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님의 사건수첩’, 봉골레 파스타와 봉블리가 사극서 만났을 때

이선균과 안재홍이 아니었다면 영화 <임금님의 사건수첩>은 가능한 작품이었을까. 사실 이 코믹추리극은 사극의 틀과는 조금 이질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임금 예종(이선균)이 셜록처럼 추리를 하고 자기만의 은신처에서 모종의 사건을 해결하는 슈퍼히어로라는 설정이 그렇고, 사관 이서(안재홍)가 한번 보면 사진처럼 기억해내는 놀라운 시력으로 그를 수행한다는 이야기가 그렇다. 배트맨과 로빈, 혹은 셜록과 와트슨의 코믹 버전 사극판이라고 해야할까. 

사진출처:영화<임금님의 사건수첩>

하지만 이런 부조화를 적절한 긴장감과 웃음으로 유화시켜주는 건 다름 아닌 배우 이선균과 안재홍이다. 이선균은 특유의 그 굵직한 목소리가 갖는 임금님의 위엄(?)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우리에게 “봉골레 파스타!”로 기억되는 코믹함을 동시에 선사한다. 그 위엄이 슬쩍 슬쩍 무너질 때 이 예종이란 캐릭터는 웃음을 유발한다. 

아울러 이선균이 이처럼 웃음을 유발하는 임금님의 캐릭터를 제대로 연기해낼 수 있게 된 건 다름 아닌 그걸 받아주는 조금은 억울하고 우직하며 선량하기 이를 데 없는 사관 이서를 연기하는 안재홍 덕분이다. 안재홍은 <응답하라 1988>의 정봉이 역할로 우리에게는 ‘봉블리’라는 캐릭터 이미지를 갖게 된 배우가 아닌가. 그 봉블리의 매력은 이 영화 속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퓨전을 넘어 장르 사극이 그러하듯이 <임금님의 사건수첩>은 조선시대에 벌어졌을 수도 있는 사건을 현재적 관점으로 재해석한다. 기이한 사건과 그로 인해 번져가는 소문들, 흉흉해지는 민심 같은 것들이 음모론과 결합하여 임금님을 옥죄는 가운데, 이를 과학적으로 풀어나가는 예종의 추리가 흥미롭다. 물론 그 과정을 더 흥미롭게 만드는 건 예종과 이서의 주종관계에서 비롯되는 코미디들이다. 

영화는 초반 여러 사건들과 캐릭터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조금 지루함을 보이는 아쉬움을 남긴다. 하지만 중반 이후가 지나고 나면 스펙터클한 사건들과 연발 터지는 코미디가 관객들의 시선을 끌고 의외로 이서의 예종에 대한 충직한 모습이 뭉클한 브로맨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악역으로는 정평이 난 김희원과 최근 여러 작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배우 김홍파가 가벼울 수 있는 이야기에 무게감을 얹어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과거 <조선명탐정>이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같은 작품들이 그래왔듯이 사실 <임금님의 사건수첩>은 연휴나 명절 같은 시기에 별다른 부담 없이 가족들이 함께 보기에 적합한 영화다. 대단한 메시지나 의미를 찾기보다는 가벼운 오락 기획물의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다. 물론 이 작품 역시 정치적으로 해석하면 지금의 시국과는 조금 어울리지 않는 면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정치적 메시지를 의도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다지 문제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다만 이런 임금님을 코믹하게 그려내는 작품이 가능할 수 있었던 건 전적으로 이선균과 안재홍이라는 배우를 캐스팅한 점이 주효했다고 말할 수 있다. 새로운 연기라기보다는 이들이 가진 독특한 코미디적인 이미지를 사극의 캐릭터와 잘 맞춘 점이 효과적이었다는 이야기다. 이들이 벌이는 한바탕 모험과 웃음. 꿀 같은 연휴에 가족과 함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무한상사’, 유재석부터 정형돈까지 보인 연기의 진정성

 

이 정도면 배우를 해도 별 무리가 없을 듯싶다. 그저 한 편의 영화라고 해도 될 법한 연기들의 향연이 이들 <무한도전> 멤버들에 의해 나올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예전의 무한상사를 떠올려 보라. 과장된 연기가 대부분이었고, 그 목적은 당연히 웃음을 주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번 무한상사-위기의 회사원편은 완전히 결이 달랐다. <시그널> 김은희 작가가 펜을, 장항준 감독이 메가폰을 들었다. 연기는 진지할 수밖에 없었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함께 출연한 배우들의 면면은 <무한도전> 멤버들을 주눅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시그널>의 김혜수와 이제훈은 물론이고 <미생>의 김희원과 전석호, 손종학 그리고 <곡성>의 쿠니무라 준과 김환희까지. 최근 화제가 된 드라마와 영화 속 배우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들과 함께 연기를 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부담이었을까.

