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2017’, 학교가 부조리한 현실의 축소판이라는 건

이걸 어떻게 청소년 드라마라고 볼 수 있을까. KBS 월화드라마 <학교 2017>은 어른들이 불편한 드라마다. 학교라고는 해도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그대로 우리네 부끄러운 현실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성적으로 줄 세우는 학교. 그래서 공부를 못하면 더 이상 다닐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학교. 심지어 공부를 못한다고 문제아가 되는 이 학교의 시스템은 가진 것 없는 서민들이 사람 취급 받지 못하는 현실 그대로다. 

'학교2017(사진출처:KBS)'

끝없이 이어지는 시험과 그렇게 나온 결과를 버젓이 벽보에 붙여 자신의 등수를 확인시키는 이 학교에서 은호(김세정)는 성적이 바닥이다. 공부에는 영 재능이 없지만 이 아이는 웹툰 작가가 꿈이다. 하지만 학교는 이 아이의 꿈 따위는 소중하게 바라봐주지 않는다. 애써 그려온 습작노트를 보고 그 꿈의 등을 두드려주지 못할망정, 선생님은 그 노트를 빼앗아가 버린다. 소중한 노트를 찾기 위해 교무실에 몰래 들어가게 된 은호는 마침 그곳에서 불을 지르고 있는 의문의 인물을 목격하고, 오히려 자신이 그 범인으로 몰려 퇴학 위기에 처한다. 

학교는 범인을 찾기보다는 희생양을 찾으려 한다. 범인 잡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른바 학교의 권위를 세우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호가 범인이라는 증거가 없음에도 그녀를 범인으로 몰아세운다. 가난하고 공부도 못하는 은호는 희생양으로서 최적의 인물이 된다. 제자를 구제하려는 담임선생님의 노력은 무시된다. 결국 그렇게 제자가 퇴학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지만 선생님과 그녀와 아빠 같은 힘없는 어른은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하는 자신들을 자책한다. 

학교 바깥은 더 살벌한 현실이라는 것을 선생님들조차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학교가 그 현실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해주기는커녕 오히려 공부 못하는 학생들을 바깥으로 내몬다. 과연 이건 학교라는 곳이 해도 되는 일일까. 학교가 너무 쉽게 아이들을 바깥으로 내몬다는 담임선생님의 한탄 속에 우리네 현실의 부끄러운 민낯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이 학교라는 단어를 사회로 바꾸면 그 굴러가는 시스템이 완벽하게 똑같다는 걸 우리는 알 수 있다. 공부를 못하면 있을 수 없는 곳이 학교라지만, 그 공부 또한 어떤 부모를 만나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고가의 학원을 보내고, 심지어 족집게 과외를 시키는 부모의 아이들이 학교의 상위권을 형성하고, 그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만을 위한 학교가 되게 하기 위해 영향력을 행세한다. 가진 것 없는 집의 아이들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범인으로 몰린 은호에게 공부를 못한다며 그래서 문제아라는 선생님의 지적이 이어지고, 청문회를 예로 들어 결국은 사실대로 다 불게 되어 있다며 몰아세우자, 은호가 오히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이들이 모두 수재였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장면은 그래서 따끔하다. 그렇게 부조리한 시스템에서 자신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걸 몸으로 체득하며 자라나 이른바 성공이란 걸 한 어른이 어찌 제대로 사회에 기여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 

<학교 2017>은 그래서 그저 청소년 드라마가 아니다. 그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우리네 현실의 축소판이고, 그런 학교에서 자라난 아이들이 바로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라날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청소년 드라마가 풋풋한 꿈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이런 살벌한 현실을 담게 되었을까. 그것이 우리네 학교의 현실이기 때문이겠지만.

‘쌈마이’, 무엇이 이 청춘들의 꿈과 사랑을 가로막나

“왜 짐이 이것 밖에 안 되냐?” 이젠 헤어져 자신의 짐을 챙겨달라는 백설희(송하윤)에게 김주만(안재홍)은 화가 났다. 그건 아마도 그녀에게 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에게 화가 나는 것이리라. 무려 6년 간 사귀면서 그녀가 자신을 위해 산 물건들이라는 것이 한 박스도 안 되는 싸구려들뿐이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그토록 살뜰히도 챙겼던 그녀가 정작 자신을 위해서는 돈을 쓰지 않았다는 사실.

'쌈마이웨이(사진출처:KBS)'

KBS 월화드라마 <쌈마이웨이>의 백설희는 결국 김주만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하지만 그렇게 빠져나간 백설희의 빈자리를 김주만은 톡톡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매 순간 자신에게 최선을 다했던 그녀가 아니던가. 그러니 그녀가 없는 자리가 마치 살점이 떨어져 나간 것처럼 아프고 허전하고 멍할 수밖에. 

그들이 헤어지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김주만이 자신을 따르던 인턴 장예진(표예진)의 집에서 어쩔 수 없이 외박을 하고 들어온 것이었지만, 그것만이 이별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미 이전부터 그들 관계는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지나치게 김주만만을 챙기고 자존감이 바닥인 백설희. 그녀의 사랑은 헌신적이지만, 그런 헌신은 김주만에게는 부담스러운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온통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래서 어떻게든 그녀를 현실적으로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6년 간을 뛰고 또 뛰었지만 그다지 바뀌지 않는 현실. 최고는 아니어도 “중간” 정도를 해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것조차 쉽지 않은 상황 속에서 그녀가 말하는 ‘소소한 행복’은 그에게는 어떤 무력감을 주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김주만과 백설희의 이별은 서로를 지나치게 사랑하고 챙기려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서로 사랑하고 챙기는 것이 행복으로 이어지겠지만, 그것이 무거운 현실 앞에 서게 되자 서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결과로 이어졌던 것. 백설희를 위해 김주만은 전셋집 한 칸이라도 마련하려 애써왔고, 김주만을 위해 백설희는 그를 챙겨도 자신은 돌보지 않았다. 이들의 이별이 남다른 아픔으로 다가오는 이유다. 

