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마프>, 여성성의 시선으로 바라본 일그러진 우리 사회

 

꼰대들의 드라마? 애초에 이런 기치를 내걸었다지만 tvN <디어 마이 프렌즈>는 거기서 머무는 드라마는 아니다. 단지 어르신들의 이야기만이 아니게 된 것은, 그들의 삶에 묻어난 많은 것들이 우리 사회 현실의 적나라한 모습들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눈물 없이는 보기 어려운 드라마는 일그러진 우리 사회의 종합판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디어 마이 프렌즈(사진출처tvN)'

물론 이야기는 어르신들의 삶에서부터 시작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삶. 그래서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나는 혼자 살 수 있다고 되뇌는 희자(김혜자), 한 평생 구두쇠에 꼰대 남편 밑에서 살아오며 차라리 <델마와 루이스> 같은 자유롭게 살다가 길 위에서 죽는 삶을 꿈꾸는 정아(나문희) 같은 어르신들의 삶이다.

 

하지만 이렇게 한 세월을 살아온 어르신들에게서 묻어나는 건 우리 사회 현실의 많은 문제들이다. 폭압적인 남편을 그저 참으며 살아온 정아는 알고 보면 상습적인 아버지의 폭력을 겪으며 살아오신 어머니의 삶에서 영향 받은 것이고, 그것은 또 폭력을 당하는 딸의 삶으로 대물림된다. 이것은 우리네 근대사에 점철된 가부장제로부터 지금껏 흘러온 폭력의 역사를 고스란히 그려낸다.

 

그 폭력 속에는 바람 피는 남편 같은 불륜의 문제가 만들어내는 치명적인 결과들까지 들어 있다. 남편과 자기 집 침대에서 뒤엉켜 있는 다른 여자를 본 난희(고두심)는 그 충격에 자살을 결심한다. 딸을 혼자 놔두고 갈 수 없어 딸에게도 약을 먹인 일을 저지른 난희는 훗날 딸 완이(고현정)에게 그 때 일로 인해 자신이 갖게 된 선택들에 대한 처절한 원망을 듣게 된다. 난희는 그 일로 유부남과 장애인(동생이 장애를 가져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어머니 때문)은 안된다고 완이에게 버릇처럼 말하고, 완이는 그 때 그 일 이후 자신은 엄마 거라는 걸 확인했다며 엄마의 말을 거역할 수 없는 아이가 되었다고 말한다.

 

즉 하나의 폭력은 또 다른 폭력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아픈 트라우마로 남아 그들의 삶 역시 굴절시킨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드러내는 난희에게 완이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연하(조인성)가 교통사고로 장애를 갖게 되자 버렸다며 그것이 엄마 탓이라고 절규한다. 그런 딸의 아픔을 뒤늦게 알게 된 난희는 완이를 끌어안고 자신의 잘못을 후회한다.

 

<디어 마이 프렌즈>가 어르신들의 삶을 조명하면서 결국 비뚤어진 남성성의 폭력의 역사가 드러나고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여성들의 우정같은 연대로서 화해되고 해결되는 모습을 그리게 됐다는 건 주목해볼 일이다. 난희는 불륜 상대녀의 친구였던 영원(박원숙)과 결국 화해하고, 또 어린 시절 그런 고통을 겪게 만든 딸과도 화해한다. 정아는 남편에 대한 복수의 칼로서 이혼을 결심하고 친구들은 그녀를 돕는다. 성재(주현)를 두고 희자와 충남(윤여정)이 모두 관심을 갖지만 충남은 희자에게 남자를 양보한다. 그리고 확인하는 건 다시 그들의 우정이다.

 

남성성의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수직적 관계들을 <디어 마이 프렌즈>는 여성성의 우정으로 대변되는 수평적 관계로 그 해결점을 보여준다. 이 어르신들의 삶 속에서 일그러진 우리 사회의 주름을 발견하는 건 그래서 어려운 일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연대에 심정적인 지지를 하게 만드는 건 당연한 일이다. 실로 어르신들을 이토록 깊게 들여다보고 그 안에 담겨진 삶을 통해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는 건 이 드라마가 가진 놀라운 성취가 아닐 수 없다. 역시 노희경이다

'아가씨' 김민희와 김태리, 그녀들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박찬욱 감독의 신작 영화 <아가씨>의 배경은 일제강점기 어느 곳에 지어진 대저택이다. 하필 박찬욱 감독이 이 영화의 시대적 배경을 일제강점기로 삼은 이유는 명백하다. 그건 이 시대를 다룬 무수한 영화들이 많이 보여주던 민족주의적인 관점과는 무관하다. 다만 그 시기가 가진 혼종적 성격, 즉 문을 지나고 나서도 한참을 차를 타고 들어가 세워져 있는 대저택이 일본식과 영국식 그리고 우리식으로 한 공간에 지어져 있는 모양새와 무관하지 않다. 공간이 그러하듯이 그 공간에 살아가는 이들도 혼종적 성격을 띤다. 일본어를 쓰는 조선인이 있고 조선어를 쓰는 일본인이 있다.

