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플랜’, 합리적 의혹의 자격, 답해야 할 의무

만일 내가 찍은 투표지가 제대로 집계되지 않고 경쟁 후보 쪽으로 집계된다면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사실 김어준의 다큐영화 <더 플랜>이 던지는 질문은 아직까지 그다지 의심해보지 않았던 사안이다. 설마 컴퓨터가 하는 집계인데 그런 오류 혹은 나아가 부정이 있었을까. 

사진출처:영화<더 플랜>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우리의 마음은 점점 의혹 쪽으로 기울어가는 걸 어쩔 수 없다. 그 의혹은 막연히 정황만 가지고 쓰는 소설이 아니라 데이터들이 일관되게 보이고 있는 숫자가 주는 의혹이라는 점에서 더 현실감을 부여한다. 그 숫자들은 통계학적인 분석을 통해 나온 것들이다. 지난 대선, 투표 분류기가 미분류한 표에서 박근혜와 문재인 두 후보 간의 득표율을 분석해보자 전국의 미분류 표에서 1.5라는 일정한 비율로 박근혜 후보의 표가 많았다는 것이다. 이 비율로 논문까지 쓴 통계학자는 이러한 일정한 비율이 나온다는 건 중앙의 통제가 있었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국내외 전문가들은 미분류표의 비율이 1의 비율에 최대한 가까워야 상식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며, 1.5라는 수치는 지나치게 많은 비율이고, 만일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거기에 대해 이를 관리하는 주체는 합당한 답변을 내 놓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 다큐영화는 이런 문제가 우리나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해외에서 논란이 되었던 사안들이라는 걸 확인시켜줬다. 독일 등지에서 전자개표기를 두고 벌어졌던 소송들의 사례를 보여주며 이러한 컴퓨터 방식의 개표가 간단한 해킹에 의해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독일에서는 결국 그 신빙성을 문제 삼아 제기된 소송에 의해 전자개표기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됐다는 것. 

<더 플랜>은 영화 말미에 자막을 통해 선관위에 수차례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는 걸 밝혀두었다. 영화가 나오고 난 후 지난 19일 선관위는 드디어 공식적인 입장을 밝혔다. “의혹을 해소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투표지 현물을 직접 검증하는 것”이고 “<더 플랜> 제작진의 요구가 있다면 조작 여부 검증에 필요한 범위에서 제3의 기관을 통해 공개 검증을 할 것”이라는 것. 그리고 “결과를 조작한 것이 밝혀진다면 선관위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질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여기에 선관위는 한 가지 단서를 덧붙였다. “반대로 어떠한 조작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의혹을 제기한 분들은 무거운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길 기대한다”는 것이다. 김어준은 이러한 대응이 “일종의 협박”이라고 밝혔다. 

<더 플랜>이 제기하는 의혹은 한 마디로 끔찍하다. 만일 그 내용이 사실이라면 민주주의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투표가 부정한 누군가에 의해 간단히 조작될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영화 뒷부분에 <더 플랜> 제작진은 당시 사용됐던 전자개표기를 어렵게 구해 박근혜와 문재인으로 나뉘어진 표를 넣고 개표감시를 해온 ‘시민의 눈’ 활동가들이 보는 앞에서 해킹 실험을 선보인다. 놀랍게도 표에 찍혀진 도장과 상관없이 해커가 집어넣은 수치의 비율대로 정확히 표가 나뉘는 것을 눈앞에서 목도한 그들은 너무나 허탈하고 황당해 말을 잇지 못했다. 얼마나 화가 나고 황당했으면 심지어 그들 중에는 눈물까지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더 플랜>이 던지고 있는 건 질문이다. 수치들과 조작 가능한 전자개표기의 해외 사례와 국내에서의 실험이 모두 합리적 의심을 가능하게 만들고 있다. 주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투표에 대한 이러한 합리적 의혹은 국민이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자격이 있다 할 것이다. 그리고 선관위 같은 공공기관은 이러한 의혹을 해소해줄 수 있는 확실한 답변을 던질 의무가 있다. 그것이 그저 의혹에 불과하더라도 말이다. 

