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가수는 모든 연예인들이 선망하던 직업. 하지만 가요계는 음원의 디지털화라는 외부적인 악재에, 기획된 가수들의 범람이라는 내부적인 문제가 결합되면서 급격한 하락의 길을 걸었다. 게다가 가요 프로그램들이 시청률 저조로 하나 둘 사라지자 가수들은 설 자리마저 잃었다. 90년대 200만 장씩 팔렸던 앨범은 이제 10만 장을 넘으면 그 해에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이 되었다. 가수들은 위기였다.
드라마에서 활약하는 가수들
하지만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가요계가 가진 이런 총체적인 위기는 가수들의 방향전환을 요구했다. 가수들이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초창기 이 현상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노래는 안하고 안 되는 연기력으로 드라마에 출연하는 가수들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은 즉각적인 연기력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예능 프로그램에서 노래보다는 말로 살아가는 가수들에 대해서도 비판적 시선이 있었다. 하지만 가수들의 예능 출연은 예전부터 있었던 것이기에 드라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이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역전되고 있다. 가수들이 드라마에서도 예능에서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 작품마다 연기력 논란을 일으켰던 윤은혜는 ‘커피 프린스 1호점’으로 드라마에 안착했고, 역시 늘 논란의 중심에 섰던 성유리 역시, ‘쾌도 홍길동’으로 그 논란에서 벗어났다. 한편 논란은커녕 연기 호평을 받는 가수들도 늘어났는데, 대표적인 연기자가 윤계상이다. 그는 ‘사랑에 미치다’에서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영화 ‘비스티 보이즈’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비는 ‘풀 하우스’로 주목받으면서 최근에는 헐리우드 영화 ‘스피드 레이서’에도 출연할 정도로 연기자로서의 입지를 인정받았다. 에릭 역시 ‘케세라세라’에서 호연을 보여준 후, 곧 방영될 ‘최강칠우’의 주연을 맡았다. 이러한 가수들의 드라마 출연은 점점 외연을 넓혀나가고 있다. 앞으로 방영될 MBC의 ‘일지매’로 낙점을 받은 이승기와, 현재 ‘너는 내 운명’에서 주연을 맡은 소녀시대의 윤아는 이제 가수들의 드라마 외출이 점점 가속화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능에서 전성기 맞은 가수들 한편 최근 들어 예능 프로그램은 가수들의 프로그램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그들의 입지가 확고해졌다. 일찌감치 탁재훈과 신정환은 각종 예능 프로그램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았고, 탁재훈은 개그맨들을 제치고 작년 KBS 연예대상까지 거머쥐었다. 최근 각광받고 있는 ‘우리 결혼했어요’는 사실상 가수들의 가상결혼 프로그램이라 할 정도로 가수들로 장악되었다. 크라운제이와 알렉스, 서인영, 황보, 김현중 등이 그들이다. 여행버라이어티로 주가를 올리고 있는 ‘1박2일’은 MC몽, 은지원, 이승기, 김C 등이 출연하면서 가수들의 예능 프로그램이 되었다.
가수들이 이처럼 드라마와 예능에 대거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은 단지 가요계 불황이 만든 결과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가수들만이 가진 장점들이 드라마와 예능의 필요조건과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드라마는 자칫 고정된 이미지의 연기자들보다 더 신선한 이미지를 갖춘 가수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고, 예능은 가수들만이 가진 버라이어티적 요소, 즉 춤과 노래 같은 다양한 볼거리에 대한 호감이 있다.
가수들이 점점 드라마와 예능까지 속속 들어오게 되면서 그들의 본래 목적이었던 가수로서의 활동이 또한 탄력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이것은 특히 점차 가상시트콤화 되어가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두드러지는데 그네들의 노래가 마치 OST처럼 주목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각종 챠트에 수위를 차지하고 있는 곡들을 보면 대부분이 드라마나 예능에 쓰여진 곡들이 많다. 이것은 노래에 부가된 영상이 가진 힘이라 할 수 있는데, 가수들의 예능 출연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얻게된 효과로 볼 수 있다.
가수들은 가요계의 총체적인 위기의 나락 속에서 한참을 고군분투하며 새로운 생존방식으로 현재의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이것이 긍정적인 현상인지 부정적인 현상인지는 아직까지 단언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점점 더 영상화 되어가는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가요계의 당연한 변화일 수도 있고, 오히려 노래를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고 영상 속으로 침몰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간에 가수들은 끊임없이 현재의 위치에서 노력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것이 위기의식이 가진 긍정적인 힘이다.
