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와’ 핀란드친구들, 무엇이 특별했을까

독일친구들이 진지했다면, 인도친구들은 낙천적이고 흥이 가득했다. 그렇다면 핀란드친구들은 무엇이 달랐을까. 우리에게 핀란드는 사우나와 자일리톨 정도로 익숙하지만 실제로는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다. MBC 에브리원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에서 핀란드친구들을 초대한 페트리는 한국인들이 핀란드하면 “휘바휘바”라며 껌을 떠올리는 정도라고 했다. 사실 산타클로스의 나라라는 것도 잘 모르는 이들이 있을 정도. 나라는 익숙하지만 그 나라 사람들은 잘 모르는 바로 그 지점이 핀란드친구들에 대한 궁금증을 더 갖게 되는 가장 큰 이유지만.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 (사진=페트리 인스타그램)핀란드 친구들도 한국이 낯설긴 마찬가지다. 도시의 모든 것들이 신기한 순박한 시골청년 빌레, 록 음악과 게임캐릭터에 반색하는 사미 그리고 교수로 불리며 한국음식에 유독 관심을 갖는 먹방 거요미 빌푸는 공항에서부터 한국의 모든 것들이 신기한 표정이었다. 페트리가 설명하듯 “매우 춥고 심심한 나라”에서 온 핀란드 친구들은 그래서인지 말도 별로 없고 리액션도 거의 없는 ‘포커페이스’였다. 그러니 그들이 한국의 문화를 체험하면서 어떤 느낌을 갖는지가 얼굴에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포커페이스이기 때문에 살짝 미소를 짓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오히려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인도친구들이 뭐든 하기만 하면 굉장한 리액션을 보여줘 가만히 있으면 마치 화가 나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면, 핀란드 친구들은 늘 무뚝뚝한 표정을 지고 있어서인지 살짝 미소를 짓기만 해도 굉장한 마음의 표현처럼 다가오는 면이 있었다는 것. 

철두철미하게 계획하고 여행하는 모습은 독일친구들을 그대로 닮았다. 한국에 오기 전부터 지도를 파악하고 동선을 체크해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명동까지 와서 호텔을 찾는 일이 너무나 순조롭게 이어졌다. 게다가 본격적인 한국 여행을 하기 전 한국을 먼저 알아야겠다며 첫 여행지로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은 것도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독일친구들과 비슷했다. 

하지만 핀란드친구들의 관심사는 역시 조금 달랐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유독 관심을 가진 건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와 태극기였다. 특히 태극기의 그 문양이 굉장히 독특하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우리도 간과하곤 했던 태극기가 가진 특성들이 새롭게 보이게 해주었다.

흥미로웠던 건 그렇게 국립중앙박물관을 보고 식사를 한 후 그들이 간 곳이 디지털미디어시티의 e스포츠 경기장이었다는 점이다. 사실 이렇게 게임에 이들이 특히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건 빌푸가 국립중앙박물관을 갈 때, “한국은 긴 역사를 가진 나라고, 세종은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왕이다. 과학과 발명에 관심이 많았다”고 설명하며 그런 사실을 유명 역사게임을 통해 알게 됐다고 말한 대목에서부터 드러난 바 있다. 

사실 핀란드는 슈퍼셀 같은 세계적인 게임 제작사가 있는 나라다. 하지만 핀란드에는 우리 같은 PC방 개념이 없어 게임을 함께 하기 위해 직접 컴퓨터를 갖고 한 집에 모여 게임을 한다고 했다. 우리의 경우는 게임대회로서의 e스포츠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는 상황이고, 핀란드친구들이 이름을 얘기할 정도로 유명한 세계적인 게이머들이 있다. 바로 이런 지점은 이번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에서 핀란드친구들과 우리 사이의 흥미로운 연결고리가 되어주고 있다.

또한 우리가 사우나라고 흔히 부르는 그 말이 핀란드에서 유래한 말이라는 사실 역시 우리와 그들 사이를 자연스럽게 연결해준다. 첫 날 여독도 풀 겸 우리식의 사우나라고 할 수 있는 찜질방을 찾은 핀란드친구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못내 궁금해지는 건 그렇게 연결고리가 있지만 서로 다른 문화를 그 안에서 발견하고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입시 한파를 지나며 한층 겨울에 다가가는 날씨. 하지만 가장 추울 때는 영하 50도 이하로도 떨어진다는 핀란드에 비교하면 우리네 가을의 기온은 저들에게는 여름날씨를 닮았다고 할 정도다. 그러니 이 날씨에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저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를 보게 되고 또 저들을 보게 되는 일이 자연스럽다. 속내를 잘 표현하지 않는 핀란드친구들이지만 그래서 더 궁금해지는 건 그들과 우리의 접점에서 발견되는 저들의 문화와 우리의 문화가 주는 흥미로움 때문이다.(사진:MBC에브리원)

<장영실>, 어째서 이 좋은 소재가 이렇게 그려질까

 

KBS 주말사극 <장영실>은 충분히 이 시대에도 의미가 있는 소재다. 장영실(송일국)이란 청춘이 가진 처지가 현실과 맞닿아 있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천출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특별한 재능이 있어도 출사하지 못하는 처지가 그렇다. 결국 조선을 떠나겠다고까지 마음먹었던 장영실이 아니던가.