 

사진출처: 영화 <아가씨>

영화가 담는 시공간이 이처럼 혼종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건 <아가씨>에서는 중요한 모티브가 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무수한 경계와 구분들이 이 혼종적 시공간에서는 어딘지 느슨해지기 때문이다. 그 느슨함은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대저택에 거의 감금되듯이 살아온 아가씨 히데코(김민희)는 부모를 잃고 막대한 유산을 받았지만 그 후견인인 이모부 코우즈키(조진웅)의 손아귀에서 자라난다. 그런데 이 코우즈키와 히데코의 관계가 애매하다. 친인척 관계지만 코우즈키는 히데코에 대한 변태적인 애정을 갖고 있다. 외부에는 그것이 코우즈키가 히데코의 재산을 노리기 위함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건 영화의 말미에 가면 명확하게 드러난다.

 

영화는 아가씨 히데코의 재산을 노리고 접근하려는 가짜 백작(하정우)이 그녀에게 좀 더 쉽게 접근하기 위해 숙희(김태리)를 하녀로 넣는 일종의 작전으로 시작한다. 따라서 이들은 모두 연기를 한다. 혼종적 공간에서의 연기는 이들이 도대체 그 진심이 무엇이고 실체는 무엇인지를 더욱 오리무중으로 만들어버린다. 3부로 나뉘어 구성된 영화는 그래서 그 시점이 매 부마다 달라지면서 완전히 다른 이야기로의 반전을 보여준다. 연기를 하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연기가 아니었고, 진짜인 줄 알았는데 그것이 연기였다는 것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한 장면에 대한 서로 다른 이야기의 변주만으로도 <아가씨>는 꽤 흥미롭다.

 

하지만 영화가 지향하는 점은 그간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이 보여줬던 모호함이 아니라 훨씬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폭력적인 남성성의 세계로부터 두 여성이 유쾌한 탈주극을 벌이는 것이다. <아가씨>에 두 명의 여성이 등장하고 그들이 모두 두 명의 남성에 포획된 존재들이라는 설정은 그래서 이 영화가 가진 상징성을 보다 명쾌하게 보여준다. 가짜 백작에 의해 작전에 투입된 숙희가 그렇고, 코우즈키에 의해 대저택에 감금된 채, 신사차림으로 가장한 남자들 앞에서 더럽고 도착적인 소설 강독을 하며 살아가는 히데코가 그렇다.

 

아가씨와 하녀라는 관계 설정은 아마도 남성성을 드러내는 무수한 성애 영화가 보여주곤 했던 기묘한 상상을 자극할 지도 모른다. 그래서 직접 보기 전에는 <아가씨>라는 영화가 일종의 동성애 영화가 아니냐는 편견을 갖게 되는 건 이 영화가 주는 반전에는 오히려 더 효과적인 면이 있다. 남자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묻는 아가씨의 질문에 하녀가 그 속살을 만지고 성 행위를 하는 장면은 그래서 1부에서는 말 그대로 남성성의 시각을 그대로 재연하는 듯 보이지만, 2, 3부에서 다시 보는 그 장면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것은 마치 코르셋처럼 남성성에 의해 짓밟히고 옥죄던 육체들이 아가씨와 하녀라는 서열 구조까지 한껏 벗어던진 채 서로를 온몸으로 위무하는 듯한 장면으로 치환된다. 두 여성이 첫 설렘을 갖게 되는, 골무로 날카로운 이빨을 갈아주는 장면 역시 다시 보게 되면 여성들의 연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이 대저택 지하실로 상정되는 남성성의 세계는 점점 더 도착적인 느낌을 준다.

 

섹스는 이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저 성행위가 아니다. 여기 등장하는 남성들은 이상하게 삐뚤어진 성의식을 갖고 있다. 마치 여성들을 위압적으로 짓눌러야 여성들이 더 좋아할 거라는 사고방식. 그런 폭력적인 생각들은 지하실 가득한 무수한 성애 소설들의 판타지로 남겨져 여성들을 그 폭력의 대상이 되게 만든다. 뒤늦게 이 지하실에 가득 채워진 성애 소설들을 발견하고 그 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깨닫게 된 숙희는 그래서 히데코와 함께 그 집으로부터 탈주하며 소설들을 발기발기 찢어버린다. 그리고 마치 발기된 성기처럼 세워져 위압적으로 그녀들을 억압하던 상징물 뱀 대가리를 잘라버린다.

