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백의 신부’, 코미디로 무장하고 있지만 그 속내는

“중증 강박장애였을 거에요. 완전무결을 위한 강박. 피해망상. 박상철 그 사람 계속 나를 만나고 싶어 했어요. 마지막 구조신호였을 거예요. 마봉열씨도 그렇고 이번 일도. 의사인 내가 봐야할 걸 보지 않고 들어야 할 걸 듣지 않아서 생긴 일들일까요?” tvN 월화드라마 <하백의 신부 2017>의 윤소아(신세경)는 하백(남주혁)에게 정신과 의사로서 환자들의 아픈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자신을 그렇게 자책한다. 

'하백의 신부(tvN)'

하지만 그녀는 또한 그렇게 정신이 아픈 이들의 삶에 연루되는 것을 버겁게 느낀다. 정신과 의사로서 누구보다 타인의 마음을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지만 그로 인해 겪을 부담은 피하고 싶은 것. 그래서 하백에게 그 정반대의 감정을 토로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런 일로 책임감 갖거나 미안해하거나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나는 그냥 내 생각하면서 살고 싶어요.”

하백은 그러나 그녀의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확신한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 근데 하난 확실하지. 넌 네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할 거야. 넌 애초에 그렇게 생겨먹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녀의 상황을 자전거 바퀴에 비유해 이야기한다. “내가 바퀴에 관심 있어서 좀 찾아봤는데 자전거라는 게 그렇더군. 넘어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쓰러지지 않아. 네 마음이 넘어지려는 쪽이 어딘지 너만 모르는 거 아냐? 자꾸 억지로 반대로 꺾으려 하면 쓰러져 골병든다.”

사실 <하백의 신부>가 가진 이야기의 기조는 판타지와 코미디다. 그래서 조금 썰렁한 코미디들이 반복되고 또 허공으로 붕 날아오르거나 고층 건물 옥상에서 떨어지는 소아를 하백이 끌어안고 구해내고,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량 위로 탈출해 내려오는 판타지적 장면들을 보다보면 흥미롭긴 해도 어딘지 너무 가볍다는 느낌을 버릴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99%의 판타지 코미디적 설정들을 잘 들여다보면 이 드라마가 궁극적으로 하려는 1%의 진심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왜 윤소아가 하필이면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인물로 설정되어 있고, 여기 등장하는 신들이 물과 하늘같은 자연(주로 기후와 관련이 있는)을 관장하는 신들이며, 하필이면 하백의 경쟁자로 등장할 후예(임주환)라는 인물이 리조트 개발 회사의 대표인가에서 드러난다. 

후예가 하는 리조트 개발이란 다름 아닌 자연을 파헤쳐 인공적인 공간을 만들고 그것으로 부를 창출하는 사업이다. 그리고 지금 후예가 만들려는 리조트는 다름 아닌 하백을 대대로 받들어오던 윤소아의 조상들이 살던 터전이다. 그녀는 이 땅을 무려 7배의 가격으로 사겠다는 후예의 제안에 반색하지만 리조트 개발을 둘러싼 하백과 후예 사이의 대결구도는 어쩌면 윤소아를 흔들리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실로 자본의 세상에서 살아가며 돈이 신인 물신을 숭배하는 현대인들에게 <하백의 신부>는 하백이라는 자연을 상징하는 존재를 통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과연 ‘행복한 정신건강의학과의원’ 윤소아는 어떤 길이 진정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까. 

신석을 잃어버린 무라(정수정)와 비렴(공명)은 하백과 대립하며 심지어 그의 신력을 시험하기 위해 윤소아를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아마도 이것은 신(자연)이 갖는 무심함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세상으로 오며 신력을 잃어버린 하백은 바로 그 점 때문에 이들과는 다르다. “배도 고프다며?”하고 묻는 비렴의 질문은 하백이 인간적인 고통이 무엇인가를 깨닫는 특별한 신이라는 걸 오히려 드러낸다. 

윤소아는 신과 인간적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며 헷갈려 한다. 정신과 의사로서 자신의 환자들이 위험에 처하게 된 것을 자신의 잘못으로 여기면서도, 자신은 그런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한다. 그녀는 그래서 궁금하다. “신들이 다 이 모양이라 세상이 이 꼬라지인지. 세상이 이 꼬라지라 신들이 포기하고 저 모양인지.”

