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파’라는 용어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많다. 그 용어는 주로 최루성 멜로물, 자극적인 설정 남발, 뻔한 소재와 스토리 전개처럼 구태의연하고 식상한 스토리텔링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그러니 현재의 작품을 얘기할 때, 신파적이라는 말은 절대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 부정적인 의미의 신파 코드들이 여전히 문화 전반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고, 때로는 호평받는 작품 속에서도 발견되며, 심지어는 이 코드를 버리고서는 대중성을 얻기가 어렵다고까지 말한다.

시청률 45%를 넘긴 국민 드라마 <찬란한 유산>을 흔히들 착한 드라마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호칭은 작가 스스로도 밝혔듯이 애매한 구석이 많다. 이 드라마는 물론 주제가 착하지만, 드라마의 극적 구성으로 보았을 때 여타 자극적인 드라마와 크게 다르지 않은 탓이다. 아무리 계모라 해도 남편이 죽자(실은 살아있지만) 자식을 내치고 그 유산을 가로채고, 그것도 모자라 정신지체인 은성의 동생 은우까지 멀리 내다버리는 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막장 드라마’에 견주어도 모자라지 않은 자극이다.

그런데 이 극과 극을 치닫는 대립의 세계 속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이른바 신파 코드(이것은 신파라기보다는 신파적인 코드들을 활용하는 것을 지칭한다)라고 부를 수 있는 것들이다. 계모에 의해 버려졌지만 착한 심성으로 하늘이 도와 결국, 잘 살게 되는 이야기 구조는 우리네 고전적인 이야기 속에 단골로 등장하는 것으로, 신파의 전형적인 스토리텔링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찬란한 유산>의 고은성이 계모 백성희로부터 버려지지만, 그 착한 심성으로 거의 신적인 존재인 장숙자 여사(반효정)의 구원을 받는(게다가 왕자님인 선우환(이승기)까지!) 이야기는 소재적으로나 극적 구성에 있어 신파 코드를 잘 활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신파 코드의 활용은 이미 우리네 드라마에서 흔한 것들이다. 대표적인 신파 코드인 출생의 비밀은 최근 드라마들만 예로 들더라도 쉽게 발견된다. 시대극을 표방한 <에덴의 동쪽>이 그렇고, 다시 리메이크된 <미워도 다시 한 번> 역시 그러하며, 심지어 최근 방영되는 사극 <선덕여왕>이나 블록버스터 드라마를 표방하고 있는 <태양을 삼켜라>에서도 이 코드는 여전히 유용하게 활용된다. 그 이유는 그 신파적인 코드가 자극적인 감정 분출을 쉽게 끄집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때 유행했던 막장 드라마는 바로 이 자극적인 감정 분출의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 신파적인 코드들, 예를 들면 출생 비밀, 불륜, 불치 같은 소재들을 섞어 심지어 개연성을 무시하고 나열했던 드라마들이다.

한때 이러한 신파 코드들이 활용되는 드라마들이 외면받았던 적이 있었다. 이른바 트렌디물이라 불리던 멜로 드라마들의 퇴조와 미국 드라마(미드) 열풍으로 일어난 전문직 장르 드라마의 환호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것으로 과연 신파적이고 트렌디한 멜로 드라마는 사라졌을까? 잠깐 그런 것처럼 보였지만 상황은 다시 역전되었다. 전문직 장르 드라마에 대한 호평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호응은 낮았기 때문이다. 즉, 이성적으로는 감정 과잉 드라마가 식상하다고 얘기하고 있었지만, 감성적으로는 바로 그러한 드라마에 마음이 움직였다는 것이다. 현재 이른바 전문직 장르 드라마들은 이제 미드식의 장르 드라마를 구사하면서도 그 안에 우리식의 신파 코드를 반드시 끼워 넣는다. <카인과 아벨>은 의학 드라마에 가정 비극(이 코드는 <찬란한 유산>과 유사하다)을 넣었고, <태양을 삼켜라>는 액션 드라마에 트렌디한 멜로 구조를 끼워 넣었다.

