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 토토가3’, HOT가 소년으로 팬들은 소녀로

“1주일 뒤 팬들은 소녀로 돌아가고, H.O.T. 멤버들은 소년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HOT의 막내 재원이 툭 던진 이 말은, 아마도 MBC 예능 <무한도전> ‘토토가3’ 특집으로 HOT 완전체가 무대에 올랐을 때 그 장면을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한 말이 아닐까. 이건 한 마디로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 같은 여행일 것이다. 무려 17년을 기다려온 팬들이라면 더더욱.

이미 2015년부터 재결합이 타진되어 왔지만 쉽지 않았던 HOT 완전체의 무대. 그걸 성사시킨 건 다름 아닌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마음은 있지만 나서기는 쉽지 않은 재결합이 아닌가. 하지만 이미 ‘토토가’ 특집을 두 차례 해왔던 그 경험이 있고, 신뢰가 있기 때문에 HOT도 쉽지 않은 마음을 열고 즐겁게 한 무대에 설 수 있었을 게다. 

오랜 만에 여의도 MBC 공개홀에서 한 명씩 HOT 멤버들이 모이고, 오랜만의 모임이라 낯설어하다가 차츰 말문이 터지고, 노래방 미션을 할 때 기억이 가물가물하던 춤과 랩과 노래가 되살아나는 그 일련의 과정들은 마치 우리네 기억 저편에 소중하게 보관해뒀던 젊은 날의 한 때를 다시금 되살리는 시간처럼 보였다. HOT는 물론 팬들에게는 그들의 청춘 그 자체처럼 다가올 수 있을 게다. 아니 굳이 팬이 아니라도 그 노래를 젊은 날 들었던 분들이라면 누구나.

‘토토가3’ 특집은 1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너무 멀리 각자의 길을 간 이들이 다시 만나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그것만으로도 감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감미로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강타와 스웨그 넘치는 노래와 랩 그리고 유머감각을 보이는 문희준, 혼자 안무를 틀려도 남달리 열심히 노력하고 무엇보다 완전체가 모였다는 것만으르도 눈시울이 붉어진 토니, 아직도 춤 실력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빠지지 않는 우혁과, 어딘지 허당기 가득하지만 귀여운 모습에 웃음이 터지게 만드는 재원까지. 이들과 오랜 만에 노래와 춤과 이야기로 나누는 소통이라니.

그리고 그 무대를 완성시킨 건 다름 아닌 팬들이었다. 방청신청을 한 팬들에게 HOT 멤버들이 직접 전화를 걸어 당첨소식을 알리는 장면에서 팬들은 저마다 그 감격을 전해 오히려 HOT 멤버들을 울컥하게 만들었다.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라는 팬의 말 한 마디에 더 이상 말을 더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마음이 절절히 느껴졌다.

아마도 그 때는 HOT 팬으로서 소녀였던 그 분들은 이제 저마다 자기 위치로 돌아간 어른들이 되었을 게다. 그래서 각자의 일상 속에서 그 나이만큼의 삶을 살아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화통화만으로도 그들은 어느 새 17년의 세월을 뛰어넘고 있었다. 그 때 “오빠”하고 외치던 그 목소리는 여전히 떨리고 앳되게 들렸다. 

이건 <무한도전> ‘토토가’ 특집이 가진 감동의 실체가 아닐 수 없다. 긴 세월이 흘러도 무대 하나로 시간을 훌쩍 되돌려 그 젊은 날의 한 때로 돌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 당대의 스타와 팬들이 지금 다시 소통하는 거라는 사실은 이 특집이 가진 뭉클함의 실체다. 물론 다시 꾸려진 무대에서 HOT와 팬들이 함께 노래를 부르는 그 순간이 이 감동의 절정을 보여줄 것이지만. 그들이 소년으로 돌아오자 팬들은 소녀로 돌아가는 그 순간.(사진:MBC)

'옥자', 감동적인 서사를 위해 봉준호가 심어놓은 상징들

(본문 중 영화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영화를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봉준호 감독의 새 영화 <옥자>는 단순명쾌한 영화다. 도축될 위기에 처한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슈퍼돼지 옥자를 미자(안서현)가 구하는 이야기. 하지만 이 단순한 마치 동화 같은 이야기에 봉준호 감독은 무수히 많은 상징들을 넣어 그 울림을 극대화했다. 영화는 단순하지만 영화 속 인물들(슈퍼돼지 옥자를 포함해)이 처하는 상황과 그 상황에서 그들이 보여주는 선택과 행동은 그래서 곱씹어보면 꽤 많은 의미들로 읽혀진다. 

