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자>, 현실의 축소판을 보는 재미 혹은 끔찍함

 

SBS가 새로 파일럿으로 내놓은 <인생게임-상속자(이하 상속자)>9명의 일반인들이 한 공간에 모여 네 계급으로 나뉜 채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낸 일종의 리얼리티쇼다. 과거 <>이 애정촌에 모인 남녀들의 관계를 리얼리티쇼로 담아냈다면, <상속자>는 태생()적으로 정해진 계급에 의해 만들어지는 정치, 경제, 사회적인 양상들을 역시 리얼리티쇼 형식으로 담아낸다.

 

'상속자(사진출처:SBS)'

룰은 간단하다. 운으로 금수저를 뽑은 인물이 초대 상속자가 되어 계급의 맨 꼭대기에 서고 그가 바로 밑 계급 집사 1명과 그 밑 계급 정규직 3명을 뽑는다. 그리고 남은 인원 4명은 비정규직이 된다. 상속자는 이들이 지내는 방세와 식비를 받아 돈을 벌 수 있지만, 나머지 인원들은 방세와 식비를 내야 살아갈 수 있다. 물론 이 룰에서 집사는 예외적 존재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에 가장 많은 돈을 갖고 있는 자가 우승자가 되는 게임.

 

아주 간단한 게임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계급으로 구성된 룰은 지독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금수저 흙수저의 현실이 고스란히 담기고, 권력을 가진 상속자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거의 폭군에 가까운 방세와 식비를 가져가려 한다. 조악한 상황에서 살아가야 하는 비정규직들은 연합하여 다음 선거에 권력을 잡으려 하지만 이게 만만치가 않다. 상속자와 정규직들이 이미 더 공고한 연합을 만들어 비정규직들을 지속적으로 배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시작한 게임이지만 어떻게든 계급을 넘어서기 위해 배신과 야합이 난무하면서 이들은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된다. 그리고 아직 방영되지 않은 다음 편 예고에서는 눈물을 쏟는 이들의 모습이 담겨지기도 했다. 이처럼 게임이 게임에 머물지 않고 감정을 건드리는 건 그것이 고스란히 현실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등록금 대출금에 허덕이며 알바를 전전해 살아온 닉네임 샤샤샤라는 여성출연자가 상속자가 되어 그 호사와 권력에 취하는 모습은 너무 현실적이라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해지기까지 한다.

 

<상속자>는 이처럼 리얼리티쇼가 보여주곤 하는 사람들의 치부를 드러내면서도 거기에 우리 사회의 현실을 투영시킴으로써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대단히 자극적일 수 있는 내용들이다. 즉 누군가가 연합할 것처럼 행동하다가 갑자기 혼자 잘 살기 위해 배신을 하는 장면은 보는 이들마저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이 계급의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 시스템이란 다름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작동방식 그대로다.

 

그런데 이 <상속자>에서 주목해야할 것이 있다. 그건 방영 전부터 예고편에 등장해 기대감을 높였던 김상중이다. 그리고 그는 마스터라는 이름으로 이 프로그램의 이면에 참여하고 있다. 대부분의 방송분량이 일반인 출연자들의 리얼한 행동들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이 마스터 김상중의 모습은 뒤편으로 슬쩍 빠져 있다. 도대체 김상중은 이렇게 전면에 나오지도 않으면서 왜 이 프로그램의 중요한 인물로 서 있는 걸까.

 

그건 바로 그가 이러한 끔찍한 현실이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조장되고 만들어진 현실이라는 걸 은연중에 드러내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계급사회라는 시스템 속에서 불공평한 삶을 살아가며 경쟁해야 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루하루가 힘들고 서로를 경쟁자로 생각하며 밟고 밟히며 살아가지만 그것이 사실은 누군가 조장한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삶이라는 것. 김상중은 그런 존재가 현실에도 있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잘 보이지 않던 우리네 현실을 다시금 들여다보게 만드는 인물이다.