신파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된 느낌을 주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그 신파가 주로 다루는 감정의 분출을 근간으로 삼는 콘텐츠들은, 드라마는 물론이고 연극, 소설, 대중음악 등에서도 하나의 지류를 이루고 있다. <친정 엄마와 2박3일> 같은 연극은 암에 걸린 딸이 친정 엄마를 찾아가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전형적인 신파조의 극으로 연일 매진 사례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된 데는 신파가 가진 부정적인 의미들 즉, 틀에 박힌 대사나 연출 등을 벗어나 같은 소재라도 새롭고 진지한 접근을 하려는 노력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편, 2009년 상반기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꼽히는 신경숙 작가의 <엄마를 부탁해>의 성공 역시 바로 이런 시각으로 읽어낼 수 있다. 신파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 신파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신경숙 작가의 스토리텔링에 대중들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또한, 대중음악에 있어서 신파적인 코드들은 주로 외환위기 시절에 활용되었었다. 조성모의 <아시나요> 같은 곡이 대표적이다. 나중에 등장한 이른바 소몰이 창법들의 창궐과 퇴조는 신파 코드가 가요에 있어서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를 대변해 준다. 현재 발라드 가수들은 여전히 신파 코드가 담겨진 노래를 부르고 있지만 예능 프로그램 출연 같은 웃음의 코드를 동시에 들고 있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가수가 트리플 크라운(드라마, 가요, 예능 프로그램)의 주인공인 이승기라고 할 수 있다. 여러 분야 진출은 다양한 감정의 분출을 통해 캐릭터의 균형을 잡아준다. 이것은 마치 <찬란한 유산>이 구사한 감정의 양면 전략과 유사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드라마는 물론이고, 연극, 소설, 대중가요에까지 신파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늘 어떤 시기에 새로운 옷을 입고 우리에게 얼굴을 내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신파가 가진 어떤 힘이 우리네 문화 속에서 그 끈질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것일까. 우리는 흔히 ‘한국식’이라는 수식어를 즐겨 사용한다. ‘한국식’ 블록버스터, ‘한국식’ 액션, ‘한국식’ 의학 드라마 등등. 그런데 여기서 ‘한국식’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우리네 정서 속에 자리한 특유의 ‘감정 중심 문화’와 ‘특유의 끈끈한 관계의 문화’가 들어 있다. 우리는 아직까지 할리우드식의 아드레날린 과잉의 드라마나 영화에 익숙하지가 않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끈끈한 관계에서 비롯되는 감정의 폭풍, 혹은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는 콘텐츠에 더 익숙하다. 외국의 문화 콘텐츠들이 하드보일드한 감정 배제의 스토리텔링을 할 때, 우리는 끝없이 감정을 터뜨리고 끌어올리는 스토리텔링에 천착한다. 이것은 볼거리 위주의 콘텐츠들이 갖는 대규모의 투자와 대규모의 소비로 이루어지기가 어려운 우리네 문화 산업의 특징과도 연관이 있다. 우리는 볼거리보다는 그 속에 있는 인물에 집중함으로써 물량 투자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작품은 물론이고 작품을 제작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에게 문화 콘텐츠는 여전히 인력에 의지하는 산업이다.

흔히들 신파라고 말하면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 마련이다. 그 상투적인 설정과 뻔한 스토리, 게다가 그런 스토리에 저도 모르게 눈물까지 흘리고 나면 이성적인 문화의 소비자들은 도리어 기분이 나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감정에 치중하는 우리식의 문화 경향을 모두 후진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스토리텔링이란 그 나라의 문화적 특징을 부정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감정 중심의 스토리텔링이 갖는 힘을, 어떻게 하면 우리가 흔히 신파라고 했을 때 갖게 되는 부정적인 인상을 제거하면서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더 발전적인 것이 아닐까.(이 글은 시사저널에 게재된 글입니다)

‘카인과 아벨’, ‘미워도 다시 한번’, 가족의 힘 여전

종영한 수목극 ‘카인과 아벨’과 ‘미워도 다시 한번’은 장르적으로 보면 상이한 드라마다. 하지만 한 꺼풀 벗겨놓고 보면 그 구조는 비슷하다. 두 드라마는 모두 그 중심에 뒤틀어진 가족사가 있으며, 그 가족 내에서 사랑 받기 위해 대결구도를 벌이는 인물들이 있고, 파국으로 치닫는 가족이 있으며, 결말에 이르러 본래 제자리를 찾아가는 가족이 있다. 결국 이 두 드라마는 스타일과 장르가 달랐지만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같았던 셈이다. 그것은 우리 드라마의 영원한 주제, 가족이었다.

