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자’에 대한 칸의 반응이 심상찮다. 도대체 ‘아이언맨’처럼 몸에 잔뜩 무기들을 장착하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영웅도 아니고, ‘인디아나 존스’처럼 채찍 하나와 명석한 두뇌, 그리고 놀라운 순발력으로 고대의 유물들을 찾아내는 영웅도 아닌, 그저 보도방 여자를 미친 듯이 찾아 헤매는 이 중호(김윤석)라는 소시민적인 영웅의 어떤 점이 세계의 이목을 매혹시켰을까.
‘올드보이’, ‘괴물’에 이어 ‘추격자’가 내세우는 영웅은 역시 서민이다. 그것도 평범 이하거나 때론 비열하기까지 한 서민. 이 평범한 서민들은 어느 날 비범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그 사건을 해결하기는커녕 점점 나락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올드보이’의 오대수(최민식)는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아가다가 갑작스런 납치 감금으로 15년 동안의 감금을 당하며, ‘괴물’의 강두(송강호)는 순식간에 한강에 출몰한 이상한 괴물에게 금지옥엽 딸을 납치 당한다. ‘추격자’의 중호 역시 평범한 보도방 사장에서 괴물 같은 살인마에게 납치된 미진(서영희)을 찾기 위해 달리고 달리는 추격자가 된다.
즉 이들 우리네 서민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평범한 일상을 깨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그 사건은 대개가 납치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소중함을 잘 느끼지 못했던 것이 (납치로 인해) 사라질 때, 이 서민들은 그 소중한 평범함을 찾기 위해 뛰기 시작한다. 그것은 오대수에게는 세월 속에 지워진 진짜 자기 자신의 모습이며, 강두에게는 딸이고, 중호에게는 미진이다. 그 소중함이 가족이나(유사가족을 포함) 자기 자신 같은 일상의 가치를 조명할 때, 이 서민적 영웅은 휴머니티를 좇는 영웅이 된다. 거창한 것이 아닌 최소한 인간이라면 반드시 그래야 할 만한 일을 하는 영웅이 탄생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종종 이 영웅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적보다 보이지 않는 적이 더 무섭다는 점이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자신을 감금한 적을 찾아다니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지만 결국 진짜 적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며, ‘괴물’과 ‘추격자’의 강두네 가족과 중호는 눈에 보이는 괴물이나 살인마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이런 괴물들을 은폐하고 축소하려는 공권력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 사회적인 메시지는 우리네 서민적인 영웅들만이 가진 특징이다.
그리고 이 서민적인 영웅들은 헐리우드의 영웅들과는 상반되게 미션에서 실패하게 된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적은 잡았을지 모르지만 그들을 그렇게 뛰게 만들었던 소중함을 잃고 만다는 점에서 실패이다.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자신의 과오를 알아채고는 기억을 지워버리려 하고, ‘괴물’의 강두나 ‘추격자’의 중호는 결국 괴물 혹은 살인마에게서 납치된 그녀들을 구해내지 못한다. 바로 이 실패의 지점은 이 영웅들의 행보에 사회적 메시지와 함께 리얼리티를 구축해내는 힘이 된다.
이 결과가 아닌 과정을 주목하게 만드는 영웅들은 헐리우드의 영웅들과는 색다른 면모를 갖게된다. 영화는 끊임없는 추격의 과정을 그리는데 목표의 성공과는 상관없이 바로 그 추격의 이유, 즉 휴머니티가 이들 영웅의 특징이 된다는 점이다. 전 지구적 담론으로 허황된 영웅상을 정치적 논리와 섞어 세계에 배포하는 헐리우드식의 영웅을 유치하다거나 식상하다고 느꼈던 관객이라면 이 지극히 가족적이며 자성적인(사회의 어두운 면을 폭로한다는 면에서) 반영웅이 가진 인간적인 면모에 환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올드보이’, ‘괴물’에 이어 ‘추격자’에 쏟아지는 일련의 세계적인 관심은 이제 새로운 영웅상의 탄생을 예고하는 징후들이다.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의 물결. 인파로 복잡한 거리에서 만나는 남녀. 그리고 어딘가로 달려가는 차. 골목길. 담벼락에 대충 세워지는 차. “차를 저렇게 세우면 어떻게 하냐”는 사내의 말, “금방 나올 건데요”하는 여자의 답변. 하지만 이어지는 담벼락에 오래 방치된 듯 보이는 차에 가득 달라붙어 있는 출장안마사 명함들. 이 짧지만 함축적인 영상의 연결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상황과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압축해 설명한다. 누군가 사라졌고, 그 사내는 여자의 실종과 관련이 있다는 것.
