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와’, 독일 친구들과는 달랐던 젊은 러시아 여성들

MBC 에브리원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러시아 친구들의 여행기는 짧게 마무리됐다. 5회에 걸쳐 방영됐던 독일친구들편에 비교하면 3회 만에 마무리된 러시아 친구들의 여행은 너무 짧아 이제 시작하려다 바로 끝나버린 느낌이다. 물론 독일친구들 이전의 멕시코친구들 역시 3회 분량으로 방영됐던 걸 생각해보면 이들의 여행기가 짧았던 게 아니라 독일친구들의 여행기가 남달리 길었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특별했으니 길었을 수밖에.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사진출처:MBC에브리원)'

하지만 러시아 친구들의 여행은 그들 나름대로 특별한 면면들을 담고 있었다. 동물을 좋아해서 수족관을 가서 물고기를 보며 “귀엽다”를 연발하고는, 노량진 수산시장에서 물고기를 먹는 이색적인 하루를 보여주거나, 한류 팬으로서 그 캐릭터 상품들을 살 수 있는 곳에서 쇼핑을 하고, 젊은 여성으로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고 또 당연히 관심이 있는 한국 화장품을 폭풍 쇼핑하는 모습 등은 독일친구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러시아친구들의 색다른 여행의 모습이었다.

여러모로 독일친구들의 여행과의 비교 때문에 소소하게 보였지만 지나고 보니 러시아친구들은 또 다른 색깔의 여행을 보여줬다고 느껴진다. 일단 세대가 독일친구들보다 훨씬 젊다. 따라서 독일친구들이 여행에 있어서 서로를 배려하거나 좀 더 학구적인 자세를 갖는 등 성숙한 면들을 보여줬던 것과 달리, 러시아친구들은 젊은 또래들이 보여줄 만한 여행에서의 좌충우돌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그걸 단적으로 드러낸 게 대학가를 여행하는 도중 아나스타샤가 갑자기 “더 이상 못하겠다”며 힘겨움을 토로하며 생긴 갈등이었다.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차에 비가 추적추적 내려 유독 습도가 높은 날씨로 불쾌지수가 높아지는 상황, 오해로 인해 어딘지 소외되고 있다고 느낀 아나스타샤의 감정이 터져버린 것. 

결국 여행 일정을 모두 접고 숙소로 돌아와 버렸지만, 사실 이런 사소한 다툼들이나 갈등들은 여행 도중 종종 발생하는 일이다. 특히 젊은 친구들은 자주 싸우지만 또 금세 친해지는 게 그 세대의 특징이기도 하다. 지나고 생각해보면 아무 일도 아니어서 피식 웃음이 나올 수도 있는 그런 일들이지만 현장에서는 자못 심각했던 그런 일들을 러시아 친구들이 보여준 건 그래서 독일친구들의 늘 좋았던 여행과는 사뭇 다른 여행의 면면을 드러내줬다. 

그런 갈등이 지나고 나서 서로 말 한 마디로 화해를 하고 금세 다시 친해져 찜질방으로 향하는 러시아친구들의 이야기는 그래서 더 흥미진진해질 수 있었다. 불가마의 뜨거움과 얼음방의 차가움을 오가며 냉탕온탕의 단짠 체험을 즐기거나, 처음 해보는 안마의자에서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좋아하는 모습은 그 날 낮에 있었던 갈등들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행복한 순간들로 남게 됐다. 그리고 이어진 러시아 음식점에서의 편안한 식사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의 술 한 잔은 이 젊은 친구들의 여행에 괜찮은 마침표를 찍어주었다. 

저마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그 나이 대에 각기 가진 취향들이 다르니 그 여행의 양상도 달라진다. 이것은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라는 프로그램이 가진 중요한 관전 포인트다. 사실 외국인이 국내에 들어와 겪는 문화적 충돌이라고 하면 어찌 보면 비슷한 것들의 반복처럼 보인다. 언어적 차이, 문화적 차이, 음식이나 숙소의 차이 같은 게 그것이다. 그래서 여러 번 반복하면 새로운 이야기가 나올까 싶지만 그런 우려를 날려주는 건 그 여행자들의 다른 취향들이다. 이 취향들이 있어 또 다른 여행기가 나온다.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는 그래서 그들의 한국 체험기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그들의 눈으로 여행으로 하는 ‘그들의 취향 체험’이기도 하다.

‘쌈마이웨이’, 그래 우린 모두 꿈이 있었어

“나처럼 살지 마라.” 아버지의 이 한 마디 속에는 얼마나 많은 감정들이 담겨져 있을까. 이제 지긋한 나이, 그 세월을 살아온 분이 자신처럼 살지 말라는 말은 사실 그 삶을 부정하는 의미가 들어 있다. 그것은 아픈 일이지만 그래도 자식에게만은 자신 같은 삶이 반복되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자신처럼 살지 말라고 하는 말만큼 슬프고 가슴 아픈 일이 없다. 

'쌈마이웨이(사진출처:KBS)'

KBS 월화드라마 <쌈마이웨이>의 고동만(박서준)은 스스로를 흙수저라 부른다. 그는 오랜만에 자신의 집을 찾아온 아버지 고형식(손병호)에게 그 답답한 속내를 토로한다. “나한테 아버지처럼 살라고 하지 마라. 죽을 똥 싸면서 나 같은 놈 또 만들어야하나 잘 모르겠다. 걔가 흙수저라고 나 원망할까봐.” 하지만 흙수저 청춘의 부모 역시 당연히 흙수저 부모다. 그들 역시 스스로 흙수저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젊은 시절 그들에게도 꿈이란 게 있었다. 

