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존의 눈물', 김진만PD와는 각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예전에 'MBC스페셜'에서 '최민수, 죄민수... 그리고 소문'이라는 다큐를 찍을 때, 인터뷰를 했던 적이 있었죠. 그 때 김PD는 죄없는 최민수가 죄인이 되어버린 이 곡해된 사실을 무척이나 안타까워 하면서 저와 한참 얘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그의 얼굴에서 저는 어떤 열정과 진지함을 읽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 진심이 읽혀졌던지 최민수는 이 다큐 프로그램을 통해서 오해를 풀 수가 있었죠.
그 후 다시 김진만PD를 만난 건, '휴먼 다큐 사랑'을 통해서였습니다. MBC스페셜의 윤미현CP를 만나 인터뷰를 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익숙한 얼굴이 인사를 했습니다. 검게 탄 전형적인 야전형 얼굴에 서글서글하게 웃는 미소. 그는 이 코너에서 '로봇다리 세진이'를 맡아 연출했었죠. 그 때 처음 김PD가 아마존에 간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윤미현CP는 너무 김PD를 오지로 굴리는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있다고 하더군요. 정작 김PD는 어떤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흥분되어 보였지만 말입니다.
그 때 사실 저는 그 의미를 정확히 잘 몰랐습니다. 아마존에서 휴먼 다큐라니... 그리고 다시 김PD를 만난 건, 아마존에서 돌아와 후반 편집을 할 때였습니다. MBC에 갔다가 거기 '아마존의 눈물'이라는 거대한 플래카드를 보고는 문득 생각이 나서 전화를 했죠. 잠깐 MBC사옥 휴게실에서 본 김PD는 사실 사람 몰골이 아니었습니다. 그잖아도 야전으로 늘 검게 탄 얼굴이 더 검어 보였고, 그럴 수록 그의 사람 좋은 웃음은 더 시려 보였습니다.
그에게 이런 저런 아마존에서의 촬영 상황을 들었습니다. 프로그램을 통해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사실 김PD는 고생한 만큼의 성과가 있을 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아마존에서의 촬영 기간이 한정되어 있어서 더 정교하게 촬영하기가 어려웠고, 또 그렇게 촬영한 분량 중에서 많은 양을 사고로 잃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 이 진심이 분명 영상에도 녹아나겠구나 생각했죠. 그걸 그 사람 좋은 웃음에서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존의 눈물'(사진출처:MBC)
다큐멘터리는 사실 시청률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이유로 프라임 타임 밖으로 밀려나는 게 요즘 현실이었죠. 하지만 저는 언젠가 다큐멘터리가 일을 낼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이런 현장에서의 진심을 담은 카메라들이 준 확신이었죠. 점점 진정성을 요구하는 대중들에게 그 마음이 전해지지 않을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역시..! 였습니다. '아마존의 눈물'에는 그 아마존이 파괴되어가는 실상이 담겨져 있지만 그것보다 제가 본 것은 그걸 찍는 사람들의 진심이었습니다. 분명 그 진심은 통하고 있었습니다. '아마존에서 휴먼 다큐를 찍는다'는 말을 그제서야 이해했습니다. 그 원주민들 가까이로 다가간다는 것, 그리고 그들과 호흡하며 생활하며 사실을 그대로 찍어낸다는 것, 그것은 어쩌면 원주민들과 도시인들 사이의 벽을 무너뜨리고 한 똑같은 인간으로서 똑같은 마음을 담는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가 이제는 남극으로 또 간답니다. 거기서 '눈물 3부작'의 마지막, '남극의 눈물'을 찍기 위해서죠. 이제 알것도 같습니다. 그 '눈물 3부작'은 우리 지구가 흘리는 눈물을 기록하기 위해 떠나간, 그 진심을 담은 사람들의 눈물 3부작이기도 하다는 것을요. 검게 탄 얼굴에 시린 하얀 웃음을 짓고 다시 남극을 담아올 김진만PD가 벌써부터 기다려지는군요.
MBC의 명품 다큐 '아마존의 눈물'이 마무리 되었어요. 적지 않은 시간동안 공을 들여가면서 만들었던 다큐멘터리이기에 그들이 보여준 화면 하나만으로도 신기함을 느끼게 만들었고, 단순히 신기함을 떠나 우리가 처하고 있는 현실이나 사람들의 이기심이 얼마나 추악하게 세상을 바꾸어가고 있는지 등을 볼 수 있었던 프로그램이라고 생각을 해요. 사실 다큐멘터리라는 것은 잔잔한 재미라고 해야 할까요? 암튼 그런 재미를 던져주는 것 같아요. 예능 프로그램이나 드라마..
놀라웠다. 2008년, 점점 사라져가는 북극의 모습을 깨끗한 화면에 담아 우리나라 4800만 국민들의 탄성을 자아냈던 <북극의 눈물>을 보았을 때, 나는 그저 놀라웠다. 하얗다는 말로도 모두 표현할 수 없는 냉기와,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을 동시에 지닌 북극의 땅.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매우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생존을 위한 사냥은 때론 너무 가혹하게도 보였고, 문명의 탈을 쓴 나는 겉으론 그들을 이해한다고 큰 소리 떵떵치면서 속으론..