 


'장영실(사진출처:KBS)'

그런데 초반 <장영실>의 이런 흥미로운 설정은 어찌 된 일인지 점점 매력이 떨어져간다. 그 흙수저로 태어난 장영실에 대한 공감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던 그를 알아봐주는 세종(김상경)이나 마치 형처럼 그를 허물없이 대해주고 밀어주는 이천(김도현) 같은 인물들이 일찌감치 그를 일으켜 세워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심지어 소현옹주(박선영)와 장영실은 신분을 뛰어넘어 연정을 가진 관계로까지 그려진다. 이건 역사에도 나와 있는 이야기가 아니고 현실적으로도 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런데도 굳이 이런 멜로 설정까지 집어넣는 건 흙수저로 태어나 가진 게 없었던 장영실을 사실상 모든 걸 다 가진 인물로 느껴지게 만든다.

 

장영실에 대한 찬양에 가까운 이야기는 그가 명나라에 가서 주태강(임동진)의 집에 있는 전설의 물시계 수운의상대를 재현하는 데에도 등장한다. 그는 얘기만 들었지 한 번도 실제 본적이 없는 수운의상대를 척척 재현해낸다. 그런 장영실을 주태강은 경이로운 눈길로 바라본다. 장영실이 조선으로 돌아올 때 주태강은 심지어 조선의 과학이 명나라를 앞지르고 있다는 얘기까지 꺼내놓는다. 제 아무리 드라마라고 해도 이런 식의 극단적인 찬양은 <장영실>이라는 사극에 마치 군대에서 만드는 정훈 영상물 같은 느낌을 덧씌운다. <장영실>은 왜 이 특별한 인물에 대한 현재적인 재해석은 보이지 않고 찬양만 가득할까.

 

이와 상반된 느낌을 주는 작품은 SBS <육룡이 나르샤>. <육룡이 나르샤>에서 정몽주(김의성)와 이방원(유아인)의 이야기는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워왔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이 드라마는 이 인물들을 현재의 관점으로 재해석해 놓았다. 정몽주가 그래도 고려를 지키려는 시대에 역행하는 인물처럼 그려진다면 이방원은 신조선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기 위해 모두가 못하는 것들을 실행해 옮기는 인물로 그려진다. 물론 이방원을 완벽한 인물로 그리는 건 아니지만 확연히 현재의 관점이 투영되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사극이 과거가 아닌 현재를 다룬다는 건 이제 누구나 알고 있는 일이다. 즉 과거의 역사를 소재로 하지만 그 역사를 굳이 지금 현재 들춰본다는 건 그 관점이 현재에 맞춰져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렇다면 <장영실>은 어떨까. 장영실이라는 인물을 이 사극은 모든 걸 다 갖춘 과학자로 그려낸다. 그는 천문의 이치를 꿰뚫어보는 인물이면서 동시에 뭐든 척척 만들어내는 기술자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천출이라고 해도 청춘의 그림자가 그리 느껴지지 않는다. 왜 이토록 현재와 호응하지 못하는 걸까.

 

<장영실>이라는 사극이 그 좋은 소재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창조 경제같은 구호로 느껴지는 건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이다. <장영실>은 어째서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 같은 신선한 해석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심지어 옹주와 사랑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까지 집어넣어 도대체 무슨 얘기가 하고 싶은 것일까. 장영실처럼 노력하면 지금의 청춘들도 출사해 성공할 수 있다고? 글쎄. 거기에 호응하는 현재의 청춘들이 몇이나 될까.

<장영실>에서 떠오르는 헬조선과 탈조선

 

장영실은 별에 미친 조선의 노비 놈이다.” 장영실(송일국)은 하늘에 가득한 별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소리친다. 그 자조 섞인 목소리에는 절망감이 가득하다. 조선에서 별을 본다는 것. 아니 조선에서 노비로 태어나 별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허망한 일이다. 그의 사촌인 양반 장희제(이지훈)는 일찍이 이 현실을 장영실에게 뼛속까지 느끼게 해준 바 있다. “노비는 아무 것도 몰라야 한다. 시키는 것만 하면 되는 것이야.” 그것이 별에 미친 조선의 노비 놈의 운명이다.

 


'장영실(사진출처:KBS)'

하늘에는 귀천이 없다. 별에도 귀천이 있을 리 없다. 그리고 그 움직임은 그저 자연의 법칙일 뿐 그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별을 바라보는 이들은 거기에 의미를 부여한다. 때론 그 의미는 과학이 아니라 미신에 가깝다. 형제의 난을 거쳐 왕위에 오른 태종(김영철)이 일식과 월식을 통한 구식례(일식과 월식을 맞는 예식)를 통해 자신의 과오를 떨쳐내고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 싶어 한다. 하지만 어디 하늘의 움직임이 자신의 마음대로 움직일까. 일어나지 않는 일식과 월식을 두 차례나 허망하게 맞이한 왕은 하늘에 사죄를 올린다.

 

조선에서 과학이란 이처럼 순수한 것이 아니다. 하늘의 운행은 과학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해석된다. ‘달이 세성(목성)을 가렸다는 과학적 사실은 임금이 백성을 상대로 수탈을 일삼는다는 뜻으로 읽혀진다. 세성은 다름 아닌 복과 덕을 책임지는 별로 의미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운관 제조 유택상(임혁)달과 별은 임금과 백성의 관계와 같다고 말하며 세성을 범한 달이 의미하듯 태종에게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간언한다. 이것은 과학이 아니고, 과학이라고 해도 중국의 과학이다. 우리에게는 맞지 않는.

