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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끼'의 원작 만화가인 윤태호 작가를 만났습니다. 처음 보는 자리인데도 이미 몇 번 만난 듯한 익숙함과 편안함이 있었죠. 먼저 서로 들고 있는 아이폰으로 범핑을 하면서 어떤 동지의식 같은 것을 갖게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윤 작가와 같은 해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그런 익숙함을 만들어주었죠. 우리는 거의 비슷한 경험을 하며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지내왔다는 그 바탕에서 쉽게 '이끼'라는 작품의 공감대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이끼'에 70년대 아버지 세대의 아픔이 묻어난다는 저의 말에 윤태호 작가는 당시 그토록 커보였지만 어느새 세월에 깎여 점차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버지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 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들이 겪은 그 힘겨움이 새록새록 느껴진다고. '이끼'에서 유목형(영화에서는 허준호)이라는 주인공 유해국(박해일)의 아버지는 그런 당대의 시대적 고통을 잘 말해주는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유목형이 월남전에서 겪은 트라우마를 벗어나고자 구원에 몰두한다는 사실이 그걸 말해주죠. 저는 이 '이끼'라는 작품이 결국 이 아버지 시대의 아픔이 마치 지금은 사라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대로이고, 그 부조리함과 숨겨진 폭력성을 그 아들인 젊은 세대 유해국이 파헤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포스터에서 유해국이 손에 손전등을 들고 어두운 터널 같은 곳을 비추는 그 장면은 따라서 지극히 상징적입니다.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라는 개념은 마치 중세시대의 어둠에 맞서는 르네상스의 빛 같은 뉘앙스를 풍기고, 이것은 그대로 그 상황이 반복되는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시간을 잘 표상해냅니다. 짐승의 시간에서 이성의 시대로 넘어오는 그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죠. 그 어둠의 마을 한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이장(정재영)의 집이 마치 파놉티콘 같은 인상을 주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집단적인 통제의 시대에 개인이 말살되던 그 과정을 '이끼'라는 작품은 세세한 스토리와 탁월한 인물의 심리묘사로 잘 그려냈습니다. 여전히 그 집단적인 통제의 기제가 남아있는 마을에 들어간 한 개인 유해국이 이 마을의 분위기를 이상하고 낯설게 여기는 것은 이 마을 공간의 시간이 그 과거에 그대로 멈춰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윤태호 작가에게 집단과 개인이 어떤 의미인지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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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작업에 어느 정도 참여했기에 혹 영화에 앞으로도 발을 담글 생각은 없느냐고 넌지시 묻자 윤태호 작가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차라리 그 에너지로 만화를 그릴 것입니다." 창작에 있어서 영화와 웹툰의 차이는 그 주체가 집단이냐 개인이냐로 나누어질 것입니다. 그 작업의 차이는 어떤 것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습니다. 윤태호 작가는 웹툰 같은 작업은 자신의 창의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마음껏 풀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고, 영화 같은 집단 작업은 더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끌어모아야 한다는 점에서 좀더 대중적인 소통을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했죠.

물론 영화가 가진 집단 작업은 나름의 창의적 방식이 구현되지만, 윤태호 작가가 생각하기에 웹툰 같은 1인 작업이 창의적인 작업에는 훨씬 더 도움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비용도 적게 들기 때문에 그만큼 리스크가 적다는 장점도 있죠. 따라서 영화 같은 집단 작업이 웹툰이나 소설 같은 개인작업과 상보적인 관계를 가져야한다는 얘길 했습니다.

사실 이건 '이끼'라는 영화가 말하는 개인과 집단이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집단에 매몰되서도 또 개인에 매몰되서도 곤란한 개인적인 존재이면서도 사회적인 존재죠. 짧은 시간이지만 윤태호 작가와의 대화는 제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물론 '이끼'라는 작품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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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사건들이 거의 매일 뉴스로 방영되는 요즘, '파괴된 사나이'는 스릴러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공포물에 가까운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어느 날 다섯 살 짜리 혜린이가 유괴되고 그 후로 신실한 목사였던 영수(김명민)는 믿음을 버리고 파괴된 삶을 살아갑니다. 아내인 민경(박주미)은 희망을 놓지 못하고 계속 딸을 찾아다니다가 사고를 당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 한 통화가 걸려오고 죽은 줄만 알았던 딸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유괴범 병철(엄기준)은 8년 간을 감금해놓고 키워온 영수의 딸을 놓고 거래를 제안합니다.

영화는 저 스릴러의 한 장을 세웠던 '추격자'와 '그 놈 목소리'를 이어붙인 느낌이 나지만, 디테일은 상당히 다릅니다. 일찌감치 범인을 드러내놓는 이 영화는 미스테리를 벗어내고 딸을 찾는 아버지와 범인 사이의 팽팽한 대결에 집중합니다. 무엇보다 '소리'에 집착하는 범인은 잘만 살렸다면 꽤 괜찮은 아우라를 가질 수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목사였던 영수의 설교(성서에는 말씀이라는 청각적 기호가 신적인 것으로 표현되죠)와 범인의 음에 대한 집착. 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제 생각이지, 영화에서는 그게 잘 드러나진 않습니다. 도망치고 추격하는 장면들은 꽤 긴박하지만 또한 관습적이기도 합니다. 어디선가 많이 봐왔던 장면들이 반복되죠.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조금씩 차별화시켜주는 것은 김명민의 연기입니다. 아이를 잃은 후의 아버지의 변화(여기에는 목사에서 막 사는 의료기기업자로의 변화도 포함됩니다)는 꽤 디테일하게 그려집니다. 무표정하면서도 어딘지 냉소적이고,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여전히 남은 죄의식이 담겨진 그 얼굴. 역시 김명민이기 때문에 제대로 소화되는 그런 역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절박함은 작금의 현실 속에서 매일 벌어지는 성폭력 사건들을 바라보는 아버지들의 마음을 그대로 담았습니다. 분노, 적개심, 죄의식, 무력감 같은 것이 거기에는 뒤범벅되어 있죠. 어찌된 세상인지 이제는 불안한 마음에 아이를 데리러 학교 입구에 서 있는 것조차 다른 학부모들의 의심스런 눈총을 받는 입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시대의 아버지들은 그렇게 불안한 사회 속에서 학교 입구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자신의 아이를 기다리는 그런 처지가 되어 있죠.