아마존의 눈물이 대작이라고 주변에서 아바타 버금가게 이야길 하니 안 볼 수도 없고, 하나tv에 당연히 있는 줄 알고 틀어보니, 이런 아마존이 배경으로 나오는 거는 하나 있는네 ...쩝 아니고...어디서 아마존의 눈물을 무료로 본다지 MBC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스페셜이라서, MBC 들어가보니, 아마존의 눈물에 대한 시청자들의 반응이 정말 뜨겁더군요. 교육적으로 완성도가 상당히 높은가 봅니다. 이런 좋은 다큐멘타리를 왜 못 본 거야...개탄해봅니다 ;;..
무릎팍도사에서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나왔어요. 그들은 다름아닌 '아마존의 눈물'을 만든 제작진이었어요. 김진만 PD, 김현철 PD, 송인혁 촬영감독 이들 외에도 고생한 이들이 많았지만, 이들 3명이 대표로 나와서 '아마존의 눈물'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들려주었어요. 그들은 '아마존에 또 가라고 하는데 어떻하냐?'는 고민을 가지고 무릎팍도사를 찾아주었어요. 사실 그 고민이 너무도 공감이 갈 수 밖에 없어요. 250일 동안 고생고생하며 명품 다큐..
"울지 마세요. 울지 마세요. 강하게 살아야죠." '현장르포 동행-엄마 보고 싶어'편의 열 아홉 살 봉관이는 울고 있는 엄마에게 그렇게 말했다. 간경화로 세상을 떠난 아빠 대신 동생들을 데리고 살아가던 봉관이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엄마는 그를 반겨주지 않았다. 심한 우울증으로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엄마는 자식들에게까지 짐이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엄마 마음이 다를까. 입으로는 독하게도 "돌아가라", "다시는 오지 마라"는 말을 하면서도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그런 엄마를 다독이는 건 오히려 봉관이었다.
엄마를 찾아왔는데 "왜 왔냐"는 물음에 말문이 막혔을 봉관이. 하지만 그는 애써 눈물을 참으며 "그래도 낳아주신 엄마잖아. 한번은 봐야지."하고 말했다. 그렇게 밀쳐내던 엄마는 아마도 자신이 하는 이 독한 짓에 욕이라도 듣고 싶었었나 보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봐."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의외였다. "안아줘." 이 말은 어찌 보면 상처를 주었을 엄마를 그래도 한없이 보듬는 아이 같지 않은 봉관이의 마음이 담겨진 것이면서 동시에, 이 엄마 앞에서 꿋꿋이 서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봉관이가 역시 열아홉 살의 아이라는 걸 말해주는 것이었다.
거듭 한번만 안아 달라고 하는 봉관이에게 결국 엄마는 "그럴 자격 없다. 난 엄마도 아니야"하고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러자 봉관이가 불쑥 다가가 엄마를 안아주었다. 그리고 그의 위로의 말이 이어졌다. "엄마 원망 안 해. 힘들게 사는 거 아니까. 그냥 엄마 보러 왔어. 엄마가 아무리 독하게 말해도 잘 해주신 거 아니까 괜찮아." 그런 아들에게 엄마는 끝내 참고 참았던 입을 열었다. "우리 아들 정말 잘 컸다. 해준 게 아무 것도 없는데." 90도로 고개 숙여 다시는 못 볼 마지막 인사를 하고는 돌아서는 봉관이를 보며 엄마는 혼자 쪼그려 앉아 눈물을 흘렸다. 그 엄마의 귓전으로 마치 천상의 목소리라도 되는 듯, 봉관이의 외침이 들여왔다. "엄마! 고마워!"
이 엄마와 아들 봉관이의 짧은 만남이 주는 감동을 어떤 드라마가 대신해줄 수 있을까. 이것은 바로 휴먼 다큐멘터리 '현장르포 동행'이 세상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이다. 온통 화려하고 편리한 것들만 넘쳐나는 것 같은 세상 속에서 '현장르포 동행'은 그 사각지대에 가려진 무채색의 진실을 담아낸다. 그 속에는 가난에 휘둘려 힘겨운 세상에 내쳐진, 그러나 그 세파 속에서도 함께 살아갈 이들이 있어 하루하루를 버텨내며 희망을 놓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카메라가 비춰주지 않았다면 있는 것조차 몰랐을 그네들의 삶. 그러니 이 동행을 자처한 것은 먼저 저 따뜻해질 수 있는 카메라다.