영업부장으로 새파란 사장 앞에서 잔뜩 고개를 조아리고 갑질을 감내하는 아버지를 본 고동만은 거기서 자신이 다니던 회사에서 상사에게 당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한 번도 못해봤던 생각. 아버지는 그저 아버지일 뿐이라 생각했지만, 그 역시 한때는 자신처럼 꿈이 있던 청춘이었을 거라는 생각. 그래서 소주 한 잔을 따라드리며 꿈이 뭐였냐고 묻자 아버지는 말한다. “내 꿈은 파일럿이었다. 지금은 그냥 너희들이 내 꿈이다.”

그 아버지가 자신처럼 살지 말라고 한다. “난 이제 와서 파일럿은 못해도, 넌 사고라도 한번 칠 수 있잖아.” 그리고 아들이 흙수저라고 한 그 말이 못내 마음에 걸렸던 지 허세 섞인 한 마디를 덧붙인다. “너 흙수저 아니야. 아버지 앞으로 20년은 더 벌거야. 뒤에 아빠가 딱 있으니까 한번 날아봐라. 들이받고 덤비고 깨져도,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봐.”

<쌈마이웨이>는 가진 것 없는 현실이 만들어낸 ‘쌈마이’ 청춘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청춘들의 부모들 이야기 역시 그 울림이 적지 않다. 족발집 딸이라는 사실 때문에 주만(안재홍)의 집 사람들에게 설움 받는 딸 백설희(송하윤)를 보고 억장이 무너지지만 그 감정을 꾹꾹 눌러가며 주만에게 자신의 딸을 많이 사랑해주라고 부탁하는 설희 엄마가 그렇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무대에 선다는 소식에 한 달음에 달려오는 최애라(김지원)의 딸바보 아빠가 그렇다. 

가진 것 없이 키워서 흙수저가 되어 현실에 나간 자식들 앞에서 이 부모들은 모두 죄인처럼 살아간다. 자신은 꿈을 지워버리고 흙수저 현실을 살아가며 자식만큼은 그 삶을 반복하지 않고 그들의 꿈을 키워가길 원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흙수저라는 말 속에 이미 들어 있듯이 그 굴레는 고스란히 자식으로 대물림되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경쟁적인 현실은 이제 정년퇴직을 앞둔 부모 세대가 계속 자식들을 위해 취업전선에 나서야 하고, 그 자식들 역시 이렇게 가중된 경쟁 속에서 취업난을 겪는 이중고로 이어지고 있다. <쌈마이웨이>의 고형식이 아들 고동만에게 던지는 격려가 슬프고도 먹먹하게 다가오는 건 그래서다. 우린 모두가 꿈이 있었지만 어느 순간 현실을 알아버리고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그 꿈은 이제 아빠, 엄마가 되어간다. 자식들을 대신 꿈이라 치부하며.

'최고의 한방', 희비극이 잘 엮어진 예능드라마

짠한 데 웃음이 나고, 우스운데 짠하다. KBS <최고의 한방>은 희비극이 무엇이라는 걸 제대로 보여주는 드라마다. 최우승(이세영)이 사귀던 남자친구가 자신의 룸메이트와 바람을 피우는 걸 박스 안에 숨어서 보다 들키는 시퀀스는 이 드라마가 가진 웃음과 짠함의 정체를 드러낸다. 자존심 상하고 창피한 우승이 박스를 뒤집어쓴 채 집밖으로 나가려 하고 그걸 막으려는 남자친구와 실랑이를 벌이는 장면은 짠한데 웃음이 난다. 코미디가 가진 양면성, 즉 비극 속에 담겨진 희극적 요소가 주는 페이소스가 이 드라마에는 도처에 묻어난다. 

'최고의 한방(사진출처:KBS)'

힘겨운 공시생의 삶을 살아가는 우승은 일 년 간의 노력 끝에 들어간 시험장에서 갑자기 배탈이 나 결국 시험을 포기하게 된다. 그 상황 자체가 주는 절망감은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 비극적 상황을 웃음으로 풀어낸다. 배탈을 애써 버텨내려는 우승에게 시험 문제지의 글자들, 즉 ‘고비, 폭발, 쏟아지는, 산사태, 배출, 터져 나온다’ 같은 단어들이 그녀를 더 이상 참지 못하게 만든다는 설정은 웃음이 난다. 

매달 평가와 극단적인 다이어트를 일상으로 살아가는 기획사의 독종 연습생 혜리(보나)를 지훈(김민재)이 자꾸 자살하는 줄 알고 오해하는 장면이 반복되는 시퀀스들도 코미디적으로 처리되어 있지만 사실 그 안을 들여다보면 죽도록 연습을 해도 앞이 보이지 않는 그 청춘들의 땀과 눈물이 느껴진다. 그러니 그 연습생을 하도 오래해 ‘조상’으로 불리게 된 지훈이 월말 평가에서 대놓고 떨어지라 요구받은 랩에 자신의 심정을 담아내는 모습은 그토록 짠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엉뚱하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버텨내고, 눈물이 흘러도 눈물샘이 막혀 생긴 질환이라고 말하며 넘어가는 이 청춘들이 어느 날 가로등 아래서 진짜 힘겨움을 슬쩍 드러낼 때 그 무표정이 사실은 온통 세상의 무게를 버텨내고 있는 얼굴이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이런 청춘들에게도 한 방의 기회는 과연 올 것인가. 

<최고의 한방>은 여기에 특별한 판타지 설정을 집어넣었다. 그것은 1990년대의 아이돌 스타 유현재(윤시윤)가 그 시대에서 갑자기 20년을 뛰어넘어 현재로 타임리프한 것이다. 유현재는 당시 최고의 스타로서 화려한 청춘을 구가했지만, 20년을 뛰어넘은 현재의 그는 어쩌다 지훈의 옥탑방에 얹혀 지내는 신세가 된다. 왜 <최고의 한방>은 최근 드라마에 많이 등장해 자칫 식상하게 느껴질 우려가 있는 타임리프 설정까지 굳이 집어넣어 90년대의 청춘과 현재의 청춘을 연결시킨 걸까.

