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종에 이은 도리스 레싱, ‘이번 생은’이 품은 문학들

드라마에 문학이 더해지자 그 울림이 커진다. tvN 월화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를 인용해 남세희(이민기)와 윤지호(정소민)의 관계가 어떻게 진전되는가를 보여준 바 있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라는 시구가 어쩌다 계약 결혼을 하고 한 집에서 살게 된 두 사람의 우연적 만남이 사실은 운명적인 만남이었다는 걸 암시해줬던 것. 

그리고 이번엔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 가다>가 드라마에 울림을 더했다. 윤지호가 20대에 읽고 이해하기 어려웠던 그 소설 속에서는 자신만의 공간을 찾기 위해 결국 모텔을 찾게 된 주인공이 그게 들키자 바람을 피웠다고 거짓말을 한다는 줄거리를 갖고 있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가 처음부터 현실적인 문제로 내세웠던 집, 즉 ‘자기만의 공간’에 대한 생각을 이만큼 환기시켜주는 작품도 없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당신의 방은 처음이라’라는 부제를 갖고 저마다 가진 19호실에 대한 이야기를 건넨다. 남세희와 윤지호는 같은 집에 살지만 서로의 19호실을 지켜주며 살아간다. 그것은 계약결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함께 지내는 것과 혼자 사는 것 사이에서 두 사람이 갖고 있는 양가적 감정 때문이기도 하다. 남세희와 윤지호는 처음으로 같은 방에서 함께 잠을 청하고 그것이 그토록 아름답게 느껴지지만 또한 자신만의 19호실을 버릴 수가 없다. 

마침 윤지호에게 드라마 작업을 같이 하자는 제작사의 제안이 오자 그는 더 이상은 글을 쓰지 않는다며 그 이유로 “결혼을 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윤지호는 이내 느끼게 된다. 그렇게 결혼 핑계를 대는 것이 자신 안에 있는 19호실을 부인하고 안주하려는 것이라는 걸. 남세희는 결혼이 윤지호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결혼을 했지만 그의 19호실을 지켜주고 싶은 것이다. 

걸크러시의 면면을 보여주며 살아가는 듯 보였던 우수지(이솜) 역시 자신만의 19호실을 갖고 있다. 그것은 불편한 몸으로 억척스레 일을 해 자식을 잘 키워낸 엄마라는 존재다. 그가 결혼을 부인하는 가장 큰 이유는 몸이 불편한 엄마와 함께 살기 위해서다. 그는 바로 이 사적 비밀을 담은 자신만의 19호실에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한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그의 19호실을 보게 된 남자친구 마상구(박병은)는 그 방으로 들어와 그의 엄마와 인사를 한다. 우수지는 숨기고픈 사적 비밀을 들킨 일로 화를 내지만 마상구는 그를 위로해주며 오히려 그 현실을 피해 19호실을 숨기려 하지 말고 세상과 당당히 맞서라고 해준다. 자신이 항상 옆에 있어주겠다며. 

오랫동안 함께 같은 집에서 살아온 양호랑(김가은)과 심원석(김민석)은 이별을 준비한다. 결혼을 요구하는 양호랑과 그래서 노력을 해봤지만 서로의 불행만을 확인하게 된 심원석은 어찌 보면 같이 살고 있으면서도 저마다의 19호실에서 살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심원석의 이야기에서 남세희가 항상 주어가 자신이라는 걸 알려주자, 심원석은 비로소 깨닫는다. 양호랑의 19호실을 지켜주기 위해서라도 헤어져야 한다는 걸. 

