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리와 안아줘’, 멜로만큼 궁금한 이 드라마의 인간관

과연 채도진(장기용)은 희대의 살인마인 아버지 윤희재(허준호)를 이겨낼 수 있을까. MBC 수목드라마 <이리와 안아줘>는 채도진과 한재이(진기주)의 서로 나누는 눈빛만 봐도 눈물이 날 것 같은 절절한 사랑을 담고 있지만, 그것만큼 궁금해지는 건 이 드라마가 보여줄 인간관이다. 인간은 악을 태생적으로 안고 태어난다고 해도 과연 그것을 벗어나 구원받을 수 있을까. 또 그런 구원은 어떻게 가능해질 수 있을까. 

윤희재는 이미 체포되어 사형수로 감방에서 생활하고 있지만, 여전히 채도진과 한재이의 주변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지우고 싶은 그 과거를 끊임없이 다시 끄집어내는 장본인이 바로 윤희재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서전을 써서 베스트셀러를 만들고, 그것으로 본래 윤나무와 길낙원에서 채도진과 한재이로까지 이름을 바꿔 살아가는 이들 앞에 그 과거의 그림자를 다시금 드리운다. 

윤희재는 ‘악은 계승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원하든 원치 않든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그런 연쇄살인을 벌인 것이 ‘계승된 악’ 때문이라는 변명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아들인 채도진은 윤희재에게 반기를 든다. 한재이의 부모를 죽이고 한재이까지 죽이려 했던 윤희재를 막아선 건 채도진이었다. 그는 ‘악은 계승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선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와는 다른 선택을 한다. 아버지가 희대의 살인마를 선택했던 반면 그는 경찰을 선택한다. 윤희재가 “강해지기 위해서는 나약하게 만드는 것들을 모두 없애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사람이 “강해지는 건 누군가를 지키려 할 때”라고 반박했던 바 있다. 그가 경찰이 된 이유다. 하지만 사형수 윤희재는 감방 안에서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낸다. 자신을 따르던 추종자를 자신과 똑같은 살인범으로 키워낸 것. 

과거는 다시 반복된다. 윤희재에 의해 조종 받는 살인범은 과거 윤희재가 했던 방식 그대로 연쇄살인을 저지른다. 그리고 그 피 묻은 망치는 점점 채도진과 한재이에게도 다가오기 시작한다. 채도진은 악으로 얼룩진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경찰을 선택했지만, 다가오는 윤희재의 그림자 앞에 자신도 모르게 광기를 드러낸다. 만일 그가 살인범을 잡는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윤희재와 똑같은 광기를 드러낸다면 그건 결국 그의 실패를 자인하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는 과연 이 위기를 이겨낼 수 있을까. 

<이리와 안아줘>가 흥미로워지는 건 이렇게 태생적으로 악의 구렁텅이 속에 빠져 있는 인물들 주변에 그들을 그 바깥으로 이끌어주는 따뜻한 손길들이 있다는 점이다. 채도진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한재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그와 사실상 남남이나 마찬가지지만 진짜 엄마보다 더 엄마처럼 자신을 걱정해주는 채옥희(서정연)나, 아빠처럼 그를 돌봐준 고이석(정인기) 같은 인물이 있었다. 이들은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는 채도진에게 다가와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결국 인간은 태생이 아무리 힘겹다고 해도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살아갈 수 있지만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건 혼자만의 힘이 아니라는 것이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인간관이다. 채도진도 그렇지만 그의 형인 윤현무(김경남)가 겉으로는 아버지의 인정을 받고 싶어 악한 척하면서도 자신을 아들로 받아들이고 안아줬던 채옥희를 걱정하는 모습은 이런 인간관을 잘 드러내준다. 지독한 불행 속에 놓여져 있어도 다가와 안아주는 그 따뜻함이 어쩌면 구원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이리와 안아줘>는 채도진과 윤희재의 팽팽한 대결구도 속에서 담아내고 있다.(사진:MBC)