원경에서 잡을 때는 일상적인 거리의 풍경이었던 것이 차츰 가깝게 심도를 잡아가자 특정한 사건으로 이어진다. 이 영상 구성의 효과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나쳤던 거리에서 어쩌면 우리가 희대의 살인마와 옷깃을 스쳤을 지도 모를 아슬아슬함을 전해주기도 하며, 그렇듯 타인으로서 극장문에 들어선 관객을 영화 속 사건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이 원경에서 점점 가까운 곳으로 옮아가는 카메라는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장치다. 그리고 거기에는 출장안마소를 차려놓고 여자를 파는 비열한 인간, 엄중호(김윤석)의 시선이 겹쳐진다.
사라진 여자를 엄중호가 좇는 첫 번째 이유는 돈 때문이다. 그에게 여자란 돈을 벌어다주는 존재 그 이상이 아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억지로 손님에게 보내진 미진(서영희) 역시 마찬가지. 엄중호가 미진과 막연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때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미진을 찾아 헤매던 엄중호는 미진을 근거리에서 보게되고, 미진이 희대의 살인마에게 붙잡혔다는 심증이 갈수록 마음은 더 절박해진다. 그 근거리에서 엄중호는 돈으로서의 미진을 좇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미진을 좇게 된다. 이것은 엄중호의 시선에 포획 당한 관객들 역시 마찬가지다. 마치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송강호)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범인을 추격하는 엄중호가 쉬지 않고 달릴 때, 그 마음은 고스란히 관객들에게도 전이된다.
카메라가 점점 원경에서 근경으로 다가가면서 엄중호의 시선이 달라지듯이 영화는 우리가 흔히 지나치듯 보았던 인물들을 역전시켜 놓는다. 이 영화 속에는 엄중호, 지영민(하정우), 그리고 경찰, 이렇게 세 부류가 부딪치는데, 초반부 아무런 사전 설명 없이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인상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정반대로 바뀌어 나간다. 한없이 비열해 보였던 엄중호에게서 인간적인 면을 발견하게 되는 반면, 겉보기에 마음 여린 사내로 보이던 지영민은 희대의 살인마로 변신한다. 경찰은 그 직업상 무언가 사건해결에 도움이 되어야 하지만 상황은 거꾸로다. 경찰이 하는 일이란 엄중호가 기껏 잡아놓은 살인마를 풀어주는 것이다.
이 역전된 상황은 저 ‘괴물’이 보여주었던 상황을 반복적으로 그려낸다. 괴물(지영민)이 있고, 괴물에게 딸을 잡혀 애타게 괴물을 추격하는 강두네 가족들(엄중호)이 있는데, 오히려 이를 도와주어야 할 경찰은 강두를 감금해버리는 상황. 따라서 이 유사한 구조가 말해주는 것은 우리네 사회가 가진 문제의 본질은 늘 같다는 것이다. 무능한 정부, 그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 그리고 그 괴물과 정부 양쪽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서민이 구조의 본질이다.
그러나 ‘추격자’가 ‘괴물’과 다른 점은 괴물의 실체가 사람이라는 점이다. 한강변으로 뛰쳐나와 사람들을 습격하는 괴물은 나타나기만 해도 그것이 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도심 속, 그 사람들 속에 꼭꼭 숨어있는 지영민이라는 괴물은 찾아내기가 어렵다. 따라서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원경에서 근경으로 지영민을 추격하는 것이고, 그 추격하는 엄중호를 쫓아다니는 것이며, 그 엄중호의 변해가는 마음을 포착하게 되는 것이다.
흔히들 ‘추격자’가 ‘살인의 추억’을 닮았다고 하지만 ‘추격자’는 ‘괴물’의 구조 또한 닮았다. 나홍진 감독이 밝힌 바대로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은 ‘추격자’의 전범이 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일까. ‘추격자’에 대한 평단과 대중들의 열렬한 호응 또한 ‘살인의 추억’과 ‘괴물’을 닮은 것은. 한국영화가 어렵다는 이 시기에 불쑥 나타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괴물 같은 나홍진 감독의 출현이 반가울 따름이다.