결혼이라는 것은 결국 그 19호실을 여는 것이면서 동시에 또 다른 19호실을 만드는 과정이 아닐까. 남세희의 19호실은 과거 첫 사랑에 대한 아픈 기억이다. 그는 그 곳으로부터 나오고 있는 중이지만 우연히 윤지호의 제작사 대표가 된 그와 다시 마주하게 된다. 남세희의 19호실에는 이제 첫 사랑도 있지만 윤지호도 새로 들어와 있는 셈이다. 그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그 시작을 집을 가졌지만 하우스푸어인 남자와 홈리스인 여자가 동거하게 되는 이야기로 열었다. 현실적인 문제를 담아낸 블랙코미디에 멜로드라마가 섞인 형태였던 것. 하지만 이 드라마는 어느새 집이라는 공간이 갖는 깊은 의미를 말하기 시작했다. 공간과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이토록 깊어질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이 드라마가 인용하고 있는 문학적 감성들이 더해져서가 아닐까. 삶에 대한 통찰까지 엿보이는 이런 로맨틱 코미디는 정말 최근 들어 처음이다.

‘이번 생은’, 공대 출신들이 가진 마성의 매력 그 원천은

“저는 그렇게 무서운 프로그램은 못 다뤄요. 얘는 저 같은 똥멍청이 너드가 감당할 수 있는 그런 소스코드가 아녜요. 수준이 달라요.” tvN 월화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에서 심원석(김민석)이 IT회사 사장인 마상구(박병은)에게 하는 이 말은 업무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마상구가 짐짓 모른 체하며 연애 대상으로서 우수지(이솜)라는 인물에 대해 묻자 심원석이 던지는 답변이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사진출처:tvN)'

그러면 자신은 어떠냐고 마상구가 묻자 심원석은 말한다. “형이랑 수지요? 어 그럼 뭐 바로 랜섬웨어 감염되는 수준? 완전 복구 불가능에다가 인생 망하는 느낌 조금 나는데요.” 연애를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빗대 얘기하는 이들은 공대 출신들이다. 물론 모든 공대 출신들이 다 이런 건 아니겠지만 어쩐지 연애도 공식처럼 할 것 같은 이들 캐릭터가 만들어내는 대사는 웃음이 난다. 

일이 우선이라 남자는 하룻밤 정도로만 생각하는 우수지는 이들 공대 출신 남자들과 비교하면 연애에 있어서는 선수 중의 선수다. 그래도 마음을 열어 마상구와 연애를 하겠다는 조건으로 연애계약서를 내미는 정도. 반면 마상구는 회사로 엮어진 관계에서 연애는 결국 자신의 회사생활에도 영향을 미칠 걸 아는 우수지가 자신과 연애하려면 회사 팔고 오라고 하자, 진짜로 회사를 팔아야 하나 고민하면서 그럴 수 없는 자신 때문에 괜스레 눈물만 떨구는 연애 숙맥이다. 

이런 마상구가 ‘결혼 말고 연애 앱’을 만들어 다운로드 1위를 기록한 회사의 오너라는 사실은 이 로맨틱 코미디를 더 우습고 달달하게 만든다. 연애를 이론으로만 배운 듯 심원석이 함께 동거하는 양호랑(김가은)과 문제가 생겼을 때 나름의 심리분석을 해가며 그럴 듯한 솔루션을 제공하지만 영 헛다리만 짚는 인물. 이 드라마는 심원석도 그렇고 마상구도 바로 그 공대 출신이라는 특징을 캐릭터로 가져와 그 ‘이론으로만 배운 연애’를 하나의 장애요소로 만들어놓는다. 

그러고 보면 이 드라마의 남자주인공인 남세희(이민기)는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하는 행동은 저 공대 출신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 역시 연애라는 건 실제로 해본 일이 전혀 없고, 또 해볼 생각조차 없어 보인다. 어찌 어찌해 가짜 결혼을 하고 같이 살게 되면서 은근히 호감을 느끼고 있는 윤지호(정소민)에게 그는 조금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다.

결혼조차 조건을 위한 합리적인 선택이고, 결혼 후 갖게 되는 어떤 소속감조차 심리학에 근거한 인간 욕구의 한 단계로 생각한다. 시댁에서 갑자기 전화가 와 제사를 지내게 된 윤지호가 그래도 잘 해보고픈 그 마음에 대해 ‘착한 며느리병’이라는 이야기를 꺼내자, 남세희는 이렇게 그 병(?)을 분석한다. 

