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라면 응당.. '택시운전사'가 광주를 담는 방식
망자의 맨발은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건넨다. 왜 그토록 더럽혀지도록 그 맨발이 수고를 다했을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맨발인가. 살아생전에 쉬지 않고 어딘가로 데려다주곤 했으나 이제 겨우 그 끝에 이르러 영원한 휴식에 들어간 고마움과 미안함 같은 감정들이 그 맨발에 묻어난다. 그래서 그 망자의 맨발에 신발을 굳이 신겨주고픈 마음은 사람이라면 응당 그러고픈 인지상정일 것이다.

사진출처:영화<택시운전사>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만섭(송강호)은 독일의 외신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취만)를 손님으로 태우고 광주로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많은 맨발들을 맞이하게 될 줄 전혀 몰랐다. 만섭은 자신의 영업을 위해서라도 대학생들이 데모 좀 그만 했으면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진 소시민이었으니까. 그에게 ‘독재타도’ 같은 대학생들의 구호가 남다른 의미로 있었을 리 없다. 그저 자신의 유일한 가족 딸을 위해 쉬는 날도 거르고 택시를 운전하는 게 그의 삶의 유일한 목적이었을 테니.

신발 좀 구겨 신지 말라고 하는 만섭에게 딸이 신발이 작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느껴지는, 두 사람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의 무게는 ‘80년 광주’라는 어마어마한 비극 앞에서도 결코 소소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저마다 신고 달려야 하는 신발의 무게는 있는 법이고,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폄하될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 딸에게 새 신발을 사주기 위해 벌어야 할 돈 몇 푼에 광주로 들어가게 된 만섭은 도저히 방외인으로서의 입장을 고수할 수 없는 참담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자기 일처럼 다친 이들을 실어 나르는 택시기사들과 그 택시에 돈도 받지 않고 기름을 채워주는 주유소 사장, 그리고 사람이 모여드는 곳에서 주먹밥을 나눠주며 우리는 결코 타인이 아니라는 걸 몸소 실천하는 이름 모를 젊은이들 속에서, 그들이 총칼에 쓰러지는 걸 결코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게 된 것.

영화 <택시운전사>는 만섭의 시선에 비친 신발의 이미지를 곳곳에 배치해놓는다. 병원 가득 메운 부상자들과 사상자들의 맨발이 그의 눈에 들어오고, 거리에서 군인들의 군홧발에 질질 끌려가다 벗겨지는 신발이 들어온다. 하지만 그는 또한 딸의 그 꺾어진 신발을 떠올린다. 딸에게는 유일하게 자신이 신발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 곳의 더 이상 타자가 아닌 이들의 고통 앞에서 만섭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고, 그를 선선히 보내주는 광주 택시 기사와 피터의 마음이다.

하지만 애써 외면하며 빠져나오는 그 길 위에서 만섭은 누군가 신고 뛰어다녔을 무수한 신발들이 마구 벗겨져 널려 있는 것을 본다. 그 아픈 장면들은 그가 겨우 광주를 빠져나와 어느 시장통의 신발가게를 찾아갈 때, 마치 허공을 날아가는 듯 공중에 전시된 가벼운 신발의 이미지와 대비된다. 그는 결국 새 신발을 사서 딸에게 돌아가려 하지만, 못내 그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 아마도 광주의 거리 위에서 봤던 그 버려진 신발들이 그의 눈에 밟혔을 것이다.

<택시운전사>가 광주를 보는 방식은 이처럼 대단한 영웅적 행보와는 거리가 멀다. 대신 그 극한의 비극적 상황 속에서 광주 사람들이 오히려 얼마나 인간적인 따뜻함을 보여줬는가를 대비시킨다. 그리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응당 해야만 하는 일로서 만섭의 변화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이것이 그저 실존인물인 피터의 이야기를 담기보다 지금껏 그 행적을 찾을 수 없는 한 택시운전사를 주인공으로 세운 이유다.

이 영화가 의도적으로 그려내는 신발의 이미지는 그래서 어찌 보면 택시운전사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결국 어딘가로 누군가를 이동시켜주는 매체가 아닌가. 길은 어디든 열려있고 그 길 위로 누구나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있는 건 좋은 세상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세상의 문제다. 하지만 1980년 광주는 그 당연한 길이 막혀 있었고 누구도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없었다. 많은 신발들은 그렇게 막히고 꺾여 거리에서 스러져 갔다. 그 길을 뚫고 들어가는 만섭의 이야기가 결코 소소할 수 없는 건 그 상식이 무너진 세상 때문이다.

혹자는 <택시운전사>를 좌파 영화 운운하지만, 이 영화는 결코 그런 이념적인 걸 내세우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사람이라면 응당 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는 ‘상식의 문제’로서 광주를 이야기하는 영화다. 택시도 신발도 어디든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나아가 그것은 진실이 소통하는 방식이라는 것.


하늘의 별이 된 김영애, 마지막까지 보여준 연기투혼

“묵은 빚은 돈으로 갚는 거 아이다. 눈으로 발로 갚는 기다.” 아마도 영화 <변호인>을 봤던 분들이라면 고 김영애가 연기한 국밥집 아줌마의 이 대사를 기억할 것이다. 국밥 한 그릇 먹을 돈이 없어 도망쳤던 송 변호사(송강호)가 성공해 돌아와 그 때의 빚을 갚겠다며 돈을 내밀자 아줌마가 했던 그 대사. 

