤 오랜 세월 동안(‘투나잇쇼’는 거의 50년 가까운 전통이 있다) 유지해왔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때 1인 MC체제의 쇼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자니윤쇼’, ‘주병진쇼’, ‘이홍렬쇼’, ‘이주일쇼’, ‘서세원쇼’, ‘김형곤쇼’ 등등이 그것이다. 그 이름만 봐도 한 시대를 풍미한 개그맨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형태의 토크쇼는 이제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이제 대세는 집단 토크쇼다. 한 명의 MC가 아닌 여러 MC들이 나와 말들을 쏟아낸다.

인터넷 환경을 닮은 집단 토크쇼
이것은 정확히 쏟아낸다는 표현이 맞다. 과거의 1인 MC 체제의 토크쇼에는 기본적으로 질문-답변이라는 순서가 있었다. 하지만 집단 MC 체제에는 이러한 순서는 거의 무시된다. ‘명랑히어로’에서 김성주가 좀 진지하게 어떤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할 때, 김구라는 아예 그 이야기 자체를 끊어버리고 자신의 이야기로 방향을 돌린다. 그리고 김구라의 이야기 도중에도 신정환은 계속 엉뚱한 이야기로 맥을 끊으려 노력한다. 심지어 카메라가 신정환을 잡고 있는 와중에도 말들을 계속 튀어나온다. 그것은 자막의 형태로 마치 만화를 보는 것처럼 화면 속에 들어온다.

집단 토크쇼의 묘미는 비록 글자로서라도 화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고 싶을 정도로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말의 상찬에 있다. 아마도 과거의 토크쇼에 더 익숙한 분들이라면 이 정신산란한 말과 글자가 범람하는 화면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정보들의 홍수와 그 홍수 속에서의 순간적인 집중에 대한 훈련을 늘 디지털 사회 속에서 해오고 있는 요즘의 시청자들이라면 말이 다르다. 그것은 너무나 익숙한 풍경일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정보가 너무나 일목요연한 1인 체제의 토크쇼를 보며 그 단순함에 하품을 할 지도 모른다.

과거의 중앙 집중식 토크쇼 형식이 점점 사라지고, 중앙이 없이 서로 주장들이 난무하는 집단 토크쇼로의 변화는 작금의 인터넷 환경을 닮아있다. ‘라디오스타’에서 서로 자신이 메인 MC라고 주장하는 것은 고스란히 인터넷에서의 대화방식을 닮았다. 인터넷에서의 대화 방식이란 중앙이 없고 대신 무수한 중앙들이 서로의 주장을 하며 부딪치는 형태다. 이처럼 수직적인 대화구조가 수평적인 형태로 변모하면서, 어느 한 사람의 주도 하에 끌려가는 1인 MC체제의 토크쇼는 점점 과거의 유물이 되어가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집단 토크쇼, 달라지는 MC들
이렇게 대화방식이 달라지고 그 방식을 수용한 집단 토크쇼들이 등장하자 MC들도 달라졌다. 물론 집단 토크쇼에서도 메인 MC는 존재하지만 그 힘은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해피투게더’의 유재석은 메인 MC임이 분명하지만, 프로그램에서 너무 전면으로 나서지는 않는다. 적당한 선에서 그 날 출연한 게스트들의 웃음 포인트를 콕콕 집어내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이것은 유재석이 이 시대에 어떻게 예능 프로그램 MC 0순위의 자리에 올랐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것은 최근 주목받는 MC로서 강호동도 마찬가지다. 강호동의 스타일이 좀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유재석과는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그 역할은 그렇지 않다. 강호동은 좀 공격적인 방법으로 게스트들의 웃음 포인트를 끄집어 내주고 있을 뿐이다. 공격적인 질문만큼 답변에 대한 과장된 리액션을 아낌없이 보여주는 것은, 씨름을 했던 선수라면 당연할 ‘천부적인 균형감각’을 토크쇼에 있어서도 강호동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호동의 장점은 좀더 강한 토크의 세계 속에서도 유연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초창기 ‘무릎팍 도사’의 성공을 가능하게 한 원인이다.

