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저씨가’ 던진 화두, 당신은 편안한가 괜찮은 사람인가

“편안함에 이르렀는가?” tvN 수목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오랜 만에 서울에서 다시 이지안(이지은)을 만난 박동훈(이선균)은 그렇게 물었다. 그건 마치 선문선답 같았고, 이 드라마가 질문하려 했던 화두 같았다. 많은 드라마들이 그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해피엔딩을 그려내듯, <나의 아저씨>도 그 절절함이 늘 어두운 밤거리와 골목길로 그려질 만큼 어두웠지만 그 끝은 ‘편안함’에 이르렀다. 

박동훈은 회사를 차려 대표가 됐고, 이지안은 장회장(신구)의 소개로 부산에서 취업한 회사에서 인정받아 다시 서울 본사로 오게 됐다. 박상훈(박호산)은 이지안의 할머니 봉애(손숙)의 장례식을 통해 자신이 하려던 ‘기똥찬’ 계획들을 실행할 수 있었고 별거했던 아내 조애련(정영주)과 다시 합치려 하고 있었고, 박기훈(송새벽)은 진짜로 유명해져 이제는 영화 <노팅힐>의 줄리아 로버츠 같은 배우가 된 최유라(나라)와 헤어졌지만 포기했던 영화 시나리오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도준영(김영민)과 윤상무(정재성)는 회사를 떠났고, 그 빈자리에 박상무(정해균)가 복귀했다. 정희(오나라)는 이지안과 상처를 나누고 또 출가한 겸덕(박해준)이 찾아와 꽃을 선물해주면서 그간 마음에 쌓였던 아픔들을 치유해나갔고, 박동훈의 아내 강윤희(이지아)는 유학하고 있는 아들에게 가 자신도 공부를 했고 그렇게 떨어져 지내며 부서질 뻔 했던 가족의 고리를 다시 붙여나갔다. 모든 것들이 말 그대로 ‘편안함’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러한 편안함은 과연 드라마가 엔딩에 이르러 늘상 하던 그 방식 때문에 그렇게 그려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사실 죽을 것처럼 아프던 상처들도 시간이 흐르고 지나다 보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사라지는 게 우리네 삶이기도 하다. 어쩌면 그 많은 욕망들이 스스로를 들볶아 상처를 더 긁게 만들고 그래서 가만 내버려두었다면 더 빨리 아물었을 상처가 계속 덧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회에 <나의 아저씨>가 봉애의 장례식을 담은 장면은 그래서 꽤 의미심장하고 인상적이다. 그것은 끝이지만 그 끝에서 사람들은 한 자리에 모여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삶을 기뻐한다. 우리네 장례식의 특징이지만 이 드라마에서도 조기축구회 아저씨들은 그 곳에서도 축구를 한다. 죽음은 완전한 ‘편안함’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니 아파할 일이 아니라, 다시 살아갈 일이다. 

장례식이라는 비극에 더해지는 희망 같은 걸 <나의 아저씨>는 그 엔딩에 담아 넣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해지는 건 그 끝을 대하는 ‘괜찮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우연히 지나쳤을 수도 있는 인연을 귀하게 여기고 모여 고인을 애도해주고 남은 이를 위로해주던 사람들. 그들을 스스로를 “그렇게 괜찮은 사람 아니야”라고 말하곤 했지만, 이지안이 박동훈에게 단호하게 말했듯, 그들은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엄청.

<나의 아저씨>는 굉장한 성공 혹은 굉장한 행복을 담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행한 이들을 담았고, 그 불행으로부터 ‘편안함’에 이르는 과정을 담았다. 아픈 그들에게 “그건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해주는 것. 겸덕 같은 출가한 인물이 등장해 구도하는 모습을 보여준 건 어쩌면 이 드라마가 담으려는 이야기가 바로 그런 삶의 자세이기 때문이었을 게다. 굉장한 성취를 하려 애쓰거나, 그것을 하지 못해 좌절하는 그런 것은 진짜가 아니다. 그것보다 ‘편안해지는 것’이 진정한 삶의 행복이라는 것. 