물론 선관위는 <더 플랜> 제작진의 요구가 있다면 제3의 기관을 통해 공개검증을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더 플랜>이 던진 질문은 그것이 아니다. 지난 대선에서 나온 미분류표의 1.5라는 일정한 수치의 비율이 어떻게 나오게 된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그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아직 확실히 나오지 않았다.

‘대선주자 국민면접’, 기대 못 미쳤어도 의미 있는 까닭

대선주자들의 대통령 취업을 국민들이 면접한다? SBS <대선주자 국민면접>은 그 발상이 발칙(?)하다. 대통령을 하나의 직업으로 설정하고 그 직업의 사용자는 다름 아닌 국민이라는 걸 명확히 내놓고 있다. 물론 우리는 모두 국가의 주인은 국민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이런 명확한 관계설정으로 국민이 대통령을 대하는 지는 의문이다. 

'대선주자국민면접(사진출처:SBS)'

대통령을 국민을 위한 일꾼으로 바라보기는커녕 여전히 받들어야 할 왕으로 보고, 그 왕에 대한 충성이 사사롭게는 집안에서의 효도와 같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선주자 국민면접>은 그 제목이나 기획에서부터 아예 대놓고 대통령을 하나의 직업인으로 상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직업이 해야 할 일은 오로지 국민의 말을 듣고 그 뜻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는 일이라는 것. 

그 첫 번째 면접에 응한 대선주자는 여러 리서치에서 최고의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는 문재인이다. 마치 회사에서 치러지는 면접처럼 국민을 대변하는 면접관들 앞에서 문재인은 그간의 이력과 국정운영 관련한 여러 사안들에 대한 생각과 소신 등을 밝혔다. 직업인으로서의 대통령을 뽑는 과정이기 때문에 회사라면 당연히 해야 할 ‘검증절차’를 갖는 것. 문재인은 그래서 자신에게 덧씌워진 잘못된 이미지들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하기도 했고, 일종의 압박면접으로 부여된 특정 상황에서 어떤 대처를 하는가를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대선주자 국민면접>은 생각만큼 신랄한 느낌을 주지는 못했다. 어떻게 보면 대선주자로 나온 이들을 위한 ‘홍보와 해명의 시간’처럼 보여지기까지 했다. 질문들은 너무 의도가 있어 보였고 거기에 따른 답변도 마치 해답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평이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이 갖는 의미와 가치는 분명히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후보라면 그게 대통령이라도 반드시 제대로 된 검증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초유의 국정농단 사태를 통해 누구나 통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SBS는 최근 선거에 관련된 아이템들을 계속 쏟아내고 있다. 그것이 국민적인 관심사이기도 하지만 SBS가 그 아이템들을 통해 하려는 이야기는 제대로 된 ‘선거’가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난 5일 방송된 [SBS스페셜] ‘대통령의 탄생’ 편에서는 대선캠프에서 실제로 뛰었던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대통령이 어떻게 탄생해왔는가를 들여다보면서 실체가 아닌 만들어진 이미지가 선거를 갈랐다는 뼈아픈 진실을 드러내줬다. 그리고 미국의 사례를 들어 우리의 선거방송들이 얼마나 안이한 후보검증을 하고 있는가를 에둘러 말해줬다. 

지난 11일 방송된 <그것이 알고 싶다> ‘디도스 사건의 비밀’에서는 선거장소가 이해할 수 없이 엉뚱한 곳으로 바뀌기도 하고, 마침 선관위가 디도스 공격을 받아 접속 자체가 되지 않아 선거당일 투표를 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들이 있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줬다. 또한 선거 과정에 당락을 바꾸기 위해 동원되는 갖가지 불법적인 행태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SBS의 일련의 행보는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물론 방송사로서 국민들이 가진 최대의 관심사가 이번 대선이라는 걸 읽어낸 기획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래도 거기에 얹어진 메시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선거’를 치르자는 목소리다. 사전에 충분히 후보 검증 과정을 갖고 또 선거 당일에도 어떤 의혹이 생기지 않는 공명정대한 선거를 치를 수 있게 국민 모두가 그 과정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 

<대선주자 국민면접>은 물론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내용들로 채워진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도 얻은 것이 있다면 말의 내용들이 아니라 그런 내용들이 나오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후보의 생각과 태도 같은 것들이 아닐까. 제대로 알아야 제대로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요즘은 공약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어떤 과거를 살아왔고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그것이 어떤 미래의 그림을 그릴 것인가를 판단해내는 일이다. 지난 선거 같은 뼈아픈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면.