사진출처:영화<변호인>

이제 그렇게 찰진 대사를 더 이상은 들을 수 없게 됐다. 김영애는 지난 9일 췌장암으로 별세했다. 고인이 된 그녀의 소식이 특히 놀랍게 다가왔던 건, 최근까지도 우리의 기억 속에 선연히 남은 작품들 때문이다. 유작이 된 KBS <월계수 양복점>에서 우리는 전혀 그녀가 투병 중이라는 사실을 느끼지 못했다. 뒤늦게 알려진 것이지만 끝까지 진통제 투혼을 보이며 펼친 연기는 그래서 우리에게 김영애가 얼마나 치열한 배우였는가를 각인시켰다. 

김영애만큼 극과 극의 이미지를 연기한 배우가 있을까. <로얄패밀리>나 <황진이> 같은 작품에서 그토록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를 보여줬지만, <변호인>은 물론이고 <닥터스>나 <판도라>, <카트> 같은 작품에서는 서민들의 정이 느껴지는 따뜻한 연기를 보여줬다. 이제는 고인이 되었다는 소회 때문일까. 그래도 특히 기억이 남는 건 한 그릇의 국밥 같은 따뜻함이 묻어나는 서민적인 모습이다. 

<변호인>이나 <닥터스> 그리고 <판도라> 같은 작품을 보면 김영애라는 배우가 그 작품 전체에 어떤 정서를 만들어냈는지가 분명하게 느껴진다. 물론 주인공의 역할은 아니지만 작품의 어떤 색깔을 부여하는 역할. 이를 테면 대사 한 마디로도 느껴지는 <변호인>에서 국밥집 아줌마의 그 따뜻함이 주는 서민적 정서는 속물이었던 송 변호사가 인권변호사가 되는 계기가 된다. 

<닥터스>에서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유혜정(박신혜)이 엇나가지 않고 잘 자라 당당한 의사가 되는 그 배경에는 역시 강말순 할머니(김영애)라는 존재가 자리했다. “밥 먹는데 무슨 자격이 필요해? 숨 달려 있으면 먹으면 되는 거지.” 거기서도 이 할머니는 유혜정에게 따뜻한 밥을 차려준다. <판도라>에서 사지로 아들을 보내며 오열하는 모습이나, <카트>에서 차츰 노동자들과 연대해가는 모습 역시 서민으로서의 아픔과 따뜻함 같은 걸로 기억된다. 

즉 원로배우로서 작품의 뒤편에 늘 서 있었지만 그 존재가 만들어내는 온기나 때로는 차가움마저 작품 전체의 중요한 정서를 담는 역할을 해줬다는 점이다. 이 점은 아마도 같이 작업을 해온 배우들로서는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고인이 되었다는 소식에 함께 작업했던 제작진들이나 배우들이 진심어린 애도의 뜻을 표하는 건 그래서다. 

김영애가 췌장암을 발견한 건 이미 2012년 <해를 품은 달>을 촬영하던 도중이었다고 한다. 힘겨운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끝까지 책임을 다한 후에야 비로소 9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유작이 된 <월계수 양복점>을 촬영하면서도 고인은 아픈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고 대사 하나하나를 잊는 법이 없었다고 했다. 작품 속에서 그 작품의 정서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고인은 아마도 배우들에게 하나의 귀감이 되는 모습으로 떠났다. 하지만 그 모습은 대중들에게 어떤 열정과 따뜻함으로 기억될 것이다. <변호인>에서 보여줬던 영원히 식지 않을 국밥집의 온기처럼.

비극을 대하는 <밀정>과 <고산자>의 다른 선택

 

600만 관객과 80만 관객. 추석을 보낸 영화 <밀정><고산자 대동여지도(이하 고산자)>의 성적은 극명히 나뉜다. 이 두 영화 비교대상이 되는 건 같은 날 개봉한 우리네 영화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두 영화 모두 역사를 다뤘고, 그 역사 속 주인공들의 삶이 비극적이었으며, 그 역사는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일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사진출처 : 영화 <고산자>

사실 요즘 같은 시기에 비극을 다룬다는 건 흥행에 있어서는 쉬운 선택이 아니다. <밀정>은 조선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의열단의 이야기를 담았다. 물론 주인공은 조선인 출신의 일본 경찰인 이정출(송강호)이지만 그가 의열단의 인물들을 겪으며 갖게 되는 심적 변화가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결국 해야 되는 일을 하기 위해 숭고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의열단원들의 면면들은 슬픔과 분노를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픈 이야기가 지금껏 청산되지 않은 친일파의 문제까지를 건드리고 있다는 점에서 <밀정>은 호평 받았다.

 

영화적으로만 보면 <밀정>은 그 비극을 우아하고 장중한 느낌의 연출을 통해 관객들을 몰입하게 만들었다. 깊은 슬픔이 밑바탕에 깔려 있지만 영화는 장르적인 긴장감을 충분히 유발하고 특히 이정출이라는 인물의 심리적 변화에 대한 공감대가 유지된다는 점에서 끝까지 영화에 빨려들 수 있었다. 일제 앞에 산화한 분들의 슬픔을 고스란히 아픈 기억으로 담아냄으로써 깊은 여운을 남긴 작품이 되었다.

 

한편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삶을 다룬 <고산자>는 개봉 전부터 식민사관논란이 벌어졌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대원군에 대한 묘사와, 김정호와 딸의 옥살이 이야기가 1934년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어독본에 실린 김정호의 옥사설을 따른 것이 아니냐는 추측 때문이다. 조선어독본에는 대원군에 의해 김정호와 딸이 옥사했다고 나오는데, 이것은 일제가 식민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대원군을 매도함으로써 조선의 무능함을 드러내려 날조된 기록이라는 것.

