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트 월’, 퓨전과 짬뽕의 경계는 종이 한 장 차이

영화 <그레이트 월>은 예고편만 보면 정말 엄청난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제목에서 묻어나듯 이 영화는 중국의 미스터리로까지 남겨진 만리장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그 감독은 거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장예모인데다, 주인공은 맷데이먼이다. 그러니 예고편에서 맷데이먼이 마치 판타지 영화 속 아처의 형상으로 만리장성 위에서 활을 쏘아대는 모습만으로도 기대가 될밖에.

사진출처:영화<그레이트 월>

<그레이트 월>은 그러나 그 기대감 안에 담겨져 있는 불안요소들을 좀체 넘지 못한다. 즉 영화적 배경은 중국의 만리장성이고 감독은 장예모인데, 그 주인공은 서양인인 맷데이먼이고 그가 중국인 배우 경첨과 유덕화와 함께 싸우는 적은 외계에서 온 알 수 없는 ‘진격의 괴수들’이다. 좋게 이야기하면 동서양의 퓨전이고 중국 무협과 서구의 판타지의 만남이며 만리장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고 여기에 외계 생명체와의 대결이라는 에일리언적 요소들까지 가미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 이들 요소들은 너무 많은 이질적인 것들이 겹쳐져 있어 그것이 하나로 융합되지 않고 겉도는 느낌이 더 강하다. 무엇보다 장예모 감독의 거대한 화면에 채워지는 미술적인 연출에 대한 기대를 하는 관객이라면 그저 상업적인 틀에 머무는 영화에 실망할 수 있고, 맷데이먼의 눈으로 보여주는 액션이 아닌 내적인 응어리 같은 걸로 더 강한 폭발력을 내는 액션을 기대하는 이들에게는 너무 볼거리 위주의 액션에 실망할 수 있다. 

판타지와 무협의 퓨전이라는 것도 어찌 보면 그 합이 더 엄청난 시너지를 만들기보다는 판타지로서도 또 무협으로서도 부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래서 이러한 퓨전은 상업영화로서의 마케팅적인 결합처럼 보인다. 즉 맷데이먼이 중국영화 속으로 들어온 것은 중국 관객들을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고, 여기에 만리장성이 일종의 지구를 지키는 최종방어선처럼 그려지는 것 역시 중국인들의 민족주의를 건드리는 마케팅적 장치로 보인다. 

물론 영화가 이러한 황당해 보이는 이질적인 요소들의 결합 통해서 담으려는 메시지는 명백하다. 그것은 서역에서 검은 가루(화약)을 찾아 이 동양에까지 다다른 윌리엄(맷데이먼)과 외계의 적과 맞서고 있는 린 사령관(경첨)이 “우리는 너무 다르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후에는 “우리 생각이 틀렸다. 우리는 비슷하다”는 결론으로 바뀌는 그 과정이다. 거기서 지구를 구하는 두 패권이 손을 잡는다. 하나는 중국이고 또 하나는 서구의 힘이다. 물론 거기서도 실질적으로 과시되는 건 제목에 등장하듯 ‘만리장성’의 위용이지만. 

그래서 영화는 여러 이질적인 것들이 하나로 합쳐져 엄청난 적들과 대결해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사실 이건 저들에게 설득되는 이야기들일 뿐, 우리처럼 그들의 세력다툼에 휘둘려오며 변방을 치부되어온 관객들에게는 그다지 큰 감흥을 줄 수 없다.

그래서 그저 남는 건 스펙터클이다. 하지만 이 스펙터클 역시 ‘대륙의 상상력’은 한계가 없다고 말할 때 갖게 되는 조금은 비하적인 느낌을 갖게 만든다. 기상천외한 상상력들이 스펙터클로 보여지지만 그것이 너무 나가있어 관객이 몰입되기보다는 헛웃음이 나오는 그런 느낌. 장예모에 맷데이먼, 유덕화 그리고 만리장성까지 만나는 그 이질적인 조합은 그래서 시도는 좋았을지 몰라도 공감 가는 퓨전보다 이질적인 것들이 마구 뒤섞인 짬뽕에 가까운 결과물이 되었다.

<닥터 스트레인지>, 어떻게 이 진부함과 황당함을 이겨낸 걸까

 

새로운 마블의 슈퍼히어로물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는 그 스토리나 설정만 두고 보면 진부하고 황당하기 이를 데 없다. 잘 나가던 외과의사가 교통사고로 손을 다쳐 절망감에 빠지게 되고 육체적으로는 치유될 수 없는 몸을 정신 수련을 통해 고쳐내면서 엄청난 위기상황을 맞게 된 세상을 구원해내는 이야기... 일단 동양인이라면 이 영화가 갖고 있는 막연한 동양에 대한 신비주의에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처럼 진부하고 황당한 스토리지만 관객들은 의외로 영화 속에 점점 빨려 들어간다.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걸까.

