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한류스타들의 연이은 드라마 참패 이후, 연기자 파워는 거품이라는 인식이 생겨났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올 최고의 연기자 파워를 보여준 두 인물이 있다. 바로 ‘아이리스’의 이병헌과 ‘선덕여왕’의 고현정이다.
‘선덕여왕’의 성공은 물론 모든 제작진과 배우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지만, 그 중 미실 역할을 백 프로 이상 해낸 고현정의 힘이 컸다의는 것을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사극은 간단하게 말해, 미실이라는 권력을 세워두고, 그 권력을 빼앗아가는 덕만(이요원)의 성장담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사극의 힘은 전적으로 미실에서 비롯되고 미실에 의해 추진력이 생기며, 미실의 패배로 인해 마무리된다고 볼 수 있다.
고현정은 미실을 연기하면서, 냉혹할 정도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었고, 심지어 주인공의 반대편에 선 역할이면서도 주인공이 흠모할 정도의 매력을 발산했다. 덕만의 멘토 같은 역할을 해주고, 결국 덕만을 여왕의 자리까지 올려준 것은 결국 미실이었다. 그러니 그 냉철함 속에 합리적인 사고방식까지 갖추고, 때로는 여성으로서의 인간적인 면모까지 보여주는 미실이라는 역할이 어찌 무겁지 않을까.
고현정은 거의 움직이지 않고 한 자리에 앉아서 세치 혀와 눈 꼬리를 올리고 입 꼬리를 꼬는 몇 가지만으로도 이 사극을 거의 장악해나갔다. 50부까지 팽팽함을 잃지 않고 사극이 흘러온 힘은 바로 이 미실과 그 미실을 연기한 고현정의 호연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미실의 죽음과 함께 그 드라마의 힘을 책임져야 하는 덕만의 모습이 정치지도자로서의 미실을 닮아간다는 점이다. 그만큼 이 드라마에서 미실은 사라졌지만, 그 아우라는 여전히 남은 분량 내내 극 속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아이리스’의 이병헌은 드라마 시장에 영화적 실험성을 가미한 이 한국형 블록버스터 드라마라는 다소 모험적인 세계를 대중적으로 이끌어주는 역할을 해냈다. 이 드라마의 소재나 스토리텔링, 그리고 연출은 결코 쉽거나 대중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대의 대중적 인기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은 이병헌이 보여준 멜로와 액션을 넘나드는 연기에서 비롯되었다 볼 수 있다.
'선덕여왕'(사진출처:MBC)
고현정이 한 자리에 앉아서 몸이 아닌 말로 칼바람 나는 세상을 좌지우지하는 카리스마를 선보였다면, 이병헌은 온 몸으로 세상과 부딪치며 강력한 액션을 통해 카리스마를 보여주면서도 다른 한 편 촉촉이 젖은 눈빛으로 여성 시청층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몸을 아끼지 않는 폭발적인 액션과, 그 몸이 심지어 슬프게까지 느껴지는 처연한 멜로가 아우러지자, 드라마는 끝없이 달리면서도 그 안에 감정을 포획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무엇보다 이병헌의 존재감이 반가운 것은 그간 우리네 드라마 속에서 점차 사라져가던 남성 카리스마의 부활을 보여주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 남성 카리스마는 과거의 마초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감성적인 면이 어우러진 것이란 점에서 의미가 깊다. 이것은 향후 우리 드라마가 그려나갈 남성 캐릭터들의 새로운 방향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병헌이 가진 연기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병헌과 고현정. 이 두 배우가 올해 최고의 연기자 파워를 만들어낼 수 있었던 요인은 뭘까. 그 핵심은 연기자의 본분이라고 할 수 있는 끝없는 새로운 연기에 대한 도전에서 비롯된 것이다. 고현정은 청순한 이미지 틀에서 벗어나 털털한 이미지를 거쳐 이제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까지 소화해내면서 명실공히 연기자로의 확고한 자리를 만들어냈고, 이병헌은 멜로에서부터 피도 눈물도 없는 악역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자신만의 연기영역을 확보했다. 이것은 과거 일부 한류스타들이 이미지의 반복을 보여주던 양상과는 확연히 다르다. 즉 이제는 연기의 질만이 연기자 파워를 만들어내는 시대라는 것을 이 두 배우는 실제로 보여주고 있다.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이 아름다운 최후를 맞았다. 이제 드라마 속에서 다시는 볼 수 없는 인물이지만, 미실이라는 캐릭터는 우리네 드라마史에 남을 족적을 남겼다. 먼저 미실이라는 캐릭터는 사극 속 여성으로서는 이례적이라고 할 만큼 드라마 전체에 힘을 부여하고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힘을 지닌 캐릭터였다. '선덕여왕'의 시작이 덕만으로부터 시작하지 않고 미실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미실이라는 강력한 여성 카리스마를 세워두었기 때문에 그 반대급부로서 덕만(이요원)과 유신(엄태웅), 비담(김남길), 춘추(유승호) 등의 캐릭터가 세워질 수 있었다. 드라마 속에서 자결한 미실 앞에서 덕만이 하는 말, "당신이 없었다면 자신도 있을 수 없었다"는 그 말은 캐릭터에도 해당되는 말이다.
바로 덕만이 술회하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이 미실은 단순히 악역으로 치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때론 강력한 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덕만의 멘토 역할을 해주고, 서로 경쟁하는 관계이면서도 나라를 걱정하는 미실은 악역이라기보다는 시대를 잘못 만난 안티 히어로라고 볼 수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이상적인 덕만과 상반되게 현실 정치 감각을 가진 인물이 미실이다. 덕만이 곧잘 하는 말, "미실이 하는 방식으로 해야겠다"는 말은 이 인물이 가진 뛰어난 능력을 말해준다.