그것은 아마도 현재의 청춘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 과거 한 때는 청춘이었던 지금의 중년들이 살아왔던 삶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일 게다. 지금의 현실은 과거들이 중첩되어 만들어진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과거의 청춘 유현재가 현재의 청춘 지훈과 가까워지고 소통하고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나아가 그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주려는 그 과정은 이 드라마가 그려내려는 ‘한방’의 실체가 되지 않을까.

짠한 상황 속에서도 웃음으로 그것을 전하려는 이 드라마는 그래서 힘겨워도 웃으며 버텨내려는 청춘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닮았다. 그 웃음을 따라가다 보면 그 밑에 깔려 있는 청춘들의 절망감이 공감된다. 유현재는 이제 중년이 된 시청자들의 시선이 되어 현재를 다시 돌아보게 해주고, 지훈과 우승은 지금의 청춘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그래서 그 유현재와 지훈이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은 청춘이라는 공유점으로 세대 간의 소통이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다.

<최고의 한방>은 ‘예능 드라마’라는 기치를 내걸고 있어 전면에 드러나 있는 건 코미디적 상황들의 연속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시트콤 같은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자잘한 코미디적 상황들이 숨기고 있는 ‘한방’이 분명 존재한다. 그것은 청춘의 아픈 현실에 대한 공감과 위로라는 묵직한 메시지다.

‘도봉순’ 박보영, 복스럽고 러블리한 데다 걸크러시까지

도대체 박보영의 무슨 마력이 JTBC 금토드라마 <힘쎈 여자 도봉순>을 펄펄 날게 만드는 걸까. 4회 만에 8.3%(닐슨 코리아). 애초 3% 시청률 돌파 공약을 내세웠던 것이 무색해져버렸다. 이 정도라면 두 자릿수 시청률도 어렵지 않게 예측할 수 있는 상황. 최근 JTBC가 드라마로 낸 최고의 시청률을 최단 기간에 경신하고 있다. 그간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만들어왔지만 시청률에 유독 갈증을 느껴왔던 JTBC로서는 박보영을 업고 다니고 싶을 지경이다. 

'힘쎈여자 도봉순(사진출처:JTBC)'

그런데 이런 놀라운 기록이 그저 우연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중심에 서 있는 건 단연 박보영이라는 배우가 가진 팔색조 매력이다. 이미 <과속스캔들>, <늑대소년> 같은 영화를 통해서 가능성을 보였던 박보영은 tvN <오 나의 귀신님>으로 드라마에서도 ‘시청률 보증수표’로 등극한 바 있다. 그러고 보면 <힘쎈 여자 도봉순>은 박보영을 만나면서 일찌감치 성공의 발판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보영이 가진 매력이 이렇게 드라마를 통해 놀라운 힘을 발휘하는 까닭은 그녀가 가진 남녀노소 거의 모든 세대와 성별을 아울러 호감을 만들어내는 그녀만의 면면들 때문이다. 예를 들어 <힘쎈 여자 도봉순>에서 클럽에 놀러간 도봉순이 술에 취해 봉을 잡고 귀여우면서도 섹시한 춤을 추다가 갑자기 봉을 뽑아서 놀라는 사람들을 의아하게 바라보는 장면은 도무지 박보영이 아니면 그만큼 자연스럽게 소화가 될 수 있을까 싶은 면이 있다. 

또 어린 시절부터 친구로 지내왔지만 마음속으로 짝사랑해온 인국두(지수)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며 수줍어하는 모습이 동네 깡패들 앞에서는 완전히 다른 얼굴이 되어 천연덕스럽게 그들을 제압하는 모습으로 변하고, 어찌 보면 가녀리게만 보이는 그녀가 공기총 테러로 다친 사장 안민혁(박형식)을 영화 <보디가드>의 한 장면처럼 안고 뛰는 모습이 우스우면서도 귀엽고 또 한 편으로는 남녀 관계의 역전이 만들어내는 어떤 기존 관념을 깨는 시원함까지 전해주는 것 역시 그녀가 아니면 이만큼 잘 소화됐을까 싶은 장면들이다. 

<힘쎈 여자 도봉순>은 그래서 그 때론 한없이 러블리하고 귀엽다가도 어느 순간 폭력적인 상황 속에서는 힘센 슈퍼 히어로로 변신하는 그 다채로운 변신이 캐릭터가 가진 핵심적인 매력이다. 그런데 그것이 다름 아닌 박보영이라는 연기자에게는 마치 제 옷을 입은 것처럼 딱딱 맞아 떨어진다는 점이다. 

박보영이 가진 매력의 실체는 나이든 세대에게는 ‘복스러움’으로 다가오고, 남성들에게는 귀엽고 러블리한 매력이며, 여성들에게는 귀여우면서도 걸크러시를 보여주는 그런 워너비의 면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는 점이다. 보통 지나치게 여성적인 이미지를 보이면 오히려 여성들에게는 비호감이 되기 쉽고, 걸크러시를 강조해서 드러내면 나이든 세대에게는 너무 ‘나댄다’는 얘기를 듣기 쉬운 게 우리네 현실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박보영은 이런 세대와 남녀를 통틀어 호감을 갖게 만드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배우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렇게 좋은 매력을 가진 배우라고 해도 그것이 제대로 발현되기 위해서는 그 매력을 제대로 끄집어낼 수 있는 작품의 캐릭터를 만나는 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박보영과 <힘쎈 여자 도봉순>의 만남은 연기자와 캐릭터의 시너지라는 점에서 하나의 정답 같은 느낌을 준다. 4회만에 시청률 8%. 그것이 그저 우연이 아닌 이유다.

