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단점을 공유한 인물들, ‘라이브’ 그 따뜻한 느낌의 정체

사실 공권력을 행사하는 모습으로 우리 앞에 등장하곤 하는 경찰의 인간적인 모습을 담아낸다는 시도는 간단치가 않다. 대학생들의 총장실 점거 농성을 해산시키기 위해 투입된 경찰들의 모습은 자칫 잘못하면 드라마가 그 공권력 행사 자체를 미화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tvN 주말드라마 <라이브>는 실제로 이 장면으로 인한 논란을 겪기도 했다. 

제작진이 해명한 것처럼, 그 장면은 미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고 그런 명령을 내리는 상부에 대한 비판이 담긴 장면일 게다. 상명하복의 경찰조직에서 퇴출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이제 갓 경찰제복을 입은 신출내기들은 위에서 떨어지는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물론 드라마이니 그걸 거부하는 문제적 인물을 그려낼 수도 있는데 어째서 그렇게 하지 않았냐고 물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서민적 영웅상을 판타지로 그려내려는 건 <라이브>가 애초에 하려던 이야기가 아니다. 

<라이브>가 하려는 이야기는 힘 있는 자들이 공권력을 행사하는 걸 정당화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 공권력 행사에서 피해를 보는 일반 국민들이 있지만, 그 명령을 따라야 살아갈 수 있는 경찰들도 그 힘 있는 자들에 의한 또 다른 피해자일 수 있다는 거다. 제아무리 술에 취해 난장판을 벌여도 자신들이 지켜야할 국민이기 때문에 “선생님”이라 부르며 챙기는 그들 또한 국민을 향해 공권력을 행사하고픈 마음이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들의 애환만을 담는다는 건 자칫 미화의 소지가 남을 수 있다. 그래서 <라이브>가 선택하고 있는 건 각각의 인물들이 특정한 상황 속에서 때론 좋은 선택을 하지만 때론 잘못된 선택을 하기도 한다는 걸 제목처럼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인간관은 노희경 작가가 인물을 바라보는 일관된 시각이기도 하다. 사람은 단순히 선악으로 나뉘어질 수 없고 장단점을 공유하고 있다는 시각이 그것이다.

오양촌(배성우)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일에 있어서 마치 ‘살아 움직이는 매뉴얼’ 같은 경찰이다. 하지만 강력계에서 오래 일하다 보니 생겨난 ‘거친 면’들이 그의 일상까지도 조금씩 갉아먹기 시작한다. 그는 현장에서는 누구보다 능력 있는 경찰이지만,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끔찍한 인물이다. 아내가 그에게 불쑥 이혼하자고 말하게 된 건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이제 갓 경찰생활을 시작한 염상수(이광수)가 부사수가 되었으니 갖은 가시밭길이 펼쳐질 수밖에 없다. 툭하면 폭력을 행사하고 욕을 해대는 오양촌에게 염상수는 결국 폭발하고 만다. 그것 역시 염상수라는 인물이 가진 단점 중 하나다. 그는 무조건 살아남기 위해 어떤 굴욕도 참아내려 하지만 그건 진심이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문제를 일으킨다. 

취객에게 두드려 맞을 때 그를 제압하지 않고 참고 있었던 일 때문에 그는 오양촌에게 심한 질책을 듣는다. 그래서 신고를 받고 오양촌과 함께 간 어느 집에서 쓰러져 위급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현장 보존’을 하지 않고 구해내려다 또 질책을 듣는다. 매뉴얼대로 하지 않아 질책을 듣고, 매뉴얼을 어기고 사람을 우선 구해내려 한 행동 때문에 또 질책을 듣는다. 그가 가진 문제는 경찰로 살아남기 위해 너무 열심히 노력한다는 점이다. 자기 존재를 그렇게라도 드러내기 위해. 

그러니 오양촌도 염상수도 장점만큼 단점이 뚜렷한 인물들로 그려진다. 두 사람은 결국 갈등이 극에 달하게 되고 염상수는 오양촌의 멱살을 쥔다. 그런데 그런 폭발은 어쩌면 오히려 이 인간관계에 부족한 면을 보이는 두 사람에게 해결책이 되어줄 수도 있다. 그건 다른 측면에서 보면 두 사람이 하는 어색한 방식의 소통일 수도 있으니.