늘 어두운 밤거리와 골목길만을 주로 보여준 드라마지만, 그 어둠 때문에 오히려 더 돋보인 건 그 안에서 힘겨워하면서도 따뜻한 온기를 보여준 사람의 흔적들이었다. 어느 햇볕 좋은 밝은 대낮에 우연히 도심의 카페에서 다시 만나 미소를 나누는 이지안과 박동훈처럼, 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온 이들은 그렇게 서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떤 충분함을 느낀다. “편안함에 이르렀는가?” 이 드라마의 질문은 이제 우리들에게 던져진다. 당신은 편안한가. 편안해질 수 있을 만큼 괜찮은 사람인가. 아마도. 엄청.(사진:tvN)

‘나의 아저씨’가 그리는 지옥 속의 행복 찾기

“은행부행장이었다가 지금은 모텔에 수건 대고 계시고, 자동차연구소 소장이었다가 지금은 미꾸라지 수입하고 계시고, 제약회사 이사였다가 지금은 백수, 알지 형이랑 나는 청소. 야 좋겄다. 너는. 여기 네가 좋아하는 망가진 인간들이라.”

tvN 수목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망가진 게 좋다”며 쫓아다니는 최유라(나라)에게 박기훈(송새벽)은 그렇게 버럭 화를 냈다. 그러고 보면 정희네라는 선술집이 풍기는 분위기가 그랬다. 아저씨들이 몰려오는 그 집에서는 ‘망가짐’의 분위기가 넘쳐흘렀다. 한 때는 잘 나갔을 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한참을 망가져 엉뚱한 일을 하고 있는 그들. 술 마시는 걸로 전쟁을 하면 무적일 거라며 호기롭게 웃으며 술을 마시지만 그게 어딘가 짠하게 다가오는 그들이다. 

그러니 “망가진 게 좋다”는 말이 박기훈에게는 마치 ‘나보다 못한 인간이 있다’는 걸 그들을 통해 확인함으로써 좋다는 뜻으로 다가왔을 게다. 하지만 유라는 정색하며 그런 뜻이 아니라 자신은 거기 있는 모든 분들을 “존경한다”고 말한다. 

“인간은요 평생을 망가질까봐 두려워하며 살아요. 전 그랬던 거 같아요. 처음엔 감독님이 망해서 정말 좋았는데, 망한 감독님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그게 더 좋았어요. 망해도 괜찮은 거구나. 아무 것도 아니었구나. 망가져도 행복할 수 있구나. 안심이 됐어요. 이 동네도 망가진 거 같구 사람들도 다 망가진 거 같은데 전혀 불행해 보이지 않아요. 절대로. 그래서 좋아요. 날 안심시켜줘서.”

망가져서 힘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세상이 무너지는 건 아니라는 걸 확인하는 것으로 행복을 찾는 것. 이 ‘행복론’은 어쩌면 <나의 아저씨>가 그리려는 세계일 것이다. 드라마는 좀체 밝은 희망이나 행복을 쉽게 말하지 않는다. 그건 아저씨들만이 겪는 일이 아니다. 선술집에서 장사하고 그 곳에서 사는 정희는 모두가 집으로 돌아갈 때 돌아갈 집이 없이 괜스레 아저씨들과 선술집을 나선다. 집을 구했다고 거짓말을 하고 퇴근 기분을 내지만 그는 결국 빙 돌아서 다시 선술집으로 돌아온다. 돌아가려 해도 다시 일터로 돌아오는 삶이 그가 겪는 현실이다.

박동훈(이선균)은 아내가 자신의 후배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고는 분노하지만 정작 그가 하는 건 후배에게 아내와 조용히 헤어지라고 엄포를 놓는 일이다. 박동훈, 박기훈, 박상훈(박호산)의 엄마 변요순은 자식들이 세상에서 겪는 일들을 보며 가슴 아파한다. 살기 위해 청소일을 하는 것도 그런데 건물주에게 아들이 무릎까지 꿇고 사죄하는 모습을 본 이 엄마는 애써 활짝 웃으며 아들을 맞는다. 그 눈에는 아프게 흘러내리지도 못하는 눈물이 숨겨져 있다.

이지안(아이유)은 빚 독촉에 시달리면서 낮에는 회사에서 사무보조 아르바이트를 하고 밤에는 남들이 먹다 남긴 음식찌꺼기들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가 봉양해야 하는 할머니 봉애(손숙)는 돈이 없어 요양원에서 쫓겨나 하루 종일 그 어두운 방안에서 누워 자그마한 창으로 들어올 달을 보고 싶은 게 소망이다.

