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곳>에서 중간관리자 지현우의 역할

 

JTBC <송곳>은 노동운동을 소재로 한 드라마다. 외국계 유통체인점인 푸르미 마트에서 벌어지는 비정규직 정리해고에 맞서는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주인공으로 당사자라기보다는 관리자인 이수인 과장(지현우)을 주인공으로 내세우고 있다. 왜 비정규직 노동자가 아닌 정규직 그것도 사원도 아닌 관리자가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됐을까.

 


'송곳(사진출처:JTBC)'

사실 이 부분은 <송곳>에서 이수인 과장이 부신노동상담소를 찾아갔을 때 구고신(안내상) 소장이 그의 의도를 의심하는 장면에서 이미 거론됐던 이야기다. “이수인씨 관리자잖아요. 당신이 해고당한 것도 아닌데 왜 나서는 거요?” 그것이 구고신이 이수인 과장에게 던진 의구심이었다. 즉 자기 일에 나서는 것과 그저 나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나서는 건 다르다는 걸 구고신이 지적했던 것.

 

그렇다면 정작 <송곳>이라는 드라마는 왜 이수인을 주인공으로 세운 걸까. 그것은 드라마를 좀 더 객관화하려는 작가의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아무래도 해고노동자 당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면 드라마는 감정적으로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시청자 입장에서는 그들의 감정에 동일시하게 되고 그것은 드라마를 생각하게 하기 보다는 감정적으로 불을 지르는 방향으로 흐르게 만들 수 있다.

 

<송곳>은 해고노동자들의 힘겨운 삶을 다루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드라마다. 너무 깊게 빠져 들어가면 드라마가 지나치게 무거워질 수 있다. 물론 현실은 더 무거운 이야기다. 하지만 <송곳>이 추구하는 건 노동자들만 공감하는 노동자들만의 드라마가 아니다. 이것은 지금 이러한 현실을 당면하지 않은 보통사람들 또한 공감하기를 원하는 드라마다. 결국 달라지지 않는 시스템 안에서는 그런 현실이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수인 같은 앞뒤 꽉 막힌 듯한 캐릭터는 그래서 <송곳>이라는 드라마의 중요한 가이드 역할을 해준다. 즉 한 발 물러서 있지만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노동자들의 입장에 다가가는 인물. 그래서 그들의 입장을 객관적이면서도 타인의 관점에서 공감하게 해주는 인물이 바로 이수인이다. 노동지부장 선거에서 지부장이 이수인이 아닌 푸르미의 직원인 주강민(현우)이 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실제로 길거리에 천막을 치고 있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구고신이 항상 얘기하듯 남일이다. 심지어 푸르미의 노동자들도 자신에게 해고 통지 같은 부당한 일이 벌어지기 전까지는 노동조합에 가입하려 들지 않는다. 결국 내 앞에 떨어진 일 앞에서야 그것이 내 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수인은 그런 점에서 보면 독특한 캐릭터다. 오지랖이 넓다기보다는 무언가 부당한 일을 하는 자신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그런 인물. <송곳>이라는 제목에 딱 어울리는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송곳>이 지목하고 있는 건 결국 현실에서 싸워야 하는 노동자들의 각성을 위한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직접 관련은 없지만 부당한 것을 부당하다 말할 수 있는 이 시대의 잠재적 송곳들을 일깨우는 이야기다. 이수인이라는 중간관리자의 시선을 통해.



<송곳>, 오물을 뒤집어쓴 뒤의 역설적 자유

 

돌아올 웃음이 없다는 게 명확해졌으니 웃어줄 이유가 없어졌다.’ 왕따가 되어버린 푸르미 마트의 이수인(지현우) 과장은 더 이상 갸스통(다니엘) 점장으로부터 미소 띤 칭찬을 받지 못하게 됐다. 직원들을 해고하라는 명령에 불복하면서다. 하지만 점장은 물론이고 동료 과장들도 그를 왕따로 만들어버리자 그는 오히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독자 노선을 가는 길을 선택했다.

