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임당', 교훈적 대사들 듣기 불편한 까닭

KBS <김과장>이 떠난 자리 수목드라마들 성적표는 고만고만해졌다. 새로 들어선 KBS <추리의 여왕>이 첫 회 11.2%(닐슨 코리아)로 좋은 시작을 알리는 듯 했으나 2회에 9.5%로 추락하면서 9.6%를 기록한 SBS <사임당, 빛의 일기(이하 사임당)>에 1위 자리를 내줬다. 계속해서 2위 자리에 머물러 있던 <사임당>이 겨우 1위 자리를 탈환했지만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반응은 그리 좋지 못하다. 

'사임당, 빛의 일기(사진출처:SBS)'

이런 반응이 나오게 된 건 <사임당>의 1위 탈환이 자체적인 성취라기보다는 타 방송사 드라마들의 부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청률이라는 지표로 드라마의 완성도를 얘기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사임당>은 방송 이래 끊임없이 완성도 문제에 대한 논란이 이어져왔고, 그것은 타당한 문제제기들이었다. 

이것은 사임당이라는 인물을 이 드라마가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물론 제작발표회에서는 조선시대의 워킹맘으로서 예술인 사임당의 면면에 포커스를 맞췄다고 이야기했지만 실제 드라마 속 사임당(이영애)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익숙한 현모양처 이미지에서 크게 벗어난 게 없다. 예술인으로서의 사임당 이야기는 20부를 넘어서면서 비로소 조금씩 보여졌을 뿐이다. 전체 30부작에서 전반 20부의 내용은 엉뚱하게도 사임당이 고려지를 재현해내는 그 과정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니 좀 더 시대를 앞서간 여성으로서의 사임당의 이야기는 잘 보이지 않았다. 대신 율곡을 키워내는 ‘현모’이자, 심지어 외도로 딴 살림을 차린 남편에게조차 그 마음을 헤아리려 하는 ‘양처’로서의 보수적인 여성상의 이미지를 반복했을 뿐이다. 물론 고려지를 재현하는 과정에서 유민들을 모아 만든 양류지소라는 공간의 이야기는 혁신적인 소재임에는 분명하지만, 그 안에서 사임당은 여전히 아씨 마님의 우아한 이미지에 박제되어 있다는 걸 부정하긴 어렵다. 

<사임당>이 보수적인 드라마라는 걸 가장 잘 드러내는 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사임당의 캐릭터가 가진 교조적인 모습이다. 사임당의 대사들은 “-하느니라”라는 식의 교훈조로 가득 채워져 있다. 그녀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남편을 가르치고 무지한 백성들을 가르친다. 물론 그것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를 위한 노력이지만 그 태도 속에는 지극히 어르신의 목소리가 담겨져 있는 느낌이다. 현재의 시청자들에게 이런 교조적인 캐릭터의 교훈조 대사는 거북하게 들리는 게 사실이다. 이런 태도들은 사임당이 어진화사가 된다는 파격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혁신적 인물로 바라보기 어렵게 만드는 이유다.

지금까지 방영된 드라마의 내용들을 보면 사임당은 애초부터 어떤 새로운 여성상을 제안할 수 있는 그런 혁신성을 담지 못했던 캐릭터였다. 그나마 사극과 현대극을 넘나드는 설정을 본래 갖고 있었지만, <사임당>은 일찌감치 현대극을 버리고 대신 사극에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 선택은 이 드라마가 그나마 9%에서 10% 사이의 안정적(?)인 시청률을 유지하는데 효과적일 수 있었다. 충성도 높은 보수적 시청층을 확보함으로써 <김과장>이 펄펄 날 때도, 또 새롭게 <자체발광 오피스>와 <추리의 여왕>이 들어설 때도 변함없이 그 시청률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극을 상당 부분 들어내고 사극으로 나머지 부분을 채워 넣는 편집과정에서 드라마는 너무나 평이하고 단조로워졌다. 그 평이함이 편안함으로 느껴지는 시청층도 있겠지만, 보수적 시청층이 아니라면 그 평이함은 지루함이 되지 않았을까. 어쩌다 상황 논리에 의해 시청률 1위를 기록했지만 <사임당>에 대한 평가는 영 좋지 않은 이유는 드라마가 애초에 추구한다고 했던 새로운 여성상으로서의 사임당이 좀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낭만닥터> 고구마 시국 날려준 사이다 낭만 드라마

 

그냥 닥치고 조용히 내려와! 추하게 버티지 말고 내려와서 네가 싼 똥 네가 치워. 됐냐?” 어째서 이 평범해 보이는 대사는 이토록 다른 뉘앙스로 들리게 된 걸까. 이 대사는 SBS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김사부(한석규)가 도윤완(최진호) 원장에게 던지는 일갈이다.

 

'낭만닥터 김사부(사진출처:SBS)'

도원장은 과거 자신이 조작한 대리수술의 증거들을 김사부가 내놓자, 자신이 병원장직을 유지하게 되면 돌담병원을 외상전문센터로 해주겠다는 거래를 제안한다. 하지만 그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부하자 그럼 원하는 게 뭐냐고 묻는 도 원장에게 김사부가 던지는 속 시원한 한 마디.

