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 타자기’ 유아인이 그려낸 또 다른 청춘의 초상

일제강점기, 거사를 앞두고 청년들은 저마다 해방된 조국에서 꿈꾸는 행복에 대해 말한다. 일제에 빼앗긴 논마지기를 찾아 시골에 계신 노모를 모시고 살아가는 게 행복이라고 말하고, 순사가 꿈인 아들이 일본의 순사가 아니라 조선의 경찰이 되는 게 소원이라 말한다. 누군가는 어릴 적 첫사랑을 만나 신나게 연애하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고, 이제 막 딸아이의 아빠가 된 청춘은 그렇기 때문에 하루빨리 해방된 조국이 되어야 하기에 거사를 위해 달려왔다고 말한다. 

'시카고 타자기(사진출처:tvN)'

tvN 금토드라마 <시카고 타자기>의 전생으로 그려지고 있는 일제강점기의 청춘들이 말하는 해방된 조국에서 꾸는 꿈은 실로 너무나 소소하고 조촐하다. 목숨을 거는 그들이지만 꿈이란 것들은 대부분 그저 평범한 일상을 자유롭게 누리고 싶은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들을 보는 이 청년조직의 수장 휘영(유아인)은 거사를 앞두고 마음이 착잡해진다. 그들을 사지로 내보내야 하고 그들 중 대부분은 돌아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득 휘영의 동지인 신율(고경표)이 그에게 묻는다. 해방된 조국에서 아니 다시 환생해 태어난다면 무엇이 하고 싶냐고. 휘영은 말한다. “낚시나 함께 갈까?” 물론 그건 그의 진짜 소원이 아니다. 그는 수연(임수정) 앞에서도 속내를 숨긴다. 그녀를 마음에 두고 있지만 무수한 동지들의 수장으로서 그는 그런 사적인 감정이 사치라 생각한다. 그런 그의 냉랭함 앞에서 수연 역시 마음을 접었다고 말한다. 조국을 상대로 투기를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냐고. 

대신 그녀는 다음 생을 이야기한다. 해방된 조국에 다시 태어나면 그때는 자신을 여자로 봐달라고. “괜히 망설이지 말고. 철벽치지도 말고. 거짓말 하지도 말고 혼자 아프지도 말고 나한테 솔직하게 다 말해 달라고요. 이번 생에 못해준 거 다 해준다고 약속해.” 자꾸만 다음 생을 이야기하는 그녀의 말에 휘영은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마음의 표현을 수장의 목소리로 말한다. “꼭 살아 돌아와. 수장의 명령이야.”

거사를 앞둔 이 청춘들이 현생에서의 꿈과 소원이 아니라 다음 생에서의 그것을 얘기하는 부분은 아마도 <시카고 타자기>가 전생과 현생을 넘나드는 판타지로 그려지게 된 모티브가 아니었을까. 그들은 당장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그 생에서의 찬란한 청춘의 행복을 유예하고 있었다. 그저 옆에 있는 사람과 마음껏 사랑하고 싶은 마음마저 철벽을 치며 살아가야 했고 그렇게 산화해야 했던 청춘들. 그들은 그래서 다음 생 해방된 조국에서 행복을 맞이했을까. <시카고 타자기>는 이 전생과 현생으로 이어지는 두 부류의 청춘들의 현실을 더듬는다. 

<시카고 타자기>라는 낯선 제목은 그래서 일제강점기의 휘영 같은 청춘들을 설명하는 자화상처럼 느껴진다. 마치 타자치는 소리 같다고 해서 붙었다는 톰프슨 기관총의 별칭으로 불린 ‘시카고 타자기’. 글을 쓰는 지식인이지만 그 글은 또한 톰프슨 기관총 같은 무장투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니 말이다. 글과 총을 동시에 들었어야 했던 당대 청춘들의 초상이 그래서 ‘시카고 타자기’가 아닐까. 

그리고 이 일제강점기 청춘들이 해방된 조국의 다음 생에서 했으면 했던 소망과 꿈들은 고스란히 현생의 청춘들의 삶을 되묻게 한다. 과연 지금의 청춘들은 그들이 유예했던 그 소망과 꿈들을 이루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가. 어쩌면 조국은 해방되었어도 여전히 그 현실의 많은 무게들을 청춘들에게 부담지운 채, 그 현재의 행복들을 유예시키고 있는 건 아닌가. ‘카르페 디엠’이라는 당대의 카페 이름에 담긴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라는 의미는 그래서 그 때나 지금이나 슬픈 정조를 담고 있다. 미래를 꿈꿀 수 없기에 지금 현 순간이라도 행복하기를 바라는.

전생의 독립운동을 하던 청춘인 휘영과 현생의 베스트셀러 소설가인 한세주라는 두 청춘을 연기하는 배우가 유아인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유아인은 유독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다양한 청춘의 자화상을 그려냈던 배우다. <밀회>에서의 이선재라는 청춘이 그랬고, 영화 <사도>에서의 사도세자라는 청춘이 그랬으며, <육룡이 나르샤>에서의 이방원이란 청춘도 그랬다. 그래서 <시카고 타자기>에서 유아인이 그려내는 전생과 현생의 두 청춘이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현재를 유예하지 않고 미래를 마음껏 꿈꿀 수 있는 그런 청춘들의 시대는 언제나 올까.