‘카인과 아벨’의 엇갈린 가족사는 형이 동생을 죽이려 하고, 어머니(물론 친어머니는 아니지만)가 자식을 죽이려 하며, 형이 동생의 여자를 뺏으려 하고, 어머니가 자식의 유산을 가로채려하는 파국적인 양상을 보여준다. 부모 대에서부터 시작된 연원이 자식대로까지 반복되는 이 불운의 가족사는 저 제목이 말해주듯 꽤 오랜 전통(?)을 가진 본원적인 스토리 라인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카인과 아벨’이라는 드라마 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은 그 스토리가 가진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기 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종영에 이르러 이 드라마가 전하는 메시지를 정리하면 ‘사랑 받기를 갈구하는 자들을 구원해주는 행복했던 기억’ 정도가 될 것이다. 이 드라마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나혜주(김해숙)와 아버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이선우가 결국 비뚤어지게 사랑을 갈구하는 이야기이고, 그 과정에서 사랑을 독차지해온 것처럼 보인 이초인(소지섭)이 사지에 내몰렸다가 살아 돌아와 모든 것을 원상태로 돌리는 이야기다. 이초인의 마지막 진술로 보자면 이런 아픔들을 구원해주는 것은 누구나 하나쯤은 있는 ‘행복했던 기억’이 된다.

그간 접어두었던 기억의 문제는 이렇게 마지막 부분에서 등장하면서 다소 성급한 결론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이렇게 제시되는 메시지는 사실 이 드라마가 가진 힘을 설명해주기에는 역부족이다. 메시지를 떼놓고 보면 이 드라마가 보여준 것은 파괴 직전까지 내몰리는 한 불행한 가족사라고 볼 수 있다. 해체되는 가족에 대한 집착, 가족 구성원으로 편입되려는 안간힘 같은 것이 이 드라마의 진짜 힘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핏줄과 가족에 대한 드라마의 집착은 왜 우리네 드라마에 파탄난 가족들이 그렇게 많이 등장하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미워도 다시 한번’은 우리네 드라마의 전형적인 핏줄 정서를 보여주는 드라마다. 1968년 정소영 감독이 동명의 원작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파국적인 가족이야기는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스타일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반복된다. 그것은 이 드라마의 복잡한 가계도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명진그룹 회장인 한명인(최명길)은 남편 이정훈(박상원)사이에 아들 이민수(정겨운)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민수는 이정훈의 친아들이 아니고 한명인의 첫사랑의 소산이며 한편 이정훈과 내연관계에 있는 은혜정(전인화)은 그와의 사이에 딸 수진(한예인)을 두고 있는데, 사실은 숨겨진 딸 최윤희(박예진)가 하나 더 있다.

이처럼 이 드라마는 한 명씩 과거에 숨겨져 있던 가족과 관련된 인물들을 하나씩 불러들임으로써 극의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그 첫 번째는 이정훈의 숨겨진 내연녀 은혜정이고 두 번째는 죽은 줄 알았던 한명인의 첫사랑이며, 세 번째는 은혜정의 숨겨진 딸 최윤희다. 실로 제목처럼 미워도 다시 한번 끄집어내 뒤틀렸던 가족사를 제자리로 돌리려는 욕망이 이 드라마가 굴러가는 진짜 힘이다. 이 과정에서 과거로부터 소환된 인물들은 끊임없이 현재 유지되어 있는 가족을 뒤흔든다. 과거와 현재의 충돌, 그로 인해 위기에 처하는 가족, 그리고 어떤 화해(어떻게든 되어야만 하는). 이것은 고전적인 가족극의 전형이다.

종영하는 두 드라마는 모두 공교롭게도 이처럼 뒤틀린 가족의 제자리 찾기를 보여준다. 그런데 결말에 이르러 이들 드라마들이 모두 어딘지 급하게 마무리되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어쩌면 이들 드라마들의 힘이 끊임없이 파괴되어가는 가족의 모습(그래서 그걸 지키려고 안간힘을 쓰는 반대급부의 힘까지) 그 자체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실상 이들 드라마가 주목한 것은 그 끊임없이 파탄 일로를 달리는 가족들의 대결과정 그 자체이지, 어떤 제자리를 찾아가는 결말이나 메시지는 아니었던 셈이다. 어쨌든 우리에게 가족이라는 단어가 주는 끈끈함은 이번 종영하는 이 두 드라마를 통해서도 입증된 셈이다.