미실은 또한 여성으로서의 카리스마가 무엇인지를 보여준 캐릭터이기도 하다. 미실은 이 사극 속에서 움직임이 거의 없는 캐릭터다. 그녀는 칼을 휘두르거나 전쟁에서 진두지휘하는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저 한 자리에 앉아 판세를 읽고 거기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정치 지도자로서의 카리스마를 갖춘 인물. 칼의 힘보다 더 강력한 말의 힘만으로 상대방을 오금을 저리게 만들 수 있는 인물이 미실이다.
이 정적인 상태에서 온전히 카리스마를 보여야 하는 미실이라는 캐릭터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고현정이라는 연기자다. 그녀는 입꼬리를 살짝 틀고, 눈꼬리를 조금 올리는 것만으로 미실이 가진 힘을 온전히 표현해냈다. 즉 미실이라는 캐릭터는 고현정이라는 연기자에게도 큰 의미가 되는 캐릭터라는 점이다. 고현정은 청순한 이미지에서 탈피해 털털한 이미지로의 변신을 꾀해왔고, 이번 작품을 통해 요염하면서도 악마적이고, 카리스마가 넘치면서도 비극적인 복잡한 캐릭터를 소화함으로써 연기 스펙트럼을 더욱 넓힐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빛나는 캐릭터의 하차가 아쉽기 때문일까. 미실의 죽음 앞에 '선덕여왕'의 인물들은 저마다 예의를 표하는 모습을 보였다. 1995년 '모래시계'에서 고현정은 청순한 모습으로 최민수와 연기 호흡을 맞추며 주목을 끌었다. 그런데 10여 년이 지난 지금, 고현정에서 당시 최민수가 보여주었던 카리스마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실의 최후에, 드라마史에 길이 남게 된 모래시계' 태수(최민수)의 죽음이 연상되는 것은, 미실이라는 캐릭터가 일궈낸 여성 카리스마의 절정과 그것을 연기한 고현정의 변신이 놀랍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한 시대는 흘렀고, 카리스마 역시 남성에서 여성으로 옮겨져 왔다. 미실은 바로 그 지점을 표상하듯 서 있는 캐릭터다.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은 주역은 아니지만 이 사극의 중추적인 역할을 맡고 있다. 이 사극은 바로 이 미실이라는 악역 캐릭터에서부터 그 드라마가 만들어졌고, 그 힘으로 굴러가며 주역은 물론이고 주변인물들까지 이 캐릭터에 의해 창출되고 움직여진다. 이 사극이 가진 미션의 목적 자체가 바로 이 절대 권력의 소유자인 미실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따라서 미실을 연기하는 고현정은 어쩌면 이 사극의 가장 중요하고도 힘겨운 역할을 맡고 있는 셈이다. 그녀가 굳건히 버티고 있어야 극은 흥미진진하게 흘러갈 수 있다.
이것은 '드림'의 강경탁(박상원)이란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드림'이 스포츠 에이전트를 소재로 다룬 드라마로서 그 핵심적인 틀이 복수극에 있다면, 그 틀을 쥐고 있는 인물은 강경탁이다. 비정하고 철두철미한 이 악역은 청춘을 온전히 바쳐 개처럼 일해 부와 명예를 쌓아온 남제일(주진모)을 저 바닥까지 내치는 인물이다. 이로써 남제일은 이 드라마 속에서의 미션을 부여받는다. 그는 아무 것도 없는 상황에서 저 스스로 스포츠 에이전트로서 성공해 강경탁을 무릎 꿇려야 한다. 따라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강경탁을 연기하는 박상원은 이 드라마의 키를 쥐고 있는 셈이다.
주말 드라마, '스타일'의 박기자(김혜수)는 이 드라마 속에서 도무지 넘어서기가 어려울 것처럼 보이는 악역이다. 직장상사의 표상처럼 과장되게 그려지는 이 박기자는 이서정(이지아)이라는 말단 직원의 캐릭터를 구축해주는 인물이다. 박기자로부터 갖은 핍박을 받는 이서정은 이로써 그녀를 뛰어넘으려는 욕망을 갖게 된다. 이서정의 성장 드라마로도 볼 수 있는 이 '스타일'에서 박기자는 그 성장의 동기를 제공한다. 박기자 역할의 김혜수가 그 어떤 주역들보다 돋보이고 중심축에 서 있는 느낌을 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처럼 고현정이나 박상원, 김혜수 같은 이제는 중견이 된 연기자들이 매력적인 악역으로 돌아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악역이란 드라마의 척추 같은 역할을 한다. 극을 만들어내고 극을 움직이게 하며 심지어 거꾸로 주역을 이끌어가기도 하는 악역이 주역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역할을 맡으면서도 악역이라는 이유로 자칫 꺼려할 수 있는 이 배역을 기꺼이 끌어안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이들은 여전히 주역을 맡아도 빛날만한 자신들만의 아우라를 가진 연기자들이 아닌가.