<스포트라이트>가 조명한 광화문 집회, 거기서 발견한 희망

 

이번 최순실 게이트JTBC <뉴스룸>을 비롯해 <썰전>이 시청률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가운데 주말 저녁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역시 5%대 시청률을 기록하며 주목받는 시사교양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최순실 게이트특집으로 1편에서는 최순실 라인들이 평창 동계올림픽을 먹잇감으로 작업을 해왔다는 의혹을 제기한데 이어, 2편에서는 지금의 최순실 게이트가 과거 박근혜 대통령이 이사장으로 있을 때 터졌던 영남대 사태와 유사한 평행이론을 보여준다는 걸 보여줬다.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사진출처:JTBC)'

3편에서는 최순실 일가의 재산축적 미스테리를 추적하기에 앞서 지난 12일 광화문 광장에서 벌어진 집회현장을 직접 찾은 이규연의 시선으로 그 날의 분위기를 전했다. 이규연이 거기서 발견한 건 역설적이게도 희망이었다. 분노로 광화문 광장에 나온 것이지만 집회를 하는 시민들의 모습은 김제동이 표현한 대로 일등 국민의 면모 그대로였다.

 

묵묵히 바닥에 남겨진 쓰레기를 줍는 한 청년에게 왜 이걸 하고 있냐고 이규연이 묻자, 그는 늦게 도착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라 이렇게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100만 명의 인파가 몰린 집회 현장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질서정연한 모습이었고, 집회가 끝나고 난 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아이들과 손잡고 나온 부모들은 저마다 아이들의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함께 나왔다고 말했고, 오랜 만에 아버지의 손을 잡고 나온 딸은 이런 시위 현장에 처음이라며 모두가 모여 한 목소리를 내는 것에 마음이 뭉클하다고 말했다. 그 곳에서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지목되던 세대 갈등은 보이지 않았다. 이규연은 박근혜 대통령이 과거 그토록 강조했던 세대통합이 아이러니하게도 이번 사태를 통해 분출된 민심들에 의해 통합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이규연이 희망을 발견하게 된 것은 달라진 집회 문화였다. 과거 876.10 항쟁 때만 해도 집회가 끝나고 난 거리는 마치 전쟁터를 방불케 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광화문에서는 시민들 스스로가 나서 비폭력을 외치는 모습이 보여 졌다. 한 격앙된 시민이 전경과 몸싸움을 벌이자 시민과 전경이 한 목소리로 비폭력을 외치는 장면도 연출됐다.

 

한 고등학생은 시민들과 대치하고 서 있는 전경에게 음료수를 놓고 가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이규연이 따라가 왜 우느냐고 묻자, “저 분들도 저러고 싶지 않을 거 아니냐며 전경의 입장을 이해하는 심경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 한 아주머니는 전경들을 한 명 한 명 안아주며 대통령 잘못 만나 우리 아들들이 불쌍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 시민은 목소리를 낼 공간을 내준다면 굳이 서로 완력을 쓰고 사람이 다치는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규연의 말대로 평화는 힘이 아니라 소통으로 유지됨을 광화문은 알고 있었다는 것. 이규연은 광화문에서 자신의 소신을 밝히는 당당한 미래세대세대공감의 현장”, “풍자로 승화시킨 울분성숙한 시민의식을 봤다며 그것은 새로운 희망이었다고 말했다.

 

박근혜 정부에 대해 국민들이 가장 많은 비판을 해온 대목이 바로 불통이라는 점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번 박근혜 최순실 게이트의 핵심적인 내용 역시 바로 이 소통부재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걸 확인하게 된다. 소통해야 할 사람들과 소통하지 않고 소통하지 말아야할 사람들과 소통한 데서 비롯된 비극이 지금의 사태를 만들어낸 근본적이 이유라는 것. 그래서 이번 광화문의 촛불은 그동안 막혀 있던 이 소통의 욕망이 분출되어 나온 자리라고 볼 수 있다. 그 양상이 비폭력으로 소통공감에 맞춰져 있었다는 것. 그건 우리에게 여전히 희망이 남아있다는 걸 국민들이 확인해준 시간이었다

<아버지와 나> 바비네가 보여준 세대 소통의 비법

 

바비와 아버지는 하와이 호놀룰루의 거리를 산책하며 끝없는 잡담을 한다. 눈에 보이는 대로 코에 맡아지는 대로 들리는 대로 모든 게 화젯거리가 된다. 그건 대화라기보다는 반응이다. 바비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반짝반짝 빛나는 형형색색의 불빛을 입은 카페를 보며 너무 예쁘다고 말하고, 어디선가 맡아지는 냄새에 이게 무슨 냄새야?”하고 묻는다. 키가 스케이트 보드 정도밖에 안 되는 꼬마가 그 보드를 타는 모습에 엄지를 척 세워주고, 길거리에서 팝핀을 하는 청년에게 눈길을 던지며 환호를 해준다.

 

'아버지와 나(사진출처:tvN)'

tvN <아버지와 나>가 보여준 무려 두 시간을 그렇게 주제 없는 환호성과 반응들로 가득 채워진 두 사람의 대화는 그들 스스로도 잡담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목적이 없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 사람은 대화를 하지 않고도 소통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말로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자기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흘러가는 것들을 함께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길거리에서 아들이 춤을 춰도 아버지는 그저 씩 웃을 뿐 뭐라 하는 법이 없다.

 

제작진도 궁금했을 게다. 이 아버지는 왜 아들에게 그 흔한 잔소리를 하지 않는가. 그래서 그런 질문을 던지자 아버지는 잔소리 하는 걸 싫어한다며 그 이유로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어도 그건 내 욕심이라고 한다. 답답해도 아이들은 시행착오를 하기 마련이고 그건 소중한 경험이라고 말한다. 별거 아닌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몇 십 년을 더 산 아버지 입장에서 잔소리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갖고 있고 그걸 실천하고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다.