 

이 대사 한 마디에는 어째서 우리가 <낭만닥터 김사부>라는 드라마에 그토록 빠지고 열광했던가가 들어 있다. 그것은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가 지금의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로 퍽퍽해진 고구마 시국에 잠깐이라도 속 시원함을 안겨준 사이다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드라마 안의 스토리에 맞게 돌아가는 대사이고 이야기이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현 시국에 바라는 마음 그대로였다. 탄핵 국면과 특검 상황 속에서도 버티기에 돌입한 그들에게 던지는 일갈. 갈수록 추하게만 느껴지는 그 모습들로 더더욱 인상을 찌푸리게 만드는 그들을 향한 김사부의 한 마디.

 

그러고 보면 <낭만닥터 김사부>는 의학드라마의 탈을 쓴(?) 현실 비판 드라마가 아니었나 싶다. 결국 낭만을 소환해온 건 자본과 권력으로 움직이며 낭만이 사라져버린 세상에 그래도 끝까지 지켜야 가치들이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함이었으니 말이다. 낭만 없는 세상에 대해 거침없는 비판을 던진 김사부는 그 스스로 붙인 이름처럼 세상의 사부가 되었다.

 

그런 사부 밑에서 제대로 된 제자들이 생겨난다. 강동주(유연석)는 과거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심으로 의사가 되고 그래서 성공해 권력을 잡으려 했지만 김사부를 만나 변화한다. 진정한 의사의 길을 깨닫게 된 것. 그저 금수저 경쟁자로만 생각했던 도인범(양세종)에게 함께 수술하자고 손을 내밀며 그 스스로 변화하자, 그 변화의 힘은 도인범 또한 변화시킨다.

 

아버지 도윤완의 권세 밑에서 자라온 도인범은 돌담병원에서 비로소 자기 자신의 진면목을 찾았다고 아버지에게 털어놓는다. 거대병원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에게 그는 돌담병원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선택하며 살아가겠다고 말한다. 아마도 이 부분은 <낭만닥터 김사부>가 전하는 잘못된 권력에 대한 가장 큰 복수일 게다.

 

아직 세상에는 의사 사장이 아니라 의사 선생이 되고 싶은 애들이 많다. 인범이를 포함해서 말이다.” 김사부가 도윤완에게 던지는 이 한 마디는 실로 낭만적이지만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건 의사의 본분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지만 어느 샌가 생명을 담보로 돈 버는 일이 되어버린 현실을 꼬집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의사라는 직업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게다. 검사도 판사도 심지어는 장관도 대통령도 곱씹어야할 이야기.

 

콘트롤 타워가 부재한 우리네 현실에 김사부는 하나의 해답을 내놓는다. 우리는 흔히들 잘못된 세상을 바꾸겠다고 말하곤 하지만, 진정 세상을 바꾸는 일은 거기 사는 사람들이 먼저 살 수 있게 해주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 저마다 자기의 본분을 지키며 노력하는 것. “세상 바꿔보겠다고 이 짓 하는 것 같냐. 난 사람 살려보겠다고 이 짓거리 하는 거다. 내가 포기하지 않고 조금만 더 노력하면 사람이 산다.” 드라마를 뚫고 나와 현 시국에 대한 일갈로 들리게 된 김사부의 대사 한 마디 한 마디가 여전히 귓가에 쟁쟁하게 울린다

<그래 그런거야>, 김수현 작가 최대의 위기

 

SBS 주말드라마 <그래 그런거야>는 첫 회가 방영되기 전까지만 해도 상당한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김수현 작가가 아닌가. 막장드라마들이 주말 시간대를 장악하고 있는 현재, 김수현 작가라면 이를 깨치고 가족드라마의 부활을 알려주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 그런거야(사진출처:SBS)'

하지만 결과는 최악이다. 첫 회 시청률 4%(닐슨 코리아). 물론 2회에 5.8%를 기록하긴 했지만 이것이 시청률 상승의 신호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다분히 tvN <시그널>이 금토드라마로서 일요일에 방영되지 않았다는 점과 무관하다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청률이야 지상파에서 가장 높은 게 막장드라마들이니 그렇다 칠 수 있겠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그래 그런거야>에 대한 시청자들의 평도 그다지 좋지 않다. ‘기대 이하라는 평가 속에는 김수현 작가에 대한 실망감이 상당부분 엿보인다. 무엇보다 늘 비슷비슷한 패턴의 김수현식 가족드라마가 이제는 식상하다는 평가가 압도적이다.

 

늘 어르신들의 교훈조의 이야기들이 따발총 대사로 이어지고 젊은 등장인물들은 그 어르신들의 눈에 포획된 존재들처럼 보이는 것도 그렇고, 새로운 형태의 가족구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대가족은 심지어 보수적인 가치를 강요하는 듯한 뉘앙스로까지 느껴진다. 특별한 사건들이 벌어지기보다는 그저 일상적인 일들이 수다를 중심으로 벌어지는 것도 전형적인 김수현식 가족드라마의 문법들이다.

 

이 비슷한 문법에 등장인물 또한 매번 비슷비슷하다보니 죄다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인상을 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물론 이 보수적인 가치가 결국은 본래부터 가족드라마가 지향하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래 그런거야>에는 지금 시대의 공기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어찌 보면 한 10, 아니 20년 정도 옛날 가족 이야기를 재탕하고 있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어째서 이런 느낌이 들게 된 것일까. 가장 큰 것은 제 아무리 가족드라마라고는 해도 현재의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2회가 방영되었지만 이 드라마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들만으로 꽉 채워져 있다. 그들이 속사포로 쏘아대는 대사들을 듣고 있노라면 이 드라마의 제목처럼 보수적인 가치를 설파하는 어떤 어르신이 젊은이들에게 인생이란 그래 그런거야라고 달관하듯 가르치려는 모습이 연상된다.