'파괴된 사나이'는 바로 이런 현실 때문에 스릴러로 즐길 수 없는 영화가 됩니다. 영화가 영화가 아니라 현실의 반복일 때, 우리가 어떻게 그 영화를 즐길 수 있을까요. 게다가 이 영화는 꽤 디테일하게 아이가 당하는 폭력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영화관을 찾는 아버지들에게는 굉장한 트라우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파괴된 사나이'는 꽤 사회에 대한 불신감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우리네 스릴러 영화들이 다 그렇죠. '살인의 추억'에서도, '추격자'에서도 경찰들은 도대체 뭘 하기 위해 그런 제복을 입고 있는 존재들인지 알 수 없게 그려집니다. '파괴된 사나이'에서도 결국 이 범인과의 사투 끝에 딸을 구하는 것은 당사자인 아버지입니다. 즉 아버지를 구원해준 것은 종교도 아니고 사회의 따뜻한 시선도 아니며, 정의 또한 아닙니다. 바로 자신입니다.

괴로운 건, 이 공권력이 이런 끔찍한 범죄에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 역시 영화 속의 사실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최근 공공연히 벌어지는 '고문 경찰'의 이야기를 뉴스를 통해 듣습니다. 그럴 볼 때마다 범인은 잡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럼 진짜 범인은? 아마도 저 거리를 활보하고 있겠지요.

'파괴된 사나이'가 공포물이 된 것은 물론 의도된 연출 탓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영화적 현실이 아니라 실제 현실과 너무나 맞닿아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 땅의 아버지들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공포를 느낄 것입니다.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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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보다가 박수치기? 어린 시절에는 그런 경험이 많았습니다. 아마도 영화가 여전히 마술적인 어떤 것으로 여겨졌던 탓이겠지요. 영화 속 장면이 마치 실제라도 되는 듯 박수를 쳤던 기억은 생생합니다. 나이들어서 그런 경험은 별로 없습니다. 그만큼 영화는 객관적인 가상놀이가 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스포츠는 '각본없는 리얼 드라마'라는 점에서 놀이를 바라보면서도 박수를 치는 몇 안되는 종목(?)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아니면 월드컵 시즌이라는 특수한 시기였기 때문이었을까요. '맨발의 꿈'을 보고 있는데, 이제는 잊혀져 가는 그 박수소리가 다시 들려왔습니다. 와- 하는 함성소리와 함께 말입니다. 후반부 클라이맥스에서 서로 반목하던 두 친구가 합심해 골을 넣는 장면에서입니다. 우리는 아마도 잠시 축구경기를 보고 있다고 착각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월드컵 내내 그 골에 집중하는 훈련(?)을 받아서인지 마치 조건반사처럼 영화를 보면서도 그랬는지 모르죠.

중요한 건 그 골이 들어가는 순간의 기분이 박지성 선수가 두 명의 그리스 선수를 제치고 골을 넣는 순간이나, 박주영 선수가 기가막힌 프리킥으로 골을 넣던 그 순간의 기분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맨발의 꿈'은 물론 작위성이 후반부에 좀 등장하지만 그래도 심리적인 공감대를 계속 유지해가는 힘이 있는 영화입니다. 아이들이 골을 넣는 장면에서 박수가 터질 정도로 말이죠.

동티모르의 아이들은 가난하지만 그토록 아름다울 수가 없습니다. 그 순수함 속으로 축구화를 팔겠다고 들어간 원광(박휘순)은 차츰 장사보다는 이 '가난하다고 꿈도 작게 꿔야 한다'고 강요받는 아이들을 더 꿈꾸게 해주고 싶어집니다. 그것이 어쩌면 그 먼 곳까지 날아온 자신의 존재이유를 증명해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전형적인 스포츠 영화들의 그것과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적당한 마이너 감성과 도대체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낙천적인 시선, 그리고 뜻이 있는 자에게는 길이 있다는 지극히 고전적인 스토리.

동티모르의 가난한 아이들이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제 30회 리베리노컵 국제유소년축구대회에 나가 역전승을 거두는 이야기는 그것이 실화를 그대로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감동을 줍니다. 하지만 영화 내내 더 큰 울림을 준 것은 이 유소년축구대회에 대한 동티모르 국민들의 열렬한 응원장면입니다. 우리나라였다면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이 자그마한 유소년축구대회에 대한 그들의 폭발적인 응원은 어디에서 나왔을까요. 그 작은 것에서도 큰 희망을 찾아내려 하는 그들. 제가 기꺼이 그 영화관 속에서의 박수행렬에 동참한 것은 아마도, 내전과 오랜 가난으로 인해 갖게된 동티모르인들의 깊은 절망감을 그 열렬한 응원 속에서 거꾸로 읽으면서 마음 한 구석이 뜨거워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맨발이지만 여전히 꿈은 남아있었습니다. 영화 보면서 박수치시고 싶으신 분, 혹은 월드컵에 어딘지 미진함이 남으시는 분은 충분히 공감할 영화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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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맨발의 꿈" 국가대표를 뛰어 넘는 감동의 축구영화

    Tracked from 모과 향기  삭제

    나는 2009년도 최고의 영화는 "국가 대표"라고 생각한다.실화이며 감동적이고 해피앤딩이기 때문에 영화를보는 내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행복하게 봤다. 2010년에 최고의 영화는 아마도 "맨발의 꿈"이 될 것 ..

    2010/07/01 20:40
  2. 맨발의 꿈 - 스포츠가 지닌 가치에 눈뜨다

    Tracked from 페니웨이™의 In This Film  삭제

    세계 전역을 들끓게 한 월드컵도 어느덧 중반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한국은 원정사상 첫 16강이라는 1차적인 목표를 달성했고 비록 8강의 문턱에서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축구를 보는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 순간들이었습니다. 사실 내가 이기고 남을 떨어뜨려야 위로 올라갈 수 있는게 스포츠 경기라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스포츠의 참맛은 남을 이기는 데 있는게 아니라 모두가 함께 즐기는 것에 있다고 말이지요. 전 세계가 주목하..

