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가수와 얼굴만 있는 가수

1997년 12월 저녁. 논현동의 한 스튜디오. 스텝들은 모두 녹음실 안쪽에서 열창하고 있는 한 가수에 집중되어 있었다. 반쯤은 넋이 빠진 듯한 그들은 가수의 노래가 끝나자 마치 멈춰졌던 시간이 다시 흐른 것처럼 멋쩍어했다. 전문가들이라는 사람들이 그 정도였으니 아마추어였던 내가 오죽했을까. 온몸에 감전을 당한 듯 소름이 돋은 나는 사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건 무조건 됩니다!” 이것이 내가 우연찮게 ‘사이버 가수 아담’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던 계기가 되었다. 그렇게 사이버 가수 아담은 탄생했다.

사이버 가수 아담의 멀티 플레이어 전략
사이버 가수 아담은 예상대로 잘 나갔다. 일본에 사이버 가수 1호 교코 다테가 있었지만 그것 역시 한일전 대결양상을 이루면서 오히려 아담에게 득이 되었다. 아담의 노래는 라디오를 타고 전국에 메아리쳤다. ‘세상엔 없는 사랑’은 가요톱텐에 올라갔고, 음반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당시 아담의 캐릭터와 스토리 제작 및 홍보를 전담했던 나로서는, 홍보마케팅에 있어서도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방송 3사의 연예프로그램은 물론이고 드라마(베스트 극장 등), 뉴스에서는 연일 아담을 소개했다. CF가 들어왔고 라디오 인터뷰는 물론이며 잡지 인터뷰가 쇄도했다. 아담은 가수이자, 연기자이자, 게임 캐릭터이자, CF 및 캐릭터 비즈니스의 모델이었다. 아담은 만들어진 존재였기 때문에 멀티 플레이(One source multi use)에 강했다. 그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이론적으로는 말이다.
하지만 이론이 현실의 장벽에 부딪힌 것은 아담의 입을 몇 번 놀리기 위해서는 무려 몇 일이나 걸리는 CG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만큼의 비용도 들어갔다. 방송출연 제의가 봇물을 이뤘지만 아담은 점점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아담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갔다.

아담의 얼굴 없는 가수는 어떻게 됐을까
그는 잘 생긴 외모를 가진 얼굴만 있는 가수였다. 하지만 여전히 표정과 동작은 부자연스러웠다. 어설픈 아담의 동작에도 불구하고 그의 인기를 든든히 받쳐준 것은 얼굴 없는 가수의 노래였다. 호소력 짙은 가사에, 뛰어난 가창력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녹음실에서 처음 가졌던 그 전율은 이제 라디오를 타고 전국의 청취자들의 마음을 흔들었다. “도대체 가수가 누구냐”는 추측이 난무했고, 한 유명한 음악평론가는 “신승훈에 버금가는 가창력”이라고 아담의 얼굴 없는 가수를 추켜세웠다. 이제야 밝힐 수 있지만 아담의 목소리를 대신했던 친구는, 박성철이라는 이름의 학생이었다.

아담의 성공이 박성철에게도 성공적이었을까.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후에 그는 가요계에 데뷔하겠다고 했지만 아담의 매니저(당시 아담은 전담 매니저도 있었다)는 단칼에 그의 의욕을 꺾었다. 네가 나오면 너도 죽고 아담도 죽는다는 것이었다. 딱히 둘러댈 것이 없어서였는지 그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얼굴 때문이라고 했다(사실 내가 보기에 그는 아주 괜찮은 미소년의 얼굴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박성철은 얼굴 없는 가수로 살아야 했다.

반면 얼굴만 있는 가수, 아담의 목적은 음악이 아닌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다. 어느 정도 돈을 번 회사는 더 이상 투자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것은 경제법칙, 투자대비 수익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아담의 프로젝트가 해체되면서 박성철과 만나 마지막으로 소주를 나누던 날, 그가 해준 이야기를 잊을 수 없다. “아예 노래를 못하는 가수들도 많아요. 몇 번 코러스로 불러준 적이 있는데 나중에 녹음돼서 나온 걸 들어보니까, 그 가수 목소리는 없더라구요.” 그것이 현실이었다.

기획된 가수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에 음반 기획사들은 시장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그것도 몇 백만 장씩 소비되는)을 보았다. 가창력이나, 좋은 노래를 가진 가수들이 중심이 되어 흘러가던 가요계에 기획사들의 바람이 일었다. 기획사들은 모든 것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시장을 분석하고 거기에 맞는 상품을 고르듯, 가수를 골라내고(어떨 때는 조합을 하기도 한다), 노래를 붙이고, 댄스를 붙여서 음반을 찍어냈다.

사이버 가수 아담이 나왔던 시점은 바로 음반 기획사들이 태동하던 그 시기로 가수로는 HOT가 활동하던 시기였다. 기획사들은 그만큼 리스크를 줄이고 판매유인을 더 많이 끌어냄으로써 승승장구했다. 이미 소비자들은 영상세대로 불리는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가수의 노래도 중요했지만 거기에 곁들여진 댄스와 무엇보다도 잘 생긴 외모가 더 중요했다. 그러자 기획사들은 얼굴과 춤을 먼저 보았다. 노래는 점점 그 다음 문제가 되었다. 노래는 몇 달간의 합숙과 연습, 그것도 안되면 녹음 과정에서 코러스로 부족한 부분을 채우면 됐다.

가수로서의 어떤 포부라든가, 꿈이 있다기보다는 성공하기 위해서 어떤 것이든 감수한다는 이 얼굴만 있는 가수들 뒤에는 역시 얼굴 없는 가수들이 있었다. 그게 많아지자 얼굴 없는 가수도 기획사에서 끌어안고 하나의 전략처럼 사용되었다. 이른바 신비주의 전략이었다. 진짜 얼굴 없는 가수들은 이제 조용히 스포트라이트 밖에서 자신의 음악세계만을 묵묵히 해나가야 했다. 아티스트들은 더러운 세상 뒤로하고 청산으로 들었고(사실은 등 떠밀린 것 같지만), 경박한 얼굴과 몸짓들만 세상을 가득 메웠다. 요는 돈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과연 돈이 되었을까
물론 기획사들은 돈을 챙겼을지 모른다. 또 그 한 때를 함께 풍미했던 가수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국내에 잘 나간다는 연예기획사들을 차린 이들은 대부분이 가수 출신이라는 것이다. 음악성으로 당당히 ‘넘버1이 되었던’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연예경험을 살려 ‘넘버1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들도 가수이니 가수들이 돈을 벌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은 가수로서 벌어들인 수익이 아니다. 그 수익은 연예기획사의 사장으로서 벌어들인 것이다. 가수들은? 끊임없이 시류에 맞게 재생산되었다. 아마도 그들 본인이 실감했을 것이다. 돈을 버는 것과 음악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 생각하게된 일이지만 기획사에서 기획되어진 많은 가수들은, 사이버 가수와 다를 게 별로 없었다. 합성하지 않아도 성형을 통해 얼굴은 완벽해졌다. 노래는? 여기저기 시류에 맞게 다른 곡에서 샘플링된 상품으로 짜진 노래들을 죽어라 연습해 소화해내면 되는 것이었다. 춤은? 완벽하게 짜진 안무대로 움직이면 됐다. 춤추며 노래하기? 립싱크가 있으니까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노래 못하는 가수는 용서해도, 얼굴 못생긴 가수는 용서가 되지 않았다.

당연히 양적인 팽창이 일어났다. 너도나도 가수 명함을 내밀었다. 기획사는 더 많은 재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재료들이 많으니 다양한 조합이 가능하고, 전보다 더 좋은 상품들을 시장에 내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포화된 시장은 스스로 제 무덤을 파고 있었다. 많다보니 특별한 상품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졌고, 좋은 상품을 가려내기도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업친 데 덥친 격으로 디지털 시대가 가져온 MP3 열풍은 음반 판매고에 치명타를 먹였다.

얼굴만 있는 가수들
음반판매는 되지 않았다. 가수는 음반이 팔리지 않으면 다른 노래를 부르던가, 아니면 자신의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면 된다. 그러나 기획사들은 다르다. 회사는 당연히 이윤추구가 제 1의 목표이다. 그들은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했고, 적어도 본전을 챙겨야 했다. 가수들은 쇼프로가 아닌 각종 예능 프로그램을 장식했다. 토요일, 일요일 저녁만 되면 수많은 이름 모를 가수들이 시청자들을 웃기려고 갖은 노력을 다한다. 그리고 중간 중간 장기자랑 하듯이 노래와 춤을 홍보한다. 가끔씩 보는 사람들은 그들이 가수인지, 개그맨인지, 탤런트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런 지경이니 노래는 더더욱 잘 떠오르지 않는다.

이렇게 얼굴만 있는 가수들이 TV를 채우는 것이 요즘의 일이다. 기획사들은 멀티 플레이어 전략을 제대로 썼다. 음반 판매가 어려운 가수들은 일찌감치 각종 프로그램과 드라마 속으로 투입되었다. 음반 기획사로 출발했던 엔터테인먼트 회사들이 이제 드라마나 영화 제작에 관심을 두고 있는 이유는 그 자체로도 돈이 되지만, 자신들이 양산한 가수들을 한류의 흐름에 계속 태우기 위함이다. 그들은 드라마가 가진 한류의 힘을 톡톡히 느낄 수 있었다. 드라마에 삽입된 곡들은 한류를 타고 잘 팔려나갔다.

그 한류의 언저리에서 박성철씨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이름이 아닌 ‘제로’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담에서 제로라니 그의 가수생활이 그다지 쉽지 않았다는 것을 이름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재야에 있던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최지우, 이병헌, 류시원이 출연한 드라마 <아름다운 날들>에서였다. 이 드라마는 일본에서 붐을 일으켰고, 이것이 박성철씨가 제로라는 이름으로 일본에서 활동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얼굴 없는 가수가 얼굴을 드러낸 곳은 그가 노래했던 이 땅이 아닌 이국땅이라는 점에서 그는 여전히 국내에서는 얼굴 없는 가수였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최근 들어 립싱크니 표절이니, 퍼포먼스니 하는 단어들이 부쩍 많이 늘었다. 여기에 우리네 음악계의 거장이라는 전영혁, 신중현씨의 쓴 소리가 떨어졌다. 전영혁씨는 “가수는 노래하고, 댄서는 춤추고, DJ는 음반을 틀면 된다”고 했고, 신중현씨는 “무대에 노래하러 나온 거냐 뛰어다니러 나온거냐”고 했다. 이걸 성철 스님식으로 표현하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가수는 가수고 댄서는 댄서고 DJ는 DJ다.