‘독전’, 마약 범죄 느와르에 숨겨놓은 우리네 삶의 풍경들

영화 <독전>은 제목처럼 독하다. 이야기가 독하고 폭력적인 장면들이 독하며 그걸 연기해내는 배우들은 더더욱 독해 보인다. 한 마디로 미친 존재감을 보여준 배우들, 조진웅, 故 김주혁, 류준열, 차승원, 김성령, 박해준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진서연까지 모두가 소름끼치는 연기 몰입을 보여준다. 관객으로서는 그들의 연기가 만들어내는 긴장감에 어떻게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마약을 두고 벌어지는 느와르 영화의 전형처럼 강렬한 장면들이 관객의 시선을 온통 집중시키는 바람에 이해영 감독이 이 느와르를 통해 담아놓은 많은 종교적 뉘앙스들이 슬쩍슬쩍 뒤로 숨겨진다. 이건 <독전>이라는 영화 제목의 영문명이 조금은 엉뚱하다 싶은 ‘Believer’라는 데서도 찾아질 수 있다. 겉면은 ‘독한 전쟁’이지만 그 내면에는 ‘믿는 자’들을 내세운 삶에 대한 종교적 통찰을 숨겨놓은 듯한.

워낙 맹렬하고 독한 범죄 현장의 팽팽한 긴장감이 가득 채워져 있는지라, 영화의 시작점과 끝점에 등장하는 눈이 하얗게 쌓인 풍광 속을 달려가는 원호(조진웅)의 모습은 어찌 보면 이 느와르를 표방한 영화에는 사족 같은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 시작점과 끝점은 영화를 다 보고나면 사족이 아니라 사실은 이 느와르 영화를 훨씬 더 확장해서 볼 수 있는 열쇠라는 걸 알게 된다. 마치 자신이 믿는 바를 끝까지 확인하기 위해 세상의 끝에 다다른 듯한 원호의 모습은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한 단면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독전>이라는 느와르 영화에서 이런 종교적 뉘앙스를 느끼게 되는 이유는 이 영화 전편에 깔려 있는 ‘이선생’이라는 이름은 있지만 실체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세워져 있어서다. 영화 속 인물들은 저마다의 목적에 따라 이선생을 만나려 하거나 그를 사칭하거나 그를 잡으려 한다. 물론 느와르 영화라는 장르적 특성 속에서 이선생은 거대 마약 조직을 배후에서 움직이는 ‘거물’이고 그래서 그를 만나려는 자들은 그와 거래를 하려 하거나, 그의 명성을 이용하려 하거나 혹은 그를 검거하려 한다. 

하지만 영화는 마지막에 이를 때까지 이선생의 존재를 숨겨 놓는다. 그래서 그 가상의 존재를 두고 벌어지는 인물들의 지옥 같은 전쟁이 벌어진다. 아무도 믿지 않는 자나 그를 사칭해 권력을 쥐려는 자는 그래서 그 지옥 속에서 최후를 맞이하고, 그를 잡으려 하는 자는 결국 허상만은 잡게 된다. 그나마 끝까지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원호만이 이선생의 실체 앞에 다가간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그 이선생 앞에 선 원호는 그렇게 이선생을 좇으며 살아온 삶이 허망하다는 걸 느낀다. 그는 문득 이선생에게 묻는다. 그렇게 “살면서 행복했던 적이 있었냐”고. 마치 이선생을 잡으면 자신의 삶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지만, 막상 그 앞에 서게 되면서 그는 문득 깨닫게 된다. 무엇 때문에 그리도 고집스럽게 그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그 세상의 끝에까지 오게 됐던 것인지. 

<독전>은 제목이 말해주는 대로 그 ‘독한 전쟁’을 느와르를 즐기듯 봐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특히 그 느와르의 질감을 독한 핏빛으로 만들어낸 배우들의 열연은 소름끼치도록 흥미진진하다. 하지만 느와르를 통해 종교적인 구원과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고 있는 이해영 감독의 속삭임을 들여다보는 재미 또한 빼놓을 순 없다. 영화 앞과 끝을 이어주는 그 황량하고 추운 동토 속을 구도하듯 차를 몰고 나가는 원호의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 속에 아른거리는 그 여운이 주는 재미를.(사진:영화'독전')

‘마더’ 엄마는 아이를, 아이는 엄마를 탄생시킨다

“어쩌면 아이가 태어나는 것처럼 엄마도 태어나는 것 같아요.” tvN 수목드라마 <마더>의 수진(이보영)은 그렇게 말했다. 본인은 한 번도 엄마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던 수진이었다. 그러던 수진은 결국 엄마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진짜 엄마가.