“일종의 인정욕구네요. 제가 전에 말했던 매슬로우 욕구단계요. 하위단계의 욕구가 충족되면 그 다음 단계의 욕구들이 나타나기 마련인데 결혼을 통해 소속감의 욕구가 충족되었으니 그 다음 단계인 인정욕구가 나타나게 되는 건 뭐 자연스러운 심리적 현상입니다. 특히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욕구이기도 하구요.”

하지만 그건 이론적인 해석일 뿐이다. 윤지호는 그것이 단지 “인간의 동물적인 욕구단계가 아니라 마음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좋아하는 사람의 가족들이니까 잘 해주고 싶은 마음. 좋아하는 사람을 기쁘게 편하게 해주고 싶은 마음.”

이들은 어쩌다 이렇게 연애에 숙맥이 되었을까. 이 드라마의 멜로는 현실적인 것들이 연애 혹은 결혼 자체를 뒤로 밀어내는 장애로 작용하고 있다. 하우스푸어로서 그저 큰 욕심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꿈이 된 남세희, 아직 현실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결혼을 미룰 수밖에 없는 심원석, 그리고 남녀관계가 역전된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회사 생활을 버텨내기 위해 연애에 어떤 선을 그어버리는 우수지. 

어딘지 무거울 수밖에 없는 현실이지만 그래도 이 드라마가 로맨틱 코미디로서의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인물은 마상구나 심원석 같은 공대 출신들의 사랑이야기가 아닐까. 사랑을 이론으로 말하며 마치 자신들이 최고의 전문가인양 행동하지만 어딘지 어수룩하고 그래서 사랑스러울 수밖에 없는 인물들. 심지어 우수지나 양호랑 같은 선수들마저 빠뜨리는 마성의 매력을 가진 이들이 그들이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 현실 담은 코믹 캐릭터 열전

좋은 작품과 ‘좋은 캐릭터’는 필요충분조건이라고 하던가. 좋은 작품에는 눈에 띠는 매력적인 캐릭터가 있기 마련이고, 좋은 캐릭터가 있어야 좋은 작품이 된다는 뜻일 게다. 그런 점에서 보면 tvN 월화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는 저마다 독특하면서도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넘쳐난다. 주인공인 남세희(이민기)와 윤지호(정소민)는 물론이고 주변인물들인 우수지(이솜), 마상구(박병은), 양호랑(김가은), 심원석(김민석) 하다못해 분량이 많지 않은 윤보미(윤보미) 같은 캐릭터까지 시선을 집중시킨다. 이들 캐릭터들이 이렇게 돋보이는 건 무엇 때문일까.

'이번 생은 처음이라(사진출처:tvN)'

남세희는 마치 ‘시리야-“하고 부르면 나올 법한 고저강약 없는 목소리로 무표정을 일관하는 캐릭터다. IT업계에서 잘 나가는 브레인인 그는 모든 걸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을 근거로 결정하고 선택하려 한다. 심지어 결혼을 ‘선택’하는 일도 사랑 같은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살만큼 생활습관이 맞는 대상이고 또 월세를 꼬박꼬박 받아 평생을 갚아나가야 하는 집 대출금을 내는데 도움이 되는 대상이라는 ‘필요’에 의해서다.

그런데 이 무표정하고 무감정해 보이는 인물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감정이 조금이라도 나오는 순간 전해지는 매력은 더 커진다. 다른 사람들은 결혼을 한 부부라 부르지만, 당사자들은 집주인과 세입자인 관계로 그는 윤지호가 자신의 사적 영역 속으로 들어오는 걸 불편하다고 말하지만, 그러면서도 윤지호가 스토커로 추정되는 남자와 다니는 게 영 눈에 밟힌다. 

백미러 하나 수리하는데도 엄청난 비용이 드는 오토바이와 부딪치지 않기 위해 초절정의 순발력을 발휘하며 몸을 날리는 짠돌이지만, 윤지호를 궁지로 몰아가는 그 스토커의 오토바이를 발로 밀어버리는 장면은 그의 숨겨진 마음을 드러낸다. 그가 윤지호에게 말하는 “우리집으로 가자”는 말 한 마디가 특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건 그가 평소 아무런 감정을 보이지 않던 캐릭터였기 때문이다.