 


'송곳(사진출처:tvN)'

보답 받을 호의가 없다는 걸 아니 애써 호의를 보일 필요도 없다.’ 그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정민철(김희원) 부장이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그를 괴롭혀도 그는 더 이상 괴롭지 않게 됐다. 애초에 호의를 이제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면서 아예 그런 호의 자체를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JTBC 드라마 <송곳>에서는 이 역전된 상황을 흙탕물 속에서 뒹굴며 훈련을 받던 군대 이야기로 설명한다. 본격적인 훈련에 들어가기 전에 흙탕물을 뒤집어쓰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오히려 편안해지는 역설. 철조망에 손이 조금 긁히던 흙바닥에서 뒹굴던 그리 신경을 쓰지 않게 되더라는 이야기. 드라마는 이 상황을 오물을 뒤집어쓴 뒤에 찾아오는 역설적 자유라고 표현했다.

 

이 부분은 이 드라마가 노동운동이라는 소재를 가져와서도 어떻게 그토록 흥미진진하고 때로는 속 시원한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즉 노동운동의 이야기는 고 전태열 열사의 그것처럼 사뭇 진지하고 심지어는 비장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송곳>은 그 진지함을 유지하면서도 그렇다고 너무 무겁게만 노동운동을 다루지는 않는다. 그 안에 드라마틱한 반전과 소소한 성취들을 집어넣음으로써 그 소재에 대한 막연한 편견과 선입견을 넘어서게 해준다는 것.

 

그 스토리텔링의 핵심은 반전과 역설이다. 이수인이라는 캐릭터는 우리가 노동운동하면 떠올리는 그런 인물과 사뭇 다르다. 그는 한 마디로 말하면 바른생활 사나이. 물론 성인군자라는 뜻이 아니다. 그도 역시 현실에 타협하고픈 욕망을 갖지만 그래도 마지막에는 양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못할 뿐이다. 보통의 그런 바른생활의 인물이라면 잘 살아야 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는 학교, 군대, 사회 어디든 가는 곳마다 걸림돌같은 존재다.

 

이것은 캐릭터의 역설이다. 바른생활 사나이가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걸림돌이 되고, 그런 인물을 송곳같은 존재로 만들어버리는 현실. 결국은 현실이 비뚤어졌다는 역설이다. 그래서 마냥 당할 것만 같지만 웬걸? 의외로 이 바른생활 사나이가 승부욕을 보인다. 그것은 그래서 또다시 왕따의 역설로 나아간다. 왕따가 되니 오히려 저들의 요구나 기대를 따를 필요가 없어진다는 것. 그래서 그들의 부당함에 보다 당당하게 맞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수인을 돕는 구고신(안내상) 부진 노동상담소 소장도 우리가 노동운동하면 떠올리는 그런 투사의 이미지가 아니다. 거리에 노동자들이 나와 사측과 대치상황을 보여주지만 그 장소로 이수인을 데려온 구고신은 그것이 좋은 현장교육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노동쟁의나 노동운동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일상이다. 어디든 노동은 있고 노동자와 사측이 있기 마련이라면 노동분쟁도 일어난다.

 

그래서 그는 노동운동에 대한 교육을 서구에서는 어린 나이의 학생들에게 정규 과목으로 가르치고 있다는 걸 역설한다. 그들에게는 일상이 우리에게는 마치 송곳같은 일이 되어있다는 것. 구고신이라는 캐릭터는 그래서 이 노동운동에 대해 지나치게 비장함에 빠져들지 않게 해주는 존재가 된다.

 

사실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상황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해준다. 즉 노동쟁의를 무언가 하지 말아야 할 것처럼 금기시하는 현실에서는 마치 사측의 호의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왕따가 되어버리지만, 거꾸로 분쟁이 있을 때 그러한 노동운동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실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이수인이라는 캐릭터가 보여주는 왕따의 역설은 그 관점을 바꿔주는 것만으로도 그래서 시청자들에게 통쾌함을 선사하는 면이 있다



<인터스텔라> 광풍에 가려진 <카트>의 현실

 

영화 <카트> 상영관이 팍 죽었어요. <인터스텔라> 흥행 광풍에 직격탄을 맞고 휘청이다가 빌빌거리는 중입니다. 제작자로서 뼈가 아프네요. 가늘고 길게라도 오래 가고 싶습니다. 함께 사는 세상을 향해 절박한 맘으로 만든 영화, 많이 봐주세요. 힘이 돼주세요.”

