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아버지의 집’과 KBS ‘경숙이 경숙아버지’

불황이 드라마 세상에 가져온 것 역시 현실과 다르지 않다. “길면 살 것이요, 짧으면 죽을 것이다.” 빈익빈 부익부의 드라마 버전으로 읽히는 우리네 단막극의 실종은 그래서 더더욱 의미심장하게 보인다. 가난한 드라마, 단막극들은 이제 이 거대 자본으로 무장한 드라마 경제 속에서 힘겨워하고 있다. 하지만 바로 이 힘겨운 상황을 그대로 반영한 듯,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여 꽤 괜찮은 선전을 한 두 가난한 드라마가 있어 주목을 끈다. 바로 SBS 2부작 ‘아버지의 집’과 KBS 4부작 ‘경숙이 경숙아버지’다.

먼저 눈을 의심하게 하는 건 이 두 가난한 드라마가 거둔 시청률이다. ‘경숙이 경숙아버지’는 13.5%, ‘아버지의 집’은 무려 19.6%의 최고시청률을 기록했다(AGB 닐슨). 보통 16부작 미니시리즈에서도 높은 시청률이라 할 만한 이런 기록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 짧은 단막극에서 가능했던 걸까. 먼저 이 두 작품은 여타의 장편 드라마들이 갖추고 있기 마련인 자극적인 소재와는 거리가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두 편의 드라마들에 대중들이 공감을 갖게 된 것은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그 드라마가 전해준 메시지에서 찾을 수 있다.

올해 1월에 방영된 ‘경숙이, 경숙아버지’는 가난과 전쟁이라는 극단적으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피어나는 인간적인 정을 다루었다. 경숙(심은경)의 아버지인 조재수(정보석)는 집을 돌보지 않고 밖으로만 나도는데, 그와 악연관계에 있는 박남식(정성화)이 경숙의 집에 기거하며 경숙모를 사랑하게 되고 결국 아버지 역할을 대신하는 이야기다. 재미있는 것은 경숙의 가족들이 친 아버지인 조재수보다 가족에 헌신적인 남식을 더 따른다는 것. 결국 극단적 가난의 상황에서 조재수와 박남식의 악연이 차츰 정으로 바뀌어나가는 과정을 이 드라마는 특유의 해학으로 풀어내고 있다.

또 ‘아버지의 집’은 1998년 IMF서부터 2009년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그 연도들이 의미하는 것처럼 이 드라마는 불황 속에서의 우리네 아버지들의 초상을 담고 있다. 주인공인 아버지 강만호(최민수)가 스턴트맨 대역배우라는 사실은, 이 드라마가 담고 있는 아버지가 경제의 그늘 아래에서 소외된 서민들의 아버지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배운 것 없어 몸으로 벌어먹고 살면서도 자신의 손가락을 꼭 쥐어주는 아들을 바라보며 그 힘겨운 나날들을 버텨낸다.

하지만 그의 희망에도 불구하고, 1998년부터 2009년 간 무려 11년이 지났음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오히려 악화된다. 아들은 친엄마가 미국으로 데리고 가고, 그는 자신의 삶을 지켜주는 수호천사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의 힘겨운 삶을 알게 되고 “이것이 전부 자기 탓”이라고 말할 때, 강만호가 “네 덕분에 살 수 있었어.”하고 말하는 장면에서 아마도 모든 아버지들은 그 진심을 읽었을 것이다. 가난해서 배운 게 없어서 오로지 온 몸으로 사랑하는 법밖에 모르는 강만호의 마음은, 불황 속에 지치고 허덕인 모든 아버지들의 마음일 테니까.

공교롭게도 이 두 편의 가난한 드라마는 이처럼 그 배경 속에 불황의 풍경을 그려 넣고 있다. 그 가난 속에서도 놓지 않는 희망을 진심어린 목소리로 이야기함으로써 대중들과 공감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그 진심은 상업적으로 취약할 수밖에 없는 단편 혹은 중편의 이 가난한 드라마들이 처한 상황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연장에 막장으로 치닫는 드라마 생태계 속에서 이 짧지만 긴 여운을 주는 단막극들의 울림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2009년 단막극이 사라진 세상 속에 남겨진 두 편의 가난한 드라마가 주는 진심이 2010년 단막극 부활의 희망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지붕 뚫고...', 웃음을 넘어 공감까지 하이킥!