 

김상중이라는 외부적 시선을 통해 보여지는 <상속자>는 그래서 인간군상을 보는 재미를 선사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 적나라함이 주는 끔찍함 같은 걸 느끼게도 해준다. 물론 이 같은 시스템 상황 속에서도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당사자들에게 달려 있다. 그러니 실제 현실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 이 가상 시스템 안에 들어오느냐에 따라 다른 스토리를 전해줄 가능성도 높다. <상속자>라는 파일럿의 확장 가능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물화길 막는 육의전, 그 길을 뚫는 보부상

 

도대체 영세한 상인들은 뭘 먹고 살란 말인가. 시대가 흘렀어도 달라진 건 별로 없는 것만 같다. KBS 수목드라마 <객주>에서 나오는 보부상들의 희망 천봉삼(장혁)의 이 토로는 어찌 보면 지금도 여전히 영세 상인들에게서 나오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장사의 신 객주(사진출처:KBS)'

보부상의 대표격인 천봉삼이 싸우고 있는 건 육의전의 대행수인 신석주(이덕화). 신석주는 물화 독점에 의한 매점매석을 통해 거대한 자본을 모은다. 그는 풍등령 고개에 자신의 친척을 화적으로 세워 장삿길을 막고는 대신 물길을 독점해 손 하나 까닥하지 않고 돈을 끌어 모은다. 그러자 천봉삼은 그 풍등령 길을 뚫어 20만 보부상들의 장삿길을 열어놓는다.

 

천봉삼에게 장삿길은 마치 우리 몸의 혈관과 같은 것이다. 그 길이 막히면 한쪽으로만 피가 몰리고 다른 한쪽은 피가 미치지 못한다. 물화길이 뻥뻥 뚫려 있어야 보부상들이 구석구석 다니며 지역 곳곳을 살아가게 만든다. 하지만 신석주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 천봉삼이 풍등령 장삿길을 뚫자 신석주는 길소개(유오성)를 시켜 이제 물화길을 끊어버린다. 원산포의 지주들에게 보부상에게는 물화를 내주지 말라고 한 것.

 

하지만 흐르는 강물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천봉삼은 신석주의 독점 체제로 인해 원산포 지주에게 헐값에 명주실을 울며 겨자 먹기로 팔아온 상촌마을과 거래를 틈으로써 보부상들의 물화길까지 열어 놓는다. 이것은 <객주>가 이야기를 그리는 방식이다. 신석주는 막으려하고 천봉삼은 뚫으려 한다. 신석주는 육의전과 보부청 뒷거래를 이용해 돈을 모으려 하지만 천봉삼은 이 뒷거래를 끊기 위해 도접장 선거에 나가 20만 보부상들의 지지로 당선된다. 이번에는 신석주가 당선된 천봉삼을 우피밀매와 소밀도살 누명으로 죽이려하지만 결국 살아난 천봉삼은 이제 말뚝이(말린 명태) 덕장을 독자적으로 운영해 신석주의 독점 체제를 무너뜨리려 한다.

 

독점으로 몇몇 일부만이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나머지는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길. 그 독점을 뚫어서 모두가 아주 풍족하진 않아도 조금씩이나마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여는 길. <객주>가 육의전 신석주와 보부상 천봉삼이라는 두 인물의 대결을 통해 그리고 있는 이야기다. 아마도 신석주의 독점 체계 안에서는 빈익빈부익부가 당연한 결과로서 나타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과적으로는 나라 경제의 파탄을 불러오는 일이다.

 

이 이야기는 <객주>라는 사극이 지금 현재 방영되고 있는 이유다. 19세기말에 있었던 보부상들의 활약을 다룬 드라마지만 이 독점자본과 영세 상인들의 문제는 여전히 지금 우리네 현실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적은 돈으로 장사를 하거나 가게나마 차려 한 가족 생계를 만들려는 소시민들 앞에 대기업들의 자본 앞에 장삿길을 잃고 물화길을 잃는 일이 어디 19세기말에나 있었던 일인가.

