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간 ‘알쓸신잡3’가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들은

“메디치가는 피렌체 지역의 만석꾼. 우리 개념으로 하면 만석꾼이죠. 왜 유명해졌냐하면 이 만석꾼이 그냥 돈만 밝힌 게 아니고 예술적인 성취를 중요하게 여기고 예술가를 키우고 후원하고 그 사람들이 실력발휘를 할 수 있게 뭘 짓고 이런 걸 엄청 많이 한 거예요. 예술을 아는 그래서 돈을 좀 쓴 만석꾼.” tvN <알쓸신잡3>가 찾아간 피렌체의 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며 나누는 수다에 이 지역에서 빼놓을 수 없는 메디치가를 유시민은 그렇게 평가했다. 

실제로 피렌체 곳곳에는 메디치 가문의 흔적들이 남아있었고, 이들이 후원한 예술가들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도나텔로,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포함해 브루넬레스키, 기베르티, 미켈로소, 마사초, 알베르티, 마르실리오 피치노, 베로키오, 프란체스카, 프라안젤리코, 갈릴레오 갈릴레이 등등 부지기수였다. 두오모 성당으로 유명한 피렌체가 왜 그토록 예술적이고 아름다운 도시적 풍모를 갖게 되었는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피렌체로 오는 길 버스 안에서 나눈 대화 속에서 김진애 교수는 “다른 예술도 그런 점이 많겠지만 건축은 특히 자본과 권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고 말한 바 있다. 도시의 아름다움은 위대한 예술가들과 건축가들에 의해 상상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실현되는 건 그 도시를 움직이는 자본과 권력이 어떤 방향을 선택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 피렌체는 그 역할을 메디치 가문이 했다. 예술에 지원한 이 가문으로 인해 많은 예술가들이 탄생했고, 도시 곳곳에서 무언가를 지을 때마다 공정하게 이뤄지던 일종의 오디션을 통해 그 예술가들의 아이디어들이 받아들여졌다. 

물론 개발이라는 것이 모두 부정적인 것은 아니지만, 피렌체의 현재 모습을 우리의 서울과 비교해보면 여러모로 씁쓸해지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지금의 우리네 서울의 모습은 과거를 밀어내고 특징 없는 고층아파트들이 도처에 세워진 풍경이 아닌가. 도시의 정취보다는 아파트의 가격이 그 도시를 특징 짓게 만든 현실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권력과 자본을 가진 결정권자들이 해온 일련의 선택들이 물론 당대에는 중요한 일이었을 수 있으나 후대에는 깊은 후유증을 남기고 있으니 말이다.

두오모 성당 설계에 얽힌 브루넬레스키의 이야기 역시 우리로써는 부러울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당시에는 이러한 건축에 있어서 모든 걸 ‘설계 경기(일종의 오디션)’를 통해 했다는 김진애 교수는 두오모 성당의 상부 원형 구조의 덮개 아이디어가 천재가 아니면 가져올 수 없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지붕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이중 구조를 만들고 비계가 필요 없이 격자형태(헤링본)로 벽돌을 쌓는 방식을 채택했으며 윗부분에 구멍을 만들어 내부에서 생길 수 있는 압력문제까지 해결했다는 것. 