그것은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고, 그 어려움을 함께 바라보고, 그 힘겨움에 함께 울어주는 카메라가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지는 동행이다. TV가 화려한 세상의 모습들만을 비춰주고, 마치 세상은 그렇게 빛으로만 가득하다고 외칠 때, 이 프로그램은 마치 섬처럼 그 자리에 서서 그 그늘을 바라본다. 아무도 봐주지 않는 그 삶을 카메라가 바라보고, 그 카메라를 통해 우리들이 그 삶을 바라보는 카메라와 동행하면서 세상은 조금 따뜻해진다. 힘겨웠던 그들이 세상과 조금씩 소통하고 함께 살아가는 모습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것은 이 카메라가 바라본 그 따뜻한 시선이 우리 모두에게도 그대로 전염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그늘이 왜 만들어졌고, 또 누구의 잘못인가를 따지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현장르포 동행'이 바라보는 시선은 그런 논리적이고 설득적인 눈이 아니다. 대신 '현장르포 동행'은 세상의 그늘에 있는 그들 역시 우리와 함께 동행해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을 감동으로서 우리에게 전해줌으로써 실천에 옮기게 만드는 휴먼 다큐멘터리다. 힘겨운 삶 속에 던져졌음에도 끝내 "엄마! 고마워!"하고 외친 봉관이의 말이 그 어떤 앙상한 논리보다 더 아프고 깊게 울리는 것은 그 때문이다.
토크멘터리. 토크와 다큐멘터리가 엮어진 '오 마이 텐트' 스스로가 표방한 지칭이다. 다큐멘터리와 타 장르와의 퓨전이 새로운 경향으로 나오고 있는 요즘, '오 마이 텐트'의 토크멘터리 표방은 전혀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다큐멘터리와 예능이 만나 리얼 버라이어티쇼라는 대단히 매력적인 형식을 창출해낸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예능이 다큐멘터리의 리얼리티를 끌어들이는 것과 다큐멘터리가 예능적인 요소를 끌어들이는 것은 역시 다르다. 무엇보다 프로그램의 정체성이 다큐멘터리이기 때문에 그 특성으로서의 진지함이나 진정성이 예능적인 요소와 부딪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재미있어야겠지만 재미 그 자체보다는 어떤 의미가 목적이 되어야 그 형식이 다큐멘터리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게 된다. 즉 쉽지만은 않은 결합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프로그램을 김제동이 진행한다고 했을 때, 그런 걱정은 상당부분 상쇄되었다. 김제동은 순발력과 재치가 넘치는 토크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진지해질 줄 아는 개그맨이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처음에는 재치 있는 입담에 웃음을 터트리게 되고, 그 웃음의 끝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게 된다. 웃음이 의미를 만나 훈훈해지는 것이다.
'오 마이 텐트'는 바로 그 김제동을 그대로 빼닮은 프로그램이다. 손님을 초대해 이틀간 여행을 하면서 나누고 겪는 이야기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는 이 프로그램은, 우리가 흔히 여행을 떠나면 그 함께 떠나는 사람에 따라 여행의 성격이 달라지듯이, 함께 떠나는 김제동을 닮아있다. 때 아닌 야구배트를 꺼내 야구선수들을 흉내내는 것으로 웃음을 주고, 허술하게 차리진 밥상머리에 식구들(매니저와 코디)과 함께 맛없는 밥을 먹으면서 연실 웃는 장면에서는 이야기 없이도 훈훈해지는 느낌을 전해준다.
김제동이 캠핑장에서 기타를 치며 김광석의 노래를 부르고, 그 노래를 듣는 캠핑족들의 표정 속에는 삶에 대한 어떤 공감이 묻어난다. 김제동 자신이 손님으로 초대된 첫 파일럿 프로그램에서는 그에게 몇 가지 질문들이 던져졌고 거기에 대한 김제동의 이야기가 이어졌지만 사실 이야기의 내용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상을 벗어난 이들이 공통으로 갖는 어떤 편안함과 관조적인 태도가 주는 일체감일 것이다.
'오 마이 텐트'가 굳이 토크를 하기 위해 길 위로 나선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이미 길을 함께 간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소통하고 있다는 것. 일상 바깥으로 나왔다는 것만으로 그 올바른 자신의 얼굴로 돌아간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된다는 것. 그러니 그 위에 걸쳐지는 토크의 내용이 뭐가 중요할까. 일상 바깥에서 관계와 위치 같은 사회적 껍질을 벗고 나면 다 같은 사람이라는 인식. 토크 없이도 되는 토크. 김제동의 '오 마이 텐트'가 보여주는 것은 그 소통의 세상을 향해 내딛는 길 위의 희망가다.