<쌈마이웨이>는 청춘들의 꿈과 사랑을 쉽게 부숴버리는 현실을 담고 있다. 그들은 그저 대단한 건 아니더라도 하고픈 일을 하는 것을 꿈으로 여기고, 최고는 아니더라도 중간 정도의 행복을 원하지만 그건 번번이 갑질 하는 현실 앞에 무너진다. 그 현실의 시스템이라는 것이 가진 것 없는 흙수저 청춘들에게는 기회조차 주지 않는 비열한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쌈마이웨이>는 이런 현실에 대한 청춘들의 ‘돌려차기 한 방’을 그리려 한다. 그래서 일찍이 가난한 현실 때문에 접었던 무도의 꿈을 고동만(박서준)은 다시 걸어가려 하고, 스펙이 없어 접었던 아나운서의 꿈을 최애라(김지원)는 다시 꿈꾼다. 그렇다면 김주만과 백설희는 이 현실 앞에 무너진 사랑 앞에서 어떤 ‘돌려차기’를 보여줄까. 그깟 현실 따위 훌훌 털어내고 다시 그들은 사랑할 수 있을까. 

고동만과 최애라의 꿈이 작게라도 이뤄지길 바라는 것처럼 시청자들은 김주만과 백설희의 사랑이 그 현실 앞에 꺾이지 않기를 바란다. 시스템이 요구하는 성공과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바깥에서 얼마든지 꿈을 꾸고 사랑할 수 있기를. 저 부조리하고 비열하기까지 한 시스템이 그들을 무릎 꿇게 하지 않기를.

‘품위녀’ 김선아, 통쾌한데 불편한 이유는 뭘까

저들이 사는 세상은 우리와는 완전히 다르다. 강남의 부호들로서 뭐든 사고 싶은 건 사고 하고 싶은 건 하는 그들이다. 그들이 사는 집 자체가 서민들에게는 현실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문을 통과해 들어가서도 한참을 들어가야 되는 대저택에, 도대체 방이 몇 개인지도 알 수 없는 집안. 게다가 그 집에서 주인들을 위해 일하는 아주머니들. JTBC 금토드라마 <품위 있는 그녀>가 보여주는 강남의 부호들이 사는 모양은 보통의 서민들에게는 위화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품위있는 그녀(사진출처:JTBC)'

게다가 이 걱정 하나 없이 살아갈 것 같은 이들이 하는 짓들을 보면 가관이다. 불륜은 마치 공기처럼 퍼져 있고, 심지어 공공연히 아내에게 내놓고 내연녀 이야기를 하는 남편도 있다. 아는 언니의 남편과 바람을 피우고 자신의 레지던스에서 상습적으로 불륜을 저지르고, 딸의 미술선생과도 바람이 난다. 마치 일반적인 삶은 이제 지겹다는 듯 탈선은 일상화되어 있다. 

그러니 이 세계 속으로 들어간 박복자(김선아) 같은 흙수저의 서민이 가진 알 수 없는 분노와 범죄를 저지르면서까지 욕망을 채우려는 그 모습들에 시청자들은 양가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한 편으로는 저 위화감을 주는 세계를 파괴해가는 박복자의 행각에 통쾌함을 느끼지만, 동시에 그녀가 저지르고 있는 그 범죄가 주는 불편함을 느낀다. 

그 불편함을 가중시키는 건 그나마 이 세계에서 어떤 자신만의 룰을 지키고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아진(김희선)이라는 인물 때문이다. 모두가 불륜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욕망을 분출하며 살아갈 때 그녀는 그 선을 넘지 않는다. 모두가 집안일을 해주는 아주머니들을 하녀처럼 부릴 때 그녀는 그 분들의 자녀의 생일선물을 챙겨준다. 물론 그것 역시 그녀가 가진 허영일 수 있다. 자신은 충분히 가졌지만 또한 관대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박복자에 의해 우아진의 세계가 깨져버리는 이 구도는 아마도 <품위 있는 그녀>가 의도하고 있는 자본화된 사회의 부박함을 잘 드러낸다. 이름처럼 박복한 여자의 도발로 인해 그 우아한 세계가 깨져갈 수 있는 건 이 모든 시스템을 장악하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안태동 회장(김용건)이기 때문이다. 우아진은 박복자에게 멈추라고 했고, 급기야 “나가야 한다”고 명했지만 어느새 안태동의 마음을 사로잡은 박복자는 그 이야기를 듣지 않는 존재가 된다.

돈줄이 모든 권력의 중심이 되고 그 중심을 쥐는 것으로 이 시스템의 권력을 쥐게 되는 박복자는 그래서 이제 우아진을 비롯한 그 집안을 장악하는 새로운 실세로 등장한다. 그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고 지극히 비정상적인 사건이지만 그런 식으로 하지 않으면 이 공고한 시스템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는 걸 드라마는 말해준다. 박복자에게 느끼는 동정과 분노는 이 시스템의 을로서 갖게 되는 이중적인 감정이다.