 

한 세기가 훌쩍 지나간 지금은 어쩌면 더 체계적이고 공고해진 시스템으로 독점자본들의 매점매석이 그 어느 때보다 정교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신석주에 대적하는 천봉삼의 고군분투에 마음이 닿는 건 우리네 현실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 반증이 아닐까. 시대가 바뀌어도 여전한 육의전들이 세상의 장사길을 독점하는 사이 가난한 이 땅의 보부상들은 가슴을 치며 <객주>의 천봉삼 같은 인물을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징비록>이 현재에 던지는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

 

그건 알아라. 양반이 내지도 않는 조세, 우리처럼 피죽도 못 먹는 사람들이 내고 평생 군역에 시달린다. 특산품까지 공납하라고 목을 죄니 이 나라가 누구를 위한 나라란 말인가. 이런 나라에 살 바에야 왜놈이든 되놈이든 중요치 않다.”

 

'징비록(사진출처:KBS)'

KBS 주말사극 <징비록>에서 조선의 매국노 사화동은 류성룡(김상중)에게 그렇게 일갈했다. 반역자지만 왜구들의 첩보활동을 폭로하면서 목숨을 구걸한 사화동을 류성룡이 구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자 던진 한 마디다.

 

실록에 등장하는 사화동은 진도 출신으로 일본에 잡혀가 온갖 충성을 다한 자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죽음에 즈음해 던지는 일갈은 수백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마치 현재에까지 와 닿는 듯하다. 왜구들의 출몰로 피폐해진 백성들이지만, 그들을 더욱 피폐하게 만들어 심지어 나라를 버리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왕과 대신들이다. 사화동은 말한다. “내가 죽을죄를 지은 건 사실이지만 날 이렇게 만든 건 당신네들 양반과 왕이다.”

 

결국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백성들에게 나라란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양반과 왕은 붕당 정치라는 틀 안에서 권력 게임을 계속 하고 있다.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동인을 서인들을 밀어내고 정권을 손아귀에 넣고 있지만 동인의 거두였던 최연경이 삼봉을 자처했다며 무고로 끌려와 옥사하면서 조정은 다시 윤두수와 정철을 앞세운 서인들이 장악한다. 왕은 이 동인과 서인 사이의 밀고 당기는 힘의 균형을 통해 정치를 이끌어가려고 한다.

 

이 붕당정치는 정치 역학으로서는 이해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붕당정치 속에서 정작 민초들의 삶은 점점 힘겨워졌다는 점이다. 게다가 사화동의 입에서 나온 비격진천뢰가 의미하는 것처럼 이미 조선의 군사기밀들이 첩자들에 의해 왜에 넘어가고 있는 와중에도 선조와 대신들은 그런 사실조차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양반과 왕 사이에서 벌어지는 권력의 쟁투가 국가에 드리워진 위기를 가려버리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

 

류성룡이 임진왜란을 겪은 후 낙향해 쓴 <징비록>은 바로 그 피로 물든 산하를 뒤늦게 되돌아보며 참회하는 마음으로 적어나간 책이다. 수차례 정치를 권하는 조정의 요구를 마다하고 <징비록> 집필에 말년을 쏟아 부은 이유는 다시는 그런 위기상황을 반복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지금 현재 왜 <징비록>이 다시 꺼내져 사극이라는 형태로 보여지고 있는가 하는 근거이자 의도일 것이다. 지금 우리네 서민들의 삶을 돌아보라. 잘 사는 이들이야 더 잘 살게 된 시스템이지만 못 사는 이들은 거의 절망의 끝에 놓여진 상황이다. 물론 <징비록>이 그 위기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건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이지만, 이 시대가 처한 위기는 그것보다는 경제적인 위기가 더 크다. 지금은 전쟁보다 무서운 게 경제위기다. 전쟁조차 경제적인 이유로 벌어지는 것이니 말이다.

