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의 새 역사 쓴 <육룡이 나르샤>

 

SBS 월화 사극 <육룡이 나르샤>가 이제 종영한다. 50부작에 이르는 긴 여정의 드라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순식간에 지나가버린 듯한 느낌이다. 어느 정도 흐르고 나면 늘어지기 마련인 장편 드라마들 속에서 <육룡이 나르샤>는 확실히 다른 밀도를 보여줬다. 마치 한 회 한 회가 잘 짜여진 완성도 높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긴장감이라니. 이 사극이 50부작이었다는 게 실로 믿기지 않는 건 그래서일 게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정통사극, 퓨전사극, 판타지사극, 장르사극 등등. 사극은 역사와 상상력이라는 두 날개를 갖고 끊임없이 진화를 거듭해 왔다. 정통사극이 역사에 방점을 찍었다면 퓨전사극부터 장르사극까지는 서서히 상상력쪽으로 그 무게중심이 이동해왔다. 하지만 상상력의 끝단이 만들어낸 결과는 역사라는 사실의 진중함이 결여된 허구라는 문제를 양산했다. <정도전> 같은 정통사극으로의 회귀는 사극이 지나치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생겨났다.

 

사극은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상상력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역사로 회귀할 것인가. 그 갈림길에서 <육룡이 나르샤>는 이 둘을 다시 껴안고 나가는 제 3의 길을 제시했다. 역사적 인물과 허구의 인물을 결합하고, 역사적 인물의 사실들을 왜곡하지 않으면서도 허구의 인물들이 그려내는 상상력 또한 포기하지 않는 길. 이것은 <육룡이 나르샤>가 누구나 다 아는 여말선초의 역사를 다루면서도 흥미진진할 수 있었던 이유이고, 상상력을 무한히 펼치면서도 허구의 가벼움으로 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다.

 

<육룡이 나르샤>의 선택이 탁월했다는 건 MBC <화정>KBS <징비록>, <장영실>을 비교해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MBC는 이병훈 PD에서부터 만들어낸 퓨전사극의 전통 이후, <빛나거나 미치거나>, <화정>처럼 상상력에 더 치중하는 사극을 만들어왔다. 하지만 시청자들은 그 선택에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화정>은 심지어 지나친 역사왜곡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시청률도 곤두박질치는 결과를 맞이하기도 했다.

 

정통사극으로 회귀한 KBS 역시 마찬가지다. <정도전>은 좋은 평가와 시청률을 가져갔지만 이어진 <징비록>은 그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장영실> 역시 마찬가지다. 마치 위인전기를 보는 듯한 이야기에 더 이상 흥미를 느끼기 어려워진 것. 여러모로 <육룡이 나르샤>와는 비교되는 결과다.

 

<육룡이 나르샤>가 이전 사극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점은 인물에서도 나타난다. 보통의 사극이 한 사람의 영웅담이나 성장담을 그려내고 있는 기존의 사극의 패턴과 비교해보면 <육룡이 나르샤>는 여섯 명의 인물을 동등한 위치에서 그려내면서 그들이 서로 관계하고 대립하는 과정들을 흥미롭게 다뤘다.

 

즉 누구 한 사람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사극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도전(김명민)의 입장과 이방원(유아인)의 입장이 서로 부딪치는 장면을 보면 우리는 양자의 입장을 이해의 관점에서 바라보게 된다. 사극이 역사를 하나의 관점으로 재단하지 않고 여러 입장을 드러내 궁극의 판단은 시청자에게 남기는 것. 그것이 지금의 역사를 보는 달라진 시각에 맞는 사극이 아닐까.

 

또한 <육룡이 나르샤><뿌리 깊은 나무>의 프리퀄로서 그 연결고리를 만들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사극으로서 그 사극만의 어떤 패턴이나 유형들을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밀본이나 무명같은 조직이 그렇고, 척사광(한예리)이나 무휼(윤균상), 이방지(변요한)가 그려가는 무협적 요소들, 게다가 분이(신세경)를 통해 그려진 반촌이라는 역사적 공간까지 <육룡이 나르샤>는 새로운 사극의 전통이 될 만한 요소들을 잘 그려냈다.

 

사극은 역사를 보는 관점을 담는다는 점에서 시대에 따라 변화할 수밖에 없고 또 그래야 한다. 이방원의 이야기를 다룬 그 무수한 사극들과 <육룡이 나르샤>가 같은 역사라도 다른 이야기와 관점을 보여주는 건 그래서다. 하지만 무수한 진화들 속에서 그 새로운 첫발을 내딛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육룡이 나르샤>가 디딘 이 첫발은 그래서 새로운 사극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지 않을까 싶다.

사극의 또 다른 진화 보여준 <육룡>의 서사

 

SBS 월화 사극 <육룡이 나르샤>는 이제 종반을 향해 가고 있다. 이 사극은 여러모로 놀랍다. 무려 50부에 해당하는 대작이지만 한 회 한 회 느슨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 그렇고, 여말선초라는 이미 닳고 닳은 사극의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새롭게 느껴지는 이야기의 전개가 그렇다. 물론 이 많은 영웅들(제목부터가 육룡이다!)이 누구하나 묻히는 이 없이 저마다 선명하게 자신들만의 캐릭터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놀라움이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하지만 무엇보다 더 이 작품이 대단하고 여겨지는 건 이건 그저 사극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물론 역사를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사극이라 부르지만 기성의 사극에서 다뤄지던 내용을 완전히 뒤집거나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가상의 설정들이 눈에 띈다. 역사의 뒤안길에서 역사를 배후에서 조종하는 무명이라는 조직이 그렇고, 왕의 독주를 막기 위한 장치로서 정도전(김명민)이 만들어낸 가상의 사대부 조직 밀본이 그렇다.