 

'카트(사진출처:명필름)'

명필름 심재명 대표가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에는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마치 <카트>라는 영화의 처지가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소외된 노동자의 처지처럼 다가왔다. 자신들이 원하는 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 달라는 것이라는 영화 속 주인공의 이야기는 지금 우주 스펙터클의 광풍 속에서 들리지 않는 메아리로 울려 퍼지고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는 감독의 이름처럼(?) 놀라운 작품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토록 우주로 날아가 심지어 차원을 뛰어넘는 새로운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영화가 있었던가. 심지어 작은 스크린에서 본 관객들은 영화를 제대로 본 게 아니라며 아이맥스 영화관에 줄을 서는 기현상이 벌어질 정도다. 이 정도면 스펙터클의 새 장을 연 것이나 마찬가지다.

 

놀란 감독이 대단한 것은 이 우주적인 스펙터클을 다시 가족애와 같은 인간적인 끈으로 묶어낸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안에 들어 있는 복잡한 과학 지식 따위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되지 않는다. 우주 반대편에서 모니터 하나를 통해 저 편에서 날아온 자식의 메시지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의 모습.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 복잡하고 신비한 우주의 스펙터클 속에서도 우리는 길을 잃지 않게 된다.

 

하지만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당장 처한 현실만큼 중요하다 여겨지지는 않는다. <카트>의 제작자 심재명 대표가 최근 상영관 축소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 것은 그래서다. 비정규직의 문제. 어찌 보면 지나는 길에 누구나 한 번쯤을 봤을 지도 모르나 내 현실이 더 급박해 서둘러 발길을 돌렸던 그네들의 이야기.

 

<카트>는 그들의 이야기가 사실은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걸 들려주는 영화다. 대단한 주장을 하는 영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념적인 영화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우리 옆집 아줌마가 어느 날 갑자기 겪게 된 이야기를 어떤 편향 없이 담담히 보여주는 그런 영화. 그래서 그것이 누구나의 코앞에 닥칠 현실이라는 걸 알려주는 영화.

 

물론 영화가 어떤 당위에 의해 봐야 하는 그런 것일 수는 없다. 하지만 <카트>는 충분히 재미있는 영화이고 또 의미도 있는 영화다. 무엇보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드러내고, 그걸 통한 각성을 일깨워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 영화가 블록버스터들의 광풍 속에 가려져 많은 이들에게 보여질 기회조차 조금씩 박탈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는 이야기다.

 

우주의 스펙터클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의 현실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스펙터클이 주는 잠시 간의 마취적인 매혹이 나쁜 건 아니지만, 그것이 자칫 가려버릴 우리네 현실은 저 여전히 존재하는 비정규직들의 절규조차 들리지 않게 만들 수도 있다. 듣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가 될 그 현실을.

 

최인선 감독이 말하는 <우리동네 예체능>

 

덕장이라는 표현이 아마도 가장 적절한 단어가 아닐까. 현재 <우리동네 예체능>의 농구팀을 이끌고 있는 최인선 감독은 유독 을 강조했다. 한두 명 잘 하는 친구들이 중요한 게 아니라 팀 전체가 다 같이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경기를 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 “물론 이기려는 경기를 해야 하지만 너무 거기에 집착하다보면 더 큰 걸 놓치게 되요. 한두 번 당장 이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니죠.” 즉 모두가 자기 역할을 하게 되고 만족스런 경기를 해냈을 때 승리는 따라오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우리동네 예체능(사진출처:KBS)'

실제로 이번 <우리동네 예체능>의 농구팀은 실력 편차가 크다. 줄리엔 강이나 서지석, 김혁이 에이스 중에 에이스라면, 부상으로 주춤한 최강창민이나 아예 농구공을 잡아 본 경험이 별로 없던 강호동은 말 그대로 구멍이다. 아마추어의 강호인 창원팀을 만나 1쿼터에 무려 170이라는 스코어를 내줬을 때 최인선 감독은 골고루 선수들을 뛰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런 얘기를 남겼다. “가비지타임이라 그러죠. 이미 패했어요. 그걸 그냥 버리면 말 그대로 쓰레기가 되는 거죠....기량이 약하다고 해서 그걸 무시하면 농구 경기가 짝짝이가 되요.”