'지붕 뚫고 하이킥'에서 이순재는 김자옥을 위한 이벤트로 3천만 원 가까운 엄청난 비용을 쓰고는 그것을 벌충하기 위해 가족들을 모아놓고 비상시국선언을 한다.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절반으로 줄이라는 것. 그러자 그 집에 얹혀사는 세경과 신애는 쫓겨나는 건 아닌가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세경은 스스로 월 60만원 받던 것을 깎겠다고까지 말하며 앞장서서 비용절감에 나선다. 그런데 이 와중에도 이순재는 홈쇼핑으로 김자옥을 위해 고가의 코트를 선물한다.

이 때 이순재의 양심이 하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네가 저지른 일로 왜 가족들이 고생을 해야 하냐. 너 정신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이 양심의 말은 그의 행동과 비교되면서 보는 이들을 웃게 만들지만, 이 전체 이야기는 절대 웃지만은 못할 뉘앙스를 갖고 있다. 이 시트콤 속에서의 가족은 한 나라로도 읽히고, 그 가계살림의 파탄은 나라경제의 파탄으로도 읽힌다. 이순재의 생각 없는 낭비가 가족들의 쪼들림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일은 엄한 데서 저질렀지만 늘 국민들이 고통분담을 해야하는 상황을 떠올리게 하고, 그래도 열심히 절약하려는 세경의 모습은 눈물겨운 서민들의 건강함을 떠올리게 한다.

'지붕 뚫고 하이킥'은 이전에도 이 가족과 이웃의 이야기를 통해 나라경제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낸 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순재의 공언으로 시작된 '만 마리 학접기 사건'이다. 김자옥에게 접지도 않는 학을 접고 있다고 말하고 만 마리를 접어 선사하겠다고 공언한 이순재는 그 말을 책임지려고 정보석에게 회사도 나오지 말고 학을 접으라고 시킨다. 정보석은 혼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그 일을 아르바이트를 고용해 하기 시작하는데, 그 파급효과가 미국, 인도 등 점점 세계적으로 퍼져나가 나중에는 개성공단에서 학을 접는 상황까지 커져나간다는 이야기다.

학을 접기 위해 전 세계인이 들썩거린다는 그 이야기가 웃음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네 경제가 어떻게 굴러가는가를 에둘러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가진 자들에게는 별거 아닌 일로 비롯된 소비가 전체 경제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것. 물론 학 한 마리 접는데 백 원씩 받기 위해 여기저기서 달려드는 아르바이트생들의 이야기에는 씁쓸한 구석도 있다. 거기에서 청년들의 취업문제가 떠오르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이런 경제 불황 속에서 사회가 웃음을 잃어가는 것은 당연지사. '지붕 뚫고 하이킥'이 가볍게 던지는 웃음 한 방에 잠시 동안 시름을 잊게 되다가도, 그 시대를 공감하는 이야기가 짠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웃음을 넘어 공감까지 갖게 되는 것. 이것은 '지붕 뚫고 하이킥'의 웃음 코드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지붕 뚫고 하이킥'은 지나치게 심각하지 않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그것은 시트콤의 본분을 잃어버리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들 어려운 시국에 지나치게 가벼운 것도 그다지 좋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 '지붕 뚫고 하이킥'이 서 있는 지점은 실로 절묘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시트콤은 웃음은 물론이고 공감을 통한 흐뭇함이나 감동까지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여느 심각한 드라마도 하지 못하는 것을 이 시트콤은 제대로 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굶겨서 웃기는 시대, 먹여서 웃긴 '무한도전' 그 의미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리얼리티의 재료는? 바로 음식이다. '무한도전'은 일찍이 이 음식이 주는 식욕과 굶주림 사이에서 리얼리티를 포착해 큰 웃음을 주었다. '1박2일'의 복불복에서 가장 많이 쓰인 조건은 먹음직한 음식 앞에서 굶는 것이었고, '패밀리가 떴다'는 프로그램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음식을 만들어먹는데 쓴다. 웃음의 포인트도 모두 이 음식과 관련된 것들이 가장 크다. 아무리 설정과 연기를 한다 해도 원초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음식 앞에서는 리얼한 반응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런데 주로 음식을 활용해 웃음을 주는 방식은 굶기는 쪽이 많았다. 이유는 아마도 여러 가지일 것이다. 과거 '무리한 도전' 시절, 정준하가 우동을 몇 그릇씩 먹어야 하는 미션도 있었지만 배부름이 주는 리얼리티는 어딘지 거북한 면이 있다. 굶주림의 정서가 주는 공감대가 서민들의 정서와 맞닿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배고픔이 주는 웃음은 풍요의 시대의 정반대 그림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더 큰 웃음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한도전-박명수의 기습공격'편이 선택한 것은 굶주림이 아니라 오히려 먹여서 웃기는 쪽이었다. '서민 경제 살리기'라는 기치를 내건 박명수와 무한도전 멤버들이 기습 공격한 것은 불황에 힘겨워하는 치킨집과 삼겹살집. 불황으로 늘어난 주름과 한숨을 한 방에 날려줄 프로젝트로서 최고 매상을 올려주기 위해 유도부원들과 축구부원들 그리고 개그맨들이 일정 매출 이상 음식을 먹는 미션을 수행했다.