 

장영실은 아버지 장성휘(김명수)와 관기인 은월(김애란) 사이에서 태어나 관노가 된 노비다. 하루 종일 고단한 노비의 삶을 살면서도 그가 버틸 수 있었던 힘은 하늘의 별들이다. 그는 노동 속에서도 해의 변화를 보며 과학의 꿈을 키워나간다. 그의 평생의 친구인 석구(강성진)는 장영실이 산에 지어놓은 일종의 관측소에서 별을 보여주자 그에게 말한다. “영실아. 고마워. 하늘보고 살게 해줘서.” 땅만 죽어라 파며 살아야 하는 노비 신세에 하늘을 보고 산다는 의미는 그렇게 크다. “죽을 듯이 힘든데 이렇게 하늘보고 살 수 있어서 좋구나.”

 

하늘을 쳐다보는 것에 귀천이 없을진대, 조선은 심지어 그 하늘을 보는 것마저 귀천을 따진다. “있잖아. 난 저 하늘의 별들이 매달려 있는 이치만 알 수 있다면 그 자리에서 죽어도 좋아. 근데 조선 땅에서 노비로 사는 한 그 일을 할 수가 없어. 그래서 목숨 걸고 조선을 떠나야 해. 반드시.” 순수하게 학문의 뜻을 펴는 일은 노비인 장영실에게는 조선에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조선을 떠나고 싶어 한다.

 

<장영실>이라는 사극은 역사 과학 드라마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거기서 솔솔 피어나는 문구는 이 정부가 그토록 주창하는 창의 융합 시대라는 캐치프레이즈다. 그래서 <장영실>이라는 드라마에 대한 막연한 편견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일 게다. 하지만 <장영실>은 그 첫 주 방영분을 통해 그가 왜 조선을 떠나고 싶어 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화두처럼 던졌다. 흙수저를 물고 태어난 자는 제 아무리 하늘의 이치를 들여다보고 싶어 해도 이뤄지지 않는 세상이다. ‘헬조선이라는 표현은 그래서 아마도 장영실이라는 청춘에게 딱 어울리는 현실이었을 게다.

 

사극이 장영실이라는 인물을 다루게 된 것은 그가 다룬 과학과 그가 처한 현실이 현재에 던지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게다. 장영실은 그 신분과 태생이라는 현실을 깨치고 자신이 꿈꾸던 세계를 향해 나아갔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지금에도 통용될까. 과연 꿈을 향해 끝없이 정진하는 것으로 현실을 바꿀 수 있을까. 장영실이 그 낮은 신분에도 세상에 이름 석 자를 떨칠 수 있었던 것이 가능했던 건 그의 가치를 보고 인정해준 세종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우리에게는 세종 같은 인물이 있을까. 나아가 장영실 같은 존재의 가능성은?



사극의 진화, <뿌나>에 이은 <육룡>

 

사극의 전형은 아마도 왕이 명을 내리고 신하들은 일제히 통촉해 주시옵소서!”하며 외치는 장면이 아닐까. SBS <육룡이 나르샤>에는 그런 장면이 없다. 아니 아예 왕은 전면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동시대를 다뤘던 KBS <정도전>에서 그래도 공민왕도 나오고 공양왕도 나오며 공민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도 나오는 것과는 사뭇 다른 그림이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왕이 전면에 나오지 않자 대전의 모습도 거의 없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도당의 풍경이다. 도당은 고려후기 최고의 정무기관으로 도평의사사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사실보다 중요한 건 이 도당이 지금 현재의 국회를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왕이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 시대, 그 실세는 도당3인방이라고 불리는 이인겸(최종원), 길태미(박혁권), 홍인방(전노민)이다. 물론 이들은 가상인물이다.

 

이것은 <육룡이 나르샤>의 독특한 인물구성이다. ‘육룡이 그렇듯이 거기에는 실존인물인 이성계(천호진), 정도전(김명민), 이방원(유아인)과 함께 가상인물인 분이(신세경), 땅새(변요한), 무휼(윤균상)이 뒤섞여있다. 이런 구성은 이미 김영현, 박상연 작가의 전작인 <뿌리 깊은 나무>에서도 시도됐던 것이다. 거기에서도 세종(한석규)이라는 실존인물과 강채윤(장혁), 소이(신세경) 같은 가상인물이 함께한다.

 

이들 가상인물들은 그저 역사적 인물들을 보조해주는 캐릭터가 아니다. 그들은 오히려 이 역사의 뒤안길에서 실제 역사를 만들어낸 주역들로 그려진다. 전면에는 역사적 인물이 있지만 그 이면에는 그들을 돕거나 그들이 어떤 결심을 하게 만드는 요인으로서의 가상인물들이 자리한다. 이것은 <뿌리 깊은 나무>에 이은 <육룡이 나르샤>라는 사극이 이제 어떤 새로운 진화의 단계를 보여주고 있다는 증거들이다.

 

사극이 역사로부터 조금씩 떼어져 나와 상상력을 가미하기 시작한 건 이병훈 감독이 시작했던 이른바 퓨전사극이라고 불리는 시도에서부터였다. <허준>, <대장금> 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이들은 실존인물이지만 역사적 사료가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아 나머지 행적들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다시 쓰여졌다.

