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바이러스’가 심상치 않다. 클래식이라는 마니아적 소재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시청률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는 이 드라마는 어쩌면 ‘시청률을 잡은 유일한 마니아 드라마’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이 바이러스를 우리 사회 깊숙이 퍼뜨리고 있는 걸까. 그 중심에는 절대 카리스마, 신드롬 조짐까지 보이고 있는 강마에(김명민)가 있다. 그 캐릭터가 시청자들의 열광을 얻어내는 바로 그 지점을 보다보면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속살이 살짝 드러나는 걸 목도할 수 있다.
현실성 있는 강력한 리더십의 부재 강마에가 오케스트라를 하기 위해 모여든 단원들에게 제일 먼저 하는 작업은 그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게 하는 것이다. “실력도 없는데 노력도 안 하면서 대접을 받으려” 하는 그들에게 그는 거침없이 “똥 덩어리”라는 카운터 펀치를 날렸다. 그 충격은 단원들뿐만 아니라 드라마를 보던 이 땅의 잠재적 똥 덩어리들(?)에게도 고스란히 미쳤다. TV를 켜면 어디서나 흘러나오는 이 “생각대로 하면 되는” 긍정의 사회에 그는 강한 부정을 했다. TV가 전파하던 거짓의 희망은 그의 말 한 마디로 깨지고 우리는 거기서 진짜 냉정한 현실을 보게 되었다.
대선 때면 반짝 나타나는 리더십들은 대부분 허황된 수치를 내세우면서 장밋빛 사회를 얘기하지만 사실상 사회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현실을 얘기하기보다는 먼 미래의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혹은 일어나기 어려운) 꿈만을 이야기했다. 까칠하고 째째한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현실을 솔직히 말하는 그는 이 사회의 ‘부드럽고 한없이 너그러운 얼굴’로 거짓된 ‘핑크빛 미래’를 말하는 자들과 대비를 이루며, 이 사회에 부재한 현실성 있는 강력한 리더십을 대리충족 시키게 만들었다.
소수집단이 지배한 꿈이 없는 사회 이 드라마가 강마에식으로 표현하면 ‘귀족을 위한 것으로 천민들은 꿈에도 꿀 수 없는’ 클래식이라는 소재를 사용하면서 사회에서 누락된 서민들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 드라마만의 강력한 반어법이다. 주부로서 꿈을 접고 살아온 정희연(송옥숙)은 가정이라는 집단에 발목이 잡혀 있고, 앞서나간 후배에게 굴욕을 당하면서도 회사에서 꿈을 갉아먹고 사는 박혁권(정석용) 역시 회사와 가정에 발목이 묶여 있다. 가난한 형편 때문에 클래식을 하려면 으레 해야만 할 것으로 생각되는 개인레슨 같은 투자(?)를 받지 못해 거리를 전전하는 하이든(쥬니)은 이 사회라는 집단에 발목이 잡혀 있다.
이들의 상황은 현실 그대로이다. 이 사회에서는 누구든 현실이라는 걸림돌에서 생존하기 위해 꿈을 버린다. 아니 어쩌면 도전조차 하지 못하게 사회는 일찌감치 그들에게 꿈을 버리는 연습을 시켜온 지도 모른다. 강마에가 말한 귀족과 천민을 나누는 클래식은 이 사회의 상류층이 가진 특권의식과 서민들이 가지도록 강요받는 천민의식을 단번에 드러내준다. 몇 프로 되지 않는 소수 집단이 사회 전체 집단을 굴러가게 하는 구조 속에서 저네들은 클래식 같은 문화를 누릴 때, 다수의 서민들은 꿈을 버리도록 강요받는 사회. 강마에의 까칠한 말 한 마디 속에는 그것이 숨겨져 있다.
환타지가 환타지에서 끝나지 않도록 하지만 이 드라마는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시작한다. “꿈을 이루라는 게 아니라 한번 꿔보기나 하라는 것이다. 꿔보지도 않으면서 꿈이라고 하면 그건 꿈이 아니라 그냥 별이다.” 강마에의 이 말처럼 현실을 보지 못했던 서민들에게 잔인한 현실을 보여준 후, 꿈꾸지 못하는 소외된 이들을 꿈꾸게 만든다. 이 드라마가 강력한 환타지를 갖추는 지점은 바로 이 곳이다. 드라마 속 단원들이 강마에라는 지휘자를 통해 오케스트라를 하는 그 꿈을 향해 매진할 때, 그걸 바라는 시청자들은 자신 속에 오래도록 묻어두었던 꿈 한 자락을 꺼낼 수도 있을 것이다.