결국 진짜 모녀지간이 된 수진에게 윤복(허율)은 묻는다. “엄마 나 처음 봤을 때 불쌍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자 수진은 이렇게 말한다. “아니 난 나 같은 애가 또 있네 그렇게 생각했어.” 즉 수진이 윤복을 데리고 멀리 도망치려 했던 건 아이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아이에게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되려 윤복은 수진을 불쌍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가 “애들을 무서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긴 여정의 마지막 장면에 들어간 이 대사는 <마더>가 하려던 이야기가 그저 아동학대를 받는 한 아이를 구원하는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걸 말해준다. 그건 아이를 구해내는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엄마를, 세상을 구해내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돌아보면 이 윤복이라는 아이가 그 많은 상처를 겪어내면서 주변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는가가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수진이 말하듯 윤복을 통해 엄마가 태어났다. 그리고 그건 아직 이 세상이 살만한 곳이라는 걸 증명하는 일이었다. 

수진의 엄마 영신(이혜영)은 진짜 엄마가 무엇인가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여자가 엄마가 된다는 건 다른 작은 존재에게 자기를 다 내어줄 때”라고. 하지만 그건 모성애만을 뜻하는 건 아니다. 세상이 그래도 살만하게 되는 건 엄마가 태어나듯이 타자에게 자신을 온전히 내어줄 수 있을 만큼 따뜻한 인간애를 드러낼 때가 아닌가.

<마더>라는 드라마가 놀라운 건, 마치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그 엄마의 사랑이 태생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의 과정을 통해 태어난다는 걸 얘기하려 했다는 점이다. 아이를 두려워하던 수진은 윤복을 만나(그건 어쩌면 또 다른 자기 자신이다) 아이를 사랑하게 되고 그것이 엄마로서의(혹은 한 인간으로서의) 따뜻함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게 된다. 

그러니 아이는 ‘키워줘야 될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부모를 ‘탄생시키는 존재’가 된다. 그건 다름 아닌 세상이 살만한 건 사람들이 여전히 따뜻한 마음을 갖게 만드는 존재로서 아이가 거기 서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더>에서 윤복은 수진을 구원하는 존재이면서, 동시에 세상을 구원해내는 존재가 된다. 이 드라마에서 어떤 숭고한 종교적인 느낌 같은 걸 갖게 되는 건 이런 아이를 바라보는 남다른 시선이 있어서다.

그러고 보면 이 윤복이라는 아이가 있어 우리는 울고 웃었다. 수진은 이 아이를 통해 부정했던 자신의 구원을 얻었고, 먼저 간 영신은 큰 위로를 받았으며, 뒤늦게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진(전혜진)과 현진(고보결) 역시 자신들이 분명한 영신의 딸이라는 걸 확인하게 해줬다. 또한 수진의 친모인 홍희의 과거 아이에게 잠금줄을 맸을 때 갇혀졌던 삶 역시 윤복이 열어준 열쇠로 비로소 풀려날 수 있었다. 

그룹 홈에서 윤복을 돌봐주고 그 아픈 상처를 끝까지 보듬어주려 했던 그룹홈 엄마(오지혜)는 끝내 자신을 엄마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윤복을 수진에게 돌려보내는 그 순간에 엄마로 태어난다. 무엇이 윤복에게 진정한 행복을 줄 수 있는가를 알게 되고 결국 보내주는 마음은 저 영신이 말했듯 “다른 작은 존재에게 자기를 다 내어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순간 아이는 다가와 그룹홈 엄마에게 말한다. “고맙습니다. 엄마.”

도대체 우리는 아이를 어떤 존재로 보고 있었을까. 육아의 현실은 물론 힘겨운 일이고 그래서 그만한 제도적 마련이 절실한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이라는 존재마저 ‘키워내야만 하는 버거운 짐’처럼 여기고 있었던 건 아닐까. <마더>는 그런 점에서 아이라는 존재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아이가 있어 얼마나 많은 것들이 축복받고 있는가를. 세상에 많은 엄마들을, 또 진정한 인간애를 태어나게 하는 존재로서.(사진:tvN)

‘마더’가 사회에 던지는 딜레마, 친모라고 엄마인가

그냥 이 엄마와 딸을 진짜 모녀 관계로 살게 해줄 순 없을까. 아마도 tvN 수목드라마 <마더> 시청자라면 수진(이보영)과 윤복(허율)이 그렇게 편하게 엄마와 딸로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처한 현실은 어떨까. 수진은 경찰에 쫓기는 유괴범이다. 그것도 딸 같은 윤복을 유괴한 인물. 