연기자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점차 스타라는 허울보다는 연기자라는 실재에 더 몰입하는 것은 실로 중요하다. 이것은 중견 연기자라는 칭호를 받는 그들에게도 그렇지만, 우리네 드라마 전체의 성장을 위해서도 그렇다. 한때 청춘스타들로 빛나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 순간 사라져버리는 연기자들은 어찌 보면 우리 드라마의 큰 손실이기도 하다. 그들이 기꺼이 스타의 스포트라이트보다 드라마의 척추 역할로 돌아오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몇몇 한류스타라는 빛 속에 여전히 서서 그 언저리를 배회하는 연기자들이 외면당하는 것은 이처럼 큰 틀 속에서 자신이 해야할 역할보다는 여전히 하고 싶은 역할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대중들의 드라마를 보는 시각은 그만큼 성숙해졌다. 그들은 이미 드라마 속에서 악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고, 심지어 그 악역 속에서 어떤 매력을 발견해내 기꺼이 박수를 쳐준다. 드라마의 성패가 그 드라마를 움직이는 매력적인 악역의 발굴에 있다고 볼 때, 어쩌면 이런 선택을 하는 중견 연기자들의 어깨 위에 우리네 드라마의 향방이 달려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매력적인 악역의 중견들, 그 의미있는 귀환은 주목받고, 박수받을 만한 일이다.
'선덕여왕'이라는 사극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누구일까요. 제목이 '선덕여왕'이니 덕만(이요원)이 그 주인공일까요. 그녀와 짝패를 이룰 천명(박예진)이 그 주인공일까요. 아니면 이 모든 싸움의 결과를 가져갈 김유신(엄태웅)과 김춘추가 그 인물일까요. 저는 이 모두가 아쉽게도 그 주인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선덕여왕'의 힘은 다른 곳에서 나오고 있으니까요. 그 인물은 바로 미실(고현정)입니다.
이것은 미실이 이 사극에서 해오는 역할을 통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미실이라는 존재가 없다면 선덕여왕이라는 존재도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신하들을 자신의 수하로 끌어들여 강력한 권력을 소유하고 전횡하는 미실은 이 사극의 전제조건입니다. 결과적으로 생각해보면 덕만을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보낸 것도 미실이고, 그 곳에서 천문을 읽는 훈련과 세계의 문물을 경험하게 한 장본인도 미실이 됩니다.
미실은 이 사극의 가장 중심에 놓여져 있는 힘입니다. 그녀는 스스로를 카리스마로 무장하고 등장해 극 전체에 긴장감을 부여했고, 그 카리스마를 통해 상대방을 성장시키기도 했습니다. 그녀와 대적하는 어린 덕만은 바로 그 행위만으로 자신의 아우라를 만들 수 있었죠. 이것은 후에 그녀와 대적하는 천명, 그녀와 대적하는 유신 같이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미실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들의 캐릭터는 더욱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이죠.
미실은 왕을 허수아비처럼 세워놓기도 하고, 신하들을 자신의 발밑에 줄세워놓기도 합니다. 설원공(전노민)과 세종(독고영재)은 미실을 가운데 두고 묘한 경쟁관계에 놓이고, 그 아들들인 하종(김정현)과 보종(백도빈) 역시 충성경쟁을 하게 합니다. 이 충성경쟁이라는 미묘한 관계는 사극에 어떤 흐름을 만들면서도 변수를 가능하게 합니다. 결국 미실이라는 존재의 카리스마는 같은 편 내부에서도 독특한 힘과 방향성을 만들어내게 하는 것이죠.
그리고 미실은 이 사극의 이야기를 주도해나갑니다. '사다함의 매화'라는 에피소드 속에는 미실의 비밀스런 과거가 숨겨져 있고, 그 과거는 또한 현재의 권력과 그대로 연관관계를 가집니다. 이 비밀 한 가지를 틀어쥐고 있는 미실을 통해 사극은 흥미진진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는 미실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사극의 메시지도 숨겨져 있습니다. 민심과 천심에 대한 미실과 덕만의 대화는 이 사극이 말하려는 정치적 대결구도의 실체를 드러내줍니다. 천심을 틀어쥐고 민심을 휘두르려는 미실과 민심을 천심처럼 읽어내려는 덕만은 권력에 대한 서로 다른 시선을 드러내줍니다.
미실이 이 사극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는 잠시 미실이 없는(혹은 카리스마 없는 미실) 이 사극을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미실이 무너지면 사실상 이 사극은 끝이 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미실을 연기하는 고현정이 어떤 실패 앞에서도 늘 미소짓고 적까지도 자신의 수하로 끌어들이려는 여유있는 모습을 연기해보여줄 때, 이 사극은 힘을 발합니다. 혹자는 고현정의 연기가 이요원에 비해 단선적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미실이라는 역할은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드러내지 않을 때, 생명력이 길어집니다. 이것은 덕만과는 정반대죠. 덕만이 감정적인 인물에서 차츰 감정을 숨기는 인물로 성장하는 과정과 미실이 감정없는 인물(마치 신처럼)로 서 있다가 차츰 감정이 드러나는 인물(역시 인간이었다!)로 변화해가는 과정의 쌍곡선은 이 사극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악역들이 드라마의 핵심적인 힘을 담당하는 것처럼 '선덕여왕'의 미실도 이 사극의 중추적인 힘으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타의 극과 다른 점은 미실이 거의 모든 부분에 그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 힘겨운 압력을 버텨내고 있는 고현정의 고군분투가 놀랍게 생각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아내의 유혹’에서 악녀 신애리(김서형)의 트레이드마크는 소리를 바락바락 지르며 눈을 치켜뜨는 것이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 드라마는 거친 목소리만 들어도 뭔가 사건이 벌어진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바로 이 연기로 시청자들을 바들바들 떨게 만들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등장한 악녀들은 신애리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소리를 지르기보다는 차분해졌고, 감정적이기보다는 오히려 논리적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눈을 치켜뜨기는커녕 잔잔한 미소를 지어보이는 그녀들이 더 살벌한 것은.
