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션샤인’, 시대극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겁다

워낙 무거운 왕관을 쓰고 있어서일까. tvN 주말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역사적인 고증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이 그 첫 번째였다. 구한말 의병운동 연구가인 연세대 오영섭 연구교수가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미스터 션샤인>이 다룬 신미양요 당시 미국인 조선 땅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묘사된 상황들과, 극중 고애신(김태리)이 화승총이 아닌 연발총을 사용한 것은 실제와 다르다는 것이었다.

또 오영섭 교수는 고애신이 미국인을 암살에 엮이기도 하는데 “그 당시에는 의병이 미국인들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이런 고증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오영섭 교수는 이 드라마가 다루는 ‘구한말이라는 역사적인 상황’에서 의병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벌인 노력들을 눈여겨봐 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또 당시 일본에 저항하면서도 근대로 접어들고 있는 당대의 ‘새로운 시대적 변화’를 이 드라마가 어떻게 나타내고 있는지 살펴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즉 오영섭 교수는 역사고증 잘못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미스터 션샤인>이 드라마라는 점을 어느 정도는 감안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논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극 중 구동매(유연석) 캐릭터에 ‘친일 미화’ 논란이 불거진 것이다. 결국 제작진은 캐릭터를 수정하며 사과문을 올렸다. “구동매 캐릭터와 관련하여 공식 홈페이지와 제작발표회에서 소개되었던 극중 구동매란 캐릭터가 친일 미화의 소지가 있고, 역사적 사건 속 실제 단체를 배경으로 삼은 점이 옳지 않음을 지적받아 제작진은 가상의 단체로 극을 수정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불편함과 혼란을 드린 점 깊이 사과드립니다. 친일 미화의 의도는 결단코 없었으며, 격변의 시대에 백정으로 태어난 설움으로 첫발을 잘못 디딘 한 사내가 의병들로 인해 변모해 가는 과정과, 그 잘못 디딘 첫발로 결국 바꿀 수 없는 운명에 놓임을 그리려는 의도였습니다.”

본래 구동매가 소속된 조직으로 그려진 ‘흑룡회’는 그래서 ‘무신회’라는 가상 조직으로 바뀌었다. 흑룡회의 상부조직인 겐요사는 일본 보수극우단체로서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다. 그런 점에서 구동매 캐릭터가 가진 ‘친일 미화’ 논란은 오영섭 교수가 지적한 내용들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자칫 흑룡회라는 단체가 구동매가 말하는 ‘조선이 버린 백정’이라는 포장으로 미화될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급기야 이러한 역사왜곡 문제들은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등장했다. 그 국민청원의 내용은 골자를 보면 이 드라마에서 “피해국과 가해국 입장이 묘하게 전복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물 개개인에게 부여된 서사가 조선이라는 나라를 피해국이 아닌 그것을 ‘자초한 쪽’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식민사관’이 담긴 이 드라마를 강력히 규탄하고 경고 조치 해달라는 청원의 내용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해석의 문제일 수 있다. 즉 일제강점기라는 아픈 역사의 태동을 단지 일본의 침략이 이유였다는 것만으로 보는 건 너무 사태를 ‘외부 요인’으로만 치부하는 것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늘 주창하던 ‘친일파 청산’ 같은 이야기는 담지 못하게 된다. 일본 같은 외세의 침략이 만든 아픈 역사는 분명하지만 그 속에서 친일파들의 공조는 더 아픈 면이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감안하고 본다고 해도 이 드라마가 이토록 지속적인 논란들이 나오는 것은 그만한 사전 준비가 미흡했다는 걸 말해준다. 사실 어떤 면으로 보면 오영섭 교수의 고증 지적은 이 드라마의 뼈아픈 사전 준비 부족을 드러낸다. 만일 전문가가 이 드라마의 고증에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했다면 이런 문제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또한 이 드라마가 그 엄청난 세트와 당대를 고스란히 재연해내려 한 미술 등에 들어간 비용의 아주 적은 일부조차 역사 고증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물론 최근 들어 역사 왜곡 논란은 여러 사극들이 퓨전화되면서 조금 희미해진 면이 없잖아 있었다. 이제는 사극을 ‘역사’라기보다는 ‘드라마’로 더 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제강점기는 여전히 뜨거울 수밖에 없는 시대다. 현대로까지 직접적으로 이어지는 역사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태양의 후예>와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로 연타석 홈런을 친 김은숙 작가가 <미스터 션샤인>으로 시대극에 도전한 건 분명 의미 있는 도전임에는 틀림없다. 멜로 장인으로만 불리던 김은숙 작가는 사실상 그 멜로를 기반으로 블록버스터 액션 장르나 판타지 장르 같은 새로운 분야로의 확장을 계속 꿈꾸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극의 무게는 김은숙 작가가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무겁다. 드라마만 잘 쓴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라 뚜렷한 자기만의 역사의식이 필요한 영역이라 그렇다. 

혹자는 드라마를 드라마로 보자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드라마는 현실과 떼놓을 수 없고, 그 중에서도 시대극은 그 어느 장르보다 현실에 더 민감하다. 게다가 시작 전부터 430억 대작이라는 기대감은 이러한 민감함을 증폭시켰다. 김은숙 작가가 <상속자들>을 통해 말했던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는 그 말이 실감나는 대목이다. 과연 김은숙 작가는 이 무겁디무거운 시대극이라는 왕관의 무게를 버텨낼 수 있을까.(사진:tvN)

<펀치>, 죽다 살아난 김래원의 욕망과 본질

 

아마도 거의 모든 콘텐츠에서 죽음은 사태의 본질을 깨닫게 만드는 계기가 아닐까. SBS 월화드라마 <펀치>에서 박정환(김래원)과 신하경(김아중) 검사가 맞닥뜨리게 되는 죽음의 사태가 그렇다. 이태준(조재현)의 심복으로서 그를 검찰총장까지 만들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일들까지 해온 박정환은 그러나 정작 그 권력의 눈앞에서 사망선고를 받는다.