 

하지만 영화는 끝까지 보면 알 수 있듯이 식민사관의 내용과는 다르게 전개된다. 결국 <고산자>가 다루는 이야기는 길 위에는 신분도 없고 귀천도 없다. 다만 길을 가는 자만이 있을 뿐이라는 한 마디로 압축된다. 지도 한 장이 민초들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했던 시절, 온전히 걷고 또 걸어 정확한 지도를 만들어 민초들에게 배포하려 했던 한 위대한 평민의 이야기. 기록 자체가 A4 한 장 분량도 되지 않는 김정호의 역사적 기록을 영화는 허구를 덧대 지도에 담긴 그의 의지를 그려내려 했다. 아마도 영화 끝에 보여지는 대동여지도 목판 원본의 세세하게 새겨진 길들과 산과 강 그리고 산맥의 정교함에서 느껴지는 고산자의 마음이 역사적 기록보다 더 많은 걸 얘기해줬을 것이다.

 

식민사관논란을 겪었지만 <고산자>는 영화 속에 오히려 일본에 대한 불편한 심경들을 담아놓았다. 영화 속에서 김정호가 독도에 그토록 집착하는 건 그래서다. 영화는 그것을 어떻게든 정확하게 지도에 담기 위해 여러 차례 배를 타고 사경을 넘어서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독도를 보려 했다는 이야기를 집어넣었다.

 

이야기의 비극성으로 보면 <밀정>만큼 <고산자>도 못지않다. 김정호의 삶 자체가 비극의 연속이었다. 잘못된 지도 때문에 산길에서 횡사한 아버지와 평생을 지도를 만들기 위해 일상적인 삶은 거의 포기했던 그가 아닌가. 그래서 <고산자>는 영화적 재미를 위해 코미디를 넣었다고 한다. 차승원과 김인권이 마치 만담하듯 벌이는 코미디들은 그래서 비극을 바라보는 관객들에게 잠시 동안의 숨통을 틔워준다.

 

현실이 너무 어려워서인지 지금의 관객들은 비극을 좀체 보려하지 않는다. 그래서 <밀정><고산자>도 사실 쉬운 작품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이 비극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밀정><고산자>는 사뭇 달랐다. <고산자>는 물론 후반부에 이르러 그 비극적 삶이 강조되지만 전반적으로 코미디 설정을 많이 활용했고, 반면 <밀정>은 온전히 비극을 유지하면서 그것을 장르적인 재미와 미려한 연출을 통해 끝까지 긴장감을 만들어냈다. 되돌아보면 비극을 비켜가지 않고 정면 돌파한 <밀정>의 선택이 훨씬 괜찮은 결과를 가져온 셈이다.

<밀정>, 송강호가 왜 최고의 배우인가를 증명하다

 

김지운 감독의 <밀정>에서 송강호라는 배우가 차지하고 있는 지분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연기하는 이정출이라는 인물이 처한 상황, 즉 일제에 붙어 경무부장으로 독립운동가들을 검거하는데 앞장서는 인물이면서 의열단을 와해시키기 위해 밀정으로 투입되면서 겪게 되는 심적 변화가 이 영화의 거의 모든 메시지나 재미를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영화<밀정>

이정출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의열단장 정채산(이병헌)을 잡기 위해 상하이로 보내진 밀정이면서, 동시에 의열단원의 핵심요원으로 이정출에게 접근해 경성으로 폭탄을 실어 나르는 일에 그의 도움을 얻어내려는 김우진(공유) 사이에 서 있는 경계인이다. 사실 이 일제강점기를 다루는 많은 관점들 중에서 경계인이라는 관점은 중요하다.

 

지금의 시선으로야 분명히 친일파와 독립운동가를 명쾌히 구분해낼 수 있지만 당시로서는 그들조차 어느 쪽이라 애매모호한 입장에 서 있는 인물들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독립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닌가가 모호한 상황에 처한 당대의 인물들은 그래서 자신의 정체성조차 모호하게 느끼는 그림자같은 경계인의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 영화의 첫 시퀀스인 이정출이 일본군에 쫓기다 궁지에 몰린 의열단원인 김장옥(박희순)과 마주하는 장면은 이 인물이 가진 갈등을 잘 드러낸다. 이정출과 김장옥은 과거 친구였지만 이렇게 일제와 의열단원이라는 새로운 경계로 만나게 된다. 총에 맞아 잘려진 발가락을 보며 이정출은 생각보다 너무 가볍다고 말한다. 거기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음 한 구석에 존재할 안타까움이나 슬픔 같은 것들이 살짝 묻어난다.

 

이정출이라는 경계인을 주인공으로 세우기 때문에 영화는 우리가 <암살> 같은 작품에서 봤던 그런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나 장르적 쾌감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이 영화의 애초 목적이 그런 장르적 즐거움이 아니라 이정출이라는 경계인의 복잡한 내면을 들여다보는데 있기 때문이다. 그 내면은 때론 어두웠다가 때론 밝아지고 때론 한없이 아파했다가 분노하며 폭발하기도 한다. 분명한 적와 아군의 편을 나누고 그 대결을 그렸다면 포착하기 힘든 영화적 재미가 바로 이 이정출이라는 인물로부터 나오게 된다.