KBS는 가을개편을 맞아 그간 주중 저녁에 매일 방영되며 일일 다큐 시대를 열어놓았던 '30분 다큐'를 폐지한다고 밝혔다. 따라서 '30분 다큐'는 이번 주까지만 방영될 예정이라고 한다. 폐지 이유는 시청률이나 제작비 부담 등을 들고 있지만 그다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편당 1천만 원 정도가 들어가는 이 프로그램에 제작비 부담을 얘기하기는 어려운 일이고, 게다가 시청률을 목적으로 했다면 그럴만한 후속 프로그램이 있어야 할 텐데, '30분 다큐'의 공백은 종전처럼 스포츠 뉴스가 채운다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시청률이 높은 KBS1TV의 일일드라마를 전면에 내세우고, 이 시간대의 KBS2는 공백지대로 놔두겠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30분 다큐'는 그렇게 간단히 폐지돼도 될 만큼 존재감이 없는 프로그램일까. 시청률이 낮기 때문에 존재감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같은 시간대가 일일 드라마가 방영되는 시간이라, 이 시간대의 편성은 애초부터 다큐멘터리로서는 무리였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독특한 다큐멘터리 형식은 단지 시청률만으로는 얘기할 수 없는 존재가치가 있다. 그것은 국내 TV 다큐멘터리가 가진 거대담론의 이야기들을 벗어나 소품이지만 일상적인 다큐멘터리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여는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30분이라는 시간으로 압축된 다큐멘터리는 그 안에 지금껏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거창한 기획의 다큐멘터리의 세계에서는 좀체 발견하기 힘든 지점의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장점이 있다. 즉 일상이라는 소재 자체가 다큐멘터리의 카메라에 포착되기 시작된 것. 이것은 영상이 일상화되어버린 현재, 거대담론의 다큐멘터리들이 놓치고 있던 것들이기도 하다. '30분 다큐'는 그 짧은 시간이 주는 경쾌함으로, 일상성의 소재를 가벼이 다루지 않는 겸손함으로, 우리에게 다큐멘터리란 본래 이처럼 친근한 것임을 드러내주었던 프로그램이다.
이것은 또한 현재 TV 다큐멘터리가 어떤 변화의 길을 가는 도정에 놓여진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TV 다큐멘터리는 다큐멘터리 영화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그 변화의 속도가 느리게 진행되었다.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다양한 실험적인 스토리텔링 방식을 고민하고, 틀에 박힌 엄숙주의의 무거움을 깨뜨리면서 대중들과 호흡하려 할 때, TV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그 보수적인 틀에 갇혀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 TV 다큐멘터리는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MBC스페셜'은 그 편안해진 다큐멘터리의 성공사례로 지목된다. 'SBS스페셜'는 여전히 진지함을 유지하면서도, 작금의 변화된 다큐멘터리의 일상화를 저버리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KBS는 '30분 다큐'와 함께 '다큐멘터리 3일'이 그 첨병에 나서고 있다. 3일이라는 시간의 축으로 자른 특정 공간을 포착해 그 위에 살아가는 인간군상을 통해 현대인의 삶을 그려내는 이 독특한 형식의 다큐멘터리는 기획 다큐멘터리가 갖는 기획적인 의도성의 틀을 깨는 힘을 보여주었다. 즉 의도하지 않은 낯선 곳에서의 만남과 발견의 영상들은 그 순간의 포착이 잡아내는 리얼리티의 진정성을 극대화시켜 주었다. '다큐멘터리 3일'이 이렇게 포착하는 곳의 시간을 3일로 압축시켜 거기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삶 속에 숨겨진 비의를 포착해냈다면, '30분 다큐'는 방송분량을 압축함으로써 그간 일상이라는 이유로 소외된 소재들을 카메라에 담아낸 공적이 있다.
항간에는 '30분 다큐'가 폐지되고, '다큐멘터리 3일' 역시 지금 시간대인 토요일 저녁 9시40분에서 더 늦은 밤으로 미뤄질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다큐멘터리로는 이례적으로 롱런하며 세간의 관심을 한몫에 받아왔던 '인간극장'이 아침 7시50분대로 이동된 것까지 생각해보면, 이제 KBS 다큐멘터리는 'KBS 스페셜'을 빼고는 모두 한데로 내몰리는 느낌이다. 현재의 방송 프로그램들이 예능, 드라마 할 것 없이 다큐멘터리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형식들이 탄생하는 요즘, 그만큼 다큐멘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을 반증하는 이 시점에 다큐멘터리가 폐지되거나 한데로 옮겨가는 상황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물론 시청률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TV에서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이 어떤 재미적인 기능을 통해 시청률을 끌어올릴 수 있는 형식이라면, 다큐멘터리는 TV라는 매체가 갖는 정보적 기능에 충실한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정보성을 버리고 재미에만 치중할 경우, 결국 TV는 오락기로 전락하고 말 것이 명약관화한 현실이다. '30분 다큐'의 폐지. 시간대의 이동도 아닌 이 일상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폐지가 유감스러운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네 TV에는 현재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에 대한 집중도가 너무 높다. 반면 다큐멘터리는 그 영상의 가치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뒤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TV의 비중으로 보자면 다큐멘터리를 포함한 시사교양 프로그램은 TV의 어쩌면 가장 중요한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드라마와 예능이 대중들을 끌어들이는 재미와 오락을 선사한다면 다큐멘터리 같은 프로그램은 매체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 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껏 다큐멘터리가 주목되지 못했던 건, TV의 오락적 기능에 우리가 편향되어 있었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 들어 다큐멘터리도 어떤 변화를 모색하고 있고 그 성과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다큐에 대한 달라진 인식 변화의 한 축은 대작 다큐멘터리들의 잇따른 등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EBS에서 제작한 '한반도의 공룡', MBC의 '북극의 눈물', KBS의 '누들로드'는 모두 명품다큐라 불리며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그 중 특히 '북극의 눈물'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도 수출됐고, 극장판으로도 제작되어 환경영화제 개막작에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이러한 특집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정규 프로그램으로 편성된 다큐 프로그램들의 시청률이 반등하고 있다는 것이다. 'MBC스페셜'은 꾸준히 10% 이상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하고 있고, KBS '다큐3일' 역시 참신한 포맷으로 주말 밤 10%대의 시청률을 올리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것일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가장 먼저 꼽아야 할 것은 다큐멘터리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워낭소리'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통해서 우리는 다큐멘터리가 충분히 대중적인 폭발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과는 '워낭소리'에서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다. 과거 '비상'이라는 축구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역시 4만여 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다. 그만큼 극영화 같은 허구가 아닌 리얼 스토리인 다큐멘터리에 대한 대중들의 관심이 높아졌다는 것이다.