 

무명밀본<육룡이 나르샤>를 독특하게 만들어내는 이 작품만의 새로운 설정이다. 말미에 들어서 이방원(유아인)과 정도전(김명민)의 대결은 사실상 무명밀본의 대결양상처럼 그려지기도 한다. 물론 이들은 필요에 따라 이합집산하고 그 안에 인물들에 의해 그 조직의 성격이 변질될 수도 있다. 그래서 흥미롭다. 이 이야기의 변수들은 이미 정해져 있는 역사라는 스포일러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준다.

 

또한 <육룡이 나르샤>가 기존 사극과 다른 지점은 사극의 역사적 이야기와 동시에 무협에서나 등장할 법한 무술의 세계가 엮어져 있다는 것이다. 무휼(윤균상)이나 이방지(변요한)는 물론이고 길태미(박혁권)와 길선미 나아가 홍대홍(이준혁)이나 척사광(한예리) 같은 인물군들은 무협의 세계에 나올 법한 인물들로 <육룡이 나르샤>의 또 다른 재미요소를 만들어낸다. 이들이 서로 대결하고 무술을 배우는 그 과정 또한 이 사극의 또 다른 축이 된다는 점이다.

 

여기에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정보조직인 화사단과 비국사라는 집단도 흥미롭다. 이 두 조직은 이른바 지재(정보)를 사고파는 집단이다. 이 집단이 사극 속에 들어가게 된 건 여러 모로 <육룡이 나르샤>에서 벌어질 여러 사건과 대결구도들이 현재적인 뉘앙스를 갖게 하기 위함이다. 지금은 정보전의 시대다. 그러니 과거의 역사를 소재로 다루면서 정보를 사고파는 가상조직을 집어넣어줌으로써 현재적인 느낌을 주는 더 흥미진진한 대결이 가능해지는 것.

 

사극의 정해진 역사라는 소재가 있고, 그 역사를 배후에서 움직이는 가상의 조직들이 있으며 또한 이들이 서로 대결하는 것이 그저 정치적인 대결이 아니라 무술의 대결로서 시각화하는 무협적인 가상인물들이 등장하며 또한 정보의 흐름을 장악한 자가 승리한다는 현대전의 양상을 담아내는 비밀정보조직까지 있으니 이건 우리가 봐왔던 사극에서는 한참 더 진화된 어떤 형태라고 해도 될 법 하다.

 

흥미로운 건 <육룡이 나르샤>가 이미 <뿌리 깊은 나무>의 프리퀄로서 그 소재들을 상당부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비담 같은 인물이라고 칭하는 얘기를 통해 김영현 박상연 작가가 과거에 썼던 <선덕여왕>과의 연결고리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이제 훗날 어떤 사극이 <육룡이 나르샤>가 그려냈던 이런 조직들과 설정들(이를 테면 무명이나 밀본 혹은 화사단이나 비국사 같은)을 활용해도 그리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을 만큼 매력적인 장치들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의 장르라는 것은 이처럼 매력적인 하나의 작품을 통해 구조화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판타지 장르가 톨킨이 그려낸 반지의 제왕호빗에 상당부분 기대고 있는 것처럼, 하나의 잘된 작품은 그 기반 위에 새로운 이야기들을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육룡이 나르샤>가 대단하다 여겨지는 건 그 세계가 지금껏 사극들이 다뤄온 세계와는 확연히 다른 또 다른 세계를 구축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진화를 거듭한 끝에 생겨난 하나의 장르라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

<육룡>의 무명, <뿌리>의 밀본에서 보이는 작가의 야심

 

SBS 월화사극 <육룡이 나르샤>에서 드디어 밀본(숨은 뿌리)’이 등장했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의 한글 창제와 유포를 막는 세력으로 등장했던 비밀조직이 밀본이다. 밀본이란 조직은 꽃은 꽃일 뿐 뿌리가 될 수 없다라는 말로 그 조직의 성격을 설명한다. 정도전(김명민)1대 본원인 밀본은 그가 주장한 대로 왕의 나라가 아닌 사대부의 나라를 꿈꾸는 조직. 왕은 상징성을 드러내는 꽃일 뿐, 실질적으로 나라가 움직이는 건 사대부들에 의한 관료 시스템이며, 그들의 근본적인 힘은 백성(민본)이라는 뿌리에서 나온다고 밀본은 주장한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1대 본원인 정도전은 사대부들을 모아 놓은 자리에서 밀본을 세우며 위민(爲民), 애민(愛民), 중민(重民), 안민(安民), 목민(牧民) 같은 강령을 외친다. 김영현, 박상연 작가의 <뿌리 깊은 나무>에 열광했던 시청자라면 그 장면이 익숙할 것이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가리온이라는 이름으로 정체를 숨긴 채 밀본을 움직이던 정기준(윤제문)이 사대부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하던 그 장면과 똑같기 때문이다.

 

물론 <육룡이 나르샤>에서 정도전이 세운 밀본<뿌리 깊은 나무>에서 정기준이 움직이는 밀본은 사뭇 성격이 다르다. 근본적으로 왕을 견제하는 세력이라는 점에서 같지만 그래도 정도전은 이성계(천호진)라는 왕을 견제하면서도 보필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뿌리 깊은 나무>의 정기준은 다르다. 세종(한석규)이 왕이 되면서 오히려 왕은 애민을 실천하는 인물로 등장하고 정기준과 밀본 세력은 그 왕이 하려는 일을 막는 비밀조직으로 전락한다.