물론 수진이 윤복과 함께 도망치게 된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만일 수진이 방치했다면 윤복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의 엄마 자영(고성희)은 비정하게도 자신의 동거남 설악(손석구)이 윤복을 학대하는 걸 방치했다. 그리고 아이가 사라지자 찾아보려 하기보다는 아이의 사망을 기정사실화한다. 

윤복을 납치한 설악이 ‘눈물을 보이면 죽인다’는 자신의 룰을 이야기하며 과거 쓰레기 봉지에 넣어 윤복을 버린 일이 사실상 아이를 죽이려던 것이었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그 윤복을 구해낸 수진이야말로 진정한 어른의, 아니 엄마의 자격을 가진 인물이라는 걸 확인하게 된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윤복을 찾기 위해 그 속으로 뛰어드는 수진은 자신이 엄마라는 걸 그 행위로 증명한 셈이다. 

하지만 법은 이들을 엄마와 딸로 바라보지 않는다. 심지어 자영이 아이를 학대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이 혜나(윤복의 진짜 이름)의 엄마임을 드러내며, 수진이 유괴범이라고 주장한다. 이 사실은 이 사건을 처음부터 추적해온 형사 창근(조한철)이 그 누구보다 잘 아는 것이지만, 그 역시 자신의 직업이 해야 될 법적 의무를 저버리지 못한다. 그는 사실 수진이 혜나를 구해낸 것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그들을 추적한다. 

창근의 마음 속에도 하지만 어떤 흔들림 같은 것들이 조금씩 생겨난다. 수진의 혜나에 대한 진심이 그가 추적해온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고스란히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을 추적하면서도 그 이유가 단지 범죄자를 체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길바닥에서 얼어 죽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더한다. 그에게는 범법자를 잡아야 한다는 마음과 함께 이들을 지켜내고픈 마음이 조금씩 겹쳐진다.

그리고 언론은 이런 구체적인 사건의 진실에 관심을 그리 두려 하지 않는다. 다만 한 아이가 유괴됐다는 사실과 그 아이를 유괴한 자의 엄마가 유명한 배우라는 사실에 더 관심을 갖는다. 이미 용의자로서 그 얼굴까지 공공연하게 노출된 수진은 이제 영락없는 유괴범으로서 사회에 낙인찍힌다. 그 과정을 상세히 봐왔던 시청자들로서는 이런 현실의 시선이 너무나 비정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과연 친모만이 엄마인가. 그래서 엄마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이들도 아이에 대한 권리는 온전히 친모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아동학대는 더 끔찍한 범죄지만, 그 학대로부터 아이를 구해내 도망친 자가 유괴범으로만 지목되는 현실은 과연 합리적인가. 그 어린 시절 겪은 학대와 엄마의 자살로 인해 끔찍한 범죄를 계속 저지르게 된 설악의 최후는 과연 친모라고 해서 모두 엄마라고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혜나를 수진이 보는 앞에서 죽이려 한 설악을 진홍(이재윤)이 성모마리아상으로 때려 쓰러뜨리는 장면과, 그렇게 도주하는 수진과 혜나가 절의 스님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장면은 그래서 남다른 상징처럼 다가온다. 법이라는 인간의 잣대로서는 비정하기만 한 이들 앞에 펼쳐진 현실 속에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건 성모마리아나 스님 같은 종교적 차원의 시선이라는 메시지. 어쩌면 구원은 법적 잣대가 아닌 인간을 긍휼한 시선으로 공평히 내려다보는 그 관점으로부터 가능하다는 걸 드라마는 말하고 있는 듯하다.(사진:tvN)

<싱 스트리트>, 존 카니의 음악영화는 늘 옳

 

<싱 스트리트>라는 영화에 있어서 존 카니 감독이라는 존재감은 가히 압도적이다. 이미 <원스><비긴 어게인>으로 음악영화의 묘미를 관객들에게 전한 바 있는 감독이니 이번 <싱 스트리트>에 대한 기대감은 굳이 여러 이유를 댈 필요가 없을 게다. 그리고 그 기대감은 역시 존 카니 감독의 음악영화는 늘 옳다는 만족감으로 돌아온다. <싱 스트리트>는 이전의 음악영화들이 준 감동 그 이상이다.