 

사진출처:영화 <닥터스트레인지>

네팔에서 만난 신비로운 여인 에인션트 원(틸다 스윈튼)으로부터 수련을 받는 스티븐 스트레인지(베네딕 컴버배치)의 설정은 역시 그 무수한 쿵푸 영화의 한 대목을 잘라 붙인 듯한 느낌을 준다. 갖가지 마법을 부리는 방법들이 들어 있는 책들이 가득한 공간은 마치 무협지의 비급들이 숨겨진 공간처럼 그려지고, 그 곳을 지키는 도서관장인 웡(베네딕트 웡)은 진짜 소림사에서 갓 나온 듯한 모습이다. 스승인 에인션트 원을 배신하고 그 책들 중 중요한 마법의 한 장을 잘라내 도망치는 제자 케실리우스(매즈 미켈슨)와 또 다른 제자가 된 스트레인지가 대결 구도를 이루는 스토리도 역시 쿵푸 영화의 전형적 설정이다.

 

게다가 이들이 부리는 마법은 현실감을 갖기가 어려울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일종의 관문 같은 걸 만들어 이쪽 세상에서 갑자기 히말라야 꼭대기로 빠져나오기도 하고, 중력의 세계를 무색케 만드는 전후좌우가 마음대로 뒤집어지는 마법을 부려 그 속에 있는 이들을 공격하기도 한다. 날아다니는 건 기본이고 공간과 공간의 이동은 물론이고 시간까지도 멈춰 세우거나 뒤로 돌리기도 한다. 이 정도면 거의 신에 가까운 능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이런 상상력의 무한 확장은 현실적인 무게감을 지워버릴 수밖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엄청난 상상력의 스펙터클은 관객의 시선을 매료시킨다. ‘거울의 차원이 보여주는 것처럼 건물들이 뒤집어지고 어느 지점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런 장면들은 마치 관객이 거대한 만화경 속으로 들어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중력이 여러 방향으로 바뀌는 그런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액션은 그래서 독특한 긴박감을 만들어낸다. 결국 <닥터 스트레인지>의 진부함과 황당함을 무화시킨 건 놀라운 CG 기술 덕분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 CG는 그저 기술의 차원만을 담고 있는 건 아니다. 기술이라면 그럴 듯한 가상의 장면들을 현실감 있게 구현해내려 노력한 면들이 두드러졌을 게다. 하지만 <닥터 스트레인지>CG는 그것보다는 예술 작품의 한 대목을 잘라낸 듯한 인상이 짙다. 압도적인 비주얼이지만 예술적인 느낌들이 그 진부함을 새로움으로 바꾸고, 황당함을 상상력의 자유로 바꿔준다.

 

여기에 의도적으로 구사되는 <닥터 스트레인지> 특유의 농담과 유머는 관객으로 하여금 이 작품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만들어 지나친 현실감 추구가 야기할 수 있는 황당함을 벗어나게 해준다. 예를 들어 위기를 맞게 된 스트레인지가 수술을 받는 동안 그 영혼이 빠져나와 적의 영혼과 한판 대결을 벌일 때, 수술도중 사용하는 심장충격기의 충격이 적에게 타격을 주는 대목은 사실 개연성으로 설명될 수 있는 장면이 아니다. 대신 영화는 이 장면이 주는 유머와 웃음의 코드를 활용함으로써 개연성의 부족을 슬쩍 뛰어넘는다.

 

물론 그렇다고 이 황당한 스토리의 영화가 그저 허망한 볼거리의 작품이라는 건 아니다. 만일 그랬다면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은 어떤 허탈함을 느꼈을 게다. 하지만 영화는 이 상상력의 이야기를 통해 시간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짐으로써 의미를 확보해낸다. 즉 시간으로 인해 결국은 사멸해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의 조건이 꿈꾸게 되기 마련인 영원이나 불멸에 대한 욕망이 얼마나 허망한 일일 수 있는가를 이 영화는 흥미로운 스펙터클로 보여준다. 스토리로만 보면 황당할 수밖에 없는 영화지만, 예술적인 CG와 전략적인 유머들 그리고 그 상상력 속에 심어놓은 나름의 철학은 그래도 이 영화에 열광하게 만드는 이유들이다.

<시빌워>, 무엇이 마블의 압승을 만들었나

 

새로 개봉한 마블사의 <캡틴 아메리카 : 시빌워(이하 시빌워)>는 여러모로 지난 3월 개봉했던 DC 코믹스의 <배트맨 대 슈퍼맨>을 떠올리게 한다. 어벤져스와 저스티스 리그로 뭉쳐 심지어 외계인들과 싸우던 슈퍼히어로들은 이제 약속이라도 한 듯 그들끼리의 대결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출처:캡틴 아메리카-시빌워

이렇게 대결의 상대가 외부가 아니라 내부로 바뀌게 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이미 너무 많은 슈퍼히어로물들이 쏟아져 나와 이제는 비슷한 패턴들이 생긴데다가 이제는 악당 대 슈퍼히어로라는 대결의 스토리텔링이 식상하게 느껴질 정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현재의 달라진 세계의 정세가 그 밑바닥에 깔려 있다. 냉전시대에서 한참 벗어나 자유롭게 교류되는 지구촌에서 이제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일은 쉽지 않게 되었다. 테러리즘이 문제가 되는 것은 이 희미해진 경계 사이로 넘나들며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여기에 강력해진 한 국가의 힘은 세계 정의를 부르짖지만 때로는 그것이 약소국을 파괴하는 또 다른 폭력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시빌워><배트맨 대 슈퍼맨> 모두 그 이야기의 전제로 슈퍼히어로들이 전 지구적인 적들과 맞서 싸우는 그 과정에서 무고하게 죽어나가는 인명이라는 딜레마를 깔아놓는 건 그래서다. 슈퍼맨이 우주에서 날아와 지구를 구한다고 하지만 알고 보면 그가 불러들인 우주인들의 전쟁에 지구가 황폐화되어간다는 걸 인식한 배트맨이 복수를 꿈꾸는 <배트맨 대 슈퍼맨>의 이야기나, 슈퍼히어로가 가진 힘의 통제에 대해 찬반으로 나뉘어 대결하는 <시빌워>는 그래서 동일한 전제 위의 다른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배트맨 대 슈퍼맨>이 전반의 흥미진진한 대결구도에도 불구하고 후반부로 가면서 요령부득의 결말을 보여주어 전 세계 관객들을 실망시킨 것과 달리, <시빌워>는 캡틴 아메리카로 대표되는 자유파와 아이언맨으로 대표되는 통제파가 끝까지 대결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훨씬 더 흥미로웠다고 말할 수 있다.