 

나라의 살림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 그 빈 국고를 채우기 위해 서민들의 조세부담을 더 얘기하는 상황은 저 사화동의 일갈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 와중에 정치는 서민을 서로 호명하지만 사실 관심은 권력에 집중된 느낌이다. 모두가 서민을 얘기하지만 서민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이유다.

 

<징비록>이 그토록 긴 세월을 넘어 이 시대에 다시 재해석되면서도 어떤 공감대를 주는 이유는 거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민초들의 삶이 지금의 서민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아픈 인식에서 비롯한다. 앞으로 펼쳐질 임진왜란으로 얼마나 많은 무고한 이들의 삶이 도륙될 것인가. 그리고 이 위기의 국가를 구원하는 건 과연 누구인가. <징비록>이 현재에 던지는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이다.

 

<강남1970>은 왜 이민호를 캐스팅했을까

 

<강남1970>은 제목에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그대로 집어넣었다. 1970년대의 강남.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이것은 지금의 강남이라는 공간이 막연히 표징하는 의미와 맞닿아있다.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도열한 빌딩들과 회사들은 우리네 상류층의 막강한 자본을 상징하고, 도곡동에서 대치동, 압구정동에 들어찬 천정부지의 집값을 자랑하는 아파트들은 부동산 버블을 타고 커버린 개발시대의 경제에 맞닿아 있다. <강남1970>은 현재의 강남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그 시원을 따라가는 영화다.

 

사진출처: 영화 <강남1970>

어찌 보면 자못 탐구적이고 탐사적일 수 있는 이 영화를 유하 감독은 누아르로 풀어낸다. 마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우울함에 <영웅본색>의 핏빛 액션이 그 겉모습이고, 그 이면에는 강남이라는 공간으로 표징되는 부동산 경제가 어떻게 경제와 정치 그리고 폭력의 야합으로 만들어졌는가가 다뤄진다.

 

그러니 이 영화는 종대(이민호)와 용기(김래원)가 밑바닥에서부터 성공을 위해 안간힘을 쓰며 올라가는 그 액션 누아르에 초점을 맞춰 즐기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연출되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이어지는 형제애와 욕망의 줄다리기는 전성기 시절의 홍콩 영화처럼 때론 속 시원하고 때론 긴장과 이완을 덧붙이는 연출로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민호라는 꽃미남으로 이미지화된 배우를 캐스팅한 것은 그래서 다분히 모험적이지만 결과적으로 잘된 의도라고 판단된다. 이민호는 자칫 의미 과잉이 될 수 있는 영화를 멋진 액션 영화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 배우가 조폭들 사이에서 화려한 액션을 보일 때는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해준다.

 

그러면서 영화는 결코 1970년대의 강남이라는 우리네 현대사에 대한 의미화를 버리지 않는다. 어찌 보면 말끔해 보이는 그 강남이라는 공간은 마치 이민호가 멋진 슈트를 차려입고는 있지만 그 자리에까지 오기 위해 무수한 피들이 그의 손에 묻혀졌던 것과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강남1970>은 그렇게 피로 세워진 이 도시의 한 시절을 그려낸다.

 

물론 그 이면에는 개발시대의 군부독재와 그 정권을 유지하려는 정치인들, 그들과 손대려는 자본가들 그리고 몸뚱어리 하나가 부서져도 욕망을 쟁취하려는 조폭들의 커넥션이 있다. 그 단단한 커넥션은 결국 맨 꼭대기의 권력자들만을 남긴 채 그 밑은 끊임없이 희생되고 대치되는 시스템의 세계다. 시스템을 운용하는 이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제 손에 쥐었다고 생각하는 욕망을 그들은 끝내 쥐고 있지 못한다. 그것이 게임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유하 감독이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에 이은 <강남1970>으로 이른바 폭력 3부작을 통해 일관되게 다룬 것은 권력 시스템과 부딪쳐 깨지는 개인의 문제였다. 그들은 모두 시스템에 저항하거나, 적응하거나 혹은 그 시스템을 장악하려다 실패한다. 그리고 그렇게 몸뚱어리 하나를 갖고 부딪친 개인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시스템의 주인들이 권력을 장악한다.