그래서 <라이브>에는 서민의 편에 선 판타지적인 영웅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민들을 향해 발길질을 해대는 부정적인 공권력도 아닌 경찰의 모습이 그려진다. 음주운전을 하고도 자신들이 국회의원이라며 지구대에서 그들은 대장 기한솔(성동일)을 불러 오히려 뺨을 올려 부친다. 하지만 그 권력자들 앞에서 기한솔은 뭐라 항변하지 못한다. 물론 그 장면들을 몰래 카메라에 담고 그들을 제압해 넘기지만 결국 서장은 그들을 풀어준다.

이 씁쓸한 현실 속에서 기한솔과 지구대 사람들은 소주 한 잔으로 그 설움을 달랜다. 기한솔은 자신이 몰래 카메라를 찍었고 그걸로 선거철에 이들을 한방에 날려버릴 거라고 호언장담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잠시라도 지구대 사람들이 기분 좋으라고 한 말일 뿐이다. 실제 그런 영웅적인 행동(?)을 한다는 건 자신의 생계를 포기하는 일일 수 있으니 말이다. 

지구대 경찰관들의 이러한 딜레마에 빠지는 상황들은 그래서 미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그렇게 만드는 권력시스템의 구조적 문제들을 비판적으로 드러내기 위함이다. 또 그들은 모든 걸 국민의 편에서 척척 해내는 영웅들도 아니다. 그저 우리와 같은 직업인의 한 사람일 뿐이다. 단점도 있지만 사람으로서 어떤 인간적인 고민도 하는 그런 한 사람으로서의 경찰. 그것이 <라이브>가 가감 없이 그려나가는 경찰의 진면목이 아닐까. 노희경 작가의 특별한 인간관이 그러하듯이.(사진:tvN)

‘라이브’가 장르 속 캐릭터들의 클리셰를 깨려는 이유는

tvN 새 주말드라마 <라이브>의 첫 시퀀스는 눈 오는 날 시위현장으로 보이는 곳에서 길바닥에 앉아 끼니를 때우는 경찰들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배가 고픈 듯 허겁지겁 식판의 밥을 뜨는 염상수(이광수)는 거기 한 켠에서 역시 밥을 먹는 한정오(정유미)와 살짝 눈이 마주친다. 그리고 시간을 되돌려 그들이 어떻게 그 자리에까지 오게 됐는가를 드라마는 보여준다. 

한정오는 자식의 전화를 받고도 그런 사람 모른다며 끊어버리는 비정한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열심히 보험영업으로 살아가는 엄마와 함께 살아간다. 갖가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취업 전선에 뛰어든 그는 남자들에게만 유리하게 돌아가는 세상 앞에서 분노와 절망감을 느낀다. 그래서 그토록 지워버리고 싶었던 아버지에게 찾아가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으로 돈을 요구하고, 그 돈으로 경찰시험을 준비해 경찰이 된다.

염상수 역시 비정규직 건물 청소원으로 일하는 엄마와 약국의 재고정리까지 도와주며 제약회사 영업사원으로 일하다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호주로 도망치듯 나가버린 형과 함께 살아오며 어떻게든 취업을 하려 안간힘을 쓴다. 결국 자신이 정규직이 되려고 그토록 노력했던 회사가 사실은 사기 기업이었다는 걸 확인하고 절망하던 차에 마침 벽보에 붙어 있던 경찰공무원 모집공고를 보게 된다. 고시원생활을 통해 겨우겨우 그는 경찰시험을 통과한다. 

흔히 드라마 속 청춘들의 모습은 ‘힘겨워도 나름 재밌게 살아가는’ 이른바 ‘청춘로맨스’의 주인공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짠내 나도 ‘청춘이기 때문에’ 밝고 나름 달달한 모습들이 그려지곤 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지금의 청춘들의 모습일까. <라이브>가 비추는 청춘의 초상은 치열하기 이를 데 없다. 스펙을 보지 않겠다고 모집공고에 내걸었으면서 실제로는 스펙 타령만 하고 아예 남성 취업자들만 뽑겠다는 식으로 여성들을 제외시키는 채용관들 앞에서 한정오는 무력감을 느낀다. 

면접 뒤에 함께 모여 술자리도 갖는 같은 처지들이지만 거기서도 남성과 여성이 그 성차별적 면접 분위기를 놓고 싸운다. 그건 성차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치열한 경쟁에 그들이 놓여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한정오는 스펙이 아닌 실력만으로 뽑는 경찰 공무원을 지원한다. 하지만 합격했다고 그것으로 경쟁이 끝난 게 아니다. 중앙경찰학교 안에서도 경쟁에서 누락되어 탈락하는 이들이 나오는 것. 그래도 이 악물고 그 경쟁을 버텨내려 한다. 