방송이미지는 득표에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냥 배우로만 살면 편한 걸 왜 저러시나? 그랬던 나를 어머니께서 말보다 행동으로 바꾸셨다. 어머니는 지난 4년간 그 예뻐하는 손주들을 한 달에 한 번 볼 정도로 열심히 일하셨다. 어머니의 진심을 알아주셨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에 길게 말씀드렸다.” 배우 송일국은 4.13총선에서 송파 병에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한 어머니 김을동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메시지를 보낸 바 있다.

 


'슈퍼맨이 돌아왔다(사진출처:KBS)'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삼둥이 아버지로서 송일국은 확실히 대중들에게 존재감이 있는 배우다. 최근에는 KBS 대하사극 <장영실>에도 출연해 주목받았다. 그런 그의 지지 발언은 어찌 보면 어머니 김을동 후보에게는 천군만마의 힘이 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다. 김을동 후보는 40.3%의 득표율을 기록해 44.3%를 득표한 남인순 더불어 민주당 후보에게 밀려났다.

 

부모이기 때문에 무조건 지지한다는 송일국의 메시지는 결과적으로 보면 그리 효과적이지 못했던 것으로 나타났다. 물론 삼둥이에 대한 대중들의 호감도는 높다. 하지만 그런 호감을 바탕으로 한 가족관계를 통한 지지 호소가 국민의 일꾼을 뽑는 선거에서는 오히려 부정적인 인상을 남겼던 것도 사실이다. 선거는 보다 냉철하게 판단되어야 하는 것이고, 누군가의 관계를 통해 지지를 얻을 수는 없다는 걸 이번 선거는 잘 보여줬다.

 

경남 김해시 을 새누리당 후보로 나왔던 이만기 역시 34.4%의 득표율을 얻어 62.4%의 압도적인 득표율을 얻은 더불어 민주당 김경수 후보에게 밀려났다. 이만기는 이번이 무려 4번째 정계 도전이었지만 또다시 고배를 마셨다. 그래도 이번에는 조금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졌을 지도 모른다. SBS <백년손님-자기야>를 통해 투덜대면서도 장모님의 머슴(?) 역할을 확실히 보여주며 좋은 이미지를 쌓았던 그였다. 하지만 역시 투표는 냉철했다. 가족들과 좋은 관계를 이어가는 그의 방송 이미지와는 상관없이 유권자들은 소신대로 투표를 했기 때문이다.

 

반면 가끔 방송에 출연했던 표창원 후보는 경기 용인시 정에서 51.4%의 득표율을 얻어 당선됐다. 그 역시 방송 이미지로 좋은 평판을 얻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그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그저 방송 이미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가 해온 행보들과 일치하는 진정성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가 꿈꾸는 정의로운 사회는 방송에서도 또 선거유세에서도 그가 줄곧 주장해온 이야기다.

 

사실 방송만큼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건 없다. 그래서 무수히 많은 방송인들이 정치일선으로 나갈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 방송 이미지와 실제가 항상 같지만은 않다는 걸 대중들도 간파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또한 정치와는 상관없이 방송으로 쌓여진 이미지가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을 때 대중들이 그 방송인을 외면하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번 선거는 이렇게 달라진 대중들의 시선을 확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변화 모색하는 <런닝맨>, 단순 게임 탈피하나

 

SBS <런닝맨>선거 특집을 했다. 아무래도 오는 41320대 국회의원 선거를 염두에 둔 기획이었을 것이다. 선거철에 맞춰진 선거 소재의 예능 아이템이 새로운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런닝맨>에 있어서 이런 선택은 조금은 특별하게 보이는 면이 있다. 그간 <런닝맨>이라는 제목의 강박 때문인지 쉴 새 없이 달리며 정신없이 게임을 하던 그 방식에서 잠시 멈춰선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런닝맨(사진출처:SBS)'