 

무엇보다 선과 악의 대결 같은 평이한 결말로 흘러가지 않고 서로 다른 생각과 입장의 차이가 팽팽히 대결함으로써 어떤 논점들을 관객들이 선택하게 한 것은 <시빌워>의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이렇게 갈라진 슈퍼히어로들 때문에 관객은 혼란을 느끼게 되지만, 바로 그 혼란이야말로 어느 한쪽을 선택해 다른 한쪽을 적으로 상정하는 흑백논리를 넘어서게 해주는 이 영화의 미덕이다.

 

그래서인지 팽팽한 대결 속에서도 슈퍼히어로들이 어떤 유머를 보여주는 장면이나, 이 대결을 야기한 인물에 대해 처절한 응징이 아닌 법적 절차와 선택을 요구하는 장면들은 대결양상을 충분히 사변적으로도 즐길 수 있게 해준다. 공동의 적을 세워 대결을 멈추는 <배트맨 대 슈퍼맨>의 이야기보다는 공감대가 커지는 이유다.

 

이런 메시지를 제대로 담으면서도 영화는 관객들의 주 관심사라고 할 수 있는 슈퍼히어로들끼리의 대결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가 대결하고, 스파이더맨과 앤트맨이 한 판 붙는 그 스펙터클은 충분히 즐거우면서도 유머가 넘쳐난다. 결국 DC와 마블의 슈퍼히어로 대결 이야기의 성패를 가른 건 그 균형 감각이다. 볼거리와 대결 양상이 선명하게 보이면서도 시대를 통과하는 어떤 메시지를 던지는 것. 확실히 마블사 <시빌워>의 압승이다.

<태양의 후예>, 바쁜 의사와 빡센 군인의 로맨스로 펄펄

 

의사면 남친 없겠네요. 바빠서.” “군인이면 여친 없겠네요. 빡세서.” KBS 새 수목드라마 <태양의 후예> 첫 방송은 김은숙 작가의 작품답게 거침이 없었다. 첫 회에 유시진(송중기)과 강모연(송혜교)이 만나고 가까워지는 과정이 물 흐르듯 빠르게 전개되었고 또한 서대영(진구)과 윤명주(김지원)의 계급이 다른 군인들 간의 관계는 향후 전개될 두 사람의 이야기에 궁금증을 자아내게 하기에 충분했다.

 


'태양의 후예(사진출처:KBS)'

바쁜 의사와 빡센 군인의 로맨스. 사실 멜로드라마의 가장 큰 약점으로 지목됐던 것이 극성이 약하다는 점이라면 왜 <태양의 후예>가 이 같은 의사와 군인의 로맨스를 다뤘는가가 이해될 법도 한 부분이다. 사극을 빼놓고 보면 현대극에서 가장 극성이 강한 장르가 의학드라마와 전쟁드라마가 아닌가. 물론 최근에는 연쇄살인범이 등장하는 스릴러 장르가 힘을 발휘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멜로드라마가 스릴러를 덧붙이기는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관계와 갈등이 상처를 넘어서 죽고 사는 문제와 연결되는 직업군으로 의사와 군인만큼 센 극성을 만드는 인물군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미 첫 회가 충분히 입증한대로 총알이 날아다니고 칼부림이 다반사인 전쟁터가 일터가 된 유시진과 역시 생사가 오가는 응급실이 일터인 강모연의 만남은 강렬할 수밖에 없다. 그저 평범하게 만나서 감정을 나누는 식의 일상적인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전쟁터를 오가는 이들의 멜로드라마다. 갑작스런 긴급 상황에 데이트 약속을 미루고 떠나는 유시진이 강모연에게 병원 건물 옥상에서 헬기를 타고 떠나기 전 다음 데이트 약속을 하는 장면은 이 멜로드라마가 가진 특별한 스케일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마치 슈퍼히어로물에서 지구를 구하러 떠나는 듯한 남자 주인공과 그를 보내는 여자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한.