역시 부도를 내고 도망친 회사에 정규직을 희망했던 염상수는 그 절망의 끝에서 경찰 공무원이 되기로 결심한다. 그러니 한정오나 염상수나 한가롭게 연애 따위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당장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생존만의 문제가 아니다. 함께 살아가는 가족들에게 최소한 짐은 되지 않으려는 발버둥. 그래서 이 청춘들의 자화상은 우리가 봐왔던 드라마 속 인물들과는 사뭇 다르다.

그런데 이러한 클리셰 깨기는 청춘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애초 드라마 시작점에 보여줬던 경찰들의 면면이 진짜 이 드라마가 깨려는 클리셰다. 우리게 경찰이란 촛불시위를 하는 이들 앞에 방패를 들고 막아서던 이른바 ‘공권력’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고, 심지어 철거현장에서 살기 위해 그 곳을 점거하고 있는 서민들을 무자비하게 해산시키기 위해 투입되는 비정한 존재들로까지 이미지화되어 있다. 그것도 아니라면 늘 뒷북을 치는 무능함의 상징처럼 그려온 게 각종 드라마나 영화 속 경찰들의 통상적인 이미지다.

하지만 그것이 진짜 경찰들의 모습일까. ‘공권력’이라는 이미지가 덧붙여지면 그들은 마치 사람이 아닌 어떤 다른 존재로까지 여겨지지만, 사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고, 어쩌면 시키는 대로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그런 존재들일 것이다. 그들에게 불의한 명령을 내리는 이들이 잘못된 것이지, 그걸 감수해야 하는 그들이 무슨 잘못이 있을까. 오히려 살기 위해 모든 걸 감수해야 하는 그 무수한 딜레마 속에 서 있어야 하는 이들이 바로 진짜 경찰들의 모습일 수 있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제목은 ‘라이브’다. 우리가 어딘가에서 이미지로만 그려져 왔던 실제와는 다른 그런 모습과 현실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드라마의 다짐이 이 제목에 담겨있다. 중앙경찰학교에서 마지막 현장투입의 시험대에 들어가는 이들 청춘들에게 이들을 진두지휘하는 상관은 “아무 것도 하지마라”고 반복해서 외친다. 때리면 맞고 밀고 들어와도 그 자리를 지키라는 것. 그래서 그들은 두려움에 손을 부르르 떤다. 우리가 생각했던 ‘공권력’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그들의 진짜 모습이다.(사진:tvN)

메르스 공포로 다시 화제 된 영화들의 공통점

 

2013년 김성수 감독의 영화 <감기>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메르스 공포 때문이다.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발병자들이 많이 발생한 도시의 거리는 마치 유령도시가 된 듯 텅 비어가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체접촉은 극도로 민감해진다. 물론 바이러스가 주는 공포는 그 자체로도 우리를 압도하지만, 이보다 더 큰 공포는 통제가 제대로 되지 않는 콘트롤 타워의 부재다. <감기>는 그걸 보여줬다.

 

'사진출처:영화 <감기>'

초기에 진압되어야 할 바이러스가 정부의 뒤늦은 대처로 인해 일파만파 퍼져나가고, 삽시간에 나라를 공포에 휩싸이게 만드는 이야기들은 현재의 메르스 사태를 비슷하게 보여주는 것만 같아 소름끼친다. 무엇보다 국민들의 동요를 막기 위함이라며 정보를 숨기려는 자들로 인해 오히려 더 큰 혼란이 벌어지는 일련의 과정들은 너무나 판박이다. 이럴 때일수록 좀 더 투명하게 정보를 공유하고 한 마음으로 대처해 나가도 모자랄 판이 아닌가. 하지만 지지율에나 더 신경 쓰는 자들은 쉬쉬하거나 책임을 전가할 누군가를 찾기에 바쁘다.

 

<감기>의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종합운동장을 가득 메운 시체들을 살 처분 하는 광경이다. 그 안에는 아직도 살아있는 생명이 있지만 이미 그곳에 격리되고 버려진 이상 그들은 더 이상 생명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통제되지 않는 정부의 콘트롤 타워는 바이러스와 싸우기보다는 들끓는 민심들을 향해 오히려 총구를 겨눈다. 물론 이것은 영화가 연출한 극적인 장면일 것이지만 그것이 현실이 될 것만 같은 공포를 준다는 건 실로 씁쓸한 일이다. 이건 영화가 예언한 것인가 아니면 현실이 너무나 영화 같은 것인가.