 

그래도 좋은 이야기를 해주고 싶을 때는 책을 빌어서 말해준다고 한다. 직접적인 말은 잔소리로 들릴 수 있지만 산보하며 나누는 잡담 같은 공감의 경험처럼 책은 좋은 이야기를 강권하는 게 아니라 같이 공유하는 경험으로 제시해준다. 세대 간에 이만큼 좋은 소통 방법이 있을까.

 

그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시행착오는 아버지도 한다. 무작정 야경이 멋있다는 누군가의 글을 읽고 찾아가기로 나선 바비네 부자는 길을 헤매다 가로등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길로 접어든다. 처음 가는 길. 그들을 따라나선 제작진들이 두려움을 느낄 정도지만 정작 바비네 부자는 그런 어두컴컴한 곳으로 가게된 것에 대해 그다지 탓을 하는 법이 없다.

 

그리고 의외로 그 곳에서 저 아래 펼쳐진 호놀룰루의 놀라운 야경을 발견하게 된다. 바비가 말하는 것처럼 야경은 마치 물결치는 것처럼 반짝거리고 바람이 불 때마다 그 바람의 존재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두 사람은 그 경험이 소중하고 경이롭게까지 느껴진다. 엉뚱한 시행착오처럼 오게 된 깜깜한 길 위에서, 오히려 그곳이 깜깜하기 때문에 더 잘 보이는 야경을 발견하고 바람의 노래를 듣는다는 건 얼마나 즐겁고도 소중한 경험일까.

 

다시 도시로 돌아와 피자와 파스타를 시켜놓고 먹는 자리에서도 아들이 손으로 마구 토핑을 집어 피자에 얹어 먹어도 아버지는 묵묵히 자신의 파스타를 자신의 방식으로 먹는다. 그리고 두 사람은 평소에는 잘 하지 않던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그 이야기도 스스로에 대한 것일 뿐 상대방에게 생각을 강권하는 건 아니다. 미술을 하는 아버지와 음악을 하는 아들은 서로의 분야에 대한 자신들의 불만족을 이야기한다.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충분히 공감대를 갖는다.

 

요즘처럼 세대 갈등이 심각해진 시기에 바비네가 서로 소통하는 방식은 참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나이 좀 먹었다고 또 좋은 얘기를 건네겠다고 하는 어른의 말은 어쩌면 바로 그런 자세와 위치 때문에 젊은 세대와 소통되지 않을 수 있다. 그것보다는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고 그 느낌을 공감하는 시간을 갖는 게 훨씬 더 낫지 않을까. 결국 소통의 물꼬는 조금은 나이를 더 먹은 세대가 열어줘야 한다. 부자관계라는 틀을 벗어나 인간 대 인간으로서 친구관계를 지향하는 것. 거의 정답처럼 보이는 바비네의 소통법이 주목되는 이유다

<디마프>, 관계의 족쇄 벗어 버리고 친구가 된다는 것

 

엄마도 여자야. 내 말이 맞지 엄마. 엄마도 여자지? 엄마도 남은 인생 여자로 살고 싶지? 그치?” 꼰대 남편과의 삶에서 벗어나고자 집 나온 정아(나문희)에게 딸들이 찾아와 자신들의 고충을 토로한다. 엄마가 집을 나오자 아빠가 딸들에게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며 일을 시킨다는 것. 딸들은 집나온 엄마에 대한 의견이 다르다. 이혼을 찬성하는 쪽과 그렇지 않은 쪽. 남은 인생 여자로 살고 싶지 않냐고 묻는 딸은 이혼을 찬성하는 쪽이다.

 

'디어 마이 프렌즈(사진출처:tvN)'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정아는 그렇게 말하는 딸에게 듣다못해 한 마디를 던진다. “아휴 내가 무슨 여자냐. 물혹으로 자궁 떼 낸 지가 언젠데. 그리고 이 나이 들어서 내가 남자면 어떻고 여자면 어때. 아주 지랄들을 하고 있어 그냥.” 그러자 또 딸이 엄마 인생을 들먹이며 대거리한다. “지랄 안하게 생겼냐? 여적 잘 살다 이렇게 집 나오면 엄마 인생 실패한 거 밖에 더 돼?” 다른 딸은 생각이 다르다. “엄마가 왜 실패야? 혼자선 아무 것도 못하는 아버지 인생이 실패지.”

 

tvN 금토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정아의 남편 석균(신구)은 한 마디로 꼰대다. 아내인 정아 구박하는 일이 마치 습관처럼 되어 있다. 눈 뜨면 밥 차리라 명령하고, 물 떠다 먹는 일조차 제 손으로 하는 법이 없다. 밖에 나갔다 늦게 들어올라 치면 문 밖에서 반성하고 들어오라며 벌을 준다. 온 친척들을 위해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제사상을 차리라고 해놓고는 여자들은 재수 없다며 제사 때는 집 밖으로 내몬다.

 

집안에서 이러니 집밖에서는 오죽할까. 후배인 성재(주현)의 집에 불쑥 찾아와 밥 달라고 하고는 자신은 식탁에 숟가락 놓는 것조차 하지 않는다. 마치 아내 부리듯 성재에게도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기 일쑤다. 이러니 젊은 사람들이 그를 좋아할 리 만무다. 완이(고현정)는 그에게 전화 오는 것조차 끔찍해 한다. 집 나간 아내 대신 그 주변 사람들에게 다짜고짜 전화해 밥 차려 달라고 떼쓰는 그에게 모두가 인상을 쓴다. 버스를 타고 마치 제 자리인 양 앉아있는 여학생에게 일어나라고 말하는 그에게 예의는 없다. 집 안에서도 집 밖에서도 그는 철저히 꼰대다.