집단 MC 체제는 그 형태가 기본적으로 이야기 배틀의 구조를 가져가기 때문에 그 상황 속에서 특유의 재능을 가진 MC들을 주목시킨다. 그 대표적인 MC가 신정환이다. 신정환은 특유의 순발력과 재치로 TV에 등장하자마자 토크쇼의 강자로 떠오른 인물이다. 물론 탁재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최근 탁재훈은 메인 MC의 이미지가 너무 강하게 생기면서 오히려 초창기의 이미지를 아쉽게 만들고 있다. 지금은 옆자리에 앉아서 툭툭 던지는 촌철살인의 말들이 가장 중심에 서서 하는 말보다 더 주목받게 되는 시대다.

옆자리 토크에 적응해야 살아남는다
바로 이 ‘옆자리 토크’가 우세한 시대가 낳은 스타가 김구라다. 그는 누군가 하는 말을 받아치는 방식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세울 수 있었다. 받아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강렬한 인상을 줘 독한 이미지로 비춰질 수 있지만 김구라는 그 부분을 솔직함과 공감으로 넘어선다. 실제로 가끔씩 던지는 사회에 대한 쓴 소리는 그것이 의미가 있든 없든 간에 보는 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만들어주는 구석이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오랫동안 메인 MC로서의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해온 이경규는 이렇게 달라진 환경 속에 스스로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명랑히어로’에 나온 이경규가 박미선에게 “너랑 같이 했어야 했다”고 말하는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박미선은 메인의 입장에서 한참 동안의 공백을 통해 변방으로 내려와 집단 토크쇼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가 제일 먼저 한 것은 ‘해피투게더’에서 후배 박명수를 웃기기 위해 굴욕을 거듭하며 한없이 낮아지는 것이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박미선은 편안한 아줌마의 이미지로 집단 토크쇼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새로 돌아온 김국진도 마찬가지다.

달라진 시대의 대화방식을 차용한 집단 토크쇼는 거기에 걸맞은 MC들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 변화는 바로 수직적 체계에서 수평적 체계로의 이행이다. 라인 문화가 공공연히 프로그램 속에서 회자되던 적이 있었다. 그것이 실제로 수직적인 체계인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지금은 라인 문화(일단 이 용어부터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보다는 팀 문화가 더 어울리는 시대다. 옆자리에 앉아 편안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이 변화된 토크쇼 환경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



Daum 블로거뉴스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TRACKBACK :: http://thekian.net/trackback/539

이 시대의 아버지들, ‘되고송’을 불러라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버지는 늘 한 자리 물러나 앉아 계셨다. 다들 모여 밥을 먹을 때도, 함께 놀러갈 때도, 심지어 저녁에 모처럼 모여 TV를 볼 때도 늘 한 자리 뒤쪽에 앉아 계셨다. 어찌 보면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예우처럼 보였다. 특별대우 말이다. 하지만 퇴직 전에도 그랬지만 퇴직 후에도 아버지는 특별대우를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저 가족 중 누가 말하면 빙긋이 웃으면서 뒤로 물러나실 뿐이었다. 왜 그랬을까. 혹시 자기 삶을 늘 뒷전에 두고 계셨던 아버지는 새삼스레 자기 삶을 살 시간이 주어진 것이 못내 어색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늘 뒷전에 있는 아버지에 익숙해진 가족들의 관성은 아니었을까.

이른바 아버지 수난 시대에 살아가는 지금의 아버지들은 가장이라는 이름 하에 자신의 삶을 저당 잡혀 살아왔다. 젊어서는 경제개발이라는 이름 하에 산업의 현장에서 밤낮 없이 일했고, 이제 그 결실을 얻어야 할 나이에 IMF를 맞았다. 평생 등골 휘게 살아온 대가로 돌아온 보상이라곤 구조조정으로 일찌감치 명퇴한 아버지가 앉을 뒷전뿐이었다. 어린 시절 권위의 상징처럼 보였던 아버지, 그 자리에 자신이 와 있건만 자꾸 뒤로 밀려나면서 가슴 한 편에 남는 공허함은 도대체 뭘까. 권위의 끝자락에서 보게 되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한없이 작게만 느껴지는 이유다.