좀 으스스한 추위아래 강남 거리를 걸었다. 모두들 어딘가 바쁘지만 주위 시선은 별로 쓰지 않는다. 바쁘고 바쁘세상 무관심속에 더욱더 무관심만 남고 있다. 서울하늘은 우리들의 삶을 알고 있을까? 매일 같이 우리들을 지켜보고 있는데 모든 사실은 다 알것인데 ... 어둠이 짙게 깔린 서울하늘아래 "추격자"를 보고 그 감정을 숨길수 없어 이렇게 글을 남긴다. 분개.분노.화.욕.슬픔.안타까움.... 어떻게 이런 감정들의 단어가 나올수 있을까? 추격자_ 나를..
추격자. 나홍진이라는 신인감독이 만든 이 영화가 백만관객을 넘어섰다는 보도를 접하며 보게 된 영화. 보는 내내 꽉 막힌 마음이 한참이 지나서야 먹먹해지며 풀어졌다. 그저 숨막히는 범인과 추격자와의 대결구도 때문이거나 화면의 화려함, 혹은 배우의 실제같은 명연기 때문이라면 쉽게 버려질 마음이었다. 감독은 뼈속깊은 사회구조를 건드려 버렸다. 용의자를 잡은 것은 우연이었으며, 용의자를 수사하는 과정에는 이권이 개입되어 있었고, 용의자를 풀어준 것도 뒤탈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이 중국시장에서 반응을 보인 데는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민감해진 중국영화시장의 분위기에 힘입은 바 크지만, 그 바탕에는 ‘괴물’ 자체가 갖고 있는 아시아적인 미덕이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가족’이다. 영화가 개봉되고 중국언론들은 이 영화의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와의) 차별점으로 가족을 들었다.
‘괴물’의 중국 성공, ‘가족’ 때문?
유력일간지 징화스바오는 ‘괴물’에 대해 “기존의 멜로물과 폭력물 위주에서 탈피한 한국영화”라며 “한 평범한 소녀를 괴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평범한 가족들이 사생결단”을 “눈물 없이 보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관영 베이징르바오는 이 영화가 “으시시한 공포영화나 화려한 화면전시에 머무르지 않고 보통사람들의 단결력과 용기를 보여주며 화합의 메시지를 전해준다”고 평가했다. 사회주의 국가가 갖는 집단적 가치에, ‘가족’이라는 가치가 덧붙여졌고, 거기에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라는 확실한 경쟁자를 내세우자 반응은 더 폭발적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이 바로 이 ‘가족’이라는 소재이다. 우리이게 이 소재는 어딘지 구닥다리처럼 느껴지지만 흥행의 요소가 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즉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쿨한 전개를 파고 들어오는 가족이란 이름의 끈끈함을 종종 비아냥대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하는 소재인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들이 가족보다는 개인에 더 초점이 맞춰지는 반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권 영화들은 상대적으로 가족에 더 많은 무게중심이 맞춰져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가족이라는 그림자는 ‘가족의 탄생’, ‘좋지아니한가’ 같은 가족을 표방한 영화는 물론이고 우리영화 속 어디에서든 어른거린다.
조폭 짓 왜 하냐고? 가족 때문에
최근 개봉한 송강호 주연의 ‘우아한 세계’는 이제는 하나의 우리네 장르가 되어가고 있는 조폭영화에 ‘가족’을 끌어들였다. 이것은 과거 ‘비열한 거리’에서 가족들이 살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기 위해 철거촌 깡패짓을 하는 병두(조인성)의 연장선상에 있다. ‘우아한 세계’의 메인 카피, ‘조직에 몸담은 가장의 꿈’에서 조직은 중의적인 의미로 쓰인다. 즉 조폭 세계의 조직이란 뜻도 있지만 우리 현실사회에서 누구나 몸담게 되는 조직이란 의미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단순히 조폭의 이야기가 아니다. 조폭은 하나의 상징이 되며 조폭에 ‘가장’이 붙게되자 영화 속 가장인 송강호의 삶은 더 독해진다. 그가 피가 튀고 죽음의 문턱을 왔다갔다하는 ‘조직생활(사회생활)’에 몸담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가족들 때문이다.