 

'펀치(사진출처:SBS)'

하지만 수술 중 코마 상태가 되어버린 박정환을 두고 사태의 본질이 드러난다. 즉 이태준은 혼수상태인 그를 찾아와 눈물을 흘리지만 그것은 애도의 눈물이 아니라 배신의 눈물이다. 그는 자신의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박정환의 전처인 신하경을 살인자 누명을 뒤집어씌운다. 한편 신하경은 박정환을 살리기 위해, 또 그를 예전의 그로 되돌리기 위해 노력한다. 죽음 앞에서 아군과 적군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 셈이다.

 

<펀치>가 흥미로운 건 욕망의 끝에서 발견되는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겪고 난 자가 발견하는 새삼스러운 삶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무수한 드라마들을 통해 박정환 같은 야망의 인물들을 봐왔다. 이미 7,80년대의 시대극들이 대부분 그린 것이 그것이 아닌가. 이 야망의 인물들은 성공시대를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개발시대의 끝자락에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이다.

 

90년대 IMF가 터지면서 성공신화는 거품으로 판명 나 버렸고 한 시대를 풍미하며 살았던 이들은 고개를 숙였다. 성공신화의 죽음이다. 그런데 그 죽음을 통해 발견된 것들이 있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성장시키며 살아왔다고 믿었던 삶이 사실은 다른 것들을 소외시키고 파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죽음은 이처럼 본질을 드러내는 속성이 있다.

 

<펀치>는 마치 권투 경기를 벌이듯 쓰러졌다 다시 일어나 주먹을 날리는 드라마다. 박정환은 죽음의 끝에서 회생했고 그 과정을 통해 사태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 언제까지나 형제처럼 이어질 것 같던 이태준과의 의리는 사실 같은 욕망이 만들어낸 착각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반면 이혼한 전처와는 완전히 식은 줄 알았던 사랑의 불씨가 남아있다는 걸 발견한다. 죽음의 경험은 그에게 본질적인 삶으로의 회귀를 가능하게 해준다.

 

그런데 왜 하필 다른 것도 아닌 죽음일까. 여기에는 박경수 작가가 갖고 있는 현실인식의 단면이 들어가 있다.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이 현실은 그 정도, 즉 죽음을 맞이할 정도가 되어야 겨우 폭주기관차 같던 욕망을 멈출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권력과 욕망이 폭주하는 현실에서 그만큼 우리의 삶은 피폐해졌다. 심지어 자신을 위협하는 적과 늘 자신을 생각해주는 아군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죽다 살아난 박정환이 자신의 욕망을 벗어나 삶의 본질로 들어가는 과정은 그래서 한번 보면 <펀치>의 한 방에 눈을 사로잡히게 되는 이유가 된다. 그 과정은 다름 아닌 우리들이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을 살짝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과연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앞으로만 달려가는가. 모두가 달려가니 따라 달리던 우리네 관성에 강력한 한 방을 날리는 드라마. 그게 바로 <펀치>.

 


'빛과 그림자'와 역사 속 실제인물

'빛과 그림자'(사진출처:MBC)

'이 드라마는 특정인물이나 사건과 관련이 없으며 당시 시대상을 배경으로 창작되었습니다.' 드라마를 보다보면 시작 전에 이런 자막을 내보내는 경우가 있다. '빛과 그림자'도 그런 드라마 중 하나다. 특정 시대를 다루기 때문에 그 시대의 인물들이 드라마 속 인물과 겹쳐져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리 이런 자막을 내보내도 드라마 속 인물들이 역사 속 실제 인물을 떠올리게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보다. 그래서 자막을 굳이 붙이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빛과 그림자' 같은 시대극은 이 가상의 캐릭터와 실제인물을 맞춰보는 재미 역시 쏠쏠한 드라마임에 틀림없다.

'빛과 그림자'는 현대사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했던(물론 실제로는 암울한 역사였지만) 박정희 군부독재 시절을 다루고 있다. 워낙 드라마틱했기 때문에 이 시절을 다룬 드라마가 꽤 있었지만 '빛과 그림자'는 이 시절을 영화사, 가요사 같은 대중문화사의 눈으로 바라봄으로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드라마에 전면으로 '각하'가 등장하진 않지만 '각하'의 존재감은 이 드라마의 기본전제가 된다. 장철환(전광렬)이나 김부장(김병기)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드라마에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근거는 바로 이 '각하'에 대한 충성이 전제되기 때문이다.