여기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 같이 망가져 있다. 그리고 지금도 망가져 간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들은 살아간다. 정희네 같은 술집에서 술 한 잔에 아픔을 털어내면서 오히려 웃는다. 박동훈이 말하듯 그들이 사는 곳은 지옥이다. 그렇지만 포기하진 않는다. 벌도 받다 보면 왜 받는지 알게 될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문득 이지안이 박동훈에게 묻는다. 자신을 왜 뽑았냐고. 박동훈은 이력서 특기란에 써놓은 ‘달리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무슨 특기가 ‘달리기’냐고. 그러자 이지안이 말한다. “달릴 때는 내가 없어져요. 근데 그게 진짜 나 같아요.” 박동훈과 아저씨들이 망가져가고 있는 사이, 이 청춘은 투명인간처럼 되어버렸다. 박동훈이 이지안에게 건배를 제안하며 “행복하자”고 한 마디 던지는 게 커다란 위안으로 다가오는 건 그래서다. 그리고 그건 이 드라마가 그려나가는 세계다. 지옥 속의 행복 찾기.(사진:tvN)

'아저씨' 이선균·이지은, 24살 차이 멜로 괜한 걱정이었나

박동훈(이선균)은 형 박상훈(박호산)과 동생 박기훈(송새벽)과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며 팍팍한 중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년퇴직 후 자신의 존재 자체가 지워져버리고 있다는 박상훈. 아내와는 별거 중이고 재취업은 아파트 경비 자리 얻기도 하늘의 별 따기다. 박기훈은 영화 감독이 꿈이지만 만년 조연출로 늙어가고 있다. 한 때는 주목받기도 했었지만 그 후로는 영화판에서 마모되어가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나마 건축구조기술사라는 그럴 듯한 직업을 갖고 있는 박동훈은 나아 보이지만 그를 둘러싼 가족들의 무게가 온전히 그의 어깨를 짓누른다. 퇴근 해 혼자 소주 한 잔을 기울이는 게 유일한 휴식이지만 그의 아내는 그가 다니는 회사 대표이사 도준영(김영민)과 불륜 중이다. 

tvN 새 수목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아저씨들의 위기로 시작한다. 박상훈이 동생들과의 술자리에서 ‘아저씨가 나오는 공포영화’를 말하듯, 아저씨들은 퇴직 후 사업에 망하고 재취업도 못한 채 심지어 경조사에조차 찾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보며 절망하고 분노한다. 돈이 없어 동생 박동훈에게 손을 벌리는 그 심정이 오죽할까. 그런 형이 큰 일을 낼까 걱정이라며 엄마 변요순(고두심)이 박동훈을 찾아와 가게라도 내주자며 5천만 원 대출을 이야기하지만 그런 돈을 대출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던 차에 마치 운명처럼 그에게 뇌물 상품권 5천만 원이 퀵으로 잘못 배달된다. 경쟁관계에 있는 도준영(김영민)이 박동운 상무(정해균)를 물 먹이려 보낸 돈이지만 배달사고가 난 것. 결국 도준영은 박동훈을 희생양 삼으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아저씨들의 위기만큼 처절한 청춘의 위기가 겹쳐진다. 그 청춘은 박동훈의 사무실에서 일하는 알바생 이지안(아이유)이다. 무슨 일인지 사채업자에게 심지어 두드려 맞아가며 돈을 갚아나가고 있는 이 청춘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요양원 비용이 없어 청각장애에 운신도 하지 못하는 할머니를 부양해야 하는 처지다. 음식점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손님이 버리고 간 음식을 챙겨와 역시 사무실에서 훔쳐온 믹스 커피와 함께 먹는 게 그의 유일한 휴식이다. 불조차 켜지 않는 집에서 꾸역꾸역 음식 같지도 않은 음식을 입안에 구겨 넣고, 달달한 믹스 커피를 꼭 두 봉씩 녹여 마시는 삶. 그에게 꺼져있는 불처럼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박동훈에게 잘못 배달된 뇌물 봉투를 우연히 보게 된 이지안은 그래서 고민하지 않고 그 뇌물을 훔치기로 마음먹고 그에게 접근한다. 뇌물 봉투를 받고 당황한 박동훈이 대충 서류철과 함께 책상에 구겨 넣어둔 걸 안 이지안은 그와 같이 밥을 먹고 술을 마신 후 그가 집에 간 사이 사무실에 몰래 들어와 그 뇌물 봉투를 꺼내간다. 물불 가릴 처지가 아닌 혹독한 현실에 내몰린 청춘 이지안과, 이제 돈도 사라졌지만 뇌물을 받았다는 누명까지 뒤집어쓰게 된 아저씨 박동훈. 그들의 위기가 격돌한다. 