사진출처:영화<옥자>

산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가던 옥자와 미자가 초반 보여주는 벼랑 끝에서의 생존 장면은 그저 대상이 아닌 가족으로서의 둘의 관계를 곧바로 드러내고 후에 이어질 옥자 구출작전에 아무런 고민도 없이 뛰어드는 미자의 행동을 너무나 쉽게 이해시킨다. 영화 속에서 미자는 마치 자연 그대로를 캐릭터화한 것처럼 고민하고 생각하기보다는 행동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영화가 끝나고 나도 미자가 달리고 또 달리는 그 장면이 강렬하게 뇌리에 남아 있는 건 그래서다. 

옥자를 끌고 간 미란도 서울사무소를 찾아간 미자가, 투명해 저 앞에 안내원이 보이지만 단단해 결코 뚫고 들어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창을 향해 돌진하는 장면도 대단히 인상적이면서 상징적이다. 그건 앞뒤 재지 않고 목적을 향해 달려가는 미자의 직진 캐릭터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자본으로 구축된 그 회사의 말끔한 세계가 결코 이 작은 소녀에 의해 부서질 것 같지 않지만 그녀가 만든 충돌의 울림으로 인해 의외로 깨져버린다는 걸 그 장면은 드러낸다. 그건 아마도 이 영화가 자본의 세계에서 우리가 어떻게 인간다움을 잃지 않고 저들과 싸워나갈 것인가에 대한 단초를 담아낸 것일 게다. 

결국 미자는 옥자를 구출하려는 그 행위를 바로 성공시키지는 못했지만, 그것이 언론에 노출되게 함으로써 ‘울림’을 만들어낸다. 옥자 같은 슈퍼돼지가 유전자조작을 통해 만들어진 것에 대한 불편함을 미자 같은 농민들에 의해 친환경적으로 길러졌다는 것을 통해 상쇄시키려던 글로벌 기업 미란도의 CEO 루시(틸다 스윈튼)는 미자에 의해 만들어진 이 ‘울림’을 다시 덮기 위해 그녀와 옥자의 감동적인 상봉식을 계획한다. 

하지만 그런 포장 역시 동물해방전선(ALF)에 의해 끔찍한 고기공장의 실체가 드러나면서 실패로 돌아가자 루시가 이끌던 미란도는 그녀의 쌍둥이 언니인 낸시 손으로 넘어간다. 루시가 그나마 친환경적 이미지 같은 거짓 홍보를 통해서나마 이 고기산업을 이해시키려 했다면, 낸시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자본주의적 판단만을 내린다. 가격을 낮추면 결국 소비하게 될 것이라고. 이것은 아마도 노골화된 자본주의의 민낯을 고발하는 대목일 것이다.

공장은 마치 수용소의 홀로코스트를 떠올리게 할 정도로 끔찍하고 슬프다. 공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슈퍼돼지들의 물결 속에서 돼지들은 생명을 잃은 채 고기로 분해되어 포장된다. 그런데 똑같은 위기에 처한 옥자를 미자가 구해내는 방식이 의미심장하다. 보다 액션을 통해 구출작전이 벌어질 것처럼 여겨졌지만, 의외로 간단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옥자를 사기 위해 모았지만 살 수 없게 된 걸 알고 대신 산 금돼지를 옥자의 가격으로 지불하는 것. 아마도 루시는 거부했을 이 제안을 철저히 자본주의 논리에 입각해 결정하는 낸시는 받아들인다. 금돼지를 쥔 그녀에게 미자는 고객이다. 돈과 생명은 그렇게 교환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은 마지막 엔딩에 들어가 있다. 옥자를 구해나오는 미자의 발걸음이 철조망 저 편으로 가득 채워져 공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슈퍼돼지들을 바라보며 한없이 무거워질 때, 가족으로 보이는 슈퍼돼지 부부가 새끼를 철조망 바깥으로 밀어내는 장면이다. 마치 아이를 부탁한다는 듯 얼굴로 마음을 전하는 그 슈퍼돼지 부부를 뒤로 두고 새끼는 옥자의 입 속에 숨겨져 그 홀로코스트를 빠져나온다. 