얼굴 없는 가수와 얼굴만 있는 가수는 어찌 보면 지금의 가요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병적인 현상이다. 기획상품으로 만들어진 가수는 한 때 반짝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금세 잊혀진다. 기획이란 시류에 따라 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들 빨리 모이고 빨리 은퇴하는 가보다. 그들은 사이버 가수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계속해서 양산되는 이 사이버 가수들은 노래는 뒷전이면서도, 가수는 노래만 잘 해서는 안 된다는 부담스런 이미지를 만들어놓았다. 여기서 한 발만 더 나가면 가수는 더 이상 가수가 아닌 탤런트가 된다. 탤런트가 낸 음반이 잘 팔리라는 기대는 아예 버리는 게 좋을 것이다. 기획상품이 아닌 신중현, 조용필, 서태지 등의 계보를 잇는 가요계의 진정한 아티스트들이 나오길 바란다. 그들의 열정이 음반을 사는 이들의 마음 한 켠을 온전히 설레임으로 채우길 바란다. 얼굴 없는 가수, 제로 아니 박성철씨를 비롯해 많은 재야에 묻혀있는 진정한 실력자들이 가요계에서 활동하는 날들을 기대해본다.

<개그콘서트>의 일본진출, 그 의미  

<개그콘서트>의 일본공개공연을 앞두고 박준형은 “개그의 한류를 위해 일본 열도에서 무를 갈겠다”고 했다. 드라마와 가수에 이어 개그에서도 한류바람을 일으키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일본의 개그맨들이 우리네 프로에도 등장하고 있어 관심을 끈다. KBS의 <개그사냥>에 일본 니혼TV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활약하고 있는 개그지망생, 묘짱이 등장한 것이다. 그는 니혼TV에서 방영 중인 <아시아 개그를 정복하라>는 프로그램 출연자로, 일본이 아닌 해외 개그프로그램에서 데뷔하라는 프로그램의 미션을 수행 중에 있다. 이것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본격적으로 시작된 개그의 한일전인가. 혹은 우리네 개그가 가진 한계를 넘기 위한 자구책인가.

우리는 일본에 민감하다. 한일전은 그 종목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무조건 이겨야 된다. 월드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맞닥뜨린 일본을 일본 본토에서, 그리고 야구의 본고장 미국에서 연달아 이기는 것만으로, 그동안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던 WBC의 주가는 급상승했다. 경기는 한일전을 기점으로 국가전의 양상을 띠면서 전례 없는 야구거리응원까지 펼쳐졌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4강 위업을 달성했고, 우승은 우리가 두 번이나 꺾은 일본에 돌아갔으니 그들도 체면은 차린 셈이었다. 그럼 갖은 수모를 다 겪은 미국은 뭘 챙겨갔을까. 그들은 돈을 챙겨갔다. 비용 4500만∼5000만 달러, 순익은 1000만∼1500만 달러. 게다가 이 대회를 통해 당초 목표로 했던 메이저리그의 세계화도 이루어졌다고 하니 이건 주최측이 한일전을 조장한 건 아닌가하는 기분까지 든다. 한일전은 돈이 된다.

그렇다면 개그의 한일전은 벌어질 것인가. <개그콘서트>가 등장하면서 국내의 정통 개그 프로그램은(쇼 프로그램이 아닌) 모두 같은 색깔의 옷을 입게됐다. 공개방송. 스탠딩 개그, 무한정 투입되는 아이디어, 새로운 얼굴과 끝없는 물갈이... 그러나 끝없는 아이디어 산출이 가져온 것은 시청률 상승과 함께, 개그맨의 단명이다. <개그콘서트>는 한 마디로 엄청난 개그의 인해전술을 방불케 한다. 양이 많아지면 그만큼 주의력은 흩어지게 마련.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 뜬 개그맨들은 하나둘 그 아이디어 전쟁에서 밀려나 새로운 분야(방송진행, 드라마, 영화, 연극, 뮤지컬 등을 보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개그콘서트>의 성공은 어찌 보면 개그맨들의 살을 깎는 경쟁과 대전을 통해 이룬 것이다. 그렇게 피를 말려온 개그맨들이 일본이라는 생소한 국제무대에 서서 당당히 일본인들을 웃기는 모습을 본다면 마음이 어떨까. 라면 먹고 한 개그에 눈물이라도 흘릴 것인가.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WBC가 끝나고 야구에 대한 우리들의 관심이 국내야구경기로 옮겨왔는가 하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국내경기를 마치 동네야구처럼 생각하게 되지는 않았는가. 야구하면 메이저리그라는 등식이 더 공식화된 건 아닐까. 탄탄한 지원이나 확실한 기반 없이 해외에서 한번 보여주는 선방은 분명 우리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구석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통해 우리네 사정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마치 개그콘서트의 무대에서 주목을 끌었다고 해서 그 개그맨의 실제 사정이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 것과 같다.

도저히 웃음이 나오지 않는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개그맨들은 그 어느 정치인들보다, 경제인들보다, 의사보다, 더 존경받을 만하다(물론 가끔 개그맨들을 능가하는 정치인들이 나오기도 하지만). 그들은 우리가 저 <왕의 남자>에서 조선시대 개그맨, 장생과 공길을 통해 보았듯이 그저 ‘웃기는 잡놈’이 아닌 예술가에 가깝다. 그네들의 건전한 살판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네 개그가 어느 한 권력에 잡혀 획일적으로 흐르지 않고, 다양한 정통 개그 프로그램의 시도를 통해 이미 발굴된 개그맨들을 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웃음을 찾는 사람들(개그맨들)은 많다. 그런데 그들이 설자리는 왜 장생이 섰던 외줄 밖에는 없는 걸까.

<넌 어느 별에서 왔니> vs <봄의 왈츠>

<넌 어느 별에서 왔니>를 보고 있으면 정말 묻고 싶어진다. “너희들 외계인이니?” <소림축구>에서 주성치가 만두가게 처녀 아매에게 했던 말을 빌려, “네 별로 돌아가”라고 농담이라도 걸고 싶어진다. 그리고 진짜 묻고 싶은 건 드라마 제목처럼 “도대체 넌 어느 별에서 온 거니?”하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묻고 싶은 또 한 사람이 있으니 같은 별에서 왔으나 지금은 서로 다른 입장에 서서 경쟁하고 있는 다니엘 헤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이 핸섬가이는 떠듬떠듬 서투른 우리말 몇 마디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능력이 있었다. 그는 외계인으로 돌아간 정려원과는 정반대로 한국인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그들이 온 별은 어디?
정려원이 처음 그 몸을 숨긴 곳은 27살 유희진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맑게 웃는 모습이 아름다운 스마일페이스였지만, 그 속에는 끔찍스러운 아픔이 남아 있었다. 암으로 인해 위를 절제했던 것처럼 그의 첫사랑 진헌과의 관계도 도려내졌고, 다시 돌아온 자리에는 김삼순이라는 어마어마한 공력의 소유자가 떡 하니 앉아있었다. 김삼순의 엉뚱함과 서글서글함에 맞서는 인물로, 정려원은 다소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얼굴의 화장을 해야했다.

그때 그녀의 무거움을 덜어주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같은 별에서 온 다니엘 헤니라는 인물이다. 김삼순과 진헌을 두고 경쟁한다는 절망적인 설정에서 그녀를 끄집어내준 다니엘 헤니는 여러모로 그녀와 같은 과였다. 유창한 외국어에, 이국적인 쿨한 이미지, 보고만 있어도 마냥 기분이 좋아지는 맑은 얼굴... 그들은 진헌을 두고 김삼순과 경쟁한다는 드라마 속 구도에서 자꾸만 벗어나 같은 별 출신 특유의 더 잘 어울리는 한 쌍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별에서 정려원은 본래 호주의 맑은 하늘같은 이미지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그녀가 나온 그리피스 대학이 있는 골드코스트의 파란 하늘과 따뜻한 햇볕, 그 볕에 적당히 달구어진 바다의 열정을 고스란히 갖고 있었다. 아무리 무거운 얼굴의 화장이라 해도 그걸 숨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두 번째로 그 몸을 숨긴 <가을 소나기>의 박연서라는 인물은, 유희진이었을 때보다 더 심각했다. 다니엘 헤니도 없던 그녀는 절친한 친구를 사랑하는 남자를 옆에서 짝사랑할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 드라마를 통해 정려원은 그저 대책 없이 맑기 만한 것이 아닌 눈물을 펑펑 흘려도 잘 어울리는 새로운 이미지 하나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좀더 심플하면서도 강력한 명랑함, 그 명랑함의 뒤편에 남는 우수... 마치 찰리 채플린의 슬랩스틱에서 한껏 웃은 뒤에 남는 애잔한 감정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다시 자기 별로 돌아가 망원경으로 새로운 얼굴을 찾던 정려원은 이제 제대로 된 얼굴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복실이의 얼굴이다.

웃겨야 산다
<넌 어느 별에서 왔니>에서 정려원은 먼저 혜수(김래원의 옛 애인)라는 과거의 이미지를 교통사고로 지워버린다. 그리고 복실로 태어난다. 착하게도 자신의 사고로 죽은, 과거 이미지를 가진 정려원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김래원은 차츰 복실로 다시 태어난 정려원의 이미지에 빠져든다. 처음 몇 번은 과거와 현재를 혼동하지만 이제 과거는 묻혀지고 현재의 모습에 더 빠져드는 것이다. 복실을 만난 정려원은 제 물 만난 고기처럼 거침없이 순수한 모습(심지어는 바보스러운)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사실 제 별에서 놀던 그 모습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모습은, 어른들의 세계인 도시에 와서 오히려 빛을 발한다. 그녀의 거칠 것 없이 터져 나오는 촌스러움에 그녀를 바라보는 이들은 웃음이 터진다. 하지만 그 웃음은 이상하게도 웃을수록 마음에 애잔함을 남기는데, 그것은 그녀가 비판하고 있는 대상, 그녀가 웃음을 만들어내는 원천이 바로 우리네 도시인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한참 웃다가 한숨이 나온다.

울어야 산다
한편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같은 과라는 것을 확인했던 또 다른 별에서 온 다니엘 헤니는 정려원과는 정반대의 길을 걷게 된다. 정려원은 시골소녀로 환골탈태, 웃다가 울리는 진정한 개그의 길을 가고 있는 반면, 다니엘 헤니는 <봄의 왈츠>를 통해 절대로 울 것 같지 않던 조각 같은 얼굴에 조금씩 슬픔을 담아낸다. 아직 그 얼굴이 완전히 드러난 건 아니지만 “이러다가 다니엘 헤니가 우는 걸 보게 되는 거 아냐?”하고 생각할 정도로 드라마의 분위기는 그의 아픔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기구한 운명의 장난으로 정려원은 웃겨야 살고, 다니엘 헤니는 울려야 사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다니엘 헤니가 그 외계인의 이미지에서 점점 우리네 정서에 맞는 한국인의 모습(정스러운)으로 다가가는 반면, 정려원은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외계인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그러자 드라마는 땅과 하늘의 모습으로 진전되었다. 땅에는 봄이 만연하고, 하늘에는 별이 반짝였다. 땅을 보나 하늘을 보나 쳐다보기만 해도 즐거운 그 얼굴들이 있기에 월화가 아름답다.