 

김수현 작가가 고령에도 대작가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건 그 나이와 상관없이 당대의 젊은이들과도 호응할 수 있는 혁신적인 이야기들을 심지어 가족드라마 속에서도 거침없이 보여줬기 때문이다. 한 평생을 가족 뒤치다꺼리 하며 살아왔던 엄마의 파업(?) 선언을 다뤘던 <엄마가 뿔났다>가 그렇고, 불륜을 그 끝까지 밀어붙여 그 밑바닥을 보여줬던 <내 남자의 여자>가 그랬으며, 동성애라는 새로운 문제를 가족드라마 틀로 끌어들여 화제가 됐던 <인생은 아름다워>가 그랬다. 그런데 <그래 그런거야>에는 아직까지 그런 파격과 혁신적인 소재에 대한 도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응답하라1988>이 가족드라마이면서도 그토록 화제가 되고 기적적인 시청률까지 거둬갈 수 있었던 건 흔한 지상파들의 가족드라마를 재현하거나, 그 변종으로서의 막장드라마를 그려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응답하라1988>은 젊은이들의 눈높이에 새롭게 맞춰 가족드라마를 재구성했다. 어르신들의 가르치는 목소리가 아니라 젊은이들이 어르신들에게 보내는 존경과 헌사가 들어 있었기 때문에 <응답하라1988>이 가족드라마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래 그런거야>는 정반대다. 이 드라마에는 젊은이들의 목소리가 아니라 어르신들의 목소리만이 들려온다. 그것도 너무 빠르게 너무 많이. 이래서는 젊은 시청자층은 물론이고 중장년 시청자층도 그리 공감하기가 어려워진다. 중년의 시청자라고 해도 드라마를 통해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건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물론 막장드라마와 대결하겠다는 그 취지는 나쁘지 않다. 그래서 파괴되어가는 가족의 가치를 되새기겠다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막장드라마만큼 보기 힘겨운 것이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건네는 보수적인 드라마다. 가족의 가치를 다시 세우겠다는 건 좋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옛날식의 가족으로 돌아가자는 건 퇴행이다. 이제 2회가 끝났을 뿐이니 섣부르게 모든 걸 판단하기는 어려울 것이지만 그래도 기대한 만큼 남는 아쉬움도 크다. 김수현 작가는 시청률도 시청률이지만 평가도 그리 좋지 않은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갈 것인가

<용팔이> 논란, 앞뒤 맥락 없이 대사만 갖고 침소봉대

 

차세윤이 너한테 한 짓은 죽어 마땅하지만, 쉽게 연예인이 되고 싶어서 그의 호텔방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너의 잘못이 없어지지 않아. 그리고 너의 자책감을 덮기 위해서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을 죽게 해서는 안 돼.”

 


'용팔이(사진출처:SBS)'

SBS <용팔이>에서 주인공인 김태현(주원)이 성폭행 피해자 여성에게 던진 이 말은 논란의 빌미가 되었다. 이 대사만을 놓고 보면 성폭행을 당한 피해 당사자 역시 그 잘못이 있다는 것처럼 들린다. 대사 속의 자책감을 덮기 위해서라는 말이나 호텔방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간 너의 잘못이라는 말이 그렇다.

 

이 대사 한 줄이 만들어낸 논란은 점점 확대 해석되었다. 마치 이 드라마가 성폭행에는 피해자의 잘못도 있다는 식으로 일반화시킨 것처럼 해석되었고, 이런 대사를 버젓이 내놓는 지상파의 의식수준까지 거론되었다. 그럴만한 일이다. 대사 한 줄에만 집중한다면 말이다.

 

중요한 건 이 대사가 어떤 상황에서 나온 것인지에 대한 앞뒤 맥락이 다 빠져 있다는 점이다. 즉 이 드라마에서 이 여성은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인 것은 맞지만 거기에는 자발적인 면도 있었다는 점이다. 즉 그녀 스스로는 전혀 이런 일이 벌어질지 몰랐는데 성폭행을 당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거기에는 일종의 거래같은 것이 깔려 있다. 연예인이 되게 해주겠다는 것에 함께 호텔에 갔다는 것.

 

따라서 대사가 지적하고 있는 너의 잘못이란 성폭행을 당한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거래에 임했던 그녀의 잘못을 얘기하는 것이다. 성폭행은 그 호텔방에 들어간 이후에 생겨난 변수다.

 

무엇보다도 이 드라마의 이 시퀀스은 성폭행 피해자의 잘못을 드러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성폭행이라는 범죄를 저지르고도 버젓이 살아가는 이른바 VIP들의 갑질 하는 세상을 비판하고자 했던 장면들이다.

 

게다가 이 대사를 한 김태현이라는 의사는 이상을 얘기하는 인물이 아니다. 즉 당연히 성폭행 같은 건 언제 어디서든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건 이상이지만, 그는 그런 이상이 비현실적이라는 걸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인물이다. 돈이 없으면 살 수 있는 환자도 죽을 수 있다는 현실을 목도한 그에게 일종의 거래를 위해 그런 류의 남자와 호텔에 갔다는 건 현실적으로 성폭행의 위험 속에 스스로를 노출한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속으로는 따뜻한 휴머니스트지만 겉으로는 속물인 척 말하는 그런 의사다.