이로서 드디어 만들어진 우아진과 박복자의 대결구도는 그래서 흥미진진해진다. 시청자들은 때론 박복자의 도발 앞에 우아진이 그녀의 욕망을 멈추게 해주길 기대하면서도, 동시에 우아진의 그 위화감을 주는 세계가 박복자에 의해 깨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이미 드라마 초반에 등장한 바 있다. 박복자의 죽음. 그것은 욕망의 끝을 말해주면서 동시에 파괴된 우아진의 세계를 말해주는 일이다. 그것은 한 개인의 비극이지만 또한 우리 사회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드라마는 이 대결구도가 가진 흥미진진함과 그 안에서 인물들이 일으키는 동정과 분노의 양가감정의 힘에 의해 팽팽하게 흘러간다. 그러면서 그 대결구도가 우리가 사는 세계의 축소판이라는 걸 보여줌으로써 날카로운 문제의식을 담아낸다. <품위 있는 그녀>가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가져가는 독특한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역적’, 이토록 흥미로운 홍길동의 재해석이라니

난세는 영웅을 원하는 걸까. 1998년에 방영됐던 SBS 드라마 <홍길동>은 당시 IMF 외환위기라는 시국과 맞물리며 대중들의 열광을 이끌어냈던 바 있다. 그렇다면 2017년 현재 홍길동을 재해석한 MBC 월화드라마 <역적>은 이 시국의 어떤 지점들을 겨냥하고 있을까. 

'역적(사진출처:MBC)'

<역적>은 홍길동이라는 인물을 다루면서도 그 이름을 제목에 넣지 않았다. 대신 ‘역적’이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을 달게 된 건 이 드라마가 홍길동을 소재로 가져왔지만 그 이야기는 우리가 알던 ‘홍길동전’과는 다를 거라는 걸 말해준다. 

실제로 <역적>은 홍길동(윤균상)을 서자 출신의 적서차별을 겪는 인물로 그리지 않고 아모개(김상중)라는 순수 노비 혈통의 아들로 탄생시켰다. 게다가 도술을 부리는 홍길동이 아닌 애기장수 설화를 가져와 홍길동을 엄청난 괴력의 소유자로 그려냈다. 

길동이 시대의 역적이 되어가는 그 과정은 신분사회의 구조 안에서 물건 취급받으며 살아가는 노비들의 처지를 통해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어머니가 죽음을 당하자 주인을 죽이고 익화리에서 새 삶을 살아가던 길동이네 집안과 이웃들은 복수의 칼날을 갈던 참봉부인 박씨와 그녀를 돕는 충원군(김정태)에 의해 갈갈이 찢어진다. 

아모개는 옥사에서 모진 곤욕을 치른 후 가까스로 목숨만 살려냈고, 길동의 형과 여동생은 모두 뿔뿔이 흩어진다. 길동이 다시 아버지와 그를 형제처럼 따르던 무리들을 모아 충원군에게 복수를 해가는 과정은 그래서 개인적인 복수이면서 동시에 신분사회의 구조를 무너뜨리는 혁명적 행동이 된다. 

즉 1998년에 다뤄진 <홍길동>이 백성을 핍박하는 양반들과 싸우는 서민 영웅의 양상을 보여줬다면, <역적>은 제목과 이야기 설정에서부터 보이듯 훨씬 더 국가 체제 자체와 싸워나가는 영웅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단순히 양반들 곳간을 털어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것 정도로는 비뚤어진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걸 이 드라마가 정확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적>은 사건 전개만이 아니라 홍길동과 그 가족, 이웃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연산군(김지석)을 위시해 그 수직적인 권력 구조 속에서 백성들을 핍박하며 살아가는 방식을 대비시킨다. 홍길동과 함께 하는 가족 같은 익화리 사람들의 차별 없는 삶은 그들이 밥을 지어먹는 장면에서부터 여실히 나타난다. 남자고 여자고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 다 함께 밥을 짓고 고기를 구워 먹는 장면은 그들이 강조한 ‘형제로서의 삶’을 잘 보여준다. 

<역적>이 세상의 오랜 적폐와 대결하는 방식은 그래서 훨씬 더 세련되어졌다. 즉 복수나 치기어린 협객 흉내가 아니라 자신들이 꿈꾸는 ‘형제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꿈꾸고 실행하는 것으로 세상과 대결하고 있다는 것. 마치 그래픽 노블을 보는 듯 어찌 보면 만화 같은 이야기를 사뭇 진지하게 풀어내는 <역적>의 방식은 그래서 지금의 시국과 절묘하게 어우러진다. 권력을 사유한 자들의 농단 앞에 촛불을 들고 있는 국민들이 그간의 적폐를 깨고 새로운 세상을 요구하고 있는 현재, <역적>의 울림은 더욱 클 수밖에 없다.

‘김과장’, 입소문이 갈수록 커지는 건 우연이 아니다

“나? 김과장!” KBS 수목드라마 <김과장>에서 김성룡(남궁민)에게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 장면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곤 한다. 사실 과장이라는 직급이 회사 내에서 그리 높은 건 아닐 게다. 이 드라마 속 TQ그룹에서는 회장에 사장, 상무, 이사들은 물론이고 회장 아들까지 그 갑질이 일상이니 말이다. 그런데 김과장은 뭐가 그리 폼이 나는지 당당하게 자신을 그렇게 내세우곤 한다.