대중들의 리얼리티와 진정성에 대한 요구
다른 한 편으로 보면 이것은 또한 대중들의 영상에 대한 리얼리티와 진정성에 대한 욕구가 더 커졌다는 걸 말해주기도 한다. 흔히들 TV에서는 리얼 버라이어티쇼다, 리얼 토크쇼다 하면서 너나없이 리얼리티를 부르짖고 있는데 이것은 그만큼 과거처럼 짜여진 틀 안에서의 영상이 대중들에게 소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TV는 이미 일찍부터 리얼리티 영상에 대한 추구가 일어나고 있었다는 말이다. 리얼 버라이어티를 주창하고 나선 '무한도전'이나 그 영향으로 등장한 여행 버라이어티 '1박2일'은 모두 이 TV의 리얼리티 경향에 영향받은 프로그램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1박2일'은 사실상 다큐멘터리를 추구하는 예능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길에서 만나는 우연적인 사건들을 웃음의 코드로 엮어내는 방식은 다큐멘터리가 갖게 되는 진정성의 울림을 전해주기도 한다. 또한 '라디오 스타'나 '무릎팍 도사' 같은 일련의 리얼 토크쇼를 표방한 프로그램들 역시 다큐적 영상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들 토크쇼는 예정된 질문과 답변이 아니라 의외의 질문에 걸려드는 답변에서 리얼리티를 뽑아낸다. 심지어 TV의 리얼리티 경향은 드라마에서도 나타난다. 이른바 '전문직 장르 드라마'가 그것이다. 과거에는 대충 찍어냈던 의학드라마의 수술 장면을 지금의 그것과 비교해보면 드라마의 리얼리티 경향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리얼리티에 대한 요구는 그러한 전문성까지 드라마로 끌어들이게 된 것이다.
무엇이 대중들을 리얼리티에 집착하게 했나
대중들이 과거와 달리 이렇게 리얼리티에 집착하는 이유는 영상의 대중화 때문이다. 과거의 영상이란 그 제작기술을 갖고 있는 특정 전문인들의 것이었다. 그만큼 기술도 복잡했고, 기술을 안다고 하더라도 방송장비가 어마어마한 고가였다. 다 찍는다 해도 편집이 또 장난이 아니었고, 그렇게 영상을 찍어냈다고 해도 그걸 방영할 플랫폼을 갖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이 전문가들에게만 부여되었던 특권이 영상기술의 발달로 인해 대중들에게 대부분 넘어간 상황.
우리는 누구나 조그마한 HD급 캠코더로 영상을 찍어서 프로그램으로 편집하고 인터넷에 게재할 수 있다. 이 사용자가 제작자의 역할을 함께 하게 되는 상황은 영상이 가진 신비적인 부분을 벗겨 내버리고 그 진면목을 드러나게 한다. 이제 모든 게 빤히 다 보이는 것이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는 상황에서 방송이 과거와 같은 영상을 대본에 맞춰 찍어낸 것을 들키지 않을 수 있을까. 리얼리티에 대한 집착은 방송이 살아남기 위한 한 몸부림으로도 읽을 수 있다.
이런 영상에 대한 리얼리티 요구가 지금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이미 몇 년 전부터 등장한 것이라면, 왜 그 동안 그 핵심이랄 수 있는 다큐멘터리는 영상의 중심에 자리하지 못했고, 이제야 조금씩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대중들의 시선이 가장 먼 곳에 위치해 있던 탓에 다큐멘터리의 변화가 그만큼 늦어졌다고 볼 수 있다. 다큐멘터리는 늘 그 고매한 위치에 진중한 무게를 갖고 누가 뭐라든, 하긴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도 별로 없긴 하지만, 같은 모습을 고수하고 있었다. 다큐멘터리 하면 뭔가 대작이거나 가르치려는 듯한 뉘앙스, 그런 것들이 시대가 변하고 있는데도 여전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다큐멘터리에 대중들의 눈길이 닿기 시작하면서 그 변화는 좀 더 빨라지고 있다.
다큐멘터리에 부는 변화의 바람, 그 가능성
'인간극장' 같은 경우, 소소한 일반인들의 일상들을 잡아내면서 대중들의 호응을 끌어냈는데, 그것은 다큐멘터리 영상이 이제 과거처럼 어깨에 힘을 잔뜩 주는 바로 그 거품을 걷어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이미 영상을 체험한 대중들에게 너무나 진지한 다큐멘터리의 시선은 부담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시대착오적으로도 느껴지게 마련이다. 최근 호평을 받았던 '휴먼다큐 사랑'의 경우, 바로 그 낮은 시선으로 바라본 보통 사람의 위대함을 끌어냈기에 대중적으로도 성공했고, 사회적인 반향도 컸다.