    2010/07/01 22:26
사실 명실공히 한국방송사극의 개척자인 신봉승 작가에 대한 저의 기억은 좀 엉뚱합니다. 오래 전 잡지사에서 일할 때, "조선의 임금들은 왜 단명했을까"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한 적이 있어서죠. 그 글을 읽으면서 저는 이 작가의 임금에 대한 새로운 식견에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조선의 임금들은 왜 단명했을까요? 지나친 격무 때문에? 매일 반복되는 신하들과의 줄다리기 때문에? 글쎄요. 의외로 답은 간단했습니다.

첫째. 운동을 안한다. : 운동할 일이 별로 없었겠죠. 행동반경도 궁이 전부였으니.
둘째. 섹스가 잦다. : 왕은 무치라고 해서 아무 데서나 원하면 성관계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셋째. 고단백의 음식을 많이 먹는다. : 산해진미를 원하는 대로. '대장금'이 증명해주죠.

새로 시작한 사극, '동이'를 보면서 그 숙종(지진희)의 깨방정을 보면서 저는 제일 먼저 이 신봉승 작가가 썼던 그 글을 떠올렸습니다. 특히 동이(한효주)와 숙종이 도망치는 장면에서 "이렇게 멀리 달려본 적이 없다"며 헉헉대는 숙종을 볼 때, 저게 '리얼이다'라고 생각했었죠.

하지만 최근에 신봉승 작가가 조선일보와 한 인터뷰를 읽고는 어리둥절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인터뷰에서 신봉승 작가는 '동이'에 대해 얘기하면서 "우리 사극에는 국가적 맥락이 없다"면서 "적어도 사극이라면 나라의 나아갈 방향을 저변에 까는 역사인식이 기본"이며 "이런 역사인식은 정확한 사실과 적절한 해석이 조화됨으로써 나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덧붙여 숙종을 '깨방정'과 연결시킨 것에 대해서 그것은 "역사인물을 친근화"하는 것이 아니고 "위엄과 카리스마를 갖춰서 숙(肅)이라고 했다는 기초적인 사실도 모르기 때문에 왜곡된 군주상이 나오는 것"이라고 했죠. 나아가 신 작가는 "요즘 사극들은 역사 속의 이름만 빌려왔을 뿐 한편의 활극이나 사랑타령일 뿐"으로 "재미만 추구"하며 "그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제작진은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밝혔습니다. (전문 : [조선인터뷰] '한국 방송사극의 개척자' 신봉승 작가)

신봉승 작가가 우리네 사극에 미친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조선왕조실록'이 완전히 한글화되지 않았던 시절에 신 작가는 손수 그 많은 책을 독파하면서 우리 사극의 밑거름을 쌓았죠. 하지만 민족주의 시대도 아닌 지금, 한 편의 드라마를 통해 국가적 맥락을 이야기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이라 생각되었습니다. 그는 '서울, 1945'가 KBS가 좌파를 미화하고 건국대통령을 비하하는 작품이라 폄하했고, 반면 일본 NHK에서 방영한 '언덕 위의 구름(명치유신기 새나라 건설을 위해 몸바친 이들을 재조명한 작품이라고 합니다)'같은 '국가맥 맥락에 기여'하는 작품을 높이 평가했죠. 이런 시선으로 현재 '동이'에서의 깨방정 숙종이 주는 대중적인 공감을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신봉승 작가가 말하는 현 사극들의 '정사(正史)를 훼손하는 행위'는 수차례 논의가 되어진 것들이지만 '사극이 역사를 대변한다'는 그 인식이 바뀌어진 현재 그다지 의미있는 해석은 아닙니다. 사극은 과거 사(史)에 더 쏠렸던 무게중심을 극(劇)쪽으로 옮겨놓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사극을 역사로 보는 것은 그 자체로 한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최근 들어 등장하고 있는 역사에 대한 대중들의 새로운 인식에도 바람직한 일입니다. 역사란(특히 정사란) 기득권자의 시선일 뿐, 당대를 살아간 수많은 민초들의 이야기들을 모두 대변하지 못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현재의 사극은 과거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초점을 맞춥니다. 즉 과거의 이야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과거를 재해석하는 것이죠. 이 상황에서 역사의 실제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들이 전개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사극 자체가 역사를 대변하는 것도 아니고,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라는 인식 위에 서 있기 때문에 수용됩니다.

깨방정 숙종을 보면서 물론 거기에는 어느 정도의 극적 이야기 구성을 통해 만들어진 과장이 있겠지만 어쩌면 저게 실제 모습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기도 합니다. 숙종이 낮은 자들에게 털털한 모습으로 손을 내밀고, 또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정쟁만을 일삼는 중신들에게는 지엄하게 꾸짖는 그 상반된 태도는, 숙종이란 왕이 얼마나 자신감이 넘치는 인물이었던가를 에둘러 말해줍니다.

역사가 하나의 시각이라면, 인간적으로 고민하고 누군가를 가슴 뛰게 사랑하는 그런 왕이 아니라, 어떤 면으로 보면 신적으로 이미지화된 엄숙하고 돌 같은 왕을 우리는 더이상 바라지 않습니다. 절대왕정의 시대는 이미 지났고 인간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존엄한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극이 점점 역사의 엄숙주의의 박제에서 빠져나와 다양한 상상력으로 살아움직이는 것은 어찌보면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힘겨웠던 민주화 운동의 결과로서 우리는 이제 다양성의 사회 속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하지만 그 민주화 운동 역시 아무리 무거운 역사라고 하더라도 이제는 좀더 작고 일상적인 삶 속으로 스며들어야 할 것입니다. 마침 올해 처음으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에서는 5월10일부터 6월15일까지 <제1회 민주주의 UCC 공모전>http://civicedu.tistory.com/15을 가진다고 하는데요, 그 취지를 들여다보면 역시 거창한 것이 아닌 일상생활 속에서의 민주주의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참여해 자신만이 느꼈던 작은 민주주의를 피력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어떻게 사람이 한 가지 모습으로 규정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왜 우리가 생각하는 임금은 늘 한 가지 이미지로만 굳어져서 우리에게 보여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양성이 민주화의 한 잣대로 제시되는 현 시대에 어울리는 진정한 이해와 소통이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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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가 우스운가? 슬프다