이 영화에서 주목해야 될 이미지는 ‘입’이다. 고기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유전자조작으로 탄생한 슈퍼돼지가 스테이크로 나와 그것을 시식하는 자리에서 사람들은 고기를 먹고 “최고”라고 말한다. 그들에게 생명에 대한 불편함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고기가 한 때는 말을 알아듣는 생명이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사람은 고기를 먹어치우지만, 옥자는 그 입에 새끼를 숨겨 생명을 구한다. 사람들은 공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렇게 생산된 고기를 듣지 않는 대가로 맛있는 식사를 한다. 그들에게 생명은 ‘함께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대상일 뿐. 반면 미자는 집으로 돌아와 옥자와 할아버지와 함께 소박한 식사를 한다. 그것은 우리 식의 정서로 ‘식구’의 의미가 들어가 있다. 

옥자의 귀에 대고 미자는 무언가 귓속말을 한다.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옥자에게 했는지는 알 수 없고, 또 그리 중요한 것도 아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그렇게 이야기를 건네는 존재로서 생명을 대하는 모습이니까. 유전자 조작으로 탄생한 돼지의 이야기지만, 이토록 감동적인 서사가 가능한 건 그 단순명쾌한 이야기 안에 봉준호 감독이 곳곳에 심어놓은 상징들 덕분이다.

'로건', 17년을 함께 한 슈퍼히어로의 쓸쓸한 뒷모습

휴 잭맨에게 17년을 함께 한 <엑스맨> 시리즈의 고별작이어서였을까. 아니면 울버린이라는 어찌 보면 <엑스맨>의 정서적 바탕이 되는 캐릭터의 최후를 담은 작품이어서였을까. <로건>은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로서의 피와 살점이 튀는 강렬한 액션을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내 쓸쓸함과 처연함, 그리고 급기야는 먹먹함에 울컥하는 감정까지를 불러일으킨다. 

사진출처:영화<로건>

사실 <엑스맨>의 캐릭터들이 가진 핵심이 이 놀라운 초능력과 함께 그것이 축복이 아닌 저주이기도 한 캐릭터들의 희비극이다. 그들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놀라운 초능력을 가졌지만 바로 그 다르다는 점 때문에 배척받고 위협받는다. 인간을 위해 싸우면서도 인간에 의해 배척받는 존재들. 그들이 <엑스맨>이라는 캐릭터들의 기저에 흐르는 어떤 쓸쓸한 정서의 정체다. 

그 중에서도 울버린 로건만큼 기구한 한 평생을 살아가는 슈퍼히어로도 없다. 그는 부모도 사랑하는 여인도 모두 죽음을 맞이했다. 그래서 극도로 그 누군가와의 관계를 맺는 일을 피하려 한다. <로건>에서도 그는 리무진을 모는 운전기사로 일하며 이제 나이 들어 자기조절이 잘 되지 않아 심지어 타인들에게 고통을 줄 위험성을 가진 프로페서X(패트릭 스튜어트)를 보필하며 살아간다. 물론 그 자신도 늙어 자가 치유되는 힐링팩터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그는 죽어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살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자신과 똑같은 능력과 운명을 가진 소녀 로라(다프네 킨)가 나타나고 그녀를 쫓는 정체불명이 집단들과 대결하게 된다. 

