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먼저’ 야하기는커녕 먹먹한, 독특한 19금 드라마의 등장

“같이 잘래요?” 사실 19금 드라마에서 이런 대사는 야한 뉘앙스를 담기 마련이다. 하지만 SBS 월화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에서는 이 대사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들린다. 야하기는커녕 먹먹해진다. 그건 진짜 혼자이기 때문에 솔로의 중년이 겪는 불면의 고통이 공유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한(감우성)이 “자러 올래요?”라고 던진 질문에 1도 기다리지 않고 “네”라고 답하는 순진(김선아)의 모습에서는 그 고통이 얼마나 컸던가가 느껴진다. 

바로 이런 점은 <키스 먼저 할까요?>라는 드라마가 가진 독특한 멜로의 지점들이다. 청춘의 멜로라면 키스 한 번 하는 것이 사랑의 궁극적 결실로서 등장하지만, 이들 중년의 멜로는 키스보다 ‘하룻밤’보다 더 큰 것이 서로를 이해하고 차갑게 식어있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주는 말 한 마디가 된다. 그래서 19금의 상황들이 대담하게도 전개되지만 그 상황에서도 놀라운 감성들이 포착된다.

‘오늘만 살자’는 문신을 새긴 후, 안 해본 짓을 하겠다며 진창 술을 마시고 오래도록 안 해봤던 ‘같이 자는 일’을 하기 위해 코스프레 무인 모텔을 찾은 그들이 보여주는 의외의 감성들 역시 이 드라마만이 갖는 멜로의 독특한 코드를 보여준다. 시청 앞 지하철 콘셉트로 꾸며진 방에 나란히 앉은 그들은 그 공간이 주는 독특한 에로티시즘을 느끼기보다는 지하철이 주는 남다른 감흥에 젖어든다. 

동물원의 ‘시청앞 지하철 역에서’가 떠오르는 그 모텔 방의 정경 속에서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무한의 이야기는 순식간에 그들을 같은 시간대의 같은 지하철이라는 공간에 머물고 있는 연인 같은 느낌으로 만들어버린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지나쳐갔을 것이지만, 어느 날 그렇게 한 공간에 서 있게 된 사람들에게서 새삼 느껴지는 기적 같은 느낌을 무한은 말한다. 그래서 그 곳은 지하철 콘셉트의 모텔이 주는 에로틱한 상상이 아니라 지하철이라는 시간을 달리는 공간 위에서 드디어 마주한 운명적인 만남을 더 떠올리게 한다.

이미 두 사람은 한 차례씩 결혼을 했고 배우자들의 배신 때문에 죽을 것 같은 상처를 겪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지금도 딱지가 앉은 채 아물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 먼저 두 사람은 단지 남녀의 욕망으로 이끌린 것이 아니라, 서로의 상처를 들여다보면서 인연을 맺게 되었다.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아무도 없는 고적한 한겨울의 동물원에서 그들은 서로를 통해 자신을 보았다. 그래서 무한이 자살을 시도하려던 순진을 애써 구해낸 건 어쩌면 자신을 구해내는 일과 다른 게 아니었을 것이다. 

욕망의 이끌림이 아니라 서로가 가진 상처를 공유하고 그 상처가 내 것인 양 다독이고 위로하는 과정에서 피어나는 사랑. 그래서 <키스 먼저 할까요?>는 산전수전 다 겪은 어른들의 19금 상황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전개되지만, 야하기보다는 먹먹해진다. 19금 상황 속에서도 욕망이 저만치 뒤로 물러나고 대신 그 순간이 주는 따뜻한 ‘기억’을 오래도록 함께 하고픈 마음이 더더욱 느껴지기 때문이다. “키스 하면 당신이 오늘도 기억을 지울 것 같아서” 무한은 순진에게 키스 하지 못한다. 

웬만한 일들에 그리 놀라지도 않고, 이제는 밖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일도 별로 없어 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 두 사람이 조금씩 마음을 열어 보이는 과정은 그래서 가슴 시린 느낌으로 다가온다. 19금이지만 먹먹한 이상한 드라마의 등장이다.(사진:SBS)

‘마더’의 질문, 대체 누가 진정한 엄마인가

이토록 아픈 웃음이 있을까. 혜나(허율)는 몰아치는 폭풍 속에서 저 멀리 날아가는 철새들을 보며 자신도 같이 가자고 외친다. 아이가 걱정되는 한 어부가 이렇게 바람이 부는 날에 너처럼 작은 아이는 바람에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며 방파제에 위태롭게 서 있는 혜나를 걱정할 때, 아이는 웃고 있었다. 마치 바람에 날아가면 이 아픈 현실 속에서 벗어나 저리 날아가는 철새들과 함께 할 수 있을 것처럼. 죽음의 공포 앞에서도 자유를 꿈꾸는 아이의 이 웃음은 얼마나 슬픈가.

어머니라고 불리는 것조차 견디지 못하는 혜나의 비정한 엄마 자영(고성희)은 동거남 설악(손석구)이 아이를 학대하는 걸 방관했다. 비닐봉지에 아이를 넣어 싸매놓고 영화를 보러가는 엄마는 스스로 모성애를 쓰레기통에 버린 셈이다. 대신 혜나의 그 상처들을 남달리 깊게 들여다본 수진(이보영)은 그 학대로부터 아이를 구해내려 한다. 물론 그건 법적인 틀에서 바라보면 유괴라는 범죄가 되는 것이지만.

