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겨우 서사의 시작 알린 ‘마녀’, 시리즈를 기대해

박훈정 감독은 전작인 <브이아이피>가 직면했던 여혐 논란이 뼈아팠던 게 아니었을까. <마녀>는 마치 그 작품에 대한 감독의 항변처럼 느껴진다. 최근 들어 <악녀>나 <미옥> 같은 여성 슈퍼히어로의 등장이 새삼스러운 건 아니지만, <마녀>는 확실히 이들 작품과는 색다른 지대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제목만 보면 이 영화는 슈퍼히어로물과는 사뭇 거리가 먼 것처럼 느껴지고, 실제로 영화 중반까지는 너무나 토속적인 정경이 반복된다. 친자매처럼 친한 친구가 있고, 몸이 아프지만 소를 키우는데 남다른 정성을 쏟는 목장주 아버지와 치매기가 조금씩 보이는 어머니가 등장하며, 어려운 가계를 돕기 위해 오디션 프로그램에 나가는 주인공 자윤(김다미)이 그렇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 <악녀> 같은 액션을 먼저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중반까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중반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자윤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각성하고, 등장한 닥터 백(조민수)이나 미스터 최(박희순) 그리고 귀공자(최우식)와 그 일당들이 살풍경한 살육을 시작하면서 영화는 중반까지는 사실상 이 독특한 슈퍼히어로의 탄생을 보여주기 위한 밑그림에 불과했다는 걸 드러낸다. 그저 치고 박는 수준의 액션이 아니라 날아다니는 할리우드 영화에서나 봤던 슈퍼히어로의 탄생.

영화 <마녀>의 백미는 그래서 후반부 이 괴력을 갖게 된 아이들이 탄생한 비밀스런 조직에서 벌어지는 슈퍼히어로 액션이 차지한다. 마치 마블의 플래시처럼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신출귀몰하게 움직이고, 주먹 한 방에 벽이 뻥뻥 뚫려버리는 괴력이 압도적인 액션들이다. 실험에 의해 이런 초인들이 탄생했다는 점은 <엑스맨>이 떠오르지만, 인간의 뇌 사용량을 극대화해 초능력이 가능하다는 설정은 뤽 베송 감독의 <루시>가 떠오른다. 

하지만 흥미롭게 다가오는 건 <마녀>의 자윤이라는 슈퍼히어로가 가진 선과 악 그리고 남과 여 그 중간 지점에 놓여진 캐릭터의 색깔이다. 자윤은 자신을 거둬준 부모에게 살갑고 착하기 그지없는 전형적인 여고생 캐릭터로 등장하지만 후반부에 가면 그런 선과 악의 개념은 깨져버린다. 또 여고생으로 등장하긴 하지만, 이 캐릭터는 그렇다고 여성성을 전면에 내세우지도 않는다. 이를테면 <악녀>가 그토록 놀라운 액션을 보여주는 기반에는 ‘사랑’이라는 막연한 여성성이 깔려있었고, <미옥>이 드러낸 힘도 ‘모성’에 기반 했다는 걸 떠올려보면 <마녀>는 그런 지점 자체가 없다.

그래서 자윤은 애매모호한 경계에 선 슈퍼히어로의 느낌을 준다. 악당들을 물리치니 선한 존재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섬뜩함과 무자비함은 관객들조차 소름 돋게 만든다. 중요한 건 그 속내를 알 수 없고, 보여주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자윤이 싸우는 건 살아남기 위한 생존본능이지만, 거기에 달라붙는 ‘왜’라는 질문이 자꾸 만들어낸 선을 위해서인가 악을 위해서인가 하는 궁금증에는 답을 주지 않는다. 

<마녀>는 그래서 마치 마블의 슈퍼히어로물들이 시리즈를 구성하듯이 다음 이야기를 궁금하게 만든다. 박훈정 감독이 아예 ‘Part1. The Subversion’이라고 부제를 달아놓은 건 이 영화가 꿈꾸는 연작에 대한 기대감을 담고 있다. 만일 자윤이라는 슈퍼히어로가 향후 ‘Part2’의 이야기로 이어진다면 우리만의 독특한 슈퍼히어로 무비의 역사가 시작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

물론 연작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지는 영화들이 그러하듯, <마녀>는 아쉬운 지점들이 적지 않다. 특히 후반부의 액션이 폭발하기 전까지 전반부는 너무 설명적이라 다소 지루하다. 하지만 본격적인 액션이 시작되었고, 영화 말미에 다음 편에 대한 복선을 이미 깔아놓았던 터라 Part2에 대한 기대감은 크다. 선악과 남녀의 선을 뛰어넘은 독특한 슈퍼히어로 캐릭터의 탄생만으로도 반갑게 느껴지는 이유다.(사진:영화'마녀')

카멜레온 같은 그들, 연기변신의 끝은 어디?