그러니 이 <로건>은 단순히 슈퍼히어로들의 놀라운 힘과 능력을 스펙터클로 보여주는 그런 영화가 아니다. 나이든 로건과 90세에 가까운 나이로 죽음에 임박한 프로페서X 그리고 너무나 작디작은 소녀. 이들은 겉으로만 보면 슈퍼히어로라기보다는 ‘사회적 약자’들을 모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 실체는 심지어 짐승처럼 보이는 힘을 숨기고 있는 것이지만.

역시 로건의 액션은 강렬하다. 마치 한 마리 야수처럼 날카로운 발톱을 긋는 것만으로도 적들은 사지절단이 된 채 날아가 버린다. 프로페서X 역시 조절이 되지 않지만 걸어다니는 시한폭탄이라고 할 만큼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반전 액션을 보여주는 인물은 바로 로라다. 이 작디작은 소녀는 통제되지 않는 강력한 살인무기로서의 액션을 소름끼치도록 완벽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영화가 추구하고 보여주려는 건 그런 액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셰인>의 마지막 장면에서 느껴지는 히어로의 쓸쓸한 뒷모습 같은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부극 <셰인>의 마지막 장면에서 악당들을 다 해치운 셰인은 꼬마 아이에게 사람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며 각자 자기 길을 가는 것이라고 말한 뒤 황야를 향해 떠나간다. 셰인이 꿈꾼 것도 어쩌면 소박하고 평범한 가족과 함께 지내는 보통의 삶이었을 것이다. 로건이 보여주듯 결코 다른 존재인 슈퍼히어로는 가질 수 없는 보통의 삶.

<로건>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퀀스는 그래서 로건과 프로페서X 그리고 로라가 어느 평범한 가정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이야기다. 그 단 하룻밤을 보낸 후 프로페서X는 자신의 일생 중 가장 좋은 시간을 보냈다고 말한다. 심지어 지구를 구하기도 했던 그 엄청난 능력을 가진 존재들이 결국 꿈꾼 것이 소박한 보통의 삶이었다는 건 <로건>이 주는 메시지이자 이 영화의 정조이기도 하다. 

여러모로 서부극 <셰인>을 오마주한 이 영화는 그래서 슈퍼히어로가 등장하는 액션물이면서 그들이 꿈꾸는 평범한 가족의 삶이 유사가족이라는 형태로 슬쩍 드러나는 드라마적 요소들까지 갖고 있다. 할아버지 프로페서X와 아버지 로건 그리고 딸 로라가 함께 걸어가는 그 여정이 강렬하면서도 먹먹해지는 이유다.

가수보다 소녀 이미지로만 소비되는 걸 그룹

 

JTBC의 새 예능 프로그램 <잘 먹는 소녀들>에 대한 이승한 칼럼니스트가 쓴 이게 여성 아이돌에게 방송국이 할 짓인가라는 냉엄한 비판에 대해 대중들은 결국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들을 보였다. 이 프로그램은 최근 대중문화에서 도드라져 보이는 두 가지 문제가 동시에 겹쳐져 부정적인 시너지를 극대화하고 있었다. 이른바 먹방걸 그룹 방송이 그것이다.

 

'잘 먹는 소녀들(사진출처:JTBC)'

먹방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기 이전부터 음식 프로그램들은 이미 푸드 포르노의 양상들을 그 안에 내포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과거 <결정! 맛대맛>이나 <찾아라! 맛있는 TV> 같은 식욕자극 프로그램들은 먹방이 트렌드가 되기 훨씬 이전인 2006년에도 이미 푸드 포르노의 징후들을 보여준 바 있다. 그나마 <6시 내 고향>류의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던 음식 소개가 시장을 살린다거나 농촌을 살린다는 취지를 내세워 수위를 조절했다면, 당시 식욕자극 프로그램들에서는 점점 노골화되는 방송의 선정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잘 먹는 소녀들>은 먹방 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이러한 푸드 포르노적인 성격에 걸 그룹 소녀들을 수많은 시선들 속에 세워 두었다는 점에서 더 노골화된 먹방의 선정성을 드러냈다. 걸쭉한 음식이 소녀들의 입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클로즈업하고 슬로우 모션으로 자세히 보여주는 장면들은 만일 그것이 식욕과 성욕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담은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면 기막힌 컷으로 여겨졌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건 그런 영화가 아니다. 실제로 먹방이라는 허울 아래 소녀까지 등장시켜 푸드 포르노를 극대화한 장면일 뿐이었다.