수진이 이토록 혜나의 상처를 외면하지 못하게 된 건, 자신 또한 어렸을 때 겪었던 일들 때문이다. 그는 어린 시절 엄마로부터 버림받았다. 정애원의 문짝에 자전거 자물쇠로 꼭꼭 묶여진 어린 수진을 발견한 글라라 선생님(예수정)은 자물쇠를 풀어줘도 자리를 떠나지 않는 수진 옆에서 묵묵히 아이를 기다려주었다. 아마 그 자물쇠는 수진에게는 자신을 버리고 간 엄마와 이어진 유일한 탯줄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염없이 그 자리에서 수진은 엄마를 기다렸지만 결국 오지 않는 기다림이라는 걸 알고는 포기해버린다. 

이런 경험을 한 수진이었기 때문에 혜나의 아픔이 남다르게 다가왔을 터다. 정애원을 찾은 수진은 하지만 자신이 과연 혜나의 엄마가 될 수 있을까를 성모 마리아 앞에서 묻는다. 자신은 엄마를 경험하지 못했고 또 엄마가 되기도 싫었고 또 엄마였던 적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진의 엄마나 다름없던 글라라 선생님은 그가 엄마로서 다시 돌아온 것을 반기고 있었다. 

“저에겐 엄마가 없는데 어떻게 엄마가 될 수 있을까요?” 수진이 성모 마리아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던지는 이 질문은 그래서 남다른 울림으로 다가온다. 엄마라고 다 엄마가 아니며, 엄마가 아니라도 기꺼이 아이의 아픔을 보듬어낼 수 있는 이가 진정한 엄마가 될 수 있다는 것. 그건 글라라 선생님이 사실상 엄마로부터 버림받거나 엄마를 떠나보내 이 정애원으로 왔던 아이들의 진정한 엄마였다는 사실이 그걸 말해준다. 

<마더>에서 성모마리아 앞에서 수진이 기도를 하는 장면은 그래서 이 드라마가 가진 또 하나의 상징을 담아낸다. 동정녀 마리아가 예수를 가슴에 품듯, 수진이 혜나라는 아이를 가슴에 안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혜나는 마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우리가 짓고 있는 죄를 현시하기 위해 불쑥 우리 앞에 나타난 존재처럼 보인다. 폭풍우가 치는 바닷가에서 하늘을 향해 양팔을 벌리고 슬픈 웃음을 짓는 그 모습이 남다른 울림으로 다가오는 건 그래서다.

<마더>가 가진 연출의 영상미는 이처럼 종교적이고 상징적인 뉘앙스까지를 담아내며 깊은 울림을 전해준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사건들은 아동학대와 유괴 같은 범죄적인 모습으로 등장하고 있지만, 이 드라마가 그런 범죄물의 틀을 훌쩍 넘어 인간 본연의 본성이나 죄에 대한 함의까지를 담아낼 수 있는 건 이러한 남다른 이야기전개와 그를 시적으로 담아내는 연출력 덕분이다. 

도대체 누가 진정한 엄마인가. 이 질문은 그래서 보다 확장될 수 있다. 무엇이 진정한 인간의 본성이고, 본성이어야 하는가. 혜나의 슬픈 웃음을 보며 먹먹함을 느꼈다면, 또 수진의 눈물어린 간절한 기도에서 뭉클함을 느꼈다면, 그건 아마도 <마더>가 전하려는 진정한 메시지를 공감했다는 이야기일 게다.(사진:tvN)

‘그사이’, 그냥이라고 해도 결코 그냥이 아닌 이준호·원진아의 사랑

이들의 사랑에 무슨 특별함이 있어 이토록 울림이 큰 걸까. JTBC <그냥 사랑하는 사이>는 제목 그대로 청춘들이 ‘그냥 사랑하는 모습’을 담담히 담아낸다. 하지만 그 담담함의 밑바닥에는 과거 건물 붕괴 사고가 그들의 삶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가 깔려 있다. 

강두(이준호)는 사고로 잃은 아버지와, 혼자 빠져나오다 그 붕괴된 건물 속에서 자신을 데리고 가달라며 발목을 잡았던 생존자에 대한 죄책감으로 환청에 시달린다. 그 무너진 건물 터에 새로운 건물을 올리는 그 공사현장에서 우연히 나온 신발 하나에도 그의 마음은 섬뜩해진다.

문수(원진아)는 사고현장에서 동생을 잃고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힘겨워한다. 사고 이후 가족은 파탄이 났다. 아버지와 엄마는 따로 살아가고, 사고보상금으로 목욕탕을 지어 살아가지만 엄마는 술로 나날을 보낸다. 동생이 돌잡이로 원래 실을 집었었다는 이야기를 듣는 일도 문수에게는 남다른 아픔이 된다. 

같은 사고현장에서 저마다의 상처를 입은 두 사람, 강두와 문수가 그래서 서로에게 마음이 끌리고 사랑을 하게 되는 과정은 담담해보여도 그 가슴 속 밑바닥의 감정들 때문에 평범할 수가 없다. 보통의 남녀라면 그 첫 만남을 건물 계단에서 하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엘리베이터 타는 것마저 트라우마로 남은 두 사람에게는 그 상처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묘한 공감대가 형성된다. 

버스를 타고 가며 문수가 그저 툭 던진, “추모비에 내 동생 이름이 있다”는 말 한 마디의 울림도 그래서 남다르다. 문수의 고백에 강두 역시 “우리 아빠도 있다”고 털어놓는 것. 사실 강두는 그 추모비가 ‘같잖아서’ 부숴버렸다고 말한 바 있다. 그에게 거기 남겨진 이름은 누구에게도 선뜻 드러내기 힘든 것이었을 게다. 그러니 두 사람이 그 추모비의 이름들을 고백하는 건 서로의 상처를 상대방에게 보이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 대한 불만만을 갖고 살아가며 입만 열면 가시 돋친 말들이 튀어나오던 강두가 조금씩 문수에게 마음을 열고, 스스로 그런 자신을 “미쳤다”고 말하는 대목은 이들의 사랑이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무르익어 가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늘 상처를 몸에 달고 다니는 강두가 역시 화상을 입은 문수에게 약을 챙겨주는 모습은 이들의 사랑이 서로의 상처를 알아봐주고 그걸 내 상처처럼 어루만져주는 일로 그려진다.

