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표적인 연예 토크쇼 ‘야심만만’이 5년여의 긴 여정을 끝냈다. 한 때 20%에 육박하던 고공 시청률에 비해서는 쓸쓸한 퇴진이다. 시청률이 어느새 10%대 미만까지 추락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야심만만’의 추락을 불러왔을까.
재미와 정보의 균형이 깨지다 많은 이들은 프로그램 내적인 문제를 거론한다. ‘야심만만’은 설문 조사 결과 내용을 연예인들이 출연해 맞추는 형식의 토크쇼로 가장 특징적인 점은 그 맞추는 과정에서 연예인들의 사담이 자연스럽게 섞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첫 키스하기 좋은 장소는?’이란 질문이 나오면 MC는 연예인에게 ‘언제 첫 키스를 했습니까?’하고 묻는 식이다. 이런 진솔한 연예인들의 이야기는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미디어를 통해 회자되었다.
연예인들의 사생활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 알아본다는 두 가지 기능이 만나면서 ‘야심만만’은 재미와 정보를 모두 껴안을 수 있는 획기적인 토크쇼로 자리매김했다. 문제는 그 균형이 깨지는 지점이다. 영화나 드라마에 대한 홍보성 질문들이 설문으로 등장하고, 출연진 역시 홍보를 위한 인물로 맞춰지면서 심리에 대한 정보는 온데간데없고 프로그램은 연예인들의 신변잡기로 흐르게 되었다.
이것은 분명 ‘야심만만’이 추락한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초창기 ‘야심만만’은 연예인들의 진솔한 이야기(사실은 사생활에 가까운)를 끄집어내면서 인기를 끌었으나, 지나친 홍보성 포맷으로 인해 그 신뢰성을 잃게 된 것이다. 2007년 들어 급부상한 리얼리티쇼들은 한편으로 ‘야심만만’의 진솔한 이야기마저 홍보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몸 개그가 자리한 세상, 말은 독해진다 한편으로 몸 개그가 자리를 잡으면서 말은 점점 자리를 잡기가 어려워졌다. 리얼리티쇼가 주창하는 리얼리티는 말보다는 몸에 손을 들어주었다. 몸은 가식 없이 시청자들을 즐겁게 해줄 뿐 아니라, 점점 편집의 공포에서 짧아져만 가는 개그의 시간 속에서 순간적으로 웃음을 주기에 적합했다. 반면 말로만 진행되는 토크쇼는 점점 ‘연예인들이 출연해 저들끼리 노는 말장난’ 정도로 인식되어갔다.
물길이 막히면 물은 돌아가기 마련. 몸 개그가 자리한 세상에서 말이 생존할 수 있는 것은 더 커지고 독해지는 것이었다. 막말과 호통이 2007년도 예능의 키워드가 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말이 독해졌다는 것은 단지 막말개그와 호통개그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말이 담고 있는 내용 또한 그렇다는 것이다.
‘야심만만’의 밤이었던 월요일밤을 처음 잠식하기 시작한 것은 편성이 바뀌기 전 죄민수의 몸 개그가 작렬하던 ‘개그야’였다. 그러나 ‘개그야’의 편성이 바뀌면서 월요일 밤 토크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야심만만’은 물론이고 ‘지피지기’가 아나운서들을 내세워 토크를 시작했고 ‘미녀들의 수다’는 그 속에서 최강자로 군림했다.
‘야심만만’과 ‘지피지기’가 고만고만한 10% 미만대의 시청률을 기록한 반면 ‘미녀들의 수다’는 15% 정도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유는 논란을 몰고 다니는 몸과 말의 자극적인 배합 때문이다. 프로그램 명에서부터 익히 짐작할 수 있듯이 이 프로그램은 굳이 미녀들을 모아놓고 서로 다른 다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성희롱에 가까운 자극적인 이야기들을 끄집어낸다는 데 있다. ‘지피지기’는 아나운서라는 베일에 싸인 직업의 속살을 끄집어내면서까지 분투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몸이 부상하고 말이 가라앉은 세상, 자막이 뜨다 왜 하는 지 의미를 알 수 없는 도전에 기꺼이 몸 하나를 던져 웃음만을 끄집어내는 몸 개그가 급부상하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말이 독해지고 거칠어지고 커지면서 토크쇼가 하던 말의 본래기능은 자막으로 흡수됐다. 오로지 웃음을 만들기 위해 몸을 괴롭히는 행위에 대해 자막은 스스로 비하하거나 꼬집으면서, 오히려 그 몸 개그가 웃음만을 위한 것이란 점을 시청자에게 전달한다. ‘도대체 뭐 하는 짓인지’ 같은 자막들이 몸 개그와 함께 등장하는 식이다.