<봄의 왈츠> 상처에 대한 변주곡

한 사람의 마음 속에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상처와 그 아문 흔적들이 있는 걸까. 지금 웃고 있는 저 얼굴 뒤에는 얼마나 많은 아픔들이 숨어있을까. 상처들에 의해 만들어진 나의 얼굴은 또 얼마나 많은 걸까. <봄의 왈츠>는 이제껏 보여줬던 트렌디한 등장인물들이 사실은 그렇게 단순한 인물들이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긁을수록 점점 커져만가는 딱지처럼 이 치유가 도무지 불가능해 보이는 상처들은 윤재하, 박은영, 필립, 송이나는 물론이고 그 주변인물들, 윤재하의 어머니와 아버지, 박은영의 어머니와 필립의 어머니에게까지 번지고 있다. 이제 상처들은 조금씩 몸을 간질이며 봄을 예고하고 있다. 하지만 등장인물들이 봄의 왈츠를 추기 전에 먼저 해야될 일이 있다. 마음 속 깊숙이 너무나 깊이 숨겨두어서 마치 애초부터 없었다고 믿고 있었던 과거의 상처, 그 상처와 마주하는 일이다.

윤재하, 나는 누구인가
윤재하가 가진 상처는 마치 인간 존재 깊숙이 내재된 원죄의식에 가깝다. 윤재하는 본래 이수호였다. 그런데 그 이수호의 아버지는 그의 삶은 물론이고 그가 사랑하는 박은영의 삶을 송두리째 뽑아버렸다. 이수호는 그 깊은 죄의 공모자라는 원죄의식과 함께, 그것이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였다는 것에서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게된다. 그는 박은영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죽이는 길을 선택한다. 그는 이수호를 죽이고 윤재하로 태어났다.

윤재하는 피아노를 닮아버렸다. 어쩌면 그가 피아노를 두드리며 자라온 그 세월은 이수호의 흔적을 지우고 윤재하라는 새로운 인물을 자신 속으로 박아 넣는 아픔의 세월이었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그런데 자신이 스스로 죽였다고 생각했던 이수호가 깨어난다. 그의 눈앞에 박은영의 실루엣이 자꾸만 어른거리는 것이다. 그가 다시 대면하게된 상처에서 그는 머뭇거린다. 박은영을 사랑하지만 그녀에게 지워질 수 없는 상처를 입힌 이수호로 돌아갈 것이냐, 아니면 그 상처를 덮고 자신을 윤재하로 믿고 사랑하는 송이나를 받아들일 것이냐.

자꾸만 거울 앞이나 유리창 앞에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볼 때의 애잔함, 피아노 건반 위에서가 아니라 가끔씩 허공을 두드리는 그의 손가락의 절망감, 마치 어떤 얘기도 꺼낼 수 없다는 듯이 악다문 입술, 고개를 가로젓거나 방을 뛰쳐나갈 때의 쓸쓸한 어깨... 그것들은 모두 그의 속에서 꿈틀대고 있는 이수호의 그림자를 보이지 않기 위한 위장술이다. 박은영이 과거의 박은영으로 드러나는 그 지점이 윤재하 속의 이수호가 깨어나는 날이다. 그것이 봄의 왈츠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박은영과 필립, 그 대책 없는 미소 뒤의 아픔
도무지 참아낼 수 없는 깊은 상처는 오히려 얼굴에 행복의 가면을 씌우는가. 참기 어려운 충격적인 사건들을 겪은 사람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다못해 맑기까지 한 대책 없이 발랄하고 명랑한 현재의 얼굴을 한 그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우는’ 캔디와, 씩씩함의 대명사 김삼순의 캐릭터가 반쯤 섞인 박은영의 얼굴은 그래서인지 웃는 순간, 한숨을 내쉬는 순간에 저릿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자신이 사랑했던 이수호의 아버지로 인해 죽게된 자신의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병 때문에 스스로의 존재를 포기해야 했던 그녀가 사랑한 이수호, 그럼에도 다시 나타난 이수호의 아버지의 꾀임에 넘어가 겪게되는(그녀는 어느 여관에 버려진 것이다. 혹은 팔렸거나.) 지울 수 없는 상처... 윤재하가 그녀 앞에 다시 나타남으로 해서 그 묻어두었던 상처들이 다시 떠오른다. 저 외딴 섬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던 소녀는 이제 낯선 서울까지 너무나 멀리 오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과거와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그녀 옆에 강력한 환상, 행복에로의 몰핀이 자리하고 있으니 그가 바로 필립이다. 이 유쾌한 친구는 드라마 전체의 무거움을 일순간 날려버릴 만큼 가볍다. 하지만 저 밀란 쿤데라가 말했듯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그 자체로 무거움을 내포한다. 그의 과거는 철저히 가려져 있으나 그가 은영 모의 무덤가에서 자신의 어머니도 돌아가셨다는 말을 할 때 그 어둠이 얼핏 드러난다. 굳이 혼혈의 아픔 운운하지 않더라도 그 쾌활한 웃음이 어린 시절의 어떤 상상하기 어려운 아픔을 예고하게 한다. 그는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보려고만 한다. 그런 그가 은영을 사랑한다. 윤재하(과거)와 필립(현재와 미래) 사이에서 은영은 갈등한다. 아프지만 진정한 사랑인 과거로 갈 것인가, 환상일지도 모르지만 아름답고 행복하기 만한 현재와 미래로 갈 것인가. 허공에 발이 1센티 정도 떠 있는 듯한 필립과 은영의 만남, 사랑의 드라마는 그래서 유쾌하면서도 아련한 여운을 남기는 것이다.

송이나와 현지숙, 자기기만이 불러오는 아픔
어느 날 사랑했던 이가 떠났을 때,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랑하는 이가 돌아올까. 송이나와 현지숙이 잡고 있는 과거 한 자락의 추억은 그래서 안타깝다. 그 둘은 똑같이 과거의 윤재하(죽은 실제 윤재하)의 영혼을 붙들고 놓지 않는다. 그러나 과연 그들은 모르고 있는가. 송이나는 다시 오스트리아에서 윤재하를 만났을 때부터 그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너 어딘가 달라 보여. 하지만 그게 더 좋아”라고 말하는 송이나 속에는 자신이 그리워했던 그가 아니지만, 그를 지금 눈앞의 윤재하와 묶어두려는 강력한 소망이 자리하고 있다. 송이나가 그럴진대 윤재하의 어머니인 현지숙은 오죽할까. 20년의 세월을 살면서 그녀의 환상은 과연 한번도 깨지지 않았을까. 그는 진짜로 지금의 윤재하를 죽은 자신의 아들로 생각하고 있을까.

송이나와 현지숙이 붙들고 있는 윤재하의 영혼은 그러나 박은영이 나타남으로 해서 조금씩 위기를 맞고 있다. 그들은 절망적으로 윤재하의 영혼에 매달리지만 그것은 사실 끝없는 자기기만일 뿐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윤재하의 존재론적 고민의 끝은 그들에게 끝없는 절망이 될 수도 있다. 윤재하가 윤재하를 포기하고 이수호가 되는 순간, 그들이 잡고 살아왔던 20여 년의 세월은 무화되고 마는 것이다. 온통 윤재하로 채워왔던 그 나날들 속에서 그가 빠져나간 후, 남게되는 커다란 공백을 그들은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매달림은 처절하기까지 하다.

아픔과 치유의 변주곡
피아노는 자신을 두드림으로 해서 아름다운 소리를 낸다. 우리 모두가 살아가면서 겪는 아픔은 그래서 아름다움으로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피아노곡으로 흐르는 ‘클레멘타인’이 아프면서도 승화와 치유로 변주되는 것처럼, <봄의 왈츠>는 인물들이 부딪치면서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소리들의 변주곡이다. 작고 가녀린 영혼들이 내는 작지만 반짝이는 그 소리들을 들어보자. 혹 우리들 삶 속에서 숨겨왔던 우리네 상처들을 거기서 만날지도 모르니까.

시청률이라는 이름의 파시즘

흔히들 “예술영화는 졸리다”는 자조적인 농담처럼, 잘 만들어진 드라마와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는 항상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최근 <봄의 왈츠>, <굿바이 솔로> 같은 뚜렷한 메시지를 갖고 ‘생각하게 만드는’ 웰 메이드 드라마의 낮은 시청률은, ‘TV는 바보상자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꺼내게 만드는 씁쓸함이 있다.

조기 종영되거나 연장 방영되는 드라마가 나오는, 시청률이 지고선이 된 작금의 현실은 한편으로 ‘한류의 종주국’이라는 호칭을 무색케 한다. ‘시청률이 몇%’라는 애매한 잣대로 작품을 난도질하는 대부분의 연예기사들도 시청률이라는 바벨탑을 쌓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한류라는 힘으로 전 세계 컨텐츠 비즈니스의 중심에 서겠다는 포부에 맞는 일일까.

물론 시청자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 문제는 시청률에 올인 하는 방송사와 그런 시류에 밀착하는 제작자들,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는 수많은 매체들이 문제다. 그저 재밌으면 됐지. 뭐가 그리 거창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지금 우리네 드라마가 문화계 전체에서 갖는 비중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얘기일 것이다. 드라마는 이제 그냥 드라마가 아닌, 우리네 문화의 견인차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지적인 시청률과 범아시아적 시청률
한류는 모든 상황들을 바꾸어 놓았는데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바로 드라마였다. 한류의 성공은 드라마 제작에 범아시아적인 투자자들을 끌어 모았다. 드라마 제작은 붐을 이루었다. 게다가 케이블을 비롯해 위성방송, DMB 등 다양한 채널들은 더 많은 컨텐츠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과거 방송사에서 하던 드라마 제작은 대부분 외주 프로덕션으로 넘어갔다. 그것이 경쟁력도 있고 비용측면에서도 유리했기 때문이다. 성공한 제작사들의 위상은 높아졌다. 드라마 제작이 활기를 띄면서, 웰 메이드 드라마에 대한 수요도 높아졌다. 쪽대본으로 상징되는 기존 드라마제작 관행은 사전제작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쪽대본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영화 제작인력들은 사전제작에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영화를 찍는 날보다 찍지 않는 날들이 많았다. 게다가 HDTV라는 환경변화에서 드라마 제작에 영화용 카메라를 사용하는 것 역시 영화 제작인력들에게 유인이 되었다.