하지만 이러한 천재적인 아이디어보다 더 놀라운 건 이 두오모 성당이 브루넬레스키가 지은 첫 번째 건축물이었다는 점이었다고 김영하는 말했다. 그 설계 경기가 얼마나 공정했는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었다. 금공예가로 이름을 날렸던 브루넬레스키였지만 건축 분야는 처음이었다는 것. 그럼에도 그의 아이디어가 채택되었다는 건 그만큼 이 오디션이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걸 말해주는 대목이었다. 스펙사회로까지 불리는 우리로서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더더욱 놀라웠던 건 김영하와 유시민이 방문했던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인노첸티 고아원의 이야기였다. 1445년에 시민들의 후원으로 개원해 지금껏 600년 간 실제로도 운영되고 있는 인노첸티 고아원. 그 곳 2층에는 놀랍게도 보티첼리 같은 유명한 예술가들의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김영하와 유시민을 놀라게 한 건, 은행 개인 금고처럼 된 작은 상자들 속에 무려 몇 백 년 전에 아이를 놓고 갔던 부모가 놓고 간 증표를 지금껏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반쪽만 있는 증표들 중에는 소박하기 그지없는 단추 같은 것들도 있었다. 김영하는 “이런 고아원은 있지만 이런 걸 보존한 고아원은 여기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유시민은 “이탈리아라는 이 사회가 500년, 600년 기록을 이렇게 유지하는 사회인데 국가는 1500년 넘게 없었지만 근데 우리보다 1인당 GDP도 높고 인구도 많은 나라인데 이렇게 되는 게 무엇 때문인가를 느끼며 한 대 얻어맞았어요.”라고 말했다. 유시민은 이어 “이탈리아에 대한 선입견이 없어졌다. 이탈리아 시민 사회가 그렇게 만만치 않다는 걸 느꼈다”고 덧붙였다. “한국에도 이런 시설이 있냐”고 묻는 직원분의 질문을 잘못 들어 “많다”고 말했지만 “몇 년 됐냐”는 질문에 민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남기는 것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탈리아도 1992년에 부패척결운동으로 벌어진 ‘마니 풀레테’처럼 큰 곤욕을 겪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근간에도 남아있는 인노첸티 고아원 같은 곳에서 느껴지는 문화적 저력은 부러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조선의 그 찬란하고 예술적이었던 공간들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밀어내져 점점 사라져가고, 과거의 유산들을 예술적으로 받아들여 보존해나가기보다는 당장의 자본적 이익으로 바꿔나가는 우리네 현실이 가진 경박함이 못내 씁쓸하게 다가왔다.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아파트 숲을 만들고 거기서 모자라 4대강까지 밀어버린 이들이나, 예술가들이 기회를 얻을 수 있게 해주기는커녕,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핍박했던 이들이 사실상 개발시대를 이끌었던 권력가와 그 가문들이라는 점은 그래서 아프게도 다가온다. 지금 현재에 이르러 초라한 끝을 보고 있으니. 지금이라도 피렌체가 가졌던 예술과 문화와 시민사회의 위대함을 우리도 깊이 숙고해봐야 하지 않을까 <알쓸신잡3>가 피렌체를 보여주며 우리에게 시사하고 있는 것들이다.(사진:tvN)

‘하백의 신부’, 코미디로 무장하고 있지만 그 속내는

“중증 강박장애였을 거에요. 완전무결을 위한 강박. 피해망상. 박상철 그 사람 계속 나를 만나고 싶어 했어요. 마지막 구조신호였을 거예요. 마봉열씨도 그렇고 이번 일도. 의사인 내가 봐야할 걸 보지 않고 들어야 할 걸 듣지 않아서 생긴 일들일까요?” tvN 월화드라마 <하백의 신부 2017>의 윤소아(신세경)는 하백(남주혁)에게 정신과 의사로서 환자들의 아픈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자신을 그렇게 자책한다. 

'하백의 신부(tvN)'

하지만 그녀는 또한 그렇게 정신이 아픈 이들의 삶에 연루되는 것을 버겁게 느낀다. 정신과 의사로서 누구보다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지만 그로 인해 겪을 부담은 피하고 싶은 것. 그래서 하백에게 그 정반대의 감정을 토로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런 일로 책임감 갖거나 미안해하거나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냥 내 생각하면서 살고 싶어요.”

하백은 그러나 그녀의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확신한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근데 하난 확실하지. 넌 네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할 거야. 넌 애초에 그렇게 생겨먹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녀의 상황을 자전거 바퀴에 비유해 이야기한다. “내가 바퀴에 관심 있어서 좀 찾아봤는데 자전거라는 게 그렇더군. 넘어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쓰러지지 않아. 네 마음이 넘어지려는 쪽이 어딘지 너만 모르는 거 아냐? 자꾸 억지로 반대로 꺾으려 하면 쓰러져 골병든다.”

사실 <하백의 신부>가 가진 이야기의 기조는 판타지와 코미디다. 그래서 조금 썰렁한 코미디들이 반복되고 또 허공으로 붕 날아오르거나 고층 건물 옥상에서 떨어지는 소아를 하백이 끌어안고 구해내고,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량 위로 탈출해 내려오는 판타지적 장면들을 보다보면 흥미롭긴 해도 어딘지 너무 가볍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99%의 판타지 코미디적 설정들을 잘 들여다보면 이 드라마가 궁극적으로 하려는 1%의 진심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왜 윤소아가 하필이면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인물로 설정되어 있고, 여기 등장하는 신들이 물과 하늘같은 자연(주로 기후와 관련이 있는)을 관장하는 신들이며, 하필이면 하백의 경쟁자로 등장할 후예(임주환)라는 인물이 리조트 개발 회사의 대표인가에서 드러난다. 

후예가 하는 리조트 개발이란 다름 아닌 자연을 파헤쳐 인공적인 공간을 만들고 그것으로 부를 창출하는 사업이다. 그리고 지금 후예가 만들려는 리조트는 다름 아닌 하백을 대대로 받들어오던 윤소아의 조상들이 살던 터전이다. 그녀는 이 땅을 무려 7배의 가격으로 사겠다는 후예의 제안에 반색하지만 리조트 개발을 둘러싼 하백과 후예 사이의 대결구도는 어쩌면 윤소아를 흔들리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실로 자본의 세상에서 살아가며 돈이 신인 물신을 숭배하는 현대인들에게 <하백의 신부>는 하백이라는 자연을 상징하는 존재를 통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연 ‘행복한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윤소아는 어떤 길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까. 