 

우리네 재난 영화들을 보면 대부분 그 문제는 재난을 일으키는 장본인보다 이에 대처하지 못하는 정부의 엇나간 콘트롤 타워에서 비롯된다. 물론 봉준호 감독 스스로는 납치극이라고 얘기했지만 <괴물>은 적어도 관객들에게는 너무 많은 기시감을 준 영화였다. 분향소에서 가족들이 뒹굴며 오열하는 장면은 영화가 상영된 이후에도 우리나라에서 반복적으로 벌어진 그 많은 재난들을 통해 봐왔던 장면들이다. 작년 세월호 참사는 안타깝게도 그 많은 재난 속 장면을 또 다시 보여주었다. <괴물>은 그래서 지금까지도 묻고 있다.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를.

 

2012년 방영된 <연가시>에서도 감염의 공포만큼 더 공포스럽게 등장한 건 공권력의 무능이었다. 무수한 사람들이 연가시보다 재난 대처능력이 떨어지는 정부의 무능 때문에 죽어나간다. 정부의 콘트롤 타워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면서 위험에 처한 이들이 기대는 것은 가족뿐이다. <연가시>에서 경제적인 문제로 가족에게 부채감을 느끼고 있는 가장은 그래서 죽어라 뛰어다닌다.

 

그런데 이 <괴물>이나 <감기>, <연가시>가 공통적으로 가족들의 사투를 그려내고 있는 걸 보다보면 참담한 우리네 현실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국가나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심지어는 잘못된 콘트롤 타워가 그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을 포기하는 상황 속에서 이제 믿을 건 가족들밖에 없다는 이 절절함. 메르스 사태가 감염자를 병수발하다 또 다른 감염자를 낳으며 더 확산됐던 그 이면에는 이 믿을 건 가족뿐이라는 절망적인 인식이 자리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보건당국은 스스로 격리하라고 하고 스스로 손발을 씻고 개인위생에 철저하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을 피하고 가급적 야외 활동을 하지 말라고 한다. 뭘 자꾸만 하라고 하고 또 하지 말라고 하지만 과연 그들은 국민들을 위해 뭘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영화가 예언한 건 재난 그 자체가 아니다. 그건 재난에 대처하는 정부의 자세였다. 지금 이 정부의 자세는 마치 현실이 아닌 영화를 보는 것만 같아 씁쓸하기 이를 데 없다.

 

<맨홀>이 끔찍한 건 그것이 현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영화 <맨홀>의 배경은 강북의 한 마을이다. 어둑한 밤길 마치 공무원들처럼 복지부동하고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공권력 속에서 그나마 행인들을 지켜주는 것이라면 가로등과 CCTV가 될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맨홀>의 연쇄실종사건이 벌어지는 강북의 그 마을에는 그 가로등과 CCTV를 공권력이 아니라 살인자가 쥐고 있다.

 

'맨홀(사진출처:화인웍스)'

가로등을 마음대로 꺼버리고 그 어둠 속에서 살인자는 일종의 인간사냥을 벌인다. CCTV? 그것은 범죄자들을 찍는 사회적 안전장치가 아니라 사냥감이 어디로 움직이는가를 보여주는 범죄자의 천리안이다. <맨홀>에서 본다는 것은 하나의 특권적인 위치를 만들어낸다. 살인자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고, 공권력은 우리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살아남기 위해 한 치 알 수 없는 어두운 지하의 그 미로 같은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건 우리에게 끔찍한 경험을 선사한다.

 

<맨홀>은 스릴러 장르지만 그래서 공포에 가깝다. 영화는 시종일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불편함은 단지 자극적인 장면들 때문에만 생겨나는 건 아니다. 이 맨홀로 상징되는 어두운 지하세계가 현실의 무언가를 자꾸만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 위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밑에서는 끌려 들어간 사람들이 끔찍한 일을 겪는다는 건 우리가 굳이 확인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바라보게 만든다.

 

<맨홀>의 피해자들을 보면(당연히 그 배경이 강북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서민들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택시기사가 아버지인 딸이 있고,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를 가진 동생과 부모를 여의고 그 동생을 돌보는 착한 언니가 있다. 만일 피해자가 기득권층이었다면 이 영화를 통해 그나마 어떤 사회적 분노를 발견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는 피해자들을 그저 선량한 서민들로 보여준다. 심지어 가해자마저 폭력의 피해자로 그려진다.