송강호가 가족들의 ‘우아한 세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은 정작 ‘우아하지 않은 세계’ 속에 남아 있을 때,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스크린을 장식하고 있다. ‘파란 자전거’에서는 손이 불편한 아들에게 희망을 넣어주는 아버지로, ‘눈부신 날에’는 딸을 만나 잃었던 가족애를 찾아가는 아버지로, ‘날아라 허동구’에서는 IQ 60인 아들을 향한 부성애의 모습으로 찾아온다. 그들은 모두 어려운 선택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한 가지 공통된 이유가 있다.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형사 짓보다 가족이 우선이다
‘안방극장’이라 불리는 만큼, 드라마에 나타나는 가족의 모습은 좀더 직접적이다. 주간시청률 집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드라마는 대부분이 가족드라마이다. 거기에는 ‘하늘만큼 땅만큼’, ‘행복한 여자’, ‘나쁜여자 착한여자’, ‘사랑도 미움도’, ‘아줌마가 간다’등등 문제가 되는 불륜과 논란 드라마도 끼어 있지만 그것은 역시 가족이 중심테마이다.
하지만 이런 경향은 단지 가족드라마에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최근 들어 새롭게 시도되고 있는 전문직드라마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나타난다. ‘하얀거탑’이 병원 내에서 숨가쁘게 벌어지는 정치드라마를 그리면서도 장준혁(김명민)이 어머니를 찾아가는 장면을 빼놓지 않는 것은 가족이 갖는 장치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외과의사 봉달희’에서도 병원 내의 생사를 오가는 전문적 내용들이 다뤄지면서도, 기본적으로 그 속에서 가족의 이야기(예를 들면 이건욱(김민준)과 조문경(오윤아)의 에피소드 같은)를 끄집어낸다.
최근 시작한 한국형 범죄수사드라마 ‘히트’에서도 이런 경향은 나타난다. 수사경력 25년의 최고참 베테랑 형사이지만 만년 경사인 장용하(최일화)의 에피소드가 그렇다. 강력범죄 수사를 전담하는 ‘히트’의 멤버이면서 만사 제쳐두고 가출한 딸을 찾아 홍콩으로 가는 그는 우리 드라마에서 가족이 갖는 힘을 새삼 느끼게 한다. 이것은 외국드라마라면 상상하기 힘든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범인 잡는 형사이야기에서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는 딸과 그 딸을 보호하려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되자 드라마는 좀더 끈끈하고 절절해진다. 자극 중심의 아드레날린 드라마에 감성적 드라마가 뒤섞여지게 되는 것이다.
‘가족’이 우리 식의 경쟁력이 되려면
홍콩 느와르의 전성시대를 예고했던 ‘영웅본색’은 헐리우드 영화가 갖지 못한 피의 끈끈함을 다루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의리’이다. 소마(주윤발)가 자호(적룡)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폭력과 피로 아드레날린을 자극하기만 하던 헐리우드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갑작스레 던져진 감성의 자극이었다. 그 감성은 그러나 감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인물들 사이를 좀더 끈끈한 의리로 묶어놓자, 거기서 벌어지는 드라마에는 더 강력한 아드레날린이 가능해진다. 이것은 타인의 죽음이 갖는 의미보다 지인의 죽음이 갖는 의미가 더 강렬해지는 탓이다.