 

<강남1970>의 마지막 장면은 이 70년대의 이야기가 현재와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과거 70년대 손에 피를 묻혔던 그들은 지금 현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 말끔한 양복 아래 숨겨진 잔인함은 강남이라는 공간의 말끔함을 다시금 바라보게 만든다. 유하에게 강남은 그런 공간이었을 것이다. <강남1970>은 그래서 1970년대를 향수하는 영화가 아니다. 대신 그것은 지금의 문제가 1970년대의 한 지점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다.

 

<빅맨>, 강지환의 복수 아닌 반전을 기대하는 이유

 

선의는 어째서 보상받지 못하고 악용될까. KBS 월화드라마 <빅맨>의 김지혁(강지환)은 강동석(최다니엘)과 그의 가족들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인물이다. 회사의 비리를 모두 뒤집어쓴 것도 모자라 고용된 깡패들에게 끌려가 바다에 던져진다. 육체적 고통보다 더 큰 것은 아마도 배신의 아픔이었을 게다. 그가 바란 건 겨우 가족 하나뿐이었지 않은가.

 

'빅맨(사진출처:KBS)'

하지만 고아로 자라며 그토록 간절했던 가족에 대한 애착은 오히려 그가 희생양이 되는 이유가 되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강동석이 연출한 거짓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까지 오히려 동생 강동석을 걱정했다. 그를 찾아와 부모인 양 살가운 척 하는 강동석의 부모들 앞에서 그는 행복감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김지혁의 착각이 못내 안타까우면서도 어떤 공감대를 일으키는 것은 그것이 우리네 서민들의 현실을 거의 그대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늘 저들은 우리를 가족으로 부르며 지지를 호소하곤 했다. 그래서 순수한 선의로 아낌없이 지지를 보낸 후엔 어떻게 되었는가.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말하면서 일부 기득권층을 위한 정책들을 만들었고, 사지에 몰린 서민들은 고통의 바다 속에 던져졌다.

 

김지혁이 바란 것이 그저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는 사실이 못내 아프다. 그것은 바로 우리네 서민들의 소박한 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단한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명예와 출세를 꿈꾸는 것도 아니다. 그저 가족끼리 단란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 하지만 이 소박하고 순수한 꿈은 어쩌면 너무 소박하고 순수하기 때문에 악용된다.

 

동생으로 알고 있는 강동석을 위해 자신이 대신 죄를 뒤집어쓰는 것을 알리지 말아달라고 하는 김지혁의 말이나, 또 동생을 위해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를 선선히 보내주는 김지혁의 행동에 강동석은 아무런 감흥이 없다. 보통 사람의 마음이라면 가슴 먹먹함을 느껴야 할 일이지만 애초부터 사람보다 돈이나 권력에 대한 욕망이 우선인 그들에게 김지혁의 인간적인 행동들은 그저 우스운 일로 치부된다. 무감한 그들은 소시오패스의 섬뜩함을 보여준다.

 

김지혁의 선의가 악용되는 그 과정 속에서 그의 선의를 믿고 시장 부지를 내놓았던 시장 사람들도 악용된다. 한 사람은 자살을 선택하고 한 사람은 자신의 가게를 팔아 시장상인들에게 내놓는다. 서민들의 편에 섰던 김지혁의 불행은 고스란히 서민들에게도 이어진다. 이것이 과연 낯선 풍경일까. 우리는 무수한 정치 현장에서, 선거 속에서 이런 풍경을 보아오지 않았던가.