보통 청춘의 사랑이라면 그저 가슴 설레기만 하는 연정을 주로 다루기 마련이지만 <그냥 사랑하는 사이>의 사랑은 이처럼 다르다. 고통과 상처를 겪고 살아남은 자들이 하는 사랑이란 그래서 좀 더 본질적인 사랑의 면면을 담아낸다. 이들은 ‘그냥 사랑하는 사이’라고 스스로를 말하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본 시청자들로서는 그것을 ‘그냥’이라는 수식어로 말하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다. 

물론 사고 트라우마를 가진 청춘들의 사랑이라는 다소 독특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이들의 사랑이야기가 우리네 보편적인 사랑을 극적으로 담고 있다고 느껴지는 건 그 ‘상처와 치유로서의 사랑’이라는 명제 덕분이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건 어쩌면 똑같은 사멸하는 존재로서의 아픔 같은 것들을 공유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우리 모두 ‘그냥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하지만 결코 ‘그냥’은 아닌 사랑을 해왔던 걸 깨닫게 된다.(사진출처:JTBC)

이준호·원진아가 해낸 ‘그사이’의 깊은 몰입감

제목은 <그냥 사랑하는 사이>지만 연기는 그냥 할 수 없는 작품이다. 그것은 이 작품이 다름 아닌 우리 사회에 여전히 남아있는 많은 사고 피해자 가족들의 아픈 기억을 상기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 지워지지 않는 상처 앞에서는 섣부르게 웃는 것조차 감히 해서는 안 될 무례처럼 느껴진다. 그것에 진심이 담기지 않는다면.

그래서 건물 붕괴 사고 후 생존자들이 만나 사랑하고 서로를 위로하는 드라마에 이준호와 원진아라는 아직은 확고한 연기로서 자신을 대중들 앞에 증명해냈다고 보기 어려운 배우들이 주인공이라는 사실에 걱정이 앞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이준호는 지난 작품인 <김과장>에서 독특한 악역 서율 역할을 해내면서 놀라운 가능성을 보여준 바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아이돌의 잔상이 남아있는 게 사실이고, 원진아는 아직 대중들이 잘 모르는 신인이다. 어찌 기대보다 우려가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2회까지 방영된 드라마 속에서 이런 우려는 오히려 기대감으로 바뀌고 있다. 청춘의 시기가 갖는 풋풋함을 갖고 있으면서도, 사고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해 그 상처를 안고 어려운 현실을 버텨내는 그런 모습들이 전혀 이물감 없이 인물 속에 녹아들어서다. 이제 거꾸로 이들이 아니었으면 강두(이준호)와 문수(원진아) 역할을 그 누가 이만큼 깊은 몰입감으로 이끌어냈었을까 의구심을 갖게 될 정도다. 

그것은 이 작품의 함영훈 CP가 매체를 통해 밝힌 바대로 이들이 갖고 있는 ‘진지함’에서 비롯된다고 보인다. 강두와 문수를 연기하는 이준호와 원진아는 실로 사고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겪는 그 지워지지 않는 아픈 삶 속에 온전히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온 몸에 상처투성이로 살아가고, 상처가 나지 않으면 어딘가 이상하다고 여길 정도로 마구 몸을 부리는 강두는 거칠어 보여도 사실은 굉장히 여린 인물처럼 느껴진다. 세상에 자신의 아픔을 토로하는 듯한 어린 마음이 그에게서는 느껴진다.

반면 가녀리게 보이지만 오히려 엄마를 챙기고 아빠를 다독이며 생활력을 보이는 문수는 굉장히 강한 성격을 갖고 있다. 물론 엘리베이터 같은 밀폐된 공간에 있는 것 자체를 견디지 못하는 트라우마를 보이지만, 그래도 피하지 않고 그 아픔과 마주하는 인물이다. 그래서 오토바이에 치일 뻔한 문수를 강두가 구해냈을 때, 문수는 자신보다는 오히려 도로에 쓰러진 그 배달원의 안위를 더 걱정한다. 

강두와 문수가 이렇게 다른 면을 갖고 있는 건 사고 당시의 기억과도 연결되어 있다. 당시 먼저 구출된 문수가 들것에 실려 나갈 때 강두는 그 매몰된 곳에 갇혀 외치고 있었다. 거기 사람이 있다고. 누군가 다치는 것을 먼저 걱정하는 문수와 달리, 강두는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는 자기만을 생각하는 게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강두는 문수가 궁금하다. 힘겨움 속에서도 단단하게 살아가는 그 모습이. 그리고 문수는 감두가 신경 쓰인다. 계속 상처를 입으며 살아가는 그 모습이.

이렇게 인물들의 감정과 성격 깊숙이 우리가 빠져들 수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이들을 연기해낸 이준호와 원진아 덕분이다. 연기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만들어낸 어떤 진정성이 어쩌면 어려울 수 있는 이 역할들을 소화해낼 수 있게 했다고 보인다. 이준호라는 이제는 연기자라는 말이 더 어울릴 배우가 다시 보이고, 원진아라는 보석 같은 신인 배우가 새삼 아련한 느낌으로 다가온다.(사진:JTBC)

‘기억의 밤’, 아픈 기억은 어째서 밤을 필요로 하는가

영화 <동주>에서 감옥에 수감되어 갖은 고초를 겪으며 점점 파리해져가는 강하늘의 그 초점없는 눈빛이 선연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관객이라면 장항준 감독의 신작 영화 <기억의 밤>은 바로 그런 강하늘의 얼굴이 가진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는 작품으로 다가올 게다. 밝고 맑은 청년 같은 얼굴로 시작하지만 저 뒤편으로 가면 ‘절실함’에 몸부림치다 스스로를 놓아버리는 그의 얼굴 속에 한 시대의 아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걸 느낄 수 있을 테니.

