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이 노출을 쓰는 방식은 에로티즘이 아니다

 

파격. 아마도 영화 <간신>을 한 단어로 표현하라면 그것은 파격이 될 것이다. 지금껏 연산군의 폭정을 다룬 사극들이 그토록 많이 쏟아져 나왔어도 이처럼 폭력적이고 광기에 휩싸인 연산군은 심지어 낯설게 다가올 정도다. 갑자사화를 짧게 묘사하면서 시작하는 방식은 마치 <글래디에이터><300>의 한 장면처럼 핏빛 폭력을 심지어 경쾌한 터치로 그려낸다. 연산군은 발가벗은 궁녀들이 기묘한 포즈를 취하게 하면서 그걸 그림으로 담아놓는다. 목이 날아가고 팔이 잘려지는 폭력은 살벌할 정도로 리얼하고, 음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노출은 놀라울 정도로 과감하다.

 

사진출처: 영화 <간신>

거의 끝까지 밀어붙이는 듯한 폭력과 노출은 그래서 서로 그 살을 뒤섞으며 기묘한 긴장과 이완을 만들어낸다. 육체와 살은 이 두 감정을 하나로 보여주는 오브제가 되어 피를 튀기거나 흥건한 땀에 젖는다. 때로는 고통의 원천으로도 보이고 때로는 쾌락의 끝으로도 보이는 이 살들은 그래서 어느 비등점을 넘어서면 기묘한 슬픔 같은 걸 드러내기도 한다.

 

연산군이 채홍사를 통해 1만 명의 궁녀들을 끌어 모아 실제로 꾸렸다는 흥청이 망청이 되어가는 과정은 육체에 쓰여진 쾌락과 고통의 기록처럼 보인다. 채워지지 않는 모성에 대한 결핍을 1만 명의 여성들의 살을 통해 채워 넣으려는 연산군의 광기. 그 폭정에 휘둘려 억지로 끌려오거나, 채홍사의 사적 복수에 의해 끌려온 누군가의 여식들, 그리고 가난한 부모가 먹고 살기 위해 팔아치운 자식들은 이 광기 아래 살아가는 백성들의 분신들처럼 보인다. 연산군에 의해 자행되는 육체의 유린은 그래서 권력이 착취하고 유린하는 백성들의 고혈을 떠올리게 한다.

 

흥미로운 건 폭력과 노출이 거의 끝까지 밀고 나갈 정도로 파격적이지만 그것이 그리 야하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들은 파격적인 성행위를 선보이지만 그것은 마치 현대무용의 한 장면처럼 육체의 퍼포먼스로 보이고, 실제로 이런 장면들 앞에서 연산군은 그것을 화포에 그림으로 담아내는 예술적 행위에서 오히려 더 쾌감을 느낀다. 즉 이들의 성적 행위들은 에로틱하다기보다는 무언가 예술적인 표현을 위해 구성된 행동처럼 다뤄진다.

 

그래서 그 동작들은 힘겨운 백성들의 삶을 표현해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권력자 앞에서 피를 튀기며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검투사들처럼, 온 몸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파이널 매치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왕의 여자가 되려 싸우는 여자들의 육박전은 슬픔이 묻어나고 때로는 그들을 각성시키기도 한다. 검투사들이 그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과정을 거치며 반란을 꿈꾸게 되듯이.

 

<간신>은 그래서 폭력과 노출 수위만을 두고 보자면 대단히 자극적이고 상업적인 영화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들여다보면 그 폭력과 노출이 에로티즘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리 상업적인 영화라고 보기가 힘들어진다. 19금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생각보다 야하지 않았다는 느낌은 그래서 두 갈래 평가로 나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별로였다거나 그래서 오히려 좋았다는. 어쨌든 <간신>은 그런 점에서 독특한 작품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토록 강렬한 폭력과 노출을 보여주면서도 그리 자극적으로만 치닫지 않는 그런 작품. 그래서 나아가 누군가의 쾌락을 위해 바쳐지는 고통의 몸들이 지금의 민초들과 겹쳐지는 어떤 지점에 이르게 하는 그런 기묘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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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적 시각 돋보인 ‘궁녀’의 아쉬움