 

그렇게 여성들이 탈주해버린 대저택에서 남겨진 남성들은 그 폭력적인 성의식 속에서 스스로를 파멸의 길로 이끈다. 대신 탈주한 여성들은 블라디보스톡행 배를 타고 자유의 항해를 한다. 그간 남성성의 억압을 상징하던 옷들을 남김없이 벗어버리고 폭력적인 성행위가 아닌 행복한 성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은 그래서 인상적이다. 어린 시절 코우즈키가 히데코를 훈육시키기 위해 사용했던 구슬은 온전한 쾌락의 도구로 바뀐다.

 

사실 이렇게 선명하게 메시지를 담아내면서도 매번 반전에 반전을 이어가고 그리고 박찬욱 감독 특유의 탐미적인 영상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가씨>는 놀라운 성취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다. 한 장면을 바라보던 카메라가 갑자기 느릿느릿 뒷걸음질을 치면서 그 장면의 진짜 이야기를 보여주는 듯한 영상 연출은 그래서 이 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다음에 벌어질 상황들이 못내 궁금하고, 그러면서 스스로 갖고 있던 편견들이 여지없이 박살나는 그 장면에서는 어떤 쾌감마저 느껴진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혼종적 성격을 띠던 영화의 모호함은 보다 선명해진다. 가짜는 가짜임이 판명되고 진짜는 진짜임이 드러난다. 그래서 모두가 연기를 하는 듯 보였던 영화는 후반부에 이르면 그 연기의 끝장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폭압적인 상상력과 기획으로 강요되던 연기들이 벗겨지고 대신 진실 된 알몸이 드러날 때의 카타르시스는 그 어떤 섹스보다 강렬하다. 남성성이 내포하고 있는 폭력적인 양태들이 무너져 내리고 저 편 들판을 향해 달려 나가는 두 여성의 자유를 지지하게 될 때, 영화는 한없이 유쾌해진다. 성 의식에 대한 논제들이 그 어느 때보다 쏟아져 나오는 시기여서 일까. <아가씨>는 특히 더 흥미로운 동지의식을 갖게 만드는 영화다

<육룡이>, 박혁권이 만들어낸 악역의 품격

 

이토록 모스트스러운 악역이라니. SBS <육룡이 나르샤>에는 육룡만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의 활약을 가능하게 해주는 악역들이 있다. 이른바 도당3인방이라 불리는 이인겸(최종원), 길태미(박혁권), 홍인방(전노민)이 그들이다. 고려 말 혼돈기에 백성들의 고혈을 빨고 전횡을 일삼는 이들이 전제되기 때문에 육룡이라는 시대의 영웅들이 훨훨 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드라마 구조상 이들 악역은 가장 중요한 인물들이 아닐 수 없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그 세 명의 악역이 모두 강렬한 저마다의 캐릭터를 갖고 있다. 이인겸은 정치력을 갖춘 악역이다. 그는 일찍이 이성계(천호진)의 약점을 잡아 무릎 꿇린 바 있고 그의 정계 진출을 막기 위해 갖가지 정치적 책략과 술수를 동원하는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홍인방은 배신의 아이콘이다. 본래 성균관의 스승이었지만 모진 고문 앞에 스스로를 포기하고 오히려 개인적인 욕망을 터트리는 인물. 해동갑족의 수장에게 대놓고 협박을 하는 모습에서 소름돋는 악역의 면모를 보여줬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 세 명의 악역 중 단연 주목을 끄는 캐릭터가 길태미일 것이다. 삼인방 중 무력을 상징하는 그는 삼한제일검이라 불리며 초절정의 무공을 갖고 있지만 어찌 된 일인지 하는 행동이나 외모, 말투는 여성스럽기 그지없다. 진한 화장에 말할 때 목소리나 손동작은 영락없는 여성의 그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부드러움이 칼을 뽑을 들 때 더 섬뜩한 느낌을 준다.

 

해동갑족 전원의 서명이 들어간 상소를 이방원(유아인)이 가져옴으로써 최영(전국환) 시중이 주상의 윤허를 받아 이뤄진 길태미의 추포 과정에서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그 어떤 사극 속 악역들보다 압도적이다. 얼굴에 피칠갑을 한 채 그를 잡으러 온 군사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배가 고프다며 국밥을 먹는 장면은 길태미의 캐릭터를 제대로 보여준다. 평상시에는 전혀 무공을 할 것 같지 않는 듯한 허술함을 보여주지만 그것이 오히려 고수의 면면으로 느껴지는 그런 캐릭터.