우리에게 ‘가족’은 그런 면에서 우리 식의 경쟁력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개인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서구가 뒤늦게 인정하게 된 가치이다. 점점 글로벌화되는 미디어 시장 속에서 세계는 국경 없는 전쟁에 돌입해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중국과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이 하나의 아시아권으로서의 영화적 경쟁력을 키워나간다고 가정할 때,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우리 식의 경쟁력이 되면서도 보편성을 띄는 가치이다. ‘의리’니 ‘가족’이니 하는 가치가 보편성을 갖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오랜 세월 똑같은 동양적 가치체계(예를 들면 유교나 불교 같은)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경쟁력이 되기 위해서는 선결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과거의 구질구질함으로 대변되는 구태의연한 방식으로서 ‘가족’을 활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달라진 세상에 달라진 ‘가족’에 대한 새로운 가치부여의 시도가 끊임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소재는 자칫 과거적 가치로의 회귀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올초 영화계를 뒤흔들었던 사건은 뭐니뭐니해도 스크린쿼터 축소. 그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 미국산 수퍼 히어로들이 극장가를 공격했다. 그 장본인은 ‘미션 임파서블3’, ‘다빈치 코드’, ‘엑스맨3’, ‘수퍼맨 리턴즈’다. 그 틈바구니에 우리네 왜소한 히어로, ‘흡혈형사 나도열’이 끼어 있었다. 이 상징적인 장면은 저 박민규의 소설, ‘지구영웅전설’에서 수퍼히어로들 사이에서 ‘시다바리’ 역이라도 하며 히어로를 꿈꾸는 우리네 주인공을 보는 것 같아 마음 아팠다. 그것은 또한 스크린쿼터 축소에 즈음하여 저 덩치 큰 헐리우드 영화 틈바구니에서 가냘프게 서 있는 우리 영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열 받아야 변신하는 나도열처럼
‘흡혈형사 나도열’은 열 받아야 비로소 변신한다. 우스꽝스럽지만 심지어 PMP에 저장된 포르노를 봐야만 하는 히어로란 처절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결과물이야 좀 떨어지더라도 나도열의 본래 원대한 전략은 스스로 무너져 헐리우드를 대변하는 수퍼히어로라는 허상을 깨는 데 있었다. 홀홀 단신으로 사실 저 세계와 대적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크린 쿼터 일수가 축소되고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터들이 일제히 융단폭격을 준비하던 시기, 나도열이 그 영화판에 알몸으로 서 있었듯이, 거리에는 영화인들의 1인 시위가 잇따랐다.
하지만 1인 시위는 ‘흡혈형사 나도열’이 그랬던 것처럼, 온몸으로 비판에 나섰지만 정작 관객은 별로 없었다. ‘열 받아야 그제서야 힘을 쓰는’ 나도열처럼, 우리네 정서는 아직 열을 받지 않았다. 올 초부터 ‘왕의 남자’가 천만 관객 기록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인들의 제 밥 그릇 찾기라는 오명이 씌워지면서 그나마 스크린 쿼터 축소발표로 받은 열은 쉬 식어버렸다. 그 서서히 사라지는 열기 속에서 미8군에 의해 무단 방류된 포름알데히드를 먹고 ‘괴물’은 조금씩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었다.
영화계 재난에 대응하는 자세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그 자체로 하나의 알레고리를 만드는데 성공함으로써 수많은 해석이 가능해졌다. 대체로 재난에 해당하는 키워드를 괴물에 대입하고, 거기에 대처하는 정부의 자세를 보면 영화는 그렇게 해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자 그럼 괴물에 우리네 영화계의 재난으로서 스크린 쿼터라는 키워드를 대입해보자. 갑자기 백주 대낮에 나타난 이 스크린 쿼터라는 괴물에 대해 정부는 무관심하다. 오히려 그걸 보고 그 위험을 실감한 사람들은 격리된다. 여기에 우리네 강두 가족이 괴물과 맞선다. 다행스럽게도(?) 괴물을 죽이지만 우리도 현서를 잃는다.
재미있게도 이 영화는 올 한해 우리네 영화가 가졌던 위기감과 그걸 헤치고 나올 수 있는 방법론을 모두 제시한다. 괴물 같은 실체가 잘 보이지 않는(하지만 분명히 있는) 우리네 영화의 위기감을 향해 저 나도열처럼 1인 시위로는 해결이 어렵다는 것. 대신 우리 식의 전략을 가지고 우리 식의 블록버스터(?)를 하나하나 만들어내는 작업으로 결국 저 수퍼히어로들과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올 한 해 우리 영화의 성적표는 위기감이 무색할 정도로 좋다. 하지만 11월부터 분위기가 심상찮다. 우리 영화의 해외수출량이 떨어진 건 상반기에서부터 드러난 징후지만, 지금은 우리 영화가 소강상태로 접어들고 있다. 이미 괴물은 죽었는데 뭐가 걱정이냐 하겠지만, 저 영화 속 강두가 야밤에 어둠을 향해 긴장하듯, 여전히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괴물에 대처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정지영 아나운서의 퇴진까지 가져온 밀리언셀러, ‘마시멜로 이야기’는 숫자 놀음에 경도된 우리 사회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그것은 출판계에서는 ‘판매부수’로 불리며, 영화에서는 ‘관객수’로, 그리고 TV 드라마에서는 ‘시청률’로 불린다. 그것들은 이름만 다를 뿐 그 역할은 비슷하다. 작품에 권력을 부여하는 것이 숫자들이 맡은 역할이다.