남세희의 친구이자 그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인 마상구는 보면 볼수록 마음이 가는 인물이다. 이 드라마의 제목을 빗대 표현하자면, “이런 사장은 처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 CEO로서 어떤 권위는 분명히 있지만 권위주의라는 건 전혀 보이지 않고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어우러지는 리더십을 보이는 인물이다. 

어찌 보면 철없어 보이는 인물이지만 그런 인물이 자신이 좋아하는 우수지가 술자리에서 성희롱에 성추행을 일상적으로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참지 못하고 상대남자를 들이받는 장면은 이 캐릭터의 매력을 드러낸다. 투자 건이 무산되는 것을 감당하면서까지 우수지를 지켜내려 하는 모습에서 그가 철없는 인물이 아니라 순수한 인물이라는 걸 확인하게 되기 때문이다. 

남세희나 마상구가 겉보기와 다른 반전 매력을 통해 그 캐릭터가 돋보이는 것처럼, 우수지라는 캐릭터도 그 반전 모습을 통해 어떤 현실적인 공감대를 주는 매력적인 인물이다. 남세희와 마상구는 그 현실과 부딪치며 어떤 판타지를 주는 인물인 반면, 거꾸로 우수지는 평소 자유분방한 모습과는 달리 회사생활에서는 지극히 감정을 누그러뜨리며 버텨내려는 모습으로 현실의 무거움을 보여주는 인물인 셈이다. 

이처럼 자유분방한 인물이 회사 생활에서 일상으로 겪는 성추행이나 성희롱과 맞서지 않는다는 그 설정은 우리네 현실이 얼마나 여성 직장인들에게 호락호락하지 않은가를 드러내준다. 맞서는 순간 결국 여성인 자신만 다칠 뿐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맞서지 않고 버티고 있는 것. 그래서 이 드라마에서는 남세희와 윤지호의 관계가 어떻게 될 것인가만큼, 우수지와 그를 좋아하는 마상구가 이 현실적인 문제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도 크다. 

<이번 생은 처음이라>를 보다 보면 ‘이런 캐릭터들은 처음이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그건 저마다 코믹하고 반전을 가진 캐릭터들이지만 그 밑바탕에 드리워져 있는 현실이 이들 캐릭터에 어떤 페이소스를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번 작품은 그래서 이런 좋은 캐릭터들을 연기한 좋은 배우들을 발견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피고인’ 해도 너무한 고구마 전개, 개연성 부족

감옥에서만 빠져나오면 좀 달라질 줄 알았다. 하지만 SBS 월화드라마 <피고인>은 박정우(지성)가 탈옥에 성공했지만 여전히 감옥 안과 다른 느낌이 없다. 그러고 보면 <피고인>의 지지부진한 전개와 답답함은 단지 감옥이라는 틀에 주인공이 갇혀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던 듯싶다. 어떤 메시지를 담은 이야기 전개 그 자체보다는 시청자를 고구마 감옥에 가둬두고 질질 끌고 다니려는 의도가 더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피고인(사진출처:SBS)'

<피고인>이 시청자를 낚는 그 능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이 드라마는 주인공 박정우를 한없이 힘겨운 상황으로 몰아넣음으로써 시청자들로 하여금 그가 그 상황을 벗어나기를 희구하게 만든다. 하지만 박정우의 소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다분히 의도된 전개다. 소망을 이루는 것을 지연시킴으로써 시청자들이 참기 어려운 갑갑함을 느끼게 만들고 아주 조금씩 소망을 향해 나아가게 해준다. 