'특정인물과 상관없는 가상의 인물'이지만 서로 못 잡아먹어 으르렁대는 장철환과 김부장에서 차지철과 김재규를 떠올리게 되는 건 그런 이유다. 그만큼 당대의 권력자들인데다 그 팽팽한 대립이 결국 궁정동의 총성으로까지 이어진 시대의 인물들이 아닌가. 각하를 두고 벌어지는 비서실과 중정의 대립은 그래서 이 드라마의 기본 얼개가 되어 있다. 그 밑으로 장철환의 비호를 받는 조명국(이종원)이 있고, 김부장이 밀어주는 빅토리아 클럽의 손미진(이휘향)이 있으며, 또 조명국 밑으로 세븐스타쇼단의 노상택(안길강)과 빛나라쇼단의 강기태(안재욱)가 서 있다. 위로는 정치권력의 대립이 있고 그 밑으로 딴따라로 비하되던 쇼단 연예인들의 대결이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이 차지철과 김재규를 떠올리게 하는 그림은 많은 이들에게 궁정동에서 벌어진 '그 때 그 사람'의 실제 사건을 예감하게 만든다. 과연 누가 누군가에게 총을 쏠 것인가와 그 자리에 누가 있을 것인가에 대한 기대감이다. 알다시피 당시 자리에 각하와 이들 권력자들, 그리고 연예인들이 함께 있는 이 그림은 다분히 정치와 연예계를 엮어 그 시대를 풀어내려는 '빛과 그림자'의 풍경이 가진 뉘앙스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특정 사건과 관련 없다'고 주장하는 드라마는 전혀 다른 결말을 향해 갈 수도 있을 테지만 말이다.

시대극이 당대의 현실과 무관한 허구로만 치닫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니 당대를 드러낼 수 있는 사건들과 인물들은 어떤 식으로든 이 드라마 속에 들어올 수밖에 없다. 다만 똑같이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재구성되고 재해석될 뿐이다. 하지만 다른 이름으로 인물이 만들어지고 사건이 재해석된다고 해서 너무 실제와 멀어져서도 안 된다. 따라서 어디선가 실제로 본 듯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세창이 연기하는 느끼남 최성원이나 당대 전국구 주먹으로 나오는 조태수(김뢰하)를 보며 당대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되는 건 그 때문일 게다. 물론 이 드라마는 아예 실제 인물을 오마주로 활용하기도 한다. 박준규가 연기하고 있는 마도로스박이다. 이 인물은 실제 당대 최고 액션배우였던 박준규의 아버지 박노식을 오마주한 캐릭터다.

'이 드라마는 특정인물이나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드라마의 문구를 볼 때마다 거꾸로 자꾸만 그 특정인물과 사건을 떠올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당대를 살아온 이들의 호기심일 것이다. 그래서 '빛과 그림자'는 암울했던 시대의 정치와 딴따라가 대결하는 그 스토리도 재미있지만, 이 드라마 속 인물들이 과연 실제 역사에서 누구와 닮았는가를 찾아내는 것도 쏠쏠한 드라마다. 저 인물은 도대체 실제 누구를 모델로 한 것일까. 이것은 하나의 놀이(?)이지만 그 놀이가 갖는 역사성은 지금 현재와도 연결고리를 갖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다.


'빛과 그림자', 이토록 유쾌해도 되는 걸까

'빛과 그림자'(사진출처:MBC)

'빛과 그림자'가 그리는 시대는 우리가 흔히 '어두웠던 시절'이라 부르는 독재시절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그 어두움이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이렇게 유쾌해도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 하지만 이 특유의 유쾌함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빛과 그림자가 대결하던 시대를 살아온 우리는 빛과 그림자의 싸움을 머릿속에 늘 그려왔지만, 사실 빛이 그림자를 내모는 방식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림자는 빛이 더 빛나면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빛과 그림자'의 유쾌함은 마치 시대의 어둠을 유쾌함으로 이겨내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정치의 암울함에 맞서 딴따라라 불렸던 발랄한 쇼가 대결하는 드라마, 바로 '빛과 그림자'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기 마련. '빛과 그림자'라는 드라마는 그 통상적이지만 영원한 우리네 삶의 진실을 보여준다. 먼저 이 드라마의 인물들은 성공과 실패, 그 빛과 그림자를 오간다. 강기태(안재욱)는 순양극장을 소유하고 있는 지방유지 강만식(전국환)의 아들로 고민 없이 부유하게 자라지만, 밉보인 장철환(전광렬) 의원에 의해 몰락하게 되는 인물. 장철환의 사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간 아버지가 싸늘한 시체로 돌아온 후, 집안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반면 강기태네 집 식모의 아들인 차수혁(이필모)은 친구인 강기태를 배신하고 장철환 의원을 보좌함으로써 그와 함께 권력의 핵심으로 들어가게 된다. 한편 빛나라쇼단의 단장 신정구(성지루)는 강기태의 돈을 떼먹고 야반도주 하지만 그렇게 1년을 탕자처럼 지내고는 길바닥을 전전하는 삶을 살아간다. 반면 양태성(김희원)은 정혜(남상미)에게 빌붙어 살아가는 전형적인 건달이었지만 월남에 가서 무기 밀거래를 하며 벼락부자가 되어 돌아온다. '빛과 그림자'들의 인물들의 인생역정은 이처럼 다이내믹하다. 하루아침에 그림자로 전락했다가도 어느 순간 빛으로 떠오르는 그런 인생.

이것은 그 시대가 가진 빛과 그림자를 떠올리게 한다. 군부 독재 시절로서 이유 없이 남산에 끌려가 모진 고문 끝에 시체로 나오던 그 어두운 시대였지만, 또한 성공의 사다리가 지금처럼 꽉 막혀 있지 않고 도처에 있던 시대. 물론 그 성공에는 값비싼 대가가 치러졌지만 향수어린 시각으로 바라보는 당대란 그림자마저 추억처럼 여겨지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모두가 멈춰 서서 국기를 향해 경례를 하던 그 잿빛의 암울함은, 신정구과 강기태가 그 정지화면 위에서 도망치고 추격하는 장면이 발랄하게 삽입될 정도의 추억으로 그려진다.