 

사실 역사책을 통해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의열단같은 조직의 활동을 우리는 좀체 실감하지 못한다. 그들이 항일투쟁을 해왔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밀정>은 이정출이라는 조금은 경계에 서 있기 때문에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입장에 가까운 인물을 통해 그 의열단이라는 존재의 실체에 접근한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에게 요구되는 삶은 복종 아니면 죽음이라는 총독부 경무국장의 진술처럼 복종을 거부한 의열단원들은 사실상 죽음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처연하기 그지없다. 고통스러운 고문을 당하고 그럼에도 배신하지 않기 위해 혀를 물거나 아예 곡기를 끊어버리는 그들의 표정은 의연하면서도 쓸쓸하다. 다만 실패하더라도 그 실패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그 막연한 강령이 그들을 그토록 끝까지 나가게 하는 힘이 되어줄 뿐이다.

 

경계에 선 이정출은 죽음을 딛고도 또 앞으로 나가는 그들을 보면서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그 감정은 고스란히 지금의 관객들과 맞닿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일제강점기라는 상황에 카타르시스란 애초부터 기대할 것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 복잡하게 바뀌어가는 경계인의 모습을 영화는 유려한 영상과 긴장감 넘치는 장면들 속에서 포착해낸다.

 

송강호는 역시 최고의 배우답게 그 미세한 감정의 변화들을 온전히 관객들에게 설득시킨다. 속물적인 욕망들을 지워내지 못한 지독한 현실주의자의 면면을 담아내면서도 동시에 그의 앞에서 스러져 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약해지는 휴머니스트의 면모 또한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그의 섬세하게 표현되는 인물의 내면의 변화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움을 주는 영화다. 물론 그를 통해 느끼게 되는 건 결국 의열단원들의 경외로운 삶에 대해 절로 숙연해지는 마음이지만.

<사도><동주>, 이준익 감독이 그린 청춘의 자화상

 

무엇보다 이 영화가 갖고 있는 의미는 송몽규와 같은, 우리가 알지 못하고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 시대에 살았던 아름다운 청년들처럼 지금 이 시대의 송몽규들에게 많은 위로와 응원을 주고 싶은 마음으로 <동주>가 자리매김했으면 좋겠다.”

 

'백상예술대상(사진출처:JTBC)'

52회 백상 예술대상 영화 부문 대상을 차지한 이준익 감독은 수상 소감에서 이렇게 밝혔다. 올해는 <암살><베테랑>이 쌍 천만 관객을 동원한 여름 시장과 <내부자들>까지 겹쳐 그 어느 때보다 경쟁이 치열했던 한 해였다. 백상은 그 중 <사도><동주>를 만든 이준익 감독의 손을 들어주었다.

 

<사도>6백만 관객을 돌파하며 선전했고, <동주> 역시 저예산 영화에도 불구하고 116만 관객을 동원한 작품. 하지만 두 작품 다 관객 수로는 여타의 영화들에 밀렸던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준익 감독이 백상의 주인이 된 까닭은 두 작품 다 상업적으로도 또 작품으로도 의미 있는 성취를 거뒀기 때문이다.

 

두 작품은 모두 청춘에 대한 위로를 담고 있었다. <사도>는 우리네 역사의 가장 큰 비극적 사건 중 하나로 꼽히는 영조(송강호)가 사도세자(유아인)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한 사안을 소재로 삼고 있다. 여러 차례 사극을 통해 방영되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은 여기에 현재의 청춘들과 어른들의 관계를 투영시켰다.

 

아버지가 아들을 죽게 만드는 이야기는 그래서 시대를 뛰어넘어 지금의 힘겨운 현실에 처해 있는 청춘들이 공감 받을 수 있는 이야기로 재탄생되었다. 갑갑한 관 같은 궁궐에 갇혀 산 송장 취급받으며 살아가는 사도세자의 울분과 광기는, 아버지와 아들이 부조리한 시스템 속에서 서로 대립하며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현 세태에 대한 깊은 여운을 남기는 대목이었다.

 

한편 저예산 영화로 만들어진 <동주>는 일제강점기로 돌아가 윤동주(강하늘)와 송몽규(박정민)라는 청춘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바라던 청년들은 시대의 아픔 앞에 쓰러졌고 그러면서도 꿋꿋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갔다.

 

사실 이 작은 흑백영화가 이토록 큰 반향을 일으킬 수 있었던 건 기적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이준익 감독이 이 영화 속에 담아낸 치열했던 청춘들의 이야기에서 지금의 청춘들 역시 깊은 공감을 드러냈다. 무엇보다 저예산 흑백영화가 거대자본의 상업영화들 속에서 이만큼 선전했다는 것은 마치 지금의 현실 속에서 소외된 청춘들의 목소리에 대중들이 귀 기울여줬다는 희망과 위로를 느끼게 해주었다.

 

이준익 감독은 <사도><동주>를 통해 지금의 청춘들을 지지했다. 그리고 백상은 그런 이준익 감독의 지지에 화답했다. 두 영화는 말한다. 그 때나 지금이나 청춘들은 치열하고, 치열한 만큼 아름답다고

<사도>에 이어 <육룡>에서도, 어른들과 맞서는 유아인의 청춘

 

욕심이요? 왜 제가 가진 꿈만 욕심이라고 하십니까? 왕이 된 것은 아바마마의 꿈이 아니었습니다. 의안대군 역시 꿈을 꾼 적이 없을 것이나 세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 그런 꿈을 꾸어왔습니다. 헌데 왜 제 꿈만 욕심입니까?” SBS <육룡이 나르샤>에서 이방원(유아인)은 세자가 되려는 욕심을 버리라는 아버지 이성계(천호진)에게 그렇게 울분을 토로한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역사적 사실만 두고 보면 이성계가 그 왕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또 정도전(김명민)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지 않고 조선을 건국해 모든 권력을 틀어쥔 채 새나라라는 자신의 꿈을 펼칠 수 있게 된 것도 모두 이방원이 정몽주(김의성)의 폭주를 막아서다. 이성계도 정도전도 정몽주를 끌어안기 위해 그들이 죽을 위기에 처하고 패업마저 수포로 돌아갈 상황에 이르렀을 때조차 그저 손을 놓고 있었다.