 

이미 작가들이 밝힌대로 <육룡이 나르샤><뿌리 깊은 나무>의 프리퀄이다. 그러니 밀본이라는 조직의 등장은 자연스럽게 <육룡이 나르샤>의 이야기를 <뿌리 깊은 나무>와 연결시킨다. 무휼이나 이방지 같은 동일인물이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뿌리 깊은 나무>에서 저마다의 존재감을 드러내던 그들이 어떻게 성장했는가를 살펴보는 재미가 <육룡이 나르샤>의 전편에 깔려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제는 마무리가 되어가는 지점에 <뿌리 깊은 나무>와의 연결고리 또한 흥밋거리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육룡이 나르샤>에는 무명이라는 조직이 등장한다. 이 조직은 밀본과는 또 다른 조직이다. 밀본의 1대 본원인 정도전과 대립하는 조직이 무명이다. 그 무명은 여러모로 이방원(유아인)과 뜻을 같이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처음 정도전과 사제지간으로 있을 때는 이방원 역시 무명과 대립했지만, 이제 정도전과 한 판 승부를 벌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방원은 무명과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한 배를 타게 되었다. 결국 <육룡이 나르샤>의 후반부는 역사가 이미 얘기하듯 정도전과 이방원의 대결이 되겠지만, 그것은 또한 밀본과 무명이라는 두 비밀조직의 대결이 되기도 한다.

 

<육룡이 나르샤><뿌리 깊은 나무>는 이토록 비밀조직들을 등장시킬까. 그것은 이제는 사극에서 너무 많이 다뤄져 역사적 사실이 뻔히 드러나 있는 소재들을 어떻게 하면 더 흥미진지하게 만들까를 고심한 데서 나온 결과다. 김영현 작가는 과거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세종 대의 이야기를 고민하다가 이정명 작가의 소설 <뿌리 깊은 나무>를 보고 그 해답을 찾았다고 말한 바 있다. 즉 너무나 뻔해 보이는 세종대의 역사적 사실을 이면에 있는 비밀 스런 이야기를 덧붙임으로 해서 새롭게 그려내는 방식이 그것이었다.

 

밀본은 그렇게 탄생한 것이고, 무명 또한 마찬가지 이유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새로운 방식은 우리가 퓨전사극이라고 부르던 역사에 상상력을 덧대 만든 사극의 시도와는 사뭇 다르다. 퓨전사극은 역사적 사료가 거의 없는 인물을 그리거나, 있다고 해도 그 빈 공간을 상상력으로 채워 넣을 수 있는 인물을 찾아 그려왔다. 하지만 이성계, 이방원, 이도 같은 역사적 사료가 풍부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리면서도 그것이 뻔하지 않고 그 안에 새로운 이야기를 상상력으로 붙일 수 있는 방법이 무명이고 밀본이 되었던 것이다.

 

이미 해외의 슈퍼히어로 블록버스터들이 성공적으로 그려냈던 것처럼 무명과 밀본 같은 비밀스런 조직의 등장은 뻔한 역사적 사실을 흥미롭게 만든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최대한 손상하지 않으면서도 사실 그 이면에서 움직였던 비밀 조직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뿌리 깊은 나무>의 프리퀄로서 <육룡이 나르샤>가 이미 성공적으로 그려진 마당에 이제 또 이 무명과 밀본 세력을 중심으로 조선의 역사가 사극으로 새롭게 탄생하길 기대하는 건 그래서다. 무명의 암호인 초무자 무진(初無者 無盡: 애초에 없는 자 영원히 있으리니라는 말은 그래서 또 다른 후속작들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게 만든다. 김영현, 박상연 작가의 야심이 돋보이는 부분이다

'육룡', 이방원만큼 무휼, 이방지가 기대되는 까닭

 

오늘 첫 방영되는 SBS 사극 <육룡이 나르샤>의 등장인물에는 반가운 이름이 들어가 있다. 바로 김영현, 박상연 작가의 전작이었던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 이도 옆을 든든히 지키고 있던 무사 무휼(조진웅)이다. 세종 이도가 글을 세운 문의 힘을 보여준 캐릭터라면 그런 그를 칼을 통한 무로써 지켜주는 인물이 무휼. 무휼은 한글 창제의 이면을 다룬 <뿌리 깊은 나무>가 사변적인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액션 활극으로서 시청자들의 시각적 쾌감을 줄 수 있게 해준 캐릭터이기도 하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그 무휼이 훨씬 젊어진 얼굴(윤균상)<육룡이 나르샤>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무휼 옆에는 또 한 명의 익숙한 이름이 있다. 바로 이 드라마에서 땅새(변요한)라고 불리는 이방지다. 이 캐릭터 역시 <뿌리 깊은 나무>에서 강채윤(장혁)의 무술스승으로 출상술의 대가로 미친 존재감을 드러냈던 그 인물(우현이 연기했다)이다. 무휼의 젊은 시절이 다뤄지는 만큼 이방지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 역시 <육룡이 나르샤>의 중요한 스토리 중 하나가 된다.

 

이처럼 <육룡이 나르샤><뿌리 깊은 나무>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사극이다. 국내의 사극 중에서는 처음 시도되는 연작이지만 워낙 <뿌리 깊은 나무>가 남긴 강렬한 여운이 지금도 여전하다는 점에서 이 프리퀄에 대한 기대감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뿌리 깊은 나무>가 조선 건국 후 나라의 기틀이 마련되고 그 위에 세워진 세종 대의 찬란한 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육룡이 나르샤>는 바로 그 세종이 훨훨 날 수 있었던 그 기반이 되는 여말선초의 육룡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용비어천가에서 나오는 육룡이란 조선을 개국한 세종의 여섯 선조들을 일컫는 것이지만 이 사극의 육룡은 그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육룡이 나르샤>에서 육룡은 이성계, 이방원, 정도전이라는 실존 역사적 인물들과 무휼, 땅새, 분이(신세경)라는 가상 인물 여섯을 통칭하는 것이다. <육룡이 나르샤>는 실존 인물들의 역사적 이야기와 그들과 공조하고 대결하는 그 이면의 가상 인물들의 이야기를 합쳐놓은 팩션이다.