한편 다큐멘터리의 접근방식에도 변화가 생기고 있다. '다큐 3일' 같은 프로그램은 통상적으로 다큐멘터리라고 하면 수개월의 제작기간이 걸린다는 단점을 새로운 프로그램 형식으로 차용해 그 한계를 뛰어넘고 있다. 단 3일 간의 취재영상을 통해 보여지는 세상은 어쩌면 수개월 동안 취재해 찍은 영상이 보여주지 못하는 순간적인 진실을 담아내기도 하니까. 게다가 최근에는 '30분 다큐'라는 프로그램이 등장해 일일 다큐멘터리 시대를 열었다. 사실 1시간짜리 다큐멘터리는 PD들에게 큰 부담이다. 하지만 30분이라는 시간은 무언가 소소한 모든 것들을 다큐멘터리 영상으로 포획할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지금의 다큐멘터리는 대중들과 눈을 맞추기 위해 어깨에 힘을 좀 빼고, 시선을 한참 낮추고 있다고 보여지고, 이것은 향후 다큐멘터리가 TV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이라는 긍정적인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렇다면 앞으로 이러한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어디까지 볼 수 있을까. 그것은 실로 영상의 가능성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무궁무진하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방송을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이 일상의 다큐멘터리들이 하나하나 모여 하나의 역사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다큐 3일'과 'MBC스페셜'이 찍은 생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상은 연일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을 통해 방영되면서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문자시대의 역사란 글이 그 매체가 되는 것이지만, 이미 영상시대에 접어든 우리에게 역사란 영상 그 자체가 될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소소한 일상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큐멘터리의 시대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큐멘터리를 음식으로 치면 어떤 것에 가까울까. 무언가 판타지를 제공하는 눈이 즐거운 화려한 색감의 음식이나, 톡 쏘는 향신료가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자극적인 음식보다는 어딘지 밋밋해도 재료 맛에 정직한 음식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보면 '30분 다큐'는 그 맛에 가장 근접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처럼 보인다. 거기에는 지나친 자극도 없고 지나친 눈요깃거리도 없다. 하지만 이 지나치게 담담하게 우리 생활 주변을 낮은 눈높이로 바라보는 '30분 다큐'를 쳐다보고 있으면 바로 거기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 프로그램의 첫 회를 장식한 아이템은 '배PD가 108배를 하게 된 까닭은?'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 코너는 제목처럼 배용화 PD가 좁은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을 찾다가 108배가 좋다는 얘기를 듣게 되고 그것을 검증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그 효과를 알아가는 과정을 담았다.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PD가 직접 프로그램의 관찰자이자 주인공 역할을 한다는 점은 그만큼 보는 이들의 감정이입을 쉽게 만든다. PD의 관심사와 궁금증이 고스란히 시청자의 그것으로 상치되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인이라면 누구나 108배의 운동효과가 궁금하다고 해서 전문 무술인이나 한의사를 찾아가 소견을 묻고, 심지어 108배가 숙취해소에 어떤 효과가 있는지 실험을 하지는 않는다. 즉 처음 시작은 일반인과 같은 눈높이에서 관심사항을 만들었지만 차츰 그 관심은 PD로서의 좀 더 전문적인 부분으로까지 확장되어 간다. 이 서민적인 눈높이에서 전문가의 눈높이까지 이행하는 친절한 전개는 '30분 다큐'가 가진 미덕이다. 이 코너 이외에도 '30분 다큐'에는 방송에 나간 맛집을 찾아가는 PD, 고래를 보기 위해 바다로 떠나는 PD, 시내버스로만 전국을 여행해보는 PD 같은 안내자가 종종 등장한다.
이런 형식은 어찌 보면 느슨한 느낌마저 준다. 심지어 어떤 부분에서는 일반인들이 찍는 UCC를 연상케 하기도 한다. 흔히들 다큐멘터리라고 하면 어딘지 엄밀함이나 진지함을 먼저 떠올리는데 이것은 우리의 뇌리에 각인된 다큐멘터리라는 것이 주로 대작들이기 때문이다. '북극의 눈물'이나 '누들로드', 혹은 '한반도의 공룡' 같은 것들. 아니면 자연 다큐멘터리로 내셔널 지오그래픽으로 연상되는 그림들. 그것도 아니면 역사 다큐 같은 철저한 고증을 전제로 하는 엄격한 잣대들. 우리에게 그간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이상할 정도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것들만을 다큐멘터리의 본령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지금 시대를 포착해주는 한 단면을 거기서 발견해낼 수 있다면 그것은 기록으로서의 훌륭한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 그 단면이 학문적인 영역이 아닌 생활의 영역 속에서라면 그 기록은 박제된 것이 아닌 살아있는 생생함까지 가지게 된다. 그런 면에서 '30분 다큐'가 가진 일상의 기록으로서의 다큐가 가진 가능성은 그저 만만히 볼 성격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30분 다큐'는 그 시간적 제약이 오히려 다큐의 특성을 만들어주는 프로그램이다. 1시간이라면 어딘지 부담이 되는 그 다큐의 시간은 30분으로 줄어들면서(실제 영상의 시간은 25분 정도가 된다) 어깨에 힘을 빼게 된다. 일상의 아이디어가 그대로 한 편의 다큐가 될 수 있는 이 축소된 시간은 따라서 바로 그 일상을 잘 포착할 수 있는 형식이 된다. 게다가 이 여유(?)는 엉뚱한 시선의 가능성을 극대화한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에 소환될 때 모든 카메라의 시선은 대통령의 일거수일투족에 가 있었지만, '30분 다큐'는 엉뚱하게도 그 대통령을 좇는 카메라들의 취재경쟁에 가 있었다.