‘찬란한 유산’에서 백성희(김미숙)는 미소 짓는 악녀의 절정을 보여준다. 남편의 사고소식을 듣고는 보험금을 혼자 챙기려 배다른 딸인 은성(한효주)과 그 동생 은우(연준석)를 길거리로 내쫓고, 그것도 모자라 정신지체아인 은우를 멀리 내다버리기까지 한다. 살아온 남편을 반기기는커녕 갖은 거짓말로 은성을 만나려는 그를 절망에 빠뜨리고, 모든 것이 탄로 나자 거꾸로 은성을 거둬 유산까지 주려하는 장숙자(반효정) 여사를 찾아가 거짓말로 은성에게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씌운다.
그녀는 마치 사이코패스처럼 자신이 하는 행동에 감정을 최대한 숨긴다. 주도면밀하게 계산된 거짓말은 이 차분하게 숨겨진 감정 뒤에서 좀체 진면목을 드러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 앞에서 답답할 정도로 착하기만 한 고은성은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다. 뭐라 단 한 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그저 “죄송하다”고 말하는 그녀는 이 미소 짓는 악녀에게 완벽한 패배를 시인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미소 짓는 섬뜩함은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 역시 마찬가지다. 그녀는 늘 방긋 웃고 있지만 그 웃음 뒤에는 살벌한 칼날이 느껴진다. 덕만을 놓친 병사의 목을 치면서 그 피가 얼굴에 튄 채로 살짝 웃는 모습은 귀기스럽기까지 하다. 앞에서는 공손한 척 예를 다하다가 갑자기 귓속말로 천명공주(신세경)에게 “도망쳐라!”하고 명령할 때, 그 숨겨진 칼은 보는 이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시티홀’의 고고해(윤세아) 역시 같은 부류다. 이름처럼 앞에서도 고고한 척 우아함을 떨지만 사실은 뒤에서 한 사람을 파멸로 몰아붙이는 그 모습은 똑같은 미소짓는 악녀의 자질을 가졌다. 자신이 갖고 싶은 조국(차승원)을 취하기 위해 그녀는 신미래(김선아)를 파렴치하고 부도덕한 정치인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녀의 목적은 그러나 조국이라기보다는 그를 통해 획득하려는 권력이다. 그런 면에서 그녀의 우아한 악행은 때론 자본이 행하는 그것과 닮은 구석이 많다.
악녀들이 이처럼 감정을 숨긴 모습으로 진화하는 것에서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왜 악역이 아니고 악녀냐는 것이다. 이것은 거꾸로 드라마의 주인공이 점점 여성 편향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한 바가 크다. 여성과 남성의 대결구도보다는 여성과 여성의 대결구도가 그만큼 볼만해졌다는 얘기다. ‘아내의 유혹’의 신애리와 대결하는 것은 바로 구은재(장서희)라는 여성이고, 이것은 ‘찬란한 유산’의 백성희-고은성, ‘선덕여왕’의 미실-덕만, ‘시티홀’의 고고해-신미래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이러한 여성과 여성의 대결구도에 우리네 드라마가 가진 갈등 구조 속에 빠질 수 없는 멜로라인이 결부되면 그 대결구도는 더 힘을 갖게 된다. 그리고 악녀들은 이제 자신들이 가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상대방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그것은 바로 감정 자체가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철두철미해진 섬세함을 무기로 삼는 것이다. 요즘 드라마들에 유독 악녀들이 많고 그녀들이 살벌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 때 귀가시계라고 불렸던 '모래시계'는 고현정과 최민수에게는 하나의 이정표가 되는 작품이었습니다. 고현정의 순수하고 가녀린 이미지와 최민수의 강인하면서도 남성적인 이미지는 이 작품을 통해 빛을 발했죠. '모래시계'가 1995년도에 방영되었으니 벌써 14년이나 흘렀군요. 그간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긴 시간을 지나 공교롭게도 이 두 배우는 나란히 사극에서 악역을 맡았습니다.
'태왕사신기'에서 화천회 대장로로 분한 최민수는 실로 대단한 연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쇠를 긁는듯한 낮은 목소리에 음침한 눈빛과 구부정한 몸 동작이 주는 섬칫한 느낌은 이 사극을 끌어가는 힘을 만들어주었죠. 그리고 지금 현재 방영되고 있는 '선덕여왕'에서 고현정은 미실이라는 희대의 여걸이자 팜므파탈로서의 악역을 소화해내며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 최민수가 보여주었던 연기의 세계는 양극점을 오가는 것이었죠. '모래시계'에서 보여주는 카리스마는 '결혼이야기'나 '사랑이 뭐길래'에서 보여주는 살짝 망가지는 털털한 모습과는 대비되는 것이지만, 최민수는 이 양극점을 능수능란하게 오가는 연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영화 '홀리데이'에서의 살벌한 악역을 보여주었던 최민수는 이제 딱히 주연이 아니라도 주목받을 수 있는 연기자의 면모를 갖추었고, '태왕사신기'에서 그 폭발력을 입증했습니다.