 

그가 저잣거리로 걸어 나올 때 그를 본 백성들이 도망치는 장면은 마치 영화 <괴물>의 한 장면 같다. 그만큼 그 캐릭터가 가진 살벌함이 드러나는 대목이지만 왠지 길태미에게서는 인간적인 면모도 느껴진다. “어이 이인겸 따까리!” 라고 부르자 그가 분노하는 건 그 역시 스스로를 세우려 노력했지만 실상은 이인겸의 그늘 아래 있었다는 걸 자인하기 때문일 게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돈인 홍인방과 헤어지면서 그래서 사돈 때문에 재밌었다고 토로한다. 그리고 자신은 할 것 다 해봤기 때문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한다. 권력에 대한 끝없는 욕망으로 끝까지 손에 쥔 걸 놓지 않는 홍인방과는 사뭇 다른 캐릭터다. 그리고 그의 앞에 나타난 땅새(변요한)와 대결을 하게 되자 오히려 기뻐하는 모습에서는 무인으로서의 면모도 드러난다. 마치 최고의 무인에 의해 마지막을 장식하기를 바랐다는 듯이.

 

여성스러움과 난폭함을 동시에 갖춘 이 이중적인 캐릭터가 제대로 구현된 건 다름 아닌 박혁권이라는 연기자의 공력 덕분이다. 지금껏 어딘지 찌질하거나 소심한 중년의 모습을 자주 보여왔던 그지만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그 누구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긴 악역 길태미를 시청자들의 뇌리에 깊게 남겨놓았다. 길태미는 시쳇말로 모스트스러운 악역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 역할에서 박혁권은 악역의 품격이 무엇인가를 보여줬다.



<미세스캅>, 일과 가정의 양립은 불가능한 일인가

 

김희애가 돌아왔다. 이번에는 워킹맘이다. 그것도 극한 워킹맘. SBS의 새 월화드라마 <미세스캅>에서 김희애가 연기하는 최영진이라는 인물은 포장마차에서 주인아주머니와 털털한 이야기를 나누며 잠복근무하는 장면으로 등장한다. 무언가 세련되고 우아한 자태를 늘 보여주던 김희애는 이제 나쁜 놈들을 잡기 위해 좁은 골목길을 달리고, 싸워야 하는 인물로 돌아왔다.

 


'미세스캅(사진출처:SBS)'

여성들을 잔인하게 유린하고 살해하는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그녀가 일하는 현장에서는 자칫 잘못하면 범인들의 칼에 맞아 사경을 헤매게 되기도 하는 그런 살벌한 일들이 벌어진다. 최영진 팀장의 오른팔인 조재덕(허정도) 경사는 범인의 칼에 맞고서야 비로소 자신이 간경화였다는 걸 발견할 정도로 자신을 돌볼 틈조차 없는 이 일의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최영진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어쩌다 홀로 아이를 키우게 되었지만, 형사라는 직업 때문에 아이의 발표회에도 가지 못하는 나쁜 엄마가 되었다. 대신 그녀의 여동생인 최남진(신소율)이 아이를 돌보지만 아이는 결국 엄마를 그리워하게 된다. 자꾸 물건을 훔치는 아이에게서 그렇게 해서라도 엄마가 보고 싶었다는 얘기를 들은 최영진은 그래서 오열하며 이 일을 때려치울 결심을 한다.

 

그래서 과장에게 사직서를 제출하지만 또한 눈에 밟히는 것이 팀장이라고 자신을 바라보는 팀원들이다. 조재덕에게 칼을 먹인 범인이 등장했다는 이야기에 그녀는 갈등한다. 그와 그의 아내에게 반드시 범인을 잡겠다고 약속했던 그녀였다. 하지만 이렇게 열심히 일한다고 해서 그것이 모두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 게 조직의 생리이기도 하다. 팀장의 상사인 과장은 비리에 얽혀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성급하게 지목해놓고는 이를 고치려 하지 않는다.

 

<미세스캅>은 일과 가정 사이에서 동분서주하는 우리네 워킹맘들의 이야기를 형사라는 직업을 통해 극화시킨 드라마다. 일 때문에 아이를 돌볼 틈이 없는 워킹맘들의 보이지 않는 속 앓이를 이해하고 공감한다면 최영진이라는 인물에 푹 빠져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누군가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온통 일에 자신을 내던지는 삶을 살고 있지만 정작 자신의 가족은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그런 삶의 아이러니라니.

 

최영진과 최남진 그리고 최영진의 딸이 그려내는 가족의 풍경은 다른 식으로 들여다보면 여성들의 공동체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일과 가정의 양립이라는 과제 앞에서 가녀리게만 보이는 이 여성 공동체의 파편화된 삶은 저 살풍경한 남성성의 세계와 대립구도를 갖고 있다. 최영진의 상사인 염상민 과장(이기영)이나 연쇄살인범이 일 안팎에서 여성성의 삶을 위협하는 존재로 등장한다는 사실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래서 <미세스캅>은 마치 전형적인 형사 장르물의 하나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네 워킹맘들의 초상이 담겨져 있다. 최영진은 아마도 앞으로 일의 세계와 가정이 뒤얽히는 상황을 겪게 되지 않을까. 그 안에서 어쩌면 그녀는 선택을 강요받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일인가. 가정인가. 이러한 질문은 <미세스캅>이라는 장르물에 괜찮은 무게감을 얹어준다. 김희애가 그려나갈 최영진이라는 워킹맘의 삶이 자못 궁금해지는 이유다. 그녀는 과연 일과 가정을 모두 지켜낼 수 있을까.