 

사진출처: 영화 <싱 스트리트>

<싱 스트리트>는 시간을 80년대로 되돌렸다. 사실 이 영화의 정서를 만들어내는 당대의 아하, 듀란듀란, 홀 앤 오츠 등의 곡만으로도 어쩌면 반색하는 관객들이 있을 법 하다. 그저 음악이 아니라 어떤 스피릿(Sprit)’이 느껴지던 그 때의 음악들. 지금 보면 웃음이 빵 터지는 뽕 들어간 의상과 폭탄 머리지만 그것이 하나의 시대 정서로까지 느껴지는 그 때의 아티스트들과, 그들을 흉내 내면서 스스로의 음악을 만들어가는 보이 밴드 싱스트리트의 매력이라니.

 

존 카니 감독은 역시 음악이 어떤 순간 우리를 매혹시키는 지 정확히 알고 있다. 85년 더블린. 경제상황이 어려워진 현실 때문에 학비가 싼 싱스트리트로 전학 온 코너(퍼디아 월시-필로)가 라피나(루시 보인턴)라는 뮤즈를 만나게 되면서 밴드를 하게 되면서 성장해가는 이야기. 거의 음치에 가깝게 노래하던 코너가 사랑을 알게 되면서 그 마음을 담아 가사를 쓰고 거기에 밴드의 만능 악기 연주자인 에이먼(마크 맥케나)의 도움을 받아 곡으로 탄생하는 과정은 신비로울 정도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음악은 지독한 현실을 뚫고 더 아름답게 피어난다. 더블린의 어두운 경제, 지독한 현실 속에서 꿈을 포기한 채 버텨내는 삶을 살아가는 그들이다. 부모로부터 학대받는 아이, 알코올 중독 때문에 병원에 입원한 아버지를 둔 미래의 음악가, 부모가 없는 편이 오히려 낫다며 항상 그곳으로부터 탈출하려 하는 청춘들... 그들의 고뇌와 방황은 고스란히 음악으로 승화된다.

 

코너의 음악이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건 그것이 기술적으로 기교적으로 완벽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거칠지만 그 안에 온전히 자신의 마음을 담아내고, 그것을 음악으로 당당하게 전하는 그 모습 때문이다. 그래서 그 음악은 완전히 새롭게 들린다. 존 카니 감독은 바로 이 음악이 가진 마법적인 순간이 그 음악 자체의 소리가 아니라 거기 담겨진 음악을 만든 이들의 진심이라는 걸 영화를 통해 말해주고 있는 듯 보인다.

 

<비긴 어게인>을 통해 깊은 감동을 받았던 관객이라면 <싱 스트리트> 역시 충분히 만족할만한 영화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음악의 본질적인 면들을 훨씬 잘 드러냈다는 점에서 <싱 스트리트>는 존 카니가 만든 음악영화들의 근간을 보여줬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게다. 음악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그 음악의 마법 같은 탄생 과정과 그것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그 과정까지를 담아낸 이야기는 영화를 보고난 뒤에도 오랜 여운으로 남는다.

 

코너가 그저 그런 아이에서 차츰 아티스트가 되어가는 과정은 이 아픈 현실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하는 영화의 메시지로 승화된다. “너는 파괴할 줄만 알지. 뭔가 만들어낼 줄은 모르잖아.” 집에서 학대받으며 자라 학교에서 폭력을 일삼는 친구에게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이렇게 말하는 코너의 모습은 예술이 어떻게 그들에게 구원이 되어주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 부분은 80년대 더블린이라는 곳에서 살아가는 청춘들의 이야기가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도 깊은 감흥을 주는 이유다. 코너와 그가 만든 싱스트리트 밴드의 성장기는 지금 우리의 청춘에게는 큰 용기와 위안으로 다가올 만하다

<밀회>의 불륜, 사회극보다 더 신랄한 까닭

 

그 사람들 기분 좋게 돈 쓰게 하고 또 돈 벌고 그런 걸 두루 돕는 게 내 일이야. 먹이사슬. 계급 그런 말 들어봤어?” 상류사회에서 혜원(김희애)이 당하는 갑질을 보고는 분노하는 선재(유아인)에게 그녀는 자신이 우아한 노비라고 말한다. 혜원을 하인처럼 막 대하는 서영우(김혜은)가 제일 꼭대기냐는 선재의 질문에 혜원은 이렇게 말한다. “꼭대기는 그 여자가 아니라 돈이다. 아니구나. 진짜 꼭대기는 돈이면 다 살 수 있다고 끝도 없이 속삭이는 마귀.” 도대체 이 마귀란 뭘까.