 

기량이 약한 선수를 무시하면 팀은 균형을 잃는다는 것. 이것은 최인선 감독이 말하는 팀스포츠 농구에 대한 철학이다. 그가 말하듯 농구는 기록만 갖고 선수를 평가했을 때 큰 오차가 생길 수밖에 없다. 기록 바깥에서 열심히 뛰어주는 선수들이 있기 때문에 기록을 내는 선수들도 있다는 것이다. 최인선 감독의 이 말은 농구라는 스포츠에만 국한되지 않는 울림을 준다. 우리 사회를 하나의 팀으로 생각해보라. 세계 몇 위의 경제를 수치적으로 자랑하며 몇몇 대기업들의 위상을 말하곤 하지만, 그 뒤에 가려진 수많은 노동자들이 흘린 땀의 가치를 우리사회는 얼마나 배려하고 있는가.

 

최인선 감독의 농구 철학이 단지 농구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는 또 다른 대목은 그가 강조하는 로컬에 대한 애정이다. 즉 그는 과거 농구대잔치가 농구 붐을 만들었던 이유가 우리 식의 농구와 우리 식의 팬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미식축구가 미국에서만 하지 다른 나라에서는 안하잖아요. 하지만 미국에서는 인기가 있다는 겁니다. 즉 농구도 꼭 해외랑 겨루려고 할 게 아니라 우리 식으로 재밌게 하면 되는 거죠.” 해외 용병들이 들어오면서 몇몇 용병들의 기량에 따라 성패가 좌지우지되면서 다른 선수들이 전부 가려졌다고도 했다. “그런 용병들은 사실은 팀을 죽이는 결과를 가져오죠.”

 

최인선 감독이 말하는 로컬은 90년대 우리네 사회가 온통 글로벌로 들썩거리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세계화가 화두였던 그 시절, 결국 우리가 놓쳤던 것은 로컬이 가진 가능성들이 아니었던가. 결국 세계화의 끝자락에 IMF라는 철퇴를 맞았던 것처럼 스포츠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최인선 감독은 그래서 지금이라도 우리 식의 농구 문화를 새롭게 만들어가야 한다고 강변했다. 실로 우리가 굳이 NBA를 따라갈 필요는 없을 게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슬램덩크가 아니라 어쩌면 슛도사슛쟁이가 아닐까.

 

최인선 감독의 이 로컬은 그래서 <우리동네 예체능>이라는 프로그램의 취지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생각이다. 생활체육이 살아야 스포츠가 살아난다고 말하는 그는 <우리동네 예체능>이 보여주는 건강한 로컬 스포츠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실로 스포츠라고 하면 늘 거대한 국가 스포츠로만 생각하던 우리에게 이 프로그램은 우리동네라는 일상 속의 스포츠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국가 스포츠가 오로지 승패와 메달 수와 순위에만 집착한다면 우리동네의 스포츠는 함께 하는 팀워크나 그를 통한 배려 같은 스포츠 이상의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어쩌면 진정한 스포츠 정신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게다.

 

최인선 감독의 리더십은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한 하나의 대안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안녕들 하십니까운동이 보여주고 있는 안녕하지 못한 사회는 어쩌면 팀 전체를 생각하지 않는 잘못된 팀 운용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오로지 선진국에 대한 열등감으로 국가경제 몇 위의 순위에만 집착하면서 정작 로컬을 챙기지 못하는 잘못된 국가 운용에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지금 절실한 건 어쩌면 최인선 감독 같은 덕장의 리더십인지도 모르겠다.

<직장의 신>, 계약직의 비애 뒤집는 블랙 코미디

 

<직장의 신>은 1997년 버블경제의 허상이 드러나며 IMF 구제금융으로 인해 평생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비정규직, 일명 계약직이라는 신인류의 탄생(?)을 보여주는 짤막한 다큐 영상으로 시작한다. 똑같이 일해도 월급은 정규직에 반에 불과하고, 언제 잘릴 지 모르는 불안정한 고용 형태인 계약직의 문제는 삼류대를 나와 3개월 계약직으로 근무하는 정주리(정유미) 같은 인물에게는 우울한 현실이다.

 

'직장의 신'(사진출처:KBS)

어떻게든 정규직의 관문을 넘어서기 위해 계약직이면서도 밤을 새워 문서를 정리하고 회사에서 요구하는 것은 뭐든 하려는 정주리라는 인물의 처절함은 이 땅의 비정규직들이 매일 겪는 비애일 것이다. <직장의 신>은 이 지독한 현실을 밑그림으로 그려 놓고 그 위에 미스 김(김혜수)이라는 판타지를 세워놓는다. 우울한 현실을 블랙코미디로 확 뒤집는 캐릭터, 바로 미스 김이다.