송중기, 세상 어디에도 없는 캐릭터 된 사연

 

<늑대소년>이 누적 관객수 52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이 영화를 순수한 멜로영화라고 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만일 그렇다면 멜로영화 중에서는 최고의 관객수를 기록한 셈이다. 작품의 완성도가 대단한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대중들을 사로잡는 묘한 매력이 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건 다름 아닌 늑대소년 철수라는 독특한 캐릭터와 그걸 연기해낸 송중기라는 아우라다.

 

자료: 영화 '늑대소년'

멜로라는 장르가 영화에서 그다지 힘을 발휘하지 못해왔던 것처럼 드라마도 마찬가지 상황이다. 그런데 드라마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는 2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냈다. 여기서도 역시 그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은 강마루라는 캐릭터와 그걸 연기한 송중기다. 겉면으로는 스릴러와 판타지가 섞여있고 또 복수극의 요소들이 깃들여있지만 모두 그 알맹이를 보면 멜로의 결이 느껴지는 이 영화와 드라마의 성공, 그 안에 있는 늑대소년 철수와 강마루라는 캐릭터, 그리고 그걸 연기한 송중기. 과연 이건 우연의 일치일까.

 

거꾸로 뒤집어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송중기라는 배우가 가진 면모와, 지금 현재 대중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캐릭터의 조합이 절묘했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중성적 이미지의 외모와 남성성을 드러내는 내면을 가진 ‘세상 어디에도 없는(없을 것 같은)’ 판타지적인 존재다. 그렇다면 송중기라는 연기자와 늑대소년, 착한남자라는 캐릭터, 그리고 버겁디 버거운 현실은 어떤 상관관계를 가지는 걸까.

 

<늑대소년>은 작금의 여성들이 갖고 있는 완벽한 판타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제목에서부터 드러난다. 늑대와 소년의 만남은 늑대로 표징되는 남성성과 미소년이 가진 중성적 이미지로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이 두 요소(남성성과 중성적 이미지)는 작금의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요구하는 양가적 이미지다. 사회적 분위기와 시대적 변화에 따라 급격히 초식화되어가고 있는 현재의 남성들에게 여성들은 거꾸로 ‘남성적인 면’을 판타지로 꿈꾸지만 그것이 중성적으로 포장되길 원한다.

 

이것은 이른바 ‘나쁜 남자 신드롬’과 맞닿아 있다. ‘나쁜 남자 신드롬’은 자신에게만 부드럽고(중성적) 타인들에게는 까칠한(남성적인) 그런 남자에 대한 판타지다. 흔히 드라마에서 ‘버럭’ 캐릭터로 등장하곤 하는 인물들이다. <외과의사 봉달희>의 안중근(이범수)이 그렇고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가 그러하며, <파스타>의 셰프 최현욱(이선균)이 그렇다. 이들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기 분야에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발휘하지만 자기 여성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운 존재들이다.

 

<늑대소년>은 이 캐릭터의 극화버전인 셈이다. 철수라는 캐릭터는 아예 이러한 판타지가 가상의 존재로 축조된 인물이다. 철수는 순이(박보영)에 의해 순화되지만 인간이 아니다. 인간보다는 늑대에 더 가까운 존재. 그래서 남성성은 그 차원을 넘어 야수성으로까지 보여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이에 대한 부드러운 태도는 순정을 넘어 절대 복종으로 그려진다. 게다가 이 양가적 성격은 내면에 머무는 게 아니라 이 캐릭터의 외형으로도 드러난다. 그들을 떼어놓으려는 이들 앞에서 그는 늑대로 변신하지만, 그녀 앞에서는 맑디맑은 미소년의 얼굴로 돌아온다. 미소년의 외모에 자신을 끝까지 기다려주고 보호해줄 것 같은 남성성의 결합체. 이런 완전체가 현실에 존재할 수 있을까.

 

‘세상 어디에도 없는’ 존재. <늑대소년>은 그래서 <착한남자>라는 드라마가 구축해낸 강마루라는 캐릭터와 만나게 된다. 강마루는 자신의 여자를 위해서 대신 감옥에 가기도 하고, 때론 죽음도 불사하는 그런 존재다. 제목은 <착한남자>지만 그 착함(사랑하는 여자를 위한)은 때론 파괴적인 양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래서 강마루 역시 <늑대소년>처럼 ‘세상 어디에도 없는’이라는 수식어를 갖게 된다.