반면 고현정은 여성 연기자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이미지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이 상대적으로 어려웠죠. 하지만 그녀는 차츰 차츰 자신의 겉껍질을 벗어던짐으로써 연기자로서의 새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해변의 여인'에서 보여준 막말과 쌍욕은 견고했던 그녀의 신비주의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졌고, '여우야 뭐하니'에서는 솔직한 성담론을 통해 순수하기만한 이미지에서 어떤 털털한 면모를 부가시켰습니다. '선덕여왕'에서 미실이라는 악역을 소화해낼 수 있게 된 것은 이 오랜 기간동안 해왔던 그녀의 (스타에서 연기자로의)연착륙이 이제는 성공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사극 연기는 특히 더욱 어렵다고 합니다. 왠만한 연기자들도 그 독특한 사극 어법에 들어가면 당황할 때가 많다고 하죠. 게다가 악역이라면 더욱 어려울 것입니다. '모래시계'에서 젊음의 화려했던 한 시절을 보낸 고현정과 최민수가 이제 사극 속 악역으로 빛을 발하는 모습에서 성숙되어가는 연기자의 한 전형을 보게 되는 것은 저뿐일까요. '모래시계'는 그만큼 멈추지 않고 계속 흘렀고 이들은 쉬지 않고 자신들의 연기 스펙트럼을 여기까지 넓혀놓은 것이죠.
한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고현정과 최민수. 앞으로도 계속 새로운 연기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여주길 기대합니다. (말도 안되는 억측에 휘말려 고생하셨던 최민수씨도 어서 복귀하시기를!)
배우의 변신은 무죄? 아니 이제는 필수다. CF퀸의 이미지 속에 갇혀 지냈던 김남주에게 약간은 푼수에 무식을 양념으로 얹은 '내조의 여왕'의 천지애라는 캐릭터는 구원이었다. 아낌없이 무너지는 천지애를 통해 김남주는 이제 제2의 연기 인생에 접어들게 되었다. 순수의 아이콘으로 하늘 위에 둥둥 떠 있던 고현정은 수차례에 걸친 연기 변신을 통해서야 비로소 땅에 안착할 수 있었다. 그녀는 영화로는 '해변의 여인'으로 드라마로는 '여우야 뭐하니'로 일상적인 맨 얼굴을 대중들 앞에 내밀었고, '히트'를 통해 가녀린 이미지에 강인함을 덧붙였으며,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이제 깨는 모습으로 개그맨을 웃기기까지 했다. 그녀가 '선덕여왕'의 악녀 미실을 연기한다는 사실은 그녀의 스타로부터 배우로의 연착륙이 이제 모두 안전하게 끝났다는 걸 말해준다.
'내조의 여왕'의 남자 배우들의 면면을 보면 변신에도 어떤 단계가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누가 뭐래도 남자 배우들 중 가장 주목받은 캐릭터는 태봉(윤상현)이고 그 다음이 준혁(최철호)이며, 마지막이 달수(오지호)다. 윤상현은 '겨울새'로 먼저 얼굴을 알렸고, '크크섬의 비밀'에서 어떤 이미지를 형성했지만, 사실상 그의 캐릭터를 확고하게 심어준 것은 '내조의 여왕'의 태봉이다. 하지만 윤상현의 인기는 태봉이라는 캐릭터가 부여하는 점이 많다. 따라서 이 갑작스레 부각된 스타는 이제 다음 작품부터 배우로서의 시험대에 올라갈 수밖에 없다. 비슷한 캐릭터를 선택하면 인기는 유지되겠지만 배우로서의 길은 더 멀어질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연기 변신만이 배우로서의 생명을 오래 보장받는 길이 된다.
한편 준혁 역할을 해낸 최철호는 이번 연기를 통해 변신에 성공함으로써 또 하나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야인시대', '장길산', '불멸의 이순신', 그리고 '대조영'까지 시대극에서 주로 얼굴을 들이밀었지만 그가 주목을 받은 것은 '천추태후'의 초반부에 잠깐 등장한 경종 역할이었다. 여기서 그는 광기어린 연기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이처럼 강렬한 인상은 한편으로는 부담이 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준혁이라는 코믹한 역할은 최철호에게서 그간 없었던 친근한 이미지를 만들어주었다. 이제는 광기어린 얼굴 뒤에 코믹한 이미지를 안전장치처럼 달고 있으니 이런 연기변신을 가능케 해준 '내조의 여왕'은 최철호에게 연기자로서의 날개를 달아준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익숙한 캐릭터를 반복한 달수 역할의 오지호가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한 것과 상반된 결과다. 연기 변신이 필요한 시기에 변신을 하지 못하면 그것은 연기자 개인에게도 부담이지만 그 드라마에도 부담이 될 수 있다. '남자이야기'의 박용하가 그렇고 '자명고'의 정려원이 그렇다. 박용하는 거친 남자로의 이미지 변신을 꿈꾸었지만 부드러운 남자로서의 이미지를 넘지는 못하고 있다. 그것은 사극이라는 옷이 부담스러운 정려원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물론 모든 연기자가 변신을 요구받는다는 것은 아니다. '시티홀'의 김선아와 차승원은 새로운 옷이 아니라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의 연기를 통해 호평을 이끌어내고 있다. 이런 경우는 아직까지 그들이 가진 자신의 고정 이미지가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변신이 어렵다면 이처럼 자신의 옷에 가장 잘 맞는 작품 선정에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하지만 이것도 늘 같은 모습으로는 식상한 연기로 추락하게 된다. 박중훈이 똑같은 이미지를 고수해도 작품마다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변주해온 것은 그 오랜 인기의 비결이기도 하다. 비슷해도 조금씩 성장하는 느낌의 작은 변신은 늘 필요한 법이다.