그럼에도 그녀에게서 발견되는 어떤 희망 하나는 힘들게 살아가며 투덜대면서도 그런 삶조차 고마워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고맙습니다. 또 살려준 거. 그리고 오늘 종일 바쁘게 해준 거.” 그녀가 하백에게 전하는 이 한 마디는 마치 우리가 힘겨운 현실에 나갔다 돌아와 잠자리에 들 때 작은 기도 속에 담는 희망을 닮았다. 99% 판타지 코미디의 외피를 갖고 있는 <하백의 신부>가 그 안에 촘촘히 숨겨놓은 1%의 진심이다.

‘하백의 신부’가 전하려는 진심, 과연 통할 수 있을까

“잘 들어. 물의 신, 하늘의 신, 땅의 신. 우리들은 자연이다. 곧 나는 자연이다.” 하백(남주혁)의 이 대사는 낯설다. 현실적인 느낌이 없기 때문이다. 그건 이 주인공이 하백이라는 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낯선 말을 하는 인물 앞에 선 소아(신세경)의 황당과 당황은 마치 시청자들이 느끼는 것과 다르지 않을 게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가 듣고 싶은 대로 그 말을 듣고는 이렇게 반문한다. “나는 자연인이라고요?”

'하백의 신부(사진출처:tvN)'

우리에게는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의 제목이 “나는 자연이다”라는 대사보다 훨씬 더 익숙하다. 진지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나는 하백이다”를 반복해서 말하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세우는 드라마는 바로 그 비현실성 때문에 초반 몰입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tvN <하백의 신부>라는 드라마는 그래서 이를 위해 병맛 코미디를 그 장르로 차용해 이 어려운 몰입을 유머로 넘어서려 한다. 

<하백의 신부>의 첫 방에 나오는 비판적 목소리들은 사실 예견된 것들이다. 이 작품은 원작 만화가 가진 ‘신계의 이야기’라는 난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계로 내려온 신의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나 그 신을 연기한다는 건 사실 시청자들을 몰입시키기가 몇 배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저 소아의 입장이 된다. “나는 자연이라고” 이렇게 말하는 하백에게 자꾸만 “나는 자연인이라고요?”라고 묻게 된다. 

이런 병맛 코미디 설정을 몰입을 위한 전략적 장치로 세우고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부분은 왜 이런 하백이라는 신의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가 하는 그 의도일 게다. 사실 비현실적인 설정과 이를 넘어서려는 병맛 코미디라는 설정의 겉면 때문에 가려져 있지만, <하백의 신부>는 첫 회에 상당 부분 그 의도를 대사 속에 드러내고는 있다. 그것은 ‘진정한 행복’에 대한 질문이다. 

“이봐 종. 넌 정말 가장 필요한 게 도오온이야? 인간에게 왜 그렇게 도오온이 필요한거지?” 하백이 묻자 소아는 말한다. “도오온이 있으면 행복해질테니까요.” 그러자 하백은 그녀의 말을 뒤집어 그 의미를 되새긴다. “이봐 종. 넌 가장 필요한 게 도오온인데 도오온을 가지면 행복해지니까. 가장 필요한 건 행복이군.”

물질적인 풍요가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믿는 소아에게 하백은 거꾸로 그녀가 진짜 원하는 건 돈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하지만 그 단순한 사실을 그녀는 머리로는 이해할지 몰라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당장 대출을 연장하지 않으면 파산할 위기에 처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은 너무나 쉽게 아주 낮은 금리에 돈을 빌릴 수 있지만, 없는 이들은 어렵게 그것도 아주 높은 금리에 울며 겨자먹기로 돈을 빌려야 겨우 살아갈 수 있는 현실 앞에 그녀는 서 있다. 

“당신 말이 맞아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행복일지 모르죠. 정말 지쳤거든요. 그러니 이제 그만 가주세요.” 그녀는 말한다. 자신이 지쳤다고. 그리고 그렇게 된 원인을 그녀는 돈이 없어서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남은 것이라곤 산 속에 있어 아무 짝에도 쓸모없고 팔리지도 않는 땅이 전부이니. 