 

물론 이 대사가 민감하게 해석될 수 있다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드라마 전체에서 어떤 맥락을 갖고 사용되었으며, 그런 대사를 던진 캐릭터가 어떤 인물인가를 염두에 둔다면 이해되지 않는 대사도 아니다. 대사 한 줄이 가진 파장은 물론 민감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부분만 떼어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논란으로 몰아세우는 건 너무 악의적이다. <용팔이>는 그런 거래상황을 수용한 것이 잘못이라고 말했지 성폭행이 피해자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일반화한 적이 없다



<세결여>, 김수현 작가표 드라마의 한계인가

 

여전히 똑같다. 재벌가 사람들의 수다와 누가 누구와 결혼했고 이혼했으며 또 결혼하려 하는가 하는 이야기. 게다가 여전한 문어체 대사 어투는 마치 연극을 보는 것 같은 느낌으로 몰입을 방해한다. 물론 이 속사포로 쏟아지는 문어체 대사는 과거에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김수현 작가표 명대사로 칭송되기도 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고 있다. 하소연이나 넋두리 같은 문어체 대사는 관찰 카메라로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가감 없이 찍어 보여주는 시대에는 어딘지 어색하게 느껴진다.

 

'세 번 결혼하는 여자(사진출처:SBS)'

그럼에도 김수현 작가라는 이름 석자의 힘을 무시하기 어렵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떤 메시지를 갖고 왔는지에 우선 이목이 집중된다.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제목이 담고 있는 것처럼 달라진 결혼관에 대한 담론을 담고 있다. 과거의 결혼이라고 하면 어딘지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면, 요즘은 개인의 행복을 위해 이혼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을 만나 새 삶을 살아가는 것이 이상하지 않게 된 시대다.

 

과거의 드라마들이 대부분 결혼을 목표로 하고 한 식구가 될 그 당사자들과 집안사람들 간에 야기되는 갈등들을 주로 다뤄왔다면, <세 번 결혼하는 여자>는 그렇게 결혼을 하고 난 후에 발생하는 삶들, 이를테면 이혼이나 재혼 같은 것들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여기서 가장 파격적인 인물은 이 드라마의 제목이 지칭하는 주인공, 오은수(이지아)다. 그녀는 새로운 남자를 만나 재혼을 했지만 전 남편과 가진 아이와는 떨어져 살고 있다. 새 남편의 집안에서 아이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즉 오은수는 여자로서의 삶과 엄마로서의 삶 사이에 서 있는 인물이다. 요즘 세태에서 이혼이라고 하면 “그래 그럴 수도 있어”라고 고개를 끄덕이지만, 아이 문제라면 쉽게 고개가 끄덕여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아이까지 포기하고 재혼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것은 과연 사회적 통념이 얘기하듯이 여성으로서의 잘못된 삶일까. 바로 이 질문이 <세 번 결혼하는 여자>가 기존 드라마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흥미로운 건 오은수라는 역할을 연기하는 배우가 이지아라는 점이다. 대중들 모르게 서태지와 함께 살았고 헤어졌다는 것이 뒤늦게 알려져 큰 파장을 만들었던 배우. 어찌 보면 상당히 오은수라는 캐릭터를 이해할 수 있는 입장이다. 아마도 그래서 이지아라는 배우가 이 배역에 캐스팅 되었을 것이다. 김수현 작가가 이지아에게 주문한 말 “네 안의 틀을 깨고 나와라”라는 말은 그래서 작품의 캐릭터를 위한 얘기이면서, 동시에 이지아에 대한 충고이기도 하다. 즉 이 작품은 이혼에 대한 통념을 깨는 메시지를 던지면서 또한 이지아로 대변되는 이혼녀에 대한 대중들의 편견도 겨냥하고 있다는 얘기다.

 

주제의식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김수현 작가가 여전히 쥐고 있는 것은 가족이라는 틀이다. 물론 이혼을 얘기하고 있지만 여전히 결혼제도라는 프레임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요즘의 젊은이들을 생각해보자. 결혼? 이제는 필수가 아니라 선택 정도가 되고 있는 상황이다. 현실적으로 결혼이 주는 사회적 부담감이 너무 큰 데다가 ‘혼자 사는 삶’ 이른바 ‘싱클턴(Singleton)’이라 부르는 새로운 형태의 라이프스타일이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추세가 아닌가.

 

<세 번 결혼하는 여자>의 주제의식은 과거 세대에게는 파격적으로 읽힐 수 있겠지만 지금 현 세대들에게는 고루하게 읽히는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리얼하게 들리지 않는 문어체식의 대사들은 드라마의 몰입을 방해한다.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이지아의 성형설이 먼저 불거진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작용한다. 그 하나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실제로 이지아의 표정연기가 대단히 부자연스러웠기 때문이고, 또한 드라마의 대사 톤들이나 천착하는 메시지가 그다지 일상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김수현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는 여전히 도발적이다. 엄마로서의 삶보다 여자로서의 삶이 과연 나쁜 것인가 하는 질문이 그렇다. 하지만 요즘은 혼자 살아가면서 엄마로서도 여자로서도 살 수 있는 시대다. 굳이 결혼만이 유일한 여자의 삶의 선택지는 아니란 얘기다. 그래서 이 시선으로 바라보면 왜 저들이 저렇게 결혼과 이혼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 이상하게 보이기도 한다. 이지아 성형설이 먼저 불거진 데는 그만큼 몰입하게 되지 않는 드라마도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대사만으로 현대사를 관통하는 문제작, <황금의 제국>

 

“시멘트 가루 맛보던 혓바닥이 돈 맛을 보고 나니까 세상천지가 다 돈으로 보여. 회사도 공장도 사람도 저놈 저거 얼마짜리다. 저건 얼마짜리다. 한성제철이 네 손에 들어가 있으면 서윤이하고 싸우겠지. 너도 서윤이도 시멘트가루 맛은 본 적이 없고 돈 맛만 아니까. 10년 20년 결국 너도 내 나이가 될 거다. 민재야 지금 내가 느끼는 마음 너 안 느끼게 하고 싶어. 애비 마음이 그래.”