 

역사적 사건이 있다면 그 뒤안길에 그 사건들에 의해 한 시대를 이름 없이 살아낸 민초들의 이야기도 있다는 것이 <육룡이 나르샤>가 갖는 이야기 구조의 의미다. 따라서 이 사극의 재미는 젊은 이방원(유아인)과 정도전(김명민)의 권력을 향한 욕망과 백성을 위한 혁명 사이에서 부딪치는 대결에서도 찾아낼 수 있지만 그들과 함께 하는 무휼과 땅새, 분이 같은 민초들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역사적 사실이야 이미 우리가 역사적 기록을 통해 이미 아는 사실의 재연이라고 본다면 실제로 이 사극의 새로움은 무휼 같은 가상인물에서 나온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결국 <육룡이 나르샤>에 들어간 무휼 같은 존재들은 현재의 욕망이 투영된 캐릭터일 수밖에 없다. 사극이 과거의 재현이 아니고 현재의 결핍을 과거의 역사를 통해 채워주려는 욕망이라고 본다면, 왜 무휼이나 이방지 같은 가상의 존재들이 이방원이나 정도전, 이성계 같은 실제 역사적 인물만큼 기대감을 갖게 하는지를 이해할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왕들의 기록으로 남겨진 용비어천가의 육룡과는 다른 민초들의 기록으로서 다시 쓰는 용비어천가를 말해주는 건 아닐는지



백종원도 하는 일을 왜 정부는 못하나

 

때로는 각각 떨어진 사안들이 하나의 문화적 결과로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요즘 들어 연일 인터넷 실시간 검색어에 계속 회자되는 두 단어가 있다. 하나는 백종원, 다른 하나는 메르스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사진출처:MBC)'

이 둘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싶지만 그 사이에 소통이라는 단어 하나를 집어넣으면 그 연결고리를 쉬 알아차릴 수 있다. 메르스 사태는 갈수록 바이러스의 문제가 아니라 소통의 문제라는 게 드러나고 있다. 초동대처가 좀 더 빨랐다면, 또 감염 병원에 대한 정보가 빨리 공개됐더라면 지금처럼 문제가 확산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점이다.

 

사극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 이도(한석규)의 한글 유포를 막으려는 이유로 정기준(윤제문)은 미개한 백성들에게 한글은 혼동을 주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논리를 든다. <뿌리 깊은 나무>의 김영현, 박상연 작가는 이 논리를 저 나치의 괴벨스에게서 가져왔다고 말한 바 있다. 정기준은 한글 같은 파괴력 있는 정보체계를 마치 전염병처럼 본다. 메르스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은밀히 저들끼리 해결하려다 오히려 세계 제1의 감염자를 낸 병원을 보면 여전히 정보의 소통에 대한 시대착오적 판단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가를 잘 보여준다.

 

조금 엉뚱해 보이지만 이 시기에 백종원이라는 인물이 소통의 아이콘으로 등장했다는 건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저 쿡방 열풍에 기댄 셰프의 한 사람으로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는 소통의 달인이었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에서 그가 하고 있는 쿡방은 그래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소통의 한 상징처럼 보일 때가 있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라는 프로그램이 시작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이 개인방송들의 대결은 콘텐츠 대결이 되지 않을까 하는 선입견이 있었다. 하지만 막상 문을 열고 보니 그건 콘텐츠가 아니라 소통의 대결이었다. 제 아무리 좋은 콘텐츠도 혼자 독불장군식으로 보여주거나 밀고 나가면 시청자들을 우수수 빠져나간다. 결국 소통에 실패한 프로그램들은 폐쇄되고 만다.

 

백종원이 주목받게 된 것은 그가 애플보이라고 불리게 된 그 이야기 하나만으로도 그 이유를 가늠할 수 있다. 시청자들은 그의 쿡방을 보며 별의 별 시시콜콜한 것까지 트집을 잡아 사과하라고 한다. 이를테면 그냥 초장에 찍어먹는 건 정말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고 초장에 사과하세요라는 댓글이 붙고, “믹서기가 영 시원찮다는 말에 믹서기 비하 발언이라고 사과하란다. 또 카메라를 고정시키기 위해 고추를 꽂았다는 표현을 해 ‘19금 발언이라고 지적받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얼토당토않은 사과 요구에도 그는 선선히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애플보이는 그렇게 만들어진 닉네임이다.

 

이건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일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사과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무거운 무게를 갖고 있는가를 가늠해보면 백종원에 대한 그 무수한 사과 요구, 그럼에도 소통을 끊지 않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 주고받음이 대중들에게 주었을 훈훈한 미소를 그려보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 참사에 이어 메르스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과연 그 사태에 대해 책임지고 사과하는 모습을 우리는 본 적이 있었나. 남 탓하기 바빴던 것은 아닌가.

 

백종원은 방송에서 종종 카메라를 향해 은근한 미소를 날리며 구수한 멘트로 직접 시청자들과 소통하려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괜찮쥬?”하고 묻기도 하고, 때로는 살짝 투정을 부리기도 하지만 그것은 거짓이 아닌 진짜 소통을 위한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지금 백종원이 셰프 그 이상의 신드롬을 만들고 있는 이유가 아닐까.

 

소통에 실패하면 모든 걸 실패하게 된다는 사실은 저 일개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일이다. 하물며 국가와 국민의 소통이랴. 국민들은 많은 걸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들어주고 반응해주며 함께 공유하고 공감하는 모습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건 백종원도 하는 일이다.

 

한석규의 왕 연기, 어떤 점이 달랐을까

 

확실히 믿고 보는 배우 한석규는 달랐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욕하는 모습조차 인간미로 소화해낸 한석규 덕분에 우리는 지금까지 사극을 통해 봐왔던 왕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글을 창제하고 배포한 세종의 그 격의 없는 왕의 모습에서는 저잣거리 백성들을 향하는 그 낮은 자세가 느껴졌다. 교과서 속에 박제되어 있던 세종은 그렇게 한석규를 통해 재해석됐고 비로소 살아있는 인물로 되살아났다.