유아인의 성장기를 보면 군 입대 의지가 읽힌다

유아인은 현역을 고집한다. 벌써 세 차례에 걸친 신체검사를 받았다. 이를 두고 ‘병역기피’를 하려는 것 아니냐는 근거 없는 이야기들이 나왔다. 박사모 카페에서는 그가 촛불을 들었던 사실을 적시하며 그런 그가 ‘병역기피’를 하기 위해 수를 쓰고 있다는 비난의 글이 올라왔다. 하지만 이런 주장들과 사실은 정반대다. 유아인이 세 차례나 계속 재검을 받았던 건 기피가 아니라 현역을 고집하기 때문이다. 

'유아인(사진출처:UAA)'

유아인이 재심을 받게 된 건 지난 2013년 <깡철이> 촬영 중 오른쪽 어깨 근육이 파열되면서 갖게 된 골종양 때문이다. 그래서 지난 2015년 12월 1차 신체검사에서 등급보류 판정을 받았고, 2016년 5월에 2차 보류, 지난해 12월에 3차 보류 판정을 받았다. 유아인은 오는 3월 4차 판정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도 유아인은 현역 복무에 대한 의지를 내비쳤다. 낭종이 양성이기 때문에 그리 심각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유아인은 의지가 확고하지만 병무청은 정상적으로 엄밀하게 검사와 판정을 해야 한다. 만일 그의 의지에만 기대 이를 허용했다가 입대 후 문제라도 생기면 그건 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그는 대중들에게 잘 알려진 배우이고 특히나 지금은 세간의 이목이 더욱 집중되어 있는 상황이다. 물론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병무청의 등급 판정은 공평해야 한다. 

사실 어찌 보면 유아인의 현역 입대 고집은 일반인들로 보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 일이다. 만일 일반인이 이런 몸의 이상을 분명히 갖고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대부분의 경우는 진단서를 첨부해 거기에 합당한 판정을 받으려 할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몸을 위해서도 상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연예인들의 군 입대는 어느새 ‘뜨거운 감자’가 되어 있다. 군대를 갔다 왔는가 아닌가가 중요했던 차원을 넘어서 이제는 군대를 다녀와도 현역을 다녀왔는가 아닌가가 중요해졌다. 겉으로 보기에(연예인들은 직업상 여러 이미지를 실체처럼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굉장히 건강해 보이는데 현역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그것이 영원히 그 연예인의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이러니 유아인이 아니라 어떤 전도 창창한 배우들이라고 해도 현역을 다녀오려 안간힘을 쓴다. 현빈부터 송중기, 유승호처럼 현역 복무가 더 좋은 모습으로 기억되는 배우가 되고 싶어 한다. 

결국 이렇게 재검에 재검을 거치는 시간은 유아인에게는 그 자체로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언제 판정이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덜컥 작품에 들어가기도 어려운 일이니 말이다.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는 배우로서는 많은 기회들을 놓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로서는 괴로울 수밖에 없는 시간인데, 그래서 빨리 결정이 나서 군 복무를 마치고 싶은 마음인데, 이것이 오히려 와전되어 엉뚱한 악플이 달리는 건 더더욱 힘겨운 일일 게다. 

유아인은 지금껏 매번 작품을 통해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 온 배우다. 물론 대부분의 배우들도 그럴 것이다. 작품 경험이란 그 성공도 실패도 모두 배우를 성숙시키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유아인이 해왔던 일련의 선택들을 보면 무모할 정도로 도전적인 자세를 유지해왔다는 걸 확인할 수 있다. 그건 그와 함께 대결하듯 연기한 상대역들을 열거해보면 단박에 드러난다. 영화 <완득이>의 김윤석, <베테랑>의 황정민, <사도>의 송강호, 드라마 <밀회>의 김희애, <육룡이 나르샤>의 김명민... 기라성 같은 대선배 연기자들과 연기하며 자신의 색깔을 만들어왔다는 것. 

아마도 유아인에 대한 대중들의 호감을 만들어낸 가장 큰 동인은 바로 이 상처를 입더라도, 또 깨지더라도 부딪쳐 자신을 성장시키겠다는 배우로서의 의지가 느껴졌던 점이 아닐까. 유아인에게 있어서 군 복무 역시 그 연장선일 것이다. 피하기보다는 부딪쳐서 자신을 또 한 차례 성장시키고픈.

<사도><동주>, 이준익 감독이 그린 청춘의 자화상

 

무엇보다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의미는 송몽규와 같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시대에 살았던 아름다운 청년들처럼 지금 이 시대의 송몽규들에게 많은 위로와 응원을 주고 싶은 마음으로 <동주>가 자리매김했으면 좋겠다.”