타인의 삶을 연기하는 것이 직업인 이상, 늘 같은 모습만 보여준다면 어찌 그 직업을 배우라고 할 수 있을까. 배우의 변신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이다. 그리고 그 변신을 위한 각고의 노력은 결국 작품을 통해 드러나고, 대중들에 의해 보상받기 마련이다. 이른바 '되는 드라마'의 대부분에서 이 배우들의 연기변신을 목도하게 되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어제 1회를 너무도 재미있게 봐서, 2회가 시작도 하기전에 TV앞에 앉아 광고를 지루하게 느끼지 않고 기다렸다. 2화도 역시 미실(고현정)의 카리스마로 도배되었다. '고현정만을 위한 드라마'란 말이 나올법도 하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아 보인다. 초기 비중이 높을뿐이지 앞으로의 전개를 예상해 본다면 기우에 불과하지 않을까. 미실의 매력은 '복수심'이 아닌 자신의 꿈(황후)을 이루고자 하는 야망이기에 강력하게 어필하고 있다. 하얀거탑에서 나온 장준혁..
그녀들의 변신은 어디까지일까. 홍상수 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노화가의 젊은 아내로 능청스런 연기를 보여준 고현정과, 봉준호 감독의 '마더'에서 모성애의 전혀 다른 모습을 끄집어내는 소름 돋는 연기를 보여준 김혜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녀들의 이미지 변신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홍상수 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고순 역할을 한 고현정은 이제 그 능청스런 모습이 자연스럽다. '모래시계'나 '봄날'의 청순한 이미지가 깊이 각인된 분들이라면 언제 고현정이 저렇게 변했는지가 놀라울 만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단번에 이루어진 변신이 아니다.
2006년 홍상수 감독을 만난 고현정은 '해변의 여인'을 통해 파격적인 이미지 변신을 보여주었다. “차가 귀엽네요”라는 말에 “똥차예요”라고 말하고, “키가 크다”는 말에 “잘라버리고 싶어요”라는 말했던 그녀는 그 때부터 이미 자신을 코르셋처럼 옥죄이며 숨막히게 만드는 신비주의를 벗어버리려 작정한 바 있다.
드라마 '여우야 뭐하니'에서 고현정은 젊은 남자의 사랑이 부담스러운 노처녀 역할을 자임하며 솔직한 성에 대한 이야기도 주저하지 않았고, '히트'에서의 여반장 역할은 그녀의 고정되어온 가녀린 이미지를 깨뜨렸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 이제 다시 홍상수 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로 온 고현정은 이제 자기 몸에 맞는 옷을 입은 듯 연기가 편안해졌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선덕여왕'에서 미실이라는 희대의 여걸로 돌아온다. 과거였다면 차라리 선덕여왕 역할이 어울렸을 그녀가 파격적인 카리스마와 권력욕에 불타는 미실 역할을 맡았다는 것은 이제 그녀의 이미지 연착륙이 성공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좌표가 될 것이다.
한편 봉준호 감독의 '마더'로 김혜자는 자신의 한 평생 연기의 공이자 또 한 편으로는 무거운 짐인 국민 엄마의 틀을 부숴버렸다. 김혜자를 푸근하고 정이 넘쳐 아무나 그 품에 안기고픈 엄마의 이미지로 기억하고 있는 분이라면 이 영화가 주는 파격은 실로 충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김혜자를 위한 영화이기도 하다. 봉준호 감독은 김혜자가 갖고 있는 엄마의 얼굴에서 모성애의 또 다른 측면 즉 광기어린 모습까지도 찾아냈다. 그러니 영화 '마더'의 파격은 김혜자의 파격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영화의 도입 부분에서 들판을 걸어오던 김혜자가 갑자기 멈춰 서서 엉뚱하게도 어깨춤을 들썩이며 추는 그 장면에서부터 전율로 느껴진다. 그 춤사위는 흥에 겨운 듯 하면서도 슬프고, 천천히 움직이는 듯 하면서도 광기가 서려있다. 눈빛은 처연한데 그 깊은 눈 속에는 뭐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아픔과 후회가 가득하다.
이 첫 장면이 모든 걸 예고하게 하는 것처럼, 김혜자는 '봉준호' 감독의 '마더'를 통해 모성의 극한 부분까지 달려 나가는 것으로 국민엄마라는 틀을 깨고 또 다른 연기자로서의 변신을 보여주었다.
공교롭게도 고현정과 김혜자, 이 두 연기자의 연기 변신에는 홍상수와 봉준호라는 거장의 손길이 닿아있다. 이들은 모두 자신들의 영화 속에서 배우들이 갖고 있는 고정된 이미지의 파격에 관심을 가졌던 감독들이다. 그로 인해 고현정이 갖고 있는 신비주의와 김혜자가 갖고 있는 국민엄마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신선함으로 변신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결국 가능하게 된 것은 이 두 배우들의 자신의 고정된 이미지를 깨려는 끝없는 노력 때문일 것이다. 그녀들의 변신, 그 끝은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 고현정은 지금까지 이 토크쇼에 출연했던 여타의 게스트들과는 달랐다. 대부분의 게스트들이 독한 무릎팍 도사의 당혹스런 질문에 잔뜩 긴장하고 답변을 준비하는 자세를 보였다면, 고현정은 거의 무방비상태의 허허실실함을 보였다. ‘무릎팍 도사’라는 대결구도의 토크쇼에서 강호동이 날리는 펀치에 대해 고현정은 맞 받아치는 인파이터가 아니라 받아주는 척 피하며 상대방의 힘을 빼다가 어느 순간에는 벌처럼 날카로운 펀치를 날리는 마치 알리 같은 스타일의 토크를 구사했다.
먼저 친구인 이미연이 ‘무릎팍 도사’에 출연한 것에 대해 얘기하면서 고현정은 “짜증나게 예쁘게 나온다”는 표현을 썼다. 어딘지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이 “짜증난다”는 말은 홍상수 감독이 연출한 ‘해변의 여인’에서 그녀가 쏟아냈던 일련의 거친 대사들을 떠올리게 한다. “차가 귀엽네요”라는 말에 “똥차예요”라고 말하고, “키가 크다”는 말에 “잘라버리고 싶어요”라는 말했던 그녀는 그 때부터 이미 자신을 코르셋처럼 옥죄이며 숨막히게 만드는 신비주의를 벗어버리려 작정한 바 있다.