블로거의 시선 2010/05/23 10:38 Posted by 더키앙
사실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를 본 지 시간이 조금 흘렀습니다. 제목이 '하하하'이고 그래서 여름처럼 밝은 웃음을 연상시키는 그런 영화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영화를 보는 내내 저도 꽤 유쾌하게 웃었더랬습니다. 홍상수 특유의 냉소적 시선이 거둬지고 어떤 세상에 도통한 듯한 허허로움이 거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유쾌함은 영화를 보고 일주일 정도가 흐르면서 조금씩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웃었던 그 순간적인 유쾌함이 조금씩 기억에서 상쇄되어갈 즈음, 그 웃음 뒤편에 숨겨져 있던 허무가 조금씩 얼굴을 내밀었기 때문입니다.

영화감독 문경(김상경)과 영화평론가 중식(유준상)이 만나 막걸리를 마시면서 지난 여름 다녀온 통영에서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그 현재의 장면들은 영화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동영상이 아니고 정지된 사진을 이어붙인 것입니다. 그것도 흑백사진. 그 위로 이들의 대화가 흐릅니다. 그 과거를 짧게 술 마신 자의 특유한 유쾌함을 섞어 단평하는 내레이션은 과거의 한 여름 통영에서 있었던 일로 관객을 인도합니다. 현재를 포착하는 흑백사진과 과거를 포착해내는 컬러 동영상은 실로 아이러니한 대조입니다. 거기에는 우리네 삶에 있어서 선명한 과거라고 여겨졌던 사건들이 사실은 불투명한 현재의 기억에 의지하고 있다는 허무가 깔려 있습니다.

문경과 중식이 통영에서 겪은 일들은 무엇일까요. 문경이 한 것이라고는 관광해설가인 성옥(문소리)을 만난 것이고, 결혼한 중식은 애인 연주(예지원)와 함께 불륜의 한 때를 보내면서 후배이자 시인인 성옥의 애인 정호(김강우)와 술마시고 돌아다닌 것입니다. 사실 이들이 통영에서 서로 얼키고 설키면서 벌이는 이야기들은 홍상수식 자잘한 일상 스케치로 그 내용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닙니다. 중요한 건 그렇게 얼키고 설킨 관계 속에서 벌어진 일들을 현재의 문경과 중식이 각각의 이야기처럼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 막걸리를 마시면서 과거를 얘기하는 그들은 저마다 자기의 관점에서 얘기하고 있을 뿐, 사건의 진짜 본질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죠.

즉 그들에게 벌어진 일상의 사건들은 오리무중입니다. 사건들은 어떤 인과에 의해 벌어지기보다는 그저 불쑥불쑥 솟아나는 본능적인 감정에 의해 일어납니다. 과거를 회고하는 현재의 시점에서의 스토리는 실제 사건이 아니라 인과관계가 부여된 현재적 해석에 불과합니다. 사건은 그저 벌어지는 것이고, 인간은 그 우연히 벌어진 일을 어떻게든 의미화하려 애씁니다. 우리 삶의 일들이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이 벌어지는 일들의 연속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그 절망감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성옥이 관광해설을 할 때, 이순신 장군이 했던 업적에 대해 의문을 던지는 여행객에게 과도할 정도로 흥분하면서 "어떻게 이순신 장군의 행적을 의심할 수 있냐"고 말하는 장면은 우습지만, 한편으로 보면 쓸쓸한 삶의 한 자락을 잡아냅니다. 자신이 하는 일이 의미있는 것임을 확신하면서 살아가지만, 실상 그것이 그렇게 의미있는가 하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리고 그 질문에 딱히 정확한 답변을 해줄 수 없을 때, 그래서 자신의 삶이 사실은 그렇게 의미있는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성옥이 그랬던 것처럼 알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되죠.

시인 정호가 "이 꽃이 뭐냐?"고 계속 질문하면서 "너희는 모른다"고 말하는 장면도 우스꽝스럽지만, 바로 우리가 그의 그런 행동을 우스꽝스럽다고 여기는 그 대목이 쓸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시인은 그렇게 의미화를 통해 우리네 삶의 본질을 꿰뚫어보려 노력하지만 어찌 보면 그것은 세상의 본질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에 대한 절망감의 표현인지도 모릅니다. 문경이 꿈 속에서 이순신 장군을 만나는 장면 역시 우습기 짝이 없는 장면이지만, 그렇게 꿈 속에서라도 의미화를 꿈꾸는 인간의 삶은 절절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현재의 탁자에 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과거를 이야기하는 '하하하'는 스토리텔링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스토리는 과거를 소재로 해서 의미화가 덧붙여진 형태로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의 삶이 들어가 해석되어 있는 과거란 대단한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저 술자리의 안주거리 정도가 되는 것이죠. 지난 여름의 들떴던 청춘 같은 삶의 이야기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여름이 지난 자리 어떤 술자리에서 가벼운 농담처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것.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하던 어떤 막걸리 자리의 취기어린 기억 또한 빛바랜 사진 속으로 사라진다는 것. '하하하'는 그렇게 그저 의미없이 지나간 과거를 밝은 한 때 여름 날의 유쾌했던 시간으로 반추하려는 안간힘이 우리네 삶이라고 말하는 영화입니다. 유쾌하게 웃고 나면 아련한 슬픔이 남는 건 그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렇게 영화를 본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그 영화를 회고하며 글을 쓰는 저의 이 모습이 영화 속 문경과 중식이 막걸리 한 잔을 곁들여 나누던 그 장면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저 흘러가는 시간처럼 프레임 속에 담겨진 그 영상들을 기억해가며 무언가 의미화를 시키려는 안간힘. 영화감독과 영화평론가 사이에 벌어지는 의미화. 어찌 보면 하하하 웃음이 나오면서도 어찌 보면 슬프기도 한 그 장면.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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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의 내용들이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데 그다지 방해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시는 정말 어려워요!"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에서 주인공 미자(윤정희)는 시쓰기 강좌의 선생님 김용택 시인에게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그녀의 진심이 담긴 말처럼 '시'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것이 본질을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무심하게 흐르기만 하는 강물에서 시작해 바로 그 강물에서 끝납니다. 저 멀리서 강물 위로 무언가 떠내려오는 그 무엇은 차츰 화면 가까이 다가오면서 실체를 드러냅니다. 한 여중생의 시신입니다. 그 시신 옆으로 이창동 감독이 직접 육필로 썼다는 제목, '시'가 나란히 보여집니다. 이 첫 장면은 이 영화의 거의 모든 것을 담아냅니다. 우리는 저 멀리 있어서 그저 그런 풍경으로만 생각해오던, 그래서 김용택 시인이 "여러분은 한번도 본적이 없다"고 말하는 그 풍경의 본질을, 마치 강물처럼 무심하게 흘러가는 이 영화의 영상을 통해 바라봐야 합니다. 미자의 마음을 그토록 괴롭혔던 한 꽃같은 소녀의 속절없는 죽음과, 그 죽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흘러가는 사람들과 시간들의 잔인하지만 그것이 본질인 삶을 바라봐야 합니다.