 

'백상예술대상(사진출처:JTBC)'

52회 백상 예술대상 영화 부문 대상을 차지한 이준익 감독은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밝혔다. 올해는 <암살><베테랑>이 쌍 천만 관객을 동원한 여름 시장과 <내부자들>까지 겹쳐 그 어느 때보다 경쟁이 치열했던 한 해였다. 백상은 그 중 <사도><동주>를 만든 이준익 감독의 손을 들어주었다.

 

<사도>6백만 관객을 돌파하며 선전했고, <동주> 역시 저예산 영화에도 불구하고 116만 관객을 동원한 작품. 하지만 두 작품 다 관객 수로는 여타의 영화들에 밀렸던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준익 감독이 백상의 주인이 된 까닭은 두 작품 다 상업적으로도 또 작품으로도 의미 있는 성취를 거뒀기 때문이다.

 

두 작품은 모두 청춘에 대한 위로를 담고 있었다. <사도>는 우리네 역사의 가장 큰 비극적 사건 중 하나로 꼽히는 영조(송강호)가 사도세자(유아인)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한 사안을 소재로 삼고 있다. 여러 차례 사극을 통해 방영되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여기에 현재의 청춘들과 어른들의 관계를 투영시켰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게 만드는 이야기는 그래서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의 힘겨운 현실에 처해 있는 청춘들이 공감 받을 수 있는 이야기로 재탄생되었다. 갑갑한 관 같은 궁궐에 갇혀 산 송장 취급받으며 살아가는 사도세자의 울분과 광기는, 아버지와 아들이 부조리한 시스템 속에서 서로 대립하며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현 세태에 대한 깊은 여운을 남기는 대목이었다.

 

한편 저예산 영화로 만들어진 <동주>는 일제강점기로 돌아가 윤동주(강하늘)와 송몽규(박정민)라는 청춘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바라던 청년들은 시대의 아픔 앞에 쓰러졌고 그러면서도 꿋꿋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갔다.

 

사실 이 작은 흑백영화가 이토록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던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이 이 영화 속에 담아낸 치열했던 청춘들의 이야기에서 지금의 청춘들 역시 깊은 공감을 드러냈다. 무엇보다 저예산 흑백영화가 거대자본의 상업영화들 속에서 이만큼 선전했다는 것은 마치 지금의 현실 속에서 소외된 청춘들의 목소리에 대중들이 귀 기울여줬다는 희망과 위로를 느끼게 해주었다.

 

이준익 감독은 <사도><동주>를 통해 지금의 청춘들을 지지했다. 그리고 백상은 그런 이준익 감독의 지지에 화답했다. 두 영화는 말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청춘들은 치열하고, 치열한 만큼 아름답다고

<대박>의 전광렬과 최민수에 가린 장근석과 여진구

 

SBS 월화드라마 <대박>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최근 들어 사극의 주인공이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인 경우는 낯설지 않다. <육룡이 나르샤>가 조선 개국의 이야기에 여섯 용을 등장시킨 건 한 주인공의 관점이 아니라 여러 관점들을 교차시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대박>은 그 주인공이 명확하다. 숙종(최민수)과 숙빈최씨(윤진서) 사이에 태어나 어린 시절 저자거리에 버려진 대길(장근석)이 그 주인공이다.

 

'대박(사진출처:SBS)'

이 점은 <대박>의 포스터를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대길 역할의 장근석이 정중앙에 서 있고 바로 뒤에 훗날 영조가 될 연잉군(여진구)이 그리고 그 뒤에 숙종과 이인좌(전광렬)가 서 있다. 무엇보다 대길이 연잉군과 공조해가며 자신의 출생의 비밀에 얽혀있는 연원들을 풀어가고 그런 운명을 만든 이인좌에게 복수하려는 내용이 줄거리라는 점에서 <대박>의 주인공은 이 여정을 이끌어가는 대길이 분명하다.

 

이렇게 <대박>의 주인공이 대길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굳이 강조하는 까닭은, 이 사극이 그러나 이 주인공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것 같지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장면들만 놓고 보면 대길의 분량이 많고 그와 연잉군이 공조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수련을 마치고 돌아온 대길이 이인좌와 맞서기 위해 육귀신(조경훈)과 골사(김병춘)를 하나하나 도장 깨기하듯 투전판 깨기를 하고 나면 그것이 결국은 이인좌가 이미 다 예상한 손안의 게임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알고 보면 이인좌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대길이라는 청춘이 지금까지 고난과 성장을 거듭해온 그 이면에는 모두 이인좌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이인좌는 범 새끼가 아니라 범이 되라며 대길을 칼로 찔러 벼랑에서 밀어 떨어뜨린다. 이인좌에 대한 복수심으로 대길은 성장하고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나 복수의 행보를 보이는데 그것이 결국은 모두 이인좌가 깔아놓은 판 위에서 그의 예상 시나리오대로의 결과라는 것. 드라마는 세상을 통찰하며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인좌라는 특별한 인물이 한 시대를 어떻게 농단했는가를 다루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사극에서 이처럼 어른의 농단에 운명이 좌지우지되는 청춘의 모습은 대길만이 아니다. 연잉군 역시 금난전권 폐지같은 자신의 뜻을 세상에 펼치고 싶지만 그 때마다 그는 조정 대신들의 반대에 직면하고, 아버지인 숙종에게 불려가 세상이 네 뜻대로 그렇게 될 듯싶으냐?”라는 식의 무시를 당한다. 그리고 연잉군이 무엇을 하고 있다는 걸 숙종은 거의 모두 꿰고 있으며, 심지어 그를 도발하면서 자신의 뜻대로 이 판을 움직이려 한다.