 

지난 주 방영됐던 전편이 조금은 심심하고 낯설게 느껴졌다면 본격적인 이야기가 속도감 있게 전개된 후편은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의 긴박감과 몰입감을 선사했다. 역시 김은희 작가 특유의 쫄깃한 긴장과 반전이 있는 전개였다. 그러면서도 출연자들을 배려한 듯 <시그널><미생> 그리고 <곡성><베테랑>까지 여러 작품들을 떠올리게 하는 패러디 장면들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무엇보다 연쇄적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 모두 갖고 있던 오르골을 통해 직장인들의 처절한 현실을 담아내는 주제의식도 빼놓지 않았다. 누군가 돌려줘야 돌아가고 힘이 다할 때까지 무한 반복해서 일을 하는 그 처지. 유부장이 오르골을 보며 느꼈다는 그 감정은 아마도 우리네 회사원들 역시 공감할만한 것이었다.

 

이런 진지한 정극 속에서 최고의 베테랑 배우들과 함께 보인 <무한도전> 멤버들의 연기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초반 추격전 장면으로 극의 긴장감을 불어 넣어줬던 유재석은 권전무(지드래곤)의 사주를 받았던 하하를 설득해 마음을 바꾸게 하는 장면에서 진정성 있는 연기를 보여줬다. 비리를 저지르기보다는 조금 모자라게 사는 편이 낫다며 모든 게 자기 잘못이라 말하는 유재석에게서 진심이 느껴졌다.

 

하하와 정준하는 이미 연기 경험이 있어서인지 이 작품을 전체적으로 끌고 가는 연기의 힘을 보여줬다. 마키상(쿠니무라 준)에게 권전무의 전화번호 숫자를 들을 후 일본말을 못 알아듣는 정준하에게는 그것이 출국일자라고 거짓말하는 대목에서는 하하의 연기에 소름이 돋을 정도였고, 바보스러우면서도 선한 심성으로 끝까지 의문을 파헤쳐가는 정준하는 웃기면서도 짠한 면면이 느껴졌다.

 

이번 작품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역시 지드래곤이다. <베테랑>의 유아인을 패러디하는 장면에서도 그는 전혀 이물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괜찮은 연기를 보여줬다. 무엇보다 이 작품의 악역으로서 그가 서 있었기 때문에 팽팽한 긴장감이 끝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지드래곤이 가진 연기자로서의 가능성도 엿보였다.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게 바로 오랜 만에 이 작품을 통해 등장한 정형돈의 존재감이다. 그는 뺑소니로 쓰러진 유재석의 꿈에 나타나 부장님 힘내세요. 지금은 고통스럽고 힘겨워도 이겨내야 한다. 빨리 회복하셔서 다 같이 웃으면서 꼭 꼭 다시 만나요라고 말함으로써 연기에 그의 실제 진심을 담았다. 짧은 출연이었지만 정형돈의 출연은 이 작품이 가진 주제의식, 즉 회사원의 매일같이 뱅뱅 돌아가는 힘겨운 삶과 여기 출연하는 <무한도전> 멤버들의 처지를 잘 묶어내는 효과를 만들었다.

 

역대급 정극 연기였다. 이런 자세로 임한다면 연기를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 그간 <무한도전>을 통해 웃음을 주었던 이들에게서 웃음이 아닌 진지함을 느끼고 그 연기에 시청자들이 빠져들었다는 건 그 진정성이 전해졌다는 걸 말해준다. 좋은 작품이었고 좋은 연기였다.

무한상사의 도전, 시청자들은 기꺼이 미끼를 물었다

 

예능이 이래도 되나? <무한도전>무한상사가 아예 작정하고 웃음기 쪽 뺀 스릴러로 돌아왔다. 이미 예고됐던 대로다. <시그널>의 김은희 작가가 대본을 쓰고 장항준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출연자들도 예사롭지 않다. 김혜수, 이제훈은 물론이고 김희원, 전석호, 손종학, 전미선 같은 자기 색깔이 확실한 배우들이 참여했으며 심지어 <곡성>으로 국내에도 팬층을 확보하고 있는 쿠미무라 준이 함께 했다. 여기에 <무한도전>‘5분대기조가 되어가고 있는 지드래곤까지. 사실 기획만으로도 무한상사는 끝난 게임이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그래서였을까. ‘무한상사는 기존의 즉석 상황극을 통한 콩트 코미디적인 요소들을 완전히 들어내고 긴장감 100%의 스릴러를 선보였다. 어두침침한 회사 사무실에서 홀로 무언가를 보고 있던 유재석이 누군가에게 쫓기고 있다는 걸 의식하고 도망치는 몇 분 동안의 시퀀스는 <무한도전>이라면 조금 풀어놓고 웃을 준비를 하고 있던 시청자들을 잔뜩 긴장시켜 한 편의 영화 속으로 끌어들이기에 충분했다.