선거를 게임 아이템으로 차용하면서 <런닝맨>이 내세운 룰은 흥미로웠다. 아침 9시에 출근하는 게 좋은가 아니면 오후 1시에 출근하는 게 좋은가에 대해 멤버들에게 투표를 하게 하고 그 다수결의 결과대로 게임을 진행하지만 만일 만장일치가 되어 버리면 혹독한 벌칙수행이 따르는 룰이다. 이렇게 되자 단순히 투표를 통해 서열 놀이를 하게 될 수 있는 선거 아이템은 두뇌 싸움이 되어버렸고 그 안에서 드러나는 심리들은 자연스럽게 인물들의 캐릭터를 드러냈다. 본인이 원하는 건 오후 1시 출근이지만 아침 9시에 도장을 찍는 유재석에서 전체를 생각하는 그의 성격이 묻어나오는 식이다.

 

이어진 즉석으로 주어진 미션에 따라 인물을 섭외해 소원을 들어주고 도장을 받아내는 게임 역시 마찬가지다. 이 게임에서는 서로 전화번호를 알려주면서도 게임에 이기기 위해 상대방을 속이는 하하와 이광수의 배신 유전자(?)가 드러났고, 설현이나 박보검 같은 대세 스타들 앞에서 마음 설레는 개리나 송지효의 속내가 드러났다. 물론 그 짧은 만남에서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설현이나 박보검이 왜 대세인가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러한 게스트 활용법 또한 기존의 <런닝맨>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사실 설현이나 박보검 같은 게스트를 아예 섭외했다면 더 화제가 됐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런닝맨> 선거 특집은 게스트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오롯이 고정 멤버들의 캐릭터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즉석에서 이뤄진 섭외다 보니 더 오랫동안 게스트들을 붙잡아두긴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게스트가 중심이 되었다면 <런닝맨>이 지금껏 계속 해왔던 게스트 홍보성 게임 버라이어티의 틀을 벗어나긴 어려웠을 게다. ‘즉석 섭외라는 조건이 게스트도 또 고정 멤버들도 모두 제 자리에서 주목받을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냈다는 것.

 

이런 변화는 새로운 PD들이 투입되면서 생겨난 것이다. 조효진 PD와 임형택 PD1세대의 <런닝맨>을 만들고 이끌었다면 이제 젊은 피로 투입된 이환진, 정철민, 박용우 PD들은 특유의 패기로 새로운 <런닝맨>을 만들려는 모습이 역력하다. 이들은 아마도 최근 몇 년 간 반복적인 단순한 게임의 연속과 게스트 출연이라는 고정적인 틀을 깨려는 것처럼 보인다.

 

선거라는 시의성 있는 주제를 게임으로 가져온 것이나, 게스트를 쓰면서도 고정 멤버들에 대한 집중을 놓치지 않는 구성, 그리고 무엇보다 계속해서 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멈춰 서서 그 캐릭터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좀 더 버라이어티한 캐릭터쇼로의 변환은 새로운 <런닝맨>을 기대하게 하는 이유다.

 

물론 달리고 몸으로 부딪치는 것은 <런닝맨>의 변함없는 모토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너무 달리기만 하면 그 달리는 것에 대한 실감이 사라져버린다. 가끔 멈추고 그 달리는 존재들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런닝맨>은 무작정 달리기보다 이제 가끔 멈춰 서기로 한 모양이다. 반가운 변화의 선택이다

학교, 군대, 회사의 부당함, 꼰대냐 어른이냐

 

주머니 속의 송곳. 언제든 바지 바깥으로 삐져나오는 그 송곳 같은 존재. 아마도 JTBC 드라마 <송곳>은 그런 의미에서 달린 제목일 것이다. 이수인(지현우)은 그런 인물이다. 촌지를 요구하는 선생님을 거부하고 대신 매를 맞는 걸 선택하는 인물이며, 대선에서 특정 인물을 강요하는 사관학교의 장성에게 군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나서는 인물이다.

 


'송곳(사진출처:JTBC)'

그런 그에게 푸르미 마트의 정민철 부장은 직원들을 모두 해고하라는 명을 내린다. 그는 송곳 같은 존재로서 살아온 자신의 삶이 평탄치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심지어는 장래희망을 꼰대라고까지 적기도 했었다. 즉 송곳 같은 선택이 늘 그를 힘겹게 했었다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다시 송곳 같은 선택을 한다. 모두 해고하라는 명은 불법이라고.