 

결국 <대박>의 이야기는 그래서 전면에 대길과 연잉군이 갖가지 시대의 어둠과 싸워나가는 모습을 그리지만, 그 실제적인 대결은 숙종과 이인좌라는 그 배후의 인물들에 의해 계획된 것들처럼 보인다. 대길이 백성들의 고혈을 빠는 육귀신 같은 인물을 무너뜨리는 이야기는 흥미롭고 통쾌한 면이 있지만, 그것이 결국 이인좌의 생각대로의 결과라는 걸 아는 순간 맥이 빠지게 된다.

 

그래서 <대박>의 이야기는 마치 숙종과 이인좌가 두고 있는 체스판에 대길과 연잉군, 나아가 담서(임지연) 같은 청춘들이 하나의 말로서 등장하고 있는 듯한 구도를 만들고 있다. 이런 구도는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일까. 거기에는 몇 가지 추정이 가능하다.

 

첫 번째는 사실 대길과 연잉군 중심으로 움직여야 하는 이야기가 엉뚱하게도 숙종과 이인좌의 캐릭터가 강해지면서 그쪽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했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를 의심할 수 있는 건 초반 장희빈의 머리채를 휘어잡는 숙종의 캐릭터가 너무 강렬해 다른 캐릭터들이 주목되지 않을 정도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두 번째는 최민수와 전광렬이라는 배우의 강렬한 연기가 어떤 면에서는 장근석과 여진구의 존재감마저 덮어버린 면이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러 연기자들의 연기가 조합이 되어 하나의 작품을 이루는 드라마에 있어서 이런 연기력을 바탕으로 한 독주는 바람직한 건 아니다.

 

세 번째는 이 구도를 작가가 의도했다는 것이다. 숙종과 이인좌라는 어른을 대변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짜놓은 판 위에서 대길과 연잉군 같은 청춘들이 처음에는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다가 후에 이를 뒤집는 이야기를 그리려 했을 수 있다는 것. 이 관점으로 보면 <대박>은 최근 <육룡이 나르샤><사도> 같은 여러 사극들이 다루었던 어른과 청춘의 대결구도를 가져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도대체 무엇이 주인공인 청춘들과 주변 인물들 사이의 힘의 균형을 깨버린 것일까. 필자의 생각은 이 세 가지가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거라는 점이다. 현실에 더 적응되어 있고 판세를 읽는 능력이 뛰어난 노회한 어른들은 청춘들을 때론 도발하고 때론 다독이면서 자신들의 의도대로 움직이려 한다. 그것은 <대박>이라는 드라마 속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이 드라마의 중견연기자와 젊은 연기자 사이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렇게 주인공인 청춘들이 숙종이나 이인좌 같은 어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자율적으로 움직이고, 나아가 이들과 좀 더 명쾌하게 대적하는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기 때문에 사극을 보는 시청자들이 느끼는 답답함이다. 이 답답함은 물론 지금의 청춘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지만, 아마도 시청자들은 드라마에서는 조금 다른 판타지를 원했을 수 있다.

 

고구마보다는 사이다를 더 요구하는 요즘, 이런 판타지가 아닌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구도는 시청률에는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그 청춘의 답답함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점은 이 사극이 가진 미덕일 것이다. 대길과 연잉군이 아니 이들을 연기하는 장근석과 여진구의 안간힘이 느껴질수록 마음 한 구석이 짠해지는 건 그래서일 게다

<사도>에 이어 <육룡>에서도, 어른들과 맞서는 유아인의 청춘

 

욕심이요? 왜 제가 가진 꿈만 욕심이라고 하십니까? 왕이 된 것은 아바마마의 꿈이 아니었습니다. 의안대군 역시 꿈을 꾼 적이 없을 것이나 세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 그런 꿈을 꾸어왔습니다. 헌데 왜 제 꿈만 욕심입니까?” SBS <육룡이 나르샤>에서 이방원(유아인)은 세자가 되려는 욕심을 버리라는 아버지 이성계(천호진)에게 그렇게 울분을 토로한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역사적 사실만 두고 보면 이성계가 그 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또 정도전(김명민)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 않고 조선을 건국해 모든 권력을 틀어쥔 채 새나라라는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이방원이 정몽주(김의성)의 폭주를 막아서다. 이성계도 정도전도 정몽주를 끌어안기 위해 그들이 죽을 위기에 처하고 패업마저 수포로 돌아갈 상황에 이르렀을 때조차 그저 손을 놓고 있었다.