그 산 속에서 하백과 그녀가 마주하는 상황은 그래서 그 병맛 코미디 너머를 바라보면 자못 의미심장하다. 아무 것도 없는 그녀가 마주한 건 하백 스스로 얘기했듯, ‘자연’이니 말이다. 그 자연 속에서 네비게이션에 기대 길을 가던 그녀는 길을 잃는다. 그런데 그건 길을 잃은 것일까 아니면 자연 속에서 새로운 길을 찾게 된 것일까. 

지친 현실 속에서 돈이 구원이 될 것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때론 아무 것도 없는 듯 보이지만 우리를 넉넉히 껴안아주는 자연이 주는 행복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하백의 신부>가 병맛 코미디 속에 숨겨 말하려는 진심은 어쩌면 이런 것이 아닐까. 누구나 다 가질 수 있지만 찾지 않으면 가질 수 없는 자연처럼 행복도.

떡밥 넘치는 <배트맨 대 슈퍼맨>의 약한 메시지

 

사실 배트맨이니 슈퍼맨이니 하는 슈퍼히어로들에게 대단한 세계관과 메시지를 요구하는 건 과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기왕에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배트맨으로 그려냈던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세계가 슈퍼히어로물이 더 이상 아이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심지어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는 어른들의 세계일 수 있다는 게 드러난 마당에, 꼭 이런 세계관과 메시지에 대한 요구는 절대로 과한 것이 아닌 게 되었다.

 


사진출처:영화<배트맨 대 슈퍼맨>

하도 오랫동안 예고편을 통해 떡밥을 던져놔서인지 <배트맨 대 슈퍼맨>에 거는 기대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제목대로만 보면 배트맨과 슈퍼맨이 대결하는 이 구도가 마치 아이들이나 좋아할 법한 둘이 싸우면 누가 이길까같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 슈퍼히어로물에 대해 철학적 세계관을 투영시켜 바라보는 시각이 생긴 지금, 이 대결구도는 다양한 의미와 메시지의 도출을 기대하게 만든다.

 

알다시피 배트맨은 인간이고 슈퍼맨은 외계인이다. 아니 슈퍼맨은 그저 외계인이 아니고 배트맨과 비교하면 거의 신적인 존재다. 그러니 이 대결은 인간과 신의 대결로 보일 수 있고, 나아가 인간과 이종족이라는 타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배트맨 대 슈퍼맨>은 실제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신격화되어 있는 슈퍼맨은 과연 인간을 보호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위협하는 존재인가. 슈퍼맨과 그를 쫓아 지구를 침공한 조드 장군과 일당과의 대결로 초토화되어버린 도시 속에서 배트맨은 그런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이것은 믿음의 문제로까지 나아간다. 과연 슈퍼맨은 믿을만한 존재인가. 아니 인간이 아닌 신은 과연 인간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인가.

 

<배트맨 대 슈퍼맨>이 그리는 신과 인간의 대결구도가 저 성서의 이야기를 따왔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지구를 산산조각낼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힘을 가진 슈퍼맨은 신적 존재이지만 그는 인간을 위해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의 존재이기도 하다. 그 위대한 사랑은 지구로 떨어진 아기를 키워준 어머니로부터 나온다. 이런 인물 캐릭터에서 우리는 성서의 많은 인물들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철학적인 이야기의 구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그 진지한 질문보다는 간단한 해결과 블록버스터 볼거리에 더 치중한다. 물론 그 볼거리는 잭 스나이더 감독의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충분히 관객들의 시선을 잡아 끌만큼 매력적이다. 게다가 향후 쏟아져 나올 DC 코믹스의 히어로들 이야기에 대한 떡밥들도 넘쳐난다. 아마도 이 작품으로 인해 앞으로 나올 저스티스 리그의 슈퍼히어로 각각의 이야기들 역시 관심을 끌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도입부분의 진중한 메시지가 후반부에서 흐지부지되는 과정은 기대한 만큼 큰 실망감을 남긴다. 그래서 <배트맨 대 슈퍼맨>이 차용한 신과 인간의 이야기 같은 철학적 주제가 앞부분에 강조된 것은 후반부의 말도 안 되게 기막힌 볼거리들을 그저 만화가 아닌 것으로 여겨지게 하기 위한 장치 정도로 여겨지는 면이 있다. 만일 앞부분의 진중한 질문들이 없었다면 영화 후반부의 많은 장면들은 너무 과도해 실소가 나왔을 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영화는 재밌다. 적당히 진지하고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화려한 시각적 즐거움이 넘쳐난다. 하지만 <다크나이트 라이즈> 같은 진중한 메시지를 기대한다면 실망할 지도 모른다. 이것은 어쩌면 그만큼 큰 기대감 때문일 수 있다. 어차피 철학적 질문을 던졌다면 그만한 메시지를 담아냈어야 한다는 그 기대. 혹평이 쏟아진 건 이제 슈퍼히어로물에서도 철학적 주제를 기대하게 된 그 달라진 시선 때문이다