 

즉 이 <맨홀>이라는 세계에는 지워져 있는 세계가 있다. 그것은 이러한 끔찍한 사건들이 한쪽에서는 벌어지고 있는 데도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 기득권층의 세계다. <맨홀>은 그래서 피해자들끼리 벌이는 약육강식 같은 느낌을 보여준다. 강북이라는 맨홀 위의 공간과 그 맨홀 밑의 공간은 또 그 안에서도 어떤 위계를 만들어낸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영화는 맨홀 위와 아래가 치열하게 싸우는 이야기를 다룬다. ? 살아남기 위해서.

 

<맨홀>은 그래서 영화적인 통쾌함을 선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네 현실이 그러하듯이 없는 자들이 없는 자들끼리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풍경을 거칠게 담아낸다. 영화는 어두울 수밖에 없고, 때로는 그 공포의 시간이 차마 쳐다보기 힘든 고통을 주기도 한다. 그나마 그 안에서 인물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서로간의 끈끈한 가족애 같은 것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조차 처절한 현실을 상기하게 만든다.

 

<맨홀>이라는 영화 속에서 정유미, 정경호, 김새론은 말 그대로 반짝반짝 빛난다. 사실 이 영화를 끝까지 바라볼 수 있게 만드는 건 이들의 호연 덕분이다. 정유미는 단단한 연기로 영화에 추진력을 만들어낸다. 동생 역할을 하는 김새론은 아마도 괴물을 다루는 영화 속에서 자신만의 존재감을 만들어낸 배우가 아닐까 싶다. 정경호는 이번 작품을 통해 독특한 비주얼의 살인마 이미지를 각인시켜주었다. 이 세 명이 만들어내는 연기의 합은 이 지하세계에서의 쫓고 쫓기는 과정을 바라보는 관객의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마지막 맨홀 바깥으로 카메라가 나왔을 때 우리는 그 세상이 낯설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토록 끔찍한 살육이 벌어지는 지하에 비해 너무나 평온하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을 상기하게 만든다. 마치 맨홀 속 같은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의 현실 속에 살아가면서도 문을 꼭꼭 닫아걸고 아무런 일도 없는 듯 무심한 표정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삶. 그리고 아무도 그들을 지켜주지 않는다는 것. 그 삶의 무시무시함을 이 영화는 맨홀이라는 공간을 통해 보여준다.

 

얼음들이 떠올리는 세월호 참사의 안타까운 아이들

 

아이들은 착하게도 끝까지 어른들의 통제에 따랐다. 하지만 그 어른들은 심장 따위는 없는 얼음들같았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아이들을 희생시켰다는 죄책감과 부채의식 때문인지 세상의 모든 것들이 지켜내지 못한 아이들의 모습을 아프게도 떠올리게 만든다.

 

'악동뮤지션(사진출처:YG엔터테인먼트)'

<표적> 같은 영화를 봐도 먼저 비리로 얼룩진 무능한 공권력이 떠오르고, <엔젤아이즈> 같은 드라마를 보며 남녀 주인공의 멜로에 빠져들다가도 119소방대원들이 마주하는 긴급 재난과 응급 상황들에 덜컥 마음 한 구석이 내려앉는다.

 

<쓰리데이즈> 같은 스릴러 장르 드라마에서도 먼저 보이는 건 책임지는대통령의 리더십이다. <심장이 뛴다> 같은 예능 프로그램이 보여준 모세의 기적에서는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 유독 안타까웠던 골든타임이 떠오른다. 지금 이 땅의 어른들의 마음이 모두 이렇지 않을까. 일상을 살면서 겪는 모든 일들이 세월호와 거기서 희생된 아이들에 멈춰 있다.

 

이런 와중에 맞는 어린이날이니 아이들에 대한 생각이 유독 간절할 수밖에 없다. 무심코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악동뮤지션의 얼음들이라는 노래가 마음 한 구석을 후벼 파는 건 그래서일 게다. 물론 세월호 참사 이전에 발표된 이 곡을 세월호 참사와 관계 지어 이야기한다는 건 과도한 해석일 수 있다.

 

하지만 딱히 그런 것만도 아니다. 이번 세월호 참사가 우연히 벌어진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그토록 많은 사건 사고들 속에서도 여전히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고 변화하지도 않았던 어른들의 예고된 재앙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악동뮤지션이 어른들을 얼음들에 빗대 왜 그렇게 차가울까라고 질문하는 그 속에는 이미 변하지 않던 어른들에 대한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있었던 셈이다.