그러니 어찌 '시(중의적 의미로)'가 어렵지 않을 수 있을까요. 김용택 시인의 말을 빌리면 시가 어려운 것은 그것이 쓰기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시를 쓰겠다는 그 마음을 갖기가 어려워서입니다. 즉 속절없는 삶을 아무런 편견없이 바라본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죠.

저 멀리 그저 소문 속에 있던 여중생은, 미자가 시를 배우기 시작하는 그 즈음, 그래서 김용택 시인이 '사물을 제대로 바라보라'는 그 시쓰기의 첫걸음을 얘기하는 그 시점에서 차츰 미자에게 다가옵니다. 그 죽음에 손자가 관련되어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은 미자가 여중생을 좀더 제대로 바라보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추모미사에도 가보고 여중생의 어머니도 만나보면서 미자의 마음 속에 여중생이라는 불특정했던 본질없는 삶은 아녜스라는 이름으로 본질을 드러냅니다. 미자에게 그러니까 여중생이 아녜스라는 이름을 가진 피어나지 못한 꽃이 되는 과정은 그녀가 시를 쓰는 과정과 동일합니다. 미자는 추모 미사에서 훔쳐온 아녜스의 사진을 마치 자기 가족이나 되는양 집 식탁 위에 올려놓습니다.

아녜스 주변의 삶들은 그러나 그저 강물의 흐름처럼 무심하게 흘러갑니다. 아녜스의 엄마는 밭에서 깻잎을 따고 그 해의 풍작과 흉작에 대해 걱정합니다. 절대로 딸의 죽음을 합의금으로 묻어둘 것 같지 않던 그 엄마는 결국 별 저항없이 합의를 해줍니다. 아녜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미자의 손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밥 투정을 하고 TV를 보며 웃고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오락실에게 게임을 합니다. 가해자의 부모들은 말로는 아녜스의 죽음이 안타깝다 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걱정은 자기 자식들의 앞날 뿐입니다.

그런 현실을 목도하는 이제 '시 쓰기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미자는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처음 가해자의 부모들이 어느 음식점에서 만나 자기 자식들을 위해 합의금 얘기를 꺼낼 때, 미자는 그 자리를 빠져나와 화단의 붉은 꽃(미자는 이 꽃을 슬픔이라고 하죠)을 바라봅니다. 아녜스의 엄마가 합의를 해주는 그 자리에서도 같이 앉아있지 못하고 밖으로 빠져나옵니다. 무엇보다 무심한 손자를 바라보는 미자의 마음은 더더욱 무겁습니다.

미자는 결국 아녜스의 목소리로 시를 씁니다. 아녜스가 얼마나 세상의 피어나는 꽃들을 사랑했는지를, 그 누구도 아녜스의 죽음 앞에 얘기해주지 않았던 그 이야기를 대신 시로 씁니다. 그 순간 우리는 시가 말하는 '아름다움'의 실체를 보게 됩니다. 거짓없이 바라본다는 것, 그렇게 속절없이 사라져가는 것들을 고통스럽지만 안타까운 심정으로 마치 내 일처럼 바라본다는 것이 그토록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을 우리는 미자가 불러주는 '아녜스의 노래'를 통해 알게되죠. '내 삶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은 바로 그 누군가의 진심을, 우리 자신의 본질을, 세상의 사라지는 모든 것들의 이야기들을 고통스럽지만 바라보는 그 순간이라는 것.

그래서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어렵습니다. 아니 고통스럽습니다. 마치 미자가 시를 대하면서 경험한 것처럼. 또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시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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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영화 시 - 이창동 감독과 윤정희의 역사적인 만남

    Tracked from 세상을 지배하다  삭제

    시 감독 이창동 (2010 / 한국) 상세보기 깊은 울림과 페이소스 이창동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 <시>. 이창동 감독의 작품에는 갈수록 깊은 울림이 더해지는 것 같다. 이창동 감독은 그동안 한석규, 설경구, 문소리, 전도연 등의 배우들과 함께 작업하며 그들의 호연을 이끌어 내고, 그 호연으로 하여금 작품의 울림을 더하는 탁월한 리더십과 연출력을 선보여 왔다. 그런 그가 <시>에서는 대배우 윤정희와 함께한다. 사실 필자는 윤정희란 배우에 대해 아..