 

'비밀의 문(사진출처:SBS)'

그리고 돌아온 <비밀의 문>은 한석규의 영조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다.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왕의 면면이 평이할 리가 없다. 따라서 한석규가 해석해낸 영조는 자상한 면과 광기어린 면이 뒤섞여 있는 왕이다. 그 광기를 <비밀의 문>은 맹의라는 비밀문서를 통해 보여준다. 노론과의 결탁을 뜻하는 그 맹의에 수결함으로써 왕이 됐다는 그 사실은 영조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걸림돌이자 두려움이다.

 

<비밀의 문>은 일반적인 사극의 시작과는 사뭇 다르게 그 문을 열었다. 짧게 맹의에 수결하는 영조의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 맹의를 없애기 위해 심지어 승정원에 불을 지르는 영조를 통해 맹의가 가진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또 그것을 덮으려는 자와 밝히려는 자의 대결구도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바로 이 맹의의 존재감은 이 사극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힘이 된다. 바로 그 힘을 드라마 초반 시작 단 몇 분만에 실어주는 것이 다름 아닌 한석규의 연기다. 그는 광기와 두려움이 교차되는 모습을 통해 맹의라는 비밀문서가 가진 무게를 만들어냈다.

 

사실 <비밀의 문><뿌리 깊은 나무>의 장르적 특성과 유사한 점이 많다. 왕을 다뤘다는 점이 그렇고, 그 안에 미스테리한 추리극 요소를 집어넣었다는 점이 그렇다. 하지만 무엇보다 유사하게 여겨지는 건 한석규가 지금껏 우리가 봐왔던 것과는 다르게 왕을 재해석해낸다는 그 지점이다. 실제로 <비밀의 문>은 아직까지 <뿌리 깊은 나무> 만큼의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팽팽한 긴장감과 보는 재미를 만들어내는 건 바로 이 한석규가 해석하는 영조 덕분이다.

 

<비밀의 문>이라는 사극이 가진 근본적인 힘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조선왕조 500년의 가장 불행한 가족사에서 나온다. 뒤주에 가둬 사도세자를 죽게 만든 왕, 영조. 제 아무리 광기를 보였다고는 하나 아비가 자식을 죽인다는 건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터다. 역사는 자식을 죽인 왕의 입장에서 쓰여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자식을 죽인 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자식의 광기를 좀 더 극대화해야 했을 것이다.

 

<비밀의 문>은 이 부분을 재해석한다. 역사의 내용과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라는 것. 맹의는 그래서 영조가 이런 극단적인 일을 선택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여기서 흥미로워지는 것은 사도세자의 광기가 아니라 영조의 광기가 이 사건이 벌어지는 이유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역사 왜곡의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로서 <비밀의 문>이 이 새로운 해석을 통해 현재적인 문제의식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면 용인될 수 있는 일이다.

 

과연 영조는 어떻게 변화해갈까. 그리고 그 변화의 과정은 지금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줄까. 이 드라마에서 이 모든 궁금증을 쥐고 있는 게 바로 영조라는 인물이다. 한석규의 입체적인 왕에 대한 해석은 그 영조를 깨워내고 있다. 다른 모든 것을 차치하고라도 <비밀의 문>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 변화무쌍한 영조를 재창조하고 있는 한석규의 연기 덕분이다.

 

폼 잡던 장혁은 어떻게 연기변신을 시도하고 있나

 

장혁 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절권도. 사실 이 이미지는 <추노> 때만 해도 장혁에게 굉장한 이점이었다. 스타일리시 액션 영상을 선보인 <추노>에서 식탁을 치고 날아올라 원투 펀치를 날리는 장혁의 모습은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볼거리 중 하나였다.

 

'운명처럼 널 사랑해(사진출처:MBC)'

이런 캐릭터는 <뿌리 깊은 나무>에서 겸사복 관원으로 등장해 이도에 대한 복수를 꿈꾸던 강채윤에게서도 거의 비슷하게 볼 수 있었던 모습이다. 하지만 비슷한 캐릭터가 두 번 주목받기는 힘든 법이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주목된 건 장혁보다는 송중기와 한석규였다.

 

그런데 <추노>의 이미지가 워낙 강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작품선정의 잘못일까. 장혁은 <아이리스2>를 통해 또 이 비슷한 역할로 돌아왔다. 그는 여전히 드라마 속에서 빠르게 손을 움직여 상대방을 제압하는 절권도를 선보였다. 그리고 이것은 <진짜 사나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거의 그대로 이어졌다. 배우의 한 가지 일관된 이미지는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장혁 하면 이제 배우가 아니라 절권도 하는 모습이 더 떠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자칫 굳어져버릴 위험성이 있던 장혁의 이미지에 대한 선입견이 깨져나가고 있다. <운명처럼 널 사랑해>라는 드라마를 통해서다. 그것은 이 드라마의 첫 시퀀스에서부터 시작됐다. 샴푸 광고 촬영현장에 들어와 과장되고 허세 섞인 모습으로 머리를 감고 옷을 풀어헤쳐 몸을 드러내는 장혁의 모습은 기존 드라마의 이미지와는 사뭇 달랐다.

 

처음에는 지나친 과장연기가 아닌가 싶었지만 이것이 자꾸 보면 볼수록 의외의 중독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특히 과장되게 고개를 젖히고 목젖이 다 보일 정도로 웃어대는 모습은 마치 <아마데우스>의 모차르트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웃음소리만으로도 하나의 캐릭터가 떠오르는 그런 인상.