 

이 첫 장면을 위해 유재석이 며칠을 뛰고 또 뛰며 재촬영을 했던 것이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어떤 면에서 무한상사<무한도전> 시청자들에게는 이미 갖고 있는 잔상과 이미지가 존재한다. 물론 레미제라블을 직장 버전으로 패러디한 뮤지컬 형식도 있었고, 액션을 시도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어쨌든 시청자들에게 무한상사는 코미디로 자리하고 있다. 그러니 코미디에서 진짜 스릴러로 넘어가는 그 장벽을 넘기 위해서는 앞부분에서 확실한 긴장을 만들어내는 게 필수적이다. 유재석의 추격전은 그런 심리적 장벽을 뛰어넘기에 충분했다.

 

그 극점은 가까스로 회사를 빠져나온 유재석이 허무하게도 달려드는 차량에 치이는 장면이다. <무한도전>, 그것도 무한상사의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는 유재석의 이런 충격적인 사고 장면은 이야기를 되돌려 그가 왜 그런 일을 당하게 됐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어떤 일들이 뒤에서 진행되고 있고 그래서 오르골을 받은 직장 동료들이 하나씩 의문의 죽음을 맞는 과정이 이어지고 마치 <곡성>의 한 대목을 끌어온 듯 쿠니무라 준이 무한상사에서 사고를 겪은 이들의 사진을 들여다보는 장면은 시청자에게 확실한 미끼를 던졌다.

 

프로 연기자들의 연기야 명불허전이지만 그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는 <무한도전> 멤버들의 연기는 또 하나의 도전이다. 연기가 어색하다는 걸 스스로 밝힌 박명수나 광희조차 이 작품에서는 웃음기 뺀 진지함을 보여주고 있다. 자연스러운 연기를 보여주는 건 역시 연기 경험이 있는 정준하와 하하다. 특히 정준하는 특유의 바보스럽고 어눌한 모습으로 어딘지 짠하면서도 웃음을 주는 연기를 선보인다. 그는 이 무한상사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그걸 추적해 나가는 것으로 사실상 극의 중심에 서 있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이번 무한상사에서 의외의 발견은 유재석의 연기다. 그저 웃음 주는 콩트 코미디만 능한 줄 알았지 이처럼 정극에서도 의외의 단단한 연기를 보여줄지는 몰랐다. 앞부분의 긴장감을 확실히 만들어놓은 장본인이고, ‘무한상사특유의 상황극적인 웃음 속에서 한 순간에 팀원들을 긴장하게 만드는 유부장 역할로서 그는 괜찮은 몰입감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본격 스릴러 영화나 드라마만큼의 짜임새나 기상천외한 반전의 이야기를 무한상사가 보여줄 것이라 기대하는 건 너무 과한 일이다. 하지만 예능 프로그램인 <무한도전>이 이처럼 웃음기 쪽 뺀 스릴러에 도전하고, 거기에 실제 현업에 있는 작가, 감독, 배우들이 기꺼이 호응해줬다는 사실은 충분히 의미 있고 박수 받을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로써 <무한도전>은 예능에 또 하나의 영역을 확장해냈다. 그 도전만으로도 시청자들은 기꺼이 무한상사가 던지는 미끼를 물었다.

<무한도전> 무한상사, 역대급일 수밖에 없는 이유들

 

<무한도전>이 또 새로운 도전의 역사를 쓰게 됐다. ‘무한상사가 역대급 액션 스릴러로 만들어진 것. 본편이 시작되기 전 방영된 무한상사메이킹 영상만으로도 이미 기대감은 최고조다. <시그널>의 김은희 작가가 대본을 쓰고 장항준 감독이 메가폰을 잡으면서 무한상사는 그저 예능이 아니라 제대로 된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내는 도전을 하게 됐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메이킹 영상에서 유재석이 괴한들의 추격으로부터 도주하는 장면을 무려 3일에 걸쳐 찍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한상사가 가진 진지함을 엿볼 수 있다. 그저 영화를 패러디한 예능에 머물기보다는 진짜 영화를 찍고 있다는 걸 확인시켜준 것. 여기에 김혜수, 이제훈, 쿠니무라 준, 전석호, 손종학, 전미선, 김희원 같은 저마다의 존재감을 갖고 있는 배우들의 출연은 웃음기 제대로 뺀 본격 스릴러물의 긴장감까지 얹어주었다.

 

무한상사에 이전부터 회장님 아들로 등장해 독보적인 위치를 갖고 있는 지드래곤이 합류했다는 소식 역시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드는 요소다. 그간 무한상사에서 그가 해온 연기가 예능으로서의 과장 같은 걸 보여줬다면 이번 특집에서는 지드래곤의 진짜 연기를 보게 될 전망이다. 촬영장에서 이제훈이나 김희원 같은 연기자들과 마주한 지드래곤은 그래서 그런 자리에 자신이 함께 하고 있다는 걸 너무나 쑥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막상 큐 사인이 들어가면 진지한 얼굴로 연기하는 지드래곤을 볼 수 있었다.