 

그러니 집 나온 정아의 사정이 백 분 이해된다. 그런데 딸들이 찾아와 아버지에 대해 나쁘다고 말하자 그녀는 오히려 석균을 변호한다. “니들이 아버지한테 그렇게 말할 게 뭐 있냐. 젊어서는 니들 키운다고 아버지 그냥 철공소 공장 다니면서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그 추운 겨울에도 귀가 얼고 코가 얼면서도 그냥 밤 12시까지 야근하고 나이 칠십 먹어서는 지금 그래도 너희들 덕 안 볼라고 일하는데 너희들이 아빠한테 그렇게 말할 게 뭐 있어? 반찬 해주기 싫다고 그럼 하지 말어. 사다 줘. 천벌 받을 년들아.”

 

왜 정아는 딸들의 이야기에 동의하지 않고 오히려 석균의 입장을 대변했을까. 주변사람들은 정아의 가출을 복수라고 말하지만, 정작 그녀는 그게 복수가 아니라 그저 혼자 마음 편히 흑맥주 한 잔 먹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녀의 가출은 석균에 대한 복수가 아니다. 그녀 스스로가 자유롭고 싶었을 뿐이다.

 

절친인 희자(김혜자)와 나란히 손을 잡고 걸어가며 그녀는 석균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말한다. “나도 몰라. 밥 해주는 게 딱히 싫은 것도 아니고 성질 별난 것도 모르는 것 아니고. 안쓰럽지 않은 것도 아닌데 근데 지금은 그냥 다 싫어. 나도 내 마음이 왜 그런지 나도 모르겠어.” 갑자기 전화를 해서 잘 자라고 말하고는 왜 너는 나한테 잘 자란 얘기 안하냐고 지청구를 날리는 석균에 대한 정아의 마음은 복잡하다.

 

그런 정아에게 희자는 살갑다. “좀 앉았다 가 나 기운 있으면 너 업고 갈건데.” 불쑥 정아가 남편 석균에 대한 속내를 털어놓는다. “김석균이랑은 얘기 안돼. 아휴 둘이 같이 가다가 지금처럼 내가 힘들면 좀 쉬어 가자 그러구. 또 다치면 너처럼 조심하라고 그러면 될 텐데 그냥 쥐어 박듯 왜 그랬냐 정신머리는 어디다 뒀냐 하면서 어쩌구저쩌구. 내가 평생 같이 산 남자라 어디 가서 욕하는 것도 치사하고 구질스럽고.”

 

그녀는 저나 나나 앞으로 죽을 날만 남았는데자기가 바랄 게 뭐가 있냐고 말한다. 그런 그녀를 희자가 따뜻한 말로 위로해준다. “남편도 됐고 남자도 됐고 그냥 친구처럼 살다 가면 좋을 텐데. 나랑 너처럼. 친구처럼. 그치?”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정아와 석균의 갈등을 혹자들은 남녀 대결 구도로 바라본다. 하지만 이건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드라마는 남편도 남자도 아닌 친구라는 관점으로 우리네 사회에 깊숙이 들어앉아 있는 갈등들의 해법을 제시한다. 왜 우리는 남녀와 노소로 관계를 설정하고 역할을 나누고 그 구분에 얽매여 해야 할 일들을 강제하는가. 왜 여자와 여자로 만나지 못하고 고부관계로 만나고, 사람과 사람으로 만나지 못하고 장애와 비장애로 만나는가.

 

빈부 격차, 세대 갈등, 지역 갈등, 남혐 여혐 갈등 등등. 현재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심각한 갈등들의 연원을 들여다보면 그저 모든 관계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친구의 관점으로 만나지 못하는 것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부모 자식 관계도, 부부 관계도 나아가 세대 관계나 남녀 관계 역시 고작 몇 십 년 차이와 생김새만 다를 뿐, ‘죽을 날을 앞둔똑같은 사람이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우리는 친구라는 함께 손잡고 걸어갈 수 있는 진정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지 않을까. 정아의 말마따나 남자면 어떻고 여자면 어떤가. 희자의 말처럼 남편도 남자도 아닌 그저 친구가 될 수는 없는 걸까. <디어 마이 프렌즈>는 제목부터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드는 드라마다.

<계춘할망>, 청춘과 어르신에 대한 위로

 

나이가 젊다고 다 청춘이 아니듯, 나이 많다고 다 어른이 아니다. 아마도 최근 들어 가장 많은 키워드로 나오는 단어가 청춘어르신일 게다. ‘청춘이 원치 않았던 힘겨운 현실 앞에 숨가빠하고 있다면, ‘어르신들은 꼰대가 될 것인가 어른이 될 것인가를 사이에 두고 갈등한다. 그리고 이 둘은 연결되어 있다. 어른들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이 청춘들의 현재 혹은 미래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영화 <계춘할망>은 이 서로 다른 두 세대 간의 따뜻한 소통이 느껴지는 영화다.

 

사진출처: 영화<계춘할망>

제목에서 보여지듯 <계춘할망>의 배경은 제주도다. 계춘(윤여정)은 이 할망의 이름이다. 어쩌다 손주 혜지를 홀로 키워온 계춘은 어느 날 아이를 잃어버린다. 평생을 아이를 찾아다니는 계춘은 어느 날 나타난 혜지(김고은)로 인해 이제 겨우 허리 펴고 잘 수 있는 행복감에 빠져드는데 그간 혜지가 살아온 삶이 심상찮다. 도둑질은 다반사고 조건만남을 빙자해 돈을 뜯기도 하는 불량한 아이들의 폭력 속에 무심히 살아온 그녀다. 그런 그녀를 계춘은 모든 걸 품어주는 제주의 바다처럼 안아준다.