<기억의 밤>은 스릴러 장르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지만, 동시에 공포물이 갖는 충격 요법이 적절히 배치된 작품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알기 어렵고, 또 벌어진 일이 실제인지 꿈인지 알 수 없다는 그 사실이 주는 두려움을 제대로 느끼게 된다. 

워낙 반전의 반전이 많은 작품이라 어떤 언급조차 스포일러가 될까 조심스럽지만, <기억의 밤>은 어느 날 낯설게 변해버린 형 유석(김무열)을 끊임없이 의심하는 동생 진석(강하늘)이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느 집으로 가족이 모두 이사를 하면서 밤마다 벌어지는 이상한 사건들을 추적해 가는 진석은 그가 본 것들이 실제인지 아니면 꿈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신경쇠약을 앓고 있는 자신의 환상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러한 가림막이 주는 공포스러운 상황은 그러나 영화가 중반 정도를 지나면서 점점 실체를 드러내고 공포물이 아닌 스릴러의 긴박감을 만들어낸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지고 소름 돋는 반전이 관객의 예측을 깨버리면서 이야기는 과거 우리가 겪어냈던 시대의 아픔을 기억으로 소환해낸다. 진석의 사적인 이야기로 시작했던 영화가 사회적 함의로 확장되어간다는 건 이 작품이 단순한 스릴러 장르의 쾌감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전하려는 주제의식이 분명하다는 걸 말해준다. 

밤에만 벌어지는 사건들과 그 사건들의 기억이 실제인지 아니면 환상인지를 헷갈리게 하는 일들은 이 작품의 제목이 왜 <기억의 밤>인가를 말해준다. 그것은 진짜 기억이 무엇인지를 찾아 헤매는 밤이라는 영화의 실제 상황을 지시적으로 말해주면서, 동시에 우리의 아픈 기억이 어째서 망각이라는 밤이 필요한가를 얘기해주기도 한다. 

우리는 최근 2,30년 동안 꽤 많은 충격적인 사건들을 겪어왔다. 다리가 붕괴되고 건물이 무너지고 하루아침에 국가 부도 위기에 직면해 다니던 회사에서 쫓겨나 길바닥에 나앉고 지하철 화재와 배의 침몰로 무고한 생명들을 잃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른바 안전 불감증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사건들이 가진 충격을 잊어버리곤 한다. 그런데 그건 진짜 우리가 안전에 대한 불감증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그건 어쩌면 너무나 고통스런 기억들이어서 마치 없는 일처럼 치부하고, 나에게는 벌어지지 않을 일이라 여기려는 안간힘에서 생겨난 ‘증상’은 아니었을까. 기억이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밤을 필요로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의 밤>이라는 제목은 우리 사회가 가진 이 증상을 지칭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실로 강하늘은 그 변화해가는 얼굴 속에 우리 사회가 겪은 그 상처의 면면들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연기를 보인다. 스릴러 장르가 가진 반전의 쾌감이 주는 재미가 그저 장르적 재미로 휘발되지 않고 어떤 사회적 함의로 확장되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이 강하늘의 얼굴에 담긴 시대의 정서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 얼굴 속에 우리네 현대사의 상처들이 어른거린다.(사진출처:영화<기억의 밤>)

‘애나벨’, 불길한 상상이 만드는 공포가 더 무섭다

영화 <애나벨 : 인형의 주인>은 개봉되기 전부터 무섭다는 소문이 돌았다. 너무 무서워 팝콘이 날아다니니 굳이 팝콘을 사서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농담 섞인 이야기가 있었고, 그 유명한 <컨저링> 시리즈 사상 가장 무서운 작품이라는 평론가의 평가도 있었다. 

사진출처: 영화<애나벨:인형의 주인>

악령 들린 인형 하나 나오는 게 뭐가 그리 무서울까 하는 의구심을 갖는 관객도 있고, 또 실제로 영화를 봤는데 생각만큼 무섭지 않아서 왜 그렇게 호들갑이었는가 하는 비판을 하는 관객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를 보며 “안 돼”, “가지마” 같은 말을 할 정도로 몰입하는 관객도 있다. 어째서 이런 다른 반응들이 나오게 된 걸까. 

<애나벨>은 사실 다 보고 나오면 내가 왜 그토록 긴장했던가가 놀랍게 느껴지는 공포영화다. 대부분의 공포 영화들이 실제적인 끔찍한 장면들을 보여줌으로써 어떤 충격을 가하지만, <애나벨>은 보여주기보다는 보여주기 전까지 기다려야 하는 그 침묵과 가려짐의 시간이 참을 수 없는 공포를 주는 영화다. 바로 그 장면과 장면 사이의 참고 기다리는 그 시간 동안 관객이 스스로 머릿속으로 떠올리기 마련인 불길한 상상. 그것이 <애나벨>이 공포를 만들어내는 힘의 원천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영화가 말하려는 악이 어떻게 우리의 정신 속으로 깃드는가에 대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딸이 교통사고로 죽고 실의에 빠진 애나벨 인형을 만드는 장인 사무엘(안소리 라파글리아)과 그의 아내 에스더(미란다 오토). 그리고 12년 후 그들이 내준 집에 들어와 지내게 되면서 섬뜩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 소녀들. 애나벨 인형에 깃든 악령이 깨어나 소녀들의 영혼을 잠식해가는 그 과정이 주는 공포가 바로 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영화 속에서 어떤 끔찍한 공포 상황을 겪게 되고 그로인해 희생되는 건 다름 아닌 상처받아 약한 정신을 가진 이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약한 정신 속에서 깃드는 불온한 상상은 악이 자라나게 되는 씨앗이 되고 그것이 그의 영혼을 잠식해간다는 것. 딸의 죽음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집착하는 사무엘과 에스더가 그렇고,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해 같이 놀아주지 않는 보육원 친구, 언니들에게 원망의 마음을 갖는 재니스(탈리사 베이트먼)가 그렇다. 