 

향후 이 드라마는 우르크라는 총알이 날아다니는 가상의 낯선 땅에서 벌어지는 군인과 의사들의 사랑 이야기를 담을 것이라고 한다. 첫 회 마지막 장면에서 아프가니스탄의 분쟁지구로 날아가는 비행기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 드라마는 그 성격상 스펙터클을 자연스럽게 보여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많은 블록버스터 드라마들이 스펙터클에 치중하다 엄청난 투자비에도 불구하고 실패했던 그 전철을 적어도 이 드라마만큼은 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전쟁과 사랑이라는 거대한 스케일의 스펙터클 속에서도 김은숙 작가의 확고한 지향점은 결국 사랑과 휴머니즘 같은 사람에 집중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드라마의 블록버스터란 볼거리가 아니라 그 인물과 스토리의 촘촘함에서 나오는 것이란 걸 이 멜로의 대가는 잘 알고 있다. 군인이라는 여성들에게는 조금은 낯선 남성적인 등장인물을 세우면서도 첫 회부터 달달한 로맨스의 설렘을 만들어내는 건 이 작가가 가진 공력을 실감하게 한다.

 

여기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송중기, 송혜교, 진구, 김지원의 대본을 맛깔스럽게 살려내는 연기다. 군 제대 후 더 남성적인 매력을 보여주는 송중기와 귀여우면서도 당찬 매력의 송혜교, 그리고 진지한 남성의 향기가 느껴지는 진구와 톡톡 쏘는 차가움과 뜨거움을 동시에 갖고 있는 듯한 김지원의 괜찮은 조합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진다.

 

케이블 드라마의 성장으로 최근 지상파 드라마들은 그 위기의식이 확실히 높아졌다. 하지만 적어도 <태양의 후예>만큼은 지상파 드라마의 자존심을 제대로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더욱 커진 스케일과 멜로와 액션이 넘나드는 스토리. 그리고 지상파 드라마 시청자들이 좋아하는 요소들을 가져오되 그것을 세련되게 구사하는 대본. 어쩌면 이 드라마는 위기에 빠진 지상파 드라마의 대안을 보여줄 지도 모르겠다.

<007스펙터>, 볼거리는 화려한데 어째 부족한 건 왜일까

 

007 제임스 본드가 돌아왔다. 무려 24번이나 만들어진 시리즈니 이제 더 이상 구구절절 장르적 특성이나 주인공을 설명할 필요가 없는 영화다. 멋진 수트를 입고 살벌한 테러 속에서도 여유를 잃지 않는 주인공.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임무를 수행하는 그런 인물. 바람둥이처럼 이 여자 저 여자를 넘나들지만 그래도 한 여자에게 순정을 보이기도 하는 인물. 제임스 본드는 영국 신사의 이미지를 스파이물과 버무려 기막힌 스타일로 탄생된 인물이다.

 


사진출처:영화<007스펙터>

하지만 24번이나 만들어지는 사이 세상은 참 많이도 변했다. 처음 이 시리즈가 성공적일 수 있었던 건 냉전시대의 대결구도 덕분이다. 러시아로 대변되는 적수들이 강력했고 거기에 맞서는 제임스 본드는 전 세계를 배경으로 종횡무진 활약한다. 설원에서 스키를 타고 벌어지는 추격전이나 늘 등장하는 특수 제작된 본드 카의 비밀 스위치로 흥미를 돋우는 차량 추격신, 때로는 바닷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때로는 우주까지 날아가는 스케일. 그런 화려한 액션들이 그저 편편이 흩어지는 시퀀스들이 아니라 하나로 엮어질 수 있었던 건 역시 냉전의 대결구도 때문이었다.

 

하지만 냉전시대가 지나면서 007은 적수를 잃었다. 심지어 시리즈 중단 이야기까지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007이 다시 부활할 수 있었던 건 다행스럽게도(?) 테러리즘이 새로운 시대의 적으로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007스카이폴>이 괜찮은 반응을 얻어냈던 건 이러한 적수가 막연히 인류를 공격하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제임스 본드가 속한 MI6를 직접 타격하는 이야기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세워진 007시리즈의 본거지가 공격받는다는 이야기는 막연한 테러리즘보다 더 절실한 제임스 본드의 이야기를 가능하게 했다.

 

그렇다면 그 이야기의 연장선에 있는 <007 스펙터>는 어떨까. 결과적으로 얘기하면 액션은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해졌지만 어딘지 부족한 느낌이다. 그것은 적수가 제공하는 인류의 위협이 그리 새롭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제목에 들어있는 스펙터라는 문구가 이미 암시하고 있듯이 이 영화의 적은 결국 디지털 감시 시대의 빅브라더라고 할 수 있다. 헌데 화려한 액션 속에서 그 빅브라더가 구체적으로 인류를 어떻게 위기에 몰아넣을 것인가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게다가 빅브라더라는 적수가 그리 새로운 것도 아니다. 007 시리즈가 지금껏 계속 주목받을 수 있었던 건 그 시대마다 생겨나는 새로운 과학기술과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직면하게 되는 새로운 적들을 확인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007 포 유어 아이즈 온리>는 해양시대가 가져온 위협들을 보여주었고, <007 문레이커>는 우주시대의 위협을 제임스 본드의 활약으로 그려낸 바 있다. 물론 <007 스펙터>가 지목하고 있는 빅브라더는 우리 시대의 위협인 것이 맞지만 그것이 새로운 것도 아니며 또한 효과적으로 그려지지도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007 시리즈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분들이라면 또 다시 달리기 시작한 이 제임스 본드의 2시간이 훌쩍 넘는 활약에 기꺼이 시선을 빼앗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의외로 마지막 적과의 대결 장면에서 네트워크를 형상화한 듯한 연출 구성 같은 묘미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영화관을 벗어날 때 느끼게 되는 허전함은 어쩔 수 없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온다는 이 영화의 화두처럼 007은 그렇게 다시 살아났다. 하지만 그가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새로운 적수를 찾는 건 역시 쉽지 않은 일인 것 같다.