 

이렇게 상상력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만들어지자 사극은 좀 더 과감한 시도들을 보여준다. 즉 결국은 권력자의 기록이 될 수밖에 없는 역사가 기록하지 않은 것들을 상상력으로 재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추노> 같은 사극은 역사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분명 존재했을 노비들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사극이 역사에서 점점 벗어나 심지어 역사의식 자체를 버리고 상상력 깊숙이 들어가자 사극은 하나의 장르극일뿐 사극 특유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해를 품은 달>이나 <성균관스캔들>은 현대적 장르물이 단지 과거의 어떤 시점을 배경으로 재연된 느낌을 주었다. 물론 그것이 의미 없다는 건 아니지만 사극이라면 응당 있어야만 될 것 같은 역사의식이 배제된 느낌은 사극만이 가진 독특한 영역을 허물어뜨리게 되었다.

 

그래서 사극이 다시 회귀한 것이 <정도전>이나 <징비록> 같은 정통사극이다. 다시 역사와 역사의식을 회복시키는 것이 사극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 힘이라 여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 사료에 충실한 정통사극이 다시 주목을 받았으나 이 또한 역사라는 틀의 한계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결과라 보기는 어려웠다.

 

이런 일련의 흐름에서 보면 <뿌리 깊은 나무>에 이어 <육룡이 나르샤>가 구축해가고 있는 역사와 가상의 공존방식은 사극의 대안적인 진화가 아닐까 싶다. 역사이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를 들여다보는 것이지만 그 과거는 현재를 위한 것이다. 그러니 현재의 대중들이 갖고 있는 역사의식과 상상력이 투영되어야만 그 역사는 박제된 것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것이 된다.

 

역사란 이처럼 팩트에만 머물러 있을 때 오히려 왜곡의 길을 걸을 수 있다. 역사의 기록은 권력자들에게는 팩트일 수 있어도 피권력자들에게는 왜곡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역사적 인물과 가상인물이 한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고 그 결과로서 어떤 역사를 그려나가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우리가 역사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하는 관점이 들어있다. 이것은 저 역사학자 E.H 카가 말한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맥락을 잘 구현해낸 것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사극조차도 역사를 바라보는 이런 식견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다.



'육룡', 이방원만큼 무휼, 이방지가 기대되는 까닭

 

오늘 첫 방영되는 SBS 사극 <육룡이 나르샤>의 등장인물에는 반가운 이름이 들어가 있다. 바로 김영현, 박상연 작가의 전작이었던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 이도 옆을 든든히 지키고 있던 무사 무휼(조진웅)이다. 세종 이도가 글을 세운 문의 힘을 보여준 캐릭터라면 그런 그를 칼을 통한 무로써 지켜주는 인물이 무휼. 무휼은 한글 창제의 이면을 다룬 <뿌리 깊은 나무>가 사변적인 이야기에 머물지 않고 액션 활극으로서 시청자들의 시각적 쾌감을 줄 수 있게 해준 캐릭터이기도 하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그 무휼이 훨씬 젊어진 얼굴(윤균상)<육룡이 나르샤>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무휼 옆에는 또 한 명의 익숙한 이름이 있다. 바로 이 드라마에서 땅새(변요한)라고 불리는 이방지다. 이 캐릭터 역시 <뿌리 깊은 나무>에서 강채윤(장혁)의 무술스승으로 출상술의 대가로 미친 존재감을 드러냈던 그 인물(우현이 연기했다)이다. 무휼의 젊은 시절이 다뤄지는 만큼 이방지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 역시 <육룡이 나르샤>의 중요한 스토리 중 하나가 된다.

 

이처럼 <육룡이 나르샤><뿌리 깊은 나무>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사극이다. 국내의 사극 중에서는 처음 시도되는 연작이지만 워낙 <뿌리 깊은 나무>가 남긴 강렬한 여운이 지금도 여전하다는 점에서 이 프리퀄에 대한 기대감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뿌리 깊은 나무>가 조선 건국 후 나라의 기틀이 마련되고 그 위에 세워진 세종 대의 찬란한 유산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육룡이 나르샤>는 바로 그 세종이 훨훨 날 수 있었던 그 기반이 되는 여말선초의 육룡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용비어천가에서 나오는 육룡이란 조선을 개국한 세종의 여섯 선조들을 일컫는 것이지만 이 사극의 육룡은 그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육룡이 나르샤>에서 육룡은 이성계, 이방원, 정도전이라는 실존 역사적 인물들과 무휼, 땅새, 분이(신세경)라는 가상 인물 여섯을 통칭하는 것이다. <육룡이 나르샤>는 실존 인물들의 역사적 이야기와 그들과 공조하고 대결하는 그 이면의 가상 인물들의 이야기를 합쳐놓은 팩션이다.

 

역사적 사건이 있다면 그 뒤안길에 그 사건들에 의해 한 시대를 이름 없이 살아낸 민초들의 이야기도 있다는 것이 <육룡이 나르샤>가 갖는 이야기 구조의 의미다. 따라서 이 사극의 재미는 젊은 이방원(유아인)과 정도전(김명민)의 권력을 향한 욕망과 백성을 위한 혁명 사이에서 부딪치는 대결에서도 찾아낼 수 있지만 그들과 함께 하는 무휼과 땅새, 분이 같은 민초들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역사적 사실이야 이미 우리가 역사적 기록을 통해 이미 아는 사실의 재연이라고 본다면 실제로 이 사극의 새로움은 무휼 같은 가상인물에서 나온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결국 <육룡이 나르샤>에 들어간 무휼 같은 존재들은 현재의 욕망이 투영된 캐릭터일 수밖에 없다. 사극이 과거의 재현이 아니고 현재의 결핍을 과거의 역사를 통해 채워주려는 욕망이라고 본다면, 왜 무휼이나 이방지 같은 가상의 존재들이 이방원이나 정도전, 이성계 같은 실제 역사적 인물만큼 기대감을 갖게 하는지를 이해할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왕들의 기록으로 남겨진 용비어천가의 육룡과는 다른 민초들의 기록으로서 다시 쓰는 용비어천가를 말해주는 건 아닐는지