    2010/05/15 20:14
  2. 이 사회에서 시를 읽는다는 것

    Tracked from 당신 덕분에 꽃이 핍니다♡  삭제

    한국 사회에서 시를 읽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거칠게 말하면, 현실감각 없는 별종이죠. 모든 걸 돈으로 셈하는 세상에서 시를 읽는 건 쓸모없는 일이니까요. 도대체 시를 읽을 시간이 어디 있어, 그럴 시간에 효율성을 높이고 경쟁력을 키워, 요란한 소리는 끊이질 않고 사회에서, 그리고 가슴속에서 메아리 치고 있습니다. <?xml:namespace> 세상이 하라는 대로 살지만 바닷물을 마신 거처럼 충족은커녕 불만만 쌓입니다. 도대체 언제 행복할지 감이..

    2010/05/16 09:22
'자이언트'하면 떠오르는 건 제임스딘과 록허드슨,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주연으로 나왔던 동명의 영화입니다. 텍사스의 목장에서 석유왕이 되는 제임스딘, 그러나 그 성공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그의 욕망과 좌절의 드라마죠. 당시 이 영화는 50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투여한 블록버스터였습니다. 다분히 미국의 성장을 아련한 노스탤지어로 그려내는 시대극이었죠.

SBS에서 '자이언트'라는 드라마가 오늘부터 시작된다고 합니다. 제목이 거대해서인지 예고편만봐도 이건 저 영화 '자이언트'를 그대로 떠올리게 만듭니다. 기획의도를 읽어보면 이 드라마가 전형적인 시대극이 가지는 코드들을 모두 버무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공에 대한 욕망과 그 욕망 속에서 벌어지는 비극, 복수, 가족... '에덴의 동쪽'을 그대로 가져온 듯한 설정들이 눈에 띕니다. 다른 것은 강남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개발시대에 벌어지는 성공과 좌절, 복수와 배반, 사랑과 애증의 드라마는 우리에게 이미 익숙할대로 익숙한 것이 되었죠. 아버지를 죽인 원수 밑에서 성장하고, 그 원수의 딸과 사랑에 빠지지만 뒤늦게 그가 원수임을 깨닫고 성공과 사랑 복수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야기... 어딘지 이제는 조금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스토리가 되었죠.

이 드라마를 가지고 벌써부터 정권 찬양용의 드라마라는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정권을 찬양하기 위해 드라마를 만들 정도의 시대라고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드라마의 정서가 개발시대에 대한 아련한 향수를 담고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공과 성장에 대한 집착.

하지만 이제 성공과 성장을 향한 질주로 달리던 시대는 지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공이 아니라 행복을 추구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공이 행복을 준다는 환상은 깨진지 오래며, 오히려 행복이 성공을 만들어준다는 믿음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거대함에 대한 추구는 과거 개발시대의 잔재입니다. '대마불사'라는 말이 횡행하던 시절, 누구나 벌이려면 크게 벌여야 한다는 것은 성공의 기본 공식처럼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그 속이 비어 있는 거대함은 이미 여러 번 고꾸러지면서 그 실체를 보였고, 이제는 세세하면서도 정교한 것들 속에 성공의 비법이 들어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세세함과 정교함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드러내놓지 않고 거대할 것 없는 그 소소함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그 행복이 거대한 성공을 만들어주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거죠.

'에덴의 동쪽', '태양을 삼켜라'... 최근 일련의 거대함을 내세우는 욕망과 성공의 드라마들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이유는 그 치열한 삶 속에 소소한 행복이 묻어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왜 저런 처절한 삶을 우리가 봐야만 하는 것인가, 그것이 행복의 길을 제시해주지도 못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개발시대의 노스탤지어? 이제 아파트 숲 속에 앉아 지내게 된 마당에 향수란 시간적인 의미 그 이상을 주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아직 시작도 안한 드라마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단정하는 것은 성급한 일일 것입니다. 다만 '자이언트'가 기존 시대극들이 걸어갔던 그 성공과 야망의 드라마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 드라마가 지금 시대의 행복을 어떻게 얘기해줄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는다면, 저 고꾸라진 여타의 거인 드라마들의 길을 따라갈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심 기대하는 것은 '대조영'의 그 아기자기한 반전의 반전의 묘를 살렸던 장영철 작가의 역량입니다. 그라면 혹 좀 다른 시대극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어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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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말 사극이 가진 스토리텔링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김이영 작가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사극작가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출중한 외모(?)에 이 분이 그 '이산'을 썼던 분이 맞나 의구심마저 들었었죠. 자세히 보니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습니다. "많이 피곤해 보인다"고 했더니 '동이' 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병훈 감독님이 '워낙 큰 산'이라 그걸 따라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더군요.

그랬습니다. 김이영 작가는 이병훈 감독님이 워낙 꼼꼼하고 완벽하게 모든 걸 준비하는 분이라 거기에 일일이 보조를 맞추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친다고 솔직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물론 그것은 이병훈 감독님에 대한 존경심에서 우러나온 이야기였습니다. 스스로도 그런 과정을 통해 부쩍 성장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고 했죠.

먼저 사극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한 여자아이가 음식을 훔쳐먹다 주인에게 잡힌 한 미드의 예를 들면서, 이처럼 "끊임없이 인물이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게 되고 그 상황을 빠져나오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했습니다.

'동이'를 보면서 떠오른 것도 바로 그 때 김이영 작가가 예를 들어 말했던 그 어린 여자아이였습니다. 어린 동이(김유정)는 누명에 의해 아버지와 오빠, 그리고 그녀의 주변에 늘 있던 아저씨들을 잃고 홀로 벼랑 끝에 서게되죠. 천민 출신이라는 상황에서도 누구 못지 않게 행복해했던 꼬마 여자아이는 이렇게 그 행복마저 빼앗긴 채, 풍비박산난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 "무서워. 나도 따라 가고 싶어"하고 말합니다. 아이가 그 텅빈 집을 바라볼 때,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극은 어떤 방향성을 갖게 됩니다. 균형이 깨진 아이의 삶은 다시 균형을 찾기 위해 고난을 이겨내려 하죠.

그리고 김이영 작가는 이런 고난 끝에는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보상을 해주는 것이 또한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또 "너무 힘겨운 고난을 오래도록 지속시키지는 않는다"는 원칙이 있다고도 했죠. 그것은 캐릭터에게도, 또 보는 시청자들에게도 힘겨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이는 이제 바닥의 삶에서 한 걸음씩 보상 받으며 성장해나갈 것입니다. 그것이 성장드라마를 가진 퓨전사극의 매력이죠.