 

그것은 먹방이 본태적으로 갖고 있는 선정성은 물론이고, 최근 걸 그룹들이 방송에서 어떻게 선정적으로 소비되고 있는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이미 이런 기형적으로 되어가는 걸 그룹 소비방식이 주는 불편함은 도처에서 그 징후를 드러낸 바 있다. 여름철만 되면 쏟아져 나오는 걸 그룹들의 섹시 경쟁은 이제는 식상해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하의 실종이나 꿀벅지베이글이니 하는 입에 담기도 불편한 표현들이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방송에서 통용되는 용어처럼 되어버렸고, 이러한 섹시 이미지에 더해 오빠애교로 대변되는 귀여운 이미지까지 걸 그룹들은 동시에 수용해야하는 입장에 놓이게 됐다.

 

<프로듀스101>은 걸 그룹들이 어째서 노래만으로 승부할 수 없는가를 우리 눈으로 확인하게 해주었다. 화면을 가득 채운 채 피라미드형 삼각대형 무대에 올라가 군무를 추며 픽미!”를 외치는 그들의 절박함을 방송은 온전히 활용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호통치고 면박을 주고 경쟁에서의 탈락을 통해 눈물을 흘리게 만들고 경쟁하면서도 같은 위치에 서 있는 그 아픔들을 보듬는 선의까지 방송을 통해 소비되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 안에서 노래와 춤 같은 음악 자체는 그다지 주목되지 않았다. <슈퍼스타K><K팝스타>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거기 출연한 이들의 음악에 집중하게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방향이다. 대신 방송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소녀들의 이야기에 더 집중되었다. 누가 누구를 도와줬고, 누구는 자신만 살기 위한 이기심을 드러냈다가 질타를 받기도 했다. 이것이 본래 오디션 형식을 갖고 있는 방송 프로그램의 생리일 수 있지만, 특이하게도 이 소녀들은 음악 자체보다 이미지로 더 많이 소비되는 양상을 보였다.

 

이것은 어쩌면 경쟁의 소산일 수 있었다. 즉 경쟁적으로 걸 그룹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또 그네들의 음악이라는 것이 확실한 변별력을 갖기보다는 너무 비슷비슷해 이른바 섹시와 큐티 사이의 이미지를 반복하는 걸 그룹 노래라는 틀로 뭉뚱그려지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어떻게 하면 음악 이외의 방법으로 자신들을 드러낼 것인가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지점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 결국은 방송이다. 이제 방송에 나가게 된다면 무엇이든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토크쇼에서 뜬금없이 춤을 춰달라는 요구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는 자리에서 민망할 수 있는 춤을 춰야 하고, 당당한 자신의 직능으로서의 가수가 아니라 누군가를 위로해줘야 하는 그런 존재로서 이미지 메이킹 되어야 한다. 심지어 그들이 누군가의 선물로 소비되는 방송 속에서 걸 그룹이 갖고 있는 가수로서의 존재감은 희석되어 버린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 그들의 절박함을 미끼로 섹시와 큐티와 정숙까지를 요구받으며 끊임없이 기형적으로 소비되는 소녀 이미지.

 

과연 지금 우리에게 걸 그룹은 가수가 맞을까. 물론 음원차트 속에서 걸 그룹은 노래로 소비되지만 그 노래조차도 음률과 가사의 묘미라기보다는 섹시와 큐티와 정숙이 뒤범벅된 소녀 이미지들인 경우가 적지 않다. 모든 걸 그룹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치열해진 청춘들의 전선들처럼 이들 걸 그룹들은 가수로서의 본질 그 이상의 이미지를 소비하면서까지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문제는 이것을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즐기며 내재화하는 일이 가져올 악영향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지금의 우리네 사회가 갖고 있는 많은 문제들이 거의 다 내포되어 있다. 자신을 지킬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해진 경쟁사회와, 사적인 것들마저 무대 위에 올라 소비되는 투명사회, 우리에게 너무도 깊게 내재화되어 그것이 무슨 잘못인지도 모른 채 행해지는 기형적인 성 소비들 같은 문제들이 거기에는 뒤얽혀있다. 무엇보다 이런 방송들을 통해 어차피 세상은 다 저렇다고 체념하고 포기하며 나아가 순응하게 되는 청춘들의 냉소적인 시선은 어쩌면 가장 끔찍한 우리 사회의 디스토피아가 아닐까. 걸 그룹은 어째서 온전히 가수로서 설 수 없게 된 걸까. 청춘들이 그 나이에 걸맞게 도전하고 즐기며 살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귀향>의 소녀들과 <동주>의 청년들