신석을 잃어버린 무라(정수정)와 비렴(공명)은 하백과 대립하며 심지어 그의 신력을 시험하기 위해 윤소아를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아마도 이것은 신(자연)이 갖는 무심함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세상으로 오며 신력을 잃어버린 하백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이들과는 다르다. “배도 고프다며?”하고 묻는 비렴의 질문은 하백이 인간적인 고통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특별한 신이라는 걸 오히려 드러낸다. 

윤소아는 신과 인간적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며 헷갈려 한다. 정신과 의사로서 자신의 환자들이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면서도, 자신은 그런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한다. 그녀는 그래서 궁금하다. “신들이 다 이 모양이라 세상이 이 꼬라지인지. 세상이 이 꼬라지라 신들이 포기하고 저 모양인지.”

그럼에도 그녀에게서 발견되는 어떤 희망 하나는 힘들게 살아가며 투덜대면서도 그런 삶조차 고마워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고맙습니다. 또 살려준 거. 그리고 오늘 종일 바쁘게 해준 거.” 그녀가 하백에게 전하는 이 한 마디는 마치 우리가 힘겨운 현실에 나갔다 돌아와 잠자리에 들 때 작은 기도 속에 담는 희망을 닮았다. 99% 판타지 코미디의 외피를 갖고 있는 <하백의 신부>가 그 안에 촘촘히 숨겨놓은 1%의 진심이다.


'남극'의 딜레마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

'남극의 눈물'(사진출처:MBC)

'남극의 눈물' 김진만 PD는 이 '눈물' 다큐멘터리를 찍어 오면서 늘 갖게 되는 딜레마가 있다고 했다. 이 지구의 눈물을 포착하고 증언하기 위해 문명 저 편의 세계로 카메라를 갖고 들어가지만, 어쩌면 그것 자체가 파괴적인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남극의 눈물' 세 번째 이야기의 말미에 내레이션을 통해 들어간 질문, 즉 "우리는 친구인가 아니면 침입자인가"라는 그 물음은 바로 이 김진만 PD의 고민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남극의 눈물' 3편 '펭귄행성과 침입자들'은 먼저 이 남극을 자신들의 행성으로 장악할 수 있었던 다양한 펭귄들의 생태를 보여주었다. 그 펭귄들이 생존할 수 있었던 키워드는 두 가지. 즉 '협동과 배려'다. 자이언트 패트롤 같은 육식성 천적들이 새끼 펭귄을 공격하면 그것이 제 새끼가 아니라도 어른 펭귄들이 나서서 방어하고 보호해주는 모습은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그들의 지혜로운 생존능력을 보면서, 잠깐 우리 사회의 가족 이기주의가 떠올랐다면 과장일까. 이들의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가족의 테두리를 뛰어넘는 모성애와 부성애는 '내 일 아니면 지나치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떠올리게 한다.

인간 사회 속에서의 우리들이 그러할진대 타 생물들에 대한 인간의 이기주의가 오죽할까. 2편에서 나왔던 고래잡이와 물개 잡이로 학살당한 수백만 남극의 종족들은 그래서 우리를 다시 되돌아보게 만든다. 혹등고래의 그 아름다운 노래가 처절한 절규로 들리는 건 그 때문일 게다. 물론 포경이 국제협약으로 금지되는 등 환경에 대한 경각심은 높아졌지만 그렇다고 이 침탈이 끝난 것은 아니다. 펭귄행성에 들어온 침입자들, 즉 인간의 파괴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기후변화로 인해 한쪽은 얼어가고 다른 한쪽은 녹아가는 남극의 상황은 먹이를 찾아 바다로 떠나야 하는 펭귄들에게는 생존의 문제가 되고 있다. 조류 인플루엔자의 확산은 펭귄들의 알 수 없는 죽음을 초래하고, 오지의 땅이 갖는 그 신비로움을 관광하기 위해, 혹은 그 국가적인 이익을 위해 들어온 사람들은 때 아닌 남극에 쥐들을 들끓게 만들었다. 쥐는 생태계를 교란할뿐더러 그 자체로 세균을 전파한다는 데서 치명적이다.

김진만 PD는 2003년에 29세라는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난 고 전재규 대원을 얘기하면서 그 고민스러운 딜레마를 꺼내놓았다. 세종기지에서 세상을 떠난 전재규 대원 때문에 이슈가 많이 됐고, 그 덕에 '아라온'이라는 쇄빙선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국익을 위해 사명감을 갖고 목숨 걸고 일을 하고 있는 그 대원들을 보면서 환경 파괴 운운하기도 어렵다는 얘기였다. 알다시피 특정 국가의 땅이 아닌 남극은 각국의 영토권 확보를 위한 전진기지가 되어 있다.