연기자의 연기변신은 놀라울 것 없는 의무사항이다. 한 가지 작품만으로 기억에 남을 것이거나 배우가 아닌 스타만을 꿈꾸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연기자라는 말에 제대로 걸맞는 배우들이 있다. ‘포도밭 그 사나이’의 순박한 시골청년에서, ‘왕과 나’의 내시, 그리고 ‘우리 동네’에서 끔찍한 살인자로 변신을 거듭하고 있는 오만석, 늘 바른 이미지로만 보였지만 곽경택 감독의 ‘사랑’에서 소름끼치는 건달역으로 그리고 다시 ‘인순이는 예쁘다’에서 번듯한 기자로 변신한 김민준, 그리고 ‘얼렁뚱땅 흥신소’의 마음 따뜻한 건달역에서 ‘세븐데이즈’의 껄렁한 비리형사로 변신한 박희순이 그들이다.

광기 어린 눈빛과 순박함 사이, 오만석
오만석이 ‘포도밭 그 사나이’의 그 사나이 역할을 맡았다고 했을 때, 이미 그는 연기 변신의 또 한 발을 내딛는 셈이었다. 그는 일찍이 ‘왕의 남자’의 원작이었던 연극 ‘이’에서 왕의 남자인 공길 역으로 알려져 있었고, 가끔은 연산 역할을 할 정도로 변신의 귀재였다. 조승우의 광기 어린 연기로 소문났던 뮤지컬 ‘헤드윅’에서 조승우 대신 헤드윅 역할을 맡아서 그만의 색깔을 덧입혀 ‘조드윅’에 이어 ‘오드윅’을 완성하기도 했다. 그러니 ‘포도밭 그 사나이’에서의 시골청년 장택기는 그에게는 좀 심심한 역할이었다.

오만석의 연기 스펙트럼은 광기와 순박함을 오가는 그의 이미지에서 나온다. 그의 눈빛은 순박한 시골청년처럼 보이면서도 한편으로 강렬한 광기를 뿜어낸다. 그러니 순박한 청년과 내시로서의 광기를 보여줘야 하는 ‘왕과 나’의 김처선 역할은 정확히 그의 연기 스펙트럼과 맞아떨어진다. 이것은 최근 개봉한 영화 ‘우리동네’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그가 맡은 경주는 살인자이면서도 어릴 적부터의 친구인 형사 재신(이선균)과 우정을 나누는 복합적인 성격의 인물이다. 이 극과 극을 오가는 눈빛은 그의 앞으로의 연기변신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가늠하기 어렵게 만든다.

반듯함 속에 숨겨진 막가는 열정, 김민준
곽경택 감독의 ‘사랑’을 다 보고서 엔딩 크레딧에 오르는 김민준이라는 이름을 본 많은 관객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김민준이 어디에 나왔다는 거야 하고 생각할 즈음, 영화 속 소름끼치도록 악독했던 치권이란 건달이 그였다는 걸 알고 진짜 소름이 돋던 기억이 있다. ‘외과의사 봉달희’의 이건욱이나, ‘썸데이’의 진표, ‘프라하의 연인’의 지영우 같은 댄디한 이미지를 가진 반듯함 속에 어디 그런 갈 데까지 가보는 막가는 열정이 숨겨져 있었는지 모두들 의아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찬찬히 떠올려보면 김민준은 늘 그렇게 반듯한 인물로만 우리에게 다가온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다모’에서 그가 맡았던 장성백이란 캐릭터는 그 밑바닥에 잡초 같은 질깃질깃한 근성을 숨겨둔 인물이었고 ‘강력3반’의 김홍주는 기막히게 범죄의 냄새를 맡는 초보형사로 반듯함과는 역시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를 반듯하게 만든 것은 오히려 시청자들이나 관객들이었지 그 자신은 아니었다. 현실은 그를 다시 ‘인순이는 예쁘다’의 유상우로 앉혔지만 ‘사랑’에서 보여준 풀어진 눈빛의 김민준은 반듯함 하나만으로는 아까운 배우라는 걸 알게 해주었다.