'김과장(사진출처:KBS)'

김과장이 일하는 경리부서는 TQ그룹에서도 을 중의 을인 부서다. 연말정산 시기가 되면 별의 별 문의가 다 이 부서로 들어와 전화기에 불이 난다. 게다가 TQ그룹 박현도 회장(박영규) 아들인 박명석(동하) 본부장은 사적으로 쓴 비용까지 처리를 해주지 않는다고 경리부에서 행패를 부리기 일쑤다. 심지어 김과장이 들어오게 된 경리과장 자리는 억울하게 모든 문제를 떠안은 채 자살한 이과장의 자리다. 

그래서 경리부서로 온 김과장에게 경리부장인 추남호(김원해)가 제일 먼저 알려주는 건 일이 아니라 회사 조직도다. 누구에게는 경비 처리하는데 있어서 토를 달지 말아야 하고 누구에게는 적당히 쪼아도 된다는 걸 알려주는 것. 결국 이 회사는 정상적으로 경영되는 회사가 아니다. 제 멋대로 경비가 처리되고 있고 그것은 직급이나 회장 아들 같은 관계의 권력이 좌우한다. 그런 부조리와 비리를 못 참겠다면? 경리부장은 “힘들면 관둬야지 뭐”라는 한 마디로 이 상황을 정리해준다. 

부조리하게 운영되는 회사. 갑질이 횡행하는 곳. 하지만 거기에 반기를 들면 돌아오는 건 반성문을 쓰거나 대기발령이 나거나 심지어 회사에서 잘리는 일이다. 모두 이 시스템 속에서 힘들어도 참아가며 버텨낸다.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 애초에 자료가 잘못 넘어왔어도 그걸 창의적으로(?) 메워 넣지 못하면 회사의 갑들에게 한 바탕 지청구를 듣는다. 

물론 그 속에도 부조리에 나름 저항하는 윤하경(남상미) 같은 인물이 있지만 그녀 역시 대놓고 뭐라 하지는 못한다. 괜스레 전화통화로 외부업체에게 화를 내는 척하는 정도가 그녀의 저항이다. 그래서 이 회사에 다니는 이들은 대부분 즐거운 표정이 아니다. 하루하루를 버텨내며 사는 것이니 즐거울 일이 없다. 

그런데 김과장은 다르다. 그는 “나 김과장”이라고 당당히 자신을 얘기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뭐가 좋은지 늘 빙긋빙긋 웃고 있고 다들 바쁘게 출근하는 그 길에서도 여유만만인 모습이다. 그가 이렇게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건 그의 회사를 다니는 목적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이 TQ그룹이라는 회사에 목매고 있지 않다. 애초 목적은 ‘삥땅’이었고, 그 목적이 새로운 재무이사 서율(준호)에게 들키게 되자 선선히 회사를 떠나고 싶어한다. 

그래서 회사에서 잘리고 싶어 그는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한다. 회장 아들이라고 툭하면 내려와 부장의 조인트를 까는 박명석 본부장을 대놓고 혼내준다. 그것이 가장 자연스럽게 잘릴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김과장의 모습은 시청자들에게 통쾌함을 안겨준다. 그건 그가 진정으로 ‘의인’이기 때문이 아니다. 모두가 굴종하는 그 부조리한 시스템 속에서 그가 보여주는 자유로움 때문이다. 그는 시스템 밖에서 시스템을 조롱한다. 

김과장이 보여주는 이러한 통쾌한 면면들은 그저 한 회사를 배경으로 하는 코미디 설정으로 치부하기엔 그 함의하는 면들이 예사롭지 않다. TQ그룹은 어찌 보면 최근 들어 탄핵 정국과 함께 불거져 나온 기업들의 면면들을 표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필요하면 청와대와도 줄을 대고 불법을 저지르지만 권력의 힘은 그들을 처벌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기업에서 일하는 선량한 샐러리맨들은 어떨까. 부조리한 시스템 속에서도 힘들면 본인이 관둬야 한다는 패배의식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낼 수밖에 없다. 더러워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참을 수밖에 없는 삶.

이것은 좀 더 확장해서 보면 우리 사회의 면면 그대로이기도 하다. 심지어 ‘헬조선’이라 불리는 부조리함을 곳곳에서 목격하게 되는 사회지만 어쩌랴 살기 위해 버텨낼 수밖에 없으니. 김과장의 돌출은 이처럼 수직 계열화되어 있는 부조리한 시스템 바깥에 서있기 때문에 “자른다”는 엄포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조소를 날리는 모습을 통해 통쾌함을 선사한다. 이 사회에서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행보를 보이는 것. 

그런데 그 행보는 김과장의 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TQ그룹 같은 회사가 자신을 챙겨줄 것이라는 믿음 자체가 없다. 그의 아버지가 성실하게 정직하게 살았지만 돌아온 건 해고였다는 걸 어린 시절부터 목격하며 자라온 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김과장은 회사는 포기했어도 사람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쁜 놈들에게 때때로 피가 끓는다. 시스템 바깥에서 조소를 날리던 그가 어쩌다 보니 ‘의인’이 되고 또 어쩌다 보니 그 시스템과 맞서게 되는 그 과정을 그리게 되는 건 바로 그가 모든 걸 포기했어도 여전히 남아있는 사람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김과장>의 입소문이 갈수록 커지고 그 반응 역시 폭발적인 건 그저 우연이 아니다. 그저 가볍게만 보였던 이 코미디는 의외로 현재의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건드리고 있고, 그 부조리를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참아가며 버텨내는 샐러리맨들의 답답한 속을 잠시나마 시원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낭만닥터>도 피해가지 않는 멜로의 족쇄

 

사랑해요.” SBS <낭만닥터 김사부>에서 강동주(유연석)가 윤서정(서현진)에게 불쑥 그렇게 말하자 윤서정은 오글거림을 못 참겠다는 듯 그러지 마라하고 정색한다. 타인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공과 사는 구분하자는 윤서정. 그래서 병원사람들이 눈치를 챈 것 같다며 두 사람은 짐짓 대판 싸우는 모습을 가짜로 연출하기도 한다.