그저 음식점을 찾아가 먹는다면 말 그대로 '서민 경제 살리기' 이벤트 프로그램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한도전'은 그 상황 자체를 웃음의 코드와 연결시킴으로써 리얼 버라이어티 쇼의 진수를 선보였다. 군사들을 출전시켜 전쟁을 치르는 설정극을 음식 먹어치우기와 연결시켰던 것. 미션을 실패하면 음식 값을 치러줘야 하는 박명수 장군(?)의 진두지휘 하에 음식점에 투입된 군사들(?)은 일사분란하게 치킨과 삼겹살을 먹어 치웠다. 설정극을 차용하자 이 단순할 수 있는 미션은, 배부름에 힘겨워하는 군사들을 독려하고 때때로 무와 음료수를 보급(?)해주는 장면들로 전화되면서 버라이어티한 웃음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과거 정준하가 우동을 몇 그릇씩 먹던 '무리한 도전'이 주던 거북한 리얼리티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그것은 이 '많이 먹는 미션'이 '서민 경제 살리기'라는 의미를 만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많이 먹는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했을 때는 그 도전 자체가 무식하고 거북한 일이 되지만, 그것이 누군가를 돕는다는 차원이 되면 보람 있는 일로 바뀌어진다. 그런 면에서 '무한도전-박명수의 기습공격'편은 음식점에도, 운동부원들에게도, 또 '무한도전'에게도 모두 이득을 남겼다. 음식점은 음식을 팔았고, 운동부원은 실컷 음식을 먹었으며, '무한도전'은 그걸 통해 큰 웃음을 얻었다.

불황에 아끼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쓰는 것이다. 경제가 살아나기 위해서는 소비가 살아나야 한다. '무한도전'의 공격 대상이었던 치킨집과 삼겹살집이 우리네 서민 경제처럼 보이고, 그들이 먹어치우는 엄청난 양의 치킨과 삼겹살과의 전쟁이 불황과의 전쟁처럼 읽혀지는 것은 왜일까. 굶겨서 웃기는 시대, 먹여서 웃긴 '무한도전'의 웃음이 값지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바보가 헛똑똑이들에게 전하는 이야기, '그바보'

불황이어서인지 세상은 더 무례해졌다. 그 세상을 담는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 어떤 마음을 담기보다는 당장의 자극을 담아 시청률이라는 수치 올리기에 바쁘기 일쑤다. 그런 점에서 보면 '그저 바라보다가(이하 그바보)'는 요즘 세상에 어울리지 않게 예의를 아는 드라마다. 그저 키득대며 보다보면 어느 순간, 이 바보 같이 웃고만 있는 드라마가 전하는 뭉클한 메시지에 마음까지 먹먹해지는 때가 있다. 구동백(황정민)이라는 이름의 그 바보는 좀 안다는 헛똑똑이들의 무례에도 오히려 그들을 가슴으로 끌어안는다. 그리고 그 헛똑똑이들은 어쩌면 우리들의 또 다른 얼굴인지도 모른다.