엄마가 뿔날 때, 아버지는 왜?
주말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의 주인공은 제목처럼 엄마 김한자(김혜자)다. 제 맘대로 되는 자식 없다고 김한자는 자식 하나 하나가 미덥지 못하다. 참다 참다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되면 김한자는 결국 뿔을 낸다. 엄마의 뿔은 온 가족을 비상으로 몰고 간다. 가족들은 모두 엄마를 의식하면서 어떻게 하면 그 뿔을 가라앉힐까 고민한다.

그런데 바로 그 때, 아버지 나일석(백일섭)은 어떤가. 같은 부모 입장이 다를 리 없겠지만 나일석은 그 와중에도 아내 김한자의 심기를 살피기에 바쁘다. 그 뿐만이 아니다. 그 아내를 뿔나게 한 자식에게도 똑같이 마음을 쓴다. 마치 제3자의 입장인 것처럼 늘 어느 한 편만을 고집하지 않는 이 몸에 밴 습관은 어디서 온 것일까. 그것은 어쩌면 사회생활 속에서 위로 눈치보고 아래로 눈치보며 살아왔던 세월의 흔적은 아닐까.

이렇게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엄마인 김한자는 축복 받은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뿔나는 일이 있어도 늘 살뜰히 신경 써주는 남편이 있고, 권위라고는 눈곱만치도 발견할 수 없는 멋진 시아버지(이순재)가 있다. 게다가 시누이(강부자)는 거의 친구라고 해도 좋을 만큼 격이 없고 친근하다. 이 뿔난 엄마네 가족을 찬찬히 살펴보면 가장 쓸쓸한 자리에 서 있는 인물을 발견할 수 있다. 낮이면 세탁소 한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가 저녁이면 밥상머리에서 아내의 눈치를 보는 아버지가 바로 그 존재다.

엄마의 세상, 지워져버린 아버지들
요즘은 이른바 엄마의 세상이라고 한다. ‘엄마마케팅’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가정의 대소사는 물론이고 자잘한 선택의 순간에까지 엄마의 파워는 그만큼 강력해졌다. TV드라마는 바로 이런 변화를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인다. 최근 들어 우후죽순 등장하고 있는 아줌마드라마의 배경 역시 바로 이 변화에서 비롯된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엄마들은 서민적 삶이 주는 끈끈함을 체험하다가(엄마가 뿔났다), 바람난 남편에 대한 상쾌한 복수를 하고(조강지처클럽), 상류층의 삶을 대리경험(행복합니다)하기도 한다. 심지어 사회적으로 안정된 직장에 잘 생긴 젊은 남자들의 사랑을 받는 아줌마 신데렐라(천하일색 박정금, 내 생애 마지막 스캔들)가 되기도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하지만 그 뒤안길에서 아버지의 존재는 사라지거나 왜소해지고 있다. ‘천하일색 박정금’의 박정금이나 ‘온에어’의 서영은(송윤아)은 남편이 존재하지 않는 싱글맘이고, ‘행복합니다’에서의 남자들은 여자에게서 선택받는 신데렐라거나(이준수, 이훈역), 아이까지 갖게 하고는 도망친 남자거나(박상욱, 이종원역), 그 버려진 아이까지 떠맡아 기르려는 남자이거나(이용재, 김철기역), 죽은 아내를 평생 그리워하며 사진에 대고 대화를 나누는 남자(이철곤, 이계인역)들이다.