<나의 아저씨>가 아저씨라는 중년세대와 청춘의 위기를 동시에 병치한 건, 그것이 현재 우리 사회가 처한 현실과 맞닿아 있어서다. 이제 직장에서 퇴출될 위기에 처한 아저씨 세대는 아예 취업 전선에 발을 딛지 못하고 있는 청춘 세대들과 현실에서 부딪칠 수밖에 없다. 그건 일자리라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지만, 그래서 비롯되는 갈등은 현실의 차원을 넘어서 감정적인 차원으로까지 치닫곤 한다. 

그래서 <나의 아저씨>는 아저씨 세대를 대변하는 박동훈과 그 형제들과, 청춘 세대를 대변하는 이지안이 부딪치면서도 어떤 접점을 만들어낼 것을 기대하게 만든다. 애초에 24살 차이의 멜로라는 소재 때문에 갖게 되는 어떤 불편함은 그것을 단지 멜로 차원으로만 바라봤을 때 나올 수 있는 오해가 아닐까. 어쩌면 <나의 아저씨>는 그 24살 차이의 장벽에 가로막혀 있는 세대 간의 갈등을 화해하는 드라마일 수도 있으니.(사진:tvN)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정형돈의 패션 감각은 누가 봐도 꽝이다. 먼저 그 주체할 수 없는 뱃살이 망할(?) 패션의 종결을 선언한다. 그런데 이 패션 꽝의 정형돈이 누가 뭐래도 연예계 패션 리더로 지목하는 지드래곤에게 지적질을 한다. 패션이 영 아닌 것 같다며 그는 자신의 엉망진창 옷차림을 자랑한다. "지드래곤 보고 있나? 이게 패션이다." 이런 도발적인 선언도 서슴지 않는다. 이것만이 아니다. ‘무한도전-조정특집’에 출연한 조인성에게 정형돈은 몸매 관리를 조언하는 망언(?)을 일삼는다. 그런데 이 어처구니없는 도발이 의외의 반향을 만들어낸다. 대중들을 정형돈의 이른바 ‘보고 있나’ 지적질에 열광하며 각종 패러디를 쏟아낸다. ‘무한도전-서해안 고속도로 가요제’에서 정형돈과 듀엣을 이뤘던 정재형은 이 정형돈의 역발상 개그를 그대로 패러디해 보여줌으로써 똑같은 반향을 일으켰다. 정형돈의 개그를 그대로 이용해 "유희열은 나부랭이, 김동률은 조무래기, 자신은 신"이라고 표현한 정재형은 후에 유희열 팬 페이지에 "유희열 보고 있나..."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도대체 이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은 무엇이고, 여기에 쏟아지는 대중들의 열광은 또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가 다시 발견하게 되는 것은 ‘미친 존재감’이라는 단어다. ‘웃기는 것 빼고는 다 잘하는 개그맨’, ‘무존재감’을 캐릭터로 만든 정형돈은 이 역발상을 좀 더 공격적으로 활용한다. 즉 ‘무존재감’을 거꾸로 무기 삼아 존재감 있는 이들을 도발하는 것. 이것은 이 변화된 시대의 요구다. 주연이 중심에 서고 조연들은 그 그늘에 가려지던 과거에서 이제는 조연들도 각각의 미친 존재감으로 주연 이상의 주목을 끄는 시대가 아닌가. 그러니 정형돈의 조금은 과장된 자신감은 웃음을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통쾌함을 준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존재감의 소유자들 앞에 당당하게(어찌 보면 무모하게) 자신을 내세우는 모습이 웃음 이상의 공감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정형돈이 보여준 것은 바로 이 미친 존재감의 시대가 요구하는 역발상이다.