타고난 복합 캐릭터의 연기자, 박희순
이윤기 감독의 ‘러브 토크’에서 박희순은 상처 입은 영혼의 소유자, 지석 역을 맡아 감정이 절제된 연기를 선보였다. 그의 우수에 찬 듯한 타고난 눈빛은 그다지 연기를 하지 않아도 지석 그 자체가 될만했다. 하지만 그 뿐, 그것은 진짜 박희순의 진가가 아니었다. 그는 사실 초창기부터 조폭 같은 악역으로 주로 등장했다. 특히 영화 ‘가족’에서 보여준 연기는 건달의 이미지를 그에게 깊이 각인시켰다. 그의 진가는 이 두 이질적인 요소, 즉 악역과 우수의 눈빛이 만났던 ‘얼렁뚱땅 흥신소’의 백민철에서 폭발적으로 드러났다. 흥신소 사람들과 대적관계에 서 있는 건달이지만 희경(예지원)을 사랑하고 치매를 앓는 노모를 가진 아픔을 동시에 보여주는 백민철이란 캐릭터는 그에게 자신이 가진 가능성을 100% 드러내게 해주었다.

그가 가끔씩 보여주는 우수에 찬 눈빛은 건달 특유의 건들거림과 부조화를 이뤄야 하지만 박희순은 이것을 하나로 잘 버무려 미워할 수 없는 건달 캐릭터를 만들어낸다. ‘얼렁뚱땅 흥신소’의 백민철이 따뜻한 건달이라면, ‘세븐데이즈’의 김성열은 따뜻한 비리경찰인 식이다. 그 복합적인 캐릭터를 소화해내는 그 능력은 다름 아닌 오랜 연극과 뮤지컬 공연의 공력이다. 그는 극단 목화 출신으로 연출자 오태석 밑에서 바닥부터 기며 연극과 뮤지컬에서 잔뼈가 굵어온 연기자다. 뮤지컬 ‘그리스’나 ‘록키 호러 픽쳐쇼’는 그의 가능성을 입증시킨 작품들이다. 불혹을 향해 달려가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때론 소년 같은 느낌을 주는 이미지는 앞으로 더 복잡한 성격의 연기가 가능하리란 것을 예측하게 한다.

오만석, 김민준, 박희순의 연기변신에 대한 찬사는 이 시대 대중들이 연기자들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지를 명확히 말해준다. 대중들은 카멜레온처럼 끝없는 연기변신을 시도하는 진정한 연기자를 원하지, 한 가지 굳어진 이미지로 스타가 되려는 연예인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현대인들의 복잡한 삶 속에서 발생하는 한 가지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복합적인 감정들은, 이들의 다중적인 캐릭터에 공감하게 만든다. 어느 모로 보나 연기자들의 연기변신은 시대적인 요청이 되고 있는 셈이다. 영화든, 드라마든 혹은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다양한 연기의 세계를 종횡무진하는 그들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드라마를 이끄는 힘, 입체적 인물

MBC 사극 ‘이산’에서 위기에 빠진 이산(이서진)에게 홍국영(한상진)이 절실한 것처럼, 요즘 드라마들은 홍국영 같은 입체적 인물을 필요로 한다. 드라마가 만들어내는 극적 상황 속에서 흔히 빠지기 쉬운 선악대결구도는 요즘 시청자들의 눈길을 잡아끌지 못한다. 현실이 더 이상 권선징악으로 설명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감 가는 캐릭터는 오히려 선과 악으로 단순히 나누어지는 전형적 인물이 아닌 양측을 포괄하거나 그 선을 왔다갔다하는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인물이 되었다. 중요해진 것은 선악이 아니라 인물을 움직이는 욕망, 혹은 인물의 목표이다.

홍국영에 쏟아지는 관심, 왜?
그런 점에서 홍국영에 쏟아지는 공감은 당연하다. ‘이산’이란 드라마는 오히려 선악구도가 너무나 명확한 드라마다. 이산을 중심으로 한 성송연(한지민), 박대수(이종수), 남사초(맹상훈) 같은 인물군들은 모두 선이며, 이산의 반대편에 선 정순왕후(김여진), 화완옹주(성현아) 같은 인물군들은 악이다. 모두 선악이 분명한 인물들이다. 여기서 악은 강하고 선은 약하기에 드라마가 생긴다. 하지만 이런 단순구도로는 이병훈 PD 특유의 미션 해결 구조의 드라마가 쉬 지루해질 수 있다. 그것은 결과가 뻔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필요해지는 인물이 선악으로 구분되기 어려운 복합적인 성격의 인물이다. ‘이산’의 초반부에 이런 역할을 해온 인물은 영조(이순재)다. 그는 이산의 할아버지면서도 이산의 강력한 시험으로 자리잡았고, 그 힘은 대결구도의 단순함을 무마해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영조가 이산의 손을 들어버렸고, 그의 시험이 좀더 강력한 군주의 탄생을 위한 조련과정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이 즈음에서 홍국영이란 인물의 등장은 적확하면서도 효과적인 장치라 할 수 있다.