숫자들의 권력은 점점 커져서 언제부턴가 우리네 문화계는 콘텐츠 자체의 질에 승부하기보다는 이 숫자를 얻기 위한 무한경쟁에 들어서 있는 느낌이다. 스테디셀러보다는 베스트셀러를, 두고두고 꺼내보는 명작으로 남기보다는 최단기간에 최대의 관객을 끌어 모은 영화를, 그리고 시청자들과 호흡하는 완성도 높은 드라마보다는 욕을 먹더라도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를 추구하고 있다는 얘기다.
‘마시멜로 이야기’가 보여준 숫자놀음의 진수
‘마시멜로 이야기’는 작금의 출판계가 해온 기획 출판의 정점을 보여준다. 책은 작가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전문번역자가 아닌 아나운서 정지영씨의 얼굴을 달고 세상에 나왔다. 목적은 단 하나. 베스트셀러를 만들려는 것이다. 이러한 출판의 스타마케팅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벌써부터 연예인들은 작가라는 또 다른 명함을 갖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우리가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다 아는 유명 연예인들은 자서전에서부터 여행서, 수필, 어학교재, 요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서적들을 냈다. 일찍부터 출판사들은 스타마케팅을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는 얘기인데 실제 출판사 얘기를 들어보면 비디오를 갖춘 선물세트의 성격을 띤 서적류에 있어서는 상당한 돈이 오간다고 한다. 그만큼 스타마케팅을 활용한 책에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이러한 스타마케팅을 활용한 책들을 누가 썼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중 ‘마시멜로 이야기’가 모난 돌이 된 이유가 그 책이 추구했던 베스트셀러에 있었다는 점에서 이 사건은 아이러니하다.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이러한 책들이 과연 출판계에 진정으로 도움이 될 것이냐는 점이다. ‘마시멜로 이야기’의 경우 원 번역자는 이 책이 “1만 부나 나갈까 싶었지 이렇게 많이 팔릴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며 “내용은 좋지만 밀리언셀러감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 말은 책 자체의 내용보다 정지영씨의 이미지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걸 말해준다. 즉 이러한 책들은 스타들의 이미지를 포장한 ‘상품’의 성공이지 콘텐츠 자체로 승부한 ‘서적’의 성공으로 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대리작가들과 얼굴마담 스타들만 늘어나는 출판계는 당장의 이익을 위해 미래의 독서군을 빼앗는 사태를 예고한다. 이 사건은 정지영씨의 윤리적인 문제보다 더 앞서, 이러한 베스트셀러라는 숫자놀음에 빠져있는 출판계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걸 알 필요가 있다.
영화의 관객수와 드라마의 시청률
그런데 이러한 숫자 경도 현상은 출판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영화에서 관객수로, 드라마에서는 시청률로 대변된다. 작품 자체의 완성도를 차치하고라도 우리는 최고의 수치를 기록했다는 점에서 영화 ‘괴물’과 드라마 ‘주몽’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괴물’은 개봉 그 자체부터 괴물다웠다. 칸느 영화제에서의 호평(수상이 아니다)을 통해 솔솔 불어온 괴물에 대한 기대감은 마치 괴물의 탄생처럼 저 한강 밑바닥에서부터 차츰차츰 커져갔다. 그리고 대낮에 버젓이 등장한 괴물에 대해 일제히 언론들은 호평을 쏟아냈다. 비평가치고 괴물 평 안 해본 사람 없을 정도로(이 영화는 실제로 비평가들의 비평 욕구를 자극하는 구석이 있다) 홍보가 된 이 영화는 기대에 부응하기라도 하듯이 엄청난 속도로 관객몰이를 시작했다. 여기에 언론들은 ‘몇 일 만에 몇 만 돌파!’라는 식의 기사들을 쏟아냈다. 엄청난 정보의 홍수들로 범람하는 인터넷이라는 강물 속에서 뛰쳐나온 ‘괴물’은 일순간 ‘정보의 획일화’를 불러 일으켰다. 이제 어딜 가든 우리는 괴물에 대한 기사들을 보게 되었다. 그 숫자의 압력은 지대한 것이어서 우리를 극장 앞으로 가게 만들었다.