우리 드라마, 그 임신 권하는 세상이 말해주는 것

드라마 ‘미워도 다시 한번’의 가계도는 실로 복잡하다. 명진그룹 회장인 한명인(최명길)은 같은 회사 부회장인 이정훈(박상원)과 부부이고 그 사이에 아들 이민수(정겨운)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민수는 이정훈의 친아들이 아니다. 한명인의 첫사랑의 소산이다. 한편 이정훈과 내연관계에 있는 은혜정(전인화)은 그와의 사이에 딸 수진(한예인)을 두고 있는데, 사실은 숨겨진 딸 최윤희(박예진)이 하나 더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녀가 한명인의 며느리로 들어오면서 관계가 복잡해진다. 이정훈을 사이에 두고 한명인과 은혜정은 서로 치열한 대결을 벌이고 있는데, 최윤희의 존재는 이 둘 관계를 나락에 빠뜨린다. 최윤희의 시어머니인 한명인이 죽기살기로 대결을 벌이는 이가 자신의 친어머니(은혜정)가 되고, 시아버지가 된 이정훈은 갑자기 친아버지가 된다....

이 가계도는 사실 정리하면서도 헷갈릴 정도다. 그런데 이 관계의 거미줄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지나치게 엮여져 있는 관계들의 기저에는 자식문제가 지뢰처럼 놓여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극단적인 드라마 구조 속에서는 제 자리에 서 있는 자식이 거의 없다. 이민수는 자신의 친아버지가 죽었다 생각하며 살아오고, 최윤희는 자신이 은혜정의 딸인 줄도 모르고 살아온다. 흔히들 식상한 표현으로 ‘출생의 비밀’이라는 코드는 이 드라마의 중심 모티브가 된다. 그런데 나이가 지긋이 든 중년들이고 이제 사회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인물들이라 가려져 있는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미혼모의 문제다. 한명인은 젊은 시절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첫사랑과 사랑의 도피행각을 벌였고 그 사이에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고, 은혜정은 미혼이면서도 내연관계인 이정훈과 두 명의 딸이나 둔 셈이다.

희한한 일이지만 이들의 미혼모 문제가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 것은 이들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기 때문으로 보인다. 우리에게 미혼모의 문제는 주로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비춰지곤 한다. 상대적으로 윤리적인 문제나 도덕적인 문제는 회피되어 있다. 이것은 이 미혼모의 문제가 여전히 여성들의 문제라는 가부장적 사고관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에서 물론 남성들은 입만 열만 “미안하오. 잘못했소.”를 연발하지만 그 뿐이다. 이 저질러진 상황 속에서 허우적대고 악다구니를 하며 싸우고 있는 건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미혼모 문제에 대한 이런 시각은 1968년 정소영 감독이 동명의 원작 영화에서 보여준 시각에서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유부남인 줄 모르고 사랑에 빠지고 아이까지 갖게 된 혜영(문희)이 후에 그 사실을 알고 홀로 아이를 낳아 기르다가 아이가 성장하자 아버지에게 아이를 보낸다는 이 모성을 자극하는 신파적인 이야기는 미혼모의 문제를 가부장적인 시각으로 다루고 있다. 무책임한 신호보다는 불쌍한 혜영에 더 집중해 신파적 감성을 이끌어냈던 것이다. 40여 년이 지났지만 달라진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당연한 것인지 모르지만 우리네 드라마에서 임신이란 당연히 해야만 하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결혼한 신혼부부에게 부모들은 임신을 지상과제처럼 강권하고, 만일 피임이라도 하다가 들키는 날에는 마치 아이라도 지운 것 마냥 지탄을 받는다. 그래도 결혼한 사이라면 그나마 이런 설정들은 그럭저럭 받아들일 수 있겠다. 하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종종 드라마들은 피임이라는 문제를 회피하기 일쑤다. 과감한 성담론을 다루어 화제를 모았던 2006년 작 ‘여우야 뭐하니’에서 콘돔이 등장하고 솔직한 피임의 이야기들이 나왔을 때, 선정성 논란이 불거졌던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도대체 피임이 왜 선정적인가.