홍국영은 캐릭터로 보면 이산의 착한 인물들(?)을 대신해 손에 피를 묻히는 인물이다. 그는 처음부터 대의만을 내세워 이산 밑으로 오지 않았다. 정후겸(조연우)과 이산의 양 갈래 길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고민했던 인물이다. 그만큼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캐릭터인 홍국영은 이산이 하지 못하는 일들을 도맡아 한다. 정치적인 대의를 중시하는 군주 이산의 현실적인 측면을 보강해준 것이다. 홍국영은 지금의 입장이 이산의 든든한 두뇌 역할이기 때문에 선의 한 측면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정후겸과 같은 부류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냉철하게 자신의 욕망을 추구해나가는 인물이지만 드라마는 단순히 홍국영을 야심가로서의 한 측면만을 조명하지 않는다. 때론 ‘꼴통’이니 ‘개소리’같은 리얼리티쇼를 방불케 하는 거친 현실감이 넘치는 대사들을 쏟아내면서 서민적이고 서글서글한 모습까지 갖게된다. 홍국영의 출연은 대의 중심의 단순한 대결구도를 벗어나, 욕망 중심의 대결구도를 새롭게 만들어낸다. 사실상 입장만 다를 뿐, 똑같이 욕망을 추구하는 홍국영과 정후겸의 두뇌게임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드라마는 입체적 인물의 힘으로 굴러간다
이러한 드라마 속 입체적 인물들의 역할은 단지 ‘이산’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왕과 나’의 조치겸(전광렬), ‘태왕사신기’의 서기하(문소리)는 물론이고 현대극 속에서 ‘얼렁뚱땅 흥신소’의 백민철(박희순)까지 그 사례가 될 것이다. 먼저 ‘왕과 나’를 이끌어 가는 힘의 중심 축으로서 조치겸(전광렬)이 서 있는 이유는 그 복합적이고 능동적인 캐릭터 때문이다. 조치겸은 ‘욕망 하는 내시’로서 희대의 역적처럼 보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군주와 백성 사이에 그 어떠한 사특한 무리들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대의를 가진 충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태왕사신기’의 서기하는 사랑하는 사람인 담덕(배용준)과 동생 수지니(이지아)와 맞서게되는 운명을 가진 복잡한 캐릭터다. 이 역시 담덕과 사신으로 대변되는 선과 연씨 집안으로 대변되는 악의 단순구도를 깨는데 일조한다. 시청자들은 서기하의 행동들을 이해하면서도 분노하게 되는 묘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한편 ‘얼렁뚱땅 흥신소’의 백민철은 조폭이면서도 순간 희경(예지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인물이다. ‘치매를 갖고 있는 어머니’ 같은 개인적인 사연이 많은 그는 흥신소의 인물들과 부딪치면서도 묘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복합적인 성격의 인물이다.

드라마는 실로 주인공의 힘만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조역들이 있어 주연이 힘을 발하는 것이며, 그 조역들의 캐릭터가 입체적이고 복합적일 때 드라마는 더 깊은 재미를 주게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들 입체적 인물을 연기하게 되는 연기자들은 베테랑일 경우가 많다. 그만큼 연기하기가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왕과 나’의 전광렬이 그렇고 서기하 역의 문소리가 그렇다. 문소리는 캐스팅 논란이 일었지만 사실상 이런 어려운 심리묘사를 할 수 있는 연기자로 그녀 만한 인물을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최근 ‘세븐데이즈’로 영화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박희순은 바로 이러한 입체적인 캐릭터를 타고난 연기자로 보인다.

드라마의 저변이 넓어지면서 이제 한번 보면 그 행동을 다 짐작할 수 있는 단순하고 전형적인 인물이 드라마에 설 자리는 좁아졌다. 대신 능동적인 욕망이 꿈틀대면서 언제든 변화할 수 있는 입체적 인물들이 그 자리를 차지해가고 있다. 요즘 드라마는 때론 아이 같은 천진함을 가졌지만, 때론 욕망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전략가의 모습을 보이는 홍국영처럼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인물을 원한다.