 

'황금의 제국(사진출처:SBS)'

성진그룹을 형 최동성 회장(박근형)과 함께 일궈낸 최동진(정한용)이 아들 최민재(손현주)에게 던지는 이 대사는 <황금의 제국>이라는 드라마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자본론>으로 얘기하면 사용가치가 교환가치로 바뀌는 지점에서부터 생겨나고 폭주하는 자본의 생리를 최동진은 몇 마디 대사로 툭 던져놓고 있다. 게다가 이것은 우리네 현대사를 관통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80평짜리 시멘트 공장으로 시작했다. 시멘트가 한 포대 나올 때마다 거 신기하고 내가 만들었다 생각하니까 자식 같고 어떤 날은 찍어서 시멘트 가루 맛도 봤어. 근데 아파트가 무너지고 어쩌다가 청마건설을 인수했어. 땀 한 방울 안 흘리고 성진시멘트보다 몇 배나 더 큰 회사가 우리 손에 들어왔지. 그 때부터 돈으로 회사를 샀고 형님하고 싸우고 내 인생의 반 토막은 드러내고 싶어.”

 

개발시대를 거쳐 90년대 IMF 겪으며 돈이 돈을 먹는 자본의 시대로 접어드는 과정을 <황금의 제국>은 당대의 인물을 표상하는 캐릭터들로 보여준다. 흥미로운 건 이것이 온전히 최동성 회장의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로 상징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이 집안에서 벌어지는 형제들 간의 암투와 대결이 우리네 현대사를 관통하듯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래서 마치 왕조사극의 현대판을 보는 듯하다. 왕조사극이 왕과 신하들 사이에 벌어지는 대결구도를 통해서 당대의 역사적인 변화를 포착해내듯이, <황금의 제국>은 최동성 회장이라는 제국의 가족사를 통해 당대의 경제사를 그려낸다. “저는 왕건이 될 겁니다.”라며 궁예(최동성 회장을 빗대어)의 이름을 지워버리겠다고 선언하는 최민재의 말은 이 드라마가 상당 부분 왕조사극의 구성을 끌어오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놀라운 건 그래서 이 드라마는 거의 야외촬영이 없다는 점이다. 대부분이 최동성 회장의 집안에서 인물들끼리 이합집산하며 부딪치는 장면들이고, 가끔 성진그룹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서윤(이요원)의 모습과 장태주(고수)가 이끄는 에덴에서 윤설희(장신영)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을 뿐이다. 최동성 회장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할 것인가 가족장으로 할 것인가를 놓고 가족이 대결을 벌이는 9회는 거의 70%를 최동성 회장의 집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정적인 느낌을 주기보다는 긴박감 넘치는 역동감을 선사한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이 집안에 있는 모든 인물들이 저마다의 욕망이 확실하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황금의 제국>의 전제는 이 집안이 최동성 회장이 그랬던 것처럼 저녁 식사 시간에 말 한 마디로 계열사의 주인이 바뀌기도 하는 곳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수 조 원이 움직이는(그래서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는) 사업이 이 가족 구성원들의 말 한 마디, 누가 승리하고 누가 패배했는가 하는 결과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이 보다 흥미진진한 게임이 있을까.

 

하지만 이 드라마가 더욱 가치 있게 여겨지는 건 이것이 단순히 가족 내 서바이벌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네 현대사를 관통하면서 거기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던지고 있다는 점이다. 최동성 회장의 죽음에 이어 벌어진 가족 내의 대결은 그래서 이 모든 욕망들이 허망하다는 것을 에둘러 말해준다. 그가 죽자 그의 아내가 본색을 드러냈고 자식들은 고인을 애도하기보다는 일제히 자기 몫을 챙기려 안간힘을 쓴다. 고인의 영정 앞에 모여 눈물을 흘리는 가족들은 그래서 섬뜩함마저 느끼게 만든다.

 

워낙 국민적인 반향을 일으켰던 <추적자>와 비교해 <황금의 제국>은 그 성취가 낮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하지만 <추적자>가 우리 사회의 정의의 문제를 끄집어내기 위해 한 개인의 고군분투를 다뤘다면, <황금의 제국>은 그 개인의 고통이 어디서부터 비롯되고 있는가를 시대를 거쳐 그 시스템이 완성된 뿌리에서부터 들춰보고 있는 중이다. 도대체 이런 시도를 할 수 있는 작가가 몇이나 될 것인가. <황금의 제국>의 도발은 그래서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드라마가 발견한 문학의 가치, '신데렐라 언니'

"은조야-" '신데렐라 언니'에서 은조(문근영)의 이름을 부르는 이 대사는 여러 번 반복된다. 하지만 그저 이름을 부르는 것에 불과한 이 대사가 가지는 뉘앙스와 의미는 사뭇 다르다. 독하게 아 소리 하나 내지 않고 회초리를 맞고는 술도가 창고에서 술독에 귀를 대고 왠지 서글프고 왠지 편안해지는 그 술 익는 소리를 듣는 그녀에게 기훈(천정명)은 맞지 말고 앞으로는 도망치라면서 은조를 부른다. "은조야. 대답 좀 해주지. 은조야. 응. 아프지?" 그 때 한 번도 누군가에게 제 맘을 열지 않았던 은조는 "어"하고 답을 해준다.