최근 개봉한 ‘궁녀’와 움베르토 에코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장미의 이름’은 여러 모로 닮았다. ‘장미의 이름’이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을 다룬다면, ‘궁녀’는 궁에서 벌어진 의문의 살인사건을 다룬다. ‘장미의 이름’에서 사건을 다루는 윌리엄 신부(숀 코넬리)가 있다면 ‘궁녀’에는 내의녀인 천령(박진희)이 미궁의 사건을 조사한다. 윌리엄 신부에게 수련제자 아조(크리스찬 슬레이더)가 있었다면 천령에게는 숙영(한예린)이 있다.

무엇보다 유사한 점은 수도원과 궁이라는 이 두 공간이 주는 느낌이다. 먼 거리에서 봤을 때 신성한 장소로 생각되어온 이 공간으로 카메라를 들이대자, 그 곳은 기괴하고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는 야만의 공간이 된다. 주로 어둠 속에서 등에 의지해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천령과 윌리엄의 모습은 야만으로 대변되는 중세사회의 어둠을 이성으로 비춰나가는 르네상스에 세례 받은 인물들로 보인다.

두 영화가 모두 공포와 미스테리적인 기법으로 그려진다는 점도 유사한 점이다. 신성하고 밝은 이미지로만 인식됐던 수도원과 궁의 이면을 잡아내기 위해서, 이 기법은 유효하다 할 것이다. 공포의 공간으로 변한 그 곳에서 가녀린 빛(이성)에 의지해 진실을 찾아나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이성과 야만의 대결구도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결의식은 권위의 이면에 숨겨진 야만의 실체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의미 있다 할 것이다.

‘궁녀’는 이러한 의미 이외에 여성이라는 또 하나의 코드를 부여한다. 궁의 남성이 아닌 여성들, 즉 궁녀들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췄다는 말이다. 영화 속에서 왕인 남자는 그저 희빈이나 중전과 성관계를 벌이는 인물 정도로 그려진다. 또 한 명의 남자인 정랑(김남진) 역시 바람둥이 정도로만 보여진다. 그리고 영화는 시종일관 궁녀들의 이해할 수 없는 야만적인 관행을 포착해낸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여성들에게 포커스를 맞추지만 결국 여성들을 그렇게 만든 남성들에게 비판의 칼날을 드리우고 있다. 이것 역시 수도사를 통해 중세사회의 억압을 그려낸 ‘장미의 이름’과 유사한 접근이다.

하지만 이 두 영화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장미의 이름’은 영화가 하려는 내용이 그러하듯이 끝까지 이성적인 수사를 그 중심에 두었지만, ‘궁녀’는 그렇지 못했다는 점이다. 초기에는 천령의 수사가 이 궁의 비밀을 파헤치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만들지만, 영화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궁이라는 견고함을 도무지 이성이라는 것 하나로 무너뜨리기가 어려웠기 때문일까. 아니면 여성으로서의 억압이 그토록 깊다는 반증일까. 영화가 추리형식에서 공포물로 돌변하는 상황에 이르면 이성은 실종되고 만다.

‘궁녀’는 분명 그 시도자체가 의미 있는 영화임에 틀림없다. 여성이라는 입장에서 남성 중심의 역사관을 표징하는 궁이라는 공간의 적나라한 속살을 보여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좋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점은 분명히 남는다. ‘한’과 같은 감정적인 대응으로는 견고하고 뿌리깊은 남성들의 세계를 무너뜨리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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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극이 궁을 그리는 방식

지금까지 궁이라 하면 왕이 사는 선망의 장소를 의미했다. 하지만 최근 영화와 드라마를 통틀어 일련의 사극들은 궁을 더 이상 그런 장소로 그리지 않는다. ‘왕의 남자’에서 공길(이준기)은 “자유롭지 못하다면 천하를 가진 왕이라 하더라도 어찌 다 가진 것이라고 하겠습니까?”하고 말한다. 이 말은 비천한 광대들은 사방천지 못 갈 곳 없는 자유인이나, 천하를 가졌다 하는 왕은 궁이라는 공간에 유폐된 부자유인(不自由人)이란 뜻이다.