사실 강기태라는 캐릭터 자체가 하나의 향수이자 추억이다. 도무지 이 인물은 절망하거나 비관할 줄 모른다. '골치 아픈 건 딱 질색'인 이 인물은 아버지가 죽고 몰락한 집안에서도 여전히 큰 소리 뻥뻥이다. 그래서 보통의 드라마가 누군가에 의해 몰락한 집안을 다시 세우기 위해 복수를 꿈꾸지만, 이 드라마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강기태라는 캐릭터는 복수보다는 자신의 성공을 더 꿈꾸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래서인지 이 드라마는 가장 무거울 수 있는 강기태의 몰락을 그리면서도 시종일관 유쾌하다. 이것은 강기태라는 캐릭터의 힘이면서 지나간 일을 추억어린 눈으로 회고하는 이 시대극의 시선이 가진 힘이기도 하다.

물론 이러한 발랄함의 시선이 유지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드라마가 '쇼'를 소재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모의 부음을 듣고도 쇼 무대에 올라 바보 연기를 했다는 과거 코미디언들의 유명한 일화들처럼, 이 시대극의 쇼는 그 무대 뒤편의 그림자들을 덮어줄 만큼 빛으로 가득하다. 당대의 쇼 비즈니스는 안가에 연예인들이 불려가 노래를 불러야 할 정도로 어두운 면이 있었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쇼란 그 어둠마저 덮어버리는 화려한 무대가 아니던가. '빛과 그림자'는 그래서 정치와 얽혀진 어두운 시대의 쇼가 보여주는 양면을 보여주면서도, 거기에 어둠마저 시간이 지나면 빛으로 환산시키는 기억이 만들어내는 마법을 집어넣는다.

'빛과 그림자'가 주목을 끄는 것은 바로 이 추억의 시간여행이 가져다주는 특유의 유쾌함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한때 딴따라라 불리던 연예 엔터테인먼트 산업과 어두운 정치권력, 그리고 뒷골목 건달들의 이야기들이 얽혀 있는 시대극의 무게를 갖고 있으면서도, 결코 발랄함을 잊지 않는다. 당대의 힘겨웠던 삶조차 이렇게 몇 십 년이 흐른 뒤 바라보면 한 바탕의 쇼처럼 아련해지는 모양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시각은 지금 현재 결코 쉽지 않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작은 위안을 준다. 힘겨워도 이것을 이겨내고 나면 이 또한 한 바탕 우리 삶의 즐거운 쇼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 딴따라라 불리던 그들이 이제 우리의 가슴 속에 별로 남은 건 그 힘겨운 현실 속에서도 유쾌한 쇼를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딴따라라 불렸던 쇼가 당대 권력인 정치를 이겨내는 방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힘겨워도 빛을 잃지 않는 것. 그리고 스스로 빛나는 것.

'자이언트'가 소화한 것, 다양한 장르, 시청층, 연기

실로 '거인'다운 소화력이었다. 드라마는 전형적인 시대극이지만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었고, 그 장르들의 문법들을 꿀꺽꿀꺽 삼켜버렸다. 중요한 건 '삼켰다'는 것이 아니라 그걸 '소화해냈다'는 것. 시청자들이 원하고 필요한 것이라면, 그리고 흥미와 구미를 당길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삼켜서 기어이 소화해내고 마는 세계, 그것이 바로 '자이언트'의 세계였다.

시대극은 넓게 보면 사극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아주 가까운 역사를 다룬다는 것. 이것은 사소한 것 같지만 작품에는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낸다. 가까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역사의 평가에 민감할 수 있다는 것이고 또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에 있어서도 어떤 한계를 지운다는 의미다. 그래서 '자이언트'는 초반부터 특정 정치인을 옹호하는 드라마로 오인 받았다.

하지만 '대조영'을 겪은 장영철 작가의 뚝심은 여전했다. 시대극이라는 특성에 걸맞게 실제 사건들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면서도 장영철 작가는 그 속에 인물들의 대결에 좀 더 과감한 허구적 상상력을 끼워 넣었다. 인물들에게 끊임없이 제기되는 미션과 그 미션의 해결과정에 부딪치게 되는 대결구도는 사극의 장르적 특성처럼 '자이언트'의 꺼지지 않는 에너지원이 되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시대극이 부여하는 현실감에 머무르지 않고 끝없이 상상력을 펼쳐나간 점은 초반의 오인을 뒤집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역시 드라마는 드라마라는 인식을 갖게 만든 것이다. 결국 이 뚝심은 오해마저 삼켜버리고 소화시키는 저력을 발휘했다.

하지만 초반의 시청률 부진은 단지 이런 오해 때문만이 아니었다. 사극적인 대결구도와 치밀한 심리전으로 흘러가다 보니 정서적인 공감대가 따라오질 못했다. 물론 남성들은 이 사극적인 특징에 매료되었지만, 여성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래서 '자이언트'가 어떤 전환점이 된 것은 뿔뿔이 흩어졌던 강모(이범수)와 성모(박상민) 그리고 미주(황정음)가 다시 만나게 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자이언트'는 빠른 사건 전개와 반전이 주는 특유의 스릴러적인 특징으로 남성 팬들을 사로잡으면서, 동시에 가족드라마적이고 멜로드라마적인 요소들을 덧붙임으로서 여성 팬들까지 끌어들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서로 원수가 되어버린 가족들 속의 인물들이 서로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강모는 다시 만난 정연(박진희)과 사랑에 빠지고, 미주는 민우(주상욱)와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그 아버지들이 원수라는 걸 알게 되고 헤어지게 된다. 다분히 작위적인 느낌이 있지만 말 그대로 이 멜로와 가족드라마적 요소들은 시대극이 궁극적으로 끌고 가려는 하드보일드한 이야기들 위에서 말랑말랑한 매력을 첨부했다. '자이언트'는 자칫 특정 세대로만 집중될 수 있었던 시청층을 삼키고는 대중성을 확보했다.