아버지들이여 ‘되고송’을 불러라
“부장 싫으면 피하면 되고, 못 참겠으면 그만 두면 되고, 견디다보면 또 월급날 되고 생각대로 하면 되고.”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모 통신사의 ‘되고송’. 특유의 긍정어법으로 수많은 패러디를 낳으며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 노래 가사의 구조는 간단하면서도 강력하다. 그것은 ‘○면 ☆되고’가 반복되는데 여기서 ‘○면’의 ○은 부정적 상황을 말하고, ‘☆되고’의 ☆는 그 부정적 상황에 대한 ‘긍정적 생각’을 말한다. 그러니 가사가 계속 반복되면서 안 좋은 상황들은 하나하나 긍정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 쐐기를 찍듯이 후렴구처럼 ‘생각대로 하면 되고’로 끝나면서 ‘모든 건 생각에 달렸다’고 되짚는다.

이것은 어쩌면 지금 아버지들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한 가지 방법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아버지는 이제 이 달라진 세상을 긍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긍정 속에 자신도 포함시켜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스스로 자책하면서 뒷전을 찾아 서는 아버지들의 진짜 자리를 찾는 길이다. 그리고 그 자리는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란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니 이제 잊고 있던 꿈이라도 들춰내 자신을 위한 투자를 아끼지 말자. “회사 잘리면 내 생활하면 되고, 누가 뭐라면 그저 웃어주면 되고, 삶이 힘들면 잠시 쉬면 되고, 못 참겠으면 뿔 내면 되고,” 그렇게 되고송을 부르자. 뿔이라도 내보자.
(이 글은 한국원자력연구원 (http://www.kaeri.re.kr/) 사보에 게재된 글입니다)


Daum 블로거뉴스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TRACKBACK :: http://thekian.net/trackback/536

시청자의 눈이 되려는 카메라의 눈

사용자 삽입 이미지
MBC 드라마 ‘스포트라이트’의 한 장면. 서우진(손예진) 기자는 일본인 관광객으로 위장한 채, 그들을 대상으로 짝퉁 명품을 팔아온 일당들을 잠입취재 한다. 이것은 ‘스포트라이트’의 ‘탐사저널’이라는 코너로 뉴스 심층 취재의 한 방식인 ‘탐사보도’의 전형을 보여준다. 탐사보도란 사실보도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사건 그 이면을 파헤치는 적극적인 언론보도방식을 말한다. 탐사보도가 주창하는 것은 사실은 진실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명제다. 그 진실을 캐기 위해 기자들은 현장으로 직접 다가가며 그 과정을 잡아내는 것은 다름 아닌 몰래카메라다.

대중들의 눈이 된 TV
우리에게 이러한 탐사보도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추적60분’이나 ‘PD수첩’, ‘그것이 알고싶다’같은 코너들은 늘 사실로 포장된 것들을 파헤쳐 카메라에 담음으로써 사회적 이슈로 끄집어올리는 역할을 해왔다. 정치인의 문제나, 권력 비리 같은 거대담론들이 탐사보도의 도마 위에 올려져 부끄러운 속살을 보인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이 탐사보도는 이러한 거대담론에 주로 붙박여 있던 시선을 생활 저변으로 넓히고 있다.

‘PD수첩’의 미국산 쇠고기 안전성 관련 보도와 그 파장으로 알 수 있듯이 이제 정치적, 사회적 사안은 국회에서 벌어지는 ‘저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바로 우리 생활이 되었다. 카메라가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는 소비자들의 눈이 되어준다거나(‘이영돈 PD의 소비자고발’이나 ‘불만제로’), 인권에 있어서 사회적 폭력에 집중됐던 카메라가 가족 내 폭력에 눈을 돌리는(‘긴급출동 SOS’) 것은 이제 카메라의 시선이 좀더 생활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들이다.