미친 존재감은 어떻게 탄생했나
최근 들어 TV나 영화를 보다보면 의외의 발견(?)에 즐거워질 때가 있다. 주연이 아니지만 절로 "어 저 친구 대단한 걸!"하고 감탄사가 나오게 만드는 조연을 보게 될 때다. '넘버3'에서 송강호가 그 유명한 자장면 먹는 장면을 보일 때 그랬고, '왕의 남자'에서 유해진이 육갑이 역할을 진짜 이름에 딱 맞춘 듯 질펀하게 풀어낼 때 그랬다. '방자전'에서 변학도 역할로 방자, 춘향이 혹은 이몽룡보다 더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주고는 '부당거래', '해결사', '시라노 연애조작단'에 연달아 조연으로 출연한 송새벽은 대표적인 씬 스틸러(scene stealer)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씬 스틸러는 '추노'의 성동일이었다. 장혁, 오지호, 한정수 같은 멋진 사내들이 그것도 식스팩을 드러내며 시청자들을 매료시켰지만 그 와중에서도 이 불룩 튀어나온 원 팩(?)에 칫솔질 한 번 안했을 것 같은 누런 이를 하고 머리는 산발한데다가 하는 짓도 영락없는 악당인 성동일에게 우리는 매료되었다. 왜? 그에게서 우리네 민초들의 정서를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드라마 속에서 죽었을 때, 우리는 주연의 죽음 못지않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어쩌면 주연보다도 더.

사람들은 그래서 주연도 조연도 아닌 그들만의 왕관을 씌워주었다. 이른바 '미친 존재감'이라는 왕관이다. 기존의 주연과 조연으로 나뉘던 구분은 이로써 '존재감이 있는' 배우와 '존재감이 없는' 배우로 나눠지게 되었다. 자기 위치에서 열심히 그 역할을 해낸다면 이제는 그걸 바라봐주고 인정해주는 대중들이 있다는 얘기다. 이것은 작금의 달라지고 있는 대중심리이기도 하다. 과거의 대중들은 주목받는 것에만 지나치게 쏠리는 경향이 있었다. 또 내가 가진 것보다는 타인이 가진 떡을 더 크게 보는 심리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대중들은 수평적인 시선으로 나와 타인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미친 존재감'은 바로 이 변화된 대중심리에서 탄생한 것이다.

당신만의 미친 존재감을 찾아라
왜 꼭 1인자만 성공한다고 믿어온 걸까. 과거를 되돌아보면 거기에 늘 주인공에 집착하던 시절을 발견한다. 학교에서도 반장을 해야 하고, 또래들 사이에서는 골목대장이 되어야 하며, 하다못해 연극을 하더라도 꼭 주인공이 되려고 안간힘을 쓰며, 명문대학을 가지 못하면 주인공이 못되고 낙오되는 것으로 알았던 시절, 심지어 얼굴도 개성보다는 이미 정해진 미적 기준에 맞춰 순위를 매기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모두들 주인공만 되려고 안달일밖에.

하지만 어디 세상이 1인자만 존재하는 것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1인자를 받쳐주는 2인자도 필요하고 묵묵히 3인자의 역할을 하는 이들도 소중한 존재들이다. ‘무한도전’에서 1인자인 유재석을 견제하는 2인자 박명수는 호시탐탐 1인자의 자리를 노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그 자리에 앉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즉 그는 2인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더 잘할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것이 박명수가 1인자보다 더 주목되는 2인자의 역할을 해내는 이유다.

그토록 교육열이 뜨거웠던 시대, 우리는 오로지 주연의 자리만을 원했다. 주연의 자리는 딱 하나 밖에 없는데 전부 주연이 되려고만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았었다. 그리고 그 시대에는 주연이 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지곤 했다. 엘리트라고 불리는 주연들에 의해 세상이 움직이는 것처럼 오인되었으니까. 수직적인 사회 체계의 부작용이었다. 하지만 세상은 참 많이도 바뀌었다. 사람들은 주연만큼이나 조연들을 주목해주었다. 주연 조연으로 나뉘는 '높고 낮고'가 아니라 수평적으로 각자의 역할을 바라봐주는 그런 세상. 세상은 그런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 맡은 것을 해냄으로써 움직이는 것이었다.