"은조야"라고 묻고 "어"하고 답을 해주었을 뿐인데, 그 소통의 순간이 짠한 이유는 뭘까. 그것은 그 "은조야" 라는 부름 속에 들어가 있는 기훈의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기 때문이며, 그렇게 불러주는 그 목소리를 듣고는 "어'라고 답하는 그녀의 조금은 열려진 마음이 감동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여기에 술독 안에서 아프게 익어가며 제 소리를 내는 '술의 노래'는 이 짧은 순간의 추억을 다양한 차원의 감각으로 기억되게 만든다. 이 짧은 순간의 강렬함은 훗날 기훈이 소식 한 점 없이 떠나간 날, 은조의 독백으로 이어지며 시적인 여운마저 남긴다. "그 사람을 뭐라고 불러본 적이 없어서 나는... 뻐꾸기가 뻐꾹뻐꾹 울듯이 따오기가 따옥 따옥 울듯이 새처럼 내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이것은 드라마라기보다는 한 편의 문학작품을 연상케 하는 장면들이다. 그리고 이 문학적인 방식은 다이내믹한 스토리 전개보다는 정중동의 압축적이고 폭발적인 대사의 힘으로 흘러가는 '신데렐라 언니'가 가진 특징이다. 효선(서우)이 뭐든 자신보다 잘하는 은조에게 절망감을 느끼면서 내레이션과 대사가 서로 상반되게 터져 나오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하늘에 맹세하고 땅에 맹세하는 건데 내가 얘한테 뱉은 말은 100% 거짓말이었다.' "언니야. 언니야 죽지마라. 죽지마라 언니야." '죽어버려라. 말이 헛나온 거다.' "언니야. 내가 잘 할게. 내가 너 예뻐해줄 게. 죽지마라 언니야" '너 코 파다가 코피난거지 이렇게 묻고 싶은 게 내 진심이었다.' 글로 적어놓으면 좋은 소설의 한 구절을 읽는 듯한 기분에 빠져든다.

드라마 대본이라면 흔하디 흔하게 적혀있을 '온다', '웃는다', '간다' 같은 말들도 '신데렐라 언니'에서는 그 속에 많은 감정과 의미들이 겹쳐져 다가온다. 대성(김갑수)의 죽음 때문에 괴로워하던 기훈이 절에서 사죄하듯 삼천 배를 하고 비틀거리며 돌아오다 문득 은조를 마주치는 장면에서 은조는 단 두 마디만을 속으로 내뱉는다. '왔다. 웃는다.' 하지만 이 두 마디가 주는 울림은 크다. '왔다'는 언젠가 굳게 닫혀져 있던 자신의 마음을 열게 해주고는 훌쩍 가버린 기훈이 '왔다'는 그 의미이고, '웃는다'는 아무런 기대도 없이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던 은조에게 아침을 기다리게 만들었던 그 기훈의 웃음을 본다는 의미다. "많은 걸 바라지도 않았어. 하지만 가더라. 그런데 또 간대. 차라리 잘됐어. 이번에 가면 다시 오지 않겠지. 다시 오지 않으면 다신 가지 않겠지." 그렇게 다시 와서 웃음을 지어주는 기훈이 또 떠난다는 사실에 울먹이며 이렇게 말하는 은조에게 '간다'는 의미는 이처럼 남다르다.

'신데렐라 언니'가 구사하는 대사는 그저 마구 던져지는 대화체의 문장들이 아니다. 그 속에는 인물들이 켜켜이 쌓아놓은 관계의 감정들이 더깨처럼 앉아 있다. 흔하다 못해 상투가 되어버린 그런 단어들조차 깊은 울림으로 만드는 그 마법은 바로 문학의 힘이다. 흔히들 문학은 죽었다고들 말하고 또 고리타분한 것이라고 치부한다. 하지만 어디 그럴까. 세상이 죽은 상투어로 점점 쌓여갈수록 우리는 어쩌면 상투어마저 특별하게 만들어내는 문학의 힘을 갈구하게 되는 지도 모른다. '신데렐라 언니'는 드라마지만, 바로 그 문학의 가치를 발견하게 해주는 작품이다.

80년대 드라마 식의 어법과 운명적 장면의 어색함

‘에덴의 동쪽’은 시청률면에서 말 그대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첫 회에 10%대를 가볍게 넘겼고 6회에 20%를 넘기고 나서 현재 12회에 이르러 27%(AGB 닐슨)로 30%대를 노리고 있다. 하지만 시청률과 함께 점점 이 드라마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그 진원지는 다름 아닌 ‘대사’다. 어째서 이 나연숙이라는 베테랑 작가의 작품을 두고 때아닌 대사 논란이 불거지는 걸까.