완벽한 신이 되거나 부족한 사람이 되거나

 

왜 우리는 유재석을 유느님이라고 부를까. 물론 이건 예능 프로그램 속에서 만들어진 캐릭터일 것이다. 너무나 완벽한 자기 관리를 보여주는 그의 모습이 사람이 아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라는 것. 최근 우토로 마을과 관련한 유재석의 미담은 왜 그가 유느님으로 불리는가를 알게 해주었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최근 <무한도전>에서 방영된 우토로 마을을 하하와 함께 찾은 유재석이 강제징용되어 끌려간 1세대 동포 중 유일하게 생존해계신 강경남 할머니 앞에서 죄송합니다. 너무 늦게 왔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그것이 그가 이 마을에 대해 이제 겨우 알게 된 사실에 죄송한 마음을 표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는 이미 10년 전에도 이 마을에 후원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2005년 우토로 마을의 우리 동포들이 강제 퇴거 위기에 몰렸을 때 국내의 시민단체들이 함께 모금을 진행했던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당시에도 뜻있는 연예인들이 십시일반 기부에 참여했고, 거기에는 유재석 또한 기부자로 들어 있었다는 것. 그러니 우토로 마을이 그에게 낯선 것도 아니었고 그가 이 사안에 대해 외면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경남 할머니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너무 늦게 왔다고 죄송하다고 말했다. 그 한 마디는 <무한도전>을 시청하는 시청자들을 울렸다. 우리들이 갖고 있던 죄송함을 그가 대신한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번 방송에서도 50만 엔을 기부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식적으로 밝혀진 이야기는 없다. 소속사에서도 그건 사적인 기부이기 때문에 확인이 어렵다고 말했고, 유재석 또한 이에 대해 일언반구 언급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알려진 건 우토로 마을을 후원하고 있는 시민단체인 지구촌 동포연대를 통해서다. 미담이 그저 묻히지 않고 전해지길 바랐을 것이다.

 

유재석의 이런 이야기는 자기관리라는 표현으로 상찬하는 것조차 어딘지 부족하다는 인상을 남긴다. 이것은 관리된 것이 아니라 그냥 그가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무언가 미담은 보다 많이 알리고 그렇지 않은 일들은 되도록 숨기는 것이 연예계의 생리라고 볼 때, 유재석은 무언가를 알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걸 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란 점이다.

 

유재석은 어찌 보면 리얼 버라이어티쇼에 최적화된 인물이다. 지금은 관찰카메라로 불리는 리얼리티쇼의 시대다. 그러니 예능에 있어서 조금은 트렌드가 지나간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것을 압도하는 건 바로 이런 그의 앞뒤가 다르지 않은 면면 때문이다. 그는 방송에서도 반듯하지만 방송을 떠나서도 반듯하다. 얻은 것만큼 베풀 줄 알고, 가진 힘만큼 책무도 잊지 않는다. 그러니 그가 리얼리티쇼의 시대에 여전히 캐릭터쇼를 보여줘도 대중들 입장에서는 그 캐릭터 뒤에 숨겨진 진심까지를 모두 읽어낼 수 있다.

 

유재석을 조금은 과한 표현으로 유느님이라 부르는 건 이러한 자기관리의 차원을 넘어서 진짜 반듯한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거꾸로 말해준다. 요즘처럼 리얼을 요구하는 시대에 진정성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연예인의 자질이 되고 있다. 이제 자기 관리를 통해 적당히 좋은 면을 보이고 그렇지 않은 면들을 숨기는 건 언제든 드러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여있다. 그러니 많은 연예인들은 과거 신비주의 시절에 갖고 있었던 신적인 이미지를 버리고 있다. 인간적인 면모들을 오히려 드러내는 것이 밝혀진 진면목으로 대중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되었다.