이런 다양한 장르의 공존이 가능했던 것은 장르를 잘 이해하는 유인식 감독의 공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뭐든 해낼 수 있는 든든한 배우들이 있었다. 이 작품의 배우들은 어느 한 장르의 결을 연기했다기보다는 주어지는 모든 장르를 소화해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는 점에서 쉽지 않았다. 미주 역할을 한 황정음은 신파적이기까지 한 가족드라마의 여동생에서 갑자기 비운의 줄리엣이 되는 멜로드라마의 여자로 변신해야 했고, 그 후에는 가수로 성장해가는 성장드라마의 여성을 연기해야 했다. 민우 역할의 주상욱은 피도 눈물도 없는 악역에서 여자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멜로 연기를 소화해야 했다. 박소태를 연기한 이문식은 적과 친구를 넘나드는 연기를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누구보다 재발견된 배우는 정보석과 박상민이다. 정보석은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악역으로 처음부터 마지막회까지 혼신의 연기를 보여주었다. 아무리 궁지에 몰아도 절대로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강한 카리스마는 이 드라마가 마지막까지 힘을 잃지 않은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박상민은 액션연기에서부터 맏형으로서의 애틋한 가족애를 선보이며 주목받았고,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나 마지막 부분에 뇌손상을 입은 모습까지 말 그대로 연기자로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장군의 아들' 이후 밋밋하게까지 느껴졌던 그의 이미지는 '자이언트'를 통해 확고하게 연기자로서의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자이언트'는 이처럼 연기자들 속에서 끄집어낼 수 있는 연기의 극점까지 낱낱이 끄집어내 삼켜버렸다.

그래서 거의 모든 장르를 삼키고, 시청률을 삼키고는, 연기자들의 거의 모든 연기까지 끄집어낸 '자이언트'가 결국 소화해낸 것은 강남과 개발로 축약되는 한 시대의 모습이었다. 누군가는 끝없는 욕망에 사로잡혔고, 누군가는 복수하듯 처절하게 살아왔던 그 시대의 끝자락에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꼭대기에 선 자의 처절함과 쓸쓸함'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토록 뛰어왔던가. '자이언트'가 결국 돌아가는 길은 가족이다. 성모가 저 세상으로 떠난 후에 마치 그 자리를 메워주듯 막내가 찾아오고, 강모는 집으로 돌아간다. 그 길은 아마도 살아남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기나긴 개발시대의 터널을 지나와서야 겨우 알게 된 행복의 의미를 찾아가는 길이 아니었을까.

사극을 넘어선 시대극의 저력과 그 문제점

시대극 전성시대다. ‘제빵왕 김탁구’가 7,80년대의 암울했던 시대적 분위기를 넘어서 성장해가는 김탁구를 시대극의 틀 안에서 그리며 5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면, ‘자이언트’는 강남 개발이라는 소재를 시대극으로 풀어내며 경쟁 작품이었던 사극 ‘동이’의 시청률을 앞지르는 이변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새롭게 시작한 ‘욕망의 불꽃’은 엄밀히 말하면 시대극이라고 하기가 어렵지만, 시대극이 갖는 장치들을 백분 활용하면서 연일 시청률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이들 시대극을 막강하게 만드는 걸까.

한때 시대극은 실패작의 전형처럼 여겨지곤 했다. 과거 방영되었던 ‘사랑과 야망’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켰지만, 다시 리메이크된 ‘사랑과 야망’은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에 이어진 ‘로비스트’나 ‘에덴의 동쪽’ 그리고 ‘태양을 삼켜라’ 같은 시대극도 거의 모두 실패했다. 이유는 당연하다. 과거 시대극들이 갖는 성공에 대한 집착이 어딘지 시대착오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미 드라마들은 성공이 아닌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하나의 대세가 되고 있었다.

하지만 현재 방영되고 있는 시대극들은 이들 작품들과는 궤를 달리한다. 물론 성공에 대한 집착이 그 속에도 꿈틀대지만, 이들 작품들은 거꾸로 그 집착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가에 더 집중한다. 따라서 현재의 시대극들 속에 성공에 집착하는 인물들은 주인공이 아니라 대부분 악역들이다. ‘제빵왕 김탁구’의 구마준(주원) 혹은 서인숙(전인화)이나, ‘자이언트’의 조필연(정보석) 같은 인물들을 끝없는 성공에 대한 욕망을 보이지만 그것이 결국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제빵왕 김탁구’가 ‘행복’을 주제로 빵을 만드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욕망의 불꽃’도 마찬가지다. 이 작품은 나영이라는 성공하기 위한 욕망에 불타오르는 캐릭터가 바로 그것 때문에 얼마나 처절한 불행을 맞이하는가를 바라보는 드라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언니의 자리까지 빼앗아 버린 그녀는 결국 정점에 도달하지만 그 과정에서 생겨난 수많은 죄들이 고스란히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개발시대가 남긴 아픔을 이 욕망의 불꽃을 가진 캐릭터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작금의 시대극이 과거의 가치관에 머물지 않고 현재적 의미를 확보하게 되면서 오히려 시대극이 갖는 장점이 부각된다. 그것은 폭넓은 시청세대의 가능성이다. 과거는 넘어서야 할 막장에 가까운 시대의 장벽이지만 한 세대에게는 향수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과정에서 보여지는 성장드라마는 젊은 세대들의 판타지가 된다.