구동백은 가진 것 없고 여자 친구도 없으며 영업실적도 제로인 평범한 우체국 영업과 말단직원. 그런 그가 톱스타 한지수(김아중)와 시장후보 아들 김강모(주상욱)보다 돋보이는 건 왜일까. 우연한 사건으로 터진 연애스캔들이자 정치스캔들을 무마하기 위해 김강모 대신 연인 역할을 하게 된 구동백에게 한지수는 사례금을 챙겨주려 한다. 하지만 평소 한지수의 팬이었던 구동백은 도와주고픈 순수한 마음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이라며 한사코 그 돈을 받지 않는다. 이것은 어찌 보면 단순한 행동처럼 보이지만, 구동백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행동이자 그가 그들보다 돋보이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지수와 김강모가 사는 세계는 거래의 세계다. 모든 것이 돈과 권력을 통해 이루어지는 그 곳에서는 심지어 연인 관계까지 돈으로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니 거래를 거부하고 관계를 희망하는 구동백은 이들에게는 당혹스런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한지수가 억지로라도 사례를 해 관계를 거래로 바꾸려 구동백에게 차를 선물하려 했을 때, 구동백이 대신 요구한 것은 회사 단합대회에 와달라는 것이었다. 한지수와 그녀의 매니저 차연경(전미선)은 그렇게 돈을 건네려는 자신의 손이 점차 부끄러워진다. 한지수가 점점 구동백에게 무례하게 행동하는 것은 그 당혹감의 표현이다.

마치 돈만을 가진 자와 마음만을 가진 자의 대결구도처럼 한지수와 구동백 사이에 벌어지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가 그저 연애담 이상을 전하는 건 그 때문이다. 이것은 돈과 명예를 통해 모든 것을 다 가진 줄 아는 헛똑똑이들에게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그 누구도 갖지 못한 것을 갖고 있는 바보가 전하는 경고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저 '스타의 연인' 같은 남성 신데렐라 이야기와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구동백이라는 바보의 순수한 세계가, 한 때는 자신도 그런 세계에 있었으나 어느새 그 세계를 떠나버린 한지수를 일깨워주는 이야기가 그 진짜다.

구동백과 한지수의 결혼발표(일은 점점 커져 결국 위장결혼까지 하게 된다)로 귀국한 한지수의 동생, 상철(백성현)은 그녀가 떠나버린 세계에 아직까지 발을 디디고 있는 인물로 구동백과 결을 같이 한다. 그는 한지수가 자신 때문에 외국에 보내졌다는 자책감에 부쳐준 돈보다는, 어린 시절 자전거를 사주기 위해 몇 달을 걸어 다녔던 누나를 더 그리는 인물이다. 그 돈으로 구동백이 수십 대의 자전거를 구입해 아이들에게 자선행사를 하는 장면은 돈이 때로는 거래가 아닌 마음으로 전화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지수의 눈물은 거래의 세계 속에서 잊었던 그 마음을 되찾게 해준데 대한 고마움의 발로이다.

'그바보'는 돈이면 뭐든 다 된다는 이 무례한 세상에 예의를 전하는 드라마다. 그리고 이것은 작금의 불황을 맞아 자극적으로만 치닫는 드라마 세상에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불황에 시청률 같은 수치적 집착은 더욱 심해졌고, 드라마들은 그 와중에 감정 또한 거래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여기는 것만 같다. 이야기의 맥락과는 상관없이 막장으로 치달으면서 공분을 일으켰다가 또 어느 순간 적당히 풀어내는 것을 반복하며 시청자들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려는 드라마들이 그렇다. 하지만 어디 시청자의 마음이 그리 호락호락할까. 한지수 같은 자본의 세계 속에서 살고 있어도 구동백 같은 변치 않는 순수한 마음은 언제나 남아있게 마련이다. 이것이 '그바보'의 구동백을 보면서 느껴지는 감동과 부끄러움의 이유다.

‘웃찾사’의 웃음, 공감포인트가 아쉽다

‘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노래박사 강박사’에서 강성범은 과거 수다맨에서의 수다 실력을 이어받아 노래선생으로 변신한다. 노래를 부르는 감정을 구수한 사투리를 섞어 쏟아내다가 트로트풍으로 불러 제끼는 맛이 일품. 견습생 역할로 나오는 신인 개그우먼 유은의 엉뚱한 틈입도 볼거리다. 하지만 그 뿐. 코너가 끝날 때쯤이면 무언가를 빼놓은 듯한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핫! 핫! 댓스 베리 핫!”을 반복하는 ‘초코보이’는 마치 후크 송을 패러디한 것처럼 중독성이 강하다. 성적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특정 동작에서 이 노래가 반복되며 이어지는 야릇한 몸 동작은 자칫 선정적으로까지 보인다. 선정적인 세상을 풍자할 수도 있었던 이 발군의 아이디어를 가진 코너가 왜 선정적인 몸 동작에 그치고 마는 것일까. 그것은 몸 동작과 반복되는 후렴구와 함께 어떤 의미 망이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웃찾사’의 대표주자였던 ‘웅이 아버지’는 여전히 그 캐릭터가 재미있지만 너무 오래도록 지속한 결과 이제는 웃음의 강도가 약해졌다. 그나마 현재 이 코너가 유지되는 것은 게스트의 카메오 출연과 ‘스타킹’같은 프로그램을 코너 속으로 끌어들이는 외부요인들 덕분이다.