 

영화는 이미 자본의 경제가 된 지 오래다. 제작비가 얼마나 들었는가 하는 점은 그 영화의 성패와 무관하지 않다. 극장에 얼마나 걸어주는가가 흥행의 관건이 되는 상황이다. 그러니 배급사가 투자사인 우리네 상황에서 투자규모가 큰 영화는 그만큼 극장에서 더 오래 많은 관을 내주게 된다. 그러니 작은 규모의 영화들은 설 자리 자체가 없다. 자본에 따라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영화 산업에 극명하게 나타나는 건 그래서다.

 


사진출처: 영화 <귀향>

그런데 여기 이런 자본 시스템을 거스른 두 영화가 있다. <귀향><동주>. <귀향>은 국민 75270명이 크라우드펀딩으로 제작비 12억을 모아 겨우 제작될 수 있었다. 물론 손숙 같은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재능기부도 빼놓을 수 없다. 보통 배급사에서 관심을 갖는 제작비 규모가 최소 20억 수준(홍보 마케팅비 포함)이라고 한다. 그러니 거기에 한참 못 미치는 규모라고 할 수 있다. 애초에 개봉관이 50개 정도로 얘기가 됐던 건 그래서다.

 

하지만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에 힘입어 개봉일 이 영화는 500여개가 넘는 개봉관을 확보했고 그 후로도 계속 개봉관 수를 늘려나갔다. 지난 7일 현재 267만 관객을 돌파했다. 작은 영화의 반란인 셈이다. 산업적인 논리로서는 도무지 벌어지기 힘든 일이지만 이 영화에 대한 공감대가 이런 기적 같은 일을 만들어냈다. ‘위안부문제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그 공감대가 기억하기 위해 영화를 보는 것으로 이어졌던 것.

 

윤동주 시인의 청춘을 다룬 <동주>는 고작 5억 원의 제작비로 만들어졌다. 사실 이 정도의 제작비로 이런 완성도 높은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기획부터 연출까지 유기적으로 움직여 빈틈없이 제작된 결과다. 5억 원의 규모이니 역시 많은 상영관을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개봉 당일 개봉관 수는 370개 남짓. 하지만 이 영화 역시 입소문이 나면서 개봉관수도 점점 늘어갔다. 지난 224일에는 467개 스크린으로 확대됐다. 관객 수는 90만 명을 훌쩍 넘어 이제 곧 100만 관객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

 

<귀향><동주>의 이 같은 선전에는 20대 청춘들의 열화와 같은 호응과 공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왜 지금의 청춘들이 일제강점기라는 한참 이전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들에 호응한 걸까. 그 키워드는 결국 청춘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귀향>에서 무고하게 지옥으로 끌려간 소녀들과 <동주>에서 부끄러운 세상 앞에 부끄럽지 않게 살다가 산화한 청춘들이 지금의 혹독한 취업 현실 속에서 힘겹게 버텨내고 있는 청춘들을 공감하게 했다는 것이다. <귀향><동주>를 보며 흘리는 청춘들의 눈물에는 그래서 당대의 소녀들과 청춘들의 아픈 역사는 물론이고 지금 현재의 현실에 부대끼는 자신들의 아픔도 들어 있다.