 

지드래곤처럼 <무한도전> 멤버들의 연기 또한 지금껏 해온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몰입을 볼 수 있을 전망이다. 물론 무한상사라는 웃음을 기반으로 한 상황극적 요소들 역시 빼놓지 않을 거라는 건 사무실 장면을 찍는 메이킹 필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과장된 애드립 속에서도 정색하며 다시 분위기를 정극 분위기로 바꾸는 정준하와 유재석의 연기는 이 작품이 어떻게 코미디와 정극의 요소를 넘나들고 있는가를 확인하게 해주었다.

 

이번 무한상사특집을 통해 확인하게 되는 건 역시 <무한도전>다운 도전의 확장이 또 하나의 성취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사실 무한상사특집은 2011년 가벼운 야유회 상황극 콘셉트로 시작했다. 하지만 조금씩 회를 거듭하면서 <무한도전>의 중요한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고 그러면서 성장해나갔다. 특히 무한상사는 지난 2013년에는 레미제라블을 패러디한 뮤지컬을 시도하며 그 장르적 폭을 넓혀 호평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이번 2016년 시도되는 무한상사는 예능이 시도하는 한 편의 영화 같은 무게감을 얹었다.

 

처음엔 장난처럼 슬쩍 슬쩍 해왔던 시도들이 차츰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그러다 일이 커지는건 우리가 <무한도전>을 통해 자주 봐왔던 일들이다. 마치 농담처럼 김은희 작가와 장항준 감독이 동반 출연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마치 토크쇼 같은 웃음을 주더니, 이제 그게 더 이상 장난이 아닌 사건이 되어가고 있는 걸 <무한도전> 메이킹은 보여주었다.

 

무한상사의 진화는 <무한도전>의 새로운 도전 전개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무한도전>은 물론 지금도 매번 새로운 아이템에 도전하지만 동시에 이 프로그램이 그간 쌓아뒀던 빅 아이템들을 조금씩 변주하거나 진화시켜 판을 키우는 방식의 도전을 시도하고 있다. 이를테면 <무한도전> 토토가가 젝스키스의 재결합을 만들어낸 토토가2로 진화하고, ‘못친소 페스티벌이 시즌2가 만들어지고 배달의 무도가 역사 특집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변주들이 시도되고 있는 것. 이번 무한상사특집은 작은 상황극이 점점 성장해 이제 뮤지컬이나 영화 같은 어엿한 장르에 도전하는 장기적인 성장의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메이킹만으로도 이런데 본편은 어떨까. 물론 지나친 기대가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무한도전>은 지금껏 그 기대를 저버린 적이 별로 없었다. 과연 이번 무한상사는 이런 기대를 제대로 채워줄 수 있을까. 만일 이 부담감을 이겨내고 진지한 한 편의 영화 같은 이야기를 보여준다면 시청자들은 이 시도를 또 하나의 역대급으로 기억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계춘할망>, 청춘과 어르신에 대한 위로

 

나이가 젊다고 다 청춘이 아니듯, 나이 많다고 다 어른이 아니다. 아마도 최근 들어 가장 많은 키워드로 나오는 단어가 청춘어르신일 게다. ‘청춘이 원치 않았던 힘겨운 현실 앞에 숨가빠하고 있다면, ‘어르신들은 꼰대가 될 것인가 어른이 될 것인가를 사이에 두고 갈등한다. 그리고 이 둘은 연결되어 있다. 어른들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이 청춘들의 현재 혹은 미래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 <계춘할망>은 이 서로 다른 두 세대 간의 따뜻한 소통이 느껴지는 영화다.

 

사진출처: 영화<계춘할망>

제목에서 보여지듯 <계춘할망>의 배경은 제주도다. 계춘(윤여정)은 이 할망의 이름이다. 어쩌다 손주 혜지를 홀로 키워온 계춘은 어느 날 아이를 잃어버린다. 평생을 아이를 찾아다니는 계춘은 어느 날 나타난 혜지(김고은)로 인해 이제 겨우 허리 펴고 잘 수 있는 행복감에 빠져드는데 그간 혜지가 살아온 삶이 심상찮다. 도둑질은 다반사고 조건만남을 빙자해 돈을 뜯기도 하는 불량한 아이들의 폭력 속에 무심히 살아온 그녀다. 그런 그녀를 계춘은 모든 걸 품어주는 제주의 바다처럼 안아준다.

 

사실 이야기는 어찌 보면 뻔해 보인다. 결국 혜지가 계춘의 사랑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하지만 영화 속 디테일들은 이러한 당연한 수순의 이야기 속에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들을 채워 넣었다. 그림에 재능을 보이는 혜지와 그녀의 아픔을 알면서도 무심한 척 그녀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미술선생 충섭(양익준), 청춘의 설렘을 무겁지 않게 영화에 얹어주는 제주소년 한(민호), 그리고 그녀의 삼촌으로 늘 계춘을 걱정하고 돌보는 석호(김희원) 같은 인물들은 영화에 충분한 온기를 더해준다. 그림을 잘 그리려면 그림자가 아니라 빛을 봐야 한다는 충섭의 말대로 이 주변 인물들은 혜지에게 빛을 던져주는 존재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빛은 계춘이다. 손과 얼굴에 가득한 주름살과 마치 옥수수수염처럼 빛이 바랜 머리칼은 그녀의 한 평생을 한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하게 만든다. 그런 그녀가 저 멀리 혜지가 걸어오는 것만 봐도 그 주름이 확 펴지고 달려오는 모습은 그 자체로 뭉클함이 느껴진다. 그런 그녀가 혜지에게 말한다. “세상에서 살면서 딱 한 명 네 편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 ‘내 새끼라는 표현이 정확하게 맞을 정도로 계춘이 혜지를 대하는 모습은 바다그 자체다. 자신이 평생 물질을 하며 살 수 있게 해준 든든한 그녀의 편.