피임의 문제가 이처럼 은근히 회피되면서 드라마 속에 문제의식으로 드러나는 것은 낙태의 문제다. 낙태는 종종 공포의 하나로 취급되는데, 그것은 은폐하려 했던(그래서 여성들만이 그것을 대면하는) 끔찍한 결과를 그대로 드러내놓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드라마가 1994년도에 제작되었던 ‘M’이다. 낙태된 아기의 영혼이 낙태에 직면한 여성의 몸 속으로 들어와 복수를 한다는 이 이야기는 ‘전설의 고향’에서부터 변주되던 소재들이다. 이 드라마는 최근 ‘아내의 유혹’의 제작사인 신영이앤씨에서 올 여름 리메이크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낙태의 문제 역시 과거와 달라진 점이 별로 없다는 걸 말해주는 대목이다.

우리 드라마가 여성들을 다루고 있는 방식은 ‘아내의 유혹’처럼 첫 회부터 교빈(변우민)이 은재(장서희)를 강제로 아이를 갖게 해 결혼을 하고 내연녀를 낙태시키고 비서를 성희롱 하는 것처럼 직설적인 면도 있지만, 도무지 누가 누구의 자식인지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미워도 다시 한번’처럼 그 이면에 왜곡된 시각을 숨겨 두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주로 임신 권하는 사회(혹은 피임을 죄로 취급하는)의 모습으로 드러나거나, 낙태를 여성의 고통스런 문제로만 내면화하는 형태를 띄기도 한다.

만일 드라마 속에서 한 주부가 6개월 치씩 피임약을 사서 먹는 에피소드가 등장하고, 그것도 이유가 몸매 때문에 아이를 원치 않아서(물론 섹스는 좋아하지만) 결혼 후 몇 년 동안 계속 피임을 해온 것이라면 그 사실을 알게된 가족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것은 ‘위기의 주부들’이라는 미드의 한 에피소드이다. 이 드라마에서는 남편이 피임약을 버리고 대신 비타민약을 넣어두어 결국 임신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알게된 부인에게 남편이 한바탕 혼이 나는 장면이 나온다. 또 ‘프렌즈’에는 한 집 살이 하는 두 여자친구가 각각 남자친구를 데려왔는데 콘돔이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아 콘돔내기(?)에 진 여자가 “오늘은 안되겠다”고 말하는 에피소드가 나온다. 물론 우리네 정서하고는 거리가 먼 얘기지만 적어도 임신에 대한 남녀의 동등한 시선만큼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임신 권하고 피임을 죄악시하는 남성적 시각이 만들어낸 ‘미워도 다시 한번’의 그물 같은 가족관계를 언제까지나 미워도 다시 한번 봐야하는 걸까.


작품이 배우를 따라주지 못할 때

‘카인과 아벨’에서 소지섭의 눈빛 연기는 정말 소름이 끼칠 정도다. 슬쩍 웃기만 해도 뭇 여성들의 가슴이 설렐 정도라는데, 남자가 봐도 충분히 그럴만하다고 느껴진다. “그렇다고 형이 동생을 죽여?”하고 소리치며 분노에 충혈된 눈을 볼 때면 이 광기의 배우가 가진 깊이가 어디까지일까 새삼 가늠하게 만들기도 한다. ‘카인과 아벨’에 소지섭이 있다면, ‘미워도 다시 한번’에는 최명길이 있다.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이다가도 순간 무너지면서 보여지는 아픈 속내를 드러낼 때면 그 고통이 뼛속까지 전달되는 느낌이다.