 

달라진 환경 속에서 연예인은 인간적이거나 혹은 아예 신적인 모습을 요구받는다. 대중들은 점점 연예인의 사적인 영역까지 올바르기를 요구하고 방송에 비춰진 모습이 실제이기를 바란다. 물론 유재석은 인간적이고 친근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뒤에 숨겨진 아우라는 여전히 지워지지 않는 것은 그의 타인에 대한 배려와 헌신하는 삶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진짜이기 때문이다.

 

유느님처럼 산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아마도 유재석 스스로도 쉽지만은 않을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그렇게 되려고 노력하며 살 수는 있지 않을까. 선거철을 전후해 이야기가 뒤집히는 모습을 자주 보여온 우리네 일부 정치인들이나 공직자들의 앞뒤가 다른 모습을 접할 때마다 대중들이 느끼는 실망감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그래서일 것이다. 어찌 보면 기본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는 지극히 당연한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유재석에게 대중들이 심지어 유느님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있는 건



<앤트맨>은 왜 작아지는 영웅을 선택했을까

 

1978년에 개봉된 <슈퍼맨>에서 슈퍼맨은 연인이 죽게 되자 지구의 자전을 반대편으로 돌려 시간을 되돌린다. 황당한 이야기지만 이렇게 시간을 되돌려 살아난 연인과 지구인들이 슈퍼맨을 환호하며 끝나는 엔딩에 그 누구도 황당무계하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 슈퍼히어로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들로까지 나아갔다. 더 이상 지구가 좁다며 우주를 무대로 외계인들과 대적하는 슈퍼히어로가 등장하기도 하고 심지어 토르 같은 신이 영웅으로 재탄생되기도 했다.

 


사진출처:영화<앤트맨>

최근 개봉했던 <판타스틱4> 리부트를 보면 악당인 닥터 둠은 사람의 목숨 정도는 그냥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거둘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이 정도면 신이나 다름없다. <슈퍼맨>을 철학적으로 풀어낸 <맨 오브 스틸>에서 슈퍼맨은 신의 재해석이나 다름없다. 이 슈퍼히어로물에서 인간은 그저 신의 보호를 받거나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는 대상일 뿐이다. 신적인 힘을 가진 슈퍼맨은 지구를 침공해온 자신의 동족과 싸워 지구인들을 지켜낸다.

 

이 정도면 우주를 넘나들지 못하면 슈퍼히어로로서 어딘지 너무 소소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무협지에서 날아다니지 못하면 바보처럼 여겨지는 것처럼, 우주로 날아가는 슈퍼히어로들의 세상에서 지구를 전전한다는 건 어딘지 모양 빠지는 일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앤트맨>의 선택은 달랐다. 이 독특한 슈퍼히어로물은 우주를 향해 나아가기보다는 오히려 한없이 작아지는 쪽을 택했다.

 

작아지는 영웅을 선택하면서 <앤트맨>은 우리의 일상 속에 숨겨진 모험을 가능하게 한다. 일반 가정의 식탁이나 마룻바닥, 춤을 추는 파티장에서 그 밑바닥에 떨어진 앤트맨에게 사정없이 날라드는 발길질은 놀라운 미시세계의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은밀하게 세상사에 관여할 수 있다는 건 오히려 작다는 것이 능력이 될 수 있다는 걸 말해준다.

 

물론 작아진 존재 하나가 세상을 바꾸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점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부족함을 채워주는 존재들이 앤트맨에게는 부여된다. 그것은 또 다른 작은 존재들, 즉 각종 개미들을 진두지휘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 이 부분은 앤트맨의 스펙터클에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날개 개미 안토니의 등에 올라타면 마치 드래곤의 등에 올라탄 중세의 기사 같은 판타지물이 연상된다. 앤트맨의 명령에 따라 셀 수 없이 많은 날개 개미들이 날아가는 장면은 그 자체로 장관이다. 또 개미들이 서로 몸을 이어 붙여 허공에 거대한 줄을 만들거나 탑을 쌓아 그 다리를 건너가는 앤트맨의 장면 또한 장관이다.