즉 사무엘과 에스더 그리고 재니스에게 그 악령이 나타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깊은 상처로 인해 그들 안에서 만들어진 ‘불길하고 불온한 상상’이 그 악령을 스스로 찾아가게 했다는 것이다. 재니스가 그 악령을 처음 맞닥뜨리는 장면은 그래서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그 힘을 통해 보복을 하려는 마음에 이끌리는 양가감정이 교차한다.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허수아비나, 그저 아이들 장난감일 수 있는 인형 그리고 장난감 총이나 그저 방치된 우물 같은 것들은 그래서 이 곳에 머무는 이들의 상상에 의해 공포의 존재로 깨어난다. 그리고 이런 체험은 고스란히 관객들에게도 반복된다. 관객 스스로 이미 벌어지지도 않는 상황을 상상하면서 영화를 보게 됨으로써 공포가 배가된다는 것. 

그래서 <애나벨>에 대한 평가는 보는 이들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유난히 많은 불길한 상상을 떠올린 이들이라면 그토록 무서울 수가 없는 영화지만, 공포영화가 너무 익숙해 그저 액면 그대로의 장면이 주는 공포를 기대했다면 조금 심심한 영화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잔인한 장면 없이도 소름끼치는 공포가 상상력만으로도 가능해질 수 있다는 걸 이 영화가 보여줬다는 건 인정해야 할 것 같다.

<화랑>이 유골무죄 무골유죄 청춘을 보듬는 방식

 

유골무죄 무골유죄.” 골품이 있으면 죄가 없고 골품이 없으면 죄가 있다? 이 조어는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삼국시대 신라의 골품제도에 빗댄 말이다. 지금으로 치면 금수저 흙수저의 신라 버전쯤 될까. KBS 월화드라마 <화랑>이 그려내는 청춘들은 당대의 골품제도라는 태생적인 틀에 묶여 꿈이 있어도 펼칠 수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화랑(사진출처:KBS)'

무명(박서준)은 그 골품제도에 의해 많은 상처를 갖고 있는 인물이다. 어린 시절부터 천인촌에서 함께 자라온 둘도 없는 친구 막문(이광수)이 그 신분제의 틈바구니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누이를 찾기 위해 왕경을 넘었다는 죄로, 또 절대 신분이 노출되면 안 되는 성골 삼맥종(박형식)의 얼굴을 봤다는 죄로 막문이 죽음을 맞이하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무명은 본래 안지공(최원영)의 아들이었던 막문의 진짜 이름 선우를 자신이 대신 쓰기로 한다.

 

꽃다운 청춘들, 화랑이 모이는 선문이 겉으로 표방하는 것이 골품의 차별이 없다는 건 그래서 흥미로운 대목이다. 물론 그 안에서 뼛속까지 골품의 틀에서 살아왔던 진골들이 선우 같은 반쪽(반만 진골)을 집단적으로 따돌림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오로지 실력으로 판단하는 것 같은 기준들이 제시되는 건 <화랑>이라는 드라마가 현재에 어떤 판타지를 줄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골품의 차별이 없이 모두가 하나의 화랑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자신이 해야 하는(하다못해 빨래까지) 상황은 진골들에게는 힘겨운 일이지만, 애초에 천인으로 살아왔던 선우에게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하지만 그를 괴롭히는 건 여전히 귀천을 따져 자신을 능멸하고 나아가 여동생인 아로(고아라)까지 희롱하는 얘기를 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반류(도지한)는 마치 현재의 비뚤어진 상류층들의 갑질 행태를 고스란히 재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선우 역시 만만한 인물은 아니다. 반류가 선우에게 너 같은 반쪽이 시궁창이라고 말하자 선우는 이렇게 일침을 가한다. “시궁창은 너지. 스스로 뭘 해본적도 없고. 그 자리에서 썩고 있는 너 같은 고인 물.” 이 대사가 말해주듯 이 귀족 자제들이 화랑으로 모인 선문에서 선우라는 이질적인 인물은 그래서 향후 이들 화랑들에게 어떤 변화를 만들어낼 것으로 보인다. 귀족이라는 골품의 틀에서 썩어가고 있는 그들을 다시 흐르게 만들어줄.

 

선우가 온 몸에 상처를 달고 다니는 인물이라는 건 이런 그의 캐릭터를 그대로 반영한다. 흥미로운 건 그에게 마음이 설레는 아로가 의원 아버지인 안지공에게 곁눈질로 의술을 배운 인물이라는 것. 아로의 캐릭터는 다친 상처를 치료해주는 것이다. 아로를 구하다 손바닥을 칼에 베인 선우를 치료하면서 다치지 마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뭉클하게 다가오는 건 그것이 마치 상처받은 청춘을 보듬는 치유의 손길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선문에서 벌어진 화랑들의 집단 난투극으로 그들을 치료하기 위해 아로가 나서는 장면은 그래서 이 캐릭터를 보다 명확히 해준다. 또한 잠 못 드는 삼맥종을 옆에서 잠들 수 있게 해주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치유의 캐릭터 아로는 선우의 몸과 마음에 난 상처를 보듬어주고, 정신적인 고통을 겪고 있는 삼맥종을 잠시 쉬게 해준다.