시선을 확 잡아끄는 몸 개그의 힘 앞에서 거칠어진 말은 과거처럼 편집되지 않는다. 이유는 이 프로그램들이 리얼리티쇼를 주창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본에 의한 대사가 아닌, 즉흥적인 애드립에 의존하는 말을 수위가 높다해서 편집을 해버리면 결과적으로 그것은 리얼리티의 손실로서 드러난다. 따라서 말 수위는 높게 하면서 그 균형점을 찾아내는 것은 자막이 맡았다. 출연진이 우연히 만난 청소부에게 실수로 비하에 가까운 말을 한다 해도, 자막은 이런 식으로 붙는다. ‘그래도 당신이 있어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이런 자막이 붙는 순간 그 출연진의 막말은 프로그램 자체가 매도시키는 셈이 된다.
알 수 없는 행동들과 순서가 없어 서로 뒤엉키는 거친 말들이 오고갈 때, 촌철살인의 자막은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끈다. 그러니 몸 개그의 시대에 말이 선 자리는 두 지점이 된다. 하나는 독해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막으로 남는 것이다. ‘야심만만’의 종방이 말해주는 것은 어느 정도 진정성을 갖추면 성공하던 토크쇼의 시대는 이미 지났다는 점이다. 이 리얼리티 시대에 강호동이 처한 입장은 토크쇼의 변화를 또한 말해준다. ‘야심만만’의 강호동은 가고, ‘무릎팍도사’의 강호동은 살아남는 시대다.
TV가 호통을 치고 면박을 준다. 물론 저들끼리 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결국 시청자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기에 그 호통과 면박은 고스란히 시청자에게 던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때론 욕보다 더한 비아냥을 한다. “이거 뭐야?” 여기서 이거라고 물건 대하듯 지칭한 대상은 물론 사람이다. 그것도 쇼프로그램이 게스트랍시고 출연시킨 출연자다.
젊은 여성연예인을 출연시켜놓고는 장기라고 보여주는 게 ‘혀 놀림’이다. TV를 보는 시청자에게 직접 하는 건 아니지만 그걸 보는 상황에서 이상하게 성희롱을 당한 기분을 갖게 되는 건 그의 혀 놀림이 결국 이편의 TV 앞에 앉아있는 시청자를 목표로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쇼 프로그램의 고정 출연자들 사이에 대화가 오가던 것은 이제 옛말이 되었다. 그들은 대신 삿대질을 하고 멱살을 잡는다.
사회는 다문화를 포괄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지만 TV는 공공연히 시대를 역행한다. 타국의 이색음식을 체험하는 자리에서 그들에게는 고급음식인 것이 우리에게는 혐오음식이 될 수 있는 것이지만, 거기에 노골적으로 호통을 치고 삿대질을 해댄다. 상대국에 대한 문화를 내놓고 비하하는 꼴이다. 이 정도 되면 TV는 차라리 과거 ‘바보상자’일 때가 나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된다. 만일 TV를 하나의 캐릭터로 비유할 수 있다면 요즘 TV는 건달도 못되는 ‘넘버3’ 정도로 보인다.
대표적인 막방(막 나가는 방송)은 ‘라디오 스타’다. 동명의 영화가 가진 아련한 향수의 이미지를 무색하게 만드는 이 방송은 게스트를 왕따 놓는 재미에 빠져있다. 게스트들은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지 않고 저들끼리 노는 꼴을 쳐다봐야 한다. 가끔 게스트에게 던지는 질문은 인신공격성이거나 루머 확대재생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로를 헐뜯고 깔아뭉개고 비난하고 무시하고 멱살을 잡는 게 이 방송의 컨셉트다. 어떻게 방송이 이런 수준에까지 오게 되었을까.