 

그 때 이방원만은 이념이 아니라 실행으로써 이 신조선의 꿈이 가능하다는 걸 간파하고는 정몽주를 선죽교 위에서 죽였다. 물론 그 행위를 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 기반 위에 새로운 조선을 세워놓고는 아들이자 제자이면서 사실상 새 나라를 세우는데 일등공신이랄 수 있는 이방원을 희생양으로 내모는 이성계와 정도전의 행위 또한 정당하다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모든 건 이 젊은 청춘의 행동으로 이뤄졌지만 어른들은 그를 희생해 실리와 명분 모두를 가져가려 한다. 이 얼마나 잔혹한 일인가.

 

조선 건국이라는 패업을 달성하는 과정을 그리는 <육룡이 나르샤>가 막상 그걸 이룬 후 어떻게 이 육룡의 사분오열을 그려낼 것인가는 우려와 기대가 섞이는 대목이었다. 즉 육룡이 한 데 힘을 모아 구악을 밀어내고 꿈을 이뤄가는 그 과정은 가슴 설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에 벌어지는 권력 투쟁의 이야기는 육룡 간의 대결 구도를 만들면서 자칫 구심점을 잃을 위험성도 있었다. 물론 조선 건국까지는 육룡이 저 마다 등가의 위치를 확보해왔다면 이제부터는 그 여섯 용들 중 이야기의 흐름을 위해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육룡이 나르샤>가 선택한 건 이방원이다.

 

여러 차례 여말 선초의 이야기들이 사극으로 다뤄지면서 그 주인공으로 이성계를 선택하기도 하고 또 정도전을 선택하기도 했다. 물론 이방원을 선택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특히 <육룡이 나르샤>가 젊은 이방원을 선택한 건 왜일까. 거기에는 다분히 이 사극이 현재와 조우하는 면들이 드러난다. 결국 이 사극은 고려라는 구악을 물리치고 조선을 세우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중심에 청춘으로서의 이방원이 서 있다.

 

그는 아버지 이성계, 스승 정도전이라는 어른들과 함께 패업을 꿈꾸고 실행해오지만 그 결과로 돌아온 건 그 욕심을 접으라는 얘기뿐이다. 심지어 그들은 이방원을 죽을 자리가 될 지도 모르는 명나라의 사신으로 보내버린다. 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그려진 이야기의 구도는 다분히 현재의 우리네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 지금 우리 시대에 희생양은 다름 아닌 청춘들이 아닌가.

 

이미 영화 <사도>에서 유아인은 아버지 영조(송강호)와 맞서다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하는 비운의 사도세자 역할을 한 바 있다. 그 사도세자가 꿈꾸던 건 단지 떳떳하게살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그 좌절된 청춘의 이야기를 유아인은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을 통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방원은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여 실행에 옮긴 인물이다.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를 향해 던지는 그 질문, “헌데 왜 제 꿈만 욕심이냐고 묻는 그 질문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어째서 이 부조리한 시스템은 지금의 청춘들의 꿈을 번번이 좌절시키고, 심지어 그것이 욕심이라고까지 느끼게 만드는 것일까. 과연 이래도 되는 걸까. 이래서 그 사회의 더 좋은 미래는 가능한 일일까.

<육룡이 나르샤>에서 가장 변화무쌍한 유아인의 이방원

 

SBS <육룡이 나르샤>에서 가장 변화가 많은 인물을 꼽으라면 누가 될까. 단연 이방원(유아인)이다. 아버지 이성계(천호진)가 이인겸(최종원) 앞에 무릎을 꿇는 장면을 본 후, 대의에는 그것을 실행할 힘이 있어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은 이방원은 그렇게 절망적인 성장기를 거친 후 정도전(김명민)의 동굴에서 가슴 떨리는 희망을 찾아낸다. 신조선을 세우려는 그 웅지. 이 시기 이방원의 모습은 비로소 꿈을 찾아낸 자의 설렘으로 가득 했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생각을 깊이 하기 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그는 아버지 이성계가 머뭇거리는 일을 저질러버리는 과감한 성격을 보여준다. 어딘지 불안한 청년기의 그는 그러나 홍인방(전노민)에게 붙잡혀 고신을 당할 때는 아버지를 떠올리며 결코 꺾어지지 않겠다고 버텨냄으로써 또 한 차례의 성장을 하게 된다. 그리고 정도전을 스승으로 모시며 뜻을 함께 할 때 그는 탁월한 전략가이자 행동가가 된다.

 

그러던 그가 홀로 서게 되는 것은 정몽주(김의성)를 선죽교에서 살해하면서다. 이 사건으로 육룡은 비로소 조선 건국에 박차를 가하게 되지만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에게도 또 정도전에게도 버림받는 존재가 된다. 사실상 그의 결행에 의해 비롯된 조선 건국에서 그의 자리가 없다는 점은 그가 분노하게 되는 이유다.