감독은 물론, 촬영감독, 의상, 조명 등등 영화계 현장인력들은 물론이고, 이제 드라마 제작 현장은 각계 각층의 문화계 인물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조악한 현실 여건 속에서 고군분투하던 만화가, 시나리오 작가, 소설가 등은 이런 분위기를 타고 드라마 제작이라는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들어가 새로운 활력을 얻고 있다. 드라마 홍보 역시 영화 홍보 대행사들이 나설 만큼 전문화되었고, 선 마케팅은 드라마가 제작되기 이전에 제작비를 모두 끌어 모았다. 유통 채널은 이제 전 세계를 향해 뻗어있다. 이것이 지금의 우리네 드라마가 갖는 힘이다. 그런데 힘에는 책임이 따른다. ‘좀더 잘 만들어진’,  ‘우리네 것이 분명하면서도 보편적인 정서를 담는’, 그래서 ‘누가 봐도 재미있으면서 의미도 있는’, 그런 드라마가 요구되고 있는 것이다.

숨어서 복사된 일본 드라마를 보던 우리가, 일본 본토에서 한류 열풍을 일으키는 힘을 가지게 한데는 윤석호 PD라는 국제적 안목을 갖춘 연출가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최근 인터뷰를 통해서 “한류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최근 한국 드라마나 영화들이 자극적으로 흘러가는데 반해 정작 해외에서 인기를 얻는 작품들은 <대장금>과 <겨울연가>처럼 건강하고 부드러운 작품”이라고 했다. <봄의 왈츠>에 대해 범아시아적인 시청률(?)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말해주는 대목이다.

작가주의 드라마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평가들
<봄의 왈츠>와 <굿바이 솔로>의 시청률이 그다지 높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다. 소위 ‘작가주의’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평가가 그 첫 번째이다. 윤석호 PD나 노희경 작가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열어놓았다. 윤석호 PD의 작품들이 절제된 대사와 감성을 자극하는 뛰어난 영상으로 그 세계를 만들었다면, 노희경 작가는 직설적이면서도 역설적인 대사들, 인물에 대한 끝없는 탐구 혹은 애정, 러브스토리 같지만 한 꺼풀 들여다보면 그 속에 숨어있는 강한 사회적 메시지들로 굳건한 세계를 구축했다. 비평가들은 그들을 작가라고 호칭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작가주의라고 한다면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막상 새로운 드라마를 개봉하면 단 첫 회를 보고도 비평가들은 이렇게 말한다. “역시 작가적 면모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나 전작과 별로 다르지 않다”고. 이것은 다시 말해, 한껏 작가로서 추앙해서 풍선을 부풀려놓은 다음, 한번에 바람을 빼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화가 한번 시작되면 끝날 때까지 어쨌든 다 보아야 뭐라 얘기할 수 있는 반면, 드라마는 몇 달에 걸쳐 방영되기 때문에 이러한 초기의 평가는 치명적일 수도 있다.

<봄의 왈츠>의 경우 초기의 설정과 흐름이 과거 윤PD의 드라마와 유사하다는 이유로, 아직 방영되지 않은 나머지 회의 드라마들까지 그럴 것이라는 짐작들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봄의 왈츠>는 사실 전반부 설정보다는 중반 이후에 드러나는 극중 인물들의 깊은 상처, 그리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이 중요한 부분이다. 이것이 윤PD가 이 드라마를 통해 새롭게 선보이려 했던 ‘휴머니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아직 본 게임에 들어가지도 않은 것이다.

<굿바이 솔로>는 마치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노희경 매니아’라는 한 단어로 집약된다. ‘좋은 드라마지만 매니아들이나 보는’, 이라는 평가는 우리네 드라마계가 가진 보수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기계적인 설정과 판에 박은 대사, 선남선녀의 주인공들에 화려한 외관을 씌우는 과거의 방식만으로도 예상할 수 있는 20% 이상의 시청률을 확보할 수 있는 마당에, 주인공들이 무려 7명이나 되는 이런 형식 파괴적인 드라마는 도발이 아닐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과거를 답습하며 연장방영에 들어간 드라마들은 30%대의 시청률을 끌어 모으며 잘 나가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에 시청률 놀음이 가진 함정이 있다. 윤PD가 말했듯 ‘자극적인 설정’은 눈앞의 시청률을 높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보편적인 정서를 말해주지는 않으며, 또한 ‘끊임없이 좀더 자극적인 설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앞으로 나가야할 드라마가 땅을 파고 들어가는 형국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한류라는 거대한 흐름으로 우리네 드라마계가 확고한 문화의 견인차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작가들의 ‘새로운 시도’로서 가능했던 것이지, ‘전통적인 드라마들의 답습’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청률에 연연하지는 않는다고 했으나
윤석호 PD나 노희경 작가의 작품들이 그다지 시청률이 대단했던 것은 아니다. 대체로 윤석호 PD의 작품은 초기에 10%대의 시청률에서 시작해서 끝에 가서 30%에 도달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전체적으로는 그다지 높은 시청률이 아니었다. 일본에서는 마의 시청률이라는 3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달성했다지만 그것이 국내에서도 그랬던 것은 아니다. 또한 노희경 작가는 알다시피 시청률 안나오기로 유명한 작가이다. 가장 시청률이 높았던 것이 <꽃보다 아름다워>로 약 27% 정도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윤PD나 노희경 작가나 모두 “시청률에는 연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드라마를 방영하는 방송국과 드라마를 만드는 프로덕션이 이원화된 상황에서 시청률은 미묘한 사안이 아닐 수 없다. 아마도 직ㆍ간접적인 압력을 받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잣대로 방송국은 시청률이란 카드를 내밀 것이다. 안 본다는 데야 어찌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한편으로는 시청률이란 것이 정말 그렇게 공정한 것이고, 의미가 있는 것인지 반문해보고 싶다.

드라마 시청률은 현재 10대와 4, 50대가 주축이라고 한다. 얼핏 생각해도 가벼운 만화 같은 드라마와 전통적인 문법의 드라마들이 현재 시청률 1, 2위를 다투고 있는 걸 보면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그 중간에 있는 20대 30대 시청자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TV 이외의 다른 매체들이 많이 생겨서 그렇다고 하는 건 핑계일 뿐이다. 혹시 그들을 위한 드라마들은 ‘시도조차 되지’않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청률이라는 이름의 파시즘
과거에 TV가 국민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는 바보상자의 역할을 했을지 모르지만, 이제 TV는 더 이상 바보상자가 아니다. 인터넷이라는 창을 통해 시청자들은 끊임없이 TV에 의견을 전한다. 이러한 다양한 의견들은 건강한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밑거름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 의견들이 파시즘이 돼서는 안 된다. 자칫 이러한 파시즘은 제작자들의 마음 속에 ‘이건 되고 저건 안 되는 식의’ 자기검열의 족쇄를 채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의견들을 이용해 파시즘으로 활용하려는 어떠한 시도들이다. 시청률이 지고선이 됐다는 것은 마치 그것이 인터랙티브한 사회를 보여주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 지고선이 된 시청률에 동참하라는 심리적인 압박일 수도 있다.

시청률이라는 순위경쟁의 껍데기를 벗어내야 다채로운 드라마들의 스펙트럼이 TV를 장식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방송국의 입장에서는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묶어두고 싶겠지만 어느 한 드라마의 독식보다는 골라먹는 재미가 있는 TV가 됐으면 좋겠다.


<브로크백 마운틴>이 말해주는 고단한 삶

<브로크백 마운틴>을 보러 가기 전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동성애 영화란다. 그것도 서부의 사나이들이 사랑하는 이야기란다. 그런데 영화를 보고 나면 알 수 없는 슬픔이 밀려오는 그런 영화란다. 한 번 본 사람은 두 번 세 번 보게되는 영화란다. 한편으로는 미국판 <왕의 남자>라면서 동성애 코드가 요즘 유행이냐고 묻는 이들도 있단다.
머릿속에 있는 서부의 사나이들이라면 존 웨인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광활한 황야를 누비던 총잡이들뿐이었던 내게 카우보이들의 러브스토리가 그다지 끌리지 않았던 건 당연한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 상념에 젖어있을 즈음 불이 꺼지고 영화는 시작되었다.

영화는 담담했다. 1963년 Cowboy State라고 불리는 와이오밍에서 만난 에니스와 잭이 20여 년 간 겪는 안타까운 사랑과 이별의 이야기였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브로크백 마운틴의 풍경과 파란 하늘이 가슴에 박혀왔지만 그저 그런 영화인 줄 알았다. 역시나 영화 흥행도 그다지 주목할만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상한 일은 그 그저 그런 영화가 내내 가슴속에서 울림을 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혹시 영화를 잘못 본 건 아닐까. 다시 영화를 보았다. 그리고 알게 됐다. 왜 내가 보지 못한 것들이 있었는지, 왜 그 울림은 내 속에서 계속되었던 것인지, 카우보이들의(그것도 남자들 간의) 사랑 따위 얘기가 왜 한국이라는 나라에 사는 내게 깊은 감명을 준 것인지 알게 되었다.

마초 사회와 동성애 영화
우리가 머릿속에 갖고 있는 미국인 = 카우보이 = 서부의 사나이 = 마초맨의 이미지는 대부분 헐리우드가 각색한 것임에 틀림없다. 본래 서부 상황은 그렇게 낭만적인 것이 아니었다. 아름다운 날 것의 풍광이 의미하는 것은 그 속에 사람들이 극히 적으며 보이지 않을 정도로 외롭게 고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자주 비춰주는 파란 하늘과 브로크백 마운틴의 절경, 초록의 녹원은, 그 속에 있는 인간을 너무나 왜소하게 만들어버린다. 카우보이니 로데오니 하는 것들은 서부극에서 각색한 것처럼 멋지다기보다는, 외로움과 권태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기껏해야 몇 초간’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위한 목숨을 건 절규로 보인다. 가부장적인 사회구조가 가진 마초적인 강박은 사실 저 고립무원의 자연과 그로 인해 갖게된 두려움과, 두려움을 벗어나기 위해 자초한 자기고립으로부터 생긴 자기방어본능일 뿐이다. 상처받은 짐승들은 사회가 제공하는 보수적인 안전에 집착한다. 그걸 위협하는 자들을 공격하는 것 또한 용인되는 그 극단적 마초 사회의 두려움은 끊임없이 그 구성원들의 자기검열을 요구한다. 에니스는 그 속에서 자신의 한 평생을 “견디며” 살아간다.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마초적 본성도 다르지 않다. 서부의 사나이들이 했던 강박적인 자기방어본능은 우리네 군인문화와 보수문화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가끔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군대에서의 동성애자 인권문제를 보면서 우리는 ‘민주화되지 않은 군대문화’를 비판하기보다는, 나와 다른 그들의 상황을 묵인하는 마초적 태도를 갖곤 한다. 남자들의 마지노선은 여전히 굳건하다. 조작된 이미지이지만 서부의 사나이들과 조상의 얼과 군인들은 사회가 제공하는 보수적인 안전망이라는 점에서 믿어진다. 진실과 믿음은 다른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사회를 움직이는 것은 믿음이지 진실이 아니다.

이 잘 만들어진 영화가 그다지 많은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것은(물론 많은 매니아층이 형성되기는 했지만) 바로 이런 사회적인 두려움에 대한 암묵적인 거부가 한 몫 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이제야 왜 동성애 코드라는 꼬리표를 달면 영화가 성공하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나오는지 알 것도 같다.