 

과연 우리 시대의 청춘들에게는 계춘 같은 든든한 편이 있을까. 힘겨운 현실 속에서 그저 생존하기 위해 엇나간 삶을 살아내기도 하는 청춘들이다. 하지만 그 청춘들의 삶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 질식하고 있을 뿐. 영화가 제주도까지 달려가 계춘이라는 할망을 통해 보여주려는 건 그래서 진정한 어른의 모습이다. 청춘들에게 저마다 든든한 편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런 어른.

 

계춘 같은 진정한 어른이 있어 혜지는 어둠을 비로소 빠져나와 미래를 향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아픔은 자양분이 되어 미술이라는 예술로 승화되고 거기에는 고스란히 혜지의 계춘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과 사랑이 담겨진다.

 

<계춘할망>에서 김고은은 역시 단단한 연기력으로 혜지라는 청춘의 아픔을 때론 퉁명스럽게 때론 따뜻한 눈물로 그려낸다. 윤여정은 늘 도회적인 이미지라는 틀에서 과감히 벗어나 손끝의 주름 하나로도 어르신의 감정을 담아내는 놀라운 연기변신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주목되는 또 한 명의 연기자는 김희원이다. 늘 악역으로만 나오던 그가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는 연기를 보여줄지 누가 알았으랴.

 

김고은이라는 청춘과 윤여정이라는 어른이 만나 보여주는 건 청춘과 어른에 대한 위로다. 힘겨워도 세상에 한 사람 정도쯤은 자기편이 있다는 걸 청춘들에게 말해주면서, 동시에 헌신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어른의 삶이 얼마나 숭고한가를 들려준다. <계춘할망>은 그래서 이들이 서로 소통하는 과정만 봐도 눈물이 나는 영화다. 아파서가 아니라 너무 따뜻해서 나는 그런 눈물.

<무도> ‘못친소’, 외모 소재도 불편하지 않은 까닭

 

MBC <무한도전> ‘못친소(못생긴 친구를 소개합니다)’ 시즌2가 시작됐다. 최종 라인업에 오른 못친소친구들의 면면에 벌써부터 기대감이 상승하고 있다. 우현과 이봉주, 김희원, 김태진 등등 그들은 결코 인정하지 않는 못생겼다는 말에 발끈하거나 전혀 이해하기 어렵다는 얼굴만으로도 이 아이템은 명불허전의 웃음을 줬다.

 


'무한도전(사진출처 MBC)'

사실 외모를 대놓고 아이템으로 세운다는 것은 분명 웃음을 담보하지만 그만큼 불편함을 주기도 하는 일이다. 그 많은 개그 프로그램들의 고정 아이템으로 외모 개그가 자리하고 있지만 또한 논란 역시 만만찮게 쏟아져 나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긴다는 것이다.

 

<무한도전> ‘못친소특집 역시 외형적으로 보면 마치 외모지상주의를 대놓고 부르짖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누가 더 못 생겼나를 두고 경쟁적으로 순위를 매기고 그것으로 웃음을 주는 것이 이 특집의 분명한 재미 요소라는 건 부정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못친소특집에는 기존 외모지상주의를 부추기는 코너들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존재한다. 이상하게도 이들은 못생겼다는 얘기를 그토록 반복하면서 하는데도 불구하고 별로 기분이 나빠지지 않고, 어떤 경우에는 오히려 더 기분 좋은 웃음을 던진다는 사실이다.

 

물론 짐짓 왜 내가 못생겨?”하며 반발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것은 진심 기분 나빠서 하는 대꾸라기보다는 그것이 웃기기 때문에 하는 리액션으로 보인다. 도대체 무엇이 똑같이 외모를 소재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못친소특집은 불편한 느낌이 들지 않을까.

 

거기에는 다른 외모 개그에는 없는 요소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발성이다. 즉 외모 개그가 불편함을 주는 건 누군가에게 외모를 지적받았을 때지만, ‘못친소는 스스로 결정해 이 페스티벌에 참여한다. 물론 거부하는 이들은 참여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건 외모가 아니더라도 다른 매력이 충분히 스스로에게 있음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이 자발성은 마치 이런 말을 건네는 것처럼 보여진다. 외모? 그게 뭐 그렇게 중요한데?