 

사실 이야기는 어찌 보면 뻔해 보인다. 결국 혜지가 계춘의 사랑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 하지만 영화 속 디테일들은 이러한 당연한 수순의 이야기 속에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들을 채워 넣었다. 그림에 재능을 보이는 혜지와 그녀의 아픔을 알면서도 무심한 척 그녀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미술선생 충섭(양익준), 청춘의 설렘을 무겁지 않게 영화에 얹어주는 제주소년 한(민호), 그리고 그녀의 삼촌으로 늘 계춘을 걱정하고 돌보는 석호(김희원) 같은 인물들은 영화에 충분한 온기를 더해준다. 그림을 잘 그리려면 그림자가 아니라 빛을 봐야 한다는 충섭의 말대로 이 주변 인물들은 혜지에게 빛을 던져주는 존재들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빛은 계춘이다. 손과 얼굴에 가득한 주름살과 마치 옥수수수염처럼 빛이 바랜 머리칼은 그녀의 한 평생을 한 장면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하게 만든다. 그런 그녀가 저 멀리 혜지가 걸어오는 것만 봐도 그 주름이 확 펴지고 달려오는 모습은 그 자체로 뭉클함이 느껴진다. 그런 그녀가 혜지에게 말한다. “세상에서 살면서 딱 한 명 네 편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 ‘내 새끼라는 표현이 정확하게 맞을 정도로 계춘이 혜지를 대하는 모습은 바다그 자체다. 자신이 평생 물질을 하며 살 수 있게 해준 든든한 그녀의 편.

 

과연 우리 시대의 청춘들에게는 계춘 같은 든든한 편이 있을까. 힘겨운 현실 속에서 그저 생존하기 위해 엇나간 삶을 살아내기도 하는 청춘들이다. 하지만 그 청춘들의 삶은 어느 누구도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에 질식하고 있을 뿐. 영화가 제주도까지 달려가 계춘이라는 할망을 통해 보여주려는 건 그래서 진정한 어른의 모습이다. 청춘들에게 저마다 든든한 편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런 어른.

 

계춘 같은 진정한 어른이 있어 혜지는 어둠을 비로소 빠져나와 미래를 향해 나갈 수 있게 된다. 아픔은 자양분이 되어 미술이라는 예술로 승화되고 거기에는 고스란히 혜지의 계춘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과 사랑이 담겨진다.

 

<계춘할망>에서 김고은은 역시 단단한 연기력으로 혜지라는 청춘의 아픔을 때론 퉁명스럽게 때론 따뜻한 눈물로 그려낸다. 윤여정은 늘 도회적인 이미지라는 틀에서 과감히 벗어나 손끝의 주름 하나로도 어르신의 감정을 담아내는 놀라운 연기변신을 보여준다. 이 영화에서 주목되는 또 한 명의 연기자는 김희원이다. 늘 악역으로만 나오던 그가 관객들의 심금을 울리는 연기를 보여줄지 누가 알았으랴.

 

김고은이라는 청춘과 윤여정이라는 어른이 만나 보여주는 건 청춘과 어른에 대한 위로다. 힘겨워도 세상에 한 사람 정도쯤은 자기편이 있다는 걸 청춘들에게 말해주면서, 동시에 헌신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어른의 삶이 얼마나 숭고한가를 들려준다. <계춘할망>은 그래서 이들이 서로 소통하는 과정만 봐도 눈물이 나는 영화다. 아파서가 아니라 너무 따뜻해서 나는 그런 눈물.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 그 기적 같은 일

 

MBC <무한도전> ‘토토가2’는 역시 변함없는 감동을 안겨주었다. 해체 후 16년 만에 완전체로 무대에 선 젝스키스에게 노란 우비를 입고 객석을 가득 메운 팬들은 눈물로 화답해주었다. 그들은 모두 함께 나이 들었고 그래서 더 성숙해진 모습들이었지만 그런 건 그들이 만나는 순간 모두 지워져버렸다. 함께 공유한 시간들은 그들을 고스란히 16년 전으로 되돌려 주었으니.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사실 이번 특집에 대한 우려 섞인 목소리가 없었던 건 아니다. 그 중 가장 컸던 건 <무한도전>처럼 이미 하나의 공공의 장이 되어버린 프로그램에서 젝스키스 팬 미팅의 성격이 강한 토토가2’를 한다는 것이 너무 마니아적이 아니냐는 시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 젝스키스의 16년만의 무대는 의외로 보편적인 감동을 주었다. 팬이라면 당연하겠지만 팬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물론 젝스키스의 팬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당대를 지냈던 이들이라면 “Oh love -”의 후렴구로 유명한 커플이란 곡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왔을 때 저마다의 추억이 방울방울 소환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노래를 전혀 모르고, 심지어 당대를 살지 않은 젊은 세대라고 해도 토토가2’는 충분히 감동적일 수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에 대한 남다른 감흥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20년 전 가수와 팬으로 만나 같은 공간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열광하고 박수쳤을 그들이 그렇게 다시 20년 후 한 자리에 모여 그 때와 똑같은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 그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었다는 것이다.

 

게릴라 콘서트형식으로 팬들과 만나기 전, 이런 시간의 공유가 주는 감동을 먼저 보여준 건 마지막 날 무대에 함께 오르기로 결심한 고지용이었다. 잠깐 커플의 안무동작을 바라보던 지용이 저도 모르게 춤동작을 기억해내고 따라하는 장면. 그것은 젝스키스 멤버들이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함께 해왔는가를 자연스럽게 드러내주었다. 머리는 기억을 못하지만 몸이 기억해내는 지용의 춤동작은 그래서 그것이 어설프다고 해도 멤버들을 반색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감흥은 고스란히 시청자들에게 전해졌다. 설혹 젝스키스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사람과 사람이 시간을 뛰어넘어 함께 했던 시간을 공유한다는 건 얼마나 놀라운 인간만의 능력인가. 그것을 그저 쉽게 공감이라고 표현하지만 바로 이 능력이 있어 우리는 생판 모르는 타인과도 연결될 수 있는 것일 게다.