 

물론 이 극대화된 판타지는 이런 남자가 현실에서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세상은 그렇게 착하지 않다. 특히 남자에게는. 특히 청춘에게는. 청춘의 남성들은 그런 현실 속에서 초식화되거나 타인과 담을 쌓고 자신에게 침잠하는 개인주의적 경향을 띌 수밖에 없다. 청춘을 등장시킬 수밖에 없는 멜로가 과거를 회상하고 추억하거나(<건축학개론>처럼), 극단적인 판타지로 숨는 것(<늑대소년>같은)은 그런 현실 때문일 게다.

 

아마도 이 이미지 때문일 게다. 이미지에 민감한 광고가 송중기를 가만둘 리 만무다. 그는 2개월간 총 10편의 광고를 제의 받았다고 한다. 물론 의도된 것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송중기가 갑자기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시대적 요청에 의해서다. 그는 곱상한 미소년의 얼굴에 강한 남성성의 내면을 숨기고 있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그런 캐릭터로 축조됐다. 그의 필모그래피가 말해주듯이 그는 미소년(<성균관스캔들> 같은)에서 시작해 갈등하고 고뇌하며 때론 분노하는 햄릿으로 왔다가(<뿌리 깊은 나무> 같은) 이 두 이미지의 결합을 통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캐릭터로 세워졌다. 작금의 현실을 두고 볼 때, 이러한 캐릭터를 가진 송중기의 시대는 이미 도래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성을 버리자 여성이 된 문근영, 그리고 신윤복

문근영은 국민여동생이라는 이미지를 얻는 순간 딜레마에 빠졌다. 귀엽고 순수함이 묻어나는 미소, 특유의 선해 보이는 커다란 눈망울은 그녀를 순식간에 스타덤에 올려놓았지만, 그것은 또한 족쇄이기도 했다. ‘어린 신부(2004)’, ‘댄서의 순정(2005)’으로 구축된 여동생 이미지를 벗어나기 위해 그녀는 ‘사랑따윈 필요없어(2006)’의 비련의 여주인공을 맡는 한편, 모 이동통신사의 CF를 통해 섹시한 이미지로의 변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대중들은 여전히 그녀를 여동생 이미지로 두고 싶어했다.

2년여의 공백기를 거쳐 문근영에게 다가온 ‘바람의 화원’의 신윤복이라는 캐릭터는 그녀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했다. 남장여자란 그녀가 강요받아온 국민여동생이라는 이미지와, 또 변신해야할 성인연기자라는 이미지를 벗어난 제3의 선택이 될 수 있었다. 우리네 연예계에서 여성연기자들에게 강요되는 두 이미지, 즉 귀엽거나 섹시한 그 이미지의 짐을 벗어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기묘한 것은 그녀가 여성의 이미지를 버리자 오히려 여성으로 성큼 다가왔다는 점이다.

‘바람의 화원’의 신윤복이라는 캐릭터는 화동(畵童)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다. 이것은 문근영이라는 국민여동생이라 불리던 연기자에게 가장 편안한 옷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연기하는 신윤복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남성으로 살아가지만 그녀의 마음 속에서 꿈틀대는 여성성은 신윤복의 겉모습인 화동의 이미지를 깨고 바깥으로 슬쩍슬쩍 빠져나온다. 스승인 김홍도(박신양)의 등에 업혀 가슴이 설레기도 하고, 그림을 가르쳐주기 위해 잡은 김홍도의 손길에 마음이 떨리기도 한다.

이러한 ‘강요된 남성성, 드러내고 싶은 여성성’은 문근영이라는 연기자가 꿈꾸던 것이 아닐 수 없다. 여성의 이미지보다는 아이의 이미지로서 보여지길 원하는 대중들의 욕망과 그 속에서 본인 스스로 보여주고픈 여성의 이미지는 정확하게 문근영이라는 배우의 상황과 연결된다. 따라서 그녀가 연기하는 신윤복이 그림 속에서 여성성에 끌리는 것(여성을 주로 그리고 화풍 또한 여성성을 따른다)은 그대로 그녀의 마음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것은 또한 신윤복의 그림을 통해 보여지는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과도 연결된다. 신윤복은 그려서는 안 되는 것들에 대한 당대의 틀을 깼던 화원이다.