 

점심시간과 퇴근시간이 되면 눈치 보기 마련인 회사에서 칼같이 업무를 접고 일어서는 미스 김이라는 캐릭터는 계약직이어서 당할 수 있는 불이익을 계약직이어서 누릴 수 있는 이익으로 바꾸는 통쾌함을 선사한다. “선배님 점심 같이 드실래요?”하는 말에 “아니오.”라고 선을 긋는 그녀는 자신이 “선배님”이 아니라 “미스 김”이라고 정정하기까지 한다. 미스 김의 이 선 긋기는 이른바 소속감을 내세우고, 심지어 가족애 운운하며 직원들을 혹사시키는 회사라는 조직의 특성을 무력화시키는 방식이기도 하다.

 

사실은 노동시간 그 자체가 돈으로 환산되는 곳이 회사라는 조직이지만 회사는 이것을 ‘정’이나 ‘애사심’ 같은 애매모호한 말로 포장해 직원들에게 더 많은 노동시간을 부여하곤 한다. 미스 김이 이른바 ‘미스 김 사용설명서’의 규정을 내세우고 노동시간 이외에 하는 일에는 가차 없이 ‘시간 외 수당’을 요구하는 건 그래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면서도 그렇지 못한 현실 때문에 통쾌한 판타지를 제공한다.

 

퇴근 시간 즈음해 갑자기 떨어지는 회식에 한 번쯤 스트레스를 받아본 직장인이라면 당당히 퇴근하며 이렇게 얘기하는 미스 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공감을 느꼈을 게다. “그건 소속이 있는 직원에게만 해당하는 경우지요. 무소속인 저의 경우, 불필요한 친목과 아부와 음주로, 몸 버리고 간 버리고 시간 버리는 자살테러 같은 회식을 이행해야 할 이유가 하등, 없습니다."

 

미스 김이라는 존재가 계약직으로 전락한 우리네 노동자들의 슬픈 현실을 뒤집는 캐릭터라면, 장규직(오지호)은 그 이름에서도 풍겨져 나오듯이 정규직이 마치 벼슬이나 되는 양 계약직들에게 마구 권력을 휘두르는 캐릭터다. 때로는 성희롱에 가까운 말로, 계약직을 비하하는 말로 사사건건 미스 김과 대립구도를 갖는 장규직은 희화화되어 그려지지만 우리 고용시장의 아픈 현실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누구나 한 때는 자기가 크리스마스 트리인 줄 알 때가 있다. 하지만 곧 자기는 그 트리를 밝히던 수많은 전구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진실을 알게 된다.” 정주리의 반복되는 이 내레이션은 그래서 씁쓸함을 남긴다. 노동자들은 어쩌면 크리스마스 트리인 것처럼 포장되지만 실제로는 수명이 다하면 가차 없이 교체되는 수많은 전구 중 하나로 취급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대한은행 화재. 계약직 여 노조원 1명 사망.’ 이 짤막한 기사 한 줄의 현장 속에 미스 김이 망연자실 서 있었던 적이 있다는 사실은 왜 이 인물이 이토록 조직에 정을 주지 않게 되었는가의 단서가 된다. “그리고 머지않아 더 중요한 진실을 알게 된다. 그 하찮은 전구에도 급이 있다는 것을.” 정주리의 이어지는 내레이션은 그래서 이 미스 김이라는 미스테리한 인물의 변화를 바라보면서, 정주리 같은 정규직에 목매는 계약직의 현실 인식을 이 드라마가 그리려 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은 그저 하찮은 전구가 아니라는 것을.

김기덕의 <피에타>가 보여주려는 것

 

“돈 받아오라고 했지. 병신 만들라고 했어? 인간백정 같은 놈...” 김기덕 감독의 새 영화 <피에타>에서 잔혹한 방법으로 돈을 뜯어내며 살아가는 강도(이정진)에게 그의 고용주(?)는 이렇게 말한다. 고용주의 말대로 강도는 빌려간 돈을 받아내기 위해(이자가 무려 열배에 가깝지만) 청계천 공장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이들을 보험에 들게 하고는 손목을 절단하거나 다리를 부러뜨리는 식으로 돈을 갚게 한다. 말 그대로 인간백정 저리 가라 하는 인물이다.