 

아이들조차 따뜻한 생명으로 보기보다는 차가운 통제와 관리의 대상으로만 보는 시선은 세월호가 침몰하는 과정에서도 저 혼자 살아남겠다고 탈출한 선장과 일등항해사 같은 얼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저 학교에서도 오로지 경쟁 속에서 살아남는 자만이 생존할 수 있다는 식의 입시지옥 속에 아이들을 밀어 넣고 있지 않았던가. 아이들은 얼음들이 만들어낸 경쟁체제의 시스템 속에서 늘 관리대상이었지 따뜻한 생명의 존재들이 아니었다.

 

얼음들이 녹아지면 조금 더 따뜻한 노래가 나올 텐데. 얼음들은 왜 그렇게 차가울까. 차가울까요.’ 악동뮤지션이 아이의 순수한 목소리로 얼음들에게 던지는 질문은 그래서 심지어 준엄하게까지 다가온다. 배가 침몰하는 그 순간까지 천진함을 잃지 않았던 아이들이 아빠와 엄마 그리고 선생님을 걱정하던 그 목소리는 더 쟁쟁하게 귓전에 울린다. 아이들은 그 때조차도 끝까지 어른들을 생각하고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이날이다. 아이들을 위한 온전한 세상이어야 할 날. 그러나 얼음들의 중대한 과오를 눈앞에서 목도한 지금은 우연히 듣는 노래 한 자락마저 어른들을 비통하게 만든다. 어른들이 서둘러 도망치는 순간 한 아이는 두려워하는 친구를 위해 구명조끼를 벗어주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전해준 그 인간적인 따뜻함이 제발 얼음들을 녹여주기를. 유독 슬픈 어린이날이다.

<표적>, 공권력에 맞서는 히어로는 어떻게 가능한가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거두절미하고 총에 맞아 피 흘리며 쫓기는 여훈(류승룡)으로부터 시작되는 <표적>의 장르적 방점은 물론 액션에 찍혀 있다. 강렬한 인상만으로도 일단 기본 먹고 들어가는 류승룡이라는 배우는 이 영화를 위해 특공무술 특훈을 받아 당장이라도 터질 듯한 몸의 액션을 보여준다. 총에 맞서 맨 몸으로 부딪치는 류승룡표 액션은 화려함보다는 묵직함이 어울리고, 특유의 감정 선이 덧붙여져 타격감에 통쾌함을 더해준다.

 

사진출처: 영화 <표적>

하지만 온전한 액션 영화 한 편을 보는 와중에도 흥미로운 설정들이 눈에 띈다. 그것은 쫓기는 자와 쫓는 자의 역전이다. 거두절미하고 시작하는 추격전 속에서 쫓기는 자들은 자신이 왜 쫓겨야 하는 지조차 모른다. 하지만 희생양이 되어버린 쫓기는 자들이 자신들의 상황을 깨닫게 되면서 여훈의 분노가 터져 나온다. 류승룡의 액션이 폭발하게 되는 건 그 분노가 대중들의 정서를 끌어안기 때문이다.

 

왜 무고한 이가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가. 조폭과 비리경찰은 액션 범죄물에 단골로 등장하는 악역들. 경찰이 비리경찰로 돌변하고 공권력이 주인공을 위협하는 요소로 돌변하는 순간, 류승룡의 액션은 틀에 박힌 추격전 양상을 벗어난다. 이제 이 안티 히어로는 공권력과 맞서 싸우는 인물로 돌변한다.

 

돈만 된다면 제 어머니도 죽일 존재들이라는 이 비리경찰들은 이 영화만의 특별한 장면들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것은 범죄물에서 흔히 생각하는 경찰서라는 안전을 상징하는 듯한 공간이 오히려 살육과 공포의 공간으로 바뀐다는 점이다. 여훈이 경찰서 하나를 완전히 때려 부수는 장면은 그래서 묘한 카타르시스를 만들어낸다.

 

<추격자> 같은 영화에서 등장하는 무능한 공권력은 이제 어느새 비리로 점철된 폭력적인 공권력으로 그려지고 있다. 때때로 누가 범죄자고 누가 경찰인지 아리송해지는 코미디 같은 설정이 영화 속에 종종 등장하는 건 지금 서민들이 갖고 있는 공권력에 대한 불신을 보여준다. <표적>은 그 서민들을 지켜야할 공권력이 오히려 그들을 표적 삼아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상황을 그려낸다. 쫓기던 류승룡의 반격이 서민들의 분노를 덧붙여 통쾌함을 만드는 이유다.