 

사실 이 과장연기는 제작사쪽에서 주문한 게 아니라 장혁 스스로 갖고 온 것이라고 한다. 자신이 이건이라는 캐릭터를 연구하고 어떻게 그 결을 만들 것인가를 스스로 고민해 나온 결과라는 것. 결과적으로 보면 장혁의 조금은 과장된 캐릭터 구축은 성공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현실에서 약간 벗어난 듯한 로맨틱 코미디의 결을 만들어내고 있고, 그 판타지적인 분위기에 조금은 희화화된 재벌남을 보여줌으로써 시청자들에게 보다 친근하게 다가가고 있다.

 

신데렐라 이야기가 자칫 위화감을 주는 이유는 상대방인 왕자님이 너무 일방적으로(그것도 거의 돈의 힘을 빌려) 신데렐라를 구제하는 모습 때문이다. 하지만 <운명처럼 널 사랑해>에서 장혁이 연기하는 이건은 이런 위화감이 거의 없는 캐릭터다. 과장된 웃음이 보여주듯 그에게서는 허당기 역시 가득하게 느껴진다.

 

그 비현실적인 이건의 캐릭터를 현실로 잡아 끌어내리는 인물이 바로 상대역인 김미영(장나라)이라는 점에서도 장혁의 선택은 옳았다고 보인다. 이 드라마는 웃음과 판타지를 주는 이건과, 눈물과 현실감을 주는 김미영이라는 캐릭터의 알콩달콩한 사랑을 다룬다. 따라서 장혁의 과장 연기는 김미영이라는 캐릭터가 할 수 있는 역할과 여지를 부여하기도 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장혁의 코믹한 과장연기를 통해 다소 논란이 될 뻔했던 이 드라마의 도입부분이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었다는 점이다. <운명처럼 널 사랑해>는 원 나잇 스탠드에 임신이라는 그 자체로 보면 자극적인 소재가 전제가 되는 드라마다. 하지만 장혁의 과장연기와 맞물린 드라마의 코믹한 연출은 이 부분을 밝고 무난하게 만들어주었다.

 

결국 장혁과 <운명처럼 널 사랑해>라는 작품의 만남은 양측에게 모두 좋은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장혁은 지금까지 보였던 액션의 모습에서 벗어나 코믹과 멜로까지를 어우르는 다채로운 연기자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물론 이런 변신의 성공은 <운명처럼 널 사랑해>라는 작품이 대중들에게 좀 더 다가가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코믹한 장혁의 발견. 그것은 이 작품이 장혁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듯한 느낌을 갖게 만든다.

 

송중기, 나쁜 남자도 착한 남자로 만드는

 

송중기는 독특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여리디 여릴 것 같은 꽃미남의 외모를 갖고 있지만 앙다문 입술과 살짝 미간이 좁혀지면서 나오는 대사의 톤을 들어보면 강한 내면이 느껴진다. 밝게 웃으면 착하디 착한 미소년의 모습이지만, 분노에 한껏 일그러진 얼굴은 순간 분노의 화신으로 변신한다.

 

'착한 남자'(사진출처:KBS)

이 이중적인 이미지는 송중기를 그저 꽃미남에 머물지 않게 하면서도, 동시에 배우라는 무게에 침잠하지 않게 해준다. 그는 <뿌리 깊은 나무>의 폭력적인 아버지이자 왕인 태종(백윤식) 밑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을 고민하는 진지한 왕이었지만, 동시에 <런닝맨> 같은 가벼운 예능 프로그램에서 꽃미남을 무기로 기분 좋은 웃음을 전하는 캐릭터가 되기도 한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이하 착한 남자)>는 송중기의 이중적인 이미지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는 작품이다. 제목이 드러내듯 <착한 남자>의 강마루(송중기)는 ‘착함’과 ‘나쁨’의 경계를 넘나드는 인물이다. 강마루는 자신을 버린 한재희(박시연)에게 복수하기 위해 서은기(문채원)에게 접근하는 나쁜 남자처럼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재희에게 버림받고 서은기를 통해 구원받는 착한 남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사실 <착한 남자>라는 드라마의 핵심은 바로 이런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는 캐릭터들이 겪는 내면적인 갈등에 있다. 서은기 역시 아버지가 새 여자(한재희)를 끌어들이자 못 견디고 도망치다 결국 죽게 된 엄마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까칠할 정도로 강한 자존심을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자신을 보듬어줄 그 누군가의 사랑을 갈구하는 한 여자의 모습을 숨기고 있다. 이것은 한재희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욕망을 위해 뭐든 하는 인물이지만, 그러면서도 최후의 보루처럼 강마루를 마음에서 지워내지 못하는 천상 여자다.

 

결국 <착한 남자>의 인물들은 욕망으로서의 나쁜 존재와 사랑으로서의 착한 존재가 공존한다. 이 모든 인물들의 이중적인 욕망과 사랑의 변주곡을 그 중심에서 잡아주고 있는 존재가 다름 아닌 송중기가 연기하는 강마루라는 캐릭터다. 그는 욕망에 눈먼 한재희에게 사랑이라는 무기로 복수하려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송중기에 의해 욕망이 점점 지워져버린 서은기라는 가녀린 내면의 여자를 통해 한재희에게 복수의 형태로 보여진다.

 

사실 꽃미남이라는 표현이 그렇듯이, 여자처럼 곱상한 얼굴은 송중기가 가진 배우로서의 다양한 가능성을 오히려 가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의 초창기 작품들인 <트리플>에서도, 심지어 <성균관 스캔들> 같은 사극에서조차도 그는 꽃미남의 이미지 속에 갇혀 있었다. 그것이 깨진 것은 바로 <뿌리 깊은 나무>에서 그가 젊은 이도의 역할을 해냈을 때부터다. "내가 조선의 왕이다! 감히 왕을 참칭하지 말라!"고 아버지 태종에게 소리치는 순간, 그 유약해 보였던 꽃미남의 껍질은 드디어 깨져버렸다.