 

'낭만닥터 김사부(사진출처:SBS)'

물론 드라마 첫 회부터 강동주의 마음이 윤서정에게 있었다는 건 다소 급작스럽게 키스를 하는 장면으로 이미 예고된 바 있다. 그러니 이런 달달한 상황이 언젠가 시작될 거라는 건 시청자들도 알고 있었을 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달달해진 <낭만닥터 김사부>에 남는 아쉬움은 뭘까.

 

그건 아무래도 이 작품이 갖고 있는 사회성 같은 것들이 이 달달한 멜로에 의해 희석되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낭만닥터 김사부>는 제목이 지시하고 있듯이 김사부(한석규)라는 독특한 철학을 가진 의사의 다소 낭만적이지만 지금의 현실이 귀기울여야할 이야기들을 그 기획의 의도로 갖고 있다. 그간 김사부가 던진 한 마디 한 마디가 답답한 현실에 대한 속 시원한 일갈이었으니.

 

<낭만닥터 김사부>는 돌담병원이라는 현실의 축소판 같은 공간을 통해 기득권 세력들의 부조리한 시스템을 고발하기도 하고, 갑작스레 벌어진 위기 상황을 통해 제대로 된 콘트롤 타워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어떤 상황에서도 반드시 최우선이 되어야 할 것은 사람의 생명이라는 걸 거듭 강조했다. 요즘 같은 답답한 시국에 이런 이야기들은 그 울림이 더 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낭만닥터 김사부>도 역시 남녀 주인공의 멜로는 피해갈 수 없는가 보다. 그것이 이야기상 개연성이 없거나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시청자들이 멜로보다는 좀 더 사회성 짙은 이야기들을 거침없이 펼쳐나가기를 바라는 건 왜일까. 사적인 멜로가 주는 달달함이 지독한 현실을 접하고 있는 작금의 시청자들에게는 그다지 큰 감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강동주와 윤서정의 달달한 멜로 전개가 펼쳐지면서 이야기는 느슨해졌다. 긴박하게 굴러가던 돌담병원의 응급실은 핑크빛으로 물들었다. 물론 강동주와 도인범(양세종)이 수술 과정에서 대립각을 세우는 장면이 있었지만, 그 이야기보다 강동주와 윤서정의 멜로 상황과 그걸 눈치 채고는 눈을 찡긋 해주는 오명심(진경)이나 기묘한 눈빛을 던지는 장기태(임원희)의 다소 코믹스런 장면들이 더 많이 채워졌다.

 

이렇게 되면서 바로 드러나는 건 김사부의 분량이 줄어든다는 점이다. 김사부는 신회장(주현)이 폐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고는 심장수술을 접으려고 하고 그러다 결국 신회장 스스로가 수술 강행을 결정함으로써 상황은 원점으로 다시 돌아갔다. 강동주와 윤서정 멜로의 급 전개는 김사부를 보조적인 위치에 머물게 했다.

 

물론 이건 잠시 쉬어가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그토록 몰아치며 긴박감 넘치는 사건들을 통해 통쾌한 김사부의 일침을 봐왔던 시청자들로서는 너무 느슨한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다. 멜로는 당연히 존재하고 또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만큼 이 드라마가 지향하려는 방향성을 매회 잊지 않고 밀고 나가는 힘이 중요하다. 드라마가 갖고 있는 주제의식과 조금은 쉬어가는 달달한 멜로 사이의 적절한 균형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상속자>, 현실의 축소판을 보는 재미 혹은 끔찍함

 

SBS가 새로 파일럿으로 내놓은 <인생게임-상속자(이하 상속자)>9명의 일반인들이 한 공간에 모여 네 계급으로 나뉜 채 살아가는 모습을 담아낸 일종의 리얼리티쇼다. 과거 <>이 애정촌에 모인 남녀들의 관계를 리얼리티쇼로 담아냈다면, <상속자>는 태생()적으로 정해진 계급에 의해 만들어지는 정치, 경제, 사회적인 양상들을 역시 리얼리티쇼 형식으로 담아낸다.

 

'상속자(사진출처:SBS)'

룰은 간단하다. 운으로 금수저를 뽑은 인물이 초대 상속자가 되어 계급의 맨 꼭대기에 서고 그가 바로 밑 계급 집사 1명과 그 밑 계급 정규직 3명을 뽑는다. 그리고 남은 인원 4명은 비정규직이 된다. 상속자는 이들이 지내는 방세와 식비를 받아 돈을 벌 수 있지만, 나머지 인원들은 방세와 식비를 내야 살아갈 수 있다. 물론 이 룰에서 집사는 예외적 존재다. 이렇게 해서 마지막에 가장 많은 돈을 갖고 있는 자가 우승자가 되는 게임.