이 거대담론에서부터 생활까지 전방위에 걸친 ‘고발하는 TV’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것은 그만큼 신뢰성이 사라진 사회를 말해주는 동시에, 그만큼 대중들의 눈을 장악한 TV의 힘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심심찮게 이러한 ‘고발하는 TV’의 영상 속에서 사건에 연루된 관할 공무원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 영상이 보여주는 것은 이제 법망보다 카메라의 신뢰성이 더 높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치인, 심지어는 대통령의 말보다 TV가 해주는 말을 더 신뢰한다. 이렇게 된 데는 불신의 사회와 그것을 파헤쳐 고발하면서 대중의 지지를 얻어온 TV의 유리한 입지가 만나서 생긴 결과이다. 이 때 그 영상을 잡아낸 몰래카메라는 대중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여주는 눈이 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대중들의 욕망이 투영된 눈
하지만 이 TV의 공공성을 대변하는 듯한 탐사보도 형식의 ‘고발하는 TV’가 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면을 들추어낸다’는 이 말은 진실을 찾는다는 지적 호기심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또한 감추어진 것, 혹은 금기된 어떤 것을 보고 싶은 욕망이 자리한다. 이것은 영상과 만나면서 더 폭발력을 갖는다. 종종 탐사보도에 대해 지나치게 자극적인 영상에 대한 논란이 불거지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최근처럼 이제 카메라가 거대담론이 아닌 생활을 비추게 되었을 때, 영상에 노출되는 사생활이 문제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들 영상들이 자극으로만 흐르지 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프로그램의 공익성이다. 공익성이 없이 ‘고발하는 TV’의 형식만을 취해 자극적인 엿보기 영상을 끄집어낸 대표적인 것이 케이블TV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페이크 다큐나 유사 다큐 프로그램들이다. 여기서 탐사보도의 시선을 따르는 카메라는 마치 시사고발 프로그램의 형식 속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실제로 그런 스튜디오를 활용한다) 사실은 엿보기라는 드라마의 자극적인 코드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차용된 것뿐이다.

이것은 시사연예 프로그램이라는 슬로건을 달고 있는 ‘리얼스토리 묘’같은 프로그램이 고수하고 있는 카메라의 시선과 동일하다. 이러한 프로그램들 속에서 카메라는 사실 이면의 진실을 파헤친다기보다는, 시청자들이 보기를 원하는 은밀한 욕구의 대리자가 된다. 카메라를 두고만 봤을 때, 몰래카메라는 진실을 포착해내기 위한 훌륭한 장치가 되기도 하지만, 타인의 사생활과 은밀한 볼거리를 잡아내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몰래카메라의 두 얼굴이자 ‘고발하는 TV’의 두 얼굴이다.

TV 전반에서 보이는 고발의 흔적들
몰래카메라로 대변되는 ‘고발하는 TV’의 영향은 탐사보도 프로그램만이 아닌 TV 전반에 걸쳐져 있다. 이것은 TV라는 영상매체가 프로그램을 막론하고 새로운 카메라의 등장이나 그 기법들에 거의 모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이경규의 몰래카메라’의 등장 이후부터 차츰 연예인들의 사생활이 TV에 노출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한 ‘야심만만’이나 ‘상상플러스’ 같은 연예인 사생활을 끄집어내는 토크쇼 형식이 우후죽순 쏟아져 나오고, 리얼리티쇼가 봇물이 터진 것도 마찬가지다.

취재형식으로 초청된 게스트를 궁지에 몰아넣는 ‘무릎팍 도사’가 가능했던 것은, 연예계에 대한 사실이 아닌 진실을 알고 싶은 대중의 욕구들이 이른바 ‘고발하는 예능’과 맞아떨어진 결과다. 이런 면에서 최근 주목받고 있는 ‘명랑히어로’는 ‘고발하는 예능’이 연예인 사생활 폭로 위주에서 시사문제 같은 공익적인 포장을 요구하기 시작했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다. 여기서도 TV의 힘을 느낄 수가 있는데, 미국산 쇠고기 문제에 대해서 ‘100분 토론’이 100분 이상의 시간을 써가며 토론했던 이야기만큼, ‘명랑히어로’에서 실현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시원스럽게 쏟아낸 말에 대한 반향도 상당했다는 점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근에는 드라마마저 이런 기법들을 활용하고 있다. 종영한 ‘온에어’는 드라마 제작 과정에 벌어지는 연예계의 뒷얘기들을 폭로하면서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전략을 썼다. ‘온에어’ 자체는 환타지에 가까운 이야기를 갖고 있을 뿐이지만, 바로 이 ‘드라마가 드라마를 고발한다’는 이 부분에서 리얼리티라는 착시현상을 만들어낸다. 이것은 현재 방영중인 ‘스포트라이트’에서도 마찬가지다. ‘스포트라이트’가 고발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탐사보도를 하는 방송기자들 자체다. 진실을 파헤치지만 그 진실은 정치적인 판단(드라마 상에서는 회장의 호화저택에 대한 진실과 방송기자의 성추행 문제를 서로 무마하기 위해 보도를 하지 않는다)에 의해 저지 당한다는 걸 드라마는 보여준다.