 

'피에타'(사진출처:김기덕필름)

<피에타>가 이 인간백정을 내세운 것은 돈이라는 기괴한 장치가 만들어내는 자본의 폭력과 추악함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고용주는 강도에게 돈을 받아오라는 지시를 내렸을 뿐,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는 자기 알 바가 아니다. 돈이라는 장치 뒤에 숨어 있기 때문에, 강도를 시켜서 자신이 저지른 죄는 숨겨지고 체감되지 않는다. 즉 돈을 받아내기 위해 병신을 만든 건 강도의 짓이고,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로 여기는 것.

 

이 짧은 장면은 자본이 만들어내고 있는 세상의 끔찍한 풍경을 간단명료하게 보여준다. 자본의 세상에서 모든 것을 치환시켜주는 돈이란 괴물은 모든 단면들을 말끔하게 만들어버리는 속성이 있다. 영화 속 자살을 결심한 한 사내가 세상이 내려다보이는 건물 계단에서 이제 사라져버릴 청계천에 대해 하는 이야기는 그저 죽기 직전의 넋두리가 아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었던 그 공장들은 자본에 의해 말끔하게 밀어내지고 저 멀리 세워진 빌딩들이 다시 그 자리를 차지해버릴 것이다. 마치 한 노동자의 손목이 말끔하게 잘려져 버리는 것처럼.

 

그 땅에서 살아온 노동자들은 한 때 과도하고도 조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제 손목을 자본의 제물로 바치곤 했다. 지금의 자본의 풍경이 세워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손 무덤들이 세워졌던가. 하지만 이 풍경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이제 누군가는 돈을 갚지 못해 손목을 대신 저당 잡히고, 또 어떤 누군가는 태어나는 자식 앞에서 해줄 것 하나 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스스로 손목을 자른다. 그것으로 받아낼 수 있는 보험금으로나마 자식에게 이 손 무덤의 노동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까닭이다.

 

결국 이 말도 안되는 폭력을 가능하게 하고, 심지어 죄의식조차 없이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돈이다. 저 강도의 고용주가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돈 뒤에 숨어서 “그저 돈을 받아오라고 한 것”이라고 합리화한다. 그것도 자신이 빌려준 돈을. 이것은 강도가 그 잔혹한 짓을 저지르면서도 자신을 합리화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는 돈을 빌리고도 갚지 않으려고 한 그들이 나쁜 놈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돈이 모든 것의 가치척도가 되는 세상의 풍경이다. 돈을 빌려준 자는 받는 것이 정당하고 빌린 자는 갚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그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은 모든 게 정당화된다.

 

돈의 논리가 지상가치가 된 세상에서는 죽음이 만연하지만 그 죽음은 돈 뒤에 가려진다. 자본이 자연을 인공으로 채울 때, 생명은 죽어나가기 마련이 아닌가. 나무들이 뽑혀져 나간 후에야 그 위에 건물이 세워진다. 그렇다면 그 나무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안에 살아가던 생명들은.

 

<피에타>는 원경에서 보면 스카이라인과 랜드마크로 웅장하게 보이는 그 말끔한 도시의 빌딩이 주는 안온함을 들춰내고, 근경으로 다가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자본의 폭력에 카메라를 들이대는 영화다. 말끔한 도심의 이면에 놓여진 쓰레기더미와 비닐하우스촌, 방치되고 버려지는 공장의 기계들, 그 기계에 기대 살아가던 이들이 이제 그 기계에 제 살을 집어넣어야 살 수 있고, 급기야 그 기계에 몸을 걸어 죽음을 택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영화다.

 

<피에타>는 바로 이 자본이 저지르는 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또 한 축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것은 모성에 대한 이야기다. 마치 구원처럼 다가오는 모성은 과연 이 폭력을 어떻게 끌어안을 것인가. 그래서 다른 관점으로 보면 이 영화는 폭력으로 대변되는 남자와 모성으로 대변되는 여성의 대결과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양극화의 끝단이 만들어낸 자본의 살풍경이 남자와 여자로 표상되는 폭력과 모성의 대결로 다뤄진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피에타>는 우리 모두가 돈이라는 자본의 장치에 얽매여 살아가면서 보지 못했던(어쩌면 보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거기에는 죄의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돈 저편의 세계를 불편한 진실로 우리 눈앞에 펼쳐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이 저예산 영화가 자본 앞에 처한 문제이기도 할 것이다. 자본에 의해 말끔하게 채워지는 멀티플렉스들 그 이면에 놓여진 작은 영화들의 절규. 영화 속에서 자살을 택한 한 젊은 청년이 일기장에 마구 거칠게 적어놓은 것처럼, 김기덕 감독은 우리에게 질문한다. 돈이란 무엇인가. 도대체 넌 뭐냐.