처음에는 자신이 아내와 딸을 죽였다는 자책감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하고, 기억을 서서히 되찾으면서 그 진범을 알게 되고는 복수를 소망하게 만든다. 또 감방에서 박정우가 도움을 줬던 성규(김민석)가 마치 아내와 딸을 죽인 것처럼 오인하게 만들고 사실은 그가 딸을 데리고 보살피고 있다는 걸 나중에 알려준다. 복수에 대한 소망과 딸을 만나고 싶은 소망 그리고 탈옥에 대한 소망을 계속 갖게 만들고 그걸 지연시킴으로써 시청자들을 붙잡아두는 전개. 

탈옥을 한 후에도 이런 전개는 변함이 없다. 딸 하연(신린아)이를 만나기 위해 박정우가 그를 추격하는 경찰들을 따돌리는 등 안간힘을 쓰지만 결국 드라마 마지막에 보여주는 건 그의 딸이 차민호(엄기준)에게 먼저 붙잡혔다는 사실이다. 탈옥을 하면 무언가 고구마 전개에 있어서 숨통이 트일 것으로 여겼던 시청자들로서는 답답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이런 지연 전개와 함께 <피고인>의 문제로 지목되는 건 자칫 막장으로 흐를 수 있는 개연성 부족이 너무 많이 엿보인다는 점이다. 사실 생각해보면 죽은 걸로 알려져 있는 박정우의 딸이 이렇게 몇 달 째 가족들과 떨어져 성규와 함께 이곳저곳 옮겨 다니는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게다가 어찌된 일인지 하연이는 이 모든 상황들을 다 받아들이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탈옥해 금방이라도 붙잡힐 것처럼 보이던 박정우가 갑자기 나타난 서은혜(권유리) 변호사의 차를 타고 도주하는 설정도 그렇다. 서은혜라는 인물이 왜 이렇게 위험한 일에 뛰어들어 심지어 탈옥을 돕고 있는가 하는 점은 아무런 설명도 되어 있지 않다. 간수인 윤태수(강성민)가 탈옥하는 박정우와 그 일행에게 총을 겨누는 다른 간수를 제지하는 장면도 너무 간단히 처리되어 있다. 탈옥이나 탈옥을 돕는 일이 그렇게 간단한 일일까.

물론 드라마라고 해도 완벽하게 개연성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청자를 고구마 감옥에 가두는 지연 전개를 하기 위해, 일종의 충격요법으로 엔딩에 박정우를 절규하게 만드는 반전상황을 집어넣기 위해 개연성이 무시되는 건 문제로 지목될 수밖에 없다. 지금 <피고인>은 끝없이 시청자를 붙잡아 두기 위한 것에만 더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고구마 전개는 언젠가 끝날 것이다. 어쨌든 드라마는 어떤 갈등과 문제를 해결해야 끝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18부작으로 2부를 연장시킨 <피고인>이 18부 마지막까지 고구마만 던지다 끝에 가서 겨우 사이다 한 잔을 주는 전개를 보인다면 시청자들로서는 허탈해지지 않을까. 그것도 어떤 일관된 메시지를 전하기보다는 그저 시청률을 얻기 위한 목적에 그치게 된다면.

‘피고인’과 ‘역적’, 시청률과 호평 왜 따로따로 놀까

SBS 월화드라마 <피고인>의 시청률이 갈수록 치솟는다. 7회 만에 20%를 넘기더니 8회에는 22.2%(닐슨 코리아)를 기록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압도적 시청률만큼의 호평은 가져가지 못하고 있다. 매회 기억을 잃은 박정우(지성)가 그 망각의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단서 하나씩을 얻어가는 이야기 구조는 고구마 전개라는 볼멘소리가 나오게 만든다. 게다가 그 박정우를 제거하기 위해 쌍둥이 형을 죽인 살인자이자 그 사장 자리를 꿰찬 재벌3세 민호(엄기준)가 감옥, 그것도 박정우가 있는 방으로 들어온다는 설정은 현실성이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피고인(사진출처:SBS)'