박명수로부터 시작된 호통개그는 사실 이경규 같은 개그맨이 이미 했던 개그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어떤 선이 있었다. 호통을 친 연후에는 그것이 개그였다는 것을 알려주듯 자신이 무너지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이 적절한 균형감각이 없을 때 호통개그는 개그가 아닌 자극만 남은 호통에 머물 수밖에 없다. 박명수 역시 이경규와 비슷한 형태로 시작되었지만 지금은 그 양상이 달라졌다. 호통은 이제 박명수를 넘어서 하나의 개그 아이콘이 되었다.
게스트를 출연시키는 쇼 프로그램에서 호통은, 쇼가 갖는 홍보성이나 연예인의 신비주의를 깨는 쾌감을 제공한다. 시청자들이 “저건 또 홍보네” 하고 짐작해 프로그램이 식상해질 때, 호통은 그 호통 받는 연예인의 감추어진 속내를 끄집어낸다는 점에서 통쾌할 수 있다. 쇼 프로그램들이 연출된 화면과 영화나 드라마 홍보에 치중하면서 떨어진 재미를 다시 끌어올리는 방식으로 쓰고 있는 건 리얼리티쇼다. 즉 호통과 면박은 리얼리티쇼의 한 방식으로 등장한 것으로 봐야 한다.
‘무릎팍도사’가 화제가 된 것은 게스트를 위한 홍보 프로그램의 이미지를 벗어냈다는 데 있다. 배틀 형식을 가지고 게스트가 고수하려는 신비주의를 벗겨내는 노골적이고 공격적인 인터뷰가 시대적 요청에 맞아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탈신비주의 전략은 특정 연예인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통과의례가 되기도 한다. 물의를 빚은 연예인들이 더 크게 욕을 먹는 것은 신비주의화되어 인플레이션되어 있는 이미지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이런 탈신비주의 프로그램 속에서 인간으로 재탄생하는 것은 그들에게는 선택이 아니라 살기 위한 필수가 된다.
지금의 ‘무릎팍도사’는 어떤가. 결과는 처음부터 나와있던 것이지만 또 다른 홍보전략의 하나로 활용되고 있다. 형식은 거칠지만 내용은 홍보다. 문제는 이렇게 인터뷰가 가진 본래의 목적이 왜곡되면서 나타나는 거친 말투와 상대방에 대한 배려 없는 언변이 자극적으로만 흐르는데 있다. 이렇게 되면 인터뷰가 목적하던 게스트의 진면목이 밝혀지는 재미는 사라지고 점점 욕에 가까운 말 잔치의 재미만 남게 된다는 점이다.
같은 리얼리티쇼를 추구하지만 ‘무한도전’이 ‘황금어장’의 두 프로그램, ‘라디오스타’와 ‘무릎팍도사’와 다른 점이 있다. 그것은 적어도 ‘무한도전’은 프로그램 목적에 부응하는 노동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 막노동에 가까운 상황 속에서 나오는 리얼한 말들은 그 자체로 어떤 건전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하지만 ‘황금어장’은 무성한 말 잔치로 시작해 말 잔치로 끝난다. 그 말이 어떤 기능을 할 때는 노동이라 할 수 있겠지만 저들끼리의 농담과 신변잡기(그것도 자극적인)에 머물 때 자칫 언어폭력으로만 끝날 수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방송들을 통해 우리 사회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게될 대화의 방식에 끼치는 폐해다. 대화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나 이해를 기반으로 이루어진다. 즉 소통을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방송이 보여주는 대화의 화법은 사라진지 오래다. 말 대신에 호통과 면박과 욕에 가까운 비아냥, 그것도 모자라 멱살을 쥐고 삿대질을 하는 TV 앞에서 우리네 아이들은 도대체 무얼 배우게 될까. 시청자를 희롱하는 TV,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 할까.
이영자의 ‘가짜 반지 소동’은 리얼리티쇼 시대에 과다한 시청률 추구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페이크 쇼(가짜를 진짜인 척 하는 쇼)의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혹자들은 이 사소한 일처럼 보이는 소동이 왜 이렇게 시끄러운 지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이른바 쇼는 쇼일 뿐인데, 왜 거기서 진실이냐 거짓이냐를 따지냐는 것이다. 일견 이러한 의견은 타당성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최근 들어 오락 프로그램들이 일제히 리얼리티쇼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이 문제의 핵심이 보인다. 우리는 이영자가 ‘경제야 놀자’란 쇼에서 과장되게 얘기한 사실이 엉뚱하게도 쇼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소라에게 악플로 나타났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이영자가 쇼의 재미요소로 끌어들인 것은 말 그대로 만들어진 쇼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이영자의 사생활 즉 리얼리티였다는 것.