 

그 때 이방원만은 이념이 아니라 실행으로써 이 신조선의 꿈이 가능하다는 걸 간파하고는 정몽주를 선죽교 위에서 죽였다. 물론 그 행위를 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 기반 위에 새로운 조선을 세워놓고는 아들이자 제자이면서 사실상 새 나라를 세우는데 일등공신이랄 수 있는 이방원을 희생양으로 내모는 이성계와 정도전의 행위 또한 정당하다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모든 건 이 젊은 청춘의 행동으로 이뤄졌지만 어른들은 그를 희생해 실리와 명분 모두를 가져가려 한다. 이 얼마나 잔혹한 일인가.

 

조선 건국이라는 패업을 달성하는 과정을 그리는 <육룡이 나르샤>가 막상 그걸 이룬 후 어떻게 이 육룡의 사분오열을 그려낼 것인가는 우려와 기대가 섞이는 대목이었다. 즉 육룡이 한 데 힘을 모아 구악을 밀어내고 꿈을 이뤄가는 그 과정은 가슴 설레는 이야기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후에 벌어지는 권력 투쟁의 이야기는 육룡 간의 대결 구도를 만들면서 자칫 구심점을 잃을 위험성도 있었다. 물론 조선 건국까지는 육룡이 저 마다 등가의 위치를 확보해왔다면 이제부터는 그 여섯 용들 중 이야기의 흐름을 위해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육룡이 나르샤>가 선택한 건 이방원이다.

 

여러 차례 여말 선초의 이야기들이 사극으로 다뤄지면서 그 주인공으로 이성계를 선택하기도 하고 또 정도전을 선택하기도 했다. 물론 이방원을 선택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특히 <육룡이 나르샤>가 젊은 이방원을 선택한 건 왜일까. 거기에는 다분히 이 사극이 현재와 조우하는 면들이 드러난다. 결국 이 사극은 고려라는 구악을 물리치고 조선을 세우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 중심에 청춘으로서의 이방원이 서 있다.

 

그는 아버지 이성계, 스승 정도전이라는 어른들과 함께 패업을 꿈꾸고 실행해오지만 그 결과로 돌아온 건 그 욕심을 접으라는 얘기뿐이다. 심지어 그들은 이방원을 죽을 자리가 될 지도 모르는 명나라의 사신으로 보내버린다. 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그려진 이야기의 구도는 다분히 현재의 우리네 현실과 무관할 수 없다. 지금 우리 시대에 희생양은 다름 아닌 청춘들이 아닌가.

 

이미 영화 <사도>에서 유아인은 아버지 영조(송강호)와 맞서다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이하는 비운의 사도세자 역할을 한 바 있다. 그 사도세자가 꿈꾸던 건 단지 떳떳하게살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그 좌절된 청춘의 이야기를 유아인은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을 통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방원은 그 꿈을 포기하지 않고 밀어붙여 실행에 옮긴 인물이다.

 

이방원이 아버지 이성계를 향해 던지는 그 질문, “헌데 왜 제 꿈만 욕심이냐고 묻는 그 질문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어째서 이 부조리한 시스템은 지금의 청춘들의 꿈을 번번이 좌절시키고, 심지어 그것이 욕심이라고까지 느끼게 만드는 것일까. 과연 이래도 되는 걸까. 이래서 그 사회의 더 좋은 미래는 가능한 일일까.

<삼시세끼> 차승원과 유해진, 같이 가는 좋은 친구

 

배우로서도 나이를 참 잘 먹고 있는 배우야.” 영화 <관상>의 송강호가 마지막 바다 장면에서 보여준 회한과 복합적인 감정이 담긴 연기에 대해 차승원이 불쑥 이야기를 꺼내자 유해진이 그렇게 말한다. 모두가 공감할 이야기지만 차승원은 송강호가 연기나 뭐나 다 묵직하다고 표현한다.

 


'삼시세끼(사진출처:tvN)'

아마도 <삼시세끼> 어촌편2를 다시 찍기 위해 들어온 만재도에 비 내리는 저녁의 처연함이 한 몫을 했을 게다. 빗속에서 전쟁처럼 한 끼를 때운 두 사람은 비 내리는 바깥을 바라보며 술 한 잔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 분위기라면 조금은 쑥스러워 꺼내놓지 않았던 속내의 이야기도 풀풀 풀려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갑자기 차승원은 송강호의 이야기에서 유해진의 이야기로 방향을 돌린다. “그런데 자기도 그래. 자기 연기도 마찬가지야. 자기도 잘 나이 먹는 거야. 아니 진짜 빈 소리가 아니라. 잘 나이 들고 있어. 나이를 잘 들어야 돼.” 어쩌면 차승원은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 영화 <관상>과 송강호 이야기까지 에둘러 얘기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잘 나이 먹는다는 것, “잘 늙는다는 건 무슨 뜻일까. 그것이 굉장히 힘든 일이라고 말하며 차승원은 그 이유를 줄줄이 얘기한다. “이게 굉장히 힘든 게 뭐냐 하면 하는 일도 분명해야 하고 경제적으로도 윤택해야 되고 사람들 하고 관계도 좋아야 되고 여러 가지 복합적으로 되어야 절충이 돼야 이게 사람들이 보기에도 멋있게 늙는구나 하는 거지. 하나만 핀트가 나가도..”