 

사실 학교에서 촌지를 요구하는 선생님이나 대선에 특정인물을 찍으라 강요하는 일, 그리고 회사에서 부당해고를 요구하는 일은 모두 잘못된 일들이다. 그러니 거기에 대해 부당함을 토로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부당함을 얘기하기보다는 그것을 감수하는 걸 선택한다. 그것이 훨씬 편안한 삶을 만들어주는 현실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과연 옳은 일일까. 이런 식의 포기가 결국 우리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송곳>이 던지고 있는 질문은 간단하다. 그리고 지극히 상식적이다.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 말하는 것일 뿐. 하지만 그 송곳 같은 한 마디는 의외로 큰 파장을 일으킨다. 모두가 수긍하고 포기했던 것에 반기를 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곳>이 겨냥하고 있는 건 바로 이 상식 없는 현실이다.

 

이수인이 송곳이 된 공간이 학교, 군대, 회사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 세 곳은 다름 아닌 사회집단이다. 우리네 사회집단이 상식적이지 않고 부당함이 관행처럼 굳어져 있으며 심지어 그 부당함을 당연한 것처럼 체화시키는 곳이 되어 있다는 건 통탄할 일이다. 흔히들 군대생활을 해본 사람이 사회생활도 잘한다고 말하는 데는 그 부당함이 하나의 요령이 되어버린 현실을 말해주기도 한다.

 

<송곳>은 이수인이라는 인물을 통해 이런 현실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부당한 현실에도 적당히 수긍하고 살아가기 보다는 거기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 비로소 그런 문제제기를 통해서만이 현실이 그 부당함을 드러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을 때는 그저 당연한 듯 흘러가던 현실이 아닌가.

 

그저 그런 꼰대가 되어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제대로 된 어른이 될 것인가는 그래서 <송곳>이 던지는 중요한 질문이다. 그리고 그 어른이 된다는 것은 대단할 것도 없는 상식적인 일을 생각대로 행동에 옮기는 것일 뿐이라는 걸 드라마는 보여준다. 그러니 이수인을 송곳 같은 존재로 만든 건 그 자신의 특별함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비상식적으로 굴러가는 현실이다.

 

<송곳>이라는 드라마의 재미는 바로 이 현실과 조응하면서 생겨난다. 우리 현실이 우리에게 부지불식간에 체화시키고 교육시켜 왔던 포기. 그래서 어른이 아닌 꼰대가 되어야 살기가 수월하게 되는 현실. 그 주머니로 가려진 현실 속에서 주머니 바깥으로 삐져나오는 송곳 같은 역할을 해주는 드라마. 모두가 알고 있지만 말은 꺼내지 않았던 그것을 말해주는 드라마. 그것이 <송곳>이 주는 통쾌함의 이유다.



<빅맨>, 강지환의 복수 아닌 반전을 기대하는 이유

 

선의는 어째서 보상받지 못하고 악용될까. KBS 월화드라마 <빅맨>의 김지혁(강지환)은 강동석(최다니엘)과 그의 가족들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인물이다. 회사의 비리를 모두 뒤집어쓴 것도 모자라 고용된 깡패들에게 끌려가 바다에 던져진다. 육체적 고통보다 더 큰 것은 아마도 배신의 아픔이었을 게다. 그가 바란 건 겨우 가족 하나뿐이었지 않은가.

 

'빅맨(사진출처:KBS)'

하지만 고아로 자라며 그토록 간절했던 가족에 대한 애착은 오히려 그가 희생양이 되는 이유가 되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강동석이 연출한 거짓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기까지 오히려 동생 강동석을 걱정했다. 그를 찾아와 부모인 양 살가운 척 하는 강동석의 부모들 앞에서 그는 행복감에 어쩔 줄 몰라 했다.

 

김지혁의 착각이 못내 안타까우면서도 어떤 공감대를 일으키는 것은 그것이 우리네 서민들의 현실을 거의 그대로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다. 늘 저들은 우리를 가족으로 부르며 지지를 호소하곤 했다. 그래서 순수한 선의로 아낌없이 지지를 보낸 후엔 어떻게 되었는가.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말하면서 일부 기득권층을 위한 정책들을 만들었고, 사지에 몰린 서민들은 고통의 바다 속에 던져졌다.