“짜증난다”는 말 한 마디로 기대했던 신비의 탈을 벗어버린 고현정은 스스로 예능 프로그램을 찾아서 보며, “저 상황에서는 이렇게 말해야 하는데”하는 생각까지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쐬기를 박듯, “저 웃겨요”하고 스스로를 우스운 사람이라 표현했다. 재미있는 것은 중간에 강호동이 고현정하면 떠오르는 인물로 ‘모래시계’의 최민수를 거론했을 때 그녀가 보여준 모습이다. 그녀는 추운 겨울 촬영에서 눈물과 함께 흐르던 콧물을 최민수가 닦아주었다고 말하면서 그에게 화면을 보면서 “좀 쉽게 가요”라고 말했다.
이 말은 어찌 보면 신비주의를 본의 아니게 갖게 된 두 스타의 다른 두 길을 말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그 말은 여전히 카리스마의 지존으로 이미지 메이킹되어 여전히 그 이미지 속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최민수에게, 자신이 주목받은 건 결혼과 이혼이라고 스스로 밝히듯 그냥 대중들의 시선을 인정해버리는 그 허허실실함이 어쩌면 해법이 될 것이라고 전하는 조언이 아닐까.
콧물 얘기는 술자리 습관이라고 밝힌 ‘벽 타기(?)’로 이어졌고, ‘무릎팍 도사’는 고현정의 탈신비주의를 향한 안간힘을 돕기라도 하겠다는 듯, 연실 코를 푸는 고현정이란 이미지를 끄집어내, “더러워서 방송 못하겠어요”라는 말까지 서슴없이 던지는 과감성을 보였다. 대중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기대 이상의 시선이 부담스러운 고현정에게 그것은 오히려 그토록 무릎팍 도사를 통해 듣기를 원하던 말이었을 지도 모른다.
조인성, 천정명과 난 스캔들 이야기에서도 그녀는 달변이었다. 자신이 “결혼하자”고 했다는 폭탄 발언을 던진 후에, 그 말을 농담조로 순식간에 바꾸었다. 그리고 조인성은 그 말에 “난 쉬운 여자 싫어요”라고 답했고, 천정명은 “아빠한테 물어봐야 되요”라고 말했다는 걸 덧부여 그들에 대한 배려 또한 잊지 않았다.
고현정은 이제 더 능수능란해졌고, 여유가 생긴 모습으로 돌아왔다. 젊은 시절의 우아하고 청순한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해변의 여인’의 깨는 여자를 거쳐 ‘여우야 뭐하니’의 노처녀, ‘히트’의 맹렬 형사로 자신의 고정된 이미지를 깨는 작업을 해왔다. ‘무릎팍 도사’의 출연은 그 작업이 이제 어느 정도는 일단락되었다는 신호탄으로 보인다. 고현정에서 코현정으로 다가온 그녀. 단지 스타라는 버거운 이미지를 벗어 던진 그녀의 연기자로서의 새 길이 자못 기대되는 순간이다.
“대외홍보용인가요?” 히트(H.I.T. : 강력특별수사팀)의 팀장이 된 차수경 경위(고현정)의 질문에 경찰청장(조경환)의 답변은 정치적이다. “자네가 성과를 낸다면 그건 우리 경찰의 승리고 자네가 실패를 한다면 그건 여성의 실패가 될 테지.” 그리고 이어지는 차경위의 요청. “팀원들 바꿔주세요.” 하지만 완고한 경찰청장의 발언. “그 사람들을 데리고 임무를 완수해!” 이 짤막한 대사들 속에는 이 드라마가 앞으로 보여줄 이야기의 전조들이 모두 숨겨져 있다.
그것은 경찰사회라는 완고한 남성중심적인 사회 속에서 그것도 마이너리티로 치부되는 인물들을 데리고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여성 강력반 팀장의 이야기다. 드라마는 연달아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과 그것을 풀어가는 퍼즐 같은 재미를 줄 것이 분명하지만 그보다 더 기대감이 커지는 것은 바로 캐릭터다. 마치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진한 사연 한 가지씩 가졌을만한 인물들. 그래서 경찰 외부에 따로 지어진 히트 사무실에서 지내는 것이 특권이라기보다는 소외로 느껴지는 인물들. 게다가 총칼이 난무하는 살벌한 현실 속에서 심지어는 유사가족의 형태를 띄게 될 팀의 캐릭터들이니 기대감이 커질 밖에.
차수경, 그녀 속에 남자 있다 무엇이 가녀린 그녀를 연쇄살인범에 집착하게 했을까. 그것은 바로 그녀의 애인이었던 한상민(정호빈)이 연쇄살인범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다. 그 후 죽은 한상민은 한 여자이기만 했던 차수경 속으로 들어와 자리한다. 한상민과 접신한 그녀는 그래서 사는 게 사는 게 아니다. 한상민과 차수경이 만나는 지점, 즉 오로지 연쇄살인범을 쫓는 상황에서야 이 분열된 자아는 비로소 하나가 된다.