사극의 소재를 어떻게 발굴하느냐는 질문에는 "50부작의 이야기성이 있는가"가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했습니다. 즉 그만큼 파란만장한 삶이 존재하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충분히 성장과정을 보일 만큼 주인공이 낮은 곳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동이'는 그 소재를 숙빈 최씨에서 찾았죠. 천민에서 출발해 숙종의 후궁이 되고, 인현왕후와 장희빈 사이에서 벌어지는 피비린내나는 왕실의 싸움 속에서 살아남아 영조를 낳는 인물이죠.

역사란 늘 왕가의 이야기에 머물기에 그 속에 숨겨져 나타나지 않은 숙빈 최씨의 이야기를 상상력으로 발굴해내는 것은 실로 흥미로운 작업이었을 것입니다. 영조를 낳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숙빈 최씨의 그 발굴되지 않은 이야기는 오히려 상상력을 자극했을 것이니까요. 항간에는 이 작품이 결국에는 또다른 장희빈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이것은 포커스가 숙빈 최씨의 성장에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지 않은 데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이영 작가는 무엇보다 사극은 "극성이 강하다"는 것이 장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옛이야기의 특징이 사건 자체가 크고 다이내믹하다는 것이죠. 하지만 또한 이 극성이 강하다는 장점은 약점이 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사건이 계속 해서 벌어지고 진행되어 가다보면 정작 인물이 따라오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고 했죠. 즉 인물의 감정선이 사건과 균형을 맞추지 못하면 사건만 겉도는 결과가 나타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결국 캐릭터와 사건의 적절한 균형이 중요하다는 것이죠.

'동이'의 초반부는 사건전개가 빠른 데다, 추리적인 연출 스타일이 겹쳐져 조금은 따라가기 힘든 구석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동이의 아버지가 결계의 수장으로 등장하자마자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고 결국 죽음까지 맞이하게 되는 긴박한 과정은 시청자가 그 인물에 몰입되지 못한 상태에서 벌어져 그만큼의 효과를 주지 못했죠. 즉 '동이'는 초반부에 좀더 인물에 시청자들을 몰입시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하긴 '동이'는 홀홀단신으로 남게 된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김이영 작가는 캐릭터를 고난에 빠뜨릴 때, 반드시 그 해결책을 가진 상태에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고 했습니다. 즉 고난에 빠진 캐릭터와 같이 생각하면서 가장 적합한 해결책을 스스로 찾는다고 했죠. 그것은 결국 캐릭터의 고난 해결책이 김이영 작가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기도 하다는 것을 말해주었습니다. '동이'를 통해 김이영 작가는 스스로를 그 지난한 고난의 작업(?) 속으로 집어넣고 헤쳐나오려 하는 것이죠. 그 끝에는 '동이'가 보여주려는 것처럼 고난을 넘어선 자의 충분한 성장이 그녀에게도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김이영 작가가 말한 사극의 힘이란 결국 작가 스스로 그 극한의 상황 속에 스스로를 던져넣는데서(그것을 빠져나오려는 노력에서) 생겨나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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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의 마지막 장면, 초복이와 은실이가 태양을 바라보며 앞으로 저 해가 누구의 것인가를 말하는 대목에서 문득 대학시절 읽었던 리얼리즘 소설을 떠올렸습니다. 제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소설들은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런 식의 비전을 중요하게 생각했죠. 비록 지금은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끝난 것은 아니다. 결국 도저한 역사의 흐름은 잘못된 역사를 바꿔 놓을 것이다.

제가 대학에 들어가던 87년도. 그 해에 저는 이한열의 죽음 옆에 있었습니다. 그다지 시위에는 관심이 없던 저였지만, 그 때는 모두 강의실을 뛰쳐나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선배 누님은 사과탄에 머리를 맞아 살갗이 썩어간다는 얘기까지 나돌았으니, 그 들끓는 젊은 피의 분노가 얼마나 컸던가는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딱 반 년 간의 일이었습니다. 6월 시청앞 광장으로 시민들이 모여들고 마치 혁명의 전야가 다가온 듯 흥분되던 그 시점에서 6.29 선언이 나왔죠. 모든 것이 끝나버린 듯, 광장에 모였던 이들은 다시 제 갈길로 사라졌습니다. 대학도 제 자리로 돌아갔고, 시위는 사그러들었습니다. 86학번 선배들은 허탈감에 빠진 듯 보였습니다.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1년 전만해도 학교는 학교가 아니었답니다. 전경들이 교내로 들어와 여대생을 희롱하는 걸 매일 봐야했고, 교수가 강의하다 현장에서 체포되는 경우도 있었다니까요.

하지만 그건 모두 옛일로 사라져버린 듯 했습니다.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직선제로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88년 올림픽을 거치면서 사회는 긍정의 분위기로 바뀐 듯 보였습니다. 군대를 다녀오고 복학해보니 학교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혁명을 외치던 그 세대들은 어디론가 숨어버렸고, 대신 적을 잃어버린 방황하는 청춘들의 방탕에 가까운 소모적 삶이 그 공간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지났고 우리들은 모두 사회로 들어갔죠...

흔히들 386이라고 말하는 그 세대들은 그러나 사회 속으로 들어가면서 저마다 자신들의 살길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개중에는 우리가 젊은 시절 그토록 싸워야할 대상으로 여겼던 그런 권력형 인간으로 돌변한 이들도 있었습니다. 혁명을 외쳤지만 이제는 그것이 "옛 사랑의 그림자"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추노'를 보며 줄곧 이건 바로 그 실패한 혁명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은 썪어있고 그것을 고치겠다고 나선 선비들 역시 알고 보면 세상을 바꾸려는 것이 아니라 왕을 바꾸려는 것이었으며(조선비), 권력 아래서 살아남기 위해 저마다 작은 권력의 실타래라도 쥐고 휘두르려는 모습(오포교)이나, 여전히 대의를 외치지만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른 채 결국 자신을 소외시키는 송태하 같은 인물, 순진하게 혁명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지만 그것 역시 권력의 장난임을 깨닫는 노비당, 혁명 따위는 믿지 않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몸을 던지는 낭만적인 대길, 세상이 더럽다면서 사실은 그 세상의 무서움을 알기에 도망치는 중인 짝귀, 그리고 결국 역사에 자신 같은 노비 한 사람도 있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테러리스트의 길을 걷는 업복.