 

실제로 못친소를 보다보면 이들의 외모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여겨질 정도로 거기 참가한 이들의 새로운 매력들을 발견하게 된다. 4년 전 참가했던 조정치가 조금은 어눌하지만 그만이 가진 개성과 매력을 한껏 보여줬던 것을 떠올려보라. 못친소시즌1의 무장공비 비주얼 최강자 1위로 꼽혔던 김범수, 또 의외의 귀요미 매력이 철철 넘쳤던 고창석은 또 어떻고.

 

이번 못친소에 참여한 데프콘, 조세호, 지석진, 김수용, 바비, 우현, 김희원, 변진섭, 이봉주, 하상욱, 이천수, 김태진은 하나 같이 자기만의 독특한 영역에서 일가를 이룬 인물들이다. 마라톤의 영웅 이봉주, 국가대표 축구선수 이천수, 엄청난 팬들을 갖고 있는 시인 하상욱, 대체 불가 악역 카리스마를 보여주고 있는 김희원, 발라드 가수로서 레전드가 된 변진섭 등등. 이들의 면면은 외모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반어적으로 알려준다.

 

그래서 못친소가 보여주려는 건 외모지상주의의 정반대 메시지다. 완벽한 얼굴은 아니어도 그것이 저마다의 개성이 되고 또 그 개성이 오히려 매력적이라는 걸 이 특집은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것이 똑같은 외모 소재라도 <무한도전> ‘못친소가 불편함을 주지 않는 이유다.

<송곳>, 오물을 뒤집어쓴 뒤의 역설적 자유

 

돌아올 웃음이 없다는 게 명확해졌으니 웃어줄 이유가 없어졌다.’ 왕따가 되어버린 푸르미 마트의 이수인(지현우) 과장은 더 이상 갸스통(다니엘) 점장으로부터 미소 띤 칭찬을 받지 못하게 됐다. 직원들을 해고하라는 명령에 불복하면서다. 하지만 점장은 물론이고 동료 과장들도 그를 왕따로 만들어버리자 그는 오히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독자 노선을 가는 길을 선택했다.

 


'송곳(사진출처:tvN)'

보답 받을 호의가 없다는 걸 아니 애써 호의를 보일 필요도 없다.’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정민철(김희원) 부장이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그를 괴롭혀도 그는 더 이상 괴롭지 않게 됐다. 애초에 호의를 이제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면서 아예 그런 호의 자체를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JTBC 드라마 <송곳>에서는 이 역전된 상황을 흙탕물 속에서 뒹굴며 훈련을 받던 군대 이야기로 설명한다.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기 전에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오히려 편안해지는 역설. 철조망에 손이 조금 긁히던 흙바닥에서 뒹굴던 그리 신경을 쓰지 않게 되더라는 이야기. 드라마는 이 상황을 오물을 뒤집어쓴 뒤에 찾아오는 역설적 자유라고 표현했다.

 

이 부분은 이 드라마가 노동운동이라는 소재를 가져와서도 어떻게 그토록 흥미진진하고 때로는 속 시원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즉 노동운동의 이야기는 고 전태열 열사의 그것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지어는 비장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송곳>은 그 진지함을 유지하면서도 그렇다고 너무 무겁게만 노동운동을 다루지는 않는다. 그 안에 드라마틱한 반전과 소소한 성취들을 집어넣음으로써 그 소재에 대한 막연한 편견과 선입견을 넘어서게 해준다는 것.

 

그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반전과 역설이다. 이수인이라는 캐릭터는 우리가 노동운동하면 떠올리는 그런 인물과 사뭇 다르다. 그는 한 마디로 말하면 바른생활 사나이. 물론 성인군자라는 뜻이 아니다. 그도 역시 현실에 타협하고픈 욕망을 갖지만 그래도 마지막에는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못할 뿐이다. 보통의 그런 바른생활의 인물이라면 잘 살아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는 학교, 군대, 사회 어디든 가는 곳마다 걸림돌같은 존재다.

 

이것은 캐릭터의 역설이다. 바른생활 사나이가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걸림돌이 되고, 그런 인물을 송곳같은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현실. 결국은 현실이 비뚤어졌다는 역설이다. 그래서 마냥 당할 것만 같지만 웬걸? 의외로 이 바른생활 사나이가 승부욕을 보인다. 그것은 그래서 또다시 왕따의 역설로 나아간다. 왕따가 되니 오히려 저들의 요구나 기대를 따를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 그래서 그들의 부당함에 보다 당당하게 맞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수인을 돕는 구고신(안내상) 부진 노동상담소 소장도 우리가 노동운동하면 떠올리는 그런 투사의 이미지가 아니다. 거리에 노동자들이 나와 사측과 대치상황을 보여주지만 그 장소로 이수인을 데려온 구고신은 그것이 좋은 현장교육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노동쟁의나 노동운동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다. 어디든 노동은 있고 노동자와 사측이 있기 마련이라면 노동분쟁도 일어난다.