 

아주 간단한 게임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계급으로 구성된 룰은 지독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금수저 흙수저의 현실이 고스란히 담기고, 권력을 가진 상속자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거의 폭군에 가까운 방세와 식비를 가져가려 한다. 조악한 상황에서 살아가야 하는 비정규직들은 연합하여 다음 선거에 권력을 잡으려 하지만 이게 만만치가 않다. 상속자와 정규직들이 이미 더 공고한 연합을 만들어 비정규직들을 지속적으로 배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시작한 게임이지만 어떻게든 계급을 넘어서기 위해 배신과 야합이 난무하면서 이들은 마음의 상처를 받게 된다. 그리고 아직 방영되지 않은 다음 편 예고에서는 눈물을 쏟는 이들의 모습이 담겨지기도 했다. 이처럼 게임이 게임에 머물지 않고 감정을 건드리는 건 그것이 고스란히 현실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등록금 대출금에 허덕이며 알바를 전전해 살아온 닉네임 샤샤샤라는 여성출연자가 상속자가 되어 그 호사와 권력에 취하는 모습은 너무 현실적이라 마음 한 구석이 씁쓸해지기까지 한다.

 

<상속자>는 이처럼 리얼리티쇼가 보여주곤 하는 사람들의 치부를 드러내면서도 거기에 우리 사회의 현실을 투영시킴으로써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은 대단히 자극적일 수 있는 내용들이다. 즉 누군가가 연합할 것처럼 행동하다가 갑자기 혼자 잘 살기 위해 배신을 하는 장면은 보는 이들마저 아연실색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이 계급의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리고 그 시스템이란 다름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작동방식 그대로다.

 

그런데 이 <상속자>에서 주목해야할 것이 있다. 그건 방영 전부터 예고편에 등장해 기대감을 높였던 김상중이다. 그리고 그는 마스터라는 이름으로 이 프로그램의 이면에 참여하고 있다. 대부분의 방송분량이 일반인 출연자들의 리얼한 행동들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이 마스터 김상중의 모습은 뒤편으로 슬쩍 빠져 있다. 도대체 김상중은 이렇게 전면에 나오지도 않으면서 왜 이 프로그램의 중요한 인물로 서 있는 걸까.

 

그건 바로 그가 이러한 끔찍한 현실이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조장되고 만들어진 현실이라는 걸 은연중에 드러내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계급사회라는 시스템 속에서 불공평한 삶을 살아가며 경쟁해야 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루하루가 힘들고 서로를 경쟁자로 생각하며 밟고 밟히며 살아가지만 그것이 사실은 누군가 조장한 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 삶이라는 것. 김상중은 그런 존재가 현실에도 있다는 걸 보여줌으로써 잘 보이지 않던 우리네 현실을 다시금 들여다보게 만드는 인물이다.

 

김상중이라는 외부적 시선을 통해 보여지는 <상속자>는 그래서 인간군상을 보는 재미를 선사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 적나라함이 주는 끔찍함 같은 걸 느끼게도 해준다. 물론 이 같은 시스템 상황 속에서도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당사자들에게 달려 있다. 그러니 실제 현실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 이들이 이 가상 시스템 안에 들어오느냐에 따라 다른 스토리를 전해줄 가능성도 높다. <상속자>라는 파일럿의 확장 가능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프로듀스101>, 적어도 알게 된 걸 그룹에 대한 몇 가지

 

101명의 연습생들이 <M카운트다운> 무대에서 ‘Pick me’를 부르는 장면은 한 마디로 장관이었다. 지금껏 이토록 많은 인원이 함께 하는 군무와 합창은 없었을 게다. 그 압도적인 인원이 저마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무대 위에서 매력을 뽐내는 모습은 그 자체로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다. 자칭 국민 걸 그룹을 탄생시키겠다고 연 Mnet<프로듀스101>이 출연한 연습생들과 만든 첫 번째 무대다.

 


'프로듀스101(사진출처:Mnet)'

그런데 그들이 서 있는 무대가 예사롭지 않다. 네 개의 삼각형 무대는 가운데를 중심으로 위쪽과 좌우로 나뉘어져 있다. 그냥 그렇게 서 있는 무대라고 생각하겠지만 그 삼각형 중 어느 삼각형에 들어갈 것인지, 그리고 그 삼각형 속에서도 꼭지점 앞쪽에 설 것인지 아니면 뒤에 설 것인지가 사실은 등급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

 

중앙에 있는 삼각형의 맨 앞자리 꼭지점에 서는 인물이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는 건 당연한 일. 이건 우리가 무심코 봐왔던 걸그룹의 배치와도 무관하지 않다. <프로듀스101>에 참여한 연습생들은 그래서 어떻게든 이 꼭지점에 서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 프로그램의 상징처럼 사용되는 삼각형은 그런 의미다. 꼭지점을 향해 줄 서기. 혹은 무한 경쟁.

 

이 장면은 그 자체만으로도 시청자들의 정서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것이 다름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시스템 구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간 오디션 프로그램 역시 사실 그 시스템 구조는 이 삼각형이었지만 그걸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았다. 하지만 <프로듀스101>은 다르다. 아예 대놓고 그 삼각 시스템을 드러내고 그 안에서 방출되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라고 말한다.

 

특이한 건 <프로듀스101>은 그 많은 연습생들을 세워놓고도 오디션 과정을 통해 그들을 스타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껏 3회가 방영됐지만 시청자들에게 눈도장을 찍은 몇몇 인물이 있을 뿐, 그 이름조차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 워낙 숫자가 많은 데다 등급별로 색깔만 다를 뿐 같은 옷을 입혀 놓으니 개성이 살아날 리 없다.

 

<슈퍼스타K>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첫 회 첫 인물을 세우는 것에 그토록 공을 들이고, 그 인물이 사실상 그 해의 오디션 스타로 발돋움하는 것을 여러 차례 봐왔던 시청자들에게는 <프로듀스101>의 이 같은 진행이 이상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최고의 걸 그룹을 만든다고 주장하고, 그래서 등급까지 나눠 치열한 경쟁을 붙이지만 정작 그 개개인의 인물들은 별로 주목되지 않는 이상한 상황.