모성과 스릴러를 결합시킨  ‘세븐데이즈’

지연(김윤진)은 숨이 턱에 찰 때까지 달리고 또 달린다. 승률 99%의 잘 나가는 변호사, 하지만 딸에게는 빵점 짜리 엄마인 그녀는 딸에게 1등을 선사하기 위해 운동회 달리기에서 전력질주를 한다. 그리고 1등으로 골인하는 순간부터, 그녀는 갑작스레 유괴된 딸을 찾기 위해 달리고 또 달린다. 지연을 따라서 달리는 카메라도 숨가쁘다. 인물 동선의 중간이 생략된 채 계속해서 점프하는 컷들과 멀리서 엿보는 듯한 느낌을 주는 망원렌즈로 당겨진 컷들의 연속은 관객들의 숨까지 턱에 차게 만든다.

지연이 변호사이며 유괴범의 목적이 희대의 강간살인범의 무죄방면이란 점에서 영화는 법정 안에 인물들을 가둬놓을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공판이 며칠 남지 않은 상황에서 지연은 스스로 수사를 해가며 이 살인범이 사실은 무고하게 잡혔다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그래야 딸이 살 수 있기 때문. 이 수사과정이 좀더 물리적이고 다이나믹하게 진행되는 것은 지연의 오랜 친구인 비리경찰 성열(박희순)이 합세하기 때문이다. 성열은 과학수사를 비웃으며 우리네 탐문수사의 정수를 보여주면서 몸으로 뛰는 영화 스타일에 일조한다.

문제는 하지만 이런 외적이고 물리적인 충돌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가 예리하게 느껴지는 것은 물리적 충돌 이면에 숨겨진 딸을 유괴 당한 지연의 내적 심리상태를 칼날처럼 세워놓기 때문이다. 딸을 구하기 위해 해야만 하는 강간살인범의 변론이 깊어질수록, 그녀는 진짜 이 사내가 살인범이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자기 정체성의 문제로 빠져든다. 의뢰인을 위해 변론을 해야하는 변호사가 때론 진짜 범법자들을 두둔해야 하는 직업적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 것처럼.

잔인하게 살해된 여자의 어머니인 한숙희(김미숙)는 지연과 이렇게 맞서게 된다. 자신의 딸을 살해한 살인범의 사형을 원하는 모성과, 자신의 딸을 위해 그 살인범을 구해내야 하는 모성이 격돌하게 되는 것. 영화는 살인범의 몸통을 좇는 전형적인 수사물의 한 틀을 따르면서도 거기에 모성이라는 새로운 감정적 틀을 끼워 넣는다. 일주일 동안 지연의 주변을 샅샅이 훑고 다니는 카메라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바로 이 모성으로서의 지연의 긴박함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세븐데이즈’는 고답적인 국내 스릴러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게 해주는 영화다. 스토리가 우리네 정서에 닿는 가족이나 모성을 다루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 스토리를 담는 틀로서 원신연 감독이 보여준 실험적인 스타일은 영화적 재미를 부가시켜주면서도 효과적이고 예술적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연기경연을 보는 듯한 연기자들의 호연이 압권이다. 역시 월드스타다운 면모를 보여준 김윤진은 물론이고, 그녀와 보조를 맞춘 박희순은 영화가 찾아낸 보물 중의 보물이라 할 것이다. 이 형사와 범법자 사이를 미묘하게 걸어가는 성열이란 비리경찰의 캐릭터는 박희순에 의해 완성되었다 보여진다. 또한 끝없는 연기변신을 보여주는 김미숙의 농익은 연기 또한 놓칠 수 없는 재미가 된다.

스토리와 연출과 연기가 아우러진 ‘세븐데이즈’는 그 제목처럼 한정된 시간 속에 딸을 구하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만 하는 모성을 다룬다. 놀라운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 영화는 결국 그 모성 앞에서 그 어떤 것도 선행될 수 없다는 자연 혹은 야생의 법칙을 보여준다. 이 스릴러에서 어느 한 순간 갑자기 지연의 심정이 되어 울컥하는 마음이 생긴 것은, 어찌 보면 일주일이라는 틀 안에서 가족들을 위해 전장을 뛰어다니는 가장이 처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영화가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모성은, 아니 이 세상 부모의 마음은 모든 것을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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