물론 시대극의 힘이 이처럼 막강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모두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런 시대극은 특성상 과거의 드라마들이 가진 자극적인 설정들을 끌어오게 마련이다. 그 설정들 자체가 시대의 아픔을 표현하는 소재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설정들이 지나치게 자극으로 흐른다는 비판이 나올 수밖에 없다. ‘욕망의 불꽃’에서 낙태나 강간, 뺑소니 게다가 아이의 자살시도 장면이 등장하고, ‘자이언트’에서 납치와 폭력 수위가 높은 장면이 등장하는 것은 그 의미는 이해가 되지만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막장이라는 비판은 이런 부분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시대극은 과거 어느 때보다 그 힘이 막강해졌다. 하지만 시대극이 본래의 목적인 시대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노력보다 자극에만 더 치중하게 될 때, 그것은 자칫 시대극의 동반추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 자극은 더 큰 감각적인 자극을 요구하게 될 것이고, 결국 그것이 어떤 한계수위에 도달해 충족되지 않을 때 자칫 달라진 시청자들의 입맛을 만족시키기 어려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욕망의 불꽃', 욕망에 대한 탐구, 한 시대를 그리다

무엇이 그토록 그녀가 돈을 욕망하게 만들었을까. 대신 감옥에 간 부채감 때문에 친구 태진(이순재)이 놓고 간 돈다발을 아버지가 집어던지자, 그녀는 그 흩어진 돈을 주우려 아귀처럼 달겨든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는 아버지보다 돈이 더 좋다!"

'욕망의 불꽃'의 이 한 장면은 이 드라마가 그려내려는 이야기들의 많은 단서들을 제공한다. 먼저 불꽃 욕망을 품고 있는 이 여자, 윤나영(신은경)이라는 캐릭터.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고 싶어 부자와 결혼해 팔자를 고치려는 그녀의 뜨거운 욕망은 이 드라마의 시작점이다. 그녀의 욕망은 가족조차 불태워버릴 만큼 뜨겁다.

본래 태진의 아들 영민(조민기)과 결혼하기로 되어 있는 착하디 착한 언니 정숙(김희정)을 밀어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그녀는 자신의 욕망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슬쩍 자리는 내주는 정숙에게 그녀는 오히려 "너는 욕망이 없다"며 "그건 착한 게 아냐. 두려운 거지."하고 말한다.

그녀에게 사랑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결혼은 했지만 사랑이 없는 태진을 찾아 미국까지 간 그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태진에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건 불변의 진리가 아녜요. 변하잖아요."하고 말한다." 그녀에게 "사랑 따위'는 필요하다면 "만들어 가면 되는" 어떤 것이다.

신은경이 연기하는 나영이라는 캐릭터는 마치 막장드라마에 등장하는 희대의 악녀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거 다 차지할거야"하고 소리치는 그녀가, 인륜을 넘어설 만큼 욕망에 불타는 희대의 악녀가 아니라 연민의 대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여기에는 이 드라마가 시대극으로서 한 시대의 욕망과 상처를 나영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투영해보여주기 때문이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갖게 된 그 엄청난 욕망 속에는 개발시대를 살아낸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 그려진다. 그녀의 꺼지지 않는 욕망은 그녀를 수직상승하게 만들지만, 그것은 또 다른 비극의 시작점이 되게 된다.

'욕망의 불꽃'이 막장에 가까운 설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막장드라마로 흐르지 않는 것은 바로 이 시대적 정서를 그대로 담고 있는 신은경의 캐릭터 덕분이다. 이 캐릭터가 갖는 욕망과 그로 인해 빚어진 비극은 그 속에 시대적 정서를 담아낸다.

따라서 이 드라마는 한 가족의 치정극에 머물지 않는다. 나영이 그 어린 시절, "아버지보다 돈이 더 좋다"고 소리치던 그 시절, 악착같이 살기 위해서 우리가 버린, 혹은 잃어버린 것을 이 드라마는 그 후에 벌어지는 비극을 통해 들여다본다.

성공을 위해 가족까지 다 내버렸고, 사랑 따위는 만들면 그뿐이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바로 그 파편화된 가족과 사랑 없는 욕망의 세계 속에서 파멸해간다. 인간이 품는 욕망에 대한 탐구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겪어낸 한 시대의 빗나간 욕망을 담아내고 있는 '욕망의 불꽃'. 그 욕망을 캐릭터로 보여주는 신은경의 연기가 예사롭지 않게 보이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핏줄 의식의 힘, 그 힘을 넘어서

내세울만한 톱스타도 없고, 눈을 잡아끄는 스펙터클도 없다. 중견연기자들이 보여주는 탄탄한 연기가 드라마의 허리를 지탱해주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제빵왕 김탁구'가 보여준 괴력을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게다가 연출이 실험적이거나 빼어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결국 스토리에 답이 있다는 것인데, 완성도로만 놓고 보면 '제빵왕 김탁구'는 과장이 많고 개연성도 많이 떨어지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뭘까. '제빵왕 김탁구'의 그 무엇이 대중들을 그토록 열광하게 한 것일까.

스토리의 완성도와는 별도로, 이 드라마는 이른바 시청률이 된다는 검증된(?) 소재들이 넘쳐난다. 출생의 비밀, 불륜, 부모와 자식 간의 상봉, 복수, 경합, 가족애, 미션이 주어지는 성장드라마, 형제애, 자식을 두고 벌이는 부모 간의 대결, 비밀, 엇갈린 사랑.... 아마도 우리네 드라마들이 가졌던 성공 코드들을 이 드라마 속에서 거의 다 발견할 수 있을 정도.