오랜 세월 동안 만나지 못했던 형제가 만나는 장면에서 동생 동욱(연정훈)은 형 동철(송승헌)에게 연거푸 “형 맞아!”하고 소리친다. 어두컴컴한 그 장면에서 절절한 동욱의 외침과 “동욱아, 형이야!”하고 답하는 동철의 대사는 그 상황 자체로 보면 극적이고 가슴 절절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 장면이 답답하게만 느껴지는 것은. 차안에서 그 장면을 보던 국회장(유동근)의 “불 좀 켜 줘라”하는 대사는 따뜻한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결국 보는 이에게 참았던 실소가 터지게 만든다.

이런 장면은 이 드라마 속에서 자주 발견된다. 마카오에서 동철이 동생과 전화통화를 하는 장면에서도 이들은 그렇게 “동욱아!” “형!”을 반복해 소리쳤다. 오랜 세월을 지나 동철이 어머니 춘희(이미숙)를 다시 만나는 장면 역시 지나칠 정도로 길게 장면을 잡았다. 한참을 서로 쳐다보고, 아주 천천히 한 걸음씩을 떼면서 다가오는 동철에게 춘희는 “어딜 갔다 이렇게 지 아부지 마냥 훌쩍 커서 온겨!”, “왜 말을 못하냐! 예전처럼 말문이 막힌겨!”하고 반복해서 소리친다. 이 장면은 역시 극적이지만 떠오르는 건 멀리 서서 반복해 소리치는 “동욱아!” “형!”의 변주처럼 들린다.

이 절절한 가족애가 ‘에덴의 동쪽’이 승승장구하게 만드는 힘인 것은 분명하다. 김범이 연기했던 어린 시절의 동철이 동생 대신 방화의 죄를 뒤집어쓰고 기차에 올라 “너는 내가 사랑하는 동생이다!”라고 외칠 때 그 울림은 실로 컸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그런 말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표현 자체가 그들의 애틋한 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극적인 대사는 일상적인 어법에서는 어색하기 마련이다.

드라마 속에서 이런 극적인 대사의 활용은 적절하게 사용될 때 효과를 발휘한다. 반복적으로 활용되어 의도적으로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려는 강박관념이 작용할 때, 이 대사들은 힘을 잃어버리고 심지어 드라마의 현실성을 무너뜨린다. 거의 매 시퀀스마다 극적 상황을 연출하겠다는 강박관념이 강한 이 드라마는 따라서 거기 활용되는 대사들도 비일상적이다.

물론 연기력 부재에서 비롯한 바가 크지만 이연희의 연기력 논란은 이 비일상적 대사가 더 부추긴 이유도 있다. “벌써 날 사랑하게 된 거니?”같은 대사나, 혼자 읖조리는 듯한 톤의 대사들, 예를 들면 “충성스런 사냥개로군”처럼 “∼군”같은 어미로 끝내는 대사들은 연극에는 어울릴지 몰라도 일상언어를 추구하는 드라마로서는 부적격하다.

만일 지금이 8,90년대라면 이런 대사들과 어법들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당대의 드라마들은 아직까지 운명적인 사랑 같은 것들을 다룰 만큼 극적 스토리가 시청자들에게 충분히 호응을 얻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2008년이다. 운명적 사랑은 사극에서나 겨우 고개가 끄덕여질 정도로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대하는 태도는 달라졌다. 8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고 해도 이 드라마는 여전히 2008년도에 묶여있다.

운명적이고 극적인 것보다는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더 보편적인 이 시대의 드라마에 있어서 과도함은 부족한 것만 못하다. ‘에덴의 동쪽’은 스토리나 연기자들 소재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드라마임에 분명하지만, 지나치게 극적 장면에 집착하고 있다. 사실상 스토리 자체가 극적인 이 드라마는 오히려 좀더 절제하는 맛이 필요하다. 과도한 대사와 과도한 연출은 극적 상황마저 과장된 것, 혹은 우스운 것으로 바꾸어버릴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 세트 논란, 극 집중도 저하가 원인

대하사극 연개소문의 세트 논란이 거세다. 이밀(최재성 분), 양현감(이진우 분), 이화(손태영 분) 등이 왕빈, 연개소문 일행과 함께 사냥을 떠나는 장면에 노출된 성문 배경이 조잡하게 만들어진 세트의 티가 너무 났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이 나온 다음날 지적의 효과였는지 배경의 세트는 이화와 연개소문이 나란히 말을 타고 가는 장면에 너무도 명확하게 눈에 띄었다.

그런데 이 세트의 문제가 논란으로까지 비화된 것은 단지 세트를 너무 조잡하게 만들었기 때문일까. “400억 짜리 드라마에 합판 배경이냐”는 질책 속에는 400억이나 들여서 그것밖에 못 만드냐는 비아냥이 섞여있다. 세트 논란은 이 드라마의 집중도가 현저히 떨어져 이제는 서서히 그 증상이 나오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드라마가 보이지 않는 연개소문
집중도 저하의 가장 큰 원인은 드라마 전개에 있어서의 상투성이다. 현재 연개소문에서는 극중의 갈등, 즉 드라마가 잘 보이지 않는다. 연개소문이 처한 상황을 가만히 보면 그저 책을 읽고 사람을 만나는 유유자적만 있을 뿐, ‘대조영’만큼의 자기 출생에 대한 강렬한 욕구도 보이지 않고, ‘주몽’ 만큼의 고구려에 대한 희원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청년의 치기는 없고 오히려 중년의 느긋함이 엿보인다.