 

육룡 중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던 그가 고립되게 되자 그는 이제 스승이었던 정도전과 대립하게 되고 심지어 아버지 이성계와도 대결하는 인물이 된다. 그 명석했던 인물이 이른바 킬방원으로까지 변모하는 이 일련의 과정이 이토록 드라마틱할 수가 없다. 본래 이방원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가진 삶 자체가 그렇다고 해도 그 공은 유아인이라는 배우에게 있을 것이다. 이 변화무쌍한 삶을 제대로 연기로 소화해내지 못했다면 이방원이라는 인물에 이토록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을까.

 

사실 정몽주를 때려죽이고 나아가 아버지를 거스르며 정도전은 물론이고 형제들까지 모두 죽인 후 비로소 권좌에 오르는 인물이 이방원이다. 결코 시청자들에게 그 공감대를 주기가 쉽지 않은 인물이라는 것. 하지만 드라마의 대본이 그만큼 촘촘히 잘 설계되어 있는 면도 있지만 이를 소화해내는 유아인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없었다면 어땠을까. 변화해가는 이방원에 대한 공감을 넘어서 심지어 어떤 심리적인 지지까지 하게 만드는 면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이미 <베테랑>이나 <사도> 같은 작품을 통해 한층 성장한 유아인의 연기를 발견했지만 그가 이토록 호흡이 긴 <육룡이 나르샤> 같은 사극에서도 그 드라마의 힘을 계속 추동시킬 만큼 괜찮은 연기자라는 걸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된다. 그저 동안의 미소년처럼 보이던 그가 어느 순간 분노의 칼을 뽑아 들 때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잔혹해지는 얼굴로 돌변하고 그러면서 또 눈물을 쏟아낼 때면 그 안에 숨겨진 가녀린 속내에 마음 한 구석이 측은해진다.

 

고집스럽게 이타적인 영웅 이성계나 오로지 백성을 위한 조선 건국의 목표에만 매진하는 정도전과 비교해보면 이방원은 1인 다역의 역할이나 마찬가지다. 그 쉽지 않은 연기를 이렇게 잘 소화해내는 유아인에게서 연기자로서의 또 한 번의 성장 또한 읽어내게 된다. 참 괜찮은 배우의 기분좋은 성장이다

대종상의 몰아주기, 청룡의 나눠주기

 

아마도 이번 청룡영화상 대종상의 파행으로 인해 오히려 돋보인 시상식이 아니었나 싶다. 단 며칠 사이에 벌어진 두 영화상이지만 대종상 시상식장에 주조연 배우들이 대거 불참했던 것과는 상반되게 청룡영화상에는 상을 받든 못 받든 별들이 모여 들었다. 대종상에서 대리수상 불가를 공표함으로써 결국 대리수상이 남발하게 된 것과 대조적으로, 청룡영화상은 참석한 배우들이 상을 고루 가져가는 축제의 장으로 기억되게 됐다.

 


'청룔영화상(사진출처:SBS)'

청룡영화상이 참 상을 잘 주죠?” 김혜수가 던진 이 말은 물론 청룡영화상의 균형 잡힌 고른 시상에 대한 상찬이었지만 대중들에게는 대종상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이번 대종상은 <국제시장>에 무려 10관왕을 몰아줬다. 이런 일이 이번 한 번이 아니다. 이미 2012년 대종상은 <광해>에 총 22개 부문에 15개의 상을 몰아준 바 있다. 어째서 같은 해에 상영됐던 같은 영화들에 대해 상을 주는 것인데도 이렇게 다를까.

 

이것이 이렇게 다른 것은 그 자체로 상의 성격이나 지향점이 다르다는 걸 말해준다. 대종상이 구태의연한 영화 시상식의 전형처럼 다가오게 된 건 이 같은 몰아주기가 과연 지금의 영화 환경과 관객 취향과 사뭇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에서부터 비롯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네 영화는 그만큼 다양해졌고, 관객들의 취향도 다양해졌다.

 

물론 1천만 대작 대박영화가 매해 나오기도 하지만 그보다 작은 중박 영화도 점점 많아지고 있고, 아예 독립영화들도 의외로 다양한 관객들의 취향을 받쳐주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그러니 몇몇 대작 영화에 상을 몰아준다는 건 자칫 잘못하면 관객들의 다양한 취향들을 배려하지 못하는 일로 비춰질 수 있다. 나아가 이것은 승자가 모든 걸 독식하는, 적어도 문화에서는 바라보고 싶지 않은 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청룡영화상이 블록버스터과 독립영화에 똑같은 상의 지분을 나눠주었다는 것은 의미가 깊다. 올해 작품 중 누구나 <베테랑><암살>, <국제시장>이 상을 가져가는 것에 대해 이견을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사도> 같은 의미 있는 작품도 있고, 독립영화로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거인> 같은 작품도 있었다는 걸 청룡영화상은 놓치지 않았다. 결국 최우수작품상은 <암살>이 감독상은 <베테랑>이 가져가고 남녀주연상에 <사도>의 유아인과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의 이정현이 받은 건 균형잡힌 배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시상식에 몰아주기만큼 비판받는 것이 나눠주기다. 하지만 이것은 방송사들의 연말 시상식에서 과연 그 상이 적절한가 싶을 인물들에게 다음해를 위해 억지로 나눠 상을 시상할 때 나오는 비판이다. 이번 청룡영화상이 보여준 나눠주기는 이것과는 다르다. 그만큼 다양해진 영화들과 관객의 취향을 고루 끌어안는다는 의미에서의 나눠주기라는 점에서 의미가 다르다는 것.