극중 신윤복이 정향(문채원)을 대하는 태도 역시 남성성을 드러내기보다는 여성성을 더 강조한다. 신윤복은 금기된 것, 즉 여성성에 대한 희구를 여성의 아름다움에서 찾으려 한다. 신윤복이 그녀를 그리워하고 그림에 담으려 하는 것은 단순한 남녀 간의 애정이 아니다. 그녀는 정향을 자신의 그림 속에 담음으로써 자신의 여성성을 채워 넣으려 하는 것이다. 그녀가 ‘단오풍정’의 그림을 펼쳐놓고 정향에게 “이 그림 속에 들어와 주시요”하고 말하는 장면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렇게 보면 문근영이란 연기자와 신윤복이라는 캐릭터의 만남은 운명적이라 할 수 있다. 문근영은 연기자로서 강요된 이미지와 드러내고픈 이미지를 신윤복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드러내고 있고, 신윤복이라는 캐릭터는 문근영이라는 연기자의 훌륭한 옷이 되어주고 있다. 신윤복을 통해 보여준 문근영의 이미지 변신은 또한 우리네 여성 연기자들이 가진 딜레마를 넘어서는 것이기도 하다. 여성 연기자로서 강요되는 이미지를 넘고 나서야 비로소 ‘여성’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연기자’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문근영은 신윤복을 통해 그걸 보여주었다.

님의 질문이 님에게 다시 되돌아간 이유

[한 장면으로 읽기] 순이(수애)는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남편을 꼬박꼬박 면회 갑니다. 달거리에 맞춰 보내는 시어머니의 마음은 아마도 삼대독자의 대를 이어보자는 심산이겠죠. 여인숙에 어색하게 앉은 순이는 상관조차 하지 않고, 남편 상길(엄태웅)은 소주를 마십니다. 상길은 사실 따로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죠. 가만히 앉아있는 순이에게 넌 모를 거라는 식으로 묻습니다. “니 사랑이 뭔지 아나?” 그리고 혼자 돌아 누워버리죠.

사실 이렇게 사랑 받지 못했던 순이가 이역만리 전쟁통인 베트남까지 남편을 찾아 나선다는 건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저 남편이기 때문에? 혹은 남편은 사랑을 주지 않았지만 자신은 깊이 사랑했기 때문에? 시어머니가 시켜서? 시집에서도 쫓겨나고 그렇다고 받아주지 않는 집 때문에 갈 데가 없어서? 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대해서 순이는 아무런 속시원한 말도 해주지 않습니다. 본래 순이는 그런 사람인가 봅니다. 말보다는 행동으로 뭔가를 말해주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반면 행동은 별로 영양가가 없으면서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건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남자들입니다. 정만(정진영)은 베트남만 가면 모든 게 다 잘될 거라 밴드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얘기했지만, 그것이 깨지는 건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그건 아마도 이 전쟁통에 젊은 장병들을 내보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 ‘남자들’은 모두 호언장담하며 일을 저지릅니다. 그런 상황에서 그 저지른 일을 수습하고 껴안는 건 오히려 순이입니다. 순이는 기꺼이 청소도 하고,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속살도 내보입니다.

전쟁으로 상징되는 남성성과 베트남의 자연으로 상징되는 여성성도 영화와 마찬가지의 구도가 아닐까요. 잘 알다시피 베트남 전쟁은 자연(여성성)과 인간(남성성)의 싸움의 성격이 강하죠. 미국이 전쟁에서 진 것은 자연에게 진 것입니다. 온몸을 잡아끄는 촘촘하게 자란 나무들과,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날씨와 지형들은 화력이 우세한 미국의 발목을 잡았던 것이죠. 정글에 불을 지르고, 고엽제를 뿌리고, 융단폭격을 해대면서 미국은 결국 자신들이 싸우고 있는 것이 자연이란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한편 자연은 베트남 사람들을 숨겨주었습니다. 영화 속에서 그려진 그들의 지하땅굴 생활 속에서의 평온함이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일 저지르는 남성성(전쟁, 남자)과 그것을 통째로 끌어안는 여성성(자연, 여성)은 이 영화를 통해 대비적으로 그려집니다. 수많은 전투로 피폐해진 정신의 남성들 속으로 뛰어든 한 여자의 육탄공세로 한 때의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 위문공연 장면들도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여성의 성적 대상화를 통해 이뤄졌다고 해도 그 본질은 남성성을 끌어안으며 장악해버리는 여성성의 힘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처음 남편이 질문했던 “니 사랑이 뭔지 아나?”하는 그 질문이 이역땅 전장의 한가운데 서 있는 순이에 의해 말이 아닌 행동으로 다시 남편에게 질문되어지는 그 장면입니다. 남편의 말만 번지르르한 사랑과, 순이의 행동으로 보여준 사랑은 극적인 대비를 이루면서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이것이 여성성의 시선으로 그리겠다면서 정작 남성적 시각을 가끔씩 드러내는 이 영화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입니다. 아마도 이 질문은 영화관을 나오는 많은 관객들에게도 되돌려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심지어 섹시한 차림으로 춤추고 노래하는 순이를 성적 대상으로 바라봤던 분들까지도 말이죠.