한석규의 왕 연기, 어떤 점이 달랐을까

 

확실히 믿고 보는 배우 한석규는 달랐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욕하는 모습조차 인간미로 소화해낸 한석규 덕분에 우리는 지금까지 사극을 통해 봐왔던 왕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글을 창제하고 배포한 세종의 그 격의 없는 왕의 모습에서는 저잣거리 백성들을 향하는 그 낮은 자세가 느껴졌다. 교과서 속에 박제되어 있던 세종은 그렇게 한석규를 통해 재해석됐고 비로소 살아있는 인물로 되살아났다.

 

'비밀의 문(사진출처:SBS)'

그리고 돌아온 <비밀의 문>은 한석규의 영조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이다. 아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왕의 면면이 평이할 리가 없다. 따라서 한석규가 해석해낸 영조는 자상한 면과 광기어린 면이 뒤섞여 있는 왕이다. 그 광기를 <비밀의 문>은 맹의라는 비밀문서를 통해 보여준다. 노론과의 결탁을 뜻하는 그 맹의에 수결함으로써 왕이 됐다는 그 사실은 영조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걸림돌이자 두려움이다.

 

<비밀의 문>은 일반적인 사극의 시작과는 사뭇 다르게 그 문을 열었다. 짧게 맹의에 수결하는 영조의 두려움에 떠는 모습을 보여주고 그 맹의를 없애기 위해 심지어 승정원에 불을 지르는 영조를 통해 맹의가 가진 존재감을 부각시켰다.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또 그것을 덮으려는 자와 밝히려는 자의 대결구도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바로 이 맹의의 존재감은 이 사극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힘이 된다. 바로 그 힘을 드라마 초반 시작 단 몇 분만에 실어주는 것이 다름 아닌 한석규의 연기다. 그는 광기와 두려움이 교차되는 모습을 통해 맹의라는 비밀문서가 가진 무게를 만들어냈다.

 

사실 <비밀의 문><뿌리 깊은 나무>의 장르적 특성과 유사한 점이 많다. 왕을 다뤘다는 점이 그렇고, 그 안에 미스테리한 추리극 요소를 집어넣었다는 점이 그렇다. 하지만 무엇보다 유사하게 여겨지는 건 한석규가 지금껏 우리가 봐왔던 것과는 다르게 왕을 재해석해낸다는 그 지점이다. 실제로 <비밀의 문>은 아직까지 <뿌리 깊은 나무> 만큼의 흥미진진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팽팽한 긴장감과 보는 재미를 만들어내는 건 바로 이 한석규가 해석하는 영조 덕분이다.

 

<비밀의 문>이라는 사극이 가진 근본적인 힘은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조선왕조 500년의 가장 불행한 가족사에서 나온다. 뒤주에 가둬 사도세자를 죽게 만든 왕, 영조. 제 아무리 광기를 보였다고는 하나 아비가 자식을 죽인다는 건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터다. 역사는 자식을 죽인 왕의 입장에서 쓰여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자식을 죽인 왕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자식의 광기를 좀 더 극대화해야 했을 것이다.

 

<비밀의 문>은 이 부분을 재해석한다. 역사의 내용과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라는 것. 맹의는 그래서 영조가 이런 극단적인 일을 선택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여기서 흥미로워지는 것은 사도세자의 광기가 아니라 영조의 광기가 이 사건이 벌어지는 이유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이것은 역사 왜곡의 문제일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로서 <비밀의 문>이 이 새로운 해석을 통해 현재적인 문제의식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면 용인될 수 있는 일이다.

 

과연 영조는 어떻게 변화해갈까. 그리고 그 변화의 과정은 지금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던져줄까. 이 드라마에서 이 모든 궁금증을 쥐고 있는 게 바로 영조라는 인물이다. 한석규의 입체적인 왕에 대한 해석은 그 영조를 깨워내고 있다. 다른 모든 것을 차치하고라도 <비밀의 문>이 흥미로운 이유는 이 변화무쌍한 영조를 재창조하고 있는 한석규의 연기 덕분이다.

 


소통에 더 갈급한 세상, '뿌리'의 선택

'뿌리깊은나무'(사진출처:SBS)

"지랄하고 자빠졌네." '뿌리 깊은 나무'에서 '지랄'이라는 대사는 극 전개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화두다. 어린 세종 이도(송중기)가 죽은 아버지 앞에 오열하며 "지랄하지 말라고 그래!"하고 소리칠 때, 그 '지랄'은 이도의 뒤통수를 때렸다. 복잡한 말 장난 같은 이념과 철학의 대결구도 속에서 고뇌하고 힘들어할 때, 이 어린 백성의 한 마디 '지랄'은 오히려 이도에게 속 시원함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뭐가 그리 복잡한가. 저리 힘들어하는 백성이 있는데.

'지랄'. '마구 어수선하게 떠들거나 함부로 분별없이 하는 행동을 속되게 이르는 말'을 뜻한다. 하지만 이 사극의 대사 속에서 사용되는 '지랄'은 이런 사전적 의미보다는 그럴 듯한 논리가 아닌 직관적으로 사태를 사정없이 드러내는 장치다. '지랄' 앞에 논리란 필요 없다. 그저 그런 속된 말이 나오는 현실만이 던져질 뿐이다. 논리가 가진 자들의 무기라면, 욕은 없는 자들의 무기다.