 

그래서 그는 노동운동에 대한 교육을 서구에서는 어린 나이의 학생들에게 정규 과목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걸 역설한다. 그들에게는 일상이 우리에게는 마치 송곳같은 일이 되어있다는 것. 구고신이라는 캐릭터는 그래서 이 노동운동에 대해 지나치게 비장함에 빠져들지 않게 해주는 존재가 된다.

 

사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상황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해준다. 즉 노동쟁의를 무언가 하지 말아야 할 것처럼 금기시하는 현실에서는 마치 사측의 호의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왕따가 되어버리지만, 거꾸로 분쟁이 있을 때 그러한 노동운동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실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수인이라는 캐릭터가 보여주는 왕따의 역설은 그 관점을 바꿔주는 것만으로도 그래서 시청자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하는 면이 있다



<미생>, 멜로, 지상파, 스타가 아니어도

 

요즘 지상파 드라마 관계자들을 만나면 한결 같이 나오는 얘기가 <미생>을 놓친 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이미 밝혀진 것처럼 <미생>은 지상파에 모두 제안되었다가 결국 tvN에서 리메이크된 작품이다. 지상파 관계자들은 이때만 해도 과연 그게 드라마로도 성공할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미 대성공을 거둔 <미생>을 놓친 것에 대해 지금은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미생(사진출처:tvN)'

<미생>의 성과는 단지 한 드라마의 성취에 머물지 않는다. 지금껏 우리네 드라마 제작자들이 해왔던 관습적인 접근을 대부분 깬 데서 나온 성과이기 때문이다. <미생>을 통해 배워야할 점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 첫 번째는 멜로 없이도 된다는 것이다. 애초에 <미생>이 지상파에서 제작되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는 멜로의 부재때문이었다. 지상파 관계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멜로를 넣어달라고 주문했지만 멜로 없이 해달라는 윤태호 작가의 강력한 요구사항이 있었기 때문에 그걸 수락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tvN에서 방영된 <미생>에 만일 멜로가 들어갔으면 그 집중력이 상당부분 흩어졌을 거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직장동료로서의 장그래(임시완)와 안영이(강소라) 그리고 장백기(강하늘)가 각각 서 있었기 때문에 그들 각자가 가진 직장생활의 고충들과 성장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이 삼각 멜로에 허우적대게 하지 않은 건 윤태호 작가의 말대로 작품의 성패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었던 셈이다.

 

두 번째로 <미생>을 통해 배울 수 있었던 건 리메이크도 하기 나름이라는 점이다. 사실 <미생>은 드라마로 제작되기 전부터 이미 1백만 부가 팔린 만화였다. 이것은 그만큼 인지도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드라마 제작자들에게는 이미 많이 알려진 작품이라는 장애요소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노다메 칸타빌레>를 리메이크했다가 실패한 <내일도 칸타빌레>를 보라. 그만큼 원작의 무게감은 리메이크에게는 짐이 되는 법이다.

 

하지만 <미생>은 원작과는 또 다른 재미를 선사했다고 평가받았다. 그것은 새로운 내용을 추가했다기보다는(물론 약간 다른 내용들이 있지만), 드라마적인 극적 구성을 강화했다고 보는 편이 낫다. 이 극적 구성 때문에 웹툰이 가진 마치 바둑을 두는 듯한 지적인 흐름은 감정선이 묻어나는 장면들로 보여질 수 있었다. 같은 내용도 어떻게 연출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걸 <미생>은 실증해보인 것.

 

세 번째는 플랫폼이 아니라 콘텐츠라는 사실이다. 많은 이들이 <미생>이 만일 지상파에서 했다면 그만한 성과를 얻었을까 하고 의문을 제기한다. 즉 지상파는 상대적으로 시청층의 연령대가 높고 드라마 소비에 있어서도 패턴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상파가 <미생>에 멜로를 요구한 것은 기획적인 패착이 아니라 바로 이런 플랫폼적인 특성에 따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어떤 드라마는 지상파보다는 아예 케이블 같은 비지상파가 훨씬 더 플랫폼으로서 우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플랫폼에 끼워 맞추는 콘텐츠가 자칫 바로 그 점 때문에 실패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플랫폼보다 우선되는 것이 콘텐츠라는 점이다. 콘텐츠가 먼저 완성되고 거기에 맞는 플랫폼을 선택한 <미생>은 그래서 드라마 제작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마지막으로 <미생>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었던 것은 미 발굴된 얼굴들이 오히려 낫던이 드라마의 캐스팅이다. 김대명, 변요한, 박해준, 류태호, 김희원, 손종학, 정희태, 최귀화, 전석호, 오민석, 태인호, 황석정, 이승준... 우리는 <미생>이 나오기 전까지는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던 무수한 배우들이 이토록 많다는 걸 이 작품을 통해 깨달았다. 지상파 드라마에서 봤던 얼굴들이 여기저기 반복적으로 노출되고 있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인 그림이다.