이건 동성애 영화가 아니다
‘동성애’에 대한 편견을 버리자 이 영화의 다른 면모들이 보였다. 그런데 그렇게 보면 볼수록 이 영화는 동성애 영화가 아니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카우보이들의 러브스토리’라는 카피 제목은 너무나 표피만을 본 결과로 나온 것이었다. 동성애자도 아니고 동성애에 대한 관대한 입장을 가져왔던 사람도 아닌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 ‘알 수 없는’ 슬픔에 잠기는 것은 왜일까.

이 영화는 에니스와 잭의 사랑이야기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그들의 사랑이 절실해 보이는 것은 그들의 현실이 너무나 외롭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영화는 그들이 사랑하는 장면보다, 그들이 현실의 무게 속에서 얼마나 고립되어 살아가고 있는가를 더 많이 보여준다.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참을 수 없는 추위와 알 수 없는 성욕으로 첫 관계를 맺는 장면은 이 영화의 슬픈 정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들의 사랑은 사실 매서운 현실들과 극단의 외로움에서 겨우 한 자락 잡을 수 있었던 기쁨이었던 것이다. 20년이 넘도록 간간이 만나 얻는 그 기쁨은 마치 낡고 헤진 젊은 날의 한 자락 추억을 안고 책임과 의무로 가득한 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네 모습과 고스란히 닮아있다. 그런 이유로 에니스가 “바꿀 수 없는 것은 견뎌야 한다”고 말할 때 우리가 공감하게 되는 것이며,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잃어버렸던 셔츠가 잭의 셔츠 속에 안겨있는 걸 에니스가 발견했을 때, 그 슬픔에 공감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동성애 영화가 아니다. 대신 현실 속에서 보수화 되어가고 있는 우리네 감성에 둔중한 충격을 주는 영화다. 앞도 뒤도 알 수 없이 일상을 살아가는 어느 한 중년이 젊은 시절의 한 때를 떠올리며 ‘잠깐’ 미소짓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얼마나 처연한 일인가.
그러니 많은 사람들은 ‘동성애 영화’라는 꼬리표를 단 이 영화를 보고 난감해 했을 것이다. 나는 왜 이 ‘동성애 영화’에 감동하는가 하고 말이다. 그 조장된 동성애 코드는 그 관객에게 다시금 ‘두려움의 코드’를 끄집어내게 만든다.

없는 자들을 위한 따뜻한 시선들
러브스토리를 걷어내면 이 영화는 그 위대한 휴머니즘을 얻게 된다. 영화는 사랑에 빠진 인물들을 묘사하는 것보다는 ‘일하는’ 인물들을 묘사한다. 에니스와 잭이 만나는 것도, 금지된 것 투성이인 그 ‘빌어먹을’ 일 때문이며, 그들이 각자의 가정을 꾸미는 것도 생계를 위한 것이다. 어찌 보면 미칠 것처럼 살아가는 그들이 짧은 낚시여행을 떠나는 것도 다 이 지긋지긋한 삶을 버티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비단 에니스와 잭의 현실만은 아니다. 에니스의 아내 엘마는 등장에서부터 거의 끝날 때까지 일을 하고 있다. 부엌에서 직장에서 그녀는 죽어라 일을 하지만 상황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는다. 잭의 아내 로린은 적어도 가난을 벗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이제 돈의 노예가 된 상황으로 그 삶 역시 행복하지 않다.

그런데 이 현실은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다. 매일매일 일 중독에 살아가면서 가끔 쉬는 휴식조차 일을 위한 충전 정도로 치부되는 사회. 게다가 없는 자들이라면 그 노동은 희망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현재를 ‘버티는’ 절망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우리들은 어떤 식으로든 울기 바로 일보 직전 상태로 살아간다. 물론 얼굴은 웃고 있지만.
이 영화의 슬픔은 내러티브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 안 감독을 위대한 거장으로 부를 수 있는 것은 영화 속 등장인물들의 얼굴 표정 하나, 손짓 하나로도 그 심리상태를 섬세하게 보여줬다는 것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무언가 거대한 불행을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바로 우리네 얼굴들이다.

이 영화는 러브스토리가 아니다. 산에서 내려온 후 잭이 떠나고 에니스가 길을 걷다가 갑자기 골목을 달려가 구역질을 해대며 우는 장면은 잭이 준 상처 때문이 아니다. 사실은 또다시 현실 속에 홀로 남은 자신에 대한 연민인 것이다. 에니스와 잭의 관계를 알게 된 상황에서 아기를 안고 울음을 터트리는 엘마는 버티고 있던 일상 속에 이제 자신 혼자만 남았다는 인식 때문이다. 에니스의 딸이 결혼을 하겠다고 했을 때, 머뭇거린 것은 그가 딸의 결혼을 반대하는 것 때문이 아니고, 또 딸을 떠나보내야 하는 그 자신에 대한 외로움 때문이다. 상처를 준 것은 사회와 현실이지 상대방이 아니다. 상처 입은 짐승들은 그것이 본질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의 상처를 핥으며 살아간다. 이것이 이 영화가 던져주는 우리네 존재의 비극이다.

피묻은 셔츠로 남은 희망
낡은 컨테이너 하우스에 들어온 딸이 “가구를 더 사야겠다”고 말하자 에니스는 마치 달관한 사람처럼 말한다. “가진 게 없으면 필요한 것도 없는 법이야”라고. 가난과 외로움은 고립무원에 홀로 서 있는 컨테이너처럼 쓸쓸하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어떤 희망과 감동을 주는 것은 피묻은 셔츠를 바라보는 에니스의 시선 때문이다. 에니스가 결국 인생을 통해 버티면서 얻은 것이라고는 셔츠 두 개가 고작이다. 방금 딸이 놓고 가버린 셔츠와, 옷장 속에서 자신의 옷에 감싸진 잭의 셔츠. 셔츠 옆에는 브로크백 마운틴의 풍경이 담긴 엽서가 꽂혀있다. 그리고 에니스는 말한다. “맹세할게...” 무엇에 대한 맹세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아마도 자신 스스로에 대한 다짐이다. 삶은 고단한 일상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맹세한다.

에니스의 비천한 삶을 숭고하게까지 만드는 이 영화의 맹세는 그 어떤 저항보다 더 강력하다. 심지어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 속에 떨며 강박적인 자기보호본능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조차 끌어안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도 생애 한번쯤은 브로크백에 오른 적이 있다. 그리고 거기서 가져온 셔츠 한 벌은 여전히 당신 가슴속에 있다. <브로크백 마운틴>이 우리네 가슴속 옷장에 걸어둔 셔츠 두 벌은, 현실에 치여 살아가는 우리에게 먹먹한 희망으로 남을 것이다.

<봄의 왈츠> VS <넌 어느 별에서 왔니>

‘봄의 왈츠’는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기나긴 겨울을 전제로 한다. 그 겨울 동안 그들을 버티게 해준 힘은 어린시절 한 자락 가슴 속에 들어앉았던 추억들이다. 윤재하라는 새로운 이름의 겉옷을 입고 겨울을 살아온 이수호의 가슴 속의 절망은 “은영이 수술 후유증으로 죽었다”는 것이었다. 그에게 은영이 죽은 한국은 겨울같은 추억으로만 남아있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에서 우연히 만난 한 여자를 통해 그녀가 은영일지도 모른다는, 그녀가 살아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의 한국행을 결심하게 만든다. 윤재하로 돌아온 그는 이제 이수호로 지내며 은영과 추었던 추억의 봄의 왈츠를 찾아나선다. 숨은 그림 찾기의 시작이다.

추억의 장소. 과거에 그녀가 있었던 장소. 하지만 지금은 없는 그 장소에서 그가 서성댄다. 이 설정은 <봄의 왈츠>가 앞으로 전개될 드라마의 방향을 예고한다. 윤석호 PD의 뛰어난 영상과 연출은 ‘빈 자리’를 보여줌으로 해서 그 자리에서 함께 했던 따뜻한 봄의 기억들과 현재 진행형이 차가운 겨울을 병치한다. 그 거리감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안타깝게 만든다. 은영을 마지막으로 두고 나왔던 병원, 은영을 잃어버린 줄 알고 찾아헤맸던 남대문 시장, 그 시장통 한쪽에서 은영이 수호에게 주려고 허기를 참아가며 들고 있던 붕어빵을 팔던 노점상... 재하(과거의 수호)는 그 과거의 언저리를 서성대면서 은영의 그림자를 찾아해맨다. 시청자들은 재하의 상황에 감정이입되며 은영이 바로 재하가 찾는 그 인물이라는 확신을 갖게된다.

하지만 여기서 윤석호 PD는 시청자들의 기대를 한번 무너뜨린다. 막상 찾은 은영은 자신이 생각한 그 추억의 은영과 같은 인물이 아닐 거라는 믿음을 재하에게 심어주는 것이다. 시청자들은 그 드라마에 안타까워하면서 더욱 더 재하와 은영의 만남을 갈구한다. 여기에 끼어드는 송이나라는 과거 진짜 재하(수호가 현재 대신 살아가고 있는)의 단짝친구는 재하에게 정체성의 혼란을 부추긴다. 은영은 죽었을 거라는 재하의 실망은 수호라는 진짜 자신과 그 수호가 가졌던 봄의 기억을 잊고, 가짜지만 현실인 재하라는 새로운 실존에 타협하려 한다. 그는 송이나에게 새롭게 시작하자고 한다.

<봄의 왈츠>는 그 경쾌한 외연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무거운 과거의 설정으로 인해 추억의 언저리에서만 빙빙 돌고 있다. 윤석호 PD의 영상과 내러티브의 힘이 바로 그 추억과 노스텔지어에 있기에, 어찌보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청자들에게 <봄의 왈츠>는 첫번째 작품이 아니다. 시청자들은 이미 겨울과 가을과 여름을 거쳐 봄을 보고 있는 것이다. 추억찾기와 숨은 그림 찾기, 그리고 그 엇갈림은 많은 드라마에서 답습해오던 문법이며 그 나름대로의 의미와 힘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아마도 지금의 시청자들은 과거를 걷는 이야기보다는 현실적인 카타르시스를 더욱 요구하는 것 같다. 요는 무거움보다는 가볍고 발랄하며 상큼한 이야기에 매료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서 오히려 부각되는 인물은 다니엘 헤니가 연기하는 필립이라는 인물이다. 애초의 대본에는 없던 필립이 그 가벼움으로써 이 무거운 드라마의 무게중심을 맞춰주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에서 나오는 드라마틱한 대사들은 고전적이면서도 힘이 있지만, 그것이 새로운 것이 아닐 때 상투가 되기도 한다. 심각한 대사가 닭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반면 <넌 어느 별에서 왔니>는 철저히 가벼움과 경쾌함을 목표로 드라마를 엮어가고 있다. 가벼움과 경쾌함은 과거의 기억보다는 그 현재의 아이러니나 대결구도에서 나온다. 인물들의 시소타기 게임의 귀재인 표민수 PD는 시골소녀 vs 도시남자의 기본 대결구도(물론 이건 관계의 호전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보는 이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를 바탕으로 시골과 도시에서의 엎치락뒤치락하는 드라마를 엮어간다. 시골마을에 오게된 영화감독 최승희로 하여금 시골소녀 김복실의 집에서 기거하게 만들고, 서울로 상경한 시골소녀 복실이 최승희의 밑에서 일하게 만든다. 자본주의 논리에 의하면 도시에서 잘나가는 영화감독인 최승희가 시골의 별볼일 없는 소녀 김복실에게 확실한 우위가 있어 보이지만 사실은 정반대다. 특유의 김복실이 가진 명랑함과 순박함은 최승희를 번번히 손들게 한다. 그 밑바닥에 있는 것은 자신이 한 아무렇지도 않은 행동으로 상처받는 복실에 대한 미안함과 가책이다.