성장한 세종(한석규)이 등장해 처음 던지는 대사가 '지랄'에서 시작되어 진화된(?) '염병', '우라질'이라는 사실은 이 캐릭터에 대해 많은 걸 얘기해준다. 탁상공론처럼 양반행세하며 입바른 소리하는 권력자들과 집현전에서 토론하는 장면에서 세종은 하나하나 논리로서 대응하지만, 그런 그의 입매에는 묘한 조소가 달려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랄하고 자빠졌네'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가 느꼈던 그 한 백성의 소회를 입바른 소리하는 신하들에게서 똑같이 느끼기 때문일 게다. 세종은 '지랄'을 통해 처음 백성과 소통했고, 그것을 잊지 않음으로써 백성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위한 글자 창제에 투신하게 된다.

'뿌리 깊은 나무'는 지금껏 세종을 다룬 사극들이 한글의 창제 과정과 그 위대함에 대해 상찬하던 것과는 달리, 창제된 한글을 배포하고 유포하는 과정에 더 방점을 찍었다. 이미 백성들과 소통할 글자를 만들었는데 그 소통체계를 반대하는 무리들과의 한 판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다. 밀본의 본원 정기준(윤제문)은 세종과의 독대를 통해 그가 하려 했던 한글 반포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그것은 백성을 위한 것이 아니라 세종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것. 한글 하나 던져주고 알아서 살라는 것은 임금으로서의 직무유기라는 것. 이 뱀의 혀를 가진 정기준의 말은 세종의 트라우마를 건드린다. 자신 때문에 죽어나가는 백성이 더 이상은 생기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그래서 '백성을 위한다는 것'이 오로지 임금의 고단함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었던 세종에게 정기준은 그것이 '백성이 아닌 너를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요사스런 말의 논리를 깨부수는 건 역시 '지랄'이었다. 그 말에 내상을 입은 세종이 고뇌하고 있을 때, 처음 '지랄'을 알려준 채윤(장혁)이 또다시 일갈한다. "지랄을 하고 계십니다." '백성을 사랑한 적이 없고 대신 미워했다'는 정기준의 논리를 그대로 가져와 채윤은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한다. 글을 알게 됨으로써 백성들의 욕망이 생겨나고 그 욕망으로 인해 지옥이 생길 거라고 비관한 정기준의 논리에 채윤은 "소이가 꿈이 생겼다"는 말로 반박한다. 사상과 이념의 논리 앞에 채윤이 던지는 '지랄'은 이처럼 백성들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세종에게 전해준다. 한글 반포와 유포를 막는 자들 앞에 목숨을 던져 넣으면서 죽어가는 세종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말한다. "멈추지 마십시오." 무엇을? 소통에 대한 노력이다.

'뿌리 깊은 나무'가 창제보다는 반포와 유포 과정에 천착하고, 그 유포 과정에서 현대적 의미를 떠올릴 수 있는 SNS나 '사랑의 편지' 같은 방법들이 제시되는 것은 이 작품이 갖고 있는 소통에 대한 갈급을 말해주는 것이다. 백성들의 언어, '지랄'을 화두로 시작된 '뿌리 깊은 나무'는 그래서 왕과 백성 간의 한글을 매개로 하는 소통을 그려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현대인들에게도 깊은 여운을 남긴다. 우리가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이 바로 이 '지랄'로 표현되는 직설적이지만 정직한 대중들의 정서와 그 소통이 아닌가. '지랄'이라는 속된 말이 이토록 가슴을 울렸던 것은 그 속에 담겨진 절절한 소통의 욕구가 드라마에 묻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뿌리’, 세종은 현재와 어떻게 소통했나

'뿌리깊은나무'(사진출처:SBS)

‘뿌리 깊은 나무’는 이미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해 오히려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한글’과 ‘세종’의 이야기를 다룬다. 교과서 속에서 시험문제에나 나올 박제화된 세종의 한글창제에 관한 일화들이 21세기인 현재의 대중들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실제 역사 그 자체가 아니라, 세종과 한글창제가 갖는 의미를 현재의 시점에서 재해석했다는 것 때문일 것이다. 그 몇 백년의 간극을 이어주는 한 단어는 무엇일까.

그것은 ‘소통’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첫 도입에서 글자를 몰라 죽게 되는 한 선량한 백성의 이야기에서 화두를 던지고, 그 일을 계기로 달라지는 세 인물을 끄집어낸다. 강채윤(장혁)과 소이(신세경)와 세종(한석규)이다. 강채윤은 그 글자를 몰라 죽은 백성의 아들로서 세종에 대한 복수를 꿈꾸고, 소이는 그 죽음에 관여된 인물로서 한글 창제에 투신하게 되며, 세종은 그 두 백성(으로 표상되는 채윤과 소이)의 고통을 바라본 인물로서 역시 한글 창제를 하게 된다.

먼 길을 돌아온 강채윤이 세종의 진심을 알게 되고, 옆에서 임금이란 자리에서 겪는 고독과 또 한글 창제에 깃든 세종의 진심을 소이가 읽어내는 그 과정이 모두 소통이다. 즉 채윤과 소이가 백성을 표상하는 인물이라면 이것은 왕과 백성이 갈망하는 소통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한글은 그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매개체가 된다.