물론 이들 드라마에는 소지섭과 최명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연기는 앙상블이어서 받쳐주는 사람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자칫 드라마에 독만 된다. ‘카인과 아벨’에서 소지섭을 받쳐주는 악역으로서의 신현준이나, 상대역으로서의 한지민의 연기도 발군이다. 마찬가지로 ‘미워도 다시 한번’에서 최명길과 대립각을 이루는 전인화나 적과 아군을 넘나드는 최윤희 역할의 박예진 역시 대단한 연기를 보여준다. 우리는 이런 연기에 ‘명품 연기’라는 호칭을 주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작품들이 ‘명품 연기’에 걸맞는 명작일까. 이 질문에는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카인과 아벨’은 지나치게 많은 소재와 장르들을 덧붙였다. 그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제대로 소화해냈는가 하는 점이다. 의학드라마에 복수극에 가족극에 액션, 멜로까지 거의 모든 소재와 장르들이 드라마의 전반부를 장식하며 온갖 기대감을 갖게 만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종반에 다다른 시점에서 이 드라마는 그 많은 소재에 어느 것 하나 깊이 있는 접근을 해주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전반부를 사로잡았던 기억의 문제는 후반부의 피투성이 형제간의 싸움 속에서는 아무런 연결고리를 갖지 못하고 있다. 또 의학드라마의 변용이라고 할 수 있는 ‘상대방을 죽일 수도 있는’ 의학이라는 측면은 어떤 고민이 배제됨으로써 그저 복수극의 한 방식으로만 활용된 측면이 있다. 멜로에 있어서도 그 중심축이 본래는 형과 아우 사이에 서 있는 김서연(채정안)에 초점에 맞춰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오영지(한지민)쪽으로 편향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출생의 비밀이나 서자와 적자 간의 대결 같은 소재는 이제는 좀 식상한 면이 있다. 드라마 진행에 있어서도 그토록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악역 최치수(백승현)가 너무 쉽게 처리되는 모습에서는 어떤 허탈함까지 느끼게 만든다.

이것은 ‘미워도 다시 한번’에서도 마찬가지다. 초반부 중년의 사랑을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듯한 스토리 라인에서 갑자기 치정극으로 치닫던 드라마는 이제 끝내 쓰지 않았어야 할 최윤희(박예진)의 출생의 비밀 카드까지 끄집어냈다. 그러고 보면 이 드라마는 애초부터 이런 구조, 즉 과거의 비밀이 하나씩 카드로 제시되면서 드라마의 갈등국면을 고조시키는 이야기로 구상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첫 번째 카드는 내연녀 은혜정(전인화)의 불륜 카드였고, 두 번째는 한명인의 첫사랑의 부활이라는 카드였으며, 세 번째는 최윤희의 출생의 비밀 카드였다. 과거의 비밀이 마치 유령처럼 나타나 끝없이 현재를 가로막는 이 드라마는 그 지나침 때문에 개연성을 잃어가고 있다. 한명인과 은혜정이 최윤희와 며느리와 딸로 얽힐 가능성이 현실에서는 도대체 얼마나 될 것인가.

‘명품 연기’는 확실히 드라마를 살린다. 스토리 구조가 아무리 어설퍼도 눈에 핏발이 서는 광기의 연기는 그 정도의 약점은 충분히 덮어준다. 하지만 그것이 진정으로 드라마를 살리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명품 연기는 돋보이지만 드라마는 묻히게 된다. 캐릭터는 보이지만 드라마는 잘 보이지 않게 된다. 흔히들 출연료를 운운하면서 드라마 제작에 있어 배우 의존도가 너무 심하다고 말하곤 한다. 맞는 이야기다. 우리네 드라마는 지나치게 노동집약적(심지어 사고가 빈발하는)인 구조를 갖고 있다. 이것은 분명 개선되어야 할 문제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드라마 자체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고민을 해야하지 않을까. 부실하고 식상한 대본 위에서도 혼신의 힘을 다하는 명품연기를 볼 때마다 어떤 안타까움이 남는 건 그 때문이다.

세월이 가도 사라지지 않는 멜로 드라마의 전통

장르가 무엇이건, 스타일이 어떻건 우리네 드라마는 늘 그 중심에 멜로가 있다.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사실상 모든 드라마는 멜로 드라마이며, 그 변용이 여러 장르로 변주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때 트렌디 멜로 드라마에 대한 염증으로 ‘하얀거탑’이나 ‘개와 늑대의 시간’같은 장르 드라마들이 새롭게 등장했지만, 어느 새부터인지 그 장르드라마들 속에 떡 하니 들어앉아 있는 건 다름 아닌 멜로가 되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우리네 모든 드라마들은 멜로와 떨어질 수 없는 것일까.