 

너무나 작은 규모라서 설 자리조차 찾기 힘든 <귀향><동주> 같은 작은 영화들은 그래서 지금의 청춘들을 그대로 닮아 있다. 모든 게 태생부터 결정되고 진짜 내용이 아니라 스펙에 의해 모든 미래의 성패까지 달리는 현실. 그것이 지금의 청춘들이 처한 현실이 아닌가. 그래서 <귀향><동주>에 대한 청춘들의 호응은 당연해 보인다. 그 영화가 처한 현실 또한 청춘들이 처한 현실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귀향><동주>의 이례적인 성공은 그래서 반가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기적이라 불리는 현실에 대한 씁쓸함이 남는다. 왜 이런 일들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 되지 못할까. 왜 작은 영화들은, 또 청춘들은 거대한 영화들과 기득권자들에 의해 항상 희생되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때로는 이런 현실도 긍정적으로 바꿔낼 수 있다는 희망도 이 두 영화의 사례가 보여주었다. 결국 많은 대중들의 관심과 지지만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소중한 본보기를 보여준 것이라는 얘기다

<귀향> 어째서 모두가 봐야하는 영화일까

 

단 한 장면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하다. 구덩이에 아무렇지도 않게 버려진 소녀들. 흙투성이의 맨발과 아직 채 마르지도 않은 것만 같은 눈물 자욱. 다른 곳에서 봤다면 그 색색의 한복이 그토록 고울 수 있었을 그녀들이 거기 그렇게 방치되어 있다. 그녀들의 몸은 차갑게 식어버렸지만 직전에 남긴 그녀들의 마지막 목소리들이 귀에 쟁쟁 울리는 듯하다. 그 구덩이는 <귀향>이라는 영화가 애써 재현해내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아예 없었던 것이 될 뻔했을 게다. 그것이 또 끔찍하고 먹먹하다.

 


사진출처:영화<귀향>

어찌 보면 그리 대단히 돈이 많이 들 것 같지도 않은 이 영화가 빛을 보기까지 무려 14년이 흘렀다는 사실은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 앳된 나이에 그 먼 곳까지 끌려가 지옥을 살다 겨우겨우 살아 돌아온 분들은 아마 더 오랜 세월을 기다렸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그렇게 살아 돌아온 영희(손숙)가 몸은 돌아왔어도 마음은 진정으로 귀향하지 못했다고 하는 그 말 속에 그녀의 고통스런 한 평생이 느껴진다. 그 곳에서 여전히 고향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 소녀들을 어이할까. 그것은 영희가 가진 부채감이고 또한 그녀가 우리에게도 전하는 부채감이기도 하다.

 

사실 상업적인 선택이 일반화되어버린 요즘 같은 시대에 꼭 봐야 하는 영화라는 문구는 낯설게 다가온다. 하지만 <귀향>은 꼭 봐야 하는 영화다. 그것은 우리가 봄으로써 기억에 담아질 수 있고, 그 하나하나의 기억들을 통해 사실이 왜곡되거나 묻혀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대중오락의 성격을 띤지 오래지만 사실 그 이전에는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분명했다. <귀향>은 결코 지워져서는 안될 기록이다. 우리의 기억과 가슴에 새겨둬야 할 기록.

 

물론 그렇다고 <귀향>이 다큐적인 기록에 머무는 영화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귀향>은 극영화로서의 완성도를 갖추고 있는 영화다. 씻김굿의 형태를 띠고 있는 이 영화는 무녀를 등장시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그 돌아오지 못한 소녀들을 위한 위령제를 올리고 있다. 실상은 훨씬 더 끔찍한 지옥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끌려갔던 소녀들을 극도로 배려하려는 자세를 보인다. 영화는 그래서 상징적인 장면들이 많다. 하지만 그 상징은 위안부의 실상을 이미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그 눈빛과 더럽혀진 발 얼굴에 가득한 멍 자국만으로도 커다란 아픔으로 다가온다.

 

이처럼 과거의 소녀와 현재의 소녀가 무녀를 통해 만나는 과정은 어쩌면 없는 일인 양 단절되어 버린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려는 안간힘처럼 보인다. 처음 위안부문제가 제기되고(당대에는 정신대라고 불렀지만) 그걸 피해자들이 신고하는 일조차 미친 짓으로 치부되던 시기가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이런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려는 피해자 할머니들의 노력은 그것이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누구나 다 알아야할 실상이라는 걸 알게 해주었다.