하지만 이건 이 드라마의 겉모습이다. 만일 <넌 어느 별에서 왔니>가 이러한 가벼움으로만 일관한다면 그건 금방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그 속모습을 들여다보면 이 드라마의 말하지 않는, 어찌보면 철저히 숨기려 하는 드라마들이 보인다. 최승희가 김복실에게 끌리는 것은 사실 세상을 떠난 과거의 그의 연인과 닮았기 때문이 아니고, 김복실 그녀가 갖는 순박함 때문이다. 최승희가 가끔씩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가 미쳤지. 저런 애를’하는 투의 대사를 하는 것은 그의 착각 때문이다. 그는 김복실에게 끌리는 것이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정신이 약간 이상한 엄마, 수술을 해야 하지만 수술비가 없는 상황, 시골에서 좌판을 하며 먹고 사는 자신 등등 김복실은 사실 현실적으로는 불행해야 하는 인물이지만, 그 대책없는 발랄한 캐릭터로 인해 이러한 신파적 상황들은 전혀 드라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사실 속모습은 신파가 내재되어 있지만, 드라마는 의도적으로 발랄한 겉모습만을 보여준다. 복실이 엄마의 이야기라며 최승희에게 드라마 소재를 얘기해주자, 최승희가 바로 “그런 신파를 누가 보냐”고 하는 것은 이 드라마의 의도적인 숨기기를 말해준다. 표민수 PD는 말하는 것 같다. “본래 사는 건 신파지만, 그걸 뭘 드라마에서 다 시시콜콜 얘기하느냐”고 말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의 반전은 속모습이 드러나면서 일어난다. 임예진이 친엄마가 아니고 이보희가 친엄마라는 게 밝혀지는 것. 그리고 임예진이 울면서 미안하다고 말하자, 그 입을 막으며 그런 말 하지 말라는 복실에서 우리는 가슴뭉클함을 느끼게 된다. 다소 신파적이긴 하지만 드라마는 그 와중에도 월드컵 경기장에서 복실을 기다리는 최승희의 뚱한 모습을 보여주며 무게중심을 잃지 않는다.

이 드라마는 늘 현재진행형이다. 과거의 일들이 밝혀졌다는 것은 등장인물과 시청자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지만, 이 드라마는 그 과거에 멈춰서거나 서성대지 않는다. 대신 기대하게 되는 것은 시골소녀에서 도시 부유층의 딸이 된 달라진 환경 속에서의 복실과 최승희가 엮어갈 새로운 시소타기 게임이다. 표민수 드라마의 장점은 이 아픔을 숨긴 발랄한 시소타기 게임을 하면서도 가끔씩 반짝반짝하는 대사들을 던진다는 것이다. 밤하늘의 별이 아름다운 것은 그 밤이 많은 것들을 숨기고 가려주기 때문이다. 그걸 표민수는 알고 있다.

많은 드라마에 익숙한 요즘의 시청자들은 친절하게 상황을 알려주는 드라마보다는 저 스스로 상황을 읽는 드라마를 좋아한다. 모든 드라마의 시작은 베일에 가려져 있다. 그 숨은 그림을 하나씩 펼쳐보이는 드라마가 <봄의 왈츠>라면, <넌 어느 별에서 왔니>는 철저하게 가려진 채 진행되는 드라마 속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그림들을 보여준다. 숨은그림찾기나 숨기기나 모두 목적은 드러내는 데 있다. 그것은 단지 말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드라마에 있어서 그 말하는 방식은 드라마 자체가 되기도 한다. 과거에 잃어버린 봄의 숨은 조각들을 맞춰나가는 재미인가, 아니면 어두운 밤하늘에 숨겨져 있다가 어느 순간 반짝이는 별을 찾는 재미인가. 두 드라마가 나갈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하기만 하다.

<무인 곽원갑> 그 몸이 말해주는 것들

앙상한 체구의 달라이 라마는 성지순례를 온 비구니들과 수녀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종교라는 것은 신뢰와 존중이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종교에 대해서는 무한한 신뢰를 가져야 하지만 다른 종교에는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한 수녀님께서 물으셨다. “선생님께서는 많은 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달라이 라마가 말했다. “세상의 사람들은 각기 다른 성향을 가집니다. 우리는 모두 같은 눈, 같은 코, 같은 입을 갖고 있어도 좋아하는 음식은 다르지요. 종교는 그런 것입니다.” 우연히 TV에서 보게된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다. 이연걸은 2005년 10월 그의 아내 리지와 함께 달라이라마를 만나기 위해 다럄살라를 방문했다. 10여년 전 불교에 귀의한 그에게 달라이라마가 한 얘기도 비슷한 것이었을까.

테러가 화두가 된 세상 속의 아름다운 몸
액션과 폭력적인 영상에 길들여진 우리 눈에 몸은 하나의 무기로도 보인다. 실제로 어떤 몸은 폭탄을 장착하고 민간인들을 향해 뛰어들기도 하고, 어떤 몸은 무고한 기자를 납치해 살해하기도 한다. 어떤 몸은 뉴욕의 무역센터 건물로 비행기를 몰기도 하고, 어떤 몸은 정치적 이념과는 전혀 무관한 올림픽 선수들을 무참히 살해하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가 네모난 세상 속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우리들의 추악한 몸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뮌헨>, 이제 곧 개봉할 워쇼스키 형제의 <브이 포 벤데타>, 거장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폭력의 역사>,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은 <크래쉬>... 모두 이 추악한 몸이 벌이는 테러와 폭력의 문제를 화두로 삼고 있는 영화들이다. 9.11 테러가 이제 그 의미를 찾는 시점이 다가오자 영화들은 일제히 테러리즘에 대한 자아성찰을 시도하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동양에 이연걸이 있다. 그는 내한 인터뷰 기사에서 “전쟁이 끊이지 않는 현대사회에 폭력은 폭력을,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것... 폭력과 테러가 난무하는 서방세계에 복수의 반복은 악순환일 뿐”이라고 말했다. <무인 곽원갑>이 단순한 이소룡류의 격투기나, 성룡류의 오리엔탈 롤러코스터, 혹은 서극류의 환타지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는 곽원갑이라는 인물을 통해 진정한 무도(武道)의 길을 펼쳐보인다. 몸은 잘못이 없다. 문제는 마음 속의 두려움이다. 그 두려움을 넘어서 타인의 몸까지 껴안을 수 있을 때, 몸은 더이상 추악한 무기가 아니라 아름다운 그 무엇이 된다.

진정한 무도가 완성된 그 후
최고의 무술인이 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몸은 무기로 변해 라이벌인 진대인을 죽이고 만다. 폭력의 시작은 끝이 처참하다. 진대인의 제자는 곽원갑의 노모와 어린 딸을 살해한다. 눈이 뒤집힌 곽원갑은 칼을 들고 진대인의 집을 찾아간다. 진대인의 시신이 놓여진 곳 옆에서 진대인의 아내와 딸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을 본 곽원갑은 칼을 버리고 만다. 그 상황에서 곽원갑은 자신의 딸과 노모의 모습을 진대인 아내와 딸에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자시의 신뢰(사랑하는 딸과 노모를 위해 복수를 해야한다)와 동시에 존중(진대인의 아내와 딸도 마찬가지의 고통을 겪고 있다)이 생겨난 것이다.
1인자가 되는 순간에 곽원갑은 나락의 길을 걷는다. 자살을 시도하지만 맹인소녀 문을 만나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진정한 무인의 길을 깨닫게 된다. 무기가 아름다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 앞못보는 맹인소녀의 도움이 있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대목이다. 곽원갑은 고향으로 돌아와 진대인의 아내와 딸을 찾아 사죄한다. 이로써 그는 진정으로 강한 자, 자신의 두려움을 이겨낸 자가 되는 것이다.
만일 영화가 여기서 끝났다면 이 영화는 세상에 대한 폭력과 그 폭력에 대처하는 동양적인 대안을 제시한 영화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완성된 무인은 시대적 소명을 갖게 되고, 서구열강과 일본에 대항하는 중국의 영웅이 된다.

국가라는 이름으로는 폭력이 정당한 것인가
WBC(World Baseball Classic)에서 보았던 것처럼, 일본이라는 나라는 우리나 중국이나 반드시 이겨야할 대상이다. 과거의 문제가 현재도 반복되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이건 이 영화가 얘기하려는 것은 본래 아니었다. 폭력을 폭력으로 해결하는 것은 곽원갑 스스로도 몸소 겪었던 것이 아닌가. 물론 영화적 장치들은 되어있다. 상대편 일본선수가 곽원갑의 손을 들어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 풍경은 우리에게 낯선 장면이 아니다. 우리가 저 <바람의 파이터>에서 기대했던 진정한 무도의 길의 모습이 점차 민족주의적인 색채로 변해갔던 그 장면 말이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뮌헨>에서 말하는 ‘국가라는 이름 하의 무조건적인 충성’이 가져온 연쇄폭력은 개인의 불행을 담보로 한다. 개인적으로는 누구나 다 아름다운 몸을 갖고 있다. 하지만 국가라는 틀이 그 몸을 갖게 되면 추악한 모습으로 돌변한다. <무인 곽원갑>이 넘지 못한 선은 바로 이 액션영화로의 귀의에 있다. 그가 이 영화를 ‘한 무인의 삶을 통한 사회적인 드라마’로 일컫지 않고 ‘마지막 액션영화’로 소개한 것은 이런 이유다. 이연걸은 알고 있었다. 이 영화가 ‘폭력에 대한 철학적 대안’이 아닌 ‘액션영화’라는 사실을.