‘공공의 적’을 패러디한 ‘공공의 편’은 공분을 자아내게 하는 상황을 콩트로 보여준 후, 그것을 응징하는 구조로 통쾌한 웃음을 선사한다. 신문을 보고 있던 이가 신문을 던지거나 신문으로 때리는 설정은 이 코너가 마치 신문 속의 갑갑한 뉴스가 주는 그 공분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저 소리치고 분노하는 장면으로는 어딘가 부족한 면이 있다. ‘개그콘서트’의 유사한 포맷인 ‘도움상회’가 가진 다채로운 재미(각종 패러디들 같은)와는 비교되는 지점이다.

‘묵언수행’은 초기 그 말을 하지 않는다는 설정이 꽤 기대감을 자아내게 했던 코너였다. 코미디언에서 개그맨으로 이름이 바뀌었을 때 거기 중심으로 선 것은 연기보다는 말 재주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코너의 말을 지워버린다는 설정은 역발상이다. 하지만 그것이 지금처럼 ‘물에 얼굴 담그고 숨 오래 참기’같은 무의미한 몸 개그에 머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역시 웃음의 포인트는 약할 수밖에 없다. 좀더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사회적 함의를 갖는 말 못하는 상황을 발굴해낼 필요가 있다.

‘믿거나 말거나’ 역시 초기에는 ‘웃찾사’를 새롭게 끌어올릴 수 있는 코너로 주목되었지만 현재는 그저 그 유행어의 반복 포인트만을 찾고 있는 느낌이다. 이 코너가 가진 힘은 바로 그 ‘믿기 힘든 세상’에서 나올 것이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모두 덤 앤 더머처럼 살아간다면’같은 개그 주제로는 공감을 끌어내기가 어려워진다. “믿기 어려우시다고요? 믿으세요!”하는 이 마지막 멘트가 힘이 빠지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웃찾사’는 전체적으로 코너가 주는 임팩트와 여운이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코너가 끝나고 나서 캐릭터나 형식에 대한 인상이 깊게 남지를 않는다. 이렇게 된 것은 코너들이 어떤 순간적인 상황의 아이디어에서 웃음의 포인트를 잡아내고는 있지만, 그것을 사회적인 맥락과 연결시키는 부분이 취약하기 때문이다. ‘불황에 개그 코너는 호황’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저 모든 개그를 대상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개그가 불황의 사회적 맥락을 담보하고 있을 때 그렇다는 말이다. ‘웃찾사’의 부족한 2%가 바로 그것이다.

불황기, 삶을 성찰하는 다섯 편의 영화들

불황기여서일까. 유난히 삶을 돌아보는 영화들이 눈에 띈다. 이미 독립다큐영화로서는 상상못할 대성공을 거둔 '워낭소리'는 물론이고, 또다른 독립영화의 맛을 보여주는 '낮술', 미키 루크라는 배우와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는 '더 레슬러', 나이를 거꾸로 먹어가는 한 인물을 통해 시간과 삶을 성찰하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그리고 심지어 슈퍼히어로 영화지만 정의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왓치맨'까지.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 그 현실을 관조하게 해주는 이 영화들이 가진 삶에 대한 각기다른 시선들은 무엇이었을까.

'워낭소리', 당신의 노동은 숭고하다
'워낭소리'의 그 잔잔한 울림은 소가 한 걸음 한 걸음을 걸어나가는 그 노동으로부터 울려퍼진다. 때론 바보처럼 우직하게 숨쉬듯 해온 노동이 달라진 세상 속에서 무화되는 어느 순간은 늘 아련한 노동의 아우라가 피어오르기 마련. '워낭소리'는 우리네 아버지들이 해왔던 노동이자, 이제는 사라져버린 진짜 노동을 소 걸음으로 찬찬히 되새겨보게 해주는 영화다. 영화가 전하는 말, "당신의 노동은 숭고하다"는 그 말은 불황을 살아가는 작금의 사람들의 가슴을 울릴만 하다.