‘놈놈놈’의 남성성 vs ‘님은 먼곳에’의 여성성

여름시장에 등장한 ‘놈’과 ‘님’은 그간의 부진을 씻고 한국영화의 부활을 알릴 것인가. 지금 극장가를 달구고 있는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과 이준익 감독의 ‘님은 먼곳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미 ‘놈놈놈’은 개봉 첫 주에만 219만의 관객을 올리면서 벌써부터 올 최고 기록인 550만의 ‘추격자’를 따돌리는 것이 시간문제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이어 개봉한 ‘님은 먼곳에’ 역시 여름 극장가의 최대 관심작으로 떠오르며 매년 반복되어왔던 여름시장 쌍끌이 흥행을 기대하게 만들고 있다. 주목해야할 점은 이 두 작품이 모두 대작이지만 완전히 상반된 특징을 가진 영화들이란 점이다.

남성적인 ‘놈놈놈’, 스토리보다는 볼거리
마카로니 웨스턴과 우리나라에서 60년대 유행처럼 등장했던 만주 웨스턴을 오마주한 ‘놈놈놈’은 웨스턴이라는 장르가 그러하듯이 그 정서가 지극히 남성적이다. 광활한 만주 대륙을 횡단하는 열차와 그 열차를 가로막고 벌어지는 총격전 그리고 모래바람 속을 달리는 추격전이 압권인 ‘놈놈놈’은 철저히 남성적인 스타일을 구사한다. 인정사정 보지 않는 세 캐릭터들이 나누는 대화는 최소화되고 대신 살과 살이 부딪치고 총알이 날아다니는 액션은 김지운 감독 특유의 스타일리쉬한 카메라에 거칠면서도 강력하게 표현된다.

이 남성적인 영상 속에서 늘어지는 대사나 감정의 머뭇거림은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감정 라인을 바탕으로 삼아 끌어가는 스토리의 묘미는 이 영화 속에서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다.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시종일관 달리고 쏘고 칼을 던지는 화려한 볼거리를 즐기다 보면 어느새 잘 만들어진 오락영화 한 편을 본 느낌을 가질 것이다. 유난히 스토리에 매료되는 우리네 관객들을 배려한 좀더 아기자기한 드라마가 아쉽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식의 호쾌한 활극을 우리 영화에서 발견한다는 것 자체가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깊게 생각하지 말고 즐기는 마음으로 본다면 여기서 우리 영화의 새로운 길 하나를 발견하게 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여성적인 ‘님은 먼곳에’, 볼거리만큼 섬세한 감성
반면 이준익 감독의 ‘님은 먼곳에’는 월남전이라는 전쟁을 다루지만 지극히 시선은 여성적인 영화다. 월남에 파병된 남편을 찾아 베트남에 와서 밴드활동을 하게 되는 이야기를 순이(수애)의 시선으로 보여주는 이 영화는 전투 장면과 공연 장면 같은 볼거리도 풍성하지만, 그것보다 더 주목되는 것은 인물들의 섬세한 감정처리다. 바로 이 부분 때문에 이 영화의 스토리가 가진 비약은 그다지 단점으로 부각되지 않는다. 카메라는 외부적인 사건에 머물기보다는 그 사건을 맞이하는 인물의 감정에 몰입함으로써 감독이 말하려는 남성성(전쟁)과 여성성(모성)의 대결을 여성의 시점으로 극대화한다.

영화 속 대부분 남성들은 일을 저지르는 존재들이며, 순이로 대변되는 여성성은 늘 그 저지른 일을 덮어주고 감싸주는 존재로 그려진다. 시커먼 남자들이 떼로 모여서 치열한 전쟁을 치르는 장면은 따라서 이 순이의 시선으로 보면 때론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그것을 비판하기보다는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를 보듬듯 끌어안는 순이의 모습은 마치 총을 쏘고 불을 지르는 인간들을 그대로 품에 안는 베트남의 대자연과 오버랩 된다. 게다가 미군이든, 베트공이든, 또 한국군이든 순이의 노래에 순간 전쟁을 잊어버리는 장면들은 이 영화만이 가진 독특한 여성의 시선을 감지하게 한다. 스토리의 인과관계에 주목하기보다는 그 인물의 감성에 맞춘다면 영화 내내 깊은 감동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영화가 부딪치는 이 여름 시장 속에서 이처럼 기대작 두 편이 서로 상반된 특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실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놈’이 그 말처럼 남성적이듯, ‘님’ 역시 그 어감처럼 여성적이다. ‘놈’은 시종일관 부딪치고 싸우며, ‘님’은 아련한 그리움을 가슴속에 먹먹하게 흩뿌려놓는다. 뜨거운 여름, 호쾌한 액션과 깊은 감동이 있는 이 두 편의 영화 속으로 푹 빠져보는 건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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