주목되는 것은 이른바 ‘재상정치’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실상은 자신들의 기득권(글자를 독점함으로써 권력을 독점하는)을 지키려는 밀본이란 세력이다. 정기준(윤제문)은 한글이 가진 그 ‘역병’ 같은 힘을 직감하고 겁을 먹는다. 그것은 소통의 체계가 왕과 백성 사이에 놓여진 자신들 같은 신하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는 세상을 뒤엎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글은 이제 백성들끼리 소통할 수 있고, 또 백성과 왕이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줄 것이다. 그러니 이 ‘역병 같은 글자’의 파급력에 정기준은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즉 한글을 반포하려는 세종과 그것을 막으려는 밀본의 대결은 마치 소통과 불통의 대결처럼 그려진다. 이것은 지금 우리 시대가 처해있는 환경과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이른바 소셜 네트워크의 시대, SNS 같은 새로운 소통체계는 기성 소통체계를 장악하고 있는 권력에게는 위협이 아닐 수 없다. ‘뿌리 깊은 나무’는 이 대결구도를 마치 100분 토론을 보는 것처럼 세종과 정기준의 논리 대결로 풀어낸다.

정기준은 한글을 백성에게 주는 것이 일종의 왕이 해야 될 책임의 방기라고 몰아 부친다. 즉 한글 하나 주고 이제는 백성들끼리 모든 걸 책임지며 살라는 얘기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생겨나는 백성의 저마다의 욕망은 앞으로의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 것이라 위협한다. 하지만 세종은 그것이 왜 지옥이냐고 되묻는다. 이것은 소통에 대한 책임에 관한 담론이다. 소통체계에는 책임 또한 따른다는 것. 우리가 흔히 인터넷 소통체계의 명과 암을 말할 때 늘 나오는 그 담론들을 몇 백 년 전 세종의 이야기를 통해 보게 된다는 건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흥미로운 건 이 ‘역병 같은 글자’의 유포 과정이다. 물론 국가가 기관을 통해 백성들에게 전파시키는 ‘반포’를 세종이 준비하고 있지만, 그것보다 소이가 직접 백성들 속으로 들어가 입에서 입으로 전파시키는 유포가 훨씬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점이다. 소이는 백성들에게 친숙한 부적을 통해, 또 아이들의 노래를 통해 한글을 전파시킨다. 이것은 확실히 지금 현재 SNS시대가 갖고 온 새로운 소통체계에 대한 알레고리다.

어렸을 적 한 번쯤은 읽어봤을 위인전 속의 세종 이야기가 21세기의 현대인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건 바로 이 사극을 통해 과거가 아닌 현재가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세종과 소이, 강채윤이 죽음을 불사하고라도 한글 전파를 위해 온 몸을 던지는 그 모습을 응원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그것이 보여주는 소통에 대한 염원을 현대인들도 똑같이 느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뿌리 깊은 나무’는 그렇게 세종의 한글창제와 반포의 이야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의 간극을 넘어 조선조의 백성과 현재의 대중들을 소통시키고 있다.


한글창제의 의미 되살린, '뿌리'의 가치

'뿌리깊은나무'(사진출처:SBS)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 이도(한석규)는 내금위장인 무휼(조진웅)에게 묻는다. "무술로 따진다면 내 언변은 어느 정도 실력이 되느냐?" 그러자 무휼은 "조선 제일... 아니 천하 제일검이십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비유는 칼보다 강하고 파괴적일 수 있는 글이 가진 힘을 잘 보여준다. 세종은 자신의 논리라는 검으로 글자를 만드는 것에 반대하는 이들을 추풍낙엽처럼 쓸어버린다.

물론 '뿌리 깊은 나무'에 무(武)의 대결이 주는 흥미로움이 없는 건 아니다. 출상술을 쓰는 이방지(우현)와 무휼이 조선제일검의 자리를 놓고 부딪치는 대결이 그렇고, 강채윤(장혁)과 윤평(이수혁)의 쫓고 쫓기는 대결이 그렇다. 하지만 더 흥미로운 건 문(文)의 대결이다. 한글을 만들고 반포하려는 세종과, 그 후폭풍을 감지하고 이를 결사적으로 막으려는 밀본 정기준(윤제문)의 대결.

집현전을 폐지하고서라도 한글을 반포하려는 세종은 한글이 가진 힘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글자를 알면 밥이 나오냐, 양반이 되는 것이냐"고 묻는 강채윤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글자를 알면 백성도 힘이 생긴다. 밥이 나오지는 않지만 밥을 더 많이 만드는 법을 알게 될 것이고 양반이 되지는 않지만 양반들에게 그렇게 힘없이 당하지만은 않는다." 이것은 지식이 권력이던 시대에 글을 독점하던 양반들에게 한글 반포가 공포 그 자체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장원급제를 한 반촌 노비 서용에 분개한 어린 유생 박세명이 그를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건이 발생한다. 글이라는 것이 사람 목숨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힘을 갖고 있다는 반증이다. 가리온으로 위장한 정기준은 강채윤에게 이렇게 말한다. "글자만이 오로지 힘인 분들이니 저에게는 검안이고 겸사복 나리께서는 칼이 아니겠습니까요. 가리온이 가리온인 이유는 검안을 잘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요. 저에겐 그것밖에 없습죠. 저 양반네들은 더 하지 않겠습니까요."