 

'밀회(사진출처:JTBC)'

중년 여인과 청춘 사이에 벌어지는 불륜을 소재로 다루지만 <밀회>를 단순한 불륜 치정극으로 바라보면 이 작품이 가진 다양한 결들을 놓치게 된다. 혜원이 조금씩 선재에게 허물어지고 결국 그의 품에 안기게 되지만, 사실 그 결과보다 중요한 건 과정이다. 혜원은 왜 선재를 만나면서부터 자신의 안온해 보였던 삶에 균열을 느끼게 되었을까.

 

<밀회>의 영우는 혜원의 친구지만 그녀의 뺨을 때리고 마작패를 집어던져 얼굴에 상처를 내는 인물이다. 친구사이지만 이런 짓을 버젓이 할 수 있게 만드는 건 뭘까. 그건 바로 혜원이 말한 그 마귀. 마귀는 돈이면 뭐든 다 될 수 있다고 속삭임으로써 그 어떤 친구사이의 패악질조차 서슴없게 만든다. 흔히 말하는 상류층의 갑질을 하는 영우도 그렇지만, 우아한 노비로 그 갑질을 감당해내는 혜원도 그 마귀의 희생자들이다.

 

선재는 모차르트 역시 마귀의 희생자가 아니냐고 묻는다. “모차르트가요. 어느 날 갑자기 난 이제부터 귀족들한테 주문 안 받는다. 내가 쓰고 싶은 것만 쓸 거다. 그러다가 일찍 죽은 거라면서요. 그러다 미치고 병들고.” 혜원은 애써 부정한다. “부자들 돈으로 먹고 살면서도 얼마든지 제 하고 싶은 거 할 수 있어!” 그녀는 선재라는 인물을 통해 자신을 본다. 그녀가 선재에게 하는 말은 실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다. “다 까불지 말라 그래! 음악이 갑이야!”

혜원이 한 사이트에서 막귀형이란 이름으로 선재에게 던지는 말은 그래서 고스란히 다시 혜원에게 되돌려진다. “제가 가끔 가는 사이트가 있는데요. 거기 어떤 형이 그러더라구요. 스펙따위 필요 없고 그냥 막 즐기면서 살라고. 저는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끝까지 즐겨주는 거요. 저는 이 곡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비트 16, 32 막 쪼개갖고 그래서 어깨 빠지게 연습하고 변주 8번 스타카토 더럽게 맘에 안 들다가 어느 날 갑자기 뻥 뚫려서 기분 째지고 그게 최고로 사랑해주는 거죠. 라흐마니노프랑 파가니니가 얼마나 좋아하겠어요. 그게 장땡이잖아요. 먹이사슬이고 먹이고 뭐.”

 

어쩌다 여신이라 믿었던 그녀는 실상 노비의 삶을 살게 되었을까. <밀회>가 그리는 상류사회의 이면은 실로 더럽다. 혜원은 그 더러운 것들을 우아하게 처리해주는 일을 한다. 아트센터라는 우아함 이면에는 아트는 없고 온갖 비리들만 넘쳐난다. 갑질은 일상이고 오입질 또한 스스럼없다. 그것은 심지어 당연시된다. 마귀 덕분이다. 돈이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속삭이는. 혜원은 그 더러운 것들을 치워주는 대가로 살아가는 마귀의 포로다.

 

선재는 그래서 혜원에게는 자신을 마귀로부터 구원해줄 존재로 여겨진다. 그가 짱땡이니 짱난다는 식의 우아한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을 던져줄 때 혜원은 그것을 순수로 읽어낸다. <밀회>가 가진 진짜 힘은 이 불륜의 과정이 마치 마귀에 의해 잘 굴러가던 선으로부터의 탈출처럼 그려지는데서 나온다. 혜원의 밀회는 그래서 아찔하면서도 슬프다.

 

<밀회>가 이런 불륜의 과정들을 통해 상류사회의 추악한 얼굴을 이끌어냄으로써 공감의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데는 피아노 같은 예술적인 장치가 한 몫을 차지한다. 그들의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있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무수히 많은 예술가들의 삶이 결코 늘 행복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거기에도 역시 마귀가 존재했다는 것을.