 

40대 중반을 넘겨 50으로 향하는 나이에 있는 중년들에게 이만큼 공감 가는 이야기도 없을 것이다. 40대 초반만 해도 늙는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깊게 생각하지는 않기 마련이다. 하지만 40대와 50대는 어감이 다르다. 이제 늙는 것그것도 잘 늙는 것에 대해 얘기할 나이다. 실로 차승원과 유해진이 얘기하는 것처럼 잘 늙는다는 건 참 힘든 일이다.

 

그런데 흔히들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는 나이대의 친구들이 늘 그렇듯이 차승원은 유해진의 삶을 격려한다. “아유 자기는 이대로만 해. 이대로만 하면 돼... 뭐가 걱정이야 이대로만 하면 그냥 잘... 살았다. 욕 안 먹고... 그리고 건강. 그럼... 건강만 잘...” 물론 잘 살았다는 것이 어떤 기준에 의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사람마다 잘 산 것에 대한 기준을 다 다를 테니까. 하지만 그래도 어떤 삶이든 그런 정도의 격려를 받을 자격은 누구나 있지 않을까.

 

연기 얘기에서 늙어가는 것에 대해 이야기 하다가 건강 이야기로 끝나는 이 레파토리는 어쩌면 많은 나이 들어가는 중년들이 친구들과 만나면 나누게 되는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술을 마시고 있지만 술을 줄이라고 얘기해주고 건강 걱정을 서로 해준다.

 

유해진에게 차승원이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그는 그다지 대단할 것도 없다는 투로 담담하게 같이 가는 좋은 친구.”라고 말한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어딘가로 가고 있다는 느낌. 그게 대단한 것처럼 여겨지진 않지만 어딘지 묵직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그것. 이것이 오래 함께 가는 친구가 아닐까.

 

그리고 그들은 잘 버텨낸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래도 잘 버텼어. 잘 버틴 거야 우리는 잘 버틴 거야..” 중년의 나이쯤 되다 보면 이제 삶이란 것이 굉장한 축제가 아니라 어찌 보면 하루하루를 잘 버텨낸 어떤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렇게 버티다 보니 중년이 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잘 늙어가려 노력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행복한 거라는 것. 그렇게 잘 늙어가고 있다고 말해주는 같이 가는 좋은 친구가 있으니



<사도>, 왜 하필 지금 사도세자의 이야기일까

 

아버지 영조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인 임오화변은 조선시대 최고의 비극으로 꼽힌다. 그래서일까. 사도세자를 소재로 한 사극들은 너무나 많다. MBC <조선왕조 오백년>은 물론이고 <이산>, 최근에는 <비밀의 문>에서도 사도세자가 다뤄졌다. 그러니 역사책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고 해도 이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사도>는 이 소재를 들고 나온 것일까.

 


사진출처:영화<사도>

물론 이 <사도>라는 영화를 읽는 독법은 다양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역사가 거의 광인으로 기록해놓은 사도세자에 대해 이토록 온정적인 시선으로 그럴 수밖에 없었던 마음을 영화로서 다시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나, 제 아무리 왕이라도 자식을 뒤주에 가둬 죽게 한 그 비정함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영조의 비애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다는 건 이 이야기가 지금의 현실에 어떤 상징적인 울림을 주고 있다는 심증을 갖게 한다.

 

영화가 사도세자(유아인) 스스로 짠 관 속에서 그가 나와 칼을 빼들고 아버지 영조(송강호)를 향해 가는 장면에서 시작한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이 사건을 접한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궁궐에 무덤을 세우고 그 안에 관을 짜고 누웠다는 것이 역모를 뜻하는 것이 아니냐고 추궁하자, 사도세자는 그것이 산송장 취급당하고 있는 자신의 처지를 말해줄 뿐 역모의 뜻은 결코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다. 사도세자는 영조의 대리청정을 맡으면서 자신의 뜻을 펼쳐보려 하지만 그 때마다 영조와 노론 세력의 반대에 부딪친다. 이미 영조가 보위에 오를 때부터 연결되어 있던 노론 세력을 떨쳐내지 못하고 어떤 합의를 해나가며 오히려 사도세자를 압박하는 영조 앞에서 그는 잔뜩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 영화에는 자주 떳떳하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사도세자는 아들인 정조 앞에서 과녁이 아닌 하늘을 향해 시위를 당기고는 허공으로 날아간 저 화살이 얼마나 떳떳하냐고 말한다. 정해진 과녁에 화살을 던지는 일에서 무슨 자유와 자율을 느낄 수 있을까. 그는 자유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뭐든 숨기고 음모를 꾸미듯 일을 처결하기보다는 당당하게 거침없이 펼쳐내는 정사와 삶을.

 

하지만 현실은 결코 녹록치 않다. 이미 구축된 영조의 시스템 속에서는 노론 세력의 입김을 무시할 수 없다. 영조 또한 이런 현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더더욱 사도세자를 강건하면서도 노련하게 세우고 싶었을 것이지만 그는 노련함이 결국은 타협이라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그는 구부러지기보다는 부러지는 쪽을 선택한다.

 

<사도>에서 이 떳떳함과 관의 이미지는 상당히 대립적인 의미를 갖는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져 죽을 때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는 플래시백으로 그의 궁에서의 삶을 보여주는데 그 삶이 뒤주 속의 삶과 다르지 않다. 무소불위의 힘을 가진 왕재가 궁 하나를 벗어나지 못하고 갇혀 살아가고 있다는 건 아이러니다. 그것은 단지 물리적인 구속만이 아니다. 사도세자는 스스로 산송장이라 표현했듯 자신이 원하는 뜻을 떳떳하게 펼쳐나가는 것조차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있다.