 

돌아온 김지혁의 복수극은 그래서 지금 우리네 현실의 무게감을 충분히 담아내고 있다. 대중들이 그의 제대로 된 복수를 꿈꾸는 이유다. 하지만 여기에도 현실이 어른거린다. 그가 제 아무리 맨발로 야구방망이 하나를 들고 현성그룹을 찾아간다고 해도 반전은 일어나지 않는다. 거대한 건물 앞에 맨발로 선 그는 그저 초라해 보일 뿐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조화수(장항선)라는 더 강력한 악이다. 악을 더 큰 악으로 대항하려는 것. 선의가 그 순수한 힘으로 악과 대항할 수 있는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시장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나선 김지혁의 복수극은 서민들을 마음을 움직이는 구석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악을 무너뜨리기 위해 더 큰 악을 불러오는 복수에 머물지 않고 상황의 반전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건 너무 큰 기대일까. 선의가 선의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세상은 여전히 요원한 걸까.

'지붕 뚫고...', 웃음을 넘어 공감까지 하이킥!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이순재는 김자옥을 위한 이벤트로 3천만 원 가까운 엄청난 비용을 쓰고는 그것을 벌충하기 위해 가족들을 모아놓고 비상시국선언을 한다.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절반으로 줄이라는 것. 그러자 그 집에 얹혀사는 세경과 신애는 쫓겨나는 건 아닌가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세경은 스스로 월 60만원 받던 것을 깎겠다고까지 말하며 앞장서서 비용절감에 나선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이순재는 홈쇼핑으로 김자옥을 위해 고가의 코트를 선물한다.

이 때 이순재의 양심이 하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네가 저지른 일로 왜 가족들이 고생을 해야 하냐. 너 정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이 양심의 말은 그의 행동과 비교되면서 보는 이들을 웃게 만들지만, 이 전체 이야기는 절대 웃지만은 못할 뉘앙스를 갖고 있다. 이 시트콤 속에서의 가족은 한 나라로도 읽히고, 그 가계살림의 파탄은 나라경제의 파탄으로도 읽힌다. 이순재의 생각 없는 낭비가 가족들의 쪼들림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일은 엄한 데서 저질렀지만 늘 국민들이 고통분담을 해야하는 상황을 떠올리게 하고, 그래도 열심히 절약하려는 세경의 모습은 눈물겨운 서민들의 건강함을 떠올리게 한다.

'지붕 뚫고 하이킥'은 이전에도 이 가족과 이웃의 이야기를 통해 나라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 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순재의 공언으로 시작된 '만 마리 학접기 사건'이다. 김자옥에게 접지도 않는 학을 접고 있다고 말하고 만 마리를 접어 선사하겠다고 공언한 이순재는 그 말을 책임지려고 정보석에게 회사도 나오지 말고 학을 접으라고 시킨다. 정보석은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일을 아르바이트를 고용해 하기 시작하는데, 그 파급효과가 미국, 인도 등 점점 세계적으로 퍼져나가 나중에는 개성공단에서 학을 접는 상황까지 커져나간다는 이야기다.