 

그러다 보니 <프로듀스101>은 누가 누군지는 알 수 없어도 서로 경쟁하고 있고, 그것이 결코 쉽지 않으며 그럼에도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는 막연한 그림들로 다가온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무심코 봐왔던 걸 그룹의 진면목이다. 지금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소녀시대나 2NE1, 시스타나 에이핑크 같은 걸 그룹들도 저런 치열하고 눈물 나는 연습생시절을 보냈을 거라는 생각을 비로소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오디션의 출연자들이 에이핑크나 소녀시대, 2NE1의 노래를 커버하는 무대를 보면 볼수록 그간 늘 웃고 밝은 모습으로만 봐왔던 걸 그룹들이 새삼 대단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도대체 에이핑크의 정은지는 노래를 얼마나 잘 했던 것이고, 2NE1의 공민지는 얼마나 춤을 잘 췄던 것이며, 씨엘은 랩을 멋지게 소화해냈던 것인가. 춤과 노래가 여전히 어색한 연습생들과 그들과의 격차를 더더욱 뼈저리게 실감하게 된다.

 

어째서 <프로듀스101>은 반짝반짝 빛나는 출연자들의 개성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지 않는 것일까. 노래를 잘하면 그걸 키워주기보다는 춤도 잘 춰야 한다고 하고, 보이쉬한 매력을 보이는 걸 그룹에게는 여성스러움 또한 잘 표현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성이 아니라 모든 걸 다 잘해야 한다고 말할 때 개개인들의 매력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것이 혹시 걸 그룹이라는 존재의 실체는 아닐까. 혼자 튀기보다는 함께 맞춰야 하는. 그래서 개인보다는 팀을 세워야 하는 그런 존재.

 

우리는 걸 그룹이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도 그 개개인의 멤버들을 알기까지 꽤 시간이 걸린다는 걸 알고 있다. 즉 걸 그룹들은 팀이 존재를 세우더라도 각자의 개성은 무대 위에서가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의 게스트 출연 등을 통해서 알려진다. 물론 그것은 후에 팀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지만 너무 개개인이 주목을 받다보면 팀은 유명무실해질 수 있다.

 

이런 태생적인 딜레마로 자신을 너무 드러내서도 또 너무 드러내지 않아도 힘겨운 게 걸 그룹의 일원이 갖는 고충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프로듀스101>은 그 101명의 한 덩어리가 이미 걸 그룹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삼각형의 무대 위에 서서 꼭지점을 향해 경쟁하면서 살을 깎는 고통을 감내한다. 그 살은 그래서 갈수록 추려진다. 이 프로그램이 목표로 세운 인원으로.

 

<프로듀스101>이 주는 불편함은 단지 그것이 상기시키는 경쟁구조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지만 그렇다고 완전체가 되기까지는 자신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걸 그룹이라는 존재가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사회생활과 판박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조직에서 열심히 일하고는 있지만 자신의 존재는 묻혀지기 일쑤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는 곳에서 퇴출되곤 하는 게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삶이 아닌가. 결국 주목되는 건 꼭지점뿐이다. 이 과정을 거치고 있는 연습생들보다 그 과정을 거쳐 스타덤에 오른 걸 그룹들이 새삼 대단하게 여겨지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육룡'의 질문, 백성이냐 가족이냐

 

백성인가 아니면 가족인가. SBS <육룡이 나르샤>가 이성계(천호진)의 위화도 회군을 통해 던진 질문이다. 회군을 결정하자 최영(전국환) 장군은 이성계의 식솔들을 인질로 잡고 만일 군사를 이끌고 도성으로 들어올 시 만월대 위에 그들의 목을 내걸 것이라고 위협한다. 5만의 군사들을 구하자니 가족의 생명이 위태롭고, 그렇다고 가족을 구하자니 5만의 군사들이 눈에 밟힌다. 이성계의 선택은 결국 군사들, 아니 영문도 모르고 죽을 전쟁에 차출된 백성들이었다.

 


'육룡이 나르샤(사진출처:SBS)'

백성이냐 가족이냐는 질문은 고스란히 지금 현재로 되돌려진다.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정치인들은 과연 국민들을 위한 선택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자신들의 가족적인 당파와 세력을 위한 선택만을 하고 있을까. 물론 정당정치가 그러한 당의 방향성을 어느 정도는 만들어내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래도 정치인들은 당 이전에 국민이 우선이 아닌가. 국민의 어려움과 고통이 어느 정도인가를 생각한다면 과연 지금처럼 그들끼리의 정쟁에만 휘둘리는 모습을 보여도 되는 것일까.

 

<육룡이 나르샤>는 지난 회에서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요동정벌이라는 무모한 결정에 백성들을 사지로 몰아넣으며, 어느 정도의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고 말하는 위정자에게 과연 그 자격이 있는가를 질문한다. 국가의 명령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백성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것이라면 과연 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홍인방(전노민)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처했을 때 그는 정도전(김명민)에게 인간의 욕망은 결국 권력욕으로 향하게 되어 있어 개혁이 성공할 수 없음을 피력한다. 그는 누구나 가슴 속에 벌레 한 마리씩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인물. 즉 개혁을 부르짖던 인물도 권좌에 오르게 되면 권력욕에 휘둘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시스템에 대한 질문이다. 개혁에 있어서 사람은 바뀌어도 권력 시스템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

 

하지만 정도전은 홍인방에게 자신이 하려는 것이 개혁이 아니라 나라를 바꾸는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논리를 무너뜨린다. 즉 고려를 되살리기 위한 개혁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이야기는 시스템 자체를 바꾸겠다는 뜻이다. 그는 왕이 바뀌어도 신하들이 서로 견제하여 권력이 쏠리는 것을 막는 시스템을 고안해낸다.