여성으로서의 형사는 이 드라마에서처럼 ‘대외홍보용’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여성 특유의 섬세함’이란 장점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이 드라마가 남성을 내세운 여타의 형사물들과 차별점을 이루는 부분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현장에서 강인하고 털털해 보이는 그녀가 집으로 돌아온 시간에서야 제대로 차별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여성으로서의 차수경이 보이는 것. 그러나 그 시간에 그녀를 기다리는 건 아픈 기억뿐이다. 한 남자의 여자로서 사랑 받으며 살고 싶었던 기억. 하지만 부서진 기억.
김재윤, 그녀가 자꾸 눈에 밟힌다
그 기억 속으로 들어오는 남자, 김재윤(하정우)이다. 우연히 가게된 그녀의 집에서 그가 발견하는 것은 곰 인형과 하이힐로 대변되는 그녀의 본모습(여성성)이다. 무엇하나 부족할 것 없고 복잡하게 사는 걸 싫어하는 김재윤에게 그녀의 이중적인 모습은 호기심 이상의 그 무엇으로 다가간다. 안전한 삶을 희구하던 김재윤에게 부서질 것 같은 차수경의 모습은 자꾸만 변화를 요구한다. 그녀 밖의 남자였던 김재윤은 차수경 속에 있는 남자(한상민)를 밀어내고픈 욕구를 갖게될 것이 분명하다.
남 일 상관하기 싫어하는 귀차니스트 김재윤이 검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민초들의 억울함을 풀어줘야 할 그가 그럭저럭 버티다 나중에는 편안하게 변호사나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있다는 건 이 드라마에서 김재윤과 차수경의 갈등과 사랑이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를 예감하게 한다. 차츰 차수경의 안간힘에 눈이 밟히는 김재윤은 지금까지 ‘남 일’이었던 사건들이 차츰 ‘내 일’이 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장용하-김일주, 전형적 형사물의 구도
형사물을 보면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형사. 베테랑에 경험도 많지만 현실적으로는 아무 것도 갖지 못한 폐인에 가까운 형사가 장용하(최일화)다. 승진보다는 범인 잡는 데 삶을 바친 이 같은 전형적 형사 캐릭터의 존재이유는 형사사회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잠복수사같은 현장중심의 수사방식에서 과학수사로 넘어오면서 차츰 공룡이 되어버린 존재들이다. 하지만 어디 수사가 과학만으로 되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실전 경험이다.
그런 그에게 도전하는 인물. 과학수사를 내세우는 원칙주의자 김일주(정동진)다. 장용하가 임의동행을 하려는 것을 피의자가 거부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막는 김일주는 과거식의 수사방식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대표격인 장용하와 부딪칠 수밖에. 실력으로만 인정받고픈 그에게 무능함의 대명사로 보이는 장용하는 그가 좋아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에게 부족한 점은 역시 경험과 열정. 그러니 이 둘의 만남은 묘한 균형감각을 갖게 된다. 이것이 현실적인 판단이 부족한 장용하와 경험이 부족한 김일주가 파트너가 된 이유다.
남성식-심종금, 투캅스의 부활
영화 ‘투캅스’의 재미는 서로 다른 캐릭터의 부조화에 있다. 닳고닳은 타락한 고참형사와 세상물정 모르고 정의만 부르짖는 신참형사의 만남. 그러나 차츰 닮아가고 나중에는 심지어 청출어람(?)을 보이는 신참의 모습에 오히려 고참이 훈계(?)하는 형국으로의 전환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드라마 ‘히트’의 남성식(마동석)과 심종금(김정태)은 바로 그런 인물들이다.
생각은 좀 모자란 듯 하지만 완력과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남성식은 이름에서도 느껴지지만 여성 강력팀장인 차수경의 빈 구석을 꽉 채워주는 인물이다. 그녀의 완벽한 수족이 될 그는 그러나 여성적인 내면(?)까지도 갖추고 있다. 머리가 나쁘다는 콤플렉스와 외모가 조폭인 그의 섬세한 면모들은 한편으로 그럴듯한 외모에 머리만 굴리며 살아가는 세태를 꼬집는 묘미가 있다. 그와의 대척점에서 심종금의 면모가 교활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하지만 ‘투캅스’에서 안성기가 타락한 형사가 된 것은 사실 사회의 부조리함을 뒤집어 말하기 위함이다. 그러니 심종금이 그렇게 살아가는 이유가 밝혀질 즈음, 보여질 그의 진면목에서 우리는 동정심과 애정을 예감하게 된다.
전문직, 멜로, 가족드라마의 경계에 서다
이 밖에도 이 드라마에는 전직형사이자 선술집 주인인 김영두(김정민), 수사본부의 부지휘자로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서 그 넉넉한 허리가 되어주는 조규원(손현주), 과학수사의 진면목을 보여줄 정인희(윤지민) 같은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꿈틀거린다. 이들 캐릭터들은 처음에는 외인부대처럼 버려지거나 외면될 위기에 처한 상태로 서로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결국 보여주려는 것은 그들이 살인사건을 해결해가며 팀이 되어 가는 과정이다.
여러모로 미국 드라마 ‘CSI’를 연상케 하는 전문직 드라마지만 ‘히트’의 전개양상은 이러한 캐릭터 설정으로 인해 저네들의 드라마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 분명하다. 스타일은 따왔으되 하려는 이야기는 저네들의 쿨한 관계보다는 좀더 끈끈한 팀 간의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든다. 정두홍이라는 걸출한 무술감독으로 인해 깨지고 부서지는 우리 식의 액션이 선보여지고 있는 것처럼, ‘히트’가 서는 지점은 형사물로 대변되는 전문직드라마와 전형적인 멜로드라마, 그리고 팀으로 대변되는 가족드라마의 경계에 서게 되지 않을까. 따라서 이 드라마의 성패는 바로 그 적절한 배합과 균형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