이소룡, 성룡, 이연걸로 오는 몸의 계보학
냉전시대에 탄생한 중국무술영화의 영웅, 이소룡의 몸은 파괴적이다. 적과의 대결 속에서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효과적으로 살상하느냐가 그의 몸이 보여주는 매력이다. 그러다 우리는 성룡이라는 괴짜 무술인, 변칙 무술인을 만나게 된다. 그는 냉전을 비웃듯이 몸을 희화화시킨다. 똑같이 살상을 목표로 하지만 동작들은 말하는 것 같다. ‘정말 웃기지 않니? 이 몸이 말야.’ 성룡의 액션은 점차 체조화되고 무용화되어간다.
그리고 이연걸이 있었다. 그의 동작은 아름다웠다. 하나의 무술이면서도 몸의 예술, 무용이었다. 무술영화가 그 미적인 힘을 발휘하는 부분은 그 동작의 무용적인 특성에 있다. 아름다운 몸의 동작들을 보면서 우리는 감탄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액션영화들은 이 무용을 하는 듯한 몸을 폭력과 연결시켜 미학화한다. 느와르의 탄생이다. 타란티노의 <킬빌>이나 워쇼스키의 <매트릭스> 같은 영화는 모두 이 몸의 느와르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많은 액션영화들은 아름다운 몸을 차용해 폭력적인 장면, 상황을 정당화하고 있다. 멋진 동작 하나를 보면서 우리는 빠져든다. 그러면서 저들이 왜 저렇게 싸우고 있는지조차 생각하지 않게 된다. 이것이 몸이 무기가 된 이유이다.

아름다운 몸을 탓하지 말라
성찰은 몸에서 나오는 게 아니고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달라이라마의 종교에 대한 성찰은 우리 몸을 아름답게 한다. 이연걸은 이제 그 몸의 차원을 보다 내적인 곳으로 끌어들인 것 같다. 그는 이제 나이들었고, 찍을만큼 많이 액션영화도 찍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젊을 때 고통은, 육체적 측면이 컸지만, 나이 들수록 마음의 고통이 커졌다. 마흔이 가까워오자 비로소 내가 처한 고통을 ‘객관화’하기 시작했다. 어려움은 바깥에서 주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그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름다운 몸을 탓하지 말자. 그 몸을 폭력으로 내모는 수많은 사회적 모순들과, 그 몸을 전장으로 내모는 국가적인 폭력을 탓하자. 그리고 마음을 가다듬자. 몸은 아름답다.

가벼운 너무나 가벼운

윤석호 PD의 <봄의 왈츠>가 왈츠풍의 클래식이라면 표민수 PD의 <넌 어느 별에서 왔니>는 코믹하고 경쾌한 스타카토풍의 소품이다. <봄의 왈츠>가 하나의 운명적인 서사시라면 <넌 어느 별에서 왔니>는 쿡쿡 대며 웃다가 눈물이 나는 순정만화이다.

<봄의 왈츠>의 시작이 청산도의 바다를 잡아, 섬에 갇혀 점점 섬이 되어가는 한 사내의 어린시절을 그렸다면, <넌 어느 별에서 왔니>는 강원도 오지 첩첩산골에서 다시 만나는 과거의 아우라다. <봄의 왈츠>의 주인공들이 과거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듯이, <넌 어느 별에서 왔니>의 김래원 역시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교통사고로 애인이 죽은 것. 하지만 이 드라마에서 상처를 다루는 방법은 <봄의 왈츠>와 같은 정공법이 아니다. 상처를 보여주고 그 기저의 감성을 갖고 다음의 드라마를 엮어간다기 보다는, 상처를 숨기고 살아가면서 언뜻언뜻 보이는 상처의 모습으로 드라마를 엮어간다. 따라서 드라마의 힘은 <봄의 왈츠>와 <넌 어느 별에서 왔니>가 서로 다르다. 전자는 과거의 상처에 힘의 근원이 있고, 후자는 현재와 미래에 어떻게 될 것인가에 그 힘이 있다.

유명한 영화감독인 김래원은 뮤직비디오 촬영차 산골로 들어가고, 그곳에서 죽은 애인과 똑같은 정려원을 만난다. 잘 나가는 영화감독과 시골소녀의 만남. 어딘지 모르게 삐걱거릴 것 같은 그 만남은 표민수 PD 특유의 만화적 구성으로 시종일관 웃음을 터트리게 한다. 표민수 PD는 한 공간에 이질적인 신분의 남녀를 집어넣고 그 톡톡 튀는 대결구도를 잘 그려내는 감독이다. <풀 하우스>에서 비와 송혜교의 만남을 기억하는 시청자라면 김래원과 정려원의 만남 또한 익숙하다. 이질적인 만남을 부드럽게 연결시키는 것은 장소와 유머다. 우여곡절 끝에 정려원의 집에서 민박을 하게 되는 김래원의 모습은 저 도시에서 잘나가던 PD가 시골집에서 얼마나 무력한가를 보여주면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반면 정려원은 시골소녀지만 그 시골에서는 김래원을 능가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겠지만 후에 정려원이 도시로 왔을 때 정반대의 상황을 연출하는데 고스란히 활용될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한 설정은 만화적인 화면 배치를 통해, 풋풋한 동화같은 느낌을 던져주면서 동시에 신분이 다른 남녀의 대결양상은 물론이고, 자연스러운 관계의 끈을 만들어낸다. 표민수표 드라마의 공력이다. 하지만 이 가벼운 이야기와 경쾌한 농담은 동시에 그 기저에 있는 캐릭터들의 무거운 아픔이 전제되어 있기에 힘을 발한다. 이것은 순정만화 속에 심각한 표정의 주인공들, 그리고 그 옆에서 우스워죽겠다는 듯이 키득대는 망가진 캐릭터가 공존하는 풍경과 같다. 요는 ‘뭐 그렇게 심각하게 폼을 잡냐. 누구는 안 아픈 줄 아냐.’는 식의 이야기다.

정려원의 캐릭터는 아마도 우리에게 익숙한 김삼순의 모습을 닮아있다. 시골에서 도시의 잘 나가는 PD, 김래원에게 한 방 먹인 정려원은 이제 도시로 와서 김래원에게 한 방 먹을 것이다. 하지만 정려원이 누군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다. 촌스러움으로 힘으로 맞서나가는 그녀의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될 것이다. 이 드라마는 사랑이라는 표면적인 달콤함을 바르고 있지만, 달라진 상황 속에서 그걸 헤쳐나가는 정려원의 모습이 관건이다. 물론 현재지향적인 표민수 PD 특유의 톡톡 튀는 대결구도가 흥미를 제공한다.

<봄의 왈츠>의 구도는 어린시절의 우화가 만들어낸 반면, <넌 어느 별에서 왔니>의 구도는 산골오지에서 김래원이 정려원과 만나 벌이는 해프닝이 차지한다. 전자가 어린이를 내세웠지만 어른들의 드라마를 보여준 반면, 후자는 어른들이 나오지만 어린아이들 같은 대결구도의 드라마를 연출한다. 전자가 인파이터로 첫주먹을 날렸다면, 후자는 변칙복싱으로 대응했다. 첫 대결은 1:1 무승부다. 하지만 본격적인 대결은 다음주부터가 될 것이다. <봄의 왈츠>의 재하는 죽은 걸로 알고 오랫동안 가슴에만 묻어왔던 은영을 만나러 달려갔고. <넌 어느 별에서 왔니>의 정려원과 김래원은 본격적인 대결에 들어섰다. 이제 드라마의 구도는 완성되었고, 2라운드의 흥미진진한 전개가 시작될 것이다.

<하늘이시여>, 그 하드코어 세상이 말해주는 것들

아이들 성추행 사건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그걸 막는 법을 만들어야할 국회의원이란 사람은 여기자를 성추행하고 뒤늦게 문제가 커지자 가게주인인줄 알았다는 망언을 해대는 세상이다. 할 수만 있다면 “하늘이시여!”하며 기도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다. 드라마 <하늘이시여>에서 악마소굴 같은 곳에 있는 딸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친엄마 한혜숙의 마음이 그랬을까?
사회나 드라마나 TV 속 네모난 세상 속에서 보여지는 것은 늘 아름다운 세상만은 아니다. 때로는 추악한 모습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여지없이 사회문제에 무관심했던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끈다. 그 추악한 모습은 너무나 자극적이고 충격적이어서 일종의 안전장치를 채우기도 한다. 하지만 때로는 가감 없는 방송이 등장해 시청자들의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놀라운 것은 방송사가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런 방송에 시청률이 높다는 것이다.
물론 사회적인 이슈나 정치적 사건들을 만든 장본인들에게 의도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혹자들은 정치적 사건들 속에도 음모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번 최연희 의원 성추행 파문을 각종 현안에 대한 물타기로 보는 민노당의 입장이 그렇다). 하지만 그런 내용의 뉴스들을 내보내는 ‘편성’에는 역시 의도가 숨어있다. 공정함이 생명이라는 뉴스에도 공공연한 선정성 논란이 이는 마당에 드라마는 오죽할까. 시청률 확보라는 의도로 오랜 세월동안 수많은 노하우를 축적한 드라마는 그 유혹이 너무나 가깝다. 이것이 지나친 감정의 하드코어가 범람하는 드라마가 탄생하는 이유이다.

드라마의 하드코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함께 드라마를 봤다. 드라마 속에서는 시어머니에게 대드는 며느리의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보기에 민망한 며느리가 채널을 돌리려고 하는데 시어머니가 말했다. “내가 언제 저 늙은이 저렇게 될 줄 알았지. 속이 다 후련하다!”
현실의 시어머니들이 이렇게 드라마 속에서 며느리의 입장을 대변하는 이유는 무얼까. 답은 명확하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드라마 속의 인물에 감정이입되는 대상도 나이가 많은 건 아니라는 것이다. 예컨대 아줌마들도 <하늘이시여>를 보며 자경의 입장 속으로 빠져든다. 그렇다면 자경의 친엄마나 새엄마, 강예리, 왕모 등은 어떨까. 자경보다는 덜 하겠지만 역시 감정이입의 대상이 된다. 아줌마들은 드라마라는 게임의 틀 안에서 그 무수한 인물들 속에 자신을 집어넣으며 때론 웃고 울며 때론 분노하고 때론 통쾌함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이 옷을 벗겨놓은 날 것의 드라마가 가진 본능적인 속성이다. 그러니 드라마 속 인물에 대한 평이 현실에 대한 관점과 다르다고 해서 놀랄 것이 없다. 그것은 감정의 게임이니까. 게다가 이건 그냥 보면 보는 것이고 보지 않으면 마는 드라마가 아닌가.