'미친 존재감'을 발견하게 된 대중들은 이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삶의 가치도 바꿔가고 있다. 즉 우리 사회는 중심에서 주변으로 시선을 넓혀가고 있고, 이미 '만들어진' 삶에서 차츰 '만들어가는' 삶으로 가치가 이동되어 가고 있다. 그러니 '미친 존재감'은 드라마나 영화 속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저 길거리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무도 없는 새벽에 거리를 청소하시는 분들이나, 한 자리에서 몇 십 년 동안 구두수선을 해가며 자식들 뒷바라지를 해오신 분들이나, 시장통 한 구석에서 현재는 힘들어도 희망을 잃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그런 분들 모두는 이 사회의 '미친 존재감'들이다. 그러니 멀리 볼 것 없이 바로 당신 속에 있는 그 미친 존재감을 찾아야 할 일이다. 그 누구도 갖고 있지 못한 당신만의.


"어, 너 거기 있었니?" 어린 시절 이런 얘길 참 많이도 들었다. 극도의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말수도 없는데다가 막상 입을 열어도 그다지 빵빵 터트리지 못했던 나는 말 그대로 존재감 없는 아이였다. 심지어 말할 때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아서, 무슨 얘길 꺼낼 때마다 이걸 말해 말어 고민할 정도였다. 그런 시골 아이가 떡 하니 서울 한 복판으로 전학을 왔으니 이건 투명인간이 따로 없었다.

 

그 때 나는 대신 아주 특별한 재주(?)를 갖고 있었는데, 어디 바깥에 나가면 늘 뭔가를 주워오는 것이었다. 누나는 그런 내가 신통했던지 "어디 바닥에 그런 게 다 있어? 난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없던데...", 하곤 했다. 그렇게 내가 주워오는, 누군가 버린 물건들은 하나하나 모여서 내 책상의 한 구석을 장식하곤 했다. 존재감 없는 아이는 그 누군가 버린 물건들을 갖고 책상에 앉아 혼자 놀이를 했다. 팔 한쪽이 떨어진 울트라맨이 주인공이고 꼬리가 잘린 공룡이 악역이며, 문짝 하나가 빠진 장난감 자동차가 울트라맨이 공룡을 이기고 구해야 하는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친구 없이도 그렇게 혼자 몇 시간을 놀 수 있었다. 그것들이 바로 내 친구였으니까.

'추노'(사진출처:KBS)

'추노'의 성동일에게 '미친 존재감'이라는 영광스런 호칭을 대중들이 붙여줄 때, 내가 절절히 공감한 것은 아마도 그 어린 시절 존재감 없던 아이가 떠올랐기 때문이었을 게다. 주연도 아니고 조연도 아닌, 어쩌면 그저 주변인물 정도로 치부될 수 있는 그가, 말 그대로 미친 존재감을 드러내는 연기를 보여줄 때, 나는 정말 가슴 한 구석이 울컥할 정도로 짜릿함을 느꼈다. 물론 그건 나만 느낀 게 아니었을 게다. 수많은 이들이 그 미친 존재감에 열광하고 있었고, 얼굴만 슬쩍 보여준 티벳 궁녀 최나경이니, 어눌한 목소리로 오히려 주목받은 송새벽 같은 인물이 스타로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사실 주연이니 조연이니 하는 것은 작품의 제작자들이 붙이는 것이다. 하지만 미친 존재감은 다르다. 그것은 바로 대중들이 수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호칭에는 대중들이 가진 존재감에 대한 욕망이 투영되어 있다. 나도 내 존재를 드러내고 싶다. 미치도록!

어린 시절과 비교해보면 나는 '미칠' 정도는 아니어도 제법 어느 정도 존재감을 갖고 있는 편이다(착각인가?). 그 옛날 존재감 없던 아이가 지금 이렇게 글줄이라도 써가며 살아가고 있는 게 신기해 보이기도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 참 기적 같은 게 있어서 그 때의 상황이 오히려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그 때 어디선가 자꾸만 물건들을 주워왔던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누군가에게 버려졌을 그 처지가 자신과 비슷하다고 그 아이가 여겼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 아이가 그 버려진 물건들을 갖고 만들어내는 스토리에는 늘 '미친 존재감'이 있었다. 울트라맨은 어디선가 팔 한 짝을 잃어버렸지만 늘 마지막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미친 존재였으니까. 그때 막연히 했던 그 스토리 훈련(?)이 어쩌면 지금 늘 스토리를 쓰며 사는 나를 만들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늘 고개를 숙이고 다녀 바닥에 떨어진 무언가를 늘 주워오던 그 아이는 그 순간부터 '미친 존재감'을 꿈꾸고 실현시키려 했는지도.
(이 글은 사보 '모터스 라인'에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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