 

좁은 계단을 지나 그녀는 남루한 선재의 방을 찾는다. 그 방은 마치 겉으로는 우아해도 속으로는 한없이 남루해진 자신의 처지 같다. 선재와의 첫 번째 정사가 온전히 이 남루한 집안을 찬찬히 둘러보는 장면과 두 사람의 소리로만 채워진 것은 이 장면이 가진 아픔과 슬픔을 제대로 전해준다. 그 속에서 그녀는 흐느낀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자신으로 돌아갔던 그녀가 제복 같은 하얀 셔츠를 입고 잠든 선재를 둔 채 나가면서 누군가의 전화를 받는다. “예 이사장님 지금 출발합니다.” 다시 마귀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는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삶의 신산함. <밀회>의 불륜은 그 어떤 사회극보다 더 신랄한 면이 있다.

비참한 삶 속에서 인간다운 삶이란

 

대선이 끝났다.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의 당선으로 막을 내렸지만 그 어느 선거보다 뜨거웠던 대중들의 염원을 느낄 수 있었던 선거였다. 보수 진보와 신구세대로 나뉘어져 팽팽한 대결을 벌였지만 그 공약이 전하는 내용들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경제민주화로 양극화 문제 해결, 반값등록금 실현과 청년 실업 해결, 대기업의 횡포로 사라져버린 골목 상권 부활 등등. 그것이 보수 진보와 신구세대를 넘어선 작금의 민심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영화 <레미제라블>

대선이 치러진 날 <레미제라블>이 개봉되었다. 영진위 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집계 결과 <레미제라블>은 이 날에만 전국 28만 3887명의 관객을 동원 누적 관객수 34만 3094명을 기록 박스오피스 정상에 올랐다. 많은 유권자들이 투표를 마치고 이 영화를 봤을 것이다. 이미 고전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이 영화를 통해 대중들은 어떤 희망을 꿈꾸었을까.

 

<레미제라블>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후의 비참했던 민중들의 삶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제목부터가 <레 미제라블 Le Miserable> 즉 ‘비참한 사람들’ 혹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무려 19년의 감옥살이를 지낸 장발장, 병을 앓고 있는 코제트를 위해 몸까지 팔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한 불쌍한 여인 팡틴, 고아나 다름없이 갖은 구박과 착취를 겪으며 살아가는 코제트가 그들을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이 가난과 비참이 전염병처럼 돌고 있는 도시, 그 끝없는 고통의 그늘 속에서 마리우스 같은 혁명을 꿈꾸는 젊은이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기득권을 가진 아버지를 부정하고 이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몸을 던진다. 하지만 혁명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거리 시위에서 모두 죽음을 맞이하고 결국 혼자만 장발장에 의해 살아남게 된 마리우스는 절망감에 사로잡힌다. 그 마리우스를 위로하고 감싸 안는 건 바로 연인 코제트와 그 사랑을 이뤄준 장발장이라는 위대한 인간의 헌신이다.

 

<레미제라블>은 최근 우리 문화계의 화두로 자리하고 있다. 뮤지컬 영화가 개봉되었고, 뮤지컬은 우리말로 초연되었다. 5권으로 완역된 소설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라있고 심지어 다시 돌아온 피겨 여왕 김연아의 프리 프로그램의 새 레퍼토리가 바로 이 작품이다. 왜일까. 도대체 150년의 세월을 뛰어넘은 이 걸작이 지금 우리 시대와 맞닿은 지점은. 그것은 아마도 20세기, 자본이 그려낸 지구의 미래가 양극화라는 위기의식을 가져왔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게다.

 

돈이면 사람도 서슴없이 거래되는 이 비참한 시대에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인가 하는 질문이다. 그리고 그런 삶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희망이다. 도둑질을 한 장발장을 끌어안아 그 영혼을 구원한 미리엘 주교의 삶은 바로 그대로 장발장에 의해 반복된다. 한 사람에게 준 희망의 촛불이 다른 여러 사람의 희망을 비춰주는 빛이 되었던 것.

 

원작에서 장발장은 죽어가며 이런 말을 남긴다. “죽는 건 아무 것도 아니야. 무서운 건 진정으로 살지 못한 것이지.” 세상이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절망할 건 없다. 스스로 진정 인간다운 삶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중요한 일이니까.

 

대선은 끝났고 당락은 결정됐다. 자신이 지지한 후보가 당선되었든, 아니면 그렇지 못했든 그 과정에서 지금 이 땅의 대중들의 염원은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그 염원이 제대로 실현될 수 있게 다시 한 걸음 한 걸음 나가는 일이다. 저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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