'낮술', 기대와 배반의 삶 그래도 웃는다
'낮술'은 우리네 삶에 존재하는 욕망의 아이러니를 낮에 마시는 술의 그 분위기에서 포착해내는 영화다. 삶의 욕망이 가지게 마련인 기대감은 곧 배반감으로 돌아오게 마련. 낮술에 취해 한바탕 유쾌한 웃음을 던지고 난 후에 남는 것은 이 끝없이 반복되는 삶에 대한 관조다. 기대와 배반의 반복은 그러나 그 과정을 이어나가는 유머감각으로 인해 절망에 빠지지 않게 된다. '낮술'은 낮술 한 잔이 주는 쓰디쓴 현실을 웃음으로 전화시키고 그것을 통해 우리네 일상이 그 한바탕 낮술과 다르지 않다는 얘기를 해준다.

'더 레슬러', 육체는 슬프다 하지만 연민은 사절이다
'더 레슬러'는 한때 잘 나가던 프로레슬러였으나 이제는 남루해진 육신이 버거운 랜디(미키 루크)의 이야기면서, 한때 섹스심볼의 아이콘이었던 배우였으나 이제는 망가진 육체를 던져 연기하는 미키 루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물론 프로레슬링은 그들이 말하는 '작전'에 의해 짜여진 쇼이지만 살과 살이 부딪치고, 피와 살점이 튀기는 링 위에서의 쇼는 리얼이다. 이것은 연기자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고, 더 확장해서 보통 사람들이 해나가는 노동과 다르지 않다. 그 노동 속에서 나이들어가는 육체는 슬프다. 하지만 이 영화가 대단한 것은 그 슬픈 육체에 보내는 연민마저 헤드락 한 판으로 날려버리는 그 쿨함에 있다.

'벤자민 버튼...', 거꾸로 돌려도 시간은 흐른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원래대로 돌아갔으면, 하는 인간의 욕망. 전쟁에서 죽어 돌아온 자식을 앞에 둔 부모의 마음이 그러할 것이고, 시간에 종속되어 늙어가다 이제는 죽음만을 눈앞에 기다리는 노인의 마음이 그러할 것이다. 이 영화는 거꾸로 나이를 먹어가는 벤자민 버튼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그러한 욕망이 실현됐을 때 과연 우리는 시간을 넘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진다. 원작소설이 가진 유쾌함은 데이빗 핀처 특유의 진지함으로 바뀌어 영화는 오히려 시간에 종속되어버리는 벤자민 버튼의 상황을 보여준다. 거꾸로 돌려도 시간은 흐른다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시간의 무차별성은, 아마도 이 영화의 초반부 전쟁터에서 전사한 이 땅의 아들들을 다시 고향으로 되돌리기 위해 거꾸로 돌아가는 영상을 끼워넣은 데이빗 핀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영화 또한 아무리 거꾸로 돌려도 시간에 종속되기 마련이니까.

'왓치맨', 세상은 구원할만큼 가치가 있는가
그래픽 노블의 정수라고 불려온 '왓치맨'은 세계를 위협하는 적과 그 세계를 구원하는 신적 존재가 등장하는 수퍼히어로 등식 속에 끼워넣어지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적은 악당이 아니라 바로 인류이고, 수퍼히어로는 구원자라기보다는 고뇌하는 인간에 가깝다. 유일한 초월적 존재(신은 아니고 초인에 가깝다) 닥터 맨해튼은 왜 자신들이 인간을 구원해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에 빠진다. 세상을 구원할 수는 있어도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는 없다는 슈퍼히어로의 비관적 고민은 그간 선과 악으로 간단하게 판단해왔던 정의의 개념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왓치맨'은 슈퍼히어로 영화로서 진지한 질문을 던졌던 '다크나이트'의 계보를 잇는 영화다.

불황이 가져온 불안은 자신의 삶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욕망하게 만든다. 가벼운 주머니로 짧게 나마 현실을 빠져나와 그 현실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이들 영화들이 가치를 갖는 이유다.

불황 속에 더욱 빛난 ‘경숙이, 경숙아버지’

‘경숙이, 경숙아버지’에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되기가 어려운 인물들의 관계들이 등장한다. 경숙아버지인 조재수(정보석)와 악연으로 얽힌 박남식(정성화)은 경숙(심은경)의 집에서 기거하며 경숙모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국 둘 사이에 아이까지 갖게 된다.