즉 리얼리티쇼는 완전한 허구로 구성되는 코미디 프로그램과 달리, 시청자들이 받아들였던 리얼리티가 거짓으로 드러나는 순간 프로그램 자체의 진정성을 잃게 된다. 리얼리티쇼의 핵심이 진정성에 있기 때문에 이것이 훼손된다면 그것은 시청자의 웃음은 기만당한 셈이 된다. “그저 웃었으면 됐지 않냐”고 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마치 속은 채 웃은 뒤에 남는 ‘바보 된 느낌’은 시청자의 몫이지 거짓말한 자의 몫이 아니라고 하는 궤변과 같다.
몰래카메라, 과연 지금도 유효한가
쇼 프로그램이 현실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는 이런 사례는 이미 리얼리티쇼를 주창하고 나왔던 프로그램들에서 쉽게 찾아낼 수 있다. ‘몰래카메라’가 거의 매주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리얼리티쇼를 표방하는 이 쇼 프로그램이 늘 진위를 의심받기 때문이다. 연예인들의 숨기지 않은 맨 얼굴을 잡아낸다는 몰래카메라에서 억지스런 상황설정으로 ‘속지 않은’ 최진실의 모습을 발견한다든가, 작위적으로 오버하는 성시경의 모습을 본다든가, ‘속은 척 해주는’ 유세윤의 모습이 보인다든가 하는 것은 시청자들의 즉각적인 비판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진짜 속은 것인지, 아니면 속은 척 해주는 것인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쩌면 ‘몰래카메라’라는 프로그램 자체가 가진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처음 시도되었을 때는 그 몰래카메라의 주인공이 자신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연예인들이 이제는 몰래카메라 자체를 일상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몰래카메라’의 재미가 성립되려면 첫째, 베일에 쌓인 신비스러운 연예인이란 전제조건이 필요하고, 둘째 그 연예인의 겉옷을 벗겨내는 몰래카메라라는 비장의 무기가 잘 숨겨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여기에 부합되지 않는다. 연예인들은 신비주의를 벗고 생얼을 드러내는 것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었고, 여기서 몰래카메라는 오히려 홍보의 수단으로 활용되는 상황이다. ‘몰래카메라’가 의도했든 아니든, 본래의 의미를 상실하고 홍보의 또 다른 방식이 되는 지점에서 진실과 거짓에 대한 논란은 표출될 수밖에 없다.
무릎팍 도사는 과연 그들의 죄를 사해줄 수 있는가
‘무릎팍 도사’가 ‘물의 연예인 면죄부 프로그램’이냐는 논란은 이 리얼리티쇼가 가진 프로그램 진정성 역시 의심되고 있다는 방증이다. 연예인을 무릎 꿇리고 거침없는 질문공세로 맨 얼굴을 드러내게 만드는 ‘리얼 인터뷰 쇼’라는 애초의 의도는 희석되고, 물의를 일으킨 연예인들에게 오히려 변명의 기회를 주는 면죄부 프로그램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릎팍 도사가 인기를 끌면서 초심을 잃어버린 결과이다. 물의 연예인들이 매주 등장해 자신의 소회를 얘기하는 것은 좋지만, 결론적으로 무릎팍 도사가 ‘그들의 죄를 사해주는 것’은 시청자들을 무시한 오만한 행위로 비춰지기도 하는 것이다.