각자 사회의 구성원들이 꿈을 다시 꾸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그 꿈을 꾸게 만드는 리더십이다. 강마에 같은 리더십은 드라마에서나 존재하는 것일까.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것일까. 우리 사회가 지금 필요로 하는 리더십은 대중들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는 리더십이 아니라, 대중들에게 혹독할지라도 현실을 보게 만들고 또 그것을 꿈으로 연결시키는 리더십이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지만, ‘베토벤 바이러스’를 보며 환타지가 환타지에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건, 그것이 이 사회가 가면 뒤에 숨겨왔던 현실의 정곡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주말극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재벌가와의 로망이라는 오래된 코드를 들고 나오고 있다. ‘엄마가 뿔났다’의 대기업 회장 김진규네 아들 김정현(기태영)과 서민적인 나일석네 딸 나영미(이유리)간의 사랑이 그렇고, ‘행복합니다’의 재벌집 딸 박서윤(김효진)과 이준수(이훈)의 사랑이 그렇다.
서로 다른 사회적 지위나 부의 차이를 가진 남녀의 만남은 이미 셰익스피어가 희곡을 쓰던 시대에서부터 내려오던 고전적인 소재. 그것이 오랜 고전이 되고 지금까지도 자주 소재로서 활용되는 이유는 그 자체로 신분상승 욕구나 변신욕구를 자극하는 강력한 환타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때 이 설정은 툭하면 신데렐라의 변주 정도에 그치면서 식상해져버린 트렌디 드라마를 근본적으로 비판받게 만든 혐의를 갖고 있다. 하지만 현재 방영되고 있는 이들 주말극들은 이러한 구도를 활용하고 있으면서도 과거와는 다르게 20%대의 높은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다. 무슨 차이가 이것을 만들었을까.
주목해야할 것은 재벌가의 남녀들이 보이는 ‘서민적인 모습’이다. ‘엄마가 뿔났다’의 김정현은 대기업 회장 아들이면서도 늘 버스를 타고 다니는 인물이고, ‘행복합니다’의 박서윤은 허례허식에 가득한 상류층 문화에 반발의식을 갖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들은 부유하면서도 서민적이다.
이것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여전히 시어머니가 될 재벌가의 엄마들은 허영과 특권의식에 가득한 악역이지만, 최소한 아버지들은 이런 차이를 뛰어넘어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인물로서 그려진다. 이러한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부부의 조합은 상당부분 재벌가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지워준다.
이들이 이렇게 그려지는 이유는 이들 주말극이 보여주는 재벌가와 서민층의 관계가 과거와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과거의 드라마가 주로 선망 받는 재벌가의 남자 혹은 여자가 서민인 상대방의 신분을 ‘끌어올리는’ 관계를 보여줬다면, 작금의 주말극들은 거꾸로 재벌가의 남자 혹은 여자가 서민 쪽으로 내려와 눈높이를 맞추는 관계를 그려낸다. 부유하면서도 서민적인 재벌가의 남녀라는 캐릭터는 이걸 가능하게 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다.
이것은 또한 주제의식과도 관련이 있다. ‘엄마가 뿔났다’는 기본적으로 신분상승 욕망을 그리는 드라마가 아니다. 이것은 서민적인 엄마의 일상을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시선은 늘 엄마에게 맞춰져 있다. ‘행복합니다’ 역시 그 주제의식은 ‘엄마가 뿔났다’와 마찬가지다. 서민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이철곤(이계인)네 집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중심에 있으며, 그것은 박승재(길용우) 회장집 사람들의 이야기와 비교되면서 진짜 행복을 묻게 될 것이다.
재벌가가 등장하지만 이들 드라마가 보여주는 것은 서민적인 일상들의 행복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극과 극의 만남이라는 설정은 오히려 돈을 좇는 사회에 진짜 행복은 이런 보통의 일상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탐탁하지 않아 하는 김정현의 엄마, 고은아(장미희)앞에서도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나영미나, “니들이 그렇게 잘났냐”며 절망하지만, 헤어지는 조건으로 돈을 줄 수도 있다는 박상욱의 말에 분노하는 이준수는 진정한 행복 앞에서 현재 우리네 서민들이 당당할 것을 요구하는 인물들이다.
김수현 작가나 김정수 작가 같은 거장들이 주말극으로 가져온 것은 소재로서는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장인의 손길을 거친 드라마들은 일상의 디테일들을 잘 포착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지금까지 천편일률적으로 그려져 왔던 구도의 식상함을 넘어서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무엇보다 공감을 일으키는 부분은 서민들의 일상에 대한 존경과 따뜻한 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