가난보다는 그 속에 피어나는 정에 주목하다
그런데 이 상황을 알게된 경숙아버지는 화를 내기는커녕 쾌재를 부르며 아예 집밖으로 나와 이화자(채민희)와 함께 지낸다. 후에는 이 네 사람이 한 집에서 나란히 살기까지 하는데, 경숙이는 아버지가 둘인 이 상황 속에서 자기만 생각하는 아버지보다 가족들을 위해 헌신하는 남식을 더 따르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경숙이네 가족들 모두의 정서이기도 하다.

친아버지보다 타인인 남식을 더 따르는 가족이라는 비범한(?) 관계에 깔려있는 전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가난이나 전쟁 같은 극단적으로 어려운 상황이다. 당장 배가 고파 먹을 걸 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마음이 가는 사람은 단지 피붙이라는 관계에는 있지만 타인만도 못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도움으로 주고 정을 주는 타인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난다면 이 드라마가 전하는 메시지는 그저 가난이 파괴한 한 가족의 이야기에서 머물렀을 지도 모른다. 드라마 말미에 경숙아버지가 빨갱이 누명을 쓰고 경찰서에 잡혀간 박남식을 구하기 위해 장구채를 들고 시위를 이끄는 장면은 이 이야기를 가난에서 정으로 위치 이동시킨다. 경숙아버지 조재수는 자신의 아내와 바람난 박남식을 구하려 나서면서 이런 얘기를 남긴다. “사람이 어려운 일을 당하면 싸우다가도 돕는 게 인지상정이다.”

이 한 마디는 이 드라마의 주제를 압축한다. 전쟁통에서도 적군인 부상 인민군을 총탄이 날아오는 상황에서도 버리지 못하고, 죽은 후에는 땅에 묻어주기도 하는 박남식의 캐릭터는 이 드라마의 핵심적 재미를 만들어낸다. 착하고 순해 빠져 늘 당하는 캐릭터로서의 박남식은 늘 누군가를 이용하거나 골탕먹이며 살아가는 경숙아버지와는 상반된다.

가난을 냉소가 아닌 따뜻한 웃음으로 바꾸다
자기 자식보다 자기 남편보다 자기 아버지보다 더 박남식을 따르는 가족들의 면면은 이 드라마의 경쾌한 리듬과 함께 폭소를 자아내게 만든다. 경숙네 집에 경숙아버지가 훔쳐간 돈을 받으러 찾아와 그들의 가난을 지나치지 못하고 투덜대면서도 그들을 돕는 그 모습에서 비롯되는 폭소는 따라서 냉소와는 다른 따뜻한 웃음을 선사한다.

이 가난을 다루면서 냉소와 풍자의 칼날을 들이대기보다는 따뜻한 웃음을 짓게 만드는 것은 이 드라마가 작금의 불황 상황에 대해 던지는 긍정론이기도 하다. 전쟁과 궁핍의 극단적 상황 속에서도 일상적 삶은 계속되고 그 속에서도 여전히 따뜻한 정은 남아있다는 전언이다.

 국가적으로 암울한 시기를 절망적인 비장감으로 그려내기보다는 동화적 시점을 끌어들여 새롭게 조명하는 것은 ‘웰컴 투 동막골’과 궤를 같이 한다. 아이의 눈으로 그려지는 이 경쾌한 시선이 지향하는 것은 바로 그 냉엄한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한 인간으로서 발현되는 인지상정의 위대함이다.

작금의 불황 상황 속에서 이 드라마가 빛을 발하는 이유는 바로 이 차디찬 현실 위에 유쾌한 정의 세계를 복원해 보여주기 때문이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캐릭터들은 저마다 투덜대면서도 사랑하고, 사랑하면서도 투덜대는 모습들을 보여줌으로써 어려운 현실적 상황 자체를 관조하게 해준다.

이 대단한 주제의식의 드라마가 4부작이라는 것 또한 곱씹어 볼만한 점이다. 드라마 역시 불황을 맞아 상업적으로 취약할 수 있는 단편 혹은 중편이 설 자리를 점점 잃고 있는 상황. 그러나 이 짧은 가난한 드라마가 막장으로 치닫는 작금의 장편 부유한 드라마들 틈바구니에서 전하는 감동은 그 여운을 더 깊게 만든다. 어려울수록 그 희망을 바로 사람들의 진정성에서 찾는 이 드라마의 태도는 작금의 불황상황이나 드라마 제작상황 모두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할 것이다.