 

류승룡과 더불어 김성령, 유준상의 기존 이미지를 깨는 반전 연기는 영화의 몰입감을 높여주는 가장 큰 요소다. <7번 방의 선물>에서 당하기만 하던 바보 연기를 했던 류승룡은 이 영화에서 분노의 히어로로 돌변하고, 우아한 이미지를 줄곧 고수해왔던 김성령은 이 영화를 통해 거친 액션의 주인공으로 변신한다. 착하고 선한 이미지의 유준상? 그의 변신은 그 이미지 때문에 더욱 큰 반전효과를 만들어낸다.

 

<표적>은 어찌 보면 너무 단순한 추격 액션 정도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중반에 일어나는 반전 이후 마지막까지 흘러가는 류승룡의 액션은 기막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해준다. 그것은 영화가 건드리는 현실에 대한 대중정서 덕분이다. 공권력과 맞서는 히어로라니. 그 설정에는 영화 속에서나마 답답한 현실을 풀어내주는 어떤 힘이 존재한다. 특히 요즘 같은 시절에.

<추격자>에서 <괴물>까지 인재를 꼬집는 영화들

 

그랬다면 어땠을까. 배에 화물을 과적하지 않았다면, 화물들과 자동차를 좀 더 단단히 고정했다면, 배의 무게를 잡아주는 밸러스트 탱크에 제대로 물을 채워 넣었다면, 배가 기울었을 때 제주가 아닌 진도에 바로 구조요청을 했다면, 승객들에게 서둘러 대피 공지를 냈다면, 선장이 선원들만 챙기지 않고 끝까지 남아 승객들을 먼저 챙겼다면 어땠을까.

 

'사진출처: 영화 <괴물>'

또 사고가 난 후에도 곧바로 정부가 자기 자식을 잃은 것처럼 혼신의 힘을 다했다면, 발표에 우왕좌왕하지 않았다면, 초동대처에 재빨랐다면, 애초부터 바지선과 오징어잡이배를 동원하는 생각을 실종자 가족들이 아닌 정부가 먼저 해냈다면, 또 이제야 투입되는 각종 첨단 장비들이 좀 더 일찍 투입되었다면 어땠을까.

 

세월호 참사를 되짚어보면 어째서 그런 이해하기 어려운 일련의 선택들을 했는지가 의아할 정도다. 무수히 많은 선택의 기회들이 있었다. 거기서 제대로 된 선택들을 했다면 조금은 나은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 재난이 천재가 아닌 인재의 축적물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왜 우리네 참사는 늘 인재일까. 영화가 현실일 수는 없지만 현실에 대한 대중들의 정서를 그대로 말해주는 건 사실이다. <추격자>에서 연쇄살인마의 문제보다 더 심각한 건 공권력의 무능이다. 결국 경찰에 잡히게 된 연쇄살인마가 풀려나게 되어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기게 되는 상황은 대중들이 바라보는 현실인식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공권력은 믿을 수 없다. 결국 믿을 건 나 자신 뿐이다.

 

<괴물>에서 문제가 되는 건 한강에 출몰한 괴물 그 자체가 아니다. 괴물에 대처하는 정부의 자세가 더 큰 문제다. 결국 정부는 시민들을 보호하기 보다는 이들을 격리하고 심지어 조사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를 양산해낸다. <괴물>이 말하는 진짜 괴물은 정부의 공권력인 셈이다.

 

<변호인>에서 멀쩡한 청년을 파괴하는 건 역시 잘못된 공권력이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었다고 용공세력으로 몰려 고문당하는 현실. <변호인>의 분노는 국가는 국민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공권력의 오만에서 비롯된다.

 

<집으로 가는 길>에서 대한민국의 국민이 카리브해에 있는 외딴 섬에서 통역 서비스조차 없이 수감생활을 하게 된 건 당시 재외공관의 무능 때문이다. 국민 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아낌없는 지원을 해야 할 당시 프랑스 한국대사관은 그녀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인재 중의 인재다.

 

이것은 그저 영화의 이야기에만 머무는 건 아니다. 때때로 벌어지는 홍수나 폭설로 인한 재난이 벌어질 때마다 우리가 늘 듣는 단어가 있다. ‘인재라는 것이다. 사고는 물론 미리 대비하고 예방해야 하는 것이지만 어쩔 수 없이 터졌을 때 그 대응체계는 실로 중요하다. 그 체계에 따라서 천재보다 더 큰 인재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일만 터지면 정부의 무능을 발견하게 되는 끝없는 인재의 연속. 언제쯤 이 단어를 더 이상 보지 않을 수 있을까.