 

시상의 공정성과 균형은 결국 그 영화상이 축제의 장이 되게 만드는 이유다. 이번 청룡영화상이 유독 훈훈한 영화인들의 축제의 장이 될 수 있었던 건 그 균형이 잘 이뤄졌기 때문이다. 상을 받고도 사과하는 상, 한쪽으로 몰아주기를 해서 다른 한쪽은 커다란 그림자와 병풍을 만들어버리는 상, 권위로 오라마라 강요하는 상. 이번 청룡영화상은 이런 시상식과는 너무나 다른 행보를 보여주었다.



유아인의 무엇이 그의 해를 만들었을까

 

2013<장옥정, 사랑에 살다>에 유아인이 이순 역할을 연기할 때까지만 해도 솔직히 이 배우가 이토록 급성장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물론 <완득이><깡철이> 같은 영화을 통해 괜찮은 연기의 결을 가진 배우라는 건 충분히 증명되었다. 하지만 유아인은 어딘가 청춘이라는 틀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에 갇혀 있는 듯한 인상이 강했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성균관 스캔들>의 문재신 역할에서는 드라마의 중심으로 들어오지 못했고, <패션왕>의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청춘의 반항기는 어딘지 시청자들이 보편적으로 공감하기 힘든 캐릭터였다. 그랬던 유아인이 달라지기 시작한 건 <밀회>를 통해서였다. 그간 청춘의 반항과 방황이라는 일관된 이미지를 갖고 있던 유아인은 <밀회>를 통해 순수한 영혼의 청춘 이선재가 되었다.

 

영화 <베테랑>은 유아인으로서는 도전이었을 것이다. 사실 연기자가 자신의 이미지를 변신하거나 연기의 폭을 넓히기 위해 가장 많이 선택하는 것이 악역이다. 그는 공분을 불러일으킬 만큼 뻔뻔하고 안하무인의 재벌3세 역할을 <베테랑>을 통해 제대로 소화해냈다. 사실상 이 캐릭터가 만들어낸 공분이 이 영화의 흥행 도화선이 되었다는 점에서 천만 관객을 돌파하는데 유아인의 지분은 확실했다고 평가된다.

 

한 번 물이 오른 연기는 <사도>를 통해서 한층 깊어졌다. 사실 <사도>의 사도세자는 그가 처한 입장을 설득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결코 쉽지 않은 역할이다. 그저 광인으로만 기록되고 알려져 있던 사도세자가 아닌가. 그런데 유아인은 이 사도세자에서 아버지 영조와 노론 세력이 이미 구축해놓은 시스템 속에서 결코 떳떳하게뻗어나갈 수 없어 스스로를 파괴하는 청춘의 슬픈 자화상을 담아냈다.

 

그리고 이제 그는 하반기 최대의 기대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육룡이 나르샤>에서 육룡 중 한 명인 이방원의 역할로 돌아온다. <육룡이 나르샤><뿌리 깊은 나무>를 쓴 김영현, 박상연 극본에, 역시 같은 작품을 연출한 신경수 PD가 메가폰을 잡고, 김명민이 정도전 역할로 출연하는 작품이다. 만일 이 작품이 성공하고 거기서도 유아인이 확실한 자기만의 지분을 보여준다면 그는 올해를 자신의 해로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영화에서부터 드라마까지.

 

그렇다면 유아인의 이런 승승장구를 가능하게 한 그만의 힘은 무엇일까. 가장 큰 건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꽤 깊이 있는 연기력을 선보인다는 점이다. <밀회>에서의 어딘지 어눌하지만 그 순수함 때문에 마음을 잡아끄는 섬세한 연기는 물론이고, <베테랑>에서의 때려주고 싶을 정도로 얄미운 악역이나, <사도>에서의 깊은 슬픔과 광기를 꾹꾹 눌러 보여주는 연기까지 그는 청춘의 역할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 바 있다.

 

즉 젊은 세대부터 중년까지를 아우를 수 있는 폭넓은 멜로 연기도 되고, 악역도 되며, 때로는 정극의 틀에서도 결코 밀리지 않는 팽팽함을 보여주는 연기력이 가장 큰 그의 바탕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청춘의 아이콘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건 유아인이란 연기자를 좋은 작품들이 찾는 이유가 되고 있다.