<하늘을 걷는 남자>, 이 위대한 범법에 기꺼이 공모하고픈 까닭

 

줄타기가 삶에 대한 은유라는 건 무수한 예술이 말해준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살판과 죽을 판 사이에서 장생(감우성)이 오르던 줄이 그 탄성으로 그를 하늘로 날게도 해주지만 그만한 중력으로 맨바닥에 곤두박질치게 하는 것처럼, 줄타기란 삶이 가진 비상과 추락을 모두 담아내는 소재다. <하늘을 걷는 남자>의 줄타기도 마찬가지다. 아무도 시도하지 않은 아름다운 곳에 줄을 걸어 그 위를 걷고 싶었던 남자 필리프(조셉 고든 레빗)의 줄타기는 우리네 삶에서 예술적 행위가 해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담아낸다.

 


사진출처: 영화 <하늘을 걷는 남자>

이야기는 단순하다. 사실 <하늘을 걷는 남자>라는 제목 속에 다 들어가 있다. 게다가 이 영화는 실화다. 그 실화를 바탕으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맨 온 와이어>라는 영화는 이미 2010년에 국내에서도 개봉됐다. 물론 흥행은 저조했지만 어쩌면 <하늘을 걷는 남자>의 흥행으로 다시 관객들의 주목을 받을 지도 모르겠다.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현재 다시 개봉되어 상영되고 있다.

 

그러니 <하늘을 걷는 남자>의 이야기는 스포일러랄 것이 없다. 어느 날 우연히 뉴욕의 쌍둥이 빌딩 세계무역센터의 기사를 본 필리프는 그 두 건물 사이에 와이어를 연결하고 줄타기를 하겠다는 꿈을 갖고 그 불가능할 것 같은 도전을 하나하나 실행해 옮긴다. 그리고 결국 그는 하늘을 걷게 된다. 그런데 이 제목만 봐도 딱 아는 이야기가 왜 이토록 감동적으로 다가올까.

 

물론 영화가 주는 스펙터클의 힘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해보라. 무려 지상에서 4백 미터가 넘는 높이의 쌍둥이 빌딩 사이를 줄 하나에 의지해 건너고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을. 3D 아이맥스의 시대에 영화의 체험은 고스란히 관객이 그 줄을 밟고 있는 것만 같은 아찔함을 선사한다. 그 아찔함은 그리고 자유로움과 뒤섞이며 시각적 스펙터클이 단지 자극이 아닌 감동은 물론이고 나아가 어떤 깨달음에까지 나아가게 한다.

 

그 감동의 실체는 다름 아닌 예술적 행위의 숭고함에서 나온다. 그저 땅바닥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가녀린 존재인 인간이 그토록 높은 곳에 줄을 세우고 그 위에 선다는 그 행위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무모한 일이면서 돈을 벌어주는 일도 아니며 심지어 뉴욕시에서는 하지 말아야할 범법행위다. 하지만 그가 그런 범법 행위를 하려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공모한다. 그들은 그 공모의 이유에 대해 스스로도 알 수 없지만 모두 같은 말을 한다. 그건 너무나 아름다운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필리프는 거기에 그런 큰 의미부여를 하지 않는다. 다만 줄을 세울 아름다운 곳이 있었고 그래서 거기에 줄을 세운 후 걸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가 그런 예술적 행위를 함으로써 달라진 것이 있다. 뉴요커들도 싫어했던 그저 높기만 한 세계무역센터에 예술적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필리프의 줄타기로서 그 건물은 어떤 상징이 되었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비상하려는 욕망의 상징.

 

알다시피 그 건물은 911 테러로 인해 무너져 내렸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던 상징은 테러와 깊은 상처의 상징으로 변모했다. 물론 그 위에 다시 새로운 무역센터 건물이 지어졌지만 그 트라우마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은 아마도 그 공간에 남아있는 이 트라우마를 저 과거에 있었던 필리프의 예술적 행위를 통해 넘어서려 했을 것이다. 그것은 비극 앞에 예술이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위로가 될 테니 말이다.

 

<하늘을 걷는 남자>라고 그 줄 위에 있던 필리프의 행위에만 가치를 부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하기까지 그를 뒤에서 도운 수많은 공모자들. 그들 역시 이 예술의 동참자가 되었다. 아니 그 날 아침 출근길에 우연히 그의 줄타기를 바라보며 회사도 까무룩 잊어버린 채 서서 박수를 쳤던 많은 행인들까지도 그 예술의 동참자가 된다. 예술의 완성은 결국 예술적 행위를 누군가 기억에 담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를 통해 다시금 세계무역센터에서 있었던 놀라운 인간의 예술적 행위에 감탄하고 있는 우리들 역시 그 예술을 완성시키는데 일조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영화를 보는 우리들도 그들이 했던 위대한 범법 행위에 기꺼이 마음으로나마 공모하고 있으니



<디데이>, 무엇이 이 드라마를 주목하게 하나

 