'30분 다큐'는 그 짧은 시간제약을 통해 일상에 천착하게 함으로써 일일 다큐멘터리 시대를 열었다. 물론 '인간극장' 같은 일일 다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30분 다큐'가 갖는 시사성 있는 소재의 다양성이 갖게 되는 기록으로서의 가치와, 그 시간적 제약이 오히려 번뜩이게 만드는 상상력은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일일 다큐멘터리로서의 묘미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30분 다큐'라는 거품을 뺀 다큐의 맛이 거창하지 않아도 입에 물리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지난 11월, 양천구 신월 5동에 있는 고물상 세 곳에서의 3일을 포착한 ‘다큐 3일-인생만물상편’에서는 다큐로서는 보기 드문 장면이 카메라에 잡혔다. 한 끼 식사를 위해 엄동설한에도 파지를 주우러 다니는 한 할머니를 쫓아다니며 촬영을 하던 한 여자 VJ가 카메라를 든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단 한 끼를 챙겨먹기 위해 그 고된 일을 하는 할머니를 취재하는 입장이지만, 그 안타까움에 눈물을 감추기가 어려웠던 탓이다.
VJ의 의도되지 않은 틈입이 주는 감동
엄정한 카메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제공하는 다큐멘터리에서, VJ의 의도되지 않은 틈입(예를 들면 질문 같은 것이 아닌)은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큐 3일’에는 이러한 VJ의 존재가 문득 문득 영상을 통해 느껴질 때가 많다. 그 고물상에서 3일 동안 할머니를 쫓아다닌 한 VJ에게 그 할머니는 고생한 것에 대한 선물이라며 요구르트를 건네며 꼭 놀러오라고 말했고, VJ는 그러겠다고 화답했다.
지난 24일 방영된 탑골공원 주변의 3일을 다룬 ‘아버지의 얼굴 편’에서도 이런 상황은 다르지 않다. 매일 출근하듯 탑골공원 인근의 1천5백 원짜리 국밥집을 찾는다는 한 노신사는 공원의 명물인 백 원 짜리 커피 자판기에서 굳이 커피를 빼주겠다며 VJ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31일 방영된 ‘고향 가는 길’에서는 버스에 동행 취재하는 VJ에게 한 아주머니가 가래떡을 건넸다. 촬영 중이라 먹지를 못하자, 아주머니는 “촬영 좀 그만하고 좀 먹어”하고 말해 기어이 VJ에게 정을 전했다.
이러한 VJ의 틈입은 자칫 다큐멘터리의 몰입을 방해할 수 있는 요소다. 하지만 ‘다큐 3일’에서의 틈입은 불편하거나 불쾌하지 않고 오히려 어떤 감동까지 준다. 그것은 VJ와 그가 찍는 사람들 간의 친밀감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친밀감을 만들어내는 걸까. 여기에는 단지 VJ의 능력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다큐 3일’만의 독특한 형식에서 비롯된다.
시간과 공간의 축에서 사람을 발견하다
‘다큐 3일’은 말 그대로 특정한 장소를 3일 간 관찰하고 기록하는 형식을 갖고 있다. 즉 시간적 제한과 공간적 제한이 그 핵심이다. 이렇게 제한적으로 시공을 압축해놓으면 그 안에 벌어지는 일들은 마치 돋보기를 댄 것처럼 자세해진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스쳐지나갔던 공간과 시간이 새롭게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시간의 축과 공간의 축 위에서 잡아내려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 곳을 살아가는 인간군상의 모습이다. 이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읽을 수 있는 단서를 얻게 된다.
즉 ‘다큐 3일’은 시공을 단지 제한해 압축해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것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다 자세하게 그려내기 위한 장치다. 바로 사람에게 집중하게 되는 이 형식은 VJ를 그 한정적 시공간 속에 익숙해지게 만든다. 시청자를 대신해 VJ라는 외부적 시선이 그 특정 공간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또 점점 동화되고 공감하게 되는 그 3일간의 경험이 바로 ‘다큐 3일’인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VJ는 어느 순간 그 시공간과 교감을 나누게 된다. VJ의 눈물, 틈입은 이 순간에는 몰입의 방해가 아니라 감동이 된다.