 

사실 우리 시대에 가장 많은 질곡과 스펙트럼을 갖고 있는 존재들이 바로 청춘이 아닐까 싶다. 그 청춘의 군상들은 순수하기도 하고, 반항기가 가득하기도 하며, 때로는 엇나가고 때로는 스스로를 파괴하기도 하며 때로는 혁명을 꿈꾼다. 그 많은 청춘들의 얼굴들이 유아인이라는 한 얼굴 속으로 겹쳐진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유아인이라는 연기자의 초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사도>, 왜 하필 지금 사도세자의 이야기일까

 

아버지 영조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인 임오화변은 조선시대 최고의 비극으로 꼽힌다. 그래서일까. 사도세자를 소재로 한 사극들은 너무나 많다. MBC <조선왕조 오백년>은 물론이고 <이산>, 최근에는 <비밀의 문>에서도 사도세자가 다뤄졌다. 그러니 역사책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고 해도 이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사도>는 이 소재를 들고 나온 것일까.

 


사진출처:영화<사도>

물론 이 <사도>라는 영화를 읽는 독법은 다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역사가 거의 광인으로 기록해놓은 사도세자에 대해 이토록 온정적인 시선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마음을 영화로서 다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나, 제 아무리 왕이라도 자식을 뒤주에 가둬 죽게 한 그 비정함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영조의 비애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건 이 이야기가 지금의 현실에 어떤 상징적인 울림을 주고 있다는 심증을 갖게 한다.

 

영화가 사도세자(유아인) 스스로 짠 관 속에서 그가 나와 칼을 빼들고 아버지 영조(송강호)를 향해 가는 장면에서 시작한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이 사건을 접한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궁궐에 무덤을 세우고 그 안에 관을 짜고 누웠다는 것이 역모를 뜻하는 것이 아니냐고 추궁하자, 사도세자는 그것이 산송장 취급당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말해줄 뿐 역모의 뜻은 결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대리청정을 맡으면서 자신의 뜻을 펼쳐보려 하지만 그 때마다 영조와 노론 세력의 반대에 부딪친다. 이미 영조가 보위에 오를 때부터 연결되어 있던 노론 세력을 떨쳐내지 못하고 어떤 합의를 해나가며 오히려 사도세자를 압박하는 영조 앞에서 그는 잔뜩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에는 자주 떳떳하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사도세자는 아들인 정조 앞에서 과녁이 아닌 하늘을 향해 시위를 당기고는 허공으로 날아간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고 말한다. 정해진 과녁에 화살을 던지는 일에서 무슨 자유와 자율을 느낄 수 있을까. 그는 자유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뭐든 숨기고 음모를 꾸미듯 일을 처결하기보다는 당당하게 거침없이 펼쳐내는 정사와 삶을.

 

하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다. 이미 구축된 영조의 시스템 속에서는 노론 세력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다. 영조 또한 이런 현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사도세자를 강건하면서도 노련하게 세우고 싶었을 것이지만 그는 노련함이 결국은 타협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는 구부러지기보다는 부러지는 쪽을 선택한다.

 

<사도>에서 이 떳떳함과 관의 이미지는 상당히 대립적인 의미를 갖는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져 죽을 때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는 플래시백으로 그의 궁에서의 삶을 보여주는데 그 삶이 뒤주 속의 삶과 다르지 않다.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왕재가 궁 하나를 벗어나지 못하고 갇혀 살아가고 있다는 건 아이러니다. 그것은 단지 물리적인 구속만이 아니다. 사도세자는 스스로 산송장이라 표현했듯 자신이 원하는 뜻을 떳떳하게 펼쳐나가는 것조차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있다.

 

거의 폐쇄공포증을 일으킬 정도로 영화의 공간은 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궁 안에서 사도세자는 끊임없이 관에 들어가거나 뒤주에 들어가 있다. 그를 그렇게 만든 건 직접적으로는 아버지 영조의 어명이지만 사실은 왕과 신하 사이에 만들어진 독특한 시스템 때문이다. 영조는 스스로도 왕은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또 왕으로서 할 수 없는 일들도 많다고 말한다. 그 역시 자기만의 관과 뒤주에 갇혀 있다.

 

사도세자의 비극이 지금 현재 특히 큰 울림을 만드는 건 그 모습이 현재 우리네 청춘들의 모습을 닮아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떳떳하고싶을 청춘들이지만 아버지들의 원죄가 구축해놓은 부조리한 시스템은 그들의 아들들을 저 마다의 뒤주에 가둬놓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저 허공으로 떳떳하게 날아간 화살이 되지 못하고 좌절과 절망 속에 관 속으로 들어가고 때로는 관을 뛰쳐나와 광기를 드러내고 있는 현실은 너무나 저 사도세자가 처한 상황 그대로가 아닌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사도>라는 영화를 통해 보다가 문득 깊은 슬픔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어쩌면 거기서 우리네 청춘들의 좌절을 읽어냈기 때문일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또한 그런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물 또한 들어있다. ‘떳떳한삶을 산다는 건 왜 이리도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을까.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비틀어진 아버지와 아들의 비극적 관계를 만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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