 

<무한도전> ‘토토가2’가 보여준 건 젝스키스의 팬 미팅도 아니고 그저 그런 추억 팔이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전혀 그들을 모르는 타인이라도 똑같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이어지는 공감의 힘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도전이었다

벌레로 살아갈 것인가 어른으로 살아갈 것인가

 

나 아주 나쁜 놈이야. 당신 말대로 쓰레기고. 동우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게 지옥 같아서 모든 게 내 탓인 것만 같아서 무섭고 두려웠어. 그래서 도망쳤어. 상처를 마주볼 용기가 없어서 있는 힘껏 도망쳤어. 기껏 도망친 곳이 진짜 지옥인지도 모르고 썩은 권력에 기생하면서 그들이 던져준 돈과 권력에 취해서 벌레처럼 살았어. 참 어리석었어. 매순간 진실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는데 매순간 그걸 놓치고 더 큰 죄를 지었거든. 그들도 나도 그렇게 살았어.”

 


'기억(사진출처:tvN)'

tvN 금토드라마 <기억>에서 태석(이성민)은 전처이자 뺑소니사고로 죽은 동우의 엄마인 은선(박진희)을 찾아와 참회한다. 그는 자신이 지옥 같은 고통 때문에 기억으로부터 도망쳤지만 그 도망친 곳이 진짜 지옥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가 일에 빠져 살았던 태선로펌. 그 대표인 이찬무(전노민)의 아들 승호(여회현)가 사실 뺑소니범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던 것. 게다가 그들은 뺑소니 사고를 덮기 위해 씻을 수 없는 더 큰 죄를 지었다.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살인까지 저질렀으니.

 

똑같은 어버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동우의 어버이와 승호의 어버이는 너무나 다르다. 동우의 어버이인 태석과 은선은 드러난 진실 앞에 분노한다. 그리고 자각한다. 자신이 살아왔던 삶이 벌레의 삶이었다는 것을. 가해자들이 준 돈과 권력에 기생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하지만 승호의 아버지인 찬무와 할머니인 황태선(문숙)은 여전히 돈과 권력을 이용해 진실을 덮으려 한다. 태선은 찬무에게 태석이 의심을 갖는다고 해도 증명할 건 아무 것도 없다며 걱정 말라고 한다.

 

하지만 그 순간 찬무는 깨닫는다. 자신이 아들 승호의 죄를 덮기 위해 했던 일들이 승호에게는 어떤 기분을 주었을 지를. 그는 이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 모든 걸 덮으려 했던 어머니 태선을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모두 널 위해서 한 일이다.” 태선의 변명 같은 말에 찬무는 답한다. “승호도 이런 기분이었겠군요.” 대물림되는 죄. 진실을 은폐한 대가는 이토록 무겁게 대를 이어 자식을 지옥 속에서 살아가게 한다. 뺑소니 죄에 대한 응당의 벌을 받지 않고 살아오면서 승호나 그의 아버지 찬무 모두 또 다른 죄를 짓게 했으니.

 

<기억>이 건드리고 있는 건 어른의 삶과 선택이 후대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다. 권력에 기생해 살아온 대가가 얼마나 벌레 같은 삶이었는가에 대한 참회이고, 그 권력이 그 과거의 진실을 덮기 위해 여전히 얼마나 큰 죄를 저지르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칭해 쓰는 어버이라는 말이 얼마나 큰 무게감을 갖는가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어버이는 진정 어떠해야 어버이라 불릴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

 

하지만 현실은 참담하다. 어버이라는 단어가 이토록 부끄러운 단어로 오염되어 있는 현실이니 말이다. 그래서일까. 태석의 참회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나도 내가 용서가 안되는 데 누가 날 용서할 수 있겠어.”라고 말하는 그를 전처인 은선은 오히려 위로해준다. 진실을 회피하지 않고 직시하며 현실에 맞서는 태석은 비로소 동우의 아버지로서 어버이라는 자리를 찾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어버이들은 어쩌다 보니 부끄러운 존재들이 되었다. 스스로는 열심히 가족을 위해 살아왔다고 자부했지만 그것이 과거의 죄를 덮어버리고 쉽게 기억에서 지워버리는 대가에 의해 이뤄졌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참회하기도 한다. 이러니 젊은 세대와 어버이 세대의 골은 깊어져간다. 나이를 뛰어넘어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세대는 친구가 되지 못한다. 이 얼마나 아픈 현실인가.

 

태석은 자신이 상대방의 약점까지 잡아 변호를 했던 대가로 자살한 김선호 박사의 유서를 젊은 변호사인 정진(이준호)에게 건네준다. 자신이 할 일을 끝내고 나서 모든 진실을 밝힐 것이라는 것. 그렇게 되면 자신의 변호사 자격마저 박탈당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려 한다. 그리고 정변호사에게는 이렇게 말한다. “정변은 김선호 박사와 관련해서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어.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게 유죄라면 유죄야. 그치만 책임질 일은 없어. 내 말 알아들었어?”

 

자신의 죄를 자신이 책임짐으로써 젊은 세대에게 그 책임이 전가되지 않게 하려는 노력. 태석이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건 바로 그것이다. 본의 아니게 자신의 짐까지 짊어지게 해서 미안하다는 태석에게 정변호사는 뜬금없이 인디언 말로 친구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내 슬픔을 등에 지고 가는 자. 그게 친구랍니다. 오늘부터 저 변호사님이랑 친구 먹은 겁니다.” 세대 간의 소통은 이런 식으로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이다. 곧 어버이날이 다가온다. 하지만 어버이라는 말이 이토록 창피하고 부끄럽게 여겨지는 현실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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