월화드라마로 새롭게 시작한 ‘내조의 여왕’에서는 내조하는 여성들의 권력 대결구도가 전면에 나오고 있지만 그 후방을 지원하는 구도는 역시 멜로적 설정이다. 고교시절 잘나가던 퀸카 천지애(김남주)와 그녀를 졸졸 따라다니던 폭탄 양봉순(이혜영)은 그 시절 천지애의 남자친구였으나 지금은 양봉순의 남편이 된 한준혁(최철호)과 묘한 삼각관계를 구성한다. 한준혁은 여전히 천지애를 잊지 못하고 있고, 천지애는 남편을 취직시키려고 하는 퀸즈그룹의 사장인 허태준(윤상현)과 얽히는 중이다. 한편 천지애의 남편인 온달수(오지호) 역시 허태준의 아내인 은소현(선우선)과 대학 선후배 관계로 얽혀있다. 이 복잡한 멜로 구도는 내조를 둘러싼 권력 대결의 중요한 동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의 중심 모티브라 할 수 있다.

이런 사정은 월화의 타 방송사 드라마들에서도 마찬가지다. ‘꽃보다 남자’는 구준표(이민호)와 금잔디(구혜선) 사이에 하재경(이민정)이 끼여들면서 본격적인 멜로 갈등을 만들어가고 있고, ‘자명고’는 낙랑공주(박민영)와 자명공주(정려원) 그리고 호동왕자(정경호) 사이에 벌어지는 멜로가 운명적인 국가 간 대결구도로 이어지고 있다. 한편 수목드라마에서 ‘카인과 아벨’은 기억이라는 모티브를 중심으로 이초인(소지섭)과 오강호의 양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한 남자와 그를 둘러싼 두 여자, 즉 김서연(채정안)과 오영지(한지민) 사이의 멜로가 바닥에 깔려있다. 이초인의 기억으로는 김서연과의 멜로가 이어지고, 오강호의 기억으로는 오영지와의 멜로가 이어진다.

‘미워도 다시 한번’은 50대의 멜로가 중심에 서 있다. 명진그룹 회장인 한명인(최명길)과 그녀의 남편인 이정훈(박상원) 그리고 그의 내연녀로 살아온 국민배우 은혜정(전인화)이 50대가 되어서야 드러나게 된 관계로 인해 극단의 대결구도로 치닫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청춘시절 겪었던 그 사랑의 열병이 ‘미워도’, 그 열병 속으로 ‘다시 한번’ 뛰어드는 50대들의 치정 멜로를 다루고 있다. 한편 ‘돌아온 일지매’ 역시 멜로에 발목이 잡혀 있다. 일지매(정일우)의 행보는 사실상 거의 월희(혹은 달이)와의 멜로 구도에서 비롯되는 것들이 많고 사실상 드라마도 한 영웅의 공적 행동을 그리기보다는 인간 일지매의 사적 삶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 구자명(김민종)과 백매(정혜영)의 멜로는 이 사극의 또 한 축을 이룬다.

이처럼 최근 모든 드라마들은 그 스타일과 장르를 떠나서 멜로를 그 중심 축으로 세워두고 있는 이유는 우리네 드라마사를 관통하고 있는 멜로적 전통이 드라마 자체를 멜로드라마로 보는 경향을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유일한 멜로 없는 드라마로서 ‘하얀거탑’은 호평은 받았지만 시청률은 저조했다. 그만큼 대중들에게 익숙한 드라마로 여겨지지 않았다는 얘기다. 미드가 가진 멜로 없는 아드레날린 드라마들에 대한 열광에서 비롯된 장르 드라마에 대한 요구는, 우리네 정서와 맞닥뜨리면서 어떤 타협점을 찾게 됐는데 그것은 어떤 장르를 표방하더라고 그 속에 멜로적 상황을 세워두는 것이었다.

우리네 드라마 속에 늘 존재하는 멜로의 전통은 그 장르의 낯설음을 친숙한 사랑이야기로 중화시켜 어느 정도의 대중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혹은 멜로적 전통에 익숙한 드라마가 장르라는 새로운 옷을 입으면서 여전히 남아있는 드라마 문법의 잔재로 볼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현재 우리네 드라마 세상은 미드 같은 스펙타클을 지향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멜로를 빼고는 대중성을 확보하기가 용이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미워도 다시 한번’, 그 남성 부재의 공간

‘미워도 다시 한번’에서 한명인(최명길)은 명진그룹의 회장이고, 그녀의 남편인 이정훈(박상원)은 부회장이며, 그녀의 아들인 이민수(정겨운)는 홍보실장이다. 가족이 기업 속에 그대로 포진하고 있는데, 그것을 기업의 권력구조 속에서 보면 남편이나 아들은 모두 한명인의 손아귀 속에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드라마의 캐릭터 파워하고도 일치한다. 한명인이라는 캐릭터는 이정훈이나 이민수라는 캐릭터를 늘 압도한다.