학을 접기 위해 전 세계인이 들썩거린다는 그 이야기가 웃음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네 경제가 어떻게 굴러가는가를 에둘러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가진 자들에게는 별거 아닌 일로 비롯된 소비가 전체 경제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것. 물론 학 한 마리 접는데 백 원씩 받기 위해 여기저기서 달려드는 아르바이트생들의 이야기에는 씁쓸한 구석도 있다. 거기에서 청년들의 취업문제가 떠오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런 경제 불황 속에서 사회가 웃음을 잃어가는 것은 당연지사. '지붕 뚫고 하이킥'이 가볍게 던지는 웃음 한 방에 잠시 동안 시름을 잊게 되다가도, 그 시대를 공감하는 이야기가 짠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웃음을 넘어 공감까지 갖게 되는 것. 이것은 '지붕 뚫고 하이킥'의 웃음 코드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지붕 뚫고 하이킥'은 지나치게 심각하지 않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그것은 시트콤의 본분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들 어려운 시국에 지나치게 가벼운 것도 그다지 좋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지붕 뚫고 하이킥'이 서 있는 지점은 실로 절묘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시트콤은 웃음은 물론이고 공감을 통한 흐뭇함이나 감동까지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여느 심각한 드라마도 하지 못하는 것을 이 시트콤은 제대로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굶겨서 웃기는 시대, 먹여서 웃긴 '무한도전' 그 의미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리얼리티의 재료는? 바로 음식이다. '무한도전'은 일찍이 이 음식이 주는 식욕과 굶주림 사이에서 리얼리티를 포착해 큰 웃음을 주었다. '1박2일'의 복불복에서 가장 많이 쓰인 조건은 먹음직한 음식 앞에서 굶는 것이었고, '패밀리가 떴다'는 프로그램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음식을 만들어먹는데 쓴다. 웃음의 포인트도 모두 이 음식과 관련된 것들이 가장 크다. 아무리 설정과 연기를 한다 해도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음식 앞에서는 리얼한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주로 음식을 활용해 웃음을 주는 방식은 굶기는 쪽이 많았다. 이유는 아마도 여러 가지일 것이다. 과거 '무리한 도전' 시절, 정준하가 우동을 몇 그릇씩 먹어야 하는 미션도 있었지만 배부름이 주는 리얼리티는 어딘지 거북한 면이 있다. 굶주림의 정서가 주는 공감대가 서민들의 정서와 맞닿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배고픔이 주는 웃음은 풍요의 시대의 정반대 그림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더 큰 웃음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한도전-박명수의 기습공격'편이 선택한 것은 굶주림이 아니라 오히려 먹여서 웃기는 쪽이었다. '서민 경제 살리기'라는 기치를 내건 박명수와 무한도전 멤버들이 기습 공격한 것은 불황에 힘겨워하는 치킨집과 삼겹살집. 불황으로 늘어난 주름과 한숨을 한 방에 날려줄 프로젝트로서 최고 매상을 올려주기 위해 유도부원들과 축구부원들 그리고 개그맨들이 일정 매출 이상 음식을 먹는 미션을 수행했다.

그저 음식점을 찾아가 먹는다면 말 그대로 '서민 경제 살리기' 이벤트 프로그램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한도전'은 그 상황 자체를 웃음의 코드와 연결시킴으로써 리얼 버라이어티 쇼의 진수를 선보였다. 군사들을 출전시켜 전쟁을 치르는 설정극을 음식 먹어치우기와 연결시켰던 것. 미션을 실패하면 음식 값을 치러줘야 하는 박명수 장군(?)의 진두지휘 하에 음식점에 투입된 군사들(?)은 일사분란하게 치킨과 삼겹살을 먹어 치웠다. 설정극을 차용하자 이 단순할 수 있는 미션은, 배부름에 힘겨워하는 군사들을 독려하고 때때로 무와 음료수를 보급(?)해주는 장면들로 전화되면서 버라이어티한 웃음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과거 정준하가 우동을 몇 그릇씩 먹던 '무리한 도전'이 주던 거북한 리얼리티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그것은 이 '많이 먹는 미션'이 '서민 경제 살리기'라는 의미를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많이 먹는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을 때는 그 도전 자체가 무식하고 거북한 일이 되지만, 그것이 누군가를 돕는다는 차원이 되면 보람 있는 일로 바뀌어진다. 그런 면에서 '무한도전-박명수의 기습공격'편은 음식점에도, 운동부원들에게도, 또 '무한도전'에게도 모두 이득을 남겼다. 음식점은 음식을 팔았고, 운동부원은 실컷 음식을 먹었으며, '무한도전'은 그걸 통해 큰 웃음을 얻었다.

불황에 아끼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쓰는 것이다. 경제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소비가 살아나야 한다. '무한도전'의 공격 대상이었던 치킨집과 삼겹살집이 우리네 서민 경제처럼 보이고, 그들이 먹어치우는 엄청난 양의 치킨과 삼겹살과의 전쟁이 불황과의 전쟁처럼 읽혀지는 것은 왜일까. 굶겨서 웃기는 시대, 먹여서 웃긴 '무한도전'의 웃음이 값지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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