 

그래서 <착한 남자>라는 드라마가 가능한 것은 이 꽃미남의 껍질이 깨지면서 ‘착함’과 ‘나쁨(혹은 강인한)’의 이중적 스펙트럼을 완성한 송중기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쁜 짓을 해도 착하게 여겨지는 그 마술 같은 이미지가 없었다면 이중적인 의미의 <착한 남자>가 탄생하기 어려웠을 거라는 얘기다. 이로써 송중기는 <착한 남자>를 통해 자기만의 확고한 연기영역이 생긴 셈이다. 앞으로 이 장래가 촉망되는 배우는 얼마나 더 넓은 연기의 영역을 갖게 될까.


 '뿌리', 자신과 싸워야했던 고독한 군주의 초상

'뿌리깊은나무'(사진출처:SBS)

'뿌리 깊은 나무'가 그리는 세종은 대단한 파격이다. 욕쟁이에, 똥지게를 지고, 개소리를 연구하는 왕. 게다가 어린 시절 아버지 이방원(백윤식)의 피의 정치를 보고 자라며 갖게 된 트라우마는 그를 정신분열의 상태로까지 몰아넣는다. 세종(한석규)이 젊은 세종(송중기)과 논쟁을 벌이는 이 셰익스피어 희곡 같은 장면은 이 왕의 깊은 내상을 밖으로 드러낸다. 아버지와는 다른 정치를 하려 했으나 그것이 얼마나 이상적이고 힘겨운 것인가를 실감하며 절망하는 세종의 내면이 이 장면에 압축되어 있다. 도대체 이 왕은 무엇이 그리도 괴로운 걸까.

일찍이 마방진 에피소드에서 상징적으로 제시되었듯이 세종은 왕 하나만을 남기고 필요하면 모두 제거해버리는 아버지 태종의 패도정치가 아니라, 모든 백성이 저 마다의 자리를 잡아서 함께 살아가는 모두가 상생하는 정치를 꿈꾼다. 즉 태종이 죽이는 정치를 했다면 세종은 살리는 정치를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자신이 살린 첫 번째 백성, 똘복(장혁)은 그를 죽이려 궁에 들어와 있고, 어린 시절 아버지 태종의 실체를 까발리고 자신을 조롱했던 정기준을 살리려 했으나 그 역시 밀본의 수장으로 돌아와 자신의 학사들을 죽이고 있다. 그는 살리려 하지만 그들은 죽이려 한다.

세종은 모두를 살리기 위해 홀로 고독하게 싸우고 있지만, 그런 왕을 이해하는 이들은 없다. 세제개혁을 위해 새로이 여론을 조사하겠다는 얘기에 조정은 술렁이고 신하들은 반기를 들려 한다. 그런 신하들을 바라보며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느냐"고 반문하는 장면에서는 왕의 외로움이 묻어난다. 갖은 명분을 붙여 자신이 하려는 일을 막아 세우는 그들을 보며 새로운 나라를 꿈꾼 왕의 절망감은 클 수밖에 없다. 이런 왕을 이해하는 유일한 인물이 나인에 불과한(그것도 말 못하는) 소이(신세경)라는 건 아이러니다. 모두가 왕의 책임을 묻고, 왕 스스로도 모든 게 내 책임이라고 할 때, 소이는 "전하의 책임이 아니옵니다"라고 말해준 유일한 인물이다.

"이 조선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 책임이다. 꽃이 지고 홍수가 나고 벼락이 떨어져도 내 책임이다. 그게 임금이다. 모든 책임을 지고 그 어떤 변명도 필요 없는 자리! 그게 바로 조선의 임금이라는 자리다." 이 아픈 고백은 세종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그것을 아무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외로운 심사가 겹쳐져 있다. 장인어른이 아버지 태종에 의해 죽게 되었을 때, 소헌왕후조차 이렇게 얘기하지 않았던가. "이 모두가 전하 때문이옵니다."

'뿌리 깊은 나무'는 그간 사극이 좀체 깊게 다뤄지지 않았던 왕이란 존재의 고독을 매력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왕이란 자리는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투쟁의 결과물이 아니다. 세종은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니라 온전히 백성을 위한 삶을 꿈꾸면서, 본인은 정작 깨질 듯한 두통과 참을 수 없는 트라우마에 불면의 밤을 지샐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이 사극의 팽팽한 긴장감은 어찌 보면 밀본이라는 세력이 가진 위협감이나 똘복이라는 복수의 화신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가장 큰 긴장감은 세종의 내면 속에 있다. 자신이 꿈꾸는 조선을 위해 '살리는 정치'를 하려는 자아와,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괴로워 이를 모두 포기하고픈 자아가 부딪치는 것. 똘복과의 대결이 아니라, 똘복을 살릴 것인가 죽일 것인가를 고민하는 세종의 갈등 속에 이 팽팽한 긴장감이 들어있는 셈이다.

그래서 이 사극은 기묘한 지점이 생겨난다. 마방진의 숫자 하나가 달라지면 전체가 흐트러지듯이 사극의 한 사건은 왕에게도 고스란히 그 여파가 전달된다. 외적인 상황들이 사건으로 터져 나오지만 그것이 결국 세종의 내면으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세종이 욕을 하고 기물을 때려 부수거나 누구의 책임이냐를 두고 소이를 윽박지를 때 이 사극의 긴장감은 그래서 더 고조된다. 얼마나 인간적인 왕인가. 백성을 위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고(이것은 아버지 태종의 트라우마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 삶이 지독스럽게 고통스럽고 외롭다는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왕. '뿌리 깊은 나무'가 보여주려는 그 깊은 뿌리는 세종이 한글을 창제했다는 그 꽃이 아니라 그 꽃이 피어나기까지 꿈틀대고 괴로워했던 세종의 내면에 있다.