 

이것은 <화랑>이라는 사극이 신라의 화랑들 이야기를 통해 현재의 청춘들을 보듬는 방식일 것이다. 물 수()를 보여주며 이것의 성격을 묻는 위화공(성동일)에게 삼맥종은 물은 선하다고 말한다. 늘 자신을 낮추고 밑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란다. 하지만 선우는 물이 고단하다고 말한다. 물은 몸속에서 금이면 금, 물고기면 물고기를 내어줘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쩌면 위화공이 물 수()자와 함께 내놓은 표제어 왕()의 역할을 묻는 질문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선우의 심경이 담겨진 이야기이기도 하다. 청춘들의 고단함. 그 고단함을 없애줄 수 있는 건 더 고단하게 백성들을 위해 일하는 왕의 역할이 아닐까 하는 그런 질문.

김은숙 작가, 그 많은 경계들을 능수능란하게 넘나드는

 

가슴에 칼이 박힌 채 바로 그것 때문에 영겁을 살아가는 존재. 간단해 보여도 이런 캐릭터를 도깨비에 부여한 건 tvN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이하 도깨비)>가 참신해질 수 있는 밑거름이 된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도깨비의 이미지는 상당히 다른 무게감을 이 캐릭터에 안겨주기 때문이다.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사진출처:tvN)'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도깨비의 이미지가 뭔가. 혹부리 영감에게 속아 혹과 도깨비 방망이를 바꿀 정도로 아둔한 존재로 그려지기도 하고, 도토리 깨무는 소리에 집 무너지는 줄 알고 줄행랑을 치는 겁많은 존재로 그려지기도 한다. <삼국유사> 등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토대로 보면 도깨비는 인간을 살해할 만큼 악독하지 않고, 인간의 꾀에 넘어가 초자연적 힘을 이용당하는 미련함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라고 한다.

 

신이지만 조금은 희화화되어 인간적인 면면을 가진 캐릭터가 바로 도깨비다. 김은숙 작가가 다른 시도 아닌 도깨비를 선택한 건 실로 탁월했다고 보인다. 도깨비라는 존재는 서구로 보면 신으로 해석될 수 있는 캐릭터일 수 있지만 또한 우리네 고유의 개성을 가진 신이라는 점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갖고 있다. 이 점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이 콘텐츠가 보편적으로 먹혀들 수 있는 틈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가슴에 박힌 칼로 인해 영겁을 살지만 그것이 또한 죽지 못하는 것으로서 축복이자 저주가 된다는 희비극 설정은 자칫 허황될 수 있는 이야기에 무게감을 실어준다. 설화 속의 도깨비는 그래서 희화화된 존재지만 이 드라마 속의 도깨비는 비극성을 껴안은 진중한 면면과 동시에 도깨비 특유의 장난기와 가벼움도 갖고 있는 캐릭터가 된다. 이 설정을 통해 김은숙 작가는 희극과 비극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그것이 서로 맞닿아 있다는 걸 캐릭터로 구현해낸다.

 

<도깨비>는 고려시대의 전쟁의 신이었던 김신(공유)의 이야기가 현재로까지 이어진다. 김신은 죽지 않는 존재로 계속 살아 현재까지 무려 9백년을 넘게 살고 있지만 그를 둘러싼 지은탁(김고은)이나 써니(유인나), 유덕화(육성재) 같은 인물들은 현생에 태어나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여기에 연기설 같은 것들이 끼어들면서 과거 고려시대의 김신과 그를 질투해 죽인 어린 왕 그리고 그 자리에서 역시 죽음을 당한 왕비(김소현)가 현재 어떤 인물로 태어났는가 하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설정을 통해 <도깨비>는 자연스럽게 사극과 현대극을 뛰어넘는 장르적 퓨전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설정이 더 흥미로워진 건 과거의 악연이 현재의 악연으로 이어지는 단순구도가 아니라 과거에는 악연이었지만 현재는 인연이 될 수도 있는 그런 구도가 예고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저 도깨비 캐릭터가 가진 희비극적 요소가 어른거린다. 즉 인연은 설렘을 동반하지만 그렇게 가까워진 사랑은 동시에 비극이 될 때 그 강도도 커지는 법이다.

 

이런 선택은 김은숙 작가가 마치 신데렐라 구박하듯 지은탁을 괴롭히는 이모네 집 사람들을 도깨비 김신이 벌주는 독특한(?) 방식에서 슬쩍 드러난다. 도깨비는 엉뚱하게도 벌이 아닌 금덩어리를 준다. 그래서 이모네 집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금덩어리에 좋아하지만 그것은 금세 지옥으로 바뀐다. 욕심이 상황을 비극으로 만드는 것.

 

이런 소소한 데까지 뻗어있는 이야기들의 면면들은 다름 아닌 김은숙 작가가 이제 인생을 좀 아는 고수라는 증거다. 행복은 비극과 연결되어 있고, 슬픔은 또한 행복이 되기도 하며 그래서 악연으로 인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굉장한 진중함이 사실은 가벼움과 공존할 수 있고, 시간이나 공간의 한계는 이야기라는 장치 안에서는 쉽게 그 경계가 무너진다.

 

물론 이런 것들은 이론적인 말일 뿐,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도깨비>라는 작품을 보다보면 너무나 쉽게 희극이 비극으로 또 비극이 희극으로 이어지고, 어떤 즐거워 보이는 욕망이 순식간에 지옥으로 바뀌어 버리며, 사랑이 주는 설렘이 다가오는 비극의 불안감으로 변화하는 걸 느끼게 된다. 이렇게 변화무쌍한 삶의 진짜 양태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룬다는 것. 멜로 한 장르를 깊게 파왔던 김은숙 작가가 그간 꽤 많은 작품들과 세월을 통해 어떤 경지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심증이 드는 대목이다.