 

<육룡이 나르샤>를 보다 보면 마치 <100분토론>의 한 장면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것은 이 사극이 선과 악의 대결로서 단순히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입장과 생각의 차이에 의해 대결하는 인물들을 그리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다. 적이라고 해도 길태미(박혁권)나 홍인방 그리고 이인겸(최종원)이 저마다의 논리를 갖고 있는 건 그래서다. 그래서 그들이 서로 대결할 때 그 모습은 마치 토론을 벌이는 것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가능한 건 김영현, 박상연 작가의 독특한 대본 작업 방식 때문이다. 이들은 대본 작업에서 각자 캐릭터들이 가진 입장을 정해놓고 실제 토론을 벌인다고 한다.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세종(한석규)과 정기준(윤제문)이 한글 유포를 갖고 나누는 대결이 토론 방식으로 전개됐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육룡이 나르샤>는 그래서 매회 시청자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여말 선초에 벌어진 위화도 회군이라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역사적 지식이지만 그 안에 현재적 질문을 집어넣음으로써 그 사건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다. 물론 그 질문에 답은 어느 정도 나와 있다. 하지만 그 답을 실행하느냐 아니냐는 또 다른 문제일 것이다. 백성인가 가족인가라는 질문도 마찬가지다. 역사든 사극이든 그래서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다면 이렇게 실행하기 어려운 갈등 상황에서 어떤 결정에 대한 하나의 답을 제시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육룡이 나르샤>의 끊임없이 던져지는 질문들이 의미 있는 건 그것이 현재에도 같은 울림의 질문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송곳>에 대한 호불호가 나뉘는 지점, 그 경계

 

싸움은 경계를 확인하는 거요.” JTBC 드라마 <송곳>에서 구고신(안내상) 부진 노동상담소 소장은 불안해하는 이수인(지현우) 과장에게 그렇게 말한다. 황주임(예성)을 자르려는 허과장(조재룡)에 맞서 집단행동에 나섰지만 이수인은 이러다 모두가 징계를 먹고 황주임도 해고될까 걱정이다.

 


'송곳(사진출처:JTBC)'

그러자 구고신은 말한다. “어떤 놈은 한 대 치면 열대로 갚지만 어떤 놈은 놀라서 뒤로 빼. 찔러봐야 어떤 놈인지 알거 아뇨? 회사도 당신이 어떤 인간인지 몰랐잖아. 내가 뭘 하면 쟤들이 쪼는지. 내가 어디까지 움직일 수 있는지 싸우면서 확인하는 거요. 싸우지 않으면 경계가 어딘지도 모르고 그걸 넘을 수도 없어요.”

 

구고신의 이 대사는 <송곳>이라는 드라마가 가진 특징을 압축한다. 노동쟁의라는 실제적 상황에 들어가면 그 행위에 대한 호불호가 엇갈릴 수밖에 없다. 즉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이 송곳같은 행위가 제대로 된 선택인지 아니면 모두가 잘못될 수 있는 선택인지 불안해지는 것이다.

 

하지만 구고신의 말처럼 일단 한 발을 나가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저 이 부조리한 상황을 받아들이며 살 것인가 아니면 불안해도 한 발을 내디딤으로써 그 상황을 변화시켜보려 노력할 것인가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송곳>이라는 드라마에 대한 호불호와도 그대로 연결되어 있다. <송곳>은 결코 저 <미생>처럼 사회 현실을 드러내지만 결론적으로는 그 시스템을 뛰어넘기보다 인정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모두가 해피한 드라마가 아니다. <미생>의 오과장(이성민)은 결국 회사를 나와 새로운 회사를 차리지만, <송곳>의 이수인은 회사가 날 밀어내려면 한번 해봐라하며 버티고 저항한다. <송곳>은 시스템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그 시스템을 바꾸려 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지점에서는 <송곳>이라는 드라마에 대한 호불호가 엇갈릴 수밖에 없다. 즉 시스템 안에서 적응해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어딘지 <송곳>의 이수인이 하는 행동이 불편하게 다가올 수 있다. 딱히 사측의 위치에 있는 시청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스템에서 방출되었거나 그 바깥에서 아예 진입조차 해보지 못한 이들이라면 이수인의 행동이 대단히 통쾌하게 다가올 수 있다.

 

이것은 마치 이 드라마가 얘기하는 조직에서의 송곳같은 존재를 우리가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이기도 하다. 통상 군대에서 고문관이라고 치부되는 이들을 바라보는 그 관점. 혹은 사회에서 왕따취급을 받는 이들을 바라보는 그 관점이다. 즉 그들은 어딘지 그 조직의 부조리함을 드러내는 인물들이다. 그래서 그 부당함을 드러내는 것에 통쾌함을 느끼게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이미 적응한 조직의 시스템에 저항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편함을 느끼게도 만든다.

 

걸림돌, 왕따, 꼰대 같은 단어들이 이 드라마에서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도 저 송곳이 주는 이중적인 감정과 무관하지 않다. 당신은 이들 단어들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그것이 불편한가 아니면 통쾌한가. 구고신의 말처럼 이 드라마는 보는 이들에게 자신이 서 있는 경계를 확인시켜 준다. 그 경계를 명확히 알아야 그걸 넘을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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