 

다양한 능력에 충성스런 부하들을 거느린 앤트맨이란 존재는 그래서 작아도 강력한 존재로서 설 수 있게 된다. 마치 곤충들이 작지만 그 많은 개체수의 협업으로 엄청난 생존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앤트맨이라는 영웅은 혼자 서는 영웅이 아닌 함께 하는 영웅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건 기존 슈퍼히어로물들이 물론 <판타스틱4> 같은 협업을 보여주는 존재들도 있지만 대부분 혼자 외로운 싸움을 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다.

 

축소 지향을 보여줘서인지 <앤트맨>은 여타의 슈퍼히어로물과 달리 무겁지 않고 유머 코드가 생생히 살아있다. 몸을 한 없이 키우거나 우주 바깥으로 날아가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작게 해 마이크로 세상의 새로운 우주를 탐험하는 이야기는 그래서 기존 슈퍼히어로물의 참신한 역발상으로 다가온다. 물론 앤트맨은 몸을 작게 하는 것만큼 크게 늘리는 방법도 알고 있다. 따라서 앤트맨이 굳이 몸을 축소하는 것에 집착하는 건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이 축소 세계를 선택한 <앤트맨>은 바로 그 발상의 전환만으로도 충분히 성공적인 액션을 보여준다. 특히 아이들에게 있어서 이 작은 세계와 곤충의 세계가 주는 흥미로움은 기존 슈퍼히어로물의 우주보다 더 강력하게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꼭 커지고 확대되어야만 그럴 듯하다고? 적어도 <앤트맨>의 세계에서는 그런 편견과 선입견은 불필요하다



신처럼 군림하며 맘대로 써서 거액을 번다면...

 

흔히들 대중들은 잘 나가는 드라마 작가에 대한 부러움이 있다. 물론 창작의 고통이라는 것은 해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필자가 아는 드라마 작가는 작품 하나를 할 때마다 10년씩은 늙는다고 한다. 그래서 고료가 많아 보이지만 사실은 제 피와 살을 깎는 비용이라고 토로하기도.

 

'오로라공주(사진출처:MBC)'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우리네 드라마 제작현실은 특히 작가들에게 더 취약하다.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올라가지 않은 작가라면 대중들의 요구에 의해, 방송사의 요구에 의해 때로는 스타 배우의 요구에 의해 굴욕적이게도 대본을 고쳐야 하는 상황을 겪기도 한다. 피 말리는 쪽대본을 생각해보라. 지옥이 따로 없을 게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대로 작가가 작품에 대해 진지하고도 심각한 고민을 할 때의 이야기다. 만일 마치 작가가 신처럼 군림하고 자신이 원하면 언제든 인물을 뺄 수도 있고 새롭게 끼워 넣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 분량도 마음껏 조절할 수 있다면 어떨까. 심지어 방송사의 통제에서도 벗어나 요구사항 따위는 들어줄 필요도 없고, 원한다면 50부 정도는 연장해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다면?

 

그렇게 하면서도 회당 몇 천만 원씩을 원고료로 받아간다면 이만큼 편한 일도 없을 게다. 작품을 할 때는 모두가 두려워하기까지 하는 신적인 존재고, 작품이 끝나고 나면 손에 몇 십 억을 벌 수 있으니 이만큼 손쉽고 즐거운 일도 없겠다.

 

<오로라 공주>의 임성한 작가가 실제로 이렇게 즐거울 지는 알 수 없다. 물론 나름대로의 스트레스와 고충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작품을 통해 비춰지는 모습은 이렇게 편안한 작가도 없다는 느낌이다.

 

인물 하나가 죽는 일에는 거기에 합당한 개연성을 만들어줘야 하는 게 작가의 소임이다. 그런데 그녀의 드라마에서는 그런 고민을 할 필요가 별로 없다. 갑자기 웃다가 죽어버리거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경험하다가 죽는 데는 이유란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주요 캐릭터들이 중도에 하차하거나 새롭게 들어가는 것에도 상당한 고민이 필요한 게 드라마 작업이다. 완성도가 있는 작품이란 필요 없는 인물이 존재하지 않고 유기적으로 끝까지 각자의 기능과 역할을 할 때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별다른 이유 없이 해외로 보내버린다거나 하는 식으로 캐릭터를 하차시킨다면 어떨까.

 

작가로서는 완성도를 포기하는 대신 고민을 덜게 된다. 결국 피해는 그 캐릭터에 몰입해온 시청자들에게 돌아간다. 시청자들의 비난이나 원성이 생기겠지만 거기에 별 개의치도 않는다면 작가는 별다른 스트레스도 없을 게다. 이런 작가 생활만큼 편안한 일이 있을까.