<푸른바다>, 그저 인어판타지로 치부할 수 없는 기억 모티브

 

도대체 이 인어라는 존재의 진짜 능력은 무엇일까. SBS 수목드라마 <푸른바다의 전설>을 보다 보면 슬쩍 드는 의문이다. 인간보다 오래 산다? 인간을 사랑하게 되고 사랑받지 못하게 되면 심장이 서서히 굳어 먼저 죽을 수 있는 존재로 인어가 그려지고 있는 마당에 이런 삶의 길이는 그다지 중요한 능력이 아닌 것 같다. 물에서도 살 수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인어의 관점으로 보면 뭍에서 잘 살 수 없다는 이야기일 수 있다. 역시 능력이라 부르긴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힘이 세다? 이건 능력일 수 있다. 하지만 <푸른바다의 전설>에서 이 능력을 발휘하는 장면은 스페인 바닷가 마을에서의 추격전 정도다. 그것도 코미디로 처리된.

 

'푸른바다의 전설(사진출처:SBS)'

조금씩 드러나고 있는 것이지만 이 인어의 진짜 능력은 기억과 관련되어 있다. 누군가의 아픈 기억을 지워줄 수 있는 존재. 이것은 실로 아픈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능력이다. 중간에 살짝 에피소드를 들어간 의료사고로 죽은 딸의 아픈 기억을 가진 예은 엄마 이야기가 그렇다. 웃으며 돌아오겠다던 아이가 싸늘하게 돌아왔을 때 찢어지는 부모의 마음이 어떻겠는가. 그 기억은 너무나 아파 지우고 싶지만 또한 지울 수도 없는 것일 게다.

 

하지만 이 인어가 기억을 지우는 능력을 가진 것으로 드라마가 설정하고 있지만 아픈 기억을 가진 이들은 아파도 결코 기억을 지우려 하지 않는다. “아파도 사랑할 수 있으니까. 우리 딸 기억하지 못해서 사랑하지 못하는 것보다 아파도 기억하면서 사랑하는 게 나아요.” 예은 엄마의 이 한 마디는 그래서 이 드라마가가 내세우고 있는 주제의식이나 마찬가지다. 인어는 상처를 보듬어주기 위해 기억을 지워주겠다고 하지만, 그 상처는 다름 아닌 사랑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즉 기억을 지운다는 건 사랑을 지운다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 기억 모티브의 이야기는 그래서 다시 허준재(이민호)의 아픈 기억의 이야기로 돌아온다. 허준재는 계모 강서희(황신혜)로부터 어린 시절 깊은 상처를 받았다. 엄마가 떠나버리고 남은 자리에 계모가 들어서더니 그녀가 데려온 배다른 형 허치현(이지훈)이 그의 자리마저 빼앗아버린 것이다. 그는 결국 그 기억으로부터 도망친다. 그래서 아버지를 떠나 최면술로 누군가의 기억을 조작함으로써 돈을 뜯어내는 사기꾼으로 살아간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 앞에서 그는 본심을 내보이지 않는다. 아버지에게 그는 아버지 곁을 떠나 훨씬 좋았다. 홀가분했다. 뒤도 안 돌아보고 포기한 건 미련 갖지 말고 잊어버려라아버지에게서 아무것도 안 받고, 안 엮이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거짓이었다. 그는 청이(전지현)에게 진짜 보고팠던 아버지에 대한 속내를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린다. 청이는 누구에게 하지 못했던 그런 이야기들을 언제든 자기에게 털어놓으라고 말한다.

 

허준재는 또한 꿈속에서 전생의 자신이었던 담령을 만난다. 담령은 이미 과거에 인어와 인연을 맺었고 동시에 그녀를 죽이려는 마대영(성동일)과 악연을 맺었다. 어찌 된 일인지 담령은 시간을 뛰어넘어 이 악연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허준재에게 알리려고 한다. 그래서 남기는 것이 바로 자신의 자화상이다. 허준재는 담령의 거처에서 발굴된 유물 속에서 잘 보존되어 있는 자화상 속의 자신의 얼굴을 목도하며 놀란다.

 

허준재는 그래서 두 개의 자신과 마주하게 되는 셈이다. 하나는 어린 시절의 상처받은 자신이고 또 하나는 전생의 담령이다. 그 과거의 두 자신들은 모두 상처받은 존재들이다. 그래서 허준재는 그 기억들로부터 도망쳐 왔다. 하지만 그 기억들이 인어의 등장과 함께 다시금 그의 앞에 나타난다. 인어는 기억을 지울 수 있는 존재지만 동시에 기억을 상기시키게 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아픈 사랑이란 망각으로 지워지기도 하지만 그 아름다운 기억으로 끊임없이 되살아나기도 하니 말이다.

 

오랜 세월을 묻혀 있던 유물들이 발굴되어 허준재의 지워진 기억을 깨운다는 이야기의 설정은 그래서 흥미롭다. 결국 아픈 기억들을 지우려 했지만 결코 지워서는 안되는 기억들도 있기 마련이다. 그 기억을 지우지 않고 떠올리는 것이 남아 있는 이들이 똑같은 비극을 겪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허준재는 그렇게 지우려 했던 기억들이 유물로서 자신의 눈앞에 돌아온 것을 마주하게 됐다. 묻는다고 묻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묻어서는 또 다른 아픈 일들이 우리 앞에 부메랑처럼 돌아오기 마련이다. 우리가 지금 마주하고 있는 현실처럼.