재난은 어디서부터 생겨날까. 지진, 쓰나미 같은 자연재해는 인간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천재지변이다. 따라서 이러한 천재지변 그 자체보다 더 중요한 건 이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다. 재난이라는 결코 쉽지 않은 소재를 다루는 새 JTBC 드라마 <디데이>가 천착하고 있는 문제 역시 바로 이것이다. 재난의 스펙터클이 아닌 재난에 대해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

 


'디데이(사진출처:JTBC)

첫 회에 보여진 이해성(김영광)이 근무하고 있는 미래병원 응급실 풍경은 그래서 이 드라마가 앞으로 그려나갈 이야기들을 상징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결국 응급실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늘 재난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재난상황을 맞아 단 9%의 가능성이 있어도 환자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모든 걸 걸 수 있는 의사가 있는 반면, 그 상황에서도 절차를 강조하는 한우진(하석진) 같은 외과의도 있다.

 

이해성이 온 몸에 피를 묻혀가며 응급실에서 생사를 오가는 환자를 살리려 안간힘을 쓰는 장면은, 한우진이 우아하게 앉아 환자에게는 손 하나 대지 않고 로봇수술을 하는 모습과 교차되며 보여진다. 한 사람은 사람을 살리는 의사의 본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다른 한 사람은 수술의 절차와 책임소재 나아가 병원 경영 같은 것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쩌면 지진이나 쓰나미가 아니라도 우리네 서민들이 응급실을 찾게 될 때면 늘 상 맞닥뜨리는 재난상황일 것이다. 그 상황에서 누군가는 살아나고 누군가는 죽는다. 그런데 그 생사의 갈림길이 공평한 결과가 아니라 차별적이거나, 혹은 너무 형식적이고 잘못된 절차 때문에 살 사람이 죽어나간다거나 한다면 그건 누구의 잘못일까.

 

이 문제는 그 상황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의사들의 문제도 문제지만, 그런 강요를 받게 만드는 병원 시스템의 문제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병원은 경영을 얘기한다. 그래서 병원이 살아야 환자들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동안 그 경영 방식 때문에 살 수 있는 어떤 환자들은 죽어나간다. <디데이>의 이 미래병원이라는 공간은 완벽하게 우리네 사회를 그대로 보여주는 축소판 같다.

 

우리네 사회가 자본의 시스템 속에서 공평한 삶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있다는 건 대부분의 대중들이 공감하는 이야기다. 그러니 미래병원 바깥을 나와도 어떤 이들에게 우리 사회의 시스템은 재난상황이다. 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가진 기득권으로 별다른 큰 노력 없이도 우아하게 살아가지만, 누군가는 제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빚만 늘고 먹고 살기가 막막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치가 경제적 불평등을 해소하기보다 경제 성장을 얘기한다면 그건 저 박건(이경영) 미래병원장 같은 사람이 추구하는 병원의 미래를 예고하게 될 것이다. 병원은 돈을 벌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와중에 전혀 의료의 혜택 혹은 기회를 받지 못하고 죽어나가는 희생은 어쩔 수 없을 것이란 얘기다.

 

물론 이런 문제들은 평상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저 세월호 사태나 메르스 사태 같은 재난 상황이 터졌을 때 그 부조리한 시스템의 실체가 드러난다. 안전은 저 뒤로 밀어둔 채 우선 더 많은 선적을 해서 돈을 벌겠다는 논리나 전염병의 실상을 공개해 그것이 더 퍼져나가지 않게 미연에 방지하기보다는 그것이 미칠 병원이미지를 더 먼저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재난 그 이상의 재난이 발생한다.

 

<디데이>는 그런 점에서 보면 유독 많이 재난이 생겨 붙여진 재난공화국이라는 부끄러운 우리네 실상에 메스를 대는 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미래병원을 통해 이미 예고된 재난에 대처하는 각기 다른 사람들의 생각들의 부딪침은 그래서 이 드라마가 보여줄 재난 스펙터클 이상의 재미와 의미를 선사할 것으로 보인다. 재난은 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시스템을 통해 우리 안 깊숙이 주입된 잘못된 생각과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 <디데이>에 대한 남다른 기대감은 바로 여기서 생겨난다.



<앤트맨>은 왜 작아지는 영웅을 선택했을까

 

1978년에 개봉된 <슈퍼맨>에서 슈퍼맨은 연인이 죽게 되자 지구의 자전을 반대편으로 돌려 시간을 되돌린다. 황당한 이야기지만 이렇게 시간을 되돌려 살아난 연인과 지구인들이 슈퍼맨을 환호하며 끝나는 엔딩에 그 누구도 황당무계하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 슈퍼히어로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들로까지 나아갔다. 더 이상 지구가 좁다며 우주를 무대로 외계인들과 대적하는 슈퍼히어로가 등장하기도 하고 심지어 토르 같은 신이 영웅으로 재탄생되기도 했다.

 


사진출처:영화<앤트맨>

최근 개봉했던 <판타스틱4> 리부트를 보면 악당인 닥터 둠은 사람의 목숨 정도는 그냥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거둘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이 정도면 신이나 다름없다. <슈퍼맨>을 철학적으로 풀어낸 <맨 오브 스틸>에서 슈퍼맨은 신의 재해석이나 다름없다. 이 슈퍼히어로물에서 인간은 그저 신의 보호를 받거나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는 대상일 뿐이다. 신적인 힘을 가진 슈퍼맨은 지구를 침공해온 자신의 동족과 싸워 지구인들을 지켜낸다.