 

이것이 드라마 작가라면 사실 아무나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충 캐릭터 몇 명을 세워놓고 이리저리 관계를 엮다가 뭔가 반응이 온다 싶으면 발전시켜나가고 그게 아니라면 중도에 캐릭터를 죽이던가 해외로 보내는 식으로 하차시키고 다른 인물을 세워 또 다른 관계를 엮어나가면 그만이다. 애초에 완성도 같은 건 염두에 두지 않았으니 그걸 두고 쏟아지는 논란이나 비난은 그다지 부담될 일도 아니다. 게다가 논란은 때로는 화제로 이어지기도 하니까.

 

일일드라마를 보는 서민들의 입장을 생각해보자. 어느 누구는 하루 종일 뼈 빠지게 일해도 돈 10만원 벌기가 힘든 이들도 있을 게다. 그러니 하루의 값싼 여가로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캐릭터들에 감정이입해 다른 삶을 경험하고 싶은 욕구는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언제든 목이 날아갈 수 있는 현실과 똑같은 일이 드라마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것을 목격했다면 어떨까. 또 완성도는커녕 개연성마저 찾기 힘든 드라마에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면?

 

그리고 누구는 그렇게 해서 시청률이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돈을 벌어가고, 반대로 스트레스를 받으며 욕하며 애써 드라마를 봄으로써 그 허수의 시청률을 만들어준 시청자들은 다시 생활전선으로 나가게 되는 상황. 어찌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임성한 작가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그래서 단지 작품의 무개념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대중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 들어가 있다. 작품을 쓰는 창작자로서의 작가가 아니라 단지 작가라는 이름을 빌어 펜대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며 그 대가로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가는 것에 대한 박탈감. 이러한 박탈감과 거기서 비롯되는 분노는 자칫 이런 권력을 가능하게 해주는 방송국에게로 옮아갈 지도 모른다.

<나가수2>, 신들의 축제 한다더니...

 

신도 없었고 축제도 없었다. 음악을 즐길 수 있는 무대라기보다는 검투사들이 한 명씩 올라와 벌이는 스포츠에 가까웠다. 애초 <나는 가수다1>이 '신들의 전쟁'이었다면, <나는 가수다2(이하 나가수2)>는 '신들의 축제'라고 했지만, 이것은 더 지독한 전쟁이었다. 생방송이라는 칼날 위에 선 가수들은 잔뜩 긴장해 제대로 노래할 수조차 없었다. 음정은 불안했고, 심지어 음 이탈도 있었다. 더 지독해진 경쟁으로 인해 신들은 평범한 인간으로 추락했다.

 

 

'나는 가수다'(사진출처:MBC)

여타의 생방송 오디션들과 비교해도 이들의 무대를 신들의 무대라 상찬할 수 있는 여지는 없었다. 예를 들어 <보이스 코리아>의 생방송과 비교해보면 <나가수2>의 생방송이 가진 허술함은 단번에 드러난다. <보이스 코리아>의 아마추어들의 무대가 더 폭발력 있고 완성도 있게 여겨지는 건 두 가지 이유일 것이다. 하나는 그만큼 생방송임에도 불구하고 프로그램이 군더더기 없는 짜임새를 갖고 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나가수2>처럼 과도한 긴장을 피하게 하여 가수들 저마다의 실력을 100% 발휘할 수 있게 한다는 것. <나가수2>는 이 두 가지 중 그 어느 것도 해결하지 못했다.

 

당연히 <나가수1>에서처럼 방송이 끝나고 나면 폭풍처럼 몰아치던 음원 돌풍도 잠잠한 편이다. 첫 경연에서 최고의 가수가 된 이수영이 부른 이선희의 노래 '인연'이 차트에 홀로 올라와 있을 뿐, 가수들이 부른 노래에 대한 화제도 별로 없다. 오히려 음원차트 10위권에 올라온 <탑밴드2>에서 장미여관이 부른 '봉숙이'란 노래가 더 화제다. 대중들이 생방송 무대에서 겨우 치러진 완성도 떨어지는 거친 라이브를 굳이 찾아서 들을 까닭이 있을까. <나가수1>의 진짜 성공은 시청률이 아니라 음원 돌풍이라는 실제 시장에서의 반향에 있었다고 볼 때, 이것이 <나가수2>의 성공을 쉽게 점치기 어려운 지점이다. 결국 가수들을 최대한 불편하게 만들었던 무대는 <나가수2>의 노래마저 잠식한 셈이다.