어딜 보나 다 불황이다. 거의 모든 경제지표들이 곤두박질치고 있는 상황. 이 상황에서 TV는 어떤 존재로 각인되고 있을까. 1,2년 전만 해도 TV의 화두는 리얼리티였다. 드라마에서 트렌디를 벗어나 좀 더 디테일과 현장감을 살린 전문직 장르 드라마가 꽃을 피웠고, 예능에서는 버라이어티 쇼 앞에 '리얼'이라는 수식어가 붙기 시작했다. 발빠른 케이블TV에서는 리얼리티쇼들을 서둘러 수입하거나 자체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막돼먹은 영애씨' 같은 다큐드라마가 나왔으며, 가짜를 진짜처럼 만들어낸 페이크 다큐가 하나의 대세처럼 우후죽순 쏟아져 나왔다. 채널을 어느 쪽으로 돌리든 프로그램이 하는 얘기는 이랬다. "이거 리얼입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리얼이라는 수식어는 과거에 비해 서서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실정이다. 아직까지 과거의 수식어 그대로 전문직 장르 드라마, 리얼 버라이어티쇼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이게 진짜 리얼이 맞는가 싶은 의구심이 생길 정도다. 먼저 드라마쪽을 보면 올 한 해 드라마의 한 경향으로 보였던 방송가 소재 드라마들의 경우, 리얼리티보다는 판타지쪽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을 비교할 수 있는 두 드라마는 '온에어'와 '그들이 사는 세상'이다. '온에어'는 방송가의 뒷얘기를 리얼하게 다룰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이른바 스타들의 화려하고 다이내믹한 삶에 대한 대중들의 판타지를 자극하는 드라마로 그려졌다. 결과는 20%에 달하는 시청률이 말해줬다. 하지만 너무 리얼해 그들이 사는 세상이 우리가 사는 모습과 그다지 다를 것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그들이 사는 세상'의 경우, 시청률은 좀체 10%를 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이 사는 세상'과 맞붙은 '에덴의 동쪽'은 시대극을 표방했지만 사실은 욕망과 복수를 그리는 판타지극을 선보이면서 30%대에 이르는 시청률로 월화를 평정했다. 그래서인지 최근 드라마들은 점점 리얼리티보다는 판타지쪽으로 힘을 실어주는 양상이다. SBS에서 새로 시작한 '떼루아'는 그 전문적인 세계보다는 트렌디한 남녀 관계에 더 몰두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바람의 화원'이 끝나고 시작할 '스타의 연인'은 본격 트렌디 드라마의 부활을 예고하고 있다.

TV의 판타지 편향은 드라마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새 강자로 등장한 '패밀리가 떴다'는 바로 그 리얼리티보다는 판타지 설정에 힘을 실어주면서 부상한 경우다. '패밀리가 떴다' 속의 캐릭터나 상황은 대부분 설정이다. 초반부터 관계를 만들어내며 그 관계 속의 상황을 통해 웃음을 주었던 이 쇼는 다른 시각으로 보면 거의 시트콤에 가까운 성격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1박2일'이 가졌던 야생의 리얼리티와는 상반되는 것이다. 즉 '1박2일'은 날것의 것을 그대로 보여주려 하지만, '패밀리가 떴다'는 대중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려 한다는 점이다. 바로 이것은 이 쇼가 판타지에 기반하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우리 결혼했어요' 같은 가상설정 버라이어티 쇼가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도 예능의 판타지 편향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가상 부부, 가상 가족 같은 개념은 사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면서 늘 상 빠지게 되는 판타지의 하나이다. 우리는 트렌디 드라마를 보면서 그 주인공들에게 감정이입 되는 판타지를 경험하고, 가족 드라마를 보면서 거기 있는 가족을 또 하나의 나의 가족으로 여기는 경험을 하게 된다. 가상 버라이어티 쇼는 바로 이런 드라마적 설정과 예능의 웃음코드를 연결시킨 것이다.

이처럼 TV의 판타지 편향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얼까. 이것은 힘겨워진 현실에서 TV는 정보와 의미를 통해 말 그대로 멀리 있는(tele) 것을 가까이 보여주는(vision)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잊게 해주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TV 앞에서나마 현실을 잊고 싶어 하는 대중들의 마음, 너무나 이해되고 공감 가는 것이지만 안타까운 현실이기도 하다.
(이 글은 스포츠칸에 기고된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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