이 드라마의 세대적인 폭이 넓은 것은 시대극의 틀 속에 성장 드라마적 요소를 집어넣은 공적이지만, 또한 이를 받쳐주는 다양한 성공 코드들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코드들을 김탁구(윤시윤)라는 실전적인 인물의 성장 스토리 속에 녹여낸 것이 드라마가 성공을 거둔 가장 큰 이유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코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네 가족드라마들이 늘상 강조하는 '핏줄의식'이다. 수많은 세월을 수많은 이야기들과 함께 걸어왔지만, 이 드라마가 결국 보여주는 것은 '핏줄에 대한 끈끈한 애정'이다.

구일중(전광렬)의 김탁구에 대한 남다른 애정, 오로지 자식을 위해 자기 한 몸을 희생하는 삶을 마다하지 않는 김탁구의 모친 김미순(전미선)의 절절한 자식 사랑,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끝까지 엄마를 찾아 헤매는 김탁구의 효심이 이 드라마의 긍정적인 힘을 만들어낸다면, 자기 핏줄에 대한 지나친 편애로 비뚤어져 버린 서인숙(전인화), 불륜으로 갖게 된 자식을 거성식품의 후계자로 세우기 위해 자신이 친아버지임을 숨기면서까지 모든 악행을 떠안는 한승재(정성모), 그리고 이 모든 것들 때문에 비뚤어져 버리는 구마준(주원)은 핏줄의식으로 보여지는 이 드라마의 부정적인 힘이다.

모든 것을 경쟁으로 바라보며, 누군가가 이기면 누군가는 질 수밖에 없다 여기는 한승재는 그래서 잘못된 가족 이기주의의 표상처럼 보인다. 반면 모두가 다 행복해질 수 있다 여기는 김탁구는 만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을 가족으로 끌어들이는 힘을 발휘한다. 그는 가족의 범주를 확장시킨다.

시대에 따라 가족에 대한 의식도 달라져 왔다는 점에서 이 가족에 대한 서로 다른 의식은 이 시대극 속에서 서로 대결을 벌인다. 시대극으로 보면 한승재는 '경쟁'을 가치로 삼던 구시대의 인물이고, 김탁구는 '행복'을 가치로 삼는 현 시대의 인물이다.

'제빵왕 김탁구'의 힘은 바로 이 우리네 정서를 끌어당기는 핏줄의식에서 비롯된다. 물론 이 시대에 여전한 것이 바로 이 핏줄의식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이 핏줄의식이 가진 힘으로 추동력을 얻은 후에 차츰 그 핏줄 이상의 판타지로 나아간다. 구마준이 친형제임을 부정하는 것에 대해 김탁구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자칫 가족주의에 매몰될 수 있는 드라마가 그것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김탁구라는 캐릭터를 통해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을 그려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김탁구와 구마준이 서로 자신들의 지분을 합쳐서 큰 누나인 구자경(최자혜)에게 거성식품의 대표이사 자리를 내주는 장면을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여성이 CEO가 되는 것이 더 이상 이상하지 않은 시대가 도래했음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고, 팔봉선생의 마지막 경합주제였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빵'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빵'은 가족이라는 틀 그 이상을 넘어서 모두가 행복해지는 삶이라는 것을 '제빵왕 김탁구'는 말하고 있다.

'제빵왕 김탁구', 빵으로 시대를 풀어내다

굶주린 아이가 빵집을 들여다보는 장면은 배고팠던 70년대의 감성을 자극한다. 그 고소하고 달콤한 향기에 씹을수록 말랑말랑한 질감의 기억은 당대의 가난을 향수할 수 있을 만큼 아련하게 다가온다. '제빵왕 김탁구'가 처음 그려낸 정서는 바로 이 가난한 시대에 맡았던 빵의 향기처럼 유혹적이면서도 처절하다. 가난은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김탁구(아역 오재무) 모자를 삶의 바깥으로 밀어낸다. 그런 탁구를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 배고팠던 시절에 코를 자극했던 빵의 기억이다. 그가 팔봉빵집으로 들어오기까지의 세월은 가난이 몸에 배어 배고픔을 잊기 위해서는 뭐든 했던(그래서 그것이 심지어 '생활의 달인'을 만들었던) 시대를 함축한다.

김탁구(윤시윤)가 경합에서 첫 과제로 받은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빵'이라는 주제는 이 시대의 감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김탁구는 자신의 배고팠던 시절을 떠올리며, 시장통의 한 아이를 위해 빵을 만든다. 팔봉(장항선)선생의 말처럼 이 과제는 '남을 생각하는 마음'을 시험하는 것. 이 과제에서 탁구에 의해 만들어지는 옥수수 보리밥 빵은 기억 속 서랍장에 넣어두었던 가난했던 보릿고개의 기억 한 자락을 끄집어 올린다.

그렇게 돌아온 김탁구는 차츰 다양한 빵을 실험하는 일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적당하게 숙성시켜야 맛을 내는 발효과정이나, 적절한 습도를 조절해야 빵을 제대로 구울 수 있다는 노하우를 배워나가면서 김탁구는 빵 만드는 일에 희열을 느낀다. 드라마의 시대로 80년대를 상정하는 이 시기에 김탁구는 이제 일이 그저 생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그저 배고픔을 없애는 빵에서 이제는 건강까지 생각하는 빵을 만들면서 그 도전이 가진 가치를 깨닫기 시작한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빵'이라는 경합에서의 두 번째 과제는 이 시대의 감성을 담는다. 생존을 넘어서서 새로운 세계에 대한 끝없는 도전은 이 과제에서 탁구와 마준(주원)으로 하여금 이스트 없는 빵을 만들게 한다. 그리고 그 도전은 좀 더 좋은 빵(맛도 좋고 건강에도 좋은)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기술혁신을 통한 성공에 몰두하던 8,90년대 경제상황을 돌아보게 한다. 당대에 사람들의 소비가 단지 기능적인 것 이외에 부가적인 가치들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듯이.