 

가수들이 이 정도니 MC들은 오죽할까. 가수들의 불안한 음정만큼, MC들의 불안한 진행도 보는 이들을 불편하게 했다. 첫 단독 MC로 선 박명수는 발음 실수를 연발했고, 너무 쉴 새 없이 멘트를 날리는 바람에 가수들의 응답마저 편안하게 이끌어낼 수 없었다. 노홍철 역시 비슷한 특징을 보여서인지 프로그램은 불안정한 느낌마저 들었다. 무대 앞과 무대 뒤를 오가며 실시간으로 나눠지는 MC와 가수들 사이의 대화는 툭툭 끊어지기 일쑤였고, 심지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방송사고까지 이어졌다. 결과적으로 보면 <나가수2>의 이번 첫 번째 생방송이 만들어낸 긴장감은 가수들의 놀라운 실력대결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방송사고에 가까운 완성도 부족에서 생겨난 것이다.

 

모든 것이 첫 생방송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가수2>의 새로운 시스템을 두고 볼 때, 가수들의 무대는 좀체 편안하기가 어려워질 듯하다. 가장 기대되는 가수와 가장 안타까운 가수를 뽑아 둘 다 탈락시키고 가장 기대되는 그 달의 가수를 연말결선으로 붙이는 방식은 부분적으로만 보면(순위 발표를 모두 하지 않는 것) 가수를 배려한 듯 보이지만, 전체 흐름으로 보면 끝없는 경쟁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총 12명이 6명씩 나뉘어 상위그룹 3명씩과 하위그룹 3명씩 이른바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전을 펼치는 이 구조는 상위그룹의 대결은 누가 1등이 될 것인가를 보는 편안함이 생길 수도 있지만, 하위그룹의 대결은 이미 하위로 떨어진 상태에서 또 누군가는 탈락을 겪게 되는 이중의 불편함을 야기할 수 있다. 물론 최고의 1인 역시 탈락을 하는 구조이기 때문에 상위그룹 또한 편안하기만 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그 불안하기만 한 생방송에서 치러진다. 이런 환경에서 제대로 된 음악을 대중들에게 선사하기는 정말 어려울 수밖에 없다.

 

<나가수2>가 '신들의 축제'를 벌인다고 했을 때만 해도, 서바이벌의 생존경쟁보다는 음악이 우선이 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생방송으로 진행된다고 했을 때부터 불안감이 생겼던 게 사실이다. 생방송은 결국 리얼리티는 강화하는 반면, 최고의 음악은 포기하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예외는 있을 수도 있다. 거의 완벽한 리허설을 통해 프로그램의 짜임새를 만들고, 가수들이 최고의 무대를 보여줄 수 있도록 최대한의 편안함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고, MC들 역시 준비되어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나가수2>의 첫 생방송은 그 어느 것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

 

<나가수2>가 굳이 '신들'을 운운하는 음악 프로그램이 되기 위해서는 그만한 프로그램의 질이 뒤따라야 한다. 물론 생방송이 갖는 장점(스포일러 방지, 실시간 투표참여 등등)이 있지만 그것이 음악 예능의 가장 근본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음악 자체의 질을 떨어뜨리게 한다면 결코 장점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이미 일부 팬덤에 의한 인기투표의 양상을 띠고 있는 실시간 투표참여의 문제점도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결과적으로 <나가수2>의 첫 번째 생방송은 안타깝게도 신도 없고 축제도 없는 무대가 되었다. 그것이 단순히 첫 번째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지나친 날것의 경쟁 구도가 갖는 이 하드코어적인 상황의 불편함은 제아무리 베테랑 가수들이라고 해도 쉽게 떨쳐내기 어려울 것이다. <나가수2>는 좋은 가수들이 선별된 만큼 좋은 음악을 최대치로 듣는 무대여야 한다. 좋은 가수들을 살벌한 무대 위에 올려놓고 벌벌 떠는 모습을 즐기는 악취미는 되지 말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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