최근 개그 콘서트에서 ‘난...뿐이고’로 뜬 안상태 기자는 사건현장 속에서 그 현장이 자신까지도 삼켜버리는 현실을 목도한 후, 기자의 본분까지 잊어버리고 자신의 처지를 토로한다. 시청자들 마음의 정곡을 찌르는 이 웃음의 포인트에는 이런 생각이 자리하고 있다. ‘기자라는 껍데기가 뭐가 중요해 나도 똑같은 인간이다.’ ‘다큐 3일’에는 웃음이 아닌 감동을 발견한 VJ의 틈입이 있다. 그들은 그 틈입의 장면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자세히 바라보면 감동인 저들과 나는 다 같은 사람이다.’ 이것은 시청자에게도 마찬가지의 느낌으로 전달된다. 난... 감동했을 뿐이고!
재작년부터 TV에 시청자들이 요청한 것은 리얼리티였다. 이미 짜여진 틀 속에서의 프로그램에 식상해진 시청자들은 좀더 의외성이 돋보이는 예측불허의 영상을 요구해왔다. 이것은 그간 본격 다큐멘터리가 가진 리얼리티의 요소를 모든 TV프로그램 속으로 끌어들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로써 드라마 분야에서는 정해진 룰 속에서 맴돌던 트렌디를 버리고 좀더 디테일한 리얼리티를 요구하는 전문직 장르 드라마가 등장했고, 예능 역시 무정형의 리얼리티쇼가 대세가 되었다. 케이블은 연일 자극적인 다큐의 틀을 끌어온 자칭 페이크 다큐 프로그램들로 넘쳐났고, 한편으로는 다큐 드라마라는 형식도 시도되었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다큐멘터리의 요소가 스며들었다는 의미에서 지금을 ‘다큐의 시대’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프로그램들 안에서 다큐멘터리는 어떤 식으로 활용되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이러한 프로그램들이 끌어온 것은 ‘실제상황’이라는 조금은 자극적으로 해석된 요소였다는 걸 알 수 있다. 거기에는 고발이나 폭로, 혹은 폭탄선언, 막말 같은 다큐의 외면적 자극만이 존재했지, 내면이 가진 진정성이 좀체 보이지 않았다. 그 짜고 맵고 단 자극적인 맛의 프로그램들은 시청자들의 입맛마저 무디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은 왜 매년 ‘휴먼다큐 사랑’이 시청자들의 큰 공감을 얻고 있는지를 뒤집어 말해준다. 그것은 이 진짜 다큐멘터리에는 진정성이라는 다큐의 진짜 재료의 맛 이외에는 그 어떤 조미료의 맛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휴먼다큐 사랑’이 포착하는 것은 ‘평범함의 가치’다. 그리고 그 가치는 바로 가족이라는 테두리 속에서 피어난다. ‘휴먼다큐 사랑’의 주인공들이 거의 몸이 불편하거나 죽음을 앞두고 있거나 한 것은 바로 이 ‘평범함의 가치’를 알려주기 위함이다. 병 없이 살아간다는 것, 장애 없이 살아간다는 것,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누군가를 키운다는 것 같은 일상의 평범함은, 그들에게는 그 자체로 비범함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돌잔치를 함께 하는 것은 평범한 일이지만 이제 시한부 선고를 받은 소봉씨에게는 비범한 일이 되며, 결혼하고 아기를 낳고 가정을 이루는 것은 평범한 일이지만, 눈 먼 아내와 점점 눈이 멀어가는 남편에게는 비범한 일이 된다. 극한의 병 앞에서는 밥 한 끼 먹는 일, 아니 그 고통을 바라보는 일조차 힘겨운 일이 된다.
하지만 평범함조차 비범한 일이 되어버리는 갑작스런 상황 속에서도 놀라운 것은 가족의 사랑이 가진 힘이다. 죽음을 앞둔 상황이지만 소봉씨에게 그 힘겨운 투병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딸 소윤이라는 존재이며, 저 자신 또한 암이지만 그 암을 마치 감기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황정희씨의 힘은 똑같이 투병생활을 하게 된 성윤이라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눈 먼 아내와 자신마저 눈이 멀어가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경호씨와 영미씨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힘은 다름 아닌 이제 두 살 된 신비가 있기 때문이다.
‘휴먼다큐 사랑’은 이 가족들이 만들어내는 기적 같은 사랑을 보여주면서 그것이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원천적인 힘이라는 걸 담담하게 전한다. 세상은 점점 살풍경이 되어가고 있고 그 속에서 점점 메말라 가는 사람들은 삶의 목표를 자꾸만 욕망으로 덧씌운다. TV가 반영해 보여주는 것들은 그 욕망들이 점점 강한 자극으로만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다. 가끔씩 다큐의 리얼리티적 요소를 통한 자극으로만 점철되어오던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어떤 순간적인 진정성을 목도했을 때, 때아닌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처럼, ‘휴먼다큐 사랑’은 모두가 더 큰 욕망으로만 달려가는 이 세태에 좀더 간단하고 평범한 진리를 끄집어내는 것만으로 마음에 커다란 파문을 일으킨다. 그 진리란 사람은 서로 기대고 등을 대줄 때 본질에 가까워지고 아름답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