 

이 영화를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다. 이 영화는 더 많은 사람들이 봐야 한다. 그리고 그 아픔 역사를 기억에 새기고 잊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그 분들이 돌아올 수 있다. 그 구덩이에서 아직까지도 돌아오지 못한 소녀들이. 그리고 몸은 돌아왔어도 여전히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할머니들이.

제시카의 소녀시대 탈퇴가 말해주는 것

 

다가오는 공식 스케줄을 기대하며 준비하고 있었으나, 회사와 8명으로부터 오늘 부로 저는 더 이상 소녀시대의 멤버가 아니다라는 통보를 받았다. 저는 소녀시대 활동을 우선시하며 적극적으로 전념하고 있는데, 정당치 않은 이유로 이런 통보를 받아서 매우 당혹스럽다.”

 

'소녀시대(사진출처:SM엔터테인먼트)'

소녀시대 제시카가 SNS에 남긴 짤막한 글은 대중들에게는 너무나 갑작스런 일로 다가왔다. 그만큼 의혹도 클 수밖에 없었다. 탈퇴냐 방출이냐에 대한 궁금증이 증폭되었고, 그녀의 연인으로 알려진 타일러 권이라는 이름이 인터넷 검색어 순위에 하루 종일 랭크되었다.

 

이유에 대한 분석이 쏟아져 나왔다. 제시카가 타일러 권과 사업적으로도 얽혀 있어 소녀시대의 단체 스케줄과 마찰을 일으켰다는 얘기도 나왔고, 그런 사업이 소녀시대 전체의 이미지를 도용하는 듯한 뉘앙스에 대한 불편함도 제기되었다. 제시카의 글에는 일방적인 통보의 뉘앙스가 들어 있지만, 이전부터 제시카의 단독 행보에 쌓인 문제가 터진 것이라고 SM측은 밝혔다.

 

탈퇴인지 방출인지, 그게 어느 것이든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앞으로도 당분간 계속 나올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제시카 탈퇴 혹은 방출 같은 사안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소녀시대는 그 이름에 걸맞게 우리네 걸 그룹의 대명사처럼 된 존재들이다. ‘소녀들이 가진 그 풋풋함과 활력 하나만으로도 이미 대중들의 마음에 들어왔던 그녀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소녀라는 아이콘은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소녀시대라는 걸 그룹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된 것도 사실이다. 그녀들은 어느새 성장했고 누군가를 만나 연애를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나이가 됐다.

 

윤아, 수영, 티파니에 이어 태연 그리고 이제는 제시카까지. 소녀시대가 연애시대가 됐다는 건 이제 부정적인 의미보다는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게 됐다. 그 나이에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건 그 자체가 오히려 이상한 일일 것이다.

 

게다가 이번 제시카의 일로 또 하나 상기되는 건 이제 이 소녀들이 사업을 꿈꿀 만큼 훌쩍 자라나 있다는 점이다. 걸 그룹으로서 음악 활동에만 집중하던 소녀시대가 이제는 제각각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녀들이 이제 더 이상 우리가 그간 생각해왔던 그 어린 소녀가 아니라는 걸 의미한다.

 

물론 8인의 소녀시대는 앞으로도 계속 활동할 것이다. 제시카 역시 단독으로 충분히 음악활동을 할 수 있는 가수다. 팬들 역시 변함없는 애정을 보여줄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 소녀시대는 영원한 소녀시대니까.

 

하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녀들이 점점 여인으로 성장해가고 그 성장한 만큼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줄 것이란 점에서 소녀시대는 이미 한 시대를 떠나보내고 있다고 여겨진다. 제시카의 탈퇴 혹은 방출은 이제 이 소녀시대라는 한 틀로서만 보이던 멤버들이 각각 한 사람씩의 존재로 분리되어가는 현 과정을 드러낸다. 성장과 독립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물론 팬들로서는 아픈 일이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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