TV는 태생적으로 ‘보여준다’는 기능을 하고 있기에 몰래카메라로 대변되는 양면성, 즉 감춰진 진실을 드러내 보여주거나 혹은 감춰진 시각적 욕망을 들추어내는 두 가지를 모두 갖고 있다. 이것이 점점 더 TV가 대중의 눈이 되고 있는 요즘 같은 시대일수록 시청자의 예리한 눈과 냉철한 판단이 요구되는 이유다. 카메라의 전략은 점점 현란해질 것이고 그만큼 영상이 전하는 정보에 대한 해독은 어려워질 것이다. 그럴수록 우리의 눈은 더 밝아져야 한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TRACKBACK :: http://thekian.net/trackback/533

지나친 시청률 경쟁, 컨텐츠 질 떨어뜨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주말이 되면 어김없이 리얼 버라이어티쇼에 대한 비교 기사들이 여기저기 뉴스로 올라온다. 그 대표주자는 ‘무한도전’과 ‘1박2일’. ‘무한도전’에 대한 기사가 뜨면 마치 반박이라도 하듯이 댓글이 달리기 일쑤인데, 눈여겨볼 점은 그 댓글 중에는 ‘1박2일’을 언급하는 대목들도 보인다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만큼 이 두 프로그램에 대한 관심이 크다는 반증이지만 지나친 경쟁구도를 볼 때 꼭 그래야만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무한도전’과 ‘1박2일’, 시청률 비교는 넌센스
‘무한도전’과 ‘1박2일’은 서로 다른 시간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먼저 단순 비교 대상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시청률 비교는 넌센스다. 물론 리얼 버라이어티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어떻게 소재와 포맷, 그리고 캐릭터 구성이 다르게 연출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비교할 수는 있다. 하지만 ‘무한도전’을 좋아한다고 ‘1박2일’을 비난하거나, 또는 그 반대의 입장을 보이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왜 하루는 ‘무한도전’을 즐기고 다음날에는 ‘1박2일’을 즐기면 안 되는 것일까.

이것은 물론 지나친 시청률 경쟁의 결과다. ‘무한도전’과 ‘1박2일’이 경쟁구도를 갖는 것은 ‘무한도전’이 가진 ‘예능의 지존’이라는 별칭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하지만 예능 프로그램 전체에서 시청률이 가장 높다는 것은 사실상 별 의미가 없다. 시청률 비교라는 것은 동시간대에 경쟁하는 비슷한 프로그램들 사이에서만이 의미가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9시대에 하는 뉴스 프로그램이나, 10시대에 하는 방송3사의 드라마, 혹은 일일드라마의 시청률 같은 것이 비교대상으로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갑자기 끼여든 프로그램(예를 들면 국가대항 축구경기 같은)으로 타방송사가 영향을 받는 것처럼 시청률이란 상대 평가된 수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대도 다른 이러한 프로그램의 단순비교는 현재 방송사간의 치열해진 시청률 경쟁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라인업’의 하차가 말해주는 것
그렇다면 이러한 시청률 경쟁이 가져오는 결과는 무엇일까. 일견 경쟁이란 좋은 컨텐츠의 전제조건처럼 여겨지곤 하지만, 실제는 이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경쟁구도 속에서 프로그램들은 저마다의 독자성을 가지고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된다 싶은 형식이나 소재에 쏠리는 경향이 있다. ‘무한도전’의 독주에 도전장을 내밀고 같은 시간대에 비슷한 형식으로 등장한 ‘라인업’의 하차는 많은 걸 말해준다.