 

이렇게 미 발굴된 얼굴들은 이미지 노출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작품 캐릭터와의 싱크로율이 더 높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웹툰에서 지금 막 걸어 나온 것 같다는 평가는 바로 이 미 발굴된 얼굴들의 미친 존재감 덕분이었다. 즉 지상파 드라마들도 새로운 얼굴의 발굴이 드라마에 얼마나 큰 힘이 되는가를 <미생>을 통해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미생>의 성공은 드라마의 새로운 성공방정식을 만들었다. 기존의 틀을 고집하며 깨지 못했던 지상파들로서는 한번쯤 숙고해야할 부분이다. 멜로가 없어도 지상파가 아니라도 또 스타가 아니라고 해도 작품만 좋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미생>은 보여주었다.

 

장그래와 장백기, 스펙과는 상관없는 사회생활

 

<미생>에서 장그래(임시완)라는 인물은 하나의 판타지처럼 보인다. 현실적으로 스펙 없는 그가 원 인터내셔널 같은 대기업에 입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얘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회사 내에서의 자잘한 일들 속에서도 그 누구보다 잘 적응하고 또 위기상황을 넘기는 기지를 발휘한다.

 

'미생(사진출처:tvN)'

새롭게 온 박과장(김희원)의 비리를 파헤치는데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리는 장그래의 행동은 일개 사원으로서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사회생활을 경험하지 못한 신입사원이라면 그런 핍박받는 상황에서 장백기(강하늘)처럼 행동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드라마 속에서 스펙 좋은 장백기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자신의 자존심을 꺾지 못한다. 당장의 것들만 눈에 보이고 좀 더 큰 그림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장그래는 다르다. 그는 이 박과장 같은 상식 이하의 선임의 명령을 반발 없이 수행하며 집으로 돌아와 자기가 바둑공부를 할 때 적어뒀던 내용을 펼쳐든다. ‘위험한 곳을 과감하게 뛰어드는 것만이 용기가 아니다. 뛰어들고 싶은 유혹이 강렬한 곳을 외면하고 묵묵히 나의 길을 가는 것도 용기다. 순류에 역류를 일으킬 때 즉각 반응하는 것은 어리석다. 상대가 역류를 일으켰을 때 나의 순류를 유지하는 것은 상대의 처지에서 보면 역류가 된다. 그러니 나의 흐름을 흔들림 없이 견지하는 자세야말로 최고의 방어수단이자 공격수단이 되는 것이다.’

 

웬만큼 회사생활을 경험한 사람도, 또 스펙이 아무리 좋은 사람도 결코 생각해내기 어려운 삶의 지혜다. 바로 이 지점은 왜 <미생>이 굳이 주인공 장그래를 스펙 없는 청춘으로 그리는 대신, 그에게 유년시절을 온통 바둑이라는 세계 속에서 살게 했는가가 잘 드러나는 지점이다. <미생>은 그저 직장생활의 애환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또한 그 애환 속에서도 어떻게 버텨내는가에 대한 노하우도 담겨져 있다.

 

<미생>에서 그것은 바둑의 세계로 제시된다. 장그래라는 인물이 비현실적이지만 그래도 수긍이 가는 이유는 그가 스펙은 없어도 바로 이 바둑을 이해하고 있다는 설정 때문이다. 겉으로 보면 평범 이하처럼 보이지만 그는 비범한 인물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해지는 점이 있다. 왜 하필 바둑을 세상살이의 지침으로 삼았을까. 바둑의 어떤 점이 그토록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장그래 같은 인물조차 회사생활을 잘 할 수 있게 하는 걸까.

 

이것은 바둑이라는 세계가 가진 현실을 내려다볼 수 있는 특징 때문이다. 바둑판이 하나의 현실이라면 그 위에 바둑돌 하나씩을 얹어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끊임없이 확인할 수 있는 세계가 바로 바둑의 세계다. 그러니 이러한 관조적 자세는 바둑이 세상 현실을 한 발 뒤로 물러나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힘을 만들어준다.

 

바로 이 한 발 뒤로 물러난다는 것은 아마도 세상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지도 모른다. 시스템이라는 괴물과 싸우고 있는 우리네 샐러리맨들은 그 시스템 안에 있기 때문에 괴물의 정체를 발견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장그래처럼 바둑 같은 자신만의 축소판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는 한 발 물러나 그 시스템을 확인하고 대처할 수 있는 식견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현재 스펙사회에 대해 <미생>이라는 작품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일 것이다. 영어, 수학 점수 좀 더 많이 나온다고 사회생활을 더 잘하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세상을 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것. <미생>은 바둑을 예로 들고 있지만, 그것은 여행 같은 세상 경험일 수 있고, 인문학 서적 같은 세상 공부일 수도 있다. 장백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스펙은 어쩌면 자신의 발목을 오히려 잡는 족쇄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미생>이라는 작품을 통해 장그래라는 판타지적인 인물이 현실에 던지는 질문이 결코 비현실적이지 않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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