드라마라는 뿌리 중의 뿌리는 역시 스토리다

'뿌리깊은나무'(사진출처:SBS)

1시간이 너무 짧다. '뿌리 깊은 나무' 3회는 그 속도감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쏟아지는 화살비 속으로 걸어 들어간 세종(송중기)의 마지막 장면의 긴박감으로 시작한 드라마는 끊임없이 사건을 일으키며 흘러가고 어느새 마지막 장면을 마주하게 만든다. 이토록 빠른 속도감을 주는 드라마가 있었던가. '뿌리 깊은 나무'의 이 미친 속도감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이제 고작 4회가 진행됐지만 이 사극은 엄청나게 많은 연기자들이 투입되었다. 세종만 해도 어린 이도(강산), 젊은 이도(송중기)를 거쳐 이제 나이든 세종(한석규)까지 무려 세 명이다. 세종에게 아버지의 복수를 하려는 채윤 역시 어린 채윤(채상우), 소년 채윤(여진구), 그리고 성장한 채윤(장혁)까지 세 명이다. 태종(백윤식)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젊은 이도와 대결구도를 만들었으나 이미 죽음을 맞이했고, 잠깐 등장했던 정도전의 아우 정도광(전노민)도 바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렇게 짧은 시간 동안 한 역할에도 많은 연기자가 투입되는 이유는 그만큼 속도감 있게 극을 전개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초반 속도감을 만들어낸 가장 큰 공적은 아무래도 태종과 세종에게 주어야 할 것 같다. 왕권을 중심에 세워두려는 태종(백윤식)의 인정사정없는 피의 숙청은 이 속도의 전제가 되었다. "왕도와 패도는 언제나 양날의 검"이라고 주장하는 태종 앞에서 세종은 "칼이 아니라 말로써 설득하고 기다리는 조선을 세울 것"이라 말한다. 또 경연이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기 위해 만든 것으로 생각하는 태종 앞에, 세종은 사대부들의 왕을 견제하기 위해 만든 그 경연이야말로 고려와 다른 조선의 실체이자 성리학의 이상이라고 말한다.

이 태종이 생각하는 조선과 세종이 생각하는 조선의 대립은, 이제 세워진 지 겨우 26년이 된 조선에서 왕이 해야 할 일에 대한 두 사람의 다른 시각이다. 태종은 칼을 동원해서라도 강력한 왕권을 세워 빠르게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세종은 신하들과 함께 꾸려나가야 고려와는 다른 조선이 세워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대화는 갑자기 '밀본'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간다.

'밀본(密本)'. '숨겨진 뿌리'라는 뜻이다. 이것은 태종과 함께 조선을 건국했으나 태종에 의해 제거된 정도전이 남긴 글귀 속에 등장한다. 정도전의 아우인 정도광의 집 지하에서 발견된 이 글귀는 왕과 재상의 관계를 꽃과 뿌리에 비유해, 왕이 그저 '화려한 꽃'일 뿐이라면 재상은 뿌리라고 말한다. 즉 이 화려한 꽃은 부실하면 꺾으면 그만이지만 뿌리가 부실하면 나무가 죽는다는 것. 그만큼 나라를 살리는 것은 왕권이 아니라 재상들의 견제에 달렸다는 이야기다. 이것은 태종과 세종이 대립하는 그 사상의 차이와도 그대로 맞닿아 있다.

흥미로운 건 이 정도전의 정치세계를 표현한 글귀가 그저 글이 아니라 실체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밀본'은 정도전이 만든 사대부들의 비밀결사라는 것. 이 밀본의 실체가 밝혀진 후 사극은 숨 가쁘게 이것을 현재의 상황으로 되돌려 놓는다. 즉 '밀본지서'가 등장하고 그것을 갖고 도망치려는 정도전의 아우 정도광과, 그를 잡으려는 태종의 명을 받은 조말생과 부하들, 그리고 그것을 막으려는 세종에 의해 움직이는 무휼. 그리고 이 일에 휘말리게 되는 반촌 사람들과 똘복이(채상우)까지.

드라마의 속도감은 물론 팽팽한 대립구도에서 비롯된다. 태종과 세종의 대립, 그리고 그 밑바닥에 깔려있는 정도전의 밀본에 대한 두 사람의 다른 입장은 이 사극에 강한 내적 동인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것은 이 사극이 정치적이고 심지어 이념적인 대립을, 눈에 보이는 행동의 대결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태종과 세종의 대결을 행동으로 보여준 조말생과 무휼의 대결은 대표적이다. 이것은 앞으로 채윤으로 이어져 집현전에서의 한글 창제라는 역사 속 글귀가 어떻게 추리와 액션이 섞인 극으로 우리 눈앞에 펼쳐질 것인가에 대해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이유다. 이렇게 한 바탕 숨 가쁜 달리기를 해온 '뿌리 깊은 나무'는 4회에 이르러 잠깐 숨고르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숨고르기는 집현전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 사건으로 이어지며 다시 숨 가쁜 달리기를 예고한다.

'뿌리 깊은 나무'가 주는 놀라운 몰입과 속도감은 바로 이 복잡한 정치적이고 사상적인 대결을 하나의 움직이는 행동의 이야기로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저 사상의 대결이라면 얼마나 지루한 논쟁 장면들의 연속이겠는가. 하지만 '뿌리 깊은 나무'는 이 사상의 대결을 실체로 보여준다. '밀본'은 그런 특징을 보여주는 이 작품의 대표적인 사례다. 정치세계의 표현이면서 비밀결사라는 실체로 존재하는 '밀본'. 이것은 '뿌리 깊은 나무'의 핵심적인 메시지면서 동시에 이 드라마를 끝없이 사건에 휘말리게 하고 달리게 만드는 힘의 원천이다. 결국 뿌리 중의 뿌리, 드라마를 팽팽하게 만드는 뿌리는 역시 잘 짜여진 대본인 셈이다. 밀본지서를 빗대 말한다면, 아무리 겉이 화려한 꽃(캐스팅에서부터 연출까지)이라도 그 뿌리(이야기)가 튼튼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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