글자를 독점한다는 것은 사실 엄청난 권력을 의미한다. 서양의 종교개혁에서 중요한 것이 라틴어가 아닌 자국의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과 쿠텐베르크의 인쇄술이다. 이로써 특정인들만이 독점할 수 있었던 종교적 지식이 일반인들에게도 전파되면서 개혁이 이뤄졌다는 얘기다. 그만큼 글의 힘은 칼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내기도 한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태종 이방원(백윤식)이 칼로서 권력을 휘어잡으려고 했다면, 세종 이도는 글로써 독점된 권력을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 "너만의 조선이란 무엇이냐"는 태종의 질문에 세종은 결국 답변을 준 셈이다.

지금껏 많은 사극들이 있었지만, 이처럼 문(文)의 힘과 문(文)의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다루는 사극은 없었다. 물론 전쟁과 정치, 혹은 인물의 성장, 장르화된 사극 속에서도 말이 갖는 힘은 그 어떤 액션이나 스펙터클보다 강하게 시청자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뿌리 깊은 나무'처럼 철학적인 깊이를 가지면서도, 그것을 단지 사변이 아닌 팽팽한 대결구도로 그려내는 사극은 일찍이 없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는 이 한글이 가진 가치를 발견하는 일은 이 사극의 또 다른 재미이자 의미다. 무(武)보다 센 것이 문(文)이라는 그 말이 실감나는 사극, 바로 '뿌리 깊은 나무'다.


'뿌리', 팩션의 진가를 드러내다

'뿌리깊은 나무'(사진출처:SBS)

그들은 잠들지 못한다. 3경5점. 지금으로 치면 자정을 넘긴 시각에 그들은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누군가를 쫓기 위해 또 누군가를 걱정하고 도움을 주기 위해 잠을 자지 못한다. '뿌리 깊은 나무'의 인물들은 잠들지 못해 망가져가는 몸 따위에는 안중에도 없다. 잠드는 것이, 그래서 악몽 같은 과거의 그 한 순간이 꿈 자락에라도 슬쩍 찾아드는 것이 더 큰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잠들지 못하는 건 과거 그들에게 있었던 사건이 남긴 트라우마 때문이다.

똘복 강채윤(장혁)은 기구하게 죽음을 맞게 된 아비에 대한 복수 때문에 잠 못 이룬다. 태종 이방원(백윤식) 때의 사건이지만 그는 그 자식인 세종 이도(한석규)에게 그 원한을 풀려 한다. 소이(신세경)는 자신의 말 한 마디 때문에 똘복의 아비가 죽게 되었다는 사실에 잠 못 이룬다. 충격으로 스스로 말문을 막아버린 그녀는 똘복에게 사죄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글을 몰라서 벌어진 그 사건 때문에 세종이 하고 있는 한글 창제에 헌신한다.

한편 세종이 잠 못 드는 건 이 두 사람 때문이다. 아버지 태종 밑에서 뭐 하나 할 수 없는 무기력함에 빠져 있을 때, 자신이 처음으로 살린 백성 똘복을 위해, 또 자신 때문에 말을 못하게 된 소이의 입을 트이게 하기 위해 그는 잠을 자지 않고 한글 창제에 온몸을 던진다. 심지어 유학자로서는 할 수 없는 시신 해부까지 하는 그는 그만큼 필사적이다. 자신 때문에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벙어리가 되는 상황을 더 이상은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뿌리 깊은 나무'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같은 거대한 업적을 다루면서도 남 일이 아닌 내 일 같은 사적인 사건처럼 팽팽한 긴장감을 잃지 않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 사극은 세종이 한글을 창제하는 그 동기를 그저 막연히 '백성을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는다. 세종 이도에게 확고한 동기부여를 하고 있는 똘복과 소이라는 두 캐릭터를 세워둠으로써 극은 더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게 된다.

물론 이 가상의 두 인물, 똘복과 소이는 이 사극에서 백성을 표상하는 캐릭터들이다. 똘복은 세종이 처음으로 살린 백성이고 또한 세종이 한글의 최종검수를 맡길 인물이다. 즉 세종은 백성을 위한 자신의 이 행위를 통해 똘복의 원망이 소통으로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사극은 궁극적으로 말하면 세종의 한글 창제를 통해 똘복으로 대변되는 백성과의 소통을 이루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소이는 말을 못하게 되었다는 그 설정만으로도 문맹인 백성을 구체적으로 지칭하는 인물이고, 따라서 한글 창제에 있어서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녀가 말을 하게 되는 순간은 아마도 한글이 반포되어 백성들의 말문이 열리는 그 때가 될 것이다.

한글 창제라는 역사 속의 글들이 눈앞에 꿈틀대며 살아 움직이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캐릭터들로 인해 구체화된 의미 덕분이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들의 욕망과 소망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밤은 그 자체로 보는 이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그것은 이 사극의 내적인 동력이면서 동시에 그 자체로 주제가 된다. '뿌리 깊은 나무'라는 조금은 복잡한 이야기가 흥미진진한 극의 구조를 잘 따라가면서도 지리멸렬해지지 않는 건, 캐릭터에 녹아있는 주제의식 덕분이다. 세종의 한글창제 이야기가 이토록 가슴을 치게 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우리가 이렇게 일상적으로 쓰고 있는 이 글 속에 담긴 절절한 마음이라니.

팩트(역사)에 픽션(이야기)이 붙여져 만들어진 팩션은 그저 재미를 위한 설정만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를 다시 불러들여 작금의 대중들에게 어떤 해석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똘복과 소이라는 가상인물은 그저 재미로 세워진 인물들이 아니다. 그들은 백성을 표상하는 인물들이고, 세종의 동기를 좀 더 확연히 들여다보게 만들어주는 인물들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그런 점에서 팩션의 진가를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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