이범수와 안재욱, 그 카리스마의 정체

'샐러리맨 초한지'(사진출처:SBS)

'샐러리맨 초한지'에는 유방(이범수)이 세운 팽성실업이란 회사가 등장한다. 팽성실업의 '팽성(烹成)'은 '팽 당한 사람들이 성공을 이룬다'는 뜻이다. 천하그룹의 해고 노동자들을 모아 세운 이 회사의 출범식에서 유방은 두 가지를 약속한다. "딱 두 가지만 여러분께 약속드리겠어요. 여러분들이 열심히 일해가지고 수익이 많이 발생하면요. 그만큼 여러분들하고 수익을 많이 나눠가질 거여요. 그리고 또 하나 형사법에 저촉되는 짓만 안하시면요 여러분들이 절대 부당하게 해고당하는 일 없을 거예요."

아무리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대사라고는 해도 가슴 한 구석이 뭉클해지는 건, 정반대의 현실 속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일 게다. "저도 대기업에 다녀봤지만 우리나라에 이윤보다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기는 회사가 몇이나 돼요. 거의 없어요. 하지만 우리 팽성실업은요. 이윤보다 사람이 우선예요. 진짜예요. 우리 회사에서 가장 큰 재산이 뭔지 아세요? 뭐 같아요? 기술요? 아녜요. 기술 개발하면 돼요. 제품요? 아녜요. 제품 만들면 되는 거예요. 바로 여러분들이에요. 여러분들이 존재하니까 기술도 개발하고 제품도 만드는 거예요. 우리 회사에서 가장 큰 재산은 바로 여러분들예요."

사장이 이러니 직원들도 다르다. 회사가 투자를 받지 못해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봉급을 받지 않겠다"고 한다. 물론 투자 유치에 성공한 유방은 그 고마운 마음만 받지만, 이런 노사 간의 관계는 이제 심지어 판타지로 여겨지는 현실이다. 그만큼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일자리에 대한 문제는 대중 정서의 가장 큰 밑바닥을 구성한다.

시대극으로서 전혀 다른 환경에 놓여진 것 같지만, '빛과 그림자'라는 드라마에서도 이런 대중 정서의 단면들이 묻어난다. 빛나라 쇼단의 단원들에게 가장 첨예한 문제는 스타가 되거나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당장 설 무대, 즉 생계가 보장된다면 뭐든 할 정도로 이들에게 일자리는 중요하다. 강기태(안재욱)가 빛나라 쇼단의 새로운 단장이 되어 이들에게 보장하는 것은 다름 아닌 일자리다. 그는 단원들의 무대를 확보하기 위해 심지어 캬바레에서 춤을 추기도 한다.

공교롭게도 '샐러리맨 초한지'의 유방과 '빛과 그림자'의 강기태가 주인공으로서의 매력을 유지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일자리' 덕분이다. 강기태는 어떤 식으로든 단원들이 일을 할 수 있게 뭐든 협박에도 굴하지 않는 카리스마를 보여주고, 유방은 좀 더 민주적인 방식으로 일자리를 보전해주는 샐러리맨의 판타지를 채워주는 인물이다.

그런데 이 두 드라마의 판타지와 인물들의 카리스마를 보면서도 동시에 생기는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다. 그것은 이 드라마 속 노동자들의 요구가 가진 소소함 때문이다. 도대체 이들이 뭘 그렇게 대단한 걸 요구했단 말인가. 그저 생계를 위한 일자리가 아닌가. 물론 드라마지만 이 지극히 기본적이고 또 당연한 것들이 하나의 판타지가 되는 것은 그만큼 작금의 현실이 상식적이지 않다는 반증이 아닐는지. 왜 우리네 현실은 기초적인 것까지 판타지로 만드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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