 

이 정도면 우주를 넘나들지 못하면 슈퍼히어로로서 어딘지 너무 소소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무협지에서 날아다니지 못하면 바보처럼 여겨지는 것처럼, 우주로 날아가는 슈퍼히어로들의 세상에서 지구를 전전한다는 건 어딘지 모양 빠지는 일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앤트맨>의 선택은 달랐다. 이 독특한 슈퍼히어로물은 우주를 향해 나아가기보다는 오히려 한없이 작아지는 쪽을 택했다.

 

작아지는 영웅을 선택하면서 <앤트맨>은 우리의 일상 속에 숨겨진 모험을 가능하게 한다. 일반 가정의 식탁이나 마룻바닥, 춤을 추는 파티장에서 그 밑바닥에 떨어진 앤트맨에게 사정없이 날라드는 발길질은 놀라운 미시세계의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은밀하게 세상사에 관여할 수 있다는 건 오히려 작다는 것이 능력이 될 수 있다는 걸 말해준다.

 

물론 작아진 존재 하나가 세상을 바꾸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점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부족함을 채워주는 존재들이 앤트맨에게는 부여된다. 그것은 또 다른 작은 존재들, 즉 각종 개미들을 진두지휘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 이 부분은 앤트맨의 스펙터클에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날개 개미 안토니의 등에 올라타면 마치 드래곤의 등에 올라탄 중세의 기사 같은 판타지물이 연상된다. 앤트맨의 명령에 따라 셀 수 없이 많은 날개 개미들이 날아가는 장면은 그 자체로 장관이다. 또 개미들이 서로 몸을 이어 붙여 허공에 거대한 줄을 만들거나 탑을 쌓아 그 다리를 건너가는 앤트맨의 장면 또한 장관이다.

 

다양한 능력에 충성스런 부하들을 거느린 앤트맨이란 존재는 그래서 작아도 강력한 존재로서 설 수 있게 된다. 마치 곤충들이 작지만 그 많은 개체수의 협업으로 엄청난 생존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앤트맨이라는 영웅은 혼자 서는 영웅이 아닌 함께 하는 영웅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건 기존 슈퍼히어로물들이 물론 <판타스틱4> 같은 협업을 보여주는 존재들도 있지만 대부분 혼자 외로운 싸움을 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다.

 

축소 지향을 보여줘서인지 <앤트맨>은 여타의 슈퍼히어로물과 달리 무겁지 않고 유머 코드가 생생히 살아있다. 몸을 한 없이 키우거나 우주 바깥으로 날아가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작게 해 마이크로 세상의 새로운 우주를 탐험하는 이야기는 그래서 기존 슈퍼히어로물의 참신한 역발상으로 다가온다. 물론 앤트맨은 몸을 작게 하는 것만큼 크게 늘리는 방법도 알고 있다. 따라서 앤트맨이 굳이 몸을 축소하는 것에 집착하는 건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이 축소 세계를 선택한 <앤트맨>은 바로 그 발상의 전환만으로도 충분히 성공적인 액션을 보여준다. 특히 아이들에게 있어서 이 작은 세계와 곤충의 세계가 주는 흥미로움은 기존 슈퍼히어로물의 우주보다 더 강력하게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꼭 커지고 확대되어야만 그럴 듯하다고? 적어도 <앤트맨>의 세계에서는 그런 편견과 선입견은 불필요하다



<인터스텔라> 광풍에 가려진 <카트>의 현실

 

영화 <카트> 상영관이 팍 죽었어요. <인터스텔라> 흥행 광풍에 직격탄을 맞고 휘청이다가 빌빌거리는 중입니다. 제작자로서 뼈가 아프네요. 가늘고 길게라도 오래 가고 싶습니다. 함께 사는 세상을 향해 절박한 맘으로 만든 영화, 많이 봐주세요. 힘이 돼주세요.”

 

'카트(사진출처:명필름)'

명필름 심재명 대표가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에는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마치 <카트>라는 영화의 처지가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소외된 노동자의 처지처럼 다가왔다. 자신들이 원하는 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 달라는 것이라는 영화 속 주인공의 이야기는 지금 우주 스펙터클의 광풍 속에서 들리지 않는 메아리로 울려 퍼지고 있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는 감독의 이름처럼(?) 놀라운 작품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토록 우주로 날아가 심지어 차원을 뛰어넘는 새로운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영화가 있었던가. 심지어 작은 스크린에서 본 관객들은 영화를 제대로 본 게 아니라며 아이맥스 영화관에 줄을 서는 기현상이 벌어질 정도다. 이 정도면 스펙터클의 새 장을 연 것이나 마찬가지다.

 

놀란 감독이 대단한 것은 이 우주적인 스펙터클을 다시 가족애와 같은 인간적인 끈으로 묶어낸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 안에 들어 있는 복잡한 과학 지식 따위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되지 않는다. 우주 반대편에서 모니터 하나를 통해 저 편에서 날아온 자식의 메시지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의 모습.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 복잡하고 신비한 우주의 스펙터클 속에서도 우리는 길을 잃지 않게 된다.