작년 가장 많은 관심과 애정을 불러일으켰던 ‘커피 프린스 1호점’은 윤은혜라는 연기자를 재탄생시켰다. 그간 윤은혜는 가수 출신 연기자로서 수많은 연기력 논란을 불러일으킨 전적이 있다. 베이비 복스 멤버로서 첫 연기 도전을 했던 ‘궁’은 그 자체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유독 윤은혜의 연기력에 대한 논란은 꺼지지 않았다. 그것은 그 후에 출연한 ‘포도밭 그 사나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왜 가수 출신 연기자에게 연기력 논란이 많을까 연기력 논란은 연기자보다는 가수출신 연기자들에게 더 많은데, 그 이유는 이들이 연기력으로서 검증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타 연기자들보다 그 잣대는 더 냉정할 수밖에 없다. 조금 엇나가는 대사만 해도 “가수나 하지”라는 비아냥이 터져 나온다. 게다가 캐릭터가 특징적이지 않고 전형적일 경우에는 잘 소화해내고 있어도 연기자가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캐릭터가 연기자의 성격에 맞췄다는, 따라서 연기하는 게 아니라 본래 성격이 그렇다는 섣부른 결론에 도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윤은혜는 ‘커피 프린스 1호점’의 고은찬이란 남장여자 캐릭터를 만나면서 달라졌다. 먼저 짧게 머리를 커트 한 그녀는 자신의 이미지에서 여성스러움을 버렸다. 자장면 다섯 그릇을 거침없이 먹어대고 사내 한 명 정도는 너끈하게 둘러업을 수 있는 괴력을 발휘하며 때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기도 하는 털털 그 이상의 이미지를 선보였다.
‘궁’과 ‘포도밭 그 사나이’에서도 털털한 이미지를 보였던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연기력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은 그 이미지가 동일했고, 그만큼의 파격적인 변화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남장여자는 ‘털털한 척 하며 예쁜 척 하는 듯 보이는’ 그 부정적인 이미지를 씻어버리기에 충분히 강한 캐릭터였다.
허이녹은 고은찬을 닮았다 이것은 ‘쾌도 홍길동’에서 허이녹이란 캐릭터를 연기하는 성유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연기를 하기 시작한 ‘어느 멋진 날’과 ‘눈의 여왕’에서의 그녀 역시 청순가련형의 과거형 캐릭터에 머물러 있었다. 이런 캐릭터로는 그녀의 가수로서 누려온 이미지의 연장일 뿐, 연기자로서의 발판을 마련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허이녹은 저 고은찬과 유사하게도 먹는 것을 무지하게 밝히며, 남자들처럼 건들대기도 하고, 때론 바보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캐릭터다. 우는 장면에 있어서도 예쁘게 우는 것이 아니라 눈물 콧물이 뒤범벅되면서 마구 울어버리는 그런 캐릭터. 여기서 ‘예쁜 척’이란 발목을 잡는 여성스러움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이다지도 여성스러움을 버리는 것일까. 그것이 단지 가장 파격적인 변화를 통한 연기력 검증을 받기 위한 선택일까. 그렇지 않다. 여성 캐릭터의 여성스러움은 남성들보다 여성들에게 더 거부감이 많기 마련이다. 게다가 멋진 남성 캐릭터 옆에서 예쁜 척하는 캐릭터는 여성 시청자들에게는 거부감을 넘어 비호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남장여자는 다르다. 일단 보이시한 매력이 여성들에게도 어필하는 면이 있다. 예쁘다기보다는 그 털털한 면이 귀엽게 다가가는 것이다. 이렇게 여성 시청자들을 ‘남장’이란 장치로 충분히 감정이입 하게 만든 상태에서는 이제 그 드라마 속의 본래 역할 ‘여자’로 돌아가도 그것은 하나의 매력으로 변한다. 고은찬이 드라마 후반부에 여성스러움을 드러내면서도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남장여자 캐릭터 또한 넘어야 할 산이다 이것은 연기하는 당사자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고은찬 역할로 보이시한 매력을 어필했던 윤은혜가 드라마가 끝나고 섹시한 이미지의 사진을 선보였을 때 나오는 반응은, 과거처럼 ‘또 예쁜 척 하네?’가 아니라 ‘이런 면도 있었어?’라는 호의적인 반응이다.
국민여동생이란 이미지로 굳어져 있어 연기변신에 난항을 겪고 있는 문근영이 남장여자로 드라마에 출연하는 것도 바로 이 캐릭터의 이런 장점들을 활용하기 위함이 분명하다. 영화 ‘사랑 따윈 필요 없어’에서 성숙한 역할을 선보였지만 어필하지 못한 것은 그 역할 또한 국민여동생이란 이미지를 뛰어넘기에는 너무나 약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제 연기력 논란이나, 이미지 변신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여성 연기자가 있다면 ‘남장을 하라’는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이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남장여자로 문제를 해결했다면 그 후에는 그에 필적하는 강한 캐릭터에 도전하거나, 남장여자 캐릭터에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남장여자 캐릭터 또한 연기자라면 깨고 넘어야 할 또 다른 산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