그런데 어째서 <피고인>은 이런 개연성을 깨는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이 치솟는 걸까. 그건 박정우라는 인물이 겪는 고통에 시청자들이 정서적으로 공감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여기에 지성의 연기는 절대적이다) 예상을 깨는 스토리가 주는 반전 효과의 힘이 적지 않다고 여겨진다. 박정우가 같은 감방에서 도와줘 풀려난 성규(김민석)가 갑자기 자신이 그의 딸을 죽였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시청자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고, 알고 보니 그가 차마 그의 딸을 죽이지 못하고 데리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또 시청자들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반전이라고 해도 재벌3세가 사형수를 직접 제거하기 위해 감옥을 저 스스로 찾아들어온다는 설정의 이야기는 나가도 너무 나간 느낌이다. 즉 이것은 <피고인>이 시청자들이 상상할 수 없는 더 센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 자의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고 있는 인상을 줄 수밖에 없다. 당연히 시청률은 오른다. 개연성을 파괴하는 이야기만큼 자극적인 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래서는 호평이 따를 수는 없다. 

반면 MBC 월화드라마 <역적>은 연일 호평이 쏟아지는 것에 비해 시청률은 10%에서 답보 상태다. 경쟁작이 <피고인>이기 때문에 이 시청률은 물론 <피고인>과의 대결구도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역적>의 이야기는 그 세세한 면들을 들여다보면 홍길동전을 재해석한 요소들이 많이 보이지만, 전반적으로는 쉽게 접근할 수 있을 정도로 쉽다. 그런데도 왜 시청률은 반등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걸까. 

<역적>은 사극의 틀을 갖고 있지만 굉장히 진보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모개(김상중)라는 노비가 주인을 살해하고 면천되어 잘 살아가는 모습은 체제 반항적인 이 사극의 방향성을 분명히 해준다. 무엇보다 홍길동이 반쪽 양반의 피를 물려받은 서자가 아니라 순수 노비 아모개의 아들이라는 설정은 <역적>이 갖고 있는 계급성을 분명히 한다. 아모개가 길동에게 장수가 되라고 하고, 그의 형인 길현에게는 과거시험을 보라고 하지만, 그들이 모두 이를 거부하고 방물장수가 되고 아버지 일을 돕는다는 이야기도 기존 시스템에 편입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길을 가겠다는 드라마의 의지처럼 읽힌다. 

그래서 <역적>은 요즘 같은 시국에 더 많은 호평이 쏟아질 수밖에 없다. 금수저 흙수저 하지만 흙수저들이 금수저의 시스템에 편입되기보다는 저 나름대로 살아가는 방법을 찾기 때문이다. 여기에 시청자들을 공분케 하는 악역으로 등장한 참봉부인 박씨(서이숙)의 면면들은 작금의 현실을 떠올리게 만든다. “충”을 내세우며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아모개와 그 식솔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시청자들은 현재의 ‘애국’을 내세워 진실을 외면하려는 이들을 떠올리게 한다. 

<역적>은 이처럼 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상황들과 그 속에서 시스템을 거부하고 스스로 역적이 되어가는 이들의 이야기가 현재의 시청자들로 하여금 호평을 쏟아내게 만든다. 하지만 시청률이 따라주지 않는 건 아무래도 사극의 주시청층이라고도 할 수 있는 보수적인 장년층들에게는 드라마가 너무 리버럴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인터넷에 쏟아지는 호평은 젊은 세대의 목소리가 많지만, 역시 지상파 드라마의 시청률이란 보수적인 장년층의 힘을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최근 몇 년 동안 보수화되어버린 MBC의 이미지 역시 <역적>과는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게 사실이다. 

시청률은 <피고인>이 가져갔지만 호평은 <역적>에 쏟아진다. 물론 완성도에 있어서 큰 차이를 보이지만 그럼에도 <피고인>도 <역적>도 근본적으로는 시대정신을 잘 담아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무고한 이들이 감옥에 들어가거나 고초를 겪는 상황이 어째서 현대극인 <피고인>이나 사극인 <역적> 모두에서 등장하고 있을까. 시청률과 호평은 따로 놀고 있지만 두 드라마의 정서적 지반이 비슷한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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