'추노'는 그 폭풍 같았던 혁명의 시절을 회고하게 만드는 드라마였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바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도저한 흐름은 결국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전언. 업복이 말했듯이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 낮은 자들의 뜨거운 삶을 하나하나 기록했다는 것, 그 자체가 혁명이 되는 드라마. 그래서 실패했지만 그 실패한 혁명을 조명하는 것으로 혁명이 되는 그런 드라마. 여전히 달라지지 않은 견고한 세상에 화살 한 방 날려보는 그런 드라마.

전반적으로다가' '추노'는 그 80년대 옛 혁명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드라마였다고 기억됩니다. 무수히 죽어간 그 인물들의 면면이 오래도록 여운으로 남을 것입니다. 우리가 한 때 길바닥에서 피흘리고 쓰러져 있던, 하지만 세월의 부식으로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던 그 얼굴들을 상기시키는. 그게 도달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태양을 향해 화살을 먹이고는 킥킥 웃어대던 그 시절의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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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태터앤미디어의 생각

    Tracked from tattermedia's me2DAY  삭제

    폭풍 같았던 혁명의 시절을 회고하게 만드는 드라마였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바뀌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 도저한 흐름은 결국 세상을 바꿀 것이라는 전언. 업복이 말했듯이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 낮은 자들의 뜨거운 삶을 하나하나 기록했다는 것.

    2010/04/14 08:28
"씁쓸하구만.." 작년 이 한 마디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김준호. '개그콘서트'와 '희희낙락'으로 전성기를 달리던 그는 안타깝게도 도박사건에 연루되어 진짜 말 그대로 '씁쓸한 인생'을 맞았습니다. 한국방송대상 코미디언 부문 수상자 명단에도 올랐지만 자숙하는 의미로 참석하지 않았고, 자신의 개그 인생과 맞닿아 있는 '개콘'이 10주년 특집 방송을 녹화하는데도 참석할 수가 없었습니다. '씁쓸한 인생'으로 이제 씁쓸했던 그 인생을 훅 날려버리나 싶었는데, '씁쓸한 인생'이 말이 씨가 되어 진짜 씁쓸한 인생이 되어버렸던 거죠.

지난주 개콘 PD와 만난 자리에서 그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편으로는 반갑고 한편으로는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하류인생', '같기도', 그리고 '달인' 이전에 최장수 코너였던 '집으로'에서도 발군의 코미디 연기를 보여준 김준호는 '개콘'의 일등공신이었습니다. '코미디쇼 희희낙락'에서는 자료영상을 합성해 만들어낸 '김준호쇼'를 통해 국내외 유명인사들과의 가상 인터뷰(?)를 보여주었죠. '웃음충전소'에서는 가장 화제가 되었던 '타짱'의 진행자로 활약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김준호는 버라이어티쇼나 토크쇼에는 잘 어울리지 않았죠. 그는 천상 코미디언이었으니까요. 개콘의 김석현 PD는 코미디는 연기에 가깝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버라이어티쇼는 코미디하고는 완전히 다른 분야라는 것이지요. 개그맨들이 버라이어티쇼에 가서 적응을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고도 했습니다. 즉 아무리 개그맨이라 하더라도 버라이어티쇼에서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김준호는 버라이어티쇼에는 잘 나오지 않았고, 심지어 토크쇼에서도 '적응이 안되는 모습'을 오히려 컨셉트로 삼곤 했습니다.

김준호는 대신 드라마쪽에서 오히려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죠. '에어시티'에서 감초연기로 가능성을 보인 김준호는 '뉴하트'에서도 자신의 역할을 해내며 연기자로서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습니다. 즉 희극 연기자로서 한 발 한 발 나아가고 있던 참이었죠. 한편 '개콘'에서 이제 고참으로서 후배들의 든든한 비빌 언덕 역할을 자처했던 김준호는 '씁쓸한 인생'에서 아낌없이 망가지는 모습으로 웃음을 주었습니다. 그러다 한 순간의 실수로 씁쓸한 인생을 맞았던 거죠.

김석현 PD는 김준호의 복귀 소식을 말하면서 '씁쓸한 인생'도 끝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김준호의 복귀와 '씁쓸한 인생'의 끝. 이 두 개가 얼키면서 알 수 없는 웃음이 터져나왔습니다. 김준호의 자리를 메워주었던 김대희가 김준호를 보며 "너 때문에 (못 끝내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는 장면, 이제 뭔가 해보겠다고 올라온 김준호에게 알려지는 코너 폐지 선언은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이었습니다.

'씁쓸한 인생'이라는 코너 자체가 그 중심에 앉아있는 인물을 씁쓸하게 해서 웃음을 만드는 것이라면, 그간 그 씁쓸한 역할을 대신해온 김대희가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하는 듯한 그 모습이 우스웠고, 불운한 실수로 씁쓸한 인생을 지내다 다시 씁쓸한 역할을 통해 개그맨으로 복귀하려 '씁쓸한 인생'이란 코너로 돌아왔지만 코너 폐지를 듣게되는 그 씁쓸한 상황이 우스웠습니다. 어찌 보면 김준호는 이 코너의 시작과 마지막을 잘 장식한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즉 마지막까지 (코너 폐지라는 소식으로) 자신을 망가뜨려 웃음을 주었으니 말입니다.

모쪼록 '씁쓸한 인생'이라는 코너의 폐지가 떠올리게 하는 것처럼, 김준호가 겪어온 씁쓸했던 나날들의 종지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연기자로서의 희극인이 귀해지는 요즘, 김준호가 한 때의 실수로 인한 씁쓸한 인생을 접고 다시 활기찬 인생을 맞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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