 

김지혁이 바란 것이 그저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다는 사실이 못내 아프다. 그것은 바로 우리네 서민들의 소박한 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대단한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엄청난 명예와 출세를 꿈꾸는 것도 아니다. 그저 가족끼리 단란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는 것. 하지만 이 소박하고 순수한 꿈은 어쩌면 너무 소박하고 순수하기 때문에 악용된다.

 

동생으로 알고 있는 강동석을 위해 자신이 대신 죄를 뒤집어쓰는 것을 알리지 말아달라고 하는 김지혁의 말이나, 또 동생을 위해 자신이 사랑하던 여자를 선선히 보내주는 김지혁의 행동에 강동석은 아무런 감흥이 없다. 보통 사람의 마음이라면 가슴 먹먹함을 느껴야 할 일이지만 애초부터 사람보다 돈이나 권력에 대한 욕망이 우선인 그들에게 김지혁의 인간적인 행동들은 그저 우스운 일로 치부된다. 무감한 그들은 소시오패스의 섬뜩함을 보여준다.

 

김지혁의 선의가 악용되는 그 과정 속에서 그의 선의를 믿고 시장 부지를 내놓았던 시장 사람들도 악용된다. 한 사람은 자살을 선택하고 한 사람은 자신의 가게를 팔아 시장상인들에게 내놓는다. 서민들의 편에 섰던 김지혁의 불행은 고스란히 서민들에게도 이어진다. 이것이 과연 낯선 풍경일까. 우리는 무수한 정치 현장에서, 선거 속에서 이런 풍경을 보아오지 않았던가.

 

돌아온 김지혁의 복수극은 그래서 지금 우리네 현실의 무게감을 충분히 담아내고 있다. 대중들이 그의 제대로 된 복수를 꿈꾸는 이유다. 하지만 여기에도 현실이 어른거린다. 그가 제 아무리 맨발로 야구방망이 하나를 들고 현성그룹을 찾아간다고 해도 반전은 일어나지 않는다. 거대한 건물 앞에 맨발로 선 그는 그저 초라해 보일 뿐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조화수(장항선)라는 더 강력한 악이다. 악을 더 큰 악으로 대항하려는 것. 선의가 그 순수한 힘으로 악과 대항할 수 있는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시장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나선 김지혁의 복수극은 서민들을 마음을 움직이는 구석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히 악을 무너뜨리기 위해 더 큰 악을 불러오는 복수에 머물지 않고 상황의 반전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건 너무 큰 기대일까. 선의가 선의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세상은 여전히 요원한 걸까.

'MB의 추억', 유인촌도 울고 갈 명연기 

 

“맨날 쓰잘데기 없이 쌈박질이나 하고 지럴 에이 우린 먹고살기도 힘들어 죽겄어.” 우리는 욕쟁이 할머니가 이렇게 맛깔난 욕을 툭툭 쏟아냈던 이명박 대통령의 당시 선거 광고를 기억한다. 뜨거운 국밥을 연거푸 입에 넣으며 욕을 듣는 이명박 당시 후보. 그런데 욕쟁이 할머니의 욕들은 조금씩 뉘앙스를 바꿔나간다. “청계천 열어놓고 이번엔 뭐 해낼껴, 밥 더줘? 더 먹어 이놈아.” 이제 욕은 욕쟁이 할머니의 진술과 행동을 통해 밥이라는 격려로 바뀌게 된다. “밥 쳐먹었으니께 경제는 꼭 살려라잉 알겄냐.” 그리고 마지막으로 던져지는 이 말은 설사 욕먹을 짓을 했더라도, 경제를 살리겠다는데 밥이라도 챙겨주자는 경제에 대한 국민적 정서를 끌어낸다. 밥은 여기서 표와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사진출처:영화

기가 막힌 이 이미지 광고는 이명박 당시 후보에게 경제대통령의 이미지를 확고히 심어주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현재, <MB의 추억>은 이 광고를 다시 끄집어낸다. 당시 광고에 자막과 함께 내레이션으로 들어간 “이명박은 아직 배고픕니다”라는 말은 그러나 이제 전혀 다른 의미로 우리를 아프게 한다. 그것이 사실은 경제를 살리겠다는 그 의지의 배고픔이 아니라, 아무리 먹어도 배가 차지 않는 탐욕의 배고픔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모든 게 거짓 이미지였다. 국밥집 욕쟁이 할머니는 사실 연기자였고, 광고 속 내용에서 이명박 당시 후보는 제작진의 칭찬을 들을 정도로 명연기를 보여주고 있었다.