시청률 경쟁의 측면에서 보면 ‘무한도전’과 정면으로 부딪친 것은 ‘1박2일’이 아니고 ‘라인업’이다. ‘1박2일’은 승승장구하고 ‘라인업’은 하차한 이유는 그 다른 방영시간대와 창조적 재해석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즉 ‘1박2일’은 ‘무한도전’과는 방영시간대도 달랐고, 형식에 있어서도 여행이라는 소재를 끌어들여 창조적으로 재해석해낸 데 반해, ‘라인업’은 그러한 전략들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라인업’의 하차는 지나친 경쟁구도 속에서 차별화 전략을 쓰지 않고 미투 전략을 쓴 결과가 가져온 시행착오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들 프로그램 사이에서 유난히 베끼기 논란이 많은 것도, 바로 이 시청률 경쟁으로 인해 생겨난 비슷비슷한 형식을 구사하는 프로그램들이 많기 때문에 일어나는 결과다. 즉 비슷한 형식 속에서 그 형식이 요구하는 소재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겹칠 수밖에 없게 된다. 국내의 프로그램이 해외의 프로그램을 표절했다는 논란이 자주 등장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때론 시청률 경쟁의 압박감에 몰려 실제로 표절을 감행하게 되기도 한다.

‘무한도전’과 ‘1박2일’, 경쟁대상 아니다
이러한 쏠림 현상은 단지 예능 프로그램만 그런 것이 아니다. 드라마에서 비슷한 소재들이 된다 싶으면 거의 동시에 쏟아져 나오는 것은 시청률 경쟁이 낳은 또 다른 폐해다. 주말드라마들이 온통 아줌마 시청자들을 타깃으로 한 가족드라마이면서 신데렐라 이야기로 가득하며, 한 때는 고구려 사극으로, 다음에는 퓨전사극으로 몰렸다가, 최근에는 방송을 소재로 한 전문직 드라마에 쏠리는 현상도 단순한 우연의 결과가 아니다.

따라서 이제는 ‘되는 것만 된다’는 식의 시청률 공식이 생겨나고 있다. 예능은 어떤 식으로든 리얼리티쇼를 가미해야만 하며, 드라마는 사극이나 전문직, 혹은 가족드라마가 아니면 살아남기 어렵다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여타의 시도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되며, 프로그램들은 소재나 형식면에서 획일화되고, 결국 시청자들은 그만큼 다양한 볼 권리를 누리지 못하게 된다.

‘무한도전’과 ‘1박2일’은 서로 경쟁하는 대상이 아니다. ‘무한도전’은 최고는 아니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재미와 감동을 주며, ‘1박2일’은 답답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시청자라면 누구나 마음이 설레기 마련인 여행이라는 단어에 끌린다. 각자의 영역에서 서로 다른 재미를 선사하는 이 두 프로그램이 서로를 의식하지 않고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내길 기대한다. 다행스럽게도 토요일 일요일로 나뉘어 편성되어 있는 이 두 프로그램으로 인해 주말이 내내 즐겁지 않은가.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TRACKBACK :: http://thekian.net/trackback/528

누가 연예인과 대중을 싸잡아 비하하나

광우병이 의심되는 미국 쇠고기 수입에 대해 연예인들이 자신의 의견을 블로그나 카페에 올린 것을 가지고 언론들은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다. 이유는 연예인들의 이성적이지 않은 감정적인 대응이 대중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몇몇 언론들은 이 연예인들이 대부분 최근 활동이 뜸하다는 점을 들면서, 연예인들의 이런 대응을 마케팅의 일환으로까지 몰고 가는 형세다.