리얼리티쇼들은 그것이 진실을 끄집어낼 때 보여지는 날 것의 신선함으로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늘 그 신선함을 유지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단 쇼의 리얼함으로 인기를 끈 프로그램 제작자들은 조금씩 연출에 대한 유혹을 받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편집에 의해 이루어지기에 당연한 연출자의 권리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아무리 대본이 아닌 연예인들의 애드립으로 현장성을 높인 쇼 프로그램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편집이 가해지기 마련이며, 출연자들은 최종편집이 될 때까지 자신의 발언이 어떤 뉘앙스로 시청자에게 전달될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런 리얼리티쇼의 진정성 문제는 출연자들의 의도라기보다는 편집권을 가진 연출자들의 문제이다. 당장은 이야기가 가진 자극적인 뉘앙스에 유혹을 받는 것이 당연할 지라도, 그것은 멀리 볼 때 프로그램을 오래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편집은 프로그램의 진정성을 위해 쓰여져야지 프로그램의 시청률을 위해 쓰여져서는 안 된다. 그것은 리얼리티쇼에서 결국 제 살을 파먹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짐 캐리가 트루먼으로 나온 영화, ‘트루먼쇼’는 지금 우리가 TV에서 보는 거의 모든 장르를 포함하고 있다. 트루먼의 샐러리맨으로서의 삶과 사랑은 그 자체로 드라마이며, 그가 술집이든 집이든 직장이든 누군가를 유쾌하게 하기 위해 떠들어대는 농담은 그 자체로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트루먼이 매력적인 것은 굉장한 스타이면서도 정작 자신은 스타가 아닌 평범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한다는 점이다. 시청자는 이 트루먼을 24시간 엿보는 것만으로 감동과 슬픔, 분노, 행복, 유쾌함, 웃음 같은 TV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얻게된다. 이 ‘트루먼쇼’는 지금 우리 TV가 변화하고 있는 한 양상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TV라는 가상의 세계는 점점 더 실재의 세계를 넘보고 있고 그러기 위해 목숨을 걸고 ‘리얼리티’를 부르짖는다.
‘무한도전’, 쇼를 하라! ‘생(生)쇼’를 하라!
‘무한도전’이 ‘리얼버라이어티쇼’를 주창하고 나섰을 때 그것은 면면히 방영되어온 리얼리티쇼의 새로운 전기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이전 리얼리티쇼의 대부분은 이른바 사연을 보낸 시청자의 문제를 풀어주는 솔루션 리얼리티쇼였다. “이랬던 집이 이렇게 바뀌었습니다”하면 와하며 놀라는 얼굴로 감동하는 사람들. 대표적인 솔루션 리얼리티쇼가 ‘러브하우스’였다. 이것은 국민공감프로젝트란 기치를 걸고 방영되어 화제를 모았던 ‘느낌표’ 역시 마찬가지였다. 솔루션 리얼리티쇼에서 연예인들은 도우미의 역할이었지 어디까지나 그 중심은 사연을 보내온 시청자들의 리얼리티에 맞춰져 있었다. 그러나 ‘무한도전’에 와서 그 리얼리티는 연예인 당사자에게 맞춰진다. 유재석, 정준하, 박명수, 노홍철, 하하, 정형돈으로 구성된 연예인단에게 미션이 떨어지고 그 미션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가감 없이(?) 담는다는 것이 프로그램의 의도. 그간 오락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기획 연출된 재미에 질력이 난 시청자들은 폭발적으로 반응했다.
필요한 것은 던져진 상황에 따라 넘치는 끼로 재미를 만들어 가는 캐릭터이지 기획된 대본에 맞춰 대사를 읊는 출연자가 아니었다. 연출보다 중요해진 것은 순발력과 애드립이었다. 좌충우돌 쏟아져 나오는 말들은 어떤 식으로든 정리되어져야 했기에 자막은 또 하나의 출연자가 되었다. 그 틀 안에서 여섯 명의 캐릭터는 말 그대로 트루먼처럼 생(Live, 生)쇼를 한다. 그 안에서는 유재석과 마봉춘 나경은 아나운서와의 열애사실 같은 개인적인 사생활도 가십처럼 쏟아져 나온다. 연예인의 리얼리티쇼라는 점에서 ‘무한도전’이란 프로그램 바깥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다시 프로그램 안에서도 다루어진다.