‘왕과 나’에서 궁은 그 너머에 살고있는 연인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왕이 되기 전인 어린 시절, 성종(고주원)은 궁 밖에서 윤소화(구혜선)를 알게되고 연모의 정을 갖게 된다. 자유롭게 정을 나누던 성종은 그러나 궁 안으로 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통제된다. 수렴청정을 한 정희왕후(양미경)와 유난히 아들에게 집착을 보이는 인수대비(전인화) 밑에서, 정략결혼까지 하게 된다. 몸은 궁 안에 있으나 마음은 궁 밖에 가 있는 성종은 무기력하게 살아간다. 그러나 막상 윤소화가 궁 안으로 들어왔다 해도 나아질 것은 없어 보인다. 궁의 세력다툼은 서서히 그들을 불행한 운명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중이다.

궁은 심지어 탈출하고픈 지옥같이 그려지기도 한다. ‘이산’에서 세손인 이산(이서진)은 끊임없는 암살위협 속에서 살아간다. 절대로 왕이 되지 않을 거라는 세손에게 그 어미인 혜경궁 홍씨(견미리)는 “왕이 되어 권세를 누리라는 게 아닙니다. 세손께서는 살아남기 위해 왕이 되셔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영조를 부추겨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노론들은 그의 아들인 이산마저 제거하려 드는 상황. 이산의 생존게임 속에서 궁은 자신을 모략하고 시해하려는 자들로 득시글대는 곳이 된다. 심지어 영조조차도 이산을 늘 시험대에 오르게 만든다. ‘이산’에서 궁은 저 ‘프리즌 브레이크’의 석호필(스코필드)이 살기 위해 탈출해야할 감옥처럼 그려진다.

그렇다면 왕이 아닌 내시나 궁녀들은 어떨까. ‘대장금’에서의 궁은 선망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핍박의 공간으로 그려졌다. 장금이는 수라간의 최고상궁이 되겠다는 궁에서의 꿈을 갖고 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하지만 최근 사극에서는 그 양상이 달라진 것 같다. ‘왕과 나’의 내시 김처선(오만석)에게 궁은 특별한 꿈을 꾸게 하는 공간이 아니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서 지키기 위해 버텨내야 하고 견뎌야 하는 곳일 뿐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궁녀’에 오면 그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살고 싶으면 입 다물라’라는 포스터 문구가 말해주듯이 이 영화에서 궁은 인간을 인간이 아닌 노예로 대하는 것이 일상화된 공간이다. 아무렇게나 살인과 고문이 자행되는 곳에서 진실을 파헤치겠다고 나서는 내의녀 천령(박진희)은, 저 ‘장미의 이름’에서 의문의 연쇄살인이 벌어지는 수도원을 수사해나가는 윌리엄 수도사(숀 코넬리)를 닮았다. 수도원이라는 신성한 공간이 사실은 비밀스런 음모와 살인이 자행되는 공간이었던 것처럼, ‘궁녀’가 보여주는 궁 역시 그런 어둠이 지배하는 공간이다. “신성해서 왕 이외에 죽음이라는 것조차 불경한 것”이 되는 공간에서 저잣거리의 옷을 살뜰히 꿰매주는 바늘은 고문이나 자해의 용도로 돌변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듯 궁이 더 이상 동경의 공간이 되지 못하고, ‘프리즌 브레이크’의 감옥이 되기도 하고 ‘장미의 이름’의 비밀과 음모가 가득한 수도원이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권위가 해체되는 현재의 가치가 투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궁은 최고권력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그러니 궁이란 순결하고 신성한 그 어떤 곳으로 권위를 갖게 마련. 늘 문제는 궁 밖의 저잣거리에서 벌어지는 것이고, 그렇기에 궁 안의 권위가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는 과거의 정치논리는 이제 낡은 것이 되었다. 대중들은 대신 궁 안의 부패가 궁 밖의 문제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요즘 사극이 궁을 그리는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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