감정의 게임
놀라울 정도의 수위를 넘고 있는 선정성 시비에도 불구하고 계속 앞으로 전진할 수 있는 드라마의 힘은 바로 이 감정의 게임에 있다. 차라리 불륜이나 이복남매의 사랑같은 근친상간은 이제 입방아거리가 더이상 되지 못한다. 아들을 요정에 데려가 술판을 벌이는 아버지가 등장하고, 심지어는 술 취한 아들에게 여자까지 소개시켜 준다. 아내의 친구와 밀회를 즐기는 남편, 혼자 된 형수를 사랑하게된 시동생, 한 남자를 뺏고 빼앗는 싸움을 벌이는 자매, 친자매와 친형제 사이에 엮이는 결혼, 남자 고교생과 교실에서 키스하고 여관을 드나드는 여교사....
한 측면에서보면 도저히 이해안되는 상황들도 양자의 측면에서 보면 이해가 된다. 드라마는 이 ‘상대방 입장되어보기’ 감정 게임이라는 편리한 틀을 가지고 사람들의 금기를 건드린다. 신문기사에서 보면 혀를 찰 내용도 드라마로 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글쎄 그 애가 그랬다니까?” “아! 그래서 그런 거였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내용 자체보다도 이런 감정의 게임을 주로 하는 드라마들은 사실 대부분이 앞으로 전개될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심지어는 첫회에 모든 것을 알게되는 드라마도 있다. 달라지는 것은 주인공의 직업과 배경설정 등이다(이것도 그다지 다르지 않은 걸 보면 드라마 작가들만의 공식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채널을 고정시킨다. 이것은 빤히 다 아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보는 하드코어와 다를 바가 없다. “이번 회에는 임채무가 자경이 친엄마를 만난대.” 다 알고 있지만 시청률은 올라간다. 왜 우리는 다 아는 내용을 또 확인하고자 하는걸까.

본격 하드코어 드라마 <하늘이시여>
우리에게 하드코어 드라마는 낯선 것이 아니다. 이른바 결혼을 지고선(至高善)으로 주장하는 짝짓기 드라마, 그런 드라마에 늘 등장하는 백마탄 왕자들 혹은 공주님들, 그들이 만나 사랑하는 신데렐라 혹은 온달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불륜 등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드라마의 단골메뉴들이다. 이들이 엮어가는 닭살 애정과 감정 긁기의 하드코어에 우리는 번번이 빠져든다. 관성이자 중독이다.
<하늘이시여>는 하드코어 드라마의 이런 모든 요소들을 빠짐없이 갖고 있다. 누가 왕모와 결혼할 것인가가 이 드라마의 핵심이고, 물론 왕모는 현대판 백마탄 왕자이며 자경은 완벽한 신데렐라다. 딸이면서도 결혼을 반대하고 돈을 벌어오라는 못된 계모까지 갖고 있으니 금상첨화다. 하드코어 드라마가 갖는 중독성은 모두 갖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핍박받는 자경에게 동화되면서, 잘난 왕모가 집안 좋은 강예리를 차고 비천하기까지한 자경에게 지극정성하는 장면에 통쾌함을 느낀다.

드라마를 이끄는 힘은 분노이다
강한 중독은 강한 분노에서 비롯된다. 분노를 만드는 인물들은 거의 악마와 같은 수준이다. 자경의 새엄마는 “네가 결혼하면 돈 벌어다 줄 사람이 없으니 결혼 못시킨다”는 말도 안되는 논리로 시청자들의 감정에 상처를 낸다. 가해자가 말도 통하지 않으니 시청자들의 상처입은 답답한 감정은 폭발할 것만 같다. 잘난 자기를 찼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운 강예리는 “너까짓게..”하면서 자경의 머리끄댕이를 잡아당긴다. 자경에게 동화되어 극중 그녀가 받은 상처를 고스란히 갖고있는 시청자들은 자경을 보호해줄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갈구한다.
보통의 하드코어 드라마에서 그 보호의 역할은 왕자님이 맡는다. <하늘이시여> 역시 마찬가지지만 이보다 더 강력한 것이 들어있다. 그것은 친엄마이다. 친엄마가 가진 사랑이 왕자님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왕자님의 엄마가 친엄마이다. 친 딸을 며느리로 들인다는 비상식적인 설정에 대한 시청자와 드라마와의 암묵적인 계약은 바로 여기서 성립된다. 왕자에 친엄마의 보호막이 있으니 자경이 처한 지금의 현실은 그래도 살만하다. 그리고 앞으로는 저 악마들에게 보복을 할 수 있다. 분노를 가진 시청자들은 그 가해자들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한다. 또한 한편으로는 사실이 밝혀지는 것을 불안해한다. 시청자들의 분노와 불안이 극에 달하면 달할수록 시청률은 치솟아오른다.

출생의 비밀이라는 감정의 시한폭탄
여기에 덧붙여지는 출생의 비밀이라는 장치는 두 가지를 가능케 한다.
그 첫번째는 자극적인 설정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숨겨진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자 “알고보니 배다른 남매였더라”라는 설정은 드라마 속에 근친간의 사랑을 가능케한다. 게다가 그것이 드러나는 순간,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는 운명이 된다(요즘은 법안이 바뀌어 이루어질 수도 있는 사랑이 되었지만). 가을동화의 준서와 은서가 그랬고, 피아노의 한재수와 이수아가 그랬으며, 진주목걸이의 김민종, 김유미, 아름다운 죄의 조은숙, 정준호, 최근 천국의 나무에서는 신현준과 최지우가 그러면서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다.
두 번째는 출생의 비밀이 앞으로 도래할 시한폭탄 같은 파장을 예감케한다는 것이다. 이로인해 시청자들은 그간 쌓여온 강한 분노 혹은 억압에 대한 융단폭격을 기다리게 된다. ‘드러난 사실’로 그간의 관계들은 모두 역전되고 해소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된다. 하지만 당해왔던 오랜 시간에 비해 그 보복의 순간은 아주 짧다. 드라마는 해소와 함께 끝나는 것이기에, 사실이 드러나는 그 순간은 종영을 의미한다. 해소는 환상이다. 시청자들을 TV앞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끊임없는 가해이다. 적당한 시기에 드라마 속 악마들은 손톱을 드러내 아물려고 했던 상처를 긁어댄다. 시원한 듯 하지만 그 상처는 계속해서 덧나게 마련이다.

하드코어 세상, 하드코어 드라마
드라마가 세상을 반영한다는 것은 그것을 비판적으로 보았을 때에만 해당되는 말이다. 어느날 아침 출근길에 갑자기 다리가 끊어지고, 저녁 찬거리 사러나간 백화점이 무너지고, 길을 가다가 가스가 폭발하고, 지하철을 탔는데 누군가 불을 던지는 사회다. 아이들 연속 성추행 사건은 정치인들의 하드코어 취중난동 시리즈들에서 이미 예견된 바다. 최연희 의원에서 정점에 이른 이 시리즈는 술자리에서 욕설을 해 구설수에 오른 주성영 의원에서부터, 맥주병 투척사건의 곽성문 의원, 이어지는 박계동 의원의 맥주 투척사건, 묵사마 정형근 의원의 호텔방 소동으로 이어지는 정치드라마다. 대사의 수준은 DJ 치매노인 발언으로 극에 달한 ‘막말’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정치인들이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적어도 TV는 그런 장면들을 보여준다.
우리는 왠만한 자극과 충격에는 둔감해져 있다. 정치드라마 속에서 정치인들이 벌이는 수많은 하드코어적 행태들은 우리에게 극도의 분노를 만들어낸다. 들은 늘 그런 거니까”, 하는 포기가 잇따른다. 포기 뒤에는 무관심이다. 무관심 속에 남는 것은 관성 밖에는 없다. <하늘이시여>는 작중인물들이 만들어내는 분노, 새엄마는 늘 나쁘고 친엄마는 늘 구원이라는 포기, 그럼으로 해서 남는 감정의 하드코어들에 의한 관성이 뒤범벅되어 나타난다.

드라마의 본성과 이야기하는 방식
<하늘이시여>가 갖는 중독성은 자극적인 관계설정과 시청자의 중독을 부추기는 거친 대사들, 그로인해 시청자들이 갖는 작중인물과의 동일시에서 비롯되는 분노 그리고 보복심리에서 비롯된다. 비정상적인 관계들(친딸을 며느리 삼으려는 어머니, 호적상 삼촌과 사랑에 빠진 조카)은 출생의 비밀에 덧대진 자극적인 관계설정의 산물이며, 분장사 비하발언이 계속된다거나 양딸의 결혼을 막기 위해 삼촌과 사랑에 빠졌던 딸의 과거를 예비 시어머니에게 폭로하는 새엄마와 같은 비상식적이고 극단적인 에피소드들은 분노를 부추기기 위한 전략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는 드라마다. 시청률이 지고선이 된 시대에, 임성한 작가가 “자신의 어머니가 즐거워할만한 드라마를 쓴다”고 말했듯이 재미있으면 됐지 뭘 바라냐고 하면 할 말은 없다. 드라마가 꼭 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할 필요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사실 위의 얘기들은 비단 <하늘이시여>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라, 대부분의 드라마가 갖는 전략들이다. 이것은 고대 소포클레스의 희곡에서부터 셰익스피어를 거쳐 지금까지 내려오는 극(drama)의 본성이다. 이 힘에 의해 우리는 드라마는 물론, 연극, 영화의 재미를 느끼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시청률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지만 모두가 알고 있는 설정, 대사, 흐름을 답습하면서 중독성 강한 하드코어적 진행으로만 간다면 자칫 드라마의 퇴행을 가져올 수도 있다. 요즘 유행처럼 번지는 과거 드라마들의 리메이크가 이 퇴행적인 양상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이런 하드코어식의 드라마가, 많은 완성도 높은 드라마들을 보는 시청자들의 입맛을 변질시키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소프트코어 드라마를 기다리며
<하늘이시여>를 가지고 임성한 작가의 전작들, <인어아가씨>, <왕꽃선녀님>과 비교하면서 “원래 그 작가는 그렇다”고 치부하는 건 드라마 기획자들이 바라는 바이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임성한 작가는 작가라기보다는 드라마가 갖는 힘을 정확히 알고 있는 장인이라고 할만하다. 50부작을 60부작으로, 60부작을 75부작으로 마음대로 늘릴 수 있는 작가는 흔치 않을 것이다. 드라마 전쟁이라고 할만한 방송3사의 각축전 속에서 좀더 높은 시청률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고집스런 작가보다는 이런 전략에 능숙한 장인이 필요하다. 요는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의 눈이다. 드라마 기획자들은 모든 기획의 초점을 바로 시청자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가 강한 메시지와 새로운 주제, 형식을 반드시 추구할 필요는 없다. 드라마들이 하는 대부분의 이야기, “윤리적으로, 운명적으로 안되지만 사랑한다는 데 어쩔 것인가?”하는 정도의 주제라도 좋다. 문제는 완성도이다. 적어도 소프트코어 드라마를 기다리는 것은 그것이 시청자들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드코어가 범람하는 세상 속에서 노희경 작가의 <굿바이 솔로>가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은 분노가 아닌 화해로, 포기가 아닌 기대로, 강한 자극에 벼려진 시청자의 눈을 적시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늘이시여! 이제 봄을 맞아 사람들이 하드코어를 더이상 바라지 않는 세상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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