리얼리티에 도전한 ‘무한도전’의 한계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저 트루먼처럼 날 것의(生) 쇼일까. 여기에 ‘무한도전’이 갖는 리얼리티쇼로서의 의미와 한계가 드러난다. ‘무한도전’의 출연자들이 보여주는 리얼리티란 진짜 개인으로서의 맨 얼굴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실제 얼굴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연예인으로서의 맨 얼굴일 뿐이다. 그것이 실제 얼굴처럼 보이는 것은 보통의 TV스타들이 당시 지향하던 신비주의의 반대방향으로 ‘무한도전’은 무한질주를 해왔기 때문이다. 무모한 도전과 무리한 도전을 거쳐 ‘무한도전’의 출연자들은 과거와 달리 ‘굴욕을 당하는’ 현재의 캐릭터들로 만들어졌다. 그 굴욕은 도전이란 의미로 상쇄되고 그 도전은 반응을 끌어내면서 각자에 맞는 캐릭터가 창출되었다. 출연자들의 캐릭터는 끌어내려지면 내려질수록 리얼리티에 가깝다고 느껴졌다.
문제는 ‘무한도전’이 인기를 끌면서 그 출연자들 역시 인기가 상승되었다는 데 있다. 인기를 얻기 전의 굴욕적인 모습들은 더 이상 ‘무한도전’ 속에서 다루어지기 어려워졌다. 그것이 아이러니하게도 ‘무한도전’이 리얼리티쇼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롯된 자가당착이다. 무한도전은 이미 톱스타가 되어버린 캐릭터들의 리얼리티에 걸맞는 도전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패션모델이나 드라마 주인공처럼 톱스타가 톱스타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자 ‘무한도전’의 리얼리티는 떨어지기 시작했다. 시청률 하락의 원인이다. 하지만 ‘무한도전’은 트루먼쇼화 되어 가는 TV의 모습을 징후적으로 보여주는 과도기적 프로그램으로서의 의미가 있다. 어쨌든 식상한 기획 프로그램을 넘어서기 위해 TV의 리얼리티라는 미션을 두고 벌인 ‘도전 한 판’은 성공적인 셈이다. 이제 그 바통은 ‘무릎팍 도사’가 이어받는다.
도사가 무릎 꿇린 연예인의 맨 얼굴
무릎팍 팍팍! 이 단순한 구호는 마치 주문 같다. 이 주문 앞에 연예인들이 그간 숨겨온, 혹은 숨기고 싶었던 맨 얼굴은 TV라는 마법의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공개된다. 다음날 인터넷에는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폭탄선언을 한 연예인들의 말들이 기사가 되어 뉴스를 장식한다. 쇼는 쇼일 뿐이라고? 적어도 ‘무릎팍 도사’의 경우 쇼는 그저 쇼가 아니다. 쇼는 바로 리얼리티며, 그 리얼리티는 마치 ‘트루먼쇼’의 트루먼의 일상처럼 연예인들의 실제상황을 보여주는 좋은 기사거리가 된다. 현실과 쇼가 묘한 동거를 시작하는 곳, 바로 ‘무릎팍 도사’라는 코너다.
형식은 간단하다. 연예인이 도사 앞에 질문을 가지고 등장하고, 무릎팍 도사 강호동과 거만한 도사 유세윤, 그리고 올라이즈 밴드는 거침없는 질문공세를 퍼부어 출연자의 속내를 드러내게 한다. 중요한 것은 이 인터뷰 형식이 대결구도를 가진다는 점. 무릎팍 도사 측은 출연자가 얘기하지 않으려는 당혹스런 부분을 끄집어내 진실(?)을 밝히려 하고 출연자는 거기서 벗어나려 때론 땀을 뻘뻘 흘리고 때론 공세를 취해 강호동을 당혹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연예인의 사생활을 파고드는 시도는 이미 ‘야심만만’을 통해 실험된 적이 있다. ‘야심만만’은 어떤 안건에 대하여 마치 설문조사를 하는 듯 포맷이 구성되어 있으나, 사실은 그 질문들을 통해 연예인들의 사생활을 끄집어내는 것으로 재미를 추구하는 프로그램이다. 하지만 ‘야심만만’은 질문 자체나 출연자를 영화나 드라마 홍보의 수단으로 만들면서 프로그램의 리얼리티를 한없이 떨어뜨렸다. ‘무릎팍 도사’는 리얼리티 떨어진 ‘야심만만’이 갖고 있는 약점을 대결형식과 좀더 과감해진 질문, 그리고 인터뷰형식의 관건인 적절한 출연자 선정으로 보완한다. ‘연예인의 맨 얼굴 드러내기’라는 리얼리티쇼의 본질을 ‘야심만만’처럼 우회적인 방법이 아닌 보다 직접적으로 건드린 것이다.