물론 어느 정도 그런 면은 없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간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던 연예인이라면 이러한 민감한 사안에 대해 거침없는 의견을 내보이는 것으로 시선을 끌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꼭 그런 식으로만 보아야 할까. 달라진 미디어 환경 속에서 연예인들이 자신의 삶과 관련된 이 사안에 대해 솔직한 이야기를 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중요한 것은 이 자체가 설혹 마케팅의 요소가 끼여들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결국은 대중과의 공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연예인의 발언은 그것이 인기발언이든 아니면 진심이든 모두 대중의 정서를 따라서 한 것이다. 즉 언론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영향력 있는 몇몇 연예인(이들의 논리로 보면 활동도 뜸했기에 영향력도 별로 없다)의 힘으로 대중 정서가 움직인 것이 아니라, 대중정서와 함께 연예인이 동참한 것뿐이라는 점이다.

오히려 이들 연예인들의 발언에 대한 몇몇 언론들의 불쾌한 심사는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 이들 언론들은 ‘연예인-블로그-인터넷’을 어떤 비슷한 수준으로 몰아대는 경향이 있다. 즉 ‘가볍고 천박한 그 무엇’으로 치부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폭발적으로 확산되는 인터넷의 영향력을 보는 눈에는 스타로서의 연예인을 보는 눈과 비슷한 지점이 있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낮게 보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기득권을 가진 기관이나 언론들이 대중을 보는 눈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권위와 신뢰’를 운운하면서 언론이나 정부기관들은 아직도 자칭 어른으로서 아이 같은 이 가벼운 존재들에게 회초리를 꺼내들기 일쑤다. 맞다. 이들은 참 아이 같다. 그래서 어른들처럼 이성적으로 판단하기보다는 감정적으로 나오기 일쑤며, 품위 있고 정제된 논리 정연한 글보다는 과격하게만 보이는 비문 가득한 글들을 쏟아낸다. 함부로 글들을 긁어다가 여기 저기 도배를 해놓는 건 일상이고, 그걸 가지고 대단히 창조적인 방법으로 괴담에 가까운 확대재생산을 해내기도 한다. 기득권을 가진 자가 스스로를 어른이라 자처하며 그 눈으로 삐딱하게 보면 대중들은 통제하기 어려운 불량아가 된다.

그러니 어른이라 자처한 자들은 이 아이 같은 대중들을 이해시키고 설득시켜야할 의무가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강제만을 통한 독단의 길이 될 수밖에 없다. 미국 소고기 수입에 대한 갑작스런 결정은 아무런 설득도, 사전 이해도 구하지 않은 채, 마치 불도저식으로 저지르고 보는 개발시대의 그것을 닮아있다. ‘정했으니 따라 오라’는 것이 그 때의 논리였다. 그 때 연예인들은 어떤 역할을 했던가. 불행히도 그 때의 역할이란 오락과 재미로 대중들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그 때와 비교하면 지금 연예인들의 행동은 굉장한 진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그 시대를 경험했고 아직도 그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착각하는 기득권층들에게 연예인들의 정치적 성격을 띨 수도 있는 이러한 발언이 얼마나 위험하게 비춰질지 알 수 있는 일이다. 아직도 그들에게 정치란 생활이 아닌 국회에서 하는 일이고, 몇몇 엘리트들에 의해 결정되고 대중들은 따라오는 것이라 믿고 있는 건 아닐까. 마치 ‘연예인은 연예나 하라’는 말처럼 들리는 일부 언론들의 반응은 또한 ‘대중들은 1%의 기득권 엘리트들이 한 결정을 따르라’는 뉘앙스로도 읽힌다. 연예인도 TV가 아닌 자기 삶의 문제로 돌아오면 언제나 대중의 한 사람이다.


Daum 블로거뉴스
블로거뉴스에서 이 포스트를 추천해주세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센스
Creative Commons License
이올린에 북마크하기(0) 이올린에 추천하기(0)

TRACKBACK :: http://thekian.net/trackback/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