 

‘정산 코미디’라고 붙였고, 그래서 이명박 당시 후보가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 끝날 때까지 웃음이 빵빵 터지지만 절대 웃을 수만은 없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바로 <MB의 추억>이다. 그 화면 속에는 유인촌 전 장관이 등장해 “지금 우리에겐 영웅이 필요한 시절, 그분은 누구인가”하고 소리친다. 그리고 그 유명한 747공약(7% 성장, 4만 달러 시대, 7대 강국)을 설파한다. 유인촌은 90년에 방영되었던 KBS <야망의 세월>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역할(이 드라마는 이명박을 모델로 했다)을 했던 연기자. 그런 그가 ‘영웅의 시대’를 말한다. MBC에서 당시 방영되었다 이명박 당시 대선후보를 미화했다는 논란을 일으켰던 <영웅시대>를 끄집어낸 것. 이미지는 그렇게 당시 힘겨웠던 서민들의 눈을 현혹하게 만들었다.

 

영화는 당시 대선의 풍경을 조목조목 잡아내가며 그것이 일종의 쇼였음으로 상기시킨다. 대선 후보들이 재래시장의 상인들이 주는 음식을 꾸역꾸역 받아먹는 장면은 실로 압권이다. 여기서 이명박 당시 후보는 국수를 두 그릇이나 뚝딱 먹어치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동영 당시 야권 후보가 연설 도중에 한 유권자가 자꾸만 먹으라는 음료를 “연설 끝나고 먹겠다”고 버티는 장면과 병치된 이 국수 시퀀스는 당시의 야권의 무능까지도 포착해낸다. 당시 야권은 이 정치쇼에서 연기조차 출중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반면 이명박 당시 후보는 안 해본 것 없는 백전노장의 이미지를 그려낸다. 뭐든 다 해봤다고 말하는 그는 풀빵 장수에게 자신이 어설프게 만들어 잘 익지도 않은 풀빵을 서민들에게 건네면서 불이 약하다고 호통을 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대단한 순발력이다.

 

‘우리가 강제한 것이 아니야. 그들이 우리에게 위임했지. 그리고 그들은 지금 대가를 치르는 거야.’ 이 괴벨스의 어록으로 시작해서 이 어록으로 끝나는 이 영화가 말하려는 것은 단지 이명박 정권에 대한 비판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정치를 혐오하고 그래서 무관심하게 되었고 결국에는 각종 거짓말과 연기로 만들어진 이미지에 호도되어 치렀던 그 대선이 가져온 대가를 일깨워주는 것이다. 흥미로운 건 그 아픈 꾸짖음을 감독의 목소리가 아니라 당시 선거운동을 하며 소리쳤던 이명박 후보의 목소리로 전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잘한다고 할 게 아니라 지난 5년간 잘했어야지, 어제 못한 사람이 내일 잘할 수 있어요? 정권을 바꿔야 합니다." 이 당시 유세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했던 발언은 2012년 <MB의 추억>이 보여주는 것처럼 다시 부메랑이 되어 자신에게 날아온다.

 

“국민에게 겁을 먹어야 하는데, 국민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국민을 마음대로 하는 건 줄 알아요. 기가 막혀요, 정말. 우리 대한민국을 다시 만들어놔야 합니다.” <MB의 추억>을 통해 보여주는 이명박 대통령이 했던 당시의 이 유세 발언은 지금 대선을 앞두고 있는 우리에게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또 “한 번 속으면 속인 사람이 나쁜 X이지만, 두 번 속으면 속은 사람이 문제”라고 한 전여옥 전 의원의 발언도 새삼스럽게 다가온다. 그렇게 <MB의 추억>은 우리에게 거짓말과 명연기로 코미디가 되어버린 당시 대선의 풍경을 아프도록 웃기게 보여준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그 명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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