그리고 팔봉 선생이 죽은 후 유지처럼 남겨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빵'은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의 가치를 빵에 담아낸다. 이제 이 시대의 가치는 살아남기 위한 생존도 아니고 성공을 위한 도전도 아닌 스스로 느끼는 행복이다. 남을 생각하는 마음만큼 자신 스스로가 즐거워야 그 마음이 온전히 빵에 담겨져 맛을 낸다는 것을 김탁구는 알게 된다. 그래서 그는 팔봉 선생의 부고에 영업정지까지 맞은 팔봉 빵집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즐거운 마음으로 빵을 굽는다. 팔봉 빵집 식구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즐겁게 담소하며 먹는 빵, 그것이 문제로 제시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빵'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팔봉 선생이 낸 세 가지 과제는 우리 시대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첫 번째 과제는 가난의 시대를 담고, 두 번째 과제는 도전의 시대를 담았다면 마지막으로 제시된 과제가 담아낼 것으로 요구하는 것은 행복의 시대다. 이것은 빵으로 시대를 풀어낸 '제빵왕 김탁구'만의 독특한 시대극이 거둔 성과다. 그저 시대의 역사적 사건들을 나열하기보다는 빵이라는 맛과 향으로 그 시대를 맛보게 한 것. '제빵왕 김탁구'가 꺼내놓은 빵들에서는 우리가 살아왔던 시대의 향기가 느껴진다.

멜로는 드라마의 독? 멜로에 대한 갈증은 여전

멜로는 여전히 드라마의 독일까. 트렌디 드라마들의 퇴조와 함께 멜로의 시대도 끝났다고 생각되던 때가 있었다. 실제로 멜로드라마들이 시청률 40%대를 구가하던 건 이젠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이른바 전문직 장르 드라마의 출현은 멜로를 피해야할 어떤 것으로 치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멜로드라마가 줄어들었다고 해서 멜로가 사라졌을까. 멜로는 전문직 장르 드라마는 물론이고 사극, 시대극 등 다양한 장르 속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그리고 실질적인 드라마의 성패를 뒤흔드는 존재로까지 부상하게 되었다.

'동이'와 '자이언트'의 시청률 곡선을 보면 멜로가 드라마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흥미로운 결과를 발견할 수 있다. '동이'의 초창기 시청률을 끌어올린 장본인은 단연 동이(한효주)와 숙종(지진희)이 궐 밖에서 만나 벌이던 일련의 멜로 시퀀스다. 이른바 깨방정 숙종의 등을 밟고 담을 넘는 동이의 이야기는 이 사극에 힘을 부여했다. 그 후로 숙종이 정체를 숨긴 채 동이와 마음을 나누는 장면들이 시청자들을 설레게 했다. 하지만 동이가 숙종의 정체를 알게 되고 궐 내로 들어오면서부터 멜로는 주춤하기 시작한다. 대신 억울하게 궐 밖으로 내쳐진 인현왕후(박하선)를 복귀시키려는 동이와 장옥정(이소연)과의 대결구도로 이어지면서 시청률은 급하락했다.

이것은 물론 이 대결구도가 이미 여러 다른 사극에서 반복되었던 전형적인 틀을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락하던 시청률을 다시 다잡은 것이 멜로로의 복귀라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깨방정 숙종'이라는 캐릭터는 바로 이 '동이'라는 사극의 정체성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왕이지만 서민적인 소탈한 모습은 동이와의 멜로를 통해 가장 극적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천민 출신을 사랑한 왕의 인간적인 모습은 이 사극이 가진 또 다른 축, 예를 들면 추리적인 요소 같은 것들을 소소하게 만들만큼 강력하게 다가온다.

한편, '자이언트'가 초반부 긴박하게 흘러가던 사건의 연속에도 좀체 오르지 않던 시청률을 끌어올린 것은 강모(이범수)가 어린 시절 헤어졌던 가족들인 성모(박상민)와 미주(황정음)를 만나면서부터이다. 물론 이 만남은 멜로가 아니지만, 이 두뇌게임을 치르는 것 같은 드라마에 어떤 감정을 부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이 당시 생겨난 강모와 정연(박진희)의 애틋한 멜로가 이어지면서 시청률은 급물살을 탔다. 현재 이 드라마에서 사건의 흐름보다도 더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미주와 민우(주상욱)의 멜로라는 사실은 특기할만한 사항이다.

멜로는 늘 반복되는 삼각 사각으로 이어지는 관계, 항시 존재하는 신데렐라 이야기, 부모의 반대로 겪게 되는 혼사장애, 우연한 만남의 남발 등등으로 비판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멜로의 이런 경향은 작금의 드라마들 속에서도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다양한 장르와 소재들로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드라마로 그려지고 있는 현재에도 여전히 멜로에 대한 갈증은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멜로는 이제 드라마의 윤활유로서 자리하고 있다. 멜로는 과도하면 식상하지만, 적절하면 드라마에 윤기와 촉촉함을 더해준다. '동이'와 '자이언트'가 보여준 일련의 시청률 등락은 이런 멜로의 힘을 잘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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