'남극의 눈물'은 물론 이 딜레마에 대한 해답을 내놓지 않았고, 또 그럴 수도 없었다. 이것은 결국 국가의 차원을 넘어서서 지구별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고민해야 될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다큐멘터리가 굳이 카메라를 들고 남극까지 들어가 그 눈물을 포착해내는 것은 답을 전하기 위함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기 위함이다. 우리는 친구인가, 아니면 침입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찾아내야 한다.

개발 논리의 끝, 사람도 자연이다

요즘 같은 시기에 아이를 가진 사람으로서 그 아이의 하루를 생각해보는 것은 불안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아이의 생활을 파고드는 위해한 환경들이 도처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광우병의 위험이 의심되는 미국산 쇠고기가 아이들의 급식으로 올려지는 건 아닐까.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조류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 걸리지는 않을까. 대량으로 유통되기 시작한 유전자 변형 옥수수를 모르는 사이 먹고 어떤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까. 한편 급증하고 있는 아이 성폭력 사건 사고에 재수 없이 휘말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사회적인 불안감까지 걱정은 끝이 없다.

어른들이라고 해서 나은 것은 없다. 삶의 기본 조건이라는 의식주를 두고 볼 때, 나아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양적인 측면에서 볼 때, 먹거리와 집의 수가 늘어난 것은 맞지만 그 질적인 측면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엄청난 대량 소비의 길 위에서 가축들은 광우병 소, 구제역 돼지, AI 닭으로 땅에 묻히고 있으며, 채소들은 유전자 변형 옥수수, 농약 투성이 야채들로 식탁을 위협하고 있다. 아파트로 대변되는 주거생활은 오히려 서민들의 터전을 빼앗고 사는 집을 살(구매) 집으로 전락시켰다. 의복은 일견 과거보다는 그 상황이 낫다고 보일 수도 있다. 허나 옷이 그 실용적인 측면을 넘어서 과시의 대상으로 변질되면서 외면에만 치중하는 정신적인 공백 상태를 만드는데 일조하고 있다는 혐의를 지울 길은 없다.

이처럼 의식주에 있어서 그 질적인 저하를 피부에 실감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오히려 부족하고 가난했던 시절의 풍족함(?)을 그리워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개발이란 본시 그 초반에는 풍요를 가져올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부족을 초래한다는 걸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불편한 집들이 불도저로 말끔하게 밀어내어지고 그 위에 지어지는 아파트의 편리함이 주는 대가는 의외로 크다. 그 대가는 대부분 자연의 파괴에서 비롯된다. 과거라면 어디서나 쉽게 밟을 수 있던 땅을 밟기가 어려워진 현대인들은 그 딱딱한 아스팔트 위에서, 시야를 저 끝까지 트이게 만들었던 낮은 집들 대신 세워진 고층건물들에 포위되어 있다. 아파트 한 채를 짓기 위해 들어가는 자재들은 또한 다른 곳에서 포획된 자연 채취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대가는 인간이 자연보다는 인공을 더 편안하게 생각하는 자연 외적인 존재가 되어간다는 점이다. 바로 이런 자연과 유리된 사고방식이 초래하는 착각은 인간 자체를 포획 혹은 소비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인 이상, 개발 논리의 그물을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편리함은 다른 누군가의 불편함 때론 죽음이 되기도 한다. 즉 개발 논리의 끝은 결국 그 대상을 거기 살아가는 사람으로 향하게 한다는 점에서 숙고되어져야 할 사안이다. 자연적인 흐름의 강줄기를 개발자의 입맛대로 바꾸겠다는 사고방식은,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 생명을 담보로 하겠다는 쇠고기 수입 문제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거기 사는 생명들에 대한 고려가 부재하다.

환경과 생명에 대한 장기적 안목 없이 눈앞의 경제적 이득을 위해 벌이는 정책적 결정이란 이제 밖을 나돌아다니기조차 불안해진 아이들의 현재처럼, 앞으로 아이들의 미래까지 불안하게 만들지 않을까. 그것은 지금도 이미 그렇지만 앞으로도 점점 생활을 생존으로 만들어 삶의 질을 끝없이 떨어뜨릴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란 그저 먹고 잠자고 거리를 마음껏 다닐 수 있는 대단할 것 없는 생활이 아닌가.

아파트 개발의 끝자락에서 우리가 맞닥뜨린 주거의 양극화를 경험한 것처럼, 위생이 불분명한 먹거리의 무분별한 수입허가는 먹거리의 양극화 나아가 건강의 양극화를 가져올 것이 뻔하다. 양극화를 육체화시키는 이 과정은, 이제 개발의 논리가 우리네 몸에까지 이르렀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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