 

거의 폐쇄공포증을 일으킬 정도로 영화의 공간은 궁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궁 안에서 사도세자는 끊임없이 관에 들어가거나 뒤주에 들어가 있다. 그를 그렇게 만든 건 직접적으로는 아버지 영조의 어명이지만 사실은 왕과 신하 사이에 만들어진 독특한 시스템 때문이다. 영조는 스스로도 왕은 결정하는 자리가 아니라고 말한다. 또 왕으로서 할 수 없는 일들도 많다고 말한다. 그 역시 자기만의 관과 뒤주에 갇혀 있다.

 

사도세자의 비극이 지금 현재 특히 큰 울림을 만드는 건 그 모습이 현재 우리네 청춘들의 모습을 닮아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떳떳하고싶을 청춘들이지만 아버지들의 원죄가 구축해놓은 부조리한 시스템은 그들의 아들들을 저 마다의 뒤주에 가둬놓고 있지 않은가. 그들이 저 허공으로 떳떳하게 날아간 화살이 되지 못하고 좌절과 절망 속에 관 속으로 들어가고 때로는 관을 뛰쳐나와 광기를 드러내고 있는 현실은 너무나 저 사도세자가 처한 상황 그대로가 아닌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사도>라는 영화를 통해 보다가 문득 깊은 슬픔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은 어쩌면 거기서 우리네 청춘들의 좌절을 읽어냈기 때문일 수 있다. 물론 거기에는 또한 그런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물 또한 들어있다. ‘떳떳한삶을 산다는 건 왜 이리도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을까.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비틀어진 아버지와 아들의 비극적 관계를 만든 것일까



신동엽의 게이 연예인 언급이 돌 맞을 일인가

 

저는 심지어 연예인 중에서 어떤 여자가 결혼을 해요. 그런데 이 남자 게이에요. 근데 이 여자는 자기가 결혼할 남자가 게이라는 걸 몰라요. 게이 중에서 결혼한 남자들 굉장히 많거든요. 애도 낳고... 근데 이거를 얘기를 해줘야 되는 건지...”

 

'마녀사냥(사진출처:JTBC)'

<마녀사냥>그린라이트를 꺼줘라는 코너에서 신동엽은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결혼한 연예인이야기를 꺼냈다. 이 내용은 한 매체에 의해 신동엽 게이 숨기고 결혼한 연예인 홍석천과 나만 안다”’는 제목으로 기사화 됐다. 기사 제목도 그렇고 이 기사의 내용만을 들여다보면 마치 신동엽이 게이 연예인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의도적으로 꺼내놓은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한편 기사의 말미에 쓰여진 신동엽은 해당 남자 연예인 성 정체성에 관해 홍석천과 나만 알고 있다고 말했다는 내용은 오보다. 방송에는 아예 그런 내용 자체가 들어 있지 않다. “홍석천과 나만 알고 있다는 멘트는 홍석천씨랑 저만 (그린라이트를) 안 껐네요.”라는 말을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오보를 적시하고 그걸 제목으로 뽑아내자 기사는 마치 신동엽이 자극적인 멘트를 하기 위해 영리한 방식으로 폭로를 한 듯한 인상을 만들었다.

 

예상대로 기사 밑에 달려진 댓글들은 온통 신동엽에 대한 비난과 욕으로 가득 채워졌다. 댓글 속에는 신동엽이 이 멘트를 한 후 (아버지가 게이임을 밝혔던) 샘 해밍턴의 얼굴 표정이 어두워졌다는 전혀 방송 내용과 다른 글들도 덧보태졌다. 비난이 전혀 다른 사실들을 더하면서 심지어는 신동엽 자신이 그 연예인이 아니냐는 비상식적인 말까지 덧붙여졌다.

 

늘상 인터넷 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니 그러려니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전형적인 마녀사냥의 한 형태를 보여준다. <마녀사냥>에서 신동엽이 게이 연예인 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것을 폭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이 날 선배가 밝힌 남자친구의 외도를 어떻게 받아들일까하는 내용의 사연 때문이다. 즉 후배의 남자친구가 외도를 한 사실을 알고 있는 중간입장에서 이걸 밝히는 게 옳은지 아닌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비슷한 고민을 했던 자신의 경험을 꺼내놓았던 것뿐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오로지 게이 연예인이야기 폭로에만 초점이 맞춰진 기사는 앞뒤의 맥락을 뚝 잘라버림으로써 전혀 다른 뉘앙스로 다가오게 만들었다. 게다가 <마녀사냥>이라는 프로그램에서 게이 이야기가 그다지 특별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기사에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즉 거기에 홍석천이 이른바 게이 대표로 버젓이 출연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걸 말해준다. 신동엽이 게이 연예인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홍석천이 거기 앉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마녀사냥>이 다루는 성담론의 수위는 높다. 그래서 19금 딱지를 붙인 것이고 성인들을 위한 솔직한 남녀 간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기도 하다. 게이 이야기 또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것은 이 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개방적인 분위기를 반영한다. 이 날 게이 연예인 언급을 하면서 신동엽이 굳이 덧붙인 멘트 역시 성 소수자에 대한 그의 배려가 묻어난다. “그런데 그런 게 힘들죠. 진짜 그런 상황이 되면은... 게이분들의 장점이 굉장히 많거든요. 굉장히 따뜻하고 섬세하고 이렇게 잘 살 수 있는 것도 아닌가.”