 

하지만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당장 처한 현실만큼 중요하다 여겨지지는 않는다. <카트>의 제작자 심재명 대표가 최근 상영관 축소에 대한 안타까움을 토로한 것은 그래서다. 비정규직의 문제. 어찌 보면 지나는 길에 누구나 한 번쯤을 봤을 지도 모르나 내 현실이 더 급박해 서둘러 발길을 돌렸던 그네들의 이야기.

 

<카트>는 그들의 이야기가 사실은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걸 들려주는 영화다. 대단한 주장을 하는 영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이념적인 영화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우리 옆집 아줌마가 어느 날 갑자기 겪게 된 이야기를 어떤 편향 없이 담담히 보여주는 그런 영화. 그래서 그것이 누구나의 코앞에 닥칠 현실이라는 걸 알려주는 영화.

 

물론 영화가 어떤 당위에 의해 봐야 하는 그런 것일 수는 없다. 하지만 <카트>는 충분히 재미있는 영화이고 또 의미도 있는 영화다. 무엇보다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드러내고, 그걸 통한 각성을 일깨워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 영화가 블록버스터들의 광풍 속에 가려져 많은 이들에게 보여질 기회조차 조금씩 박탈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는 이야기다.

 

우주의 스펙터클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의 현실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스펙터클이 주는 잠시 간의 마취적인 매혹이 나쁜 건 아니지만, 그것이 자칫 가려버릴 우리네 현실은 저 여전히 존재하는 비정규직들의 절규조차 들리지 않게 만들 수도 있다. 듣지 않으면 우리의 미래가 될 그 현실을.

 

<인터스텔라>, 80% 정도 이해하면 충분하다

 

영화가 너무 어렵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나 웜홀, 블랙홀 같은 과학적 이론을 전혀 모르고 본 관객이라면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인터스텔라>는 결코 종을 잡기 쉽지 않은 영화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는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시간의 관념을 과학적 이론을 바탕으로 뒤틀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영화 <인터스텔라>

즉 웜홀을 통과한 어느 행성에서의 한 시간이 지구에서의 7년에 해당한다는 시간의 상대성은 그 과학적 이론의 근거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저 영화적 설정처럼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 이론에 대해 ?’라고 자꾸 질문하는 것은 이 영화를 감상하는데 오히려 장애로 다가온다. 게다가 이 영화는 그 이론을 쉽게 설명해주지도 않는다. 결코 쉽지 않은 영화다.

 

하지만 놀라운 건 그렇게 이론적으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영화는 충분히 긴박감이 있고 169분이라는 긴 시간이 전혀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영화가 시도하고 있는 우주여행이라는 스펙터클의 대단함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영화 속에 녹아나고 있는 인물들 간에 벌어지는 감정들의 부딪침과 그 소통의 과정이 충분한 흥미로움을 주기 때문이다.

 

영화는 위기에 처한 인류를 전제로 깔고 그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나선 쿠퍼(매튜 맥커너히)의 탐험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웜홀을 뚫고 또 다른 우주로까지 날아간 이야기에서 오히려 주목되는 것은 가족애. 지구에 있는 딸 머피와 가족들에게 자신의 소식을 전하고 그들의 소식을 전해 듣는 쿠퍼의 모습은 순간 이 SF물을 가족드라마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하지만 이 가족드라마(?)에는 SF물답게 특별한 면이 들어간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이 다르기 때문에 지구의 아이가 성장하고 나이 들고 결혼을 해 자식을 낳는 그 일련의 과정들을 우주에서는 순식간에 목도하게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듯한 감흥을 만들어낸다.

 

우주 저 끝에까지 날아가서 <인터스텔라>라는 영화가 발견해내는 건 결국 이들의 사랑이다. 그리고 그들의 무모해 보이는 이러한 시도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게 하는 힘도 바로 그 사랑에서 비롯된다는 걸 영화는 보여준다. 그리고 그 사랑이 미래를 바꾸게 된다는 것도.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지금껏 만들어낸 영화들의 면면을 보면 그 작품들이 결코 쉽지 않은 철학적 주제들을 담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시간과 기억의 문제를 다룬 <메멘토>가 그렇고 슈퍼히어로물을 통해 정의와 선택의 문제를 다룬 <배트맨 다크나이트 라이즈>가 그러했으며 꿈과 현실의 경계를 해체시킨 <인셉션>이 그랬다. 그의 영화는 늘 상식을 뒤집는 전개를 통해 보는 이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다. 그리고 그 기상천외한 설정 속에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하지만 이 결코 쉽지 않은 철학적 논제들을 영상을 통해 풀어내고 보여주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새로운 스펙터클의 가능성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5차원의 세계를 영화 속에 구현한 <인터스텔라> 역시 지금껏 보지 못했던 차원의 영상이 주는 재미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인터스텔라>에는 매력적인 로봇 타스가 등장한다. 심지어 농담까지 던지는 이 타스는 진실을 다 드러내는 것이 어쩔 때는 더 위험하다고 말한다. 여기에 대해 쿠퍼는 타스에게 미리 농담의 비율을 제시한다. ‘80% 정도의 진담에 20%의 농담’. 이런 식이다. <인터스텔라>가 너무 어렵다고? 여기에 대해 타스식으로 얘기할 수 있을 것이다. 80% 정도 이해하면 영화를 즐기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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