한편 이정훈의 내연녀인 은혜정(전인화)과 이정훈, 그리고 그의 딸인 은수진(한예인) 사이의 권력 관계에서도 이정훈은 늘 약자의 위치에 있다. 은혜정이 이정훈을 오롯이 자기 것으로 쟁취하려 능동적인 선택(예를 들면 언론에 의도적으로 스캔들을 흘린다든지, 한명인에게 의도적으로 가까워진다든지, 혹은 자신의 집으로 그 두 사람을 동시에 초대한다든지 하는)을 한다면 이정훈은 늘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거나 한숨을 쉴 뿐이다.

따라서 이 한명인-이정훈-은혜정이라는 불륜의 삼각관계가 주는 긴장감은 능동적인 캐릭터인 한명인과 은혜정의 대결구도에서 발생한다. 이정훈은 그 사이에서 수동적으로 움츠린 존재이고(심지어 한명인과 은혜정이 왜 이 수동적인 남자를 사이에 두고 쟁투를 벌이는지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렇게 되자 이 여성 캐릭터들의 능동성은 본래 이 드라마의 영화 원작이 그리고 있는 여자 주인공들의 신파를 지워버린다. 영화에서는 여성이 자신을 희생(자식을 포기)하는 신파적 멜로에서 드라마의 힘이 발생하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두 여성이 한 남성을 차지하려고 하는 욕망의 대결구도에서 드라마의 힘이 발생한다.

이것은 한명인과 그녀의 자식인 이민수, 그리고 그와 사사건건 부딪치게되는 최윤희(박예진)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민수와 최윤희는 애초부터 서로에게 호감이 없었지만, 한명인이 최윤희를 며느리로 점찍는 순간부터 서로 얽히게 된다. 여기서도 이민수는 수동적인 존재로만 서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한명인과 최윤희는 마치 게임을 하듯 팽팽하게 부딪치고,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줄수록 드라마는 더 흥미진진해진다. 이것은 한명인-이정훈-은혜정이라는 대결구도의 자식 버전이다.

즉 이 드라마는 한명인과 은혜정, 그리고 최윤희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 어디에도 이정훈과 이민수의 입장을 동등한 위치에서 고민하지는 않는다. 이정훈과 이민수는 이 여성들의 손바닥 위에 놓여진 공기 돌처럼 이리저리 그녀들이 만들어낸 상황 속에서 어쩔 줄 몰라할 뿐이다. 이것은 ‘미워도 다시 한번’의 2009년 판이 과거의 그것들과 확실히 선을 긋는 대목이자 그간 달라진 여성들에 대한 인식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1968년에 영화로 개봉된 이래 수 편이 제작되었고 또 2002년도에까지 리메이크되는 동안 사회 속에서 여성들의 존재는, 2009년 판 ‘미워도 다시 한번’이 보여주는 세계만큼이나 변화했던 것이다.

이것은 ‘내조의 여왕’이 그리는 아줌마의 세계 속에서 삭제된 남성들이나, 늘 전통적인 사극 속에서 남성의 대상으로서만 취급받던 여성들이 이제는 남성들을 무릎 꿇리고 나라를 좌지우지하는 여걸로 재탄생되는 것과 같은 맥락 위에 있다. 심지어 ‘아내의 유혹’같은 완성도를 찾기 힘든 드라마 속에서도, 삭제된 남성(정교빈)과 여자들끼리의(은재와 애리의) 대결구도로 나타날 정도다.

이렇게 된 것은 여러모로 드라마의 주 소비층으로 자리한 중년여성들에 편향된 결과다. 어쩌면 이제는 과거 ‘미워도 다시 한번’에서 지나치게 소극적으로 그려진 여성들로 인해 가부장적 사고관에 대한 비판의식이 생겨났던 것처럼, 거꾸로 여성들의 욕망의 대상(혹은 배경)이 되어 남성들이 지나치게 소극적인 존재로 그려지는 것에 대한 비판의식이 생길 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징후는 벌써부터 아버지 캐릭터의 실종으로 표면화되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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