 

물론 이 성에 있어 개방적인 프로그램에 대한 호불호와 취향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오보에 앞뒤 맥락을 끊고 자극적인 부분만을 끄집어내 이상한 뉘앙스를 덧붙인 기사는, 물론 그 기사 내용이 방송 내용을 그대로 붙인 것이라고 하더라고 그 편집 때문에 전혀 다르게 읽힐 수밖에 없다. 이제 사실왜곡만이 오보인 시대가 아니다. 사실을 달리 편집하면 오보가 되는 시대라는 얘기다.

 

물론 오보는 실수일 수 있다. 하지만 최근의 인터넷에 뜨는 기사들을 보면 이것이 실수인지 의도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다. 지난 올해의 영화상에서 이정재와 송강호의 인사를 이상한 방향으로 몰아 논란이 만들어지고 결국은 한국영화기자협회가 사과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진 것은 단적인 사례다.

 

의도인지 실수인지 알 수 없으나 그 결과와 파장은 적지 않다. 그리고 이것은 마녀사냥이 대단한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소소해 보이는(사실은 소소하지 않은) 사안들에서부터 만들어진다는 것을 말해준다. 흥미롭게도 이 프로그램의 제목이 <마녀사냥>이다. 물론 여기서 마녀란 마녀사냥의 마녀를 뒤집는 이야기다. 당당해진 마녀의 이야기랄까. 그러니 <마녀사냥>이 당하는 마녀사냥은 실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송강호, 그가 있어 가능했던 '변호인' 천 만

 

<변호인>이 천 만 관객을 넘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재로 했다는 것 때문에 개봉 전부터 근거 없는 비아냥과 평점 테러까지 받았던 영화. 그런 영화가 천 만 관객을 넘겼다는 것은 반전 중의 반전이다.

 

사진출처:영화'변호인'

무수한 분석이 나온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제 사건을 소재로 했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성향을 보이기보다는 보편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이념과 상관없이 누구나 볼 수 있는 영화로 만들었다는 점,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으로 내 편 없는 세상에 기꺼이 내 편이 되어준 서민들의 대변인을 그렸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빼놓을 수 없는 송강호, 김영애, 곽도원 심지어 임시완까지 보여준 놀라운 호연까지.

 

하지만 이 모든 분석들 중에서도 단연 설득력을 갖는 건 송강호라는 배우다. 그가 연기 잘한다는 것은 이미 공인된 사실이지만 이번 <변호인>을 통해 발견한 것은 그가 연기력 그 이상을 가진 배우라는 점이었다.

 

그는 늘 서민들의 옆 자리에 서 있던, 마치 피곤한 일상에 영화라는 잠시 간의 여행을 떠난 관객의 믿음직한 친구이자 동료이자 가이드 같은 배우였다. <넘버3>미친 존재감이라는 서민들의 가치를 끄집어냈고, 좋은 놈도 나쁜 놈도 아닌 (소외된 서민들로서는 이상한 놈이 될 수밖에 없는 세상에) 이상한 놈으로서 어딘지 악당 같은 삐딱함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이 가는 캐릭터를 만들어냈던 배우.

 

그가 <변호인>에서 연기한 송우석이라는 캐릭터에서는 그래서 영화 <밀양>의 종찬처럼 비극에 빠진 여주인공의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그녀를 비춰주던 ‘secret sunshine’ 같은 존재가 보이고, <설국열차>의 남궁민수처럼 잘못된 시스템의 옆구리에 폭탄을 터트림으로써 관성화 된 정신을 깨우는 존재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송강호의 가장 큰 장점은 그 거창할 수 있는 일들을 지극히 인간적인 일로 바꿔놓는다는 점이다. <변호인>의 송우석이 만약 시대적 소명을 전면에 내세우는 인물이었다면 아마도 천만 관객의 발길이 영화관을 찾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게 될 그런 보편적인 정서를, 내세우지 않고 자연스럽게 보여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것은 지금껏 송강호가 해왔던 특별한 연기의 세계다. 똑같은 역할이라도 그가 하면 다르게 보이는 건 그 때문이다. 그는 <우아한 세계>에서 조폭의 상스러움과 가장의 성스러움을 동시에 보여주었고, <괴물>에서 바보스러움과 가슴 찡함을 동시에 선사했으며, <박쥐>에서도 기괴함에 해학까지 보여주기도 했다.

 

즉 그는 역할의 균형을 잘 맞추는 배우라는 점이다. 그는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친 과장된 캐릭터라도 그 속에서 정 반대의 모습을 끄집어낼 줄 안다. 이것은 마치 관객이 그런 거짓말이 어딨어?’하고 물을 때 화답하듯 슬쩍 속내를 꺼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당신과 똑같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속물적인 속내를 슬쩍 끄집어냄으로써 관객을 안심시키는 그런 배우.

 

흥미로운 건 올 한 해 단 6개월 만에 무려 3천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이 괴물 같은 배우가 서 있는 위치다. 그는 이상하게도 주연으로 서 있으면서도 늘 우리 주변에 있는 인물로 각인되어 있다. 꼭대기가 아니라 늘 아래 서 있고, 중심이 아니라 주변에 머물러 있는, 그렇지만 그 곳에서 늘 따뜻한 볕을 보내주는 ‘secret sunshine’ 같은 존재. 이것은 송강호의 진정한 힘이면서, <변호인>이라는 영화가 신드롬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이 시대의 서민들이 바라는 인물상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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