지금 연개소문은 처음의 무리한 설정(신라와 수나라, 그리고 고구려로 분할되어 전개되던 드라마)을 봉합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어느 한 장소와 인물로 집중시켜도 모자랄 판에 이렇게 나누어진 이야기 전개는 시청자의 극에 대한 몰입을 방해했다. 게다가 연개소문이 있던 신라쪽의 이야기 전개보다, 수나라의 양제 이야기가 갖는 무게감이 더해지자 문제는 더 심각해졌다. 연개소문이 수나라로 들어가면서 그나마 극의 집중도가 높아질 거라 예감했지만 여전히 연개소문이 머무는 왕빈의 집과 수나라는 따로 놀고 있다.

이렇게 되니 드라마가 생길 수가 없다. 드라마라고 해봐야 연개소문과 이화와의 멜로인데, 이것 역시 극적인 긴장감은 사라진 지 오래다. 연개소문이 나타나자 수많은 혼처를 거부하던 이화가 단박에 그에게 빠져든다는 설정만으로 어떻게 극적인 멜로의 느낌을 가질 수 있을까.

현대적 어법을 찾지 못한 상투적 대사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현대적 어법을 찾지 못하는 상투적인 대사들이다. “-사옵니다” 말투가 주는 어색함에다 의도가 뻔한 질문들과 자로 잰 듯 정확히 나오는 상투적 대사들은 극적인 긴장감을 떨어뜨리는 차원을 넘어서 실소를 자아내게까지 한다. 이화가 연개소문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은 너무나 설명적이고 구태의연해 마치 70년대 멜로 영화 속의 대사를 반복하는 느낌이다. 잠시 그 대사들을 되새겨보자.

연개소문이 포산공의 집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밖에 나와 그의 심복인 생해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이화가 나타난다. “어떻습니까. 소녀와 함께 말이라도 달려보시는 것이. 달빛이 아주 좋지 않사옵니까.”그리고 그들은 갈대 숲에 당도해 걷기 시작한다. “달빛이 좋지 않습니까.” “그런 것 같습니다. 낭자.” 그리고 이어지는 신라의 보희와의 일을 얘기하는 연개소문. 그 끝에 “외람된 이야기입니다만 소녀가 잠시 그 자리를 메꾸어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낭자 어떻게 그런 말씀을.” “많은 혼담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부다운 장부를 본적이 없습니다. 공자께서 처음이십니다. 이제 이유가 되겠습니까.” “낭자..” “다시 한 번 말을 달려 보시겠습니까.”

이런 상황에 오기까지 드라마 상으로 연개소문과 이화간에 벌어진 사건은 거의 없다. 그저 가끔 눈빛이 오고갔을 뿐이다. 물론 진짜 연애의 상황에서는 그럴 수도 있을 것이나 이것은 드라마다.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그들의 연애감정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할만한 사건이나 이야기가 존재해야 한다. 사건 없이 바로 이어지는 너무 직설적인 대사의 전개는 보는 이들을 낯간지럽게 만든다. 그러다 보니 이 장면들에는 필요 없는 대사들이 너무 많다. 멜로를 사건이 아닌 대사로서 설명하고 만들려는 것이다. 이로써 대사에 설명이 너무 장황해지는 드라마 작가로서는 가장 치명적인 함정에 빠지게 된다.

연령대로 나눠지는 대사의 층위
그러나 모든 대사가 그런 것은 아니다. 사극으로서 진짜 힘을 발휘하는 정치적인 대사들과 전개는 나무랄 데가 없다. 수양제의 캐릭터가 힘을 받는 것은 그걸 연기하는 김갑수의 힘이기도 하지만, 그런 대사를 적재적소에 잘 넣는 작가의 힘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것은 ‘연개소문’에서는 이 잘 맞아떨어지는 대사와 그렇지 못한 대사의 층위가 나누어진다는 점이다. 그것은 정확히 연령대로 잘라진다. 중년 이상의 캐릭터들은 대사가 연기와 잘 맞아떨어지지만, 청년 캐릭터들은 영 겉돌고 있다. 이것은 작가가 멜로보다는 정치적인 상황의 사극에 더 강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혹 요즘 젊은 감성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아무리 시청자대가 중ㆍ장년층이라 하더라도 젊은 캐릭터에 노회한 목소리를 넣는 것은 무리가 아닐까.

이제 드라마에서 배경은 그 드라마의 완성도를 말해주는 좋은 지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논란이 된 배경은 그다지 중요한 상황에서의 그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문제를 밖에서 찾게 만든다. 캐릭터에 한참 집중해야할 상황에(연개소문과 이화가 연애감정을 보여주는 장면) 시선을 배경으로 빼앗겼다는 점이 이 논란의 핵심이 될 것이다.

BLOG main image
더키앙
문화 속에 담긴 현실을 모색하는 곳
by 더키앙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4497)
블로거의 시선 (96)
네모난 세상 (4286)
SPECIEL (19)
문화 코드 (1)
생활의 발견 (23)
술술 풀리는 이야기 (4)
스토리로 떠나는 여행 (10)
책으로 세상보기 (8)
문화 깊게 읽기 (4)
스토리스토리 (24)
사진 한 장의 이야기 (4)
드라마틱한 삶을 꿈꾸다 (7)
대중문화와 마케팅 (9)

달력

«   2018/08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 13,089,853
  • 547533
textcubeget rss

더키앙

더키앙's Blog is powered by Tistory. / Supported by TNM Media.
Copyright by 더키앙 [ http://dogguli.tistory.com/ ]. All rights reserved.

Tattertools TNM M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