<푸른바다>가 인어를 통해 말하는 기억, 가족, 사랑

 

우리 예은이 너무 착해서 엄마 돕겠다고 수학여행도 안 간 애예요. 정말 간단한 수술이라고 했는데 다시 못 깨어날 줄 알았으면... 다 해줄걸. 수학여행도 억지로 보내고 예쁜 옷도 많이 사줄 걸.... 엄마가 못해준 것만 생각나니까. 잠을 잘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없다 예은아..”

 

'푸른바다의 전설(사진출처:SBS)'

SBS 수목드라마 <푸른바다의 전설>에서 인어 심청(전지현)은 병원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는 예은 엄마를 만난다. 그녀는 의료사고의 진실을 요구합니다. 우리 딸이 왜 죽었는지 알려주세요.’라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왜 그렇게 슬픈 눈을 하고 있냐고 청이 묻자 예은 엄마는 예은이에 대한 아픈 기억과 살았을 적 해주지 못한 것들에 대한 후회를 털어놓는다.

 

내 비밀 들어볼래요? 난 사람의 기억을 지울 수가 있어요. 원하면 지워줄게요. 슬프게 하는 기억? 딴 생각 안 나면 안 슬프고 안 아플 수 있잖아요. 내가 해줄게요.” 사람의 기억을 지울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인어 심청의 제안에 문득 예은 엄마는 예은이와의 추억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문득 눈을 뜨더니 말한다. “아니요. 죽을 때까지 아무리 아파도 가지고 갈 거예요.” 아픈데 왜 가져 가냐는 심청의 물음에 예은 엄마는 말한다. “아파도 사랑할 수 있으니까. 우리 딸 기억하지 못해서 사랑하지 못하는 것보다 아파도 기억하면서 사랑하는 게 나아요.”

 

기억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는 각별하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성수대교 붕괴, 대구가스폭발사고 등등. 멀리 갈 것도 없이 지난 몇 년 간 벌어졌던 사건사고들만 해도,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 백남기 농민 물대포 사망사건, 강남역 살인사건 그리고 지금 벌어지고 있는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까지 너무 많은 이들이 벌어졌다. 그 많은 사건사고들이 터져 나올 때마다 엄청난 아픔과 상처가 마치 트라우마처럼 우리들의 기억 속에 흉터를 남긴다. 너무 아파서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tvN에서 방영됐던 <기억>이라는 드라마는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기억의 시스템을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는 한 가장의 비극과 그 안에서 발견하는 희망을 통해 아프게도 담아냈다. 뺑소니로 죽은 아들의 기억을 지워내는 대가로 사실은 자신의 현재의 위치와 지위를 갖게 됐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이 가장의 이야기는 기억을 지우는 것과 권력 시스템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날카롭게 보여주었다.

 

드라마 <시그널>에 시청자들이 그토록 열광했던 까닭 역시 지워져가는 기억을 되돌려 그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려는 형사들의 따뜻한 인간애 때문이다. 이러한 기억의 트라우마를 툭툭 건드리며 그 미제사건을 풀어내려는 간절한 열망이 시청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다소 황당할 수 있는 무전기로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그 판타지는 아무런 이물감이 되지 않았다.

 

이처럼 기억을 다루는 드라마들 속에서 모두가 지워가는 그 기억의 언저리를 마치 유령처럼 세월이 지나도 계속 배회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가족이다. <푸른바다의 전설>이 하나의 에피소드를 담아낸 기억에 대한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예은 엄마가 그렇고, <기억>에서 기억을 지워버린 채 살아가던 가장과는 달리 결코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아파하며 살아가는 아이 엄마가 그러하며, <시그널>의 그 많은 희생자 가족들이 그렇다.

 

<푸른 바다의 전설>에서 인간 세계를 전혀 모르는 심청은 가족이 뭐냐고 같은 병실에 있는 한 아주머니에게 묻는다. 그녀는 진짜 몰라서 물어? 여기 간병하는 사람들이 다 가족들이잖아.”라고 말한다. 그러자 심청은 그들을 둘러보며 생각한다. ‘가족은 붕어빵 같은 거네요. 붕어빵들처럼 닮았고 따뜻하고 달달해.’

 

하지만 가족은 그저 달달하기만 한 존재들은 아니다. 드라마 말미 에필로그에 이르러 그 아주머니는 가족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를 덧붙인다. “항상 좋기만 하겠어? 병 주고 약 주는 거지. 나도 우리 아들 빚 갚아주느냐고 생고생이야. 그래서 여기 디스크 터진 거잖아.” 가족은 상처를 남긴다. 그 상처는 다름 아닌 사랑하기 때문에 남는 상처들이다.

 

허준재(이민호)에게도 그 상처가 있다. 아버지에 대한 아픈 기억이다. 어머니가 사라지고 아버지가 재혼해 같이 살게 된 형 허치현(이지훈)은 그의 자리를 빼앗는다. 그래서 결국 상처 입은 허준재는 집을 나와 살아가게 되지만 아픔만큼 가족에 대한 마음을 지우지 못한다. 가짜 아들 노릇하는 허치현이 무감한 것과, “미안해도 미안하다 말 못하고 보고 싶어도 또 보고 싶다는 말 잘 못하며살아가는 아버지와 허준재의 아픈 마음은 그래서 너무나 다르다.

 

허준재. 사람들은 아프고 슬퍼도 기억하고 싶어 해? 밥도 못 먹고 잠을 못 자도 기억하고 싶은 사랑은 뭘까?” <푸른바다의 전설>은 인어라는 인간과는 다른 이질적 존재를 내세워 우리가 별 생각 없이 지나치곤 했던 기억이니 가족이니 사랑의 의미에 대해 새삼 질문한다. 아파도 기억하는 것이 바로 가족이고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아픈 기억과 가족과 사랑의 이야기는 각별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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