‘무릎팍 도사’, 연예인 탈신비주의와 손잡다
질문은 시청자가 당혹스러울 정도이다. 노골적인 질문공세는 마치 저 ‘제리 스프링어쇼’를 연상할 정도. 그런데 일반인도 아닌 연예인들이 왜 무릎팍 도사의 부름에 기꺼이 출연해 무릎을 꿇는 것일까. 그것은 달라진 연예인들의 이미지 마케팅 전략에서 비롯된다. 이제 연예인들은 더 이상 스타로서 저 하늘 꼭대기에만 있어서는 전혀 빛을 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과거의 스타란 신비의 베일에 싸여 있을수록 빛을 발했다면, 현재의 스타는 우리와 같은 눈높이여야 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살아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연예인들의 스타로서 범접할 수 없는 이미지와 함께, ‘생얼’과 깨는 이미지의 ‘직찍사’가 유포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여기에는 연예인들의 신비주의가 이제는 위험한 이미지 관리방법일 수밖에 없는 환경이 한몫을 차지한다. 누구나 손에 휴대폰이라는 카메라를 들고 다니고 그렇게 우연히 찍힌 사진은 인터넷을 통해 순식간에 유포되는 세상에서 신비주의를 주창한다는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갖고 온 새로운 전략은 신비주의와 탈신비주의를 적절히 구사하는 것이다. 이효리는 뮤직비디오와 스테이지 위에서는 섹시코드의 대명사로 신비주의 전략을 구사하지만 무대를 내려오면 바로 탈신비주의로 돌아간다. 편안한 누나 같고 털털한 여자친구 같은 이미지를 동시에 갖게 하는 것이다.
여기가 ‘무릎팍 도사’와 거기 출연하는 연예인들이 만나는 지점이다. ‘무릎팍 도사’는 달라진 환경 속에서 또한 달라져야 하는 연예인의 탈신비주의 전략을 만족시킨다. 그래서 ‘무릎팍 도사’는 누구든 그 속에 들어갔다 나오면 털털한 보통사람이 되는 마법의 프로그램이다. 그래서 과거 방송을 통해 어떤 문제를 일으켰거나 물의를 일으켰던 연예인들은 기꺼이 이 프로그램에 들어가 감췄던 그 문제를 오히려 들추어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릎팍 도사’는 살벌한 질문들을 통해 진솔한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풀어내는 한바탕 살풀이를 하게된다. ‘무릎팍 도사’의 복장과 캐릭터 설정이 신기 오른 무당을 표방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살풀이를 하는 기능과도 맞닿는다.
쇼는 그저 쇼가 아니다
그런데 TV 속에서 벌어지는 이 살풀이는 그저 쇼가 아니다. 다음날이면 대문짝만하게 인터넷을 장식하는 현실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 역시 저 ‘무한도전’이 그러했듯이 연예인들의 실제 맨 얼굴이라기보다는 연예인으로서의 맨 얼굴일 뿐이다. 하지만 그것이 시청자와 연예인이 만나는 지점이기에 그것은 리얼리티가 된다. ‘무한도전’이 프로그램 속의 출연자들에게 리얼리티를 부여해 그들의 인기상승과 함께 프로그램의 인기하락이라는 자가당착에 빠진 반면, ‘무릎팍 도사’는 매번 외부인물을 끌어다가 인터뷰 배틀이란 형식으로 외부 출연자의 리얼리티를 끄집어낸다는 점에서 이점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고정 출연자에게 있다. 그것은 ‘무릎팍 도사’가 하는 질문이 과연 진짜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오히려 해명을 위한 질문인지가 헷갈리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발생한다. 후자로 가게된다면 이 트루먼쇼는 가짜임이 판명날 것이고 그 결과는 저 ‘야심만만’이 가게된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TV는 더 이상 바보상자가 아니다. TV는 더 이상 그저 그 앞에 사람을 멍한 표정으로 앉혀놓는 상자가 아니다. TV 속의 ‘난장이들’은 이제 현실세계로 빠져나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화면 속에 비춰지는 세계는 화면 밖의 세계가 되었다. 쇼가 일상이 되었다는 걸 알리듯 TV는 소리친다. 쇼를 하라! 생쇼를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