아이와 여성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 사건들이 거의 매일 뉴스로 방영되는 요즘, '파괴된 사나이'는 스릴러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공포물에 가까운 뉘앙스를 담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어느 날 다섯 살 짜리 혜린이가 유괴되고 그 후로 신실한 목사였던 영수(김명민)는 믿음을 버리고 파괴된 삶을 살아갑니다. 아내인 민경(박주미)은 희망을 놓지 못하고 계속 딸을 찾아다니다가 사고를 당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화 한 통화가 걸려오고 죽은 줄만 알았던 딸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유괴범 병철(엄기준)은 8년 간을 감금해놓고 키워온 영수의 딸을 놓고 거래를 제안합니다.

영화는 저 스릴러의 한 장을 세웠던 '추격자'와 '그 놈 목소리'를 이어붙인 느낌이 나지만, 디테일은 상당히 다릅니다. 일찌감치 범인을 드러내놓는 이 영화는 미스테리를 벗어내고 딸을 찾는 아버지와 범인 사이의 팽팽한 대결에 집중합니다. 무엇보다 '소리'에 집착하는 범인은 잘만 살렸다면 꽤 괜찮은 아우라를 가질 수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목사였던 영수의 설교(성서에는 말씀이라는 청각적 기호가 신적인 것으로 표현되죠)와 범인의 음에 대한 집착. 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제 생각이지, 영화에서는 그게 잘 드러나진 않습니다. 도망치고 추격하는 장면들은 꽤 긴박하지만 또한 관습적이기도 합니다. 어디선가 많이 봐왔던 장면들이 반복되죠.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을 조금씩 차별화시켜주는 것은 김명민의 연기입니다. 아이를 잃은 후의 아버지의 변화(여기에는 목사에서 막 사는 의료기기업자로의 변화도 포함됩니다)는 꽤 디테일하게 그려집니다. 무표정하면서도 어딘지 냉소적이고,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 여전히 남은 죄의식이 담겨진 그 얼굴. 역시 김명민이기 때문에 제대로 소화되는 그런 역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버지의 절박함은 작금의 현실 속에서 매일 벌어지는 성폭력 사건들을 바라보는 아버지들의 마음을 그대로 담았습니다. 분노, 적개심, 죄의식, 무력감 같은 것이 거기에는 뒤범벅되어 있죠. 어찌된 세상인지 이제는 불안한 마음에 아이를 데리러 학교 입구에 서 있는 것조차 다른 학부모들의 의심스런 눈총을 받는 입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시대의 아버지들은 그렇게 불안한 사회 속에서 학교 입구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자신의 아이를 기다리는 그런 처지가 되어 있죠.

'파괴된 사나이'는 바로 이런 현실 때문에 스릴러로 즐길 수 없는 영화가 됩니다. 영화가 영화가 아니라 현실의 반복일 때, 우리가 어떻게 그 영화를 즐길 수 있을까요. 게다가 이 영화는 꽤 디테일하게 아이가 당하는 폭력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영화관을 찾는 아버지들에게는 굉장한 트라우마가 아닐 수 없습니다.

'파괴된 사나이'는 꽤 사회에 대한 불신감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우리네 스릴러 영화들이 다 그렇죠. '살인의 추억'에서도, '추격자'에서도 경찰들은 도대체 뭘 하기 위해 그런 제복을 입고 있는 존재들인지 알 수 없게 그려집니다. '파괴된 사나이'에서도 결국 이 범인과의 사투 끝에 딸을 구하는 것은 당사자인 아버지입니다. 즉 아버지를 구원해준 것은 종교도 아니고 사회의 따뜻한 시선도 아니며, 정의 또한 아닙니다. 바로 자신입니다.

괴로운 건, 이 공권력이 이런 끔찍한 범죄에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 역시 영화 속의 사실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최근 공공연히 벌어지는 '고문 경찰'의 이야기를 뉴스를 통해 듣습니다. 그럴 볼 때마다 범인은 잡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럼 진짜 범인은? 아마도 저 거리를 활보하고 있겠지요.

'파괴된 사나이'가 공포물이 된 것은 물론 의도된 연출 탓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영화적 현실이 아니라 실제 현실과 너무나 맞닿아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이 땅의 아버지들이라면 이 영화를 보고 공포를 느낄 것입니다. 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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