그런데 괴물이 사라진 지금까지 그 혼령은 여전히 인터넷을 떠돈다. 새로운 영화가 등장할 때마다 나오는 ‘○○, 괴물의 흥행 넘을까’류의 글들이다. 이러한 기사들은 괴물의 숫자를 다시 떠올리는 힘을 발휘하는 동시에, 새로 등장할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끄집어낸다. 그런데 엄밀히 생각해보자. 이 기사는 정보일까. 홍보일까. 정보라기보다는 홍보에 가깝다. 물론 ‘타짜’와 같이 19세 이상가 영화로서 500만 관객을 넘은 경우, 그것이 기사로 나왔다면 정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홍보로 느껴지는 것은 이러한 대박 영화들에 조명이 집중되는 시각, 소외되고 있는 타 영화들이 너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관객수는 TV로 오면 시청률로 변신한다. 드라마 ‘주몽’에 많은 비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위 40%대를 넘는 시청률을 유지하는 것은 드라마적인 재미 이외에도 시청률의 그 숫자가 한몫을 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이제 시청률은 권력이 되었다. ‘주몽’에 대한 비판이 어려운 것은 그 40%라는 막연한 시청률이 주는 무게감 때문이다. 이것은 ‘주몽’이외에도 수위의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는 드라마들 모두가 갖고 있는 무언의 압력이다. 시청률이 권력이 된 상황은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가 탄생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무조건 시청률에만 올인하여 결국 시청률은 높으나 완성도는 떨어지는 드라마가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드라마의 존재기반은 드라마 자체가 아닌 시청률이 되는 셈이다. 따라서 이제는 ‘높은 시청률 = 완성도 높은 드라마’라는 등식은 깨지게 된다.
예술작품은 재미없다는 말은 옛말(?)
과거에 흔히 우리는 ‘예술작품은 재미없다’는 식의 자조적인 얘기를 하곤 했다. 그러나 이 얘기 속에는 예술성과 상업성은 별개라는 의식이 있었다. 또한 이 얘기는 상업적으로 실패하더라도 그것이 예술적으로도 실패는 아니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문화계에서 이러한 얘기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듯 보인다.
영화 ‘괴물’에 대한 관심은 ‘재미있다’는 점에 ‘작품성이 있다’는 두 가지 요소를 함께 자극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바로 칸느 영화제라는 작품성의 공간에서 벌어진 ‘재미있다’는 반응이었다. 드라마 ‘주몽’에 대한 관심의 증폭 역시 ‘최초의 고구려사에 대한 접근’이라는 가치와 ‘퓨전사극’이라는 재미가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물론 ‘마시멜로 이야기’ 역시 여타 연예인과는 다른 정지영 아나운서라는, 무언가 지적인 면모와 미모를 함께 갖춘 인물로 인해 가능했다(요즘 아나운서들의 전성시대는 바로 이 직업이 갖는 양면성에 비롯한 부분이 많다).
그렇다면 이제 예술작품(완성도 높은 작품)도 재미가 있다는 얘기인가. 아쉽게도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보다는 거꾸로 상업적으로 성공한 작품이 이제는 작품성이라는 부동의 지위까지 얻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좀더 대중과 가까워진 예술이라는 긍정적인 측면으로도 읽을 수 있으나, 그럼에도 이제는 잘 팔리는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 불리는 권력까지 부여한 혐의를 지울 수는 없다. 이로써 진정한 예술작품들은 예술로서도, 상업적으로도 소외 받는 상황이 되기도 한다.
보다 다양한 콘텐츠를 즐기면 안 되는 것인가
우리는 현재가 다양한 콘텐츠의 시대라는데 이견을 갖지 않는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런 다양한 콘텐츠들을 실제로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매일매일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정보들은 마치 다양성이 보장된 사회로 가는 징후로 얘기됐으나, 실제 우리의 삶은 그 중 ‘선별된’ 몇 개의 정보를 누리는 정도의 삶을 살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많은 콘텐츠와 정보들은 어떤 식으로든 선별되지 않으면 모두 쓰레기가 된다. 그런데 그 선별과정은 과연 투명한가. 아니 공정한가. 이 정보들을 선별하는 순위 혹은 수치라는 근거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부분에 우리는 의문을 가져야 한다. 수치는 콘텐츠의 질과는 그다지 상관이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단순한 수치가 아닌, 다양한 작품들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되는 그 속